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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모든 말씀을 참으로 확증해 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주일마다 초대 교회로부터 선포되던 환호입니다. 이 환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독교 중심에는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며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바가 사건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중)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그분의 생명은 살아서 믿는 모든 자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모든 말씀이 ‘참’임을 확증하고 증명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겠다는 말씀 그대로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참입니다. 주님이 길이라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은 참이며 진리라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 또한 참이고, 생명이라 말씀하셨기에 이 또한 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참으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약속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장 16~20절)
이토록 분명하게 바울은 부활 신앙을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헛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 어둑했던 때를 알리며 전개됩니다.>
그렇다면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한 가지 사례를 흥미롭게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인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시신을 내리고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합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납니다. 안식 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는 ‘새벽’에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기록하지만, 요한복음은 어둠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던 때에 막달라 마리아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증언합니다. 이에 어떤 학자는 어두울 때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고, 다시 새벽이 될 즈음에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을 함께 찾아갔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어두울 때”라는 표현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사탄의 세력, 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는 어두움을 빛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1장 5절 말씀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부활의 날을 알리면서도 어두움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요 20:1) 무덤 문은 이미 열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전히 세상이 어둡다고 증언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 세계에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양 빛보다 밝은 빛으로 번쩍이듯이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부활하신 주님이셨지만 세상의 어두움은 완전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죽음의 세력이 완전하게 물러나지 않은 듯한 때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문이 옮겨진 것을 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의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는 작은 증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 흐름상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겁도 나고 황당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곧바로 달려갑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추론합니다. “누군가가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나 보다. 어디론가 옮겼나 보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난 마리아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기보다 해석을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한복음 20장 2절 중)
어쩌면 가장 적절한 상황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까지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요한과 베드로가 빈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난 시몬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라는 표현은 저자 요한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단숨에 뛰어 갔다는 말씀입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한복음 20장 4절)
엄중한 부활 사건을 전하면서 두 제자의 달리기 시합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서로가 경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다음 장인 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쟁을 하듯이 묻는 장면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름의 경쟁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두 제자 중 열심히 달려온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안을 살짝 들여다볼 뿐입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나 봅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베드로를 기다리는 동안 요한은 한 곳에 조용하게 그리고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세마포를 보게 됩니다. 아직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를 보게 되었을 때, 요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생각이 정리되지 않던 시점에 베드로가 도착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가자 요한이 뒤따라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당시 무덤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장 6~8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빈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싼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를 싼 수건은 쌌던 모습 그대로 다른 곳에 놓여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쌌던 대로”라는 표현에 대해 해석이 다양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마포는 정돈된 채로 잘 개어 있었고, 머리를 싼 수건은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달리기 시합을 하는 듯한 이야기로 출발해서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를 알려 주고, 무덤 안의 모양이 어땠는지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어떤 정보를 얻게 됩니까? 어떤 인상을 가지게 되나요? 세밀한 묘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 사건이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알려 주려던 요한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두 제자가 빈 무덤과 세마포, 예수님의 머리를 싼 수건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세마포가 놓여 있고, 머리를 싼 수건은 모양을 간직한 채 다른 곳에 있었다는 증거로부터 무엇을 추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 증거 앞에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던 마리아의 생각은 힘을 잃고 맙니다. 어느 누가 세마포는 벗기고 수건은 모습 그대로 두면서 시신을 유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이끄는 듯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합니다.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 20:8)
그런데 이 말씀을 해석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씀일까요?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었다는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당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다음에야 무덤에 들어갔던 처음 상황을 떠올리면서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 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20장 뒷부분에 도마의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만나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던 상황을 기록하면서 자신은 보지 않고도 믿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믿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빈 무덤을 목격한 제자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합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입니다. ‘부활 신앙’은 어디서부터 출발할까요?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빈 무덤’, ‘그 안에 놓였던 세마포’ 그리고 ‘수건’, 이 모든 것이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믿었어!”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딘가 힘이 없어 보입니다. 빈 무덤과 세마포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확신시켜 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를 격한 감동과 흥분으로 몰아가지는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어!