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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

요한복음 20: 26~29

김경진 목사

2023.04.16

<부활하신 주님이 첫 번째로 만난 이는 무덤 곁에서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부활절 찬양을 드렸습니다마는 사실 부활절은 단 하루의 주일이 아니라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교회력에서 지키는 부활 절기는 부활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성령강림주일 전까지의 50일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마다 부활절 노래를 부르는 일이 그리 어색한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부활 이후에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셨을까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말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 부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크게 네 번에 걸쳐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셨음을 전하여 줍니다. 20장 그리고 21장이 알려 주고 있죠. 20장에는 세 부류의 사람을 만나셨고, 21장에는 또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이 첫 번째로 만나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두 번째로는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을 만나셨고요.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도마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21장에 가서는 일곱 제자, 특히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을 따라가며 주님이 만나 주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1)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 무덤으로 갔고, 그곳에서 돌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시작됩니다. 당연히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무덤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아마도 요한으로 보이는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간 것 같습니다. 그를 뒤따라 베드로도 달려가지요. 무덤에 이른 두 사람이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마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수건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빈 무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구나.’ 확신하게 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가장 먼저 만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달려오는데 주님은 두 팔 벌려 안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반갑게 맞아주실 법한데, 베드로마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요한도, 베드로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 주십니다. 사실 그녀는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지도 않는 인물이죠.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겨우 나음을 받은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나 주시며 막달라 마리아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먼저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11,13절이 알려 줍니다. 그녀가 무덤 옆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때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이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이 깊이 사랑하신 인물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막달라 마리아일 뿐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음을 받은 여인이죠. 그런데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만나 주신 사람은 베다니의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무덤 곁에서 울고 있던 한 여인을 첫 번째로 만나 주셨습니다.

13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치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말합니다.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5 중)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실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한데 누군가가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녀를 더 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게 해 달라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주님이 무덤 밖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만나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 무덤 곁에서 끊임없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신도 찾지 못하고 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이 그 극한의 슬픔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셨습니다. 지혜로운 분이셨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이 사천 명도 먹이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분이셨습니다. 어린아이도 흔쾌히 맞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만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배반을 받으셨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본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귀한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안식 후 첫날, 날이 밝자 발을 옮깁니다.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시신조차 사라진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여러분, 오늘도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사람들이 포격을 당하며 죽어 갑니다. 무덤을 미처 만들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습니다. 아이들이 사라집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감기에 걸린 줄 알고 잠시 쉬면 날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병원에서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 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나요? 가족들은 그저 밖에서 울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화장할 곳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화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오만 명 이상의 귀한 생명이 건물 더미에 깔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분명 건물 더미 아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사연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남편을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고 눈물 흘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시신을 찾지 못하고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은 결코 한 사람의 슬픔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녀와 같이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덤 밖에서 슬픔을 감출 길 없는 그녀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시신도 못 찾는다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누운 무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무덤은 곧 빈 무덤이 됩니다. 그때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오늘도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 시신을 찾지 못하여 우는 사람, 억울한 죽음으로 우는 사람, 그들을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가 주셔서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하신 주님은 두 번째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만나시며 평강을 건네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두 번째로 만나 주신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가서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났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믿기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시신을 유기했다고 오해를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까 염려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부활의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도리어 문을 단단히 잠가 두고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요 20:19 중)

 

성경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 권력 앞에서 무기력해진 사람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이 다가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1 중)

 

이어서 숨을 크게 불어넣으시며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중)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째로 찾아 주신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공포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들죠. ‘잡혀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망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헤어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두렵습니까?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렵게 만드는 것이죠. ‘낫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은 있습니다. 일은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두렵게 만듭니다. 결혼을 앞두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떨어질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장애인 주일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태어나면 그 가정은 참으로 힘들어집니다. 부모님이 먼저 두려움에 처하게 되고, 온 가족이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운 것이죠. 온전한 삶을 살아내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튀르키예의 한 여인이 울면서 말하는 내용이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도 잃었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하나 남은 것은 내 목숨뿐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에게서 앞날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절절 흘러나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강릉에서 산불로 많은 재산을 잃은 이들도 있습니다. 전 재산을 잃은 분도 있겠죠. 좋은 건물을 다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잿더미 아래에서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워하고 고민하며 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쟁에서,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두려움 속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보혜사 성령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두렵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워하고 우는 자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지금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세 번째로 의심하는 도마를 만나시어 복음의 증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이 만나 주신 사람은 도마였습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던 사람입니다. 그가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죠.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중)

