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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없는 사람

빌립보서 4: 11 ~ 13

김경진 목사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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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 11 ~ 13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인간은 자족하길 원하면서도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입니다.>

곽선희 원로목사님의 설교 예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백만장자가 신문에 광고를 내었다고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진실로 만족스럽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백만 불의 상금을 주겠다는 광고였습니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많은 지원자들이 모였습니다. 저마다 자기는 만족스럽고 또 스스로 행복하다며, 그 이유들을 나열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백만 불의 상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광고주가 마지막에 했던 질문 앞에서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이 진실로 모든 것에 만족한다면 왜 이 자리에 나와 있습니까?” “당신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백만 불은 왜 필요합니까?” 여기에 어느 누구도 설득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자족’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스스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원어 상으로도 같은 뜻을 가집니다. 우리가 살면서 자족이라는 말처럼 필요로 하고 또 소원하는 단어가 있을까요? ‘아, 자족하며 살고 싶다.’ ‘아, 만족하면 좋겠다.’ 얼마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소원하며 살아갑니까? 만일 여러분에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부족함이 없는 사람일 겁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부자로 록펠러가 알려져 있죠.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다고 합니다. “재산이 얼마쯤 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세계 최대의 부호 록펠러가 한 대답을 아십니까? “Just little bit more!(조금만 더!)” 그에게는 여전히 재산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도박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원래 일확천금을 생각하기 때문에 꽤 많은 돈을 벌고서도 “Just little bit more!” “Just little bit more!”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가진 것을 다 잃게 되는 것이 도박장의 원리입니다.
우리 인생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처음에는 작은 집이라도 생겼으면 했다가 이제는 작은 건물, 더 큰 건물을 원하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남에 성형수술하는 병원이 참 많습니다. 외모에 만족하지 못해서 찾는 것이겠죠? 처음에는 눈 하나만 고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고치고 나니 코를 고치고, 다음에는 입을 고쳐 보지만 만족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욕심이 우리를 자극하지만 무섭게 따라오는 노화를 실제로 물리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연예인이더라도 마음속에는 외모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말은 우리 세포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습니다.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본능의 소리라고도 볼 수 있죠. 인간의 본능적 외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사실 대부분은 이런 삶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자연으로 돌아가고 귀농을 하기도 합니다.
저의 어머님이 즐겨 보시는 방송 프로그램 중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왜 저걸 자꾸 보실까?’ 생각이 들었는데 꽤 많은 분들이 본다고 하네요. 저도 옆에서 조금씩 보면서 자연으로 돌아가 단순하게 사는 삶을 보면서 대리만족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흐름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지혜에 관한 가르침이나 책이 오늘날 많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명상을 통해서 마음을 비우거나 평정을 되찾는 훈련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일상에는 어느 정도 도움을 줍니다. 욕심대로 살다가 피폐해져버리는 인생보다 몸과 마음을 관리하는 일이 지혜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말씀이 기록된 시대도 인간의 바람은 비슷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평정을 얻길 원했고 끊임없이 솟아올라오는 욕망을 제어하길 원했습니다. 본문 가운데 ‘자족(αὐτάρκης, self-sufficient)’ 이라는 단어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였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에피쿠로스(Epicurus, B.C.341~B.C.271)가 있죠. 의식주에 대한 욕구, 성적인 욕심, 부와 명예에 대한 탐닉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하여 그가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정리하자면 소유욕을 줄이는 데 인생의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욕을 줄이기 위해서는 현재에 집중하며 만족을 찾아야 했는데, 이 상태를 두고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소위 ‘소확행’을 말합니다. 현재에 집중하려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이 어찌 보면 에피쿠로스 철학에 기인했다고도 보여집니다. 동의가 될 만도 하고 따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그의 철학은 현실에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에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의 문제이기도 하죠. 현실에만 만족하며 살다 보니 정작 미래를 준비할 여력이 없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개인의 만족만을 추구하게 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바울 역시 자족하기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헬라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자족’의 개념을 자신의 상황에 대입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사실 오늘 말씀이 있는 배경을 살펴보면 자족이라는 말은 적절치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그는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곳에서 빌립보 교인이 보낸 헌금을 받습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적죠. 이것이 본문 말씀이 기록된 상황입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 4:10)