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렇다, 나는 믿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마음엔 감동이 없고 흥분되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두 제자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마리아는 계속 울고 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무덤 안에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머리 편에, 다른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분이 서 계신 것을 보는데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라봅니다.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말을 건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한복음 20장 15절)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던 한 여인을 향해 부활하신 주님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주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야기를 한 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 살아나신 그분의 음성, 자신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음성 앞에 그녀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이 보입니다.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마디 대답 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랍오니”, “선생님, 선생님···.” 이 말 속에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식사를 나누시고 떡을 떼어 주신 후에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듯이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감격스런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어디서 올까요? 빈 무덤의 증거일까요? 아니요. 그것은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 그는 주님의 부활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에 그분의 부활이 베드로에게는 진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눈이 열리고,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이 우리 모두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오늘을 사는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실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모습으로 확증해 주실까요? 본문 속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해 줍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흥분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붙잡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20장 17절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가 주신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떤 본문은 ‘만지지 말라’ 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몸이 신령하니 만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도마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손을 내미시며 도마에게 만져 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지 말라”고 명하신 말씀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부활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부활의 과정 속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이 무엇이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부활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진정한 목적이자 온전한 완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해 원래 고향, 실제의 근원, 인간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진정한 목적이자 마지막 종착역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할까요? 거기까지만 머문다면 부활 소망은 절반의 소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도 부활한 것이지요. 물론 그가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특별한 특권을 누리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온전하게 참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시 살 시간은 얻었지만 아버지의 품에 온전하게 올라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진정한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장 29절)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도 부활할 수 있음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다시 살아난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온전한 부활의 완성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기까지 이를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실 때에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완성되며 주님께서 이 땅의 제자들을 향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장 7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로 다시 돌아와 살게 되는 것이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올라가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올라가셔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십니다. 이제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많은 역사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구속의 과정입니다.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으려 한 마리아를 향해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빛과 더불어 예수님을 만나지요.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이 곧바로 고꾸라집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장 8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경험이 바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킵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이방인들을 위한 1,2,3차 전도 여행에 나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내려 주신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감격이 여러분 안에도 있으십니까? 이 감격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을 듣게 하셔서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빈 무덤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주님을 만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 진실로 부활하셨도다!” 이 고백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더욱더 확고해지는 부활 주일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The Risen Lord Calling My Name
John 20: 11-18
“Jesus is risen! He has truly risen!”
This declaration, made every Easter and Sunday since the early church, clearly reveals the Christian identity. At the very core of Christianity, there is our faith in resurrection. Every Easter, we declare, celebrate, thank, and remember the Lord’s resurrection.
Jesus’ resurrection, foretold by the Lord to His disciples, came true. Jesus said,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John 11:25-26)
Jesus referred to Himself a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said that the meaning of His resurrection and life would affect both the dead and the living. Those who believe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 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Thus, Jesus’ resurrection gives eternal life to both the living and the dead.
Jesus’ resurrection was an event that proved all He said during His life on earth and His ministry were true. Because the Man who referred to Himself as the resurrection rose from the dead, His other teachings on Him being the way and the life can only be true. His word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will never die is also true. Resurrection made everythingthat Jesus saidthe truth, and resurrection became a true promise to us who reply “Amen!” to His words.
With such conviction of resurrection, Paul clearly declared, “For if the dead are not raised, then Christ has not been raised either. And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your faith is futile; you are still in your sins. Then those also who have fallen asleep in Christ are lost. If only for this life we have hope in Christ, we are of all people most to be pitied.But Christ has indeed been raised from the dead, 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1 Corinthians 15:16-20).
Yes. We believe in Christ’s resurrection. If Christ were not raised from the dead, our faith would be futile.