 

도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언할 때 충분히 확신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믿을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도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실 그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고 수많은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지만 그럼에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도마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래, 네가 믿지 못하냐! 그러면 너는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고, 새로운 일을 행하리라.”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마 한 사람도 그냥 놓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셔서 믿음의 용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 “나를 붙들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에게 접촉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죠. 그런 주님이 도마에게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요 20:27 중)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나를 만져보아라. 나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아라.” 말씀하십니다. 넓은 아량과 사랑 속에서 도마를 다루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죽일 작정을 하고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주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바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8)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을 알리시고 보이시길 기뻐하십니다. 연약한 믿음도 부족하다 아니하시고, 다시 오셔서 확증하여 주시고, 다시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시고, 그분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큰 은총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앞으로도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나시어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수님을 적대하고 음모를 꾸며 죽인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빌라도와 같은 사람을 찾아가시는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든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복수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덤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 두려워 떠는 사람들, 믿음이 약한 이들을 찾아오셔서 세우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일은 바로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때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희망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지금도 무덤 주위에 울고 있는 여인을 찾으시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찾으시고, 의심으로 가득 찬 사람을 찾아오시어 주님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울고 계십니까? 아직도 두렵습니까? 아직도 의심이 가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옆에 계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Those To Whom Our Risen Lord Appeared

 

John 20:26-29

 

Last week was Easter Sunday. But today we sang a hymn on resurrection; resurrection is not to be celebrated just on Easter but on every Sunday which should be a“mini Easter.”Furthermore, according to the liturgical calendar, Easter time is the period of 50 days starting from Easter Sunday until Pentecost.

 

Therefore, we rejoice in and celebrate the resurrection of our Lord even today. In fact, we remember His resurrection every Sunday.

The Synoptic Gospels and the Gospel of John describe the events following Jesus’ resurrection and the people He appeared to from slightly different perspectives. Although we must consider all testimonies in the Bible comprehensively, today I want to focus on John 20 as we look at whom our Lord appeared to after being raised from the dead.

 

John says that Jesus revealed His resurrected selfto largely four groups of people. First, He showed Himself to Mary Magdalene, the first person that went to His grave; second, to His disciples when they were together; third, to Thomas; and fourth, toseven disciples at Lake Tiberias.

 

Today I will follow the flow of John 20 as we look at whom Jesus met after being raised and what it means to us.

 

Scene 1. Jesus appears to Mary Magdalene.

 

According to John, the first person our risen Lord appeared to was Mary Magdalene. Unlike the other Gospels, the Gospel of John describes this scene rather simply:

 

“Earl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while it was still dark, Mary Magdalene went to the tomb and saw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from the entrance.”(John 20:1)

 

Alarmed, Mary runs to the disciples to tell them about the empty grave. Hearing her words, it was John, the disciple whom Jesus loved most, who first ran to the grave; then Peter arrived.The two find the tomb empty with strips of linen lying around and the cloth that had been wrapped around Jesus’ head lying separately.

 

Howeverthey go back to where they were staying without meeting the Lord there.

 

All they saw was an empty grave. The risen Lord did not appear with joy and open arms to the two disciples who rushed to the grave. The disciple He loved the most came running to His grave. His best pupil, Peter, came running too. But they were not the first ones He appeared to.

 

The person He first showed Himself to after being raised was not Peter or John, but a lowly woman: Mary Magdalene. She was a woman, a lowly being who had formerly been possessed by seven spirits before being restored by the grace of our Lord. Yet she received the honor of becoming the first person that our Lord met after being raised. (Luke 8:2)

 

Then how did Mary become the first person to see our risen Lord? There is a special reason that she became the first witness of His resurrection.

 

As John 20:11 and 13 tell us, it was because she was crying outside the tomb. Peter and John saw the empty grave butreturned home. Mary did not. The Bible tells us that she remained, weeping outside the tomb.

 

Why did our risen Lord show Himself to Mary first? Because she was a woman? Because she poured perfume on Him? Because He loved her the most? Many confuse her with Lazarus’ sister Mary, but to clear any misunderstanding the Bible clarifies that it was Mary Magdalene, not Mary of Bethany.