그는 먼저 빌립보 교인이 보낸 헌금을 받고 기쁨을 표시합니다. 빌립보 교인의 마음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말하면서 행동을 칭찬하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그가 빌립보 교인의 헌금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오해될까봐 이렇게 말을 이어 갑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이 말의 이면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나에게 보내 준 헌금은 사실 필요하지 않다. 헌금 없이도 나는 잘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오해를 살까 두려웠는지 또다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 4:14)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희 빌립보 교인이 나에게 헌금을 모아 주었을 때 기뻤다. 너희가 그렇게 할 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부족해서 너희가 보내 줄 헌금을 기다린 건 아니다. 나는 이미 어떤 상황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워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가 헌금을 보내어 내가 하는 고난의 사역을 도운 것은 참 잘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 너희와 내가 동역자가 되었다.” 자, 이 말씀 가운데 너무나도 잘 알려진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인용해 왔고 마음에 새긴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말입니다. 마치 이렇게요.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씀만 따로 떼어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 편이 되어 주신다면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정확한 말씀입니다. 진리이고 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사용되었던 본문의 배경과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이 해석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욕망을 채우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나에게도 욕심이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더 잘 먹고 싶고, 더 잘 살고 싶고, 더 가지고 싶고, 더 차지하고 싶은 욕심과 욕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자족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입니다. 다시 말해 나의 욕망을 다스리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족을 누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 자족, 아우타르게스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평강이 주어집니다.

<바울이 주님으로부터 배운 자족의 비결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없을까요? 스스로의 자족을 위해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이 문제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한 가지 단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배웠다’라는 헬라어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1)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 원어로는 μανθάνω(manthanó)입니다.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그는 자족의 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이 사실을 암시하는 듯 12절에도 ‘배웠다’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즉 내가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고 “배웠다”고 전합니다. 자족하는 법을 아는 능력이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로부터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게로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고 하십니다. 그 길에 참된 평안이 있고 쉼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후에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자족의 비결, 그 배움의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조금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흥미롭게도 바울이 배운 자족의 길은 본문 바로 앞에 ‘배우다’는 말로 연결됩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배우다’라는 단어가 9절에서 사용되고, 12절에도 같은 단어로 사용되면서 연결을 이룹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립보 교인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전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네 가지로 배움의 내용이 소개됩니다. 첫 번째는 4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어떤 상황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두 번째 교훈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 4:5)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모든 것 다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됩니다. 그러면 움켜쥐지 않고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자족에 대한 말씀이 디모데전서 6장에도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6~8)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벌거벗은 모습으로 왔다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갑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갑니다. 미래를 내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 가지고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하여 관용할 수 있습니다.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자족하게 되는 또 다른 비결입니다. 세 번째 자족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바르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항상 기도로 아뢰면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빌 4:8, 새번역)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족의 비결은 참되고 순결하고 바른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족과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족의 비결은 현실을 맞닥트리면서도 그 안에서 늘 기쁨을 누리며, 함께하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소원을 기도로 아뢰는 삶입니다. 그럴 때 참된 평안, 참된 자족을 우리에게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진정한 행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자족은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번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기뻐하십시다. 관용하십시다. 너그럽게 대하십시다. 기도하며 감사하십시다. 옳은 길을 따라 가십시다. 그 길에 하나님께서 참된 평강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8월 2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부족함이 없는 사람” (빌 4:11-13)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70장, 44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빌 4:11-1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2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느 백만장자가 신문에 ‘누구든지 자신의 삶에 진실로 만족하고 이를 증명하는 사람이 있으면 백만 불을 드리겠습니다.’라는 광고를 냈습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모였고, 그들은 자기가 정말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이유들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상금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광고를 한 백만장자의 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실로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다면 왜 이 자리에 나왔으며, 내 돈 백만 불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까?”

설교의 요약

누구나 조금만 더(just little bit more)를 꿈꾸는 세상입니다. 돈도 그렇고, 집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회는 무한경쟁의 사회이고 예측불가의 시대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마음 편하게 살기 어려운 사회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삶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으로 들어가거나,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전원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빌립보서가 쓰였던 고대시대에도 인간들은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마음의 평정을 원했고,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욕심과 욕망을 제어하며 살고 싶어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노는 ‘자족’이라는 말은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철학적 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헬라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자족이라는 개념을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자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조금은 어색한 자리입니다.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에게 헌금을 모아서 보내주었지요. 바울은 그 헌금을 받고 큰 도움을 받았고 매우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는 헌금 때문에 기쁘고 만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인들이 고난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 됨으로 복음의 동역자가 되었기 때문이고, 바울은 이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는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족을 누릴 수 있고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철학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으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이 우리 주님을 통해 배운 자족의 비결은 첫 번째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바르고 참되고 순결하고 옳은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누기

1. 나는 참으로 자족하고 있나요? 혹시 불만족스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2. 오늘 말씀을 통해 나온 자족의 네 가지 방법 중 나에게 가장 필요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마무리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참다운 평강, 자족하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병약하든지, 건강하든지, 주님의 선한 뜻 생각하며 기뻐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주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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