Then how did we come to believe in the resurrection? How did we come to believe that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It is, of course, because the Bible tells us of this fact, and because countless witnesses in the Bible testify to it. It is also because the Church has declared it to the world continuously through proclamation of the word. That is why special days like Easter on which we proclaim Jesus’ resurrection to the whole world are important.
Then how did Jesus’ disciples and followers in His time come to know about and believe in Jesus’ resurrection? Today’s text from John contains an interesting example of this.
According to the Book of John, after the death of Jesus, Joseph of Arimathea went courageously to Pontius Pilate. Joseph was actually a disciple of Jesus, but hid this fact because he was afraid of the Jews. But after Jesus’ death, he changed. He became a brave disciple. He took Jesus’s corpse down from the cross and placed it in a tomb that had never been used.
With Nicodemus who brought a mixture of myrrh and aloes, he wrapped Jesus’ body in a linen, with the spices, according to the Jewish burial customs, and placed it in a tomb near Golgotha.
Two nights passed and it was the first day of the week. Mary of Magdalene went to Jesus’ grave “while it was still dark.” In the other Synoptic Gospels, not just Mary but otherwomen are mentioned, and it is said they went to the grave “at dawn.” But John describes that it was justMary of Magdalene who went to the tomb while it was still dark. Some scholars say that Mary of Magdalene was the first to arrive, followed by other women.
But the expression “while it was still dark” may have a symbolic meaning. In John, darkness symbolizes those who do not know God. John 1:5 says,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While it was still dark… The stone had been removed from the entrance. Although the Bible tells us that Jesus was resurrected, the world was still in darkness. Jesus was not raised with a loud clamor. His resurrection was not broadcast live around the world. Jesus clearly rose from the dead, but the darkness was still there. Therefore, “while it was still dark” may mean “when it was still dark, and the forces of death had not completely receded.” That is why John writes, “while it was still dark.”
At that moment, Mary sees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from the entrance. Interestingly, new of Jesus’ resurrection begins with the testimony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Considering the flow of the story, it seems Mary did not enter the grave after seeing the stone removed. She would have been shocked to see the stone removed. Scared. And baffled, too.
So, she ran to the disciples to tell them the news. Based on what she saw, she told them what she surmised—that someone had opened the tomb and taken Jesus’ body. Rather than telling them what she saw, that is, the fact that the stone had been removed, she told them what she guessed: “They have taken the Lord out of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have put him!” (John 20:2)
This was probably her best guess, her best judgement. Generally speaking, it is actually quite an appropriate one. Until then, she did not think that Jesus was raised from the dead.
Hearing her words, Peter and “the other disciple” rushed to the grave. As you may well know, in the Book of John, “the other disciple” refers to John. So, in short, Peter and John rushed to the grave.
Then something interesting happens: “Both were running, but the other disciple outran Peter and reached the tomb first.”(John 20: 4)It is really fascinating that there was a race between these two disciples. Therealmost seems to be a rivalry between them, which is also noted in chapter 21 where Peter asks Jesus what will become of John.
Who arrived at the grave first? John. Yet,John just glances into the grave and waits for Peter to arrive. What was he thinking? John saw the linen and the cloth lying in the grave. What would have gone on in his head seeing them?
While John was still disoriented, Peter arrived and entered the grave first, followed by John. This is how the Bible records the scene:“Then Simon Peter came along behind him and went straight into the tomb. He saw the strips of linen lying there, as well as the cloth that had been wrapped around Jesus’ head. The cloth was still lying in its place, separate from the linen. Finally the other disciple, who had reached the tomb first, also went inside. He saw and believed.”(John 20: 6-8)
This is an interesting story. In the empty tomb were the linen and the cloth, but the cloth“was still lying in its place, separate from the linen.” While there are many interpretations of the “lying in its place,” it appears that the linen was folded neatly, while the cloth, which had wrapped Jesus’ face, was not. It was as if Jesus had just slipped out of the cloth, leaving itin its original wrapped shape.