 

The first person whom our risen Lord showed Himself to was not a woman, or the person who poured perfume over Him, or Peter, or John. It was the one who was weeping outside His tomb.

 

John 20:13 suggests that Mary did not even imagine Jesus could have risen from the dead. She thought someone had taken His body. So when Jesus speaks to her, she thinks He is a gardener and begs him to tell her where he has put Jesus if he has carried Him away: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put him, and I will get him.”(John 20:15)

 

Why did Jesus show Himself to Mary first who was weeping outside the grave? It is because countless people, including all those in the coming ages, are weeping outside the tomb. Because countless women are crying outside the grave.

 

Because there are countless people weeping over the death of their loved ones. Because they are mourning, unable to even find their bodies. Here, Mary’s grief is an extreme sadness that comes from not even being able to find Jesus’ body.

 

How many people are weeping outside the grave like Mary today?

 

Countless Ukrainians have been killed by Russian missiles.The deaths were too many that there weren’t enough graves. These people lost their fathers, mothers, and children. They are now crying without end outside the grave.

 

How many succumbed to Covid? What was the global death toll? People thought that it was just the flu, that they would get better after a few days’ rest. Who would have known that they would die so easily from the virus? How many died alone in isolation wards? Their families could only weep outside.

 

Is that all? More than 50,000 people were crushed to death under buildings in the recent earthquakes that happened in Turkey and Syria. How many are still weeping outside their destroyed homes as they cannot even retrieve the bodies of their loved ones when they know they are decaying under the rubble?

 

And how many of us are grieving the loss of a parent, a wife, a husband, or a child?

 

People are weeping without end outside the grave, unable to hide their grief.

 

Dear brothers and sisters, but… our risen Lord came first to these people weeping outside the grave. He showed Himself first to Mary who was crying because she could not even find His body.

 

People made a grave for Lazarus when he died. But our Lord ordered the stone to be removed and commanded Lazarus to come out of the grave. And that tomb became and empty one. Then Jesus said to Martha: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 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ohn11:25-26)

 

Scene 2. Jesus shows Himself to the fearful disciples.

 

The second group of people Jesus showed Himself to was the disciples who had seen the empty grave and the missing corpse. That day, they would have wondered all day long where the body had been moved to. Then they would have heard from Mary that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Did Jesus really come back from the dead? Was Mary hallucinating?

 

They would have spent the whole day wondering, ‘Perhaps Mary was mistaken. After all, she had been possessed by demons in the past.’

 

It was almost night of the day of Jesus’ resurrection, but the disciples were hiding behind closed doors. Perhaps they were afraid of being accused of stealing Jesus’ body.

 

This is how John describes the scene: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 when the disciples were together, with the doors locked for fear of the Jewish leaders, […]” (John 20:19)

 

It was at this moment that Jesus came to them in His risen form. Our risen Lord showed himself to them.

 

He showed Himself to these people who were afraid, who were powerless before the powers of the world, who were trembling in fear, who were lamenting their own powerlessness. These were the very people that our Lord appeared to.

 

Saying, “Peace be with you!”(John 20:21),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the Holy Spirit.”(John 20:22)

 

The second group of people that the risen Jesus showed Himself to was those trembling in fear. Why do we feel fear? Isn’t because we are uncertain about the future? Fear arises from the thought of dying. The chance of being arrested causes fear. The thought of being wrongfully accused or misunderstood causes fear. The thought of everything falling apart leads to fear. The thought of parting with something/someone causes fear.

 

The disciples were afraid. They were afraid that they might get arrested, be killed like Jesus, or be wrongfully accused of stealing His body.

 

People suffering from incurable diseases feel fear. They are afraid that they might never get better. People starting something new have fears. They are worried that things might not turn out well.

 

Even couples get afraid before getting married. Is it okay to promise myself to this man/woman for the rest of my life? People also tremble before taking tests.

 

I was heartbroken by what a Turkish woman said after the earthquake. Standing next to a heap of rubbles, she said, crying, “I have lost everything. I don’t know how I should live. I have lost my family and everything I have. All I have left is my life.”

 

Her tears reveal her immense fear for the future and how she is at a complete loss.

 

Is that all? The people in Gangneung who lost everything in the recent forest fires are weeping in fear too. Children who have lost their parents to wars and earthquakes are also crying in fear.

 

But our risen Lord came to such people trembling in fear. Comforting them, He declared peace. Furthermore, feeling this was not enough, He gave thema helper, the Holy Spirit, as a gift. He gave them the Spirit of consolation.

 

Scene 3. Jesus shows Himself to the doubting Thomas.

The third person our risen Lord met was Thomas.

 

After Jesus showed Himself to the disciples, they would have had an assurance of His resurrection. Furthermore, they would have been freed from their fear and anxiety with the help of the Holy Spirit.

 

But one man was absent when Jesus came to the disciples: Thomas. So he doubtseven after hearing from his friends about Jesus’ resurrection. He says:

 

“Unless I see the nail marks in his hands and put my finger where the nails were put, and put my hand into his side, I will not believe.” (John 20:25)

 

Thomas would have heard from the disciples how Jesus came to them and told them about His death and resurrection. He could have believed when they told him they had met the risen Lord. But he candidly confesses that he cannot.

 

Thomas’ doubts are completely understandable. Because they are our doubts too. Our confession is not unlike that of Thomas who says he cannot believe unless he sees and touches the nail marks himself—even after hearing the news of Jesus’ resurrection from many witnesses.

 

Jesus could well have just excluded Thomas who stubbornly persisted in his unbelief. Even without him, Jesus’ resurrection could be testified to by those who believed.

 

Yet our Lord appeared to this doubting Thomas in His resurrected form. By doing so, He changed Thomas into a warrior of God with a greater faith.

 

The Bible tells us that when the risen Jesus first appeared to Mary at the tomb, He ordered her not to touch Him. Although we don’t exactly know why, He forbid her from touching Him.

 

Yet this is what He says to Thomas: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John 20:27)

 

We see Jesus treating Thomas with great understanding and love.

 

When Paul was on his way to Damascus with the intent of killing all who believed in Jesus, Jesus appeared to him in His resurrected form. This is how Paul describes that encounter 1 Corinthians:

 

“and last of all he appeared to me also, as to one abnormally born.”(1 Corinthians 15:8)

 

Even now, our risen Lord rejoices in revealing His resurrection to us through the Holy Spirit. He does not reject our weak and insufficient faith, but revisits us to confirm and to reveal Himself again.

 

This is grace. Our faith is weak. But our Lord appears to us again and again—just as He reappeared to Thomas on the 8th day of His resurrection. Our risen Lord showed himself to Thomas until his faith became strong.

 

We must remember one thing, which I mentioned last week. Our risen Lord did not appear to the high priests or the teachers of the law who opposed Him, conspired against Him, and killed Him. Nor did He appear to Pontius Pilate. He could have appeared to them, knocked them out of their senses, made them regret their actions, thrown them in despair, and gotten His revenge, but our Lord is not vengeful. He came to, encouraged, and edified those weeping at the grave, those trembling in fear, and those of weak faith.

 

This is how the incident of His resurrection is conveyed to us. This was what happened approximately 2000 years ago.

 

Those who experienced Jesus’ resurrection in His time have all passed away. They all died, but they would have died in the hope of resurrection that our Lord gave them.

 

They are all gone from this world now, but our risen Lord is with us eternally; He is with us even now.

 

Even now, He comes to the woman crying outside the tomb, to those trembling in fear, and to doubtful people like Thomas.

 

“Why are you crying?”“Peace be with you! Receive the Holy Spirit!”

 

“Put your finger here; see my hands. Reach out your hand and put it into my side. And don’t become an unbelieving person, but a man of faith.”