What do you make of this? A race is run, one disciple arrives first, and the cloth and linen are lying in such and such a shape. Such minute details! What is your impression of these details? Through such detailed description, John probably wanted to tell his readers that what he saw and experienced was real, certain, and true.
Now the problem is this. The linen was there, and the cloth that wrapped Jesus’ face was lying in its original place in the shape of Jesus’ face. What can we deduce from such evidence? Did someone steal Jesus’ body after taking off the linen as Mary had thought? Who would take just the body after unwrapping the linen? And how on earth can the cloth maintain its shape?
Such peculiar circumstances tell us that it wasn’t theft. The latter part of verse 8 says, “He saw and believed.” This is quite hard to interpret. What did he, John, believe?
This verse may mean that John believed that the body was taken. Or, perhaps, John wanted to brag a little about him believing in Christ’s resurrection earlier on. Perhaps he didn’t know exactly what had happened when he entered the grave, but later on wanted to say that he had known, early on, that Jesus had been resurrected. But one thing is for certain. The two disciples weren’t exactly ecstatic about the tomb being empty and the linen and the cloth. After they saw them, they just went back home—as if nothing had happened.
Then where does our faith in resurrection begin? John answers this in an interesting way. Can you have a faith in resurrection after seeing an empty grave, the linen, and the cloth? John says that he did. It is as if he wants to compare himself, in a positive light, to Thomas who didn’t believe until he saw Jesus’ nailed hands. Still, the story about the empty grave and the linen does not excite us. They do provide proof that Jesus was risen, but do not fill us with excitement.
The story continues. After the two disciples returned home after checking the grave, Mary remained at the tomb, weeping. It seems she still thought the body was stolen. It is, however, at this moment that she saw two angels. She remembers vividly where the two angels in white were sitting: one at the head and one at the foot of where Jesus’ body had been. She also saw a man standing, but did not recognize that it was Jesus. Thinking he was the gardener, she said, “Sir, if you have carried him away, tell me where you have put him, and I will get him.”(John 20: 15)
Finally, Jesus called her name: “Mary!” And Mary heard the Lord’s voice. It was the sound of her Jesus, the risen Jesus!
Just as a sheep knows and follows the voice of its shepherd, Mary’s eyes and ears opened when she heard Jesus’ voice. When she turned and saw Him, she knew it was her Lord. It was her first encounter with the risen Lord.
The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also recognized that the man talking to them was Jesus only after Jesus ate and broke bread with them. Mary knew it was Jesus when He called her name.
Where, and when, does our faith in resurrection begin? At seeing all the evidence at the empty tomb? No. They can be a reference, there is something more important.
Jesus rose from the dead, called Mary’s name, Thomas’ name, and the disciples’ name; and appeared before them. And their eyes opened, and they saw the resurrected Lord. These facts are where our faith in resurrection begins.
Then is the resurrected Lord calling your name now? How does He call your name, and how does He testify His resurrection to you?
The story that follows today’s text gives us the answer. Mary was excited after meeting the risen Lord. That is why she held on to Him. She didn’t want to let go of the Him. She probably wanted to take Him to the disciples to tell them the good news. She wanted to take Jesus to them herself. That is probably why she held on to Him.
But Jesus said, “Do not hold on to me, for I have not yet ascended to the Father. Go instead to my brothers and tell them, ‘I am ascending to my Father and your Father, to my God and your God.’” (John 20: 17)
If Jesus went with Mary, what better proof of resurrection would there be? But Jesus orderedher to let go. This may be misunderstood as meaning, ‘My body is now holy. I will go up heaven so you should not touch me with your dirty hands.’ But this isn’t so.
In the ensuing story, Jesus encourages Thomas to touch him. Therefore Jesus’ words to Mary does not mean the above. It means that His resurrection is not yet complete. The work of resurrection is not yet finished. Just raising His dead body is not the end of resurrection.