 

This is the voice of the risen Lord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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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 26~29

26~29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첫 번째로 만난 이는 무덤 곁에서 우는 여인이었습니다.>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부활절 찬양을 드렸습니다마는 사실 부활절은 단 하루의 주일이 아니라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교회력에서 지키는 부활 절기는 부활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성령강림주일 전까지의 50일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마다 부활절 노래를 부르는 일이 그리 어색한 일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어떤 일을 하셨나요? 부활 이후에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셨을까요?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말하는 내용이 조금씩 다른 부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 집중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크게 네 번에 걸쳐 부활하신 모습을 드러내셨음을 전하여 줍니다. 20장 그리고 21장이 알려 주고 있죠. 20장에는 세 부류의 사람을 만나셨고, 21장에는 또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이 첫 번째로 만나신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두 번째로는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을 만나셨고요. 마지막 세 번째로는 도마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21장에 가서는 일곱 제자, 특히 베드로를 만나시고 그에게 소명을 주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부활하신 주님의 행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중에서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을 따라가며 주님이 만나 주신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이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합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1)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왜 갔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막달라 마리아가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 무덤으로 갔고, 그곳에서 돌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시작됩니다. 당연히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무덤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 아마도 요한으로 보이는 그가 제일 먼저 달려간 것 같습니다. 그를 뒤따라 베드로도 달려가지요. 무덤에 이른 두 사람이 빈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마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수건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빈 무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아, 주님이 여기 계시지 않는구나.’ 확신하게 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곳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어쩌면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가장 먼저 만나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달려오는데 주님은 두 팔 벌려 안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반갑게 맞아주실 법한데, 베드로마저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요한도, 베드로도 아닌 막달라 마리아를 가장 먼저 만나 주십니다. 사실 그녀는 비천한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에 많이 나오지도 않는 인물이죠.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주님의 은혜로 겨우 나음을 받은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부활하신 주님이 처음으로 만나 주시며 막달라 마리아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그녀가 왜 먼저였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11,13절이 알려 줍니다. 그녀가 무덤 옆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녀는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때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베다니에 살고 있는 마리아이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이 깊이 사랑하신 인물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막달라 마리아일 뿐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음을 받은 여인이죠. 그런데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만나 주신 사람은 베다니의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무덤 곁에서 울고 있던 한 여인을 첫 번째로 만나 주셨습니다.

13절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려 줍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치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말합니다.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5 중)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실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이 돌아가신 것이 분명한데 누군가가 시신을 옮겼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녀를 더 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게 해 달라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주님이 무덤 밖에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제일 먼저 만나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 무덤 곁에서 끊임없이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울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신도 찾지 못하고 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이 그 극한의 슬픔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분이셨습니다. 지혜로운 분이셨고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분이 사천 명도 먹이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분이셨습니다. 어린아이도 흔쾌히 맞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만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배반을 받으셨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본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참으로 귀한 분이 억울하게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안식 후 첫날, 날이 밝자 발을 옮깁니다. 무덤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시신조차 사라진 빈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여러분, 오늘도 우크라이나의 수많은 사람들이 포격을 당하며 죽어 갑니다. 무덤을 미처 만들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는지 셀 수도 없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습니다. 아이들이 사라집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목숨을 잃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감기에 걸린 줄 알고 잠시 쉬면 날 줄 알았는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병원에서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외롭게 죽어 간 사람들은 얼마나 많나요? 가족들은 그저 밖에서 울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화장할 곳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화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오만 명 이상의 귀한 생명이 건물 더미에 깔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분명 건물 더미 아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저런 사연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남편을 잃었습니다. 자녀를 잃고 눈물 흘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시신을 찾지 못하고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은 결코 한 사람의 슬픔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녀와 같이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덤 밖에서 슬픔을 감출 길 없는 그녀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시신도 못 찾는다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이 제일 먼저 나타나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누운 무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명령하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무덤은 곧 빈 무덤이 됩니다. 그때 주님이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오늘도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사람, 시신을 찾지 못하여 우는 사람, 억울한 죽음으로 우는 사람, 그들을 향하여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가 주셔서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부활하신 주님은 두 번째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만나시며 평강을 건네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두 번째로 만나 주신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간 제자들입니다. 그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달려가서 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만났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믿기지가 않았던 모양입니다. 자신들이 시신을 유기했다고 오해를 받으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을까 염려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부활의 하루가 지나고 저녁이 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도리어 문을 단단히 잠가 두고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요한복음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요 20:19 중)

 

성경은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갔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 주신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 권력 앞에서 무기력해진 사람들,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이 다가가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1 중)

 

이어서 숨을 크게 불어넣으시며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으라 (요 20:22 중)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째로 찾아 주신 사람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공포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들죠. ‘잡혀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망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헤어질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두렵습니까?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렵게 만드는 것이죠. ‘낫지 않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듭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도 두려움은 있습니다. 일은 시작했지만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두렵게 만듭니다. 결혼을 앞두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떨어질까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장애인 주일을 함께 보내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태어나면 그 가정은 참으로 힘들어집니다. 부모님이 먼저 두려움에 처하게 되고, 온 가족이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려운 것이죠. 온전한 삶을 살아내지 못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튀르키예의 한 여인이 울면서 말하는 내용이 저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족도 잃었고 재산도 잃었습니다. 하나 남은 것은 내 목숨뿐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에게서 앞날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절절 흘러나옵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강릉에서 산불로 많은 재산을 잃은 이들도 있습니다. 전 재산을 잃은 분도 있겠죠. 좋은 건물을 다 잃어버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잿더미 아래에서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워하고 고민하며 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쟁에서, 지진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두려움 속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평화를 선포하십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보혜사 성령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두렵습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워하고 우는 자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지금 여러분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세 번째로 의심하는 도마를 만나시어 복음의 증언자로 세우셨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이 만나 주신 사람은 도마였습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던 사람입니다. 그가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심하죠.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 20:25 중)

 

도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증언할 때 충분히 확신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마는 믿을 수 없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도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사실 그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고 수많은 이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지만 그럼에도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도마의 고백은, 오늘 우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얼마든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도마를 제외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래, 네가 믿지 못하냐! 그러면 너는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내가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고, 새로운 일을 행하리라.”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마 한 사람도 그냥 놓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셔서 믿음의 용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처음 나타나셨을 때, “나를 붙들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녀에게 접촉하지 말 것을 명령하신 것이죠. 그런 주님이 도마에게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요 20:27 중)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나를 만져보아라. 나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아라.” 말씀하십니다. 넓은 아량과 사랑 속에서 도마를 다루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죽일 작정을 하고 다메섹으로 향하고 있었을 때, 주님은 부활하신 모습으로 바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이 일을 회상하면서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8)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의 부활을 알리시고 보이시길 기뻐하십니다. 연약한 믿음도 부족하다 아니하시고, 다시 오셔서 확증하여 주시고, 다시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지요. 하지만 주님은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시고, 그분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큰 은총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앞으로도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나시어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예수님을 적대하고 음모를 꾸며 죽인 대제사장, 서기관, 그리고 빌라도와 같은 사람을 찾아가시는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든지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들고, 복수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고,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죄인을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무덤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 두려워 떠는 사람들, 믿음이 약한 이들을 찾아오셔서 세우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일은 바로 2천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때 주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희망 속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며 지금도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지금도 무덤 주위에 울고 있는 여인을 찾으시고, 두려움에 떠는 사람을 찾으시고, 의심으로 가득 찬 사람을 찾아오시어 주님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성령을 받으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울고 계십니까? 아직도 두렵습니까? 아직도 의심이 가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 옆에 계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4월 1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부활의 주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 (요 20장 26~29)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1장, 40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20장26~29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어떤 사람들을 만나 주셨나요? 어떻게 하셨나요?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들이 누구였고,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설교의 요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겨우 주님의 은혜로 나음을 입은 천한 여인이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비어 있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곳, 무덤 밖에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울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크라이나의 전쟁 속에서, 코로나로 인해서, 지진 속에서, 병원에서, 고립된 공간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부모님을 잃고, 배우자를 잃고, 자녀를 잃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눈물 흘리며 슬픔을 감출 길 없는 이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은 무서워하는 제자들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 세상의 권력 앞에 무력한 사람들,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들, 무기력한 자신을 보면서 한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이 생기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잡혀갈 수 있겠다는 생각, 그리고 오해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게다가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낫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일을 잘 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이 있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만나주십니다. 이들을 위로하시며 평화를 선포해 주십니다.

 

셋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사람은 도마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도 의심하게 되었던 도마입니다. 이러한 도마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지만, 그럼에도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도마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 주십니다. 그를 더욱 믿음이 있는 주님의 용사로 만들어 주십니다. 연약한 믿음에도 부족하다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 오셔서 믿음을 확증하여 주십니다.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오셔서 이들을 세우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나누기

  1. 혹시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 주신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속할지는 않나요? 현재 나의 믿음생활은 어떠한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산 소망이 되신 하나님, 이 시간 주님의 부활의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 문을 잠가두고, 가득한 의식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소망을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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