Then what makes resurrection complete? Returning to God the Father, our home and origin of existence, is what makes it complete. What does it mean that God gave us the hope of resurrection?
If it merely means that we will rise after death, we will never be happy. If our faith in resurrection stops there, and we have to live in a sinful world after being resurrected, we won’t be happy.
Our faith in resurrection is completed when we are finally in God’s arms, when we rise from the dead and enter the kingdom of God. That is why Jesus wanted to quickly finish that work. Therefore, Jesus’ resurrection was about returning to the Father. Furthermore, He promised us a gift as He ascended to the Father. The Lord said: “But very truly I tell you, it is for your good that I am going away. Unless I go away, the Advocate will not come to you; but if I go, I will send him to you.” (John 16: 7)
Jesus’ resurrection did not end in just the resurrection of His dead body. After being risen from the dead, He ascended to heaven, and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came to earth, as a guarantee to us of amazing works and a new future. Jesus’ resurrection was a grand event that meant all of this. That is why Jesus told Mary not to hold on to Him.
When the Spirit comes and calls our name, we can see the risen Lord. Therefore, news of Jesus’ resurrection leads to an earnest expectation and awaiting of the Holy Spirit.
I pray that what happened to Mary will happen to us, too—that our eyes and ears will be opened when we hear the voice of our Lord and see Him on the morning of Easter. The promised Holy Spirit will come and call our name and open our eyes so that we may see the risen Lord. Then, we will shout in exclamation and with thanksgiving, “Our Lord has truly, truly risen!”
요한복음 20: 11 ~ 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모든 말씀을 참으로 확증해 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주일마다 초대 교회로부터 선포되던 환호입니다. 이 환호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기독교 중심에는 부활 신앙이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회상하며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신 바가 사건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장 25~26절 중)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의 부활, 그분의 생명은 살아서 믿는 모든 자들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미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신 모든 말씀이 ‘참’임을 확증하고 증명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겠다는 말씀 그대로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참입니다. 주님이 길이라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은 참이며 진리라 말씀하셨기에 그 말씀 또한 참이고, 생명이라 말씀하셨기에 이 또한 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을 참으로 만드는 사건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약속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린도전서 15장 16~20절)
이토록 분명하게 바울은 부활 신앙을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믿음은 헛될 뿐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아직 어둑했던 때를 알리며 전개됩니다.>
그렇다면 부활절 아침,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한 가지 사례를 흥미롭게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인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시신을 내리고 자신을 위해 준비했던 무덤에 예수님을 안치합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납니다. 안식 후 첫 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다른 공관복음서는 ‘새벽’에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기록하지만, 요한복음은 어둠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던 때에 막달라 마리아만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증언합니다. 이에 어떤 학자는 어두울 때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고, 다시 새벽이 될 즈음에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을 함께 찾아갔으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어두울 때”라는 표현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사탄의 세력, 죄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여러 곳에서는 어두움을 빛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1장 5절 말씀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부활의 날을 알리면서도 어두움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요 20:1) 무덤 문은 이미 열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여전히 세상이 어둡다고 증언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에···.”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전 세계에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양 빛보다 밝은 빛으로 번쩍이듯이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부활하신 주님이셨지만 세상의 어두움은 완전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죽음의 세력이 완전하게 물러나지 않은 듯한 때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문이 옮겨진 것을 봅니다. 이렇듯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의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았다는 작은 증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어지는 이야기 흐름상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겁도 나고 황당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곧바로 달려갑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나름대로 추론합니다. “누군가가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갔나 보다. 어디론가 옮겼나 보다.” 그래서 제자들을 만난 마리아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기보다 해석을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한복음 20장 2절 중)
어쩌면 가장 적절한 상황 판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때까지 마리아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요한과 베드로가 빈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난 시몬 베드로와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요한복음에 나오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라는 표현은 저자 요한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단숨에 뛰어 갔다는 말씀입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한복음 20장 4절)
엄중한 부활 사건을 전하면서 두 제자의 달리기 시합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서로가 경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다음 장인 21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도 합니다. “다른 제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쟁을 하듯이 묻는 장면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베드로와 요한이 나름의 경쟁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두 제자 중 열심히 달려온 요한이 먼저 도착합니다. 그런데 그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안을 살짝 들여다볼 뿐입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없었나 봅니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베드로를 기다리는 동안 요한은 한 곳에 조용하게 그리고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세마포를 보게 됩니다. 아직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님을 쌌던 세마포를 보게 되었을 때, 요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생각이 정리되지 않던 시점에 베드로가 도착합니다.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가자 요한이 뒤따라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당시 무덤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장 6~8절)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빈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싼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 머리를 싼 수건은 쌌던 모습 그대로 다른 곳에 놓여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쌌던 대로”라는 표현에 대해 해석이 다양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세마포는 정돈된 채로 잘 개어 있었고, 머리를 싼 수건은 예수님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 놓여 있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달리기 시합을 하는 듯한 이야기로 출발해서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를 알려 주고, 무덤 안의 모양이 어땠는지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어떤 정보를 얻게 됩니까? 어떤 인상을 가지게 되나요? 세밀한 묘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 사건이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알려 주려던 요한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두 제자가 빈 무덤과 세마포, 예수님의 머리를 싼 수건을 보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세마포가 놓여 있고, 머리를 싼 수건은 모양을 간직한 채 다른 곳에 있었다는 증거로부터 무엇을 추론할 수 있겠습니까? 이 증거 앞에서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고 생각했던 마리아의 생각은 힘을 잃고 맙니다. 어느 누가 세마포는 벗기고 수건은 모습 그대로 두면서 시신을 유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정황으로부터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도록 이끄는 듯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전합니다.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 20:8)
그런데 이 말씀을 해석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믿었다는 말씀일까요?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믿었다는 표현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요한은 당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후에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경험한 다음에야 무덤에 들어갔던 처음 상황을 떠올리면서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지. 나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20장 뒷부분에 도마의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만나시면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던 상황을 기록하면서 자신은 보지 않고도 믿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짐작됩니다.
그럼에도 의문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믿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빈 무덤을 목격한 제자들이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증언합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입니다. ‘부활 신앙’은 어디서부터 출발할까요?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빈 무덤’, ‘그 안에 놓였던 세마포’ 그리고 ‘수건’, 이 모든 것이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나는 믿었어!”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딘가 힘이 없어 보입니다. 빈 무덤과 세마포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확신시켜 주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를 격한 감동과 흥분으로 몰아가지는 못합니다. 마치 우리가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어!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렇다, 나는 믿어!”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마음엔 감동이 없고 흥분되지 않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두 제자가 힘없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무덤 곁에 마리아는 계속 울고 있습니다. 여전히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때 무덤 안에 천사들이 나타납니다. 마리아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합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머리 편에, 다른 천사는 예수님이 누우셨던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분이 서 계신 것을 보는데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몰라봅니다. 동산지기인 줄 착각하고 말을 건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한복음 20장 15절)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던 한 여인을 향해 부활하신 주님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주님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야기를 한 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 살아나신 그분의 음성, 자신을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목자가 양을 부르는 음성 앞에 그녀의 귀가 열리고, 눈이 열리고, 모든 것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부활하신 주님이 보입니다.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마디 대답 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랍오니”, “선생님, 선생님···.” 이 말 속에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식사를 나누시고 떡을 떼어 주신 후에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듯이 마리아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감격스런 만남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 신앙은 어디서 올까요? 빈 무덤의 증거일까요? 아니요. 그것은 하나의 참고 자료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도마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에 그는 주님의 부활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에 그분의 부활이 베드로에게는 진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제자들의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에 눈이 열리고, 부활의 주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이 우리 모두의 이름을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오늘을 사는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실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어떤 모습으로 확증해 주실까요? 본문 속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질문에 대한 답을 전해 줍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흥분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붙잡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20장 17절 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함께 가 주신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떤 본문은 ‘만지지 말라’ 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몸이 신령하니 만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 등장하는 도마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손을 내미시며 도마에게 만져 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붙잡지 말라”고 명하신 말씀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씀은 그분의 부활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부활의 과정 속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이 무엇이지를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바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부활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진정한 목적이자 온전한 완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향해 원래 고향, 실제의 근원, 인간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진정한 목적이자 마지막 종착역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부활의 소망을 주셨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우리가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할까요? 거기까지만 머문다면 부활 소망은 절반의 소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도 부활한 것이지요. 물론 그가 이 땅에서 다시 살아나는 특별한 특권을 누리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온전하게 참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시 살 시간은 얻었지만 아버지의 품에 온전하게 올라갈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진정한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복음 5장 29절)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도 부활할 수 있음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다시 살아난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 그것이 온전한 부활의 완성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기까지 이를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을 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실 때에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완성되며 주님께서 이 땅의 제자들을 향해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장 7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육체로 다시 돌아와 살게 되는 것이 시작입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올라가는 것이 다음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품에 올라가셔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십니다. 이제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많은 역사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것이 구속의 과정입니다.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으려 한 마리아를 향해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빛과 더불어 예수님을 만나지요.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이 곧바로 고꾸라집니다. 그리고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린도전서 15장 8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경험이 바울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킵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며 이방인들을 위한 1,2,3차 전도 여행에 나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내려 주신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활의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부활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감격이 여러분 안에도 있으십니까? 이 감격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시는 것을 듣게 하셔서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빈 무덤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주님을 만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 진실로 부활하셨도다!” 이 고백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더욱더 확고해지는 부활 주일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1년 4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부활의 주님, 나의 이름을 부르시다” (요 20:11~1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5장, 16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20:11~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정체성, 우리 신앙의 중심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선언은 현재 살고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참된 생명의 선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신앙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있던 당시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어떻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알고, 확증하며 믿게 되었을까요?
설교의 요약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세상은 아직 어둠이 깔려 있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고,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곧장 달려가서 누가 주님의 시신을 옮겨 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둘이 바라 본 빈 무덤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쌌던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정말 사실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의 증거인 빈 무덤과 그대로 놓인 세마포와 수건이 베드로와 요한을 격한 감동과 흥분으로 몰고 가진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 감흥 없이 “예수님의 부활하셨음을 믿어.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훔쳐간 것으로 알고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가 무덤 안에 있는 천사들을 봅니다. 그곳엔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 사람이 동산지기 인 줄 알고 알아보지 못했던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의 음성 앞에 마리아의 눈이 열렸고 귀가 열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볼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흥분하여 예수님을 꼭 붙듭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몸의 부활이 부활의 완성이 아니라,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의 완성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몸이 다시 살아나서 죄악 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은 부활 한 몸으로 하나님의 그 품에 안기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저 몸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와 더불어 수많은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엄청난 구속의 역사와 은혜 가운데 부활의 능력과 영광이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울의 그 이름을 불러주셨을 때 인생이 바뀌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이루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약속하신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부활의 참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나누기
1.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이 오늘 내게 어떻게 들립니까? 부활은 내게 어떤 의미입니까?
2. 사실로서의 부활을 넘어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령의 역사하심 속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이 있으십니까?
마무리 기도
주님!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부활의 주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듯이, 오늘 내 이름을 불러 주옵소서. 우리 눈과 귀를 여셔서 부활의 주님을 뵈옵는 성령의 그 놀라운 역사를 기대하고 기다립니다. 부활하셔서 참 소망이 되신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