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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하라

전도서 7: 15 ~ 18

김경진 목사

2019.06.30

<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

제가 이 강단에서 설교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수차례 설교를 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가벼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굉장히 가벼운 마음으로 설교단에 섰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 제목이 “불완전하라”이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7장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전도서 7:16)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과연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새번역 성경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 (전도서 7:16 중, 새번역)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훈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다워 보이지도 않습니다. ‘과연 이 말씀에 우리가 따라야 할 중요한 가치나 교훈이 있는가?’ 하는 질문도 생깁니다. 그래도 이어지는 17절은 이해할 만합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전도서 7:17)

악에 대하여,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하는 듯한 이 말씀은 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내용 즉 “의롭게 살지도 말고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는 말씀은 조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망언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뒷부분에 또 이어집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전도서 7:18 중)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이것’은 무엇이고 또 ‘저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의로움’을, ‘저것’은 ‘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의롭게 살면서 어느 정도 악하게 살아라.” 한마디로 “중간쯤 살아라.”라는 말입니다.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바르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악하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대강대강 살아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과연 이 내용이 정말 성경이 전하는 참 지혜일까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것일까요?

< 전도자가 인생의 지혜를 전합니다. >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전도서의 전체적인 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모든 것을 누렸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전도자로서 얻게 된 자신의 지혜를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전도서 1:3~5, 새번역)

지혜의 왕, 번영을 이룬 왕으로 이스라엘을 호령한 솔로몬, 또 자신이 가진 지혜와 힘으로 열심히 나라를 통치한 솔로몬이었지만, 그 어떤 힘이나 지혜로도 꿈쩍하지 않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을 보며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가고, 결국엔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바닷가에서 수없이 성을 지어보고 집도 지어보지만, 파도가 몰아치면 금세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같은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 보려 했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도 했지만, 바닷물이 휩쓸고 가면 여전히 모래알만 남는 것처럼 허무를 경험합니다.
세상은 꿈쩍하지 않고 도도히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려 보았지만, 결국 전도자가 얻은 마지막 지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지혜를 추구했던 솔로몬이 얻은 마지막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 그가 그토록 헛되다고 토로한 이유 중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5절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도 있으니 (전도서 7:15)

전도자는 허무한 삶 속에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의롭게 살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망하는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살면 큰 벌을 받을 것이라 여겼는데 도리어 장수하는 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전도자로 하여금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했습니다. 때문에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그는 이 고뇌를 토로합니다. 전도서 8장 11절입니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서 8:11, 새번역)

그의 처연한 외침이 들립니다. “이 세상의 일이 참 헛되도다. 악한 자가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가운데 있구나!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고, 악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의인이 받고 있구나! 이를 보고도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전도자는 자신만이 터득한 방식으로 지혜를 전합니다.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 전도자의 지혜는 단순한 조언이나 권고가 아닙니다. >

전도자의 권고가 틀린 말입니까? 이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어린 자녀를 향해 부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이 많이 생길 거야. 공부하면서 혹시 네가 아는 것이 나오더라도, 너무 많이 아는 척하지 마. 그러면 친구들이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조금 모른 척하는 게 좋아.”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천재를 가진 부모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고향에 다녀오면 꼭 부모님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독재 타도, 민주화, 정의, 평등과 같은 이슈가 상당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혹여 자식들이 데모한다고 앞장서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부모님에게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들아, 딸아, 정의도 좋고, 평등도 좋다. 내 아들이, 내 딸이 그런 생각하는 것은 나도 찬성이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절대로 앞서지는 마라. 절대로 시위하면서 앞장서지는 말아라. 나는 네가 불행하게 되는 것은 싫다.”
‘혹시 오늘 본문 말씀이 그와 같은 논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이 지혜자의 조언은 마치 우리 아버지의 조언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조언 같기도 합니다. 아들과 딸을 아끼고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진심 어린 충고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악하니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 그저 중간쯤 살아라.” 이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사실 우리는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윤리’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과 대강 타협하며 살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도 괜찮다.”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듯 보입니다. 사탄의 말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힘을 쓰지 못하고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사랑 가득한, 그러나 힘없는 아버지, 어머니의 충고처럼 느껴지는 이 말씀….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실 그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려움을 당한 많은 의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의인이 세상을 올바르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힘만으로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물론 이 땅에 민주화도 이루어졌고,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갔던 수많은 의인의 삶은 종적도 없고 흔적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보다 못해 비리를 고발한 고발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의 힘든 삶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받았던 고난을 우리는 지켜보았습니다. 무서운 정치 세력 앞에서 홀로 섰던 외로운 투사들의 이후 피폐한 인생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도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건드리지 마라.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대강 살아라. 타협해라.”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 말씀이 그와 같은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과연 어떤 뜻이겠습니까? 그저 사랑 넘치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극단을 피합니다. >

오늘 본문의 비윤리성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보면서, 마지막 부분의 문장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도서 7:18 중)

사실 이 번역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명료하게 번역한 새번역 성경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 7:18, 새번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극단을 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악하게 살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악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의 극단 곧 악을 피합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살려는 사람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상 흐름으로는 마치 그렇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롭게 살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후 등장하는 말씀과 연결할 때 그 의미가 명료해집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전도서 7:20, 새번역)

이것이 단서입니다. 지혜자는 의인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를 추구합니다. 바름을 추구합니다. 정의를 추구합니다. 의를 쟁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는, 인간인 우리가 도저히 쟁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마라. 의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 그 의로운 노력 때문에 내가 의롭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의롭게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내가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나 때문에 의롭지 않은 세상이 될 뿐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의로움을 통하여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의가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일이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하나님을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신념이 하나님을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의와 신념, 정의를 이룩하려는 데 모든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를 피한다.”

< 인생의 행복은 완벽에 있지 않습니다. >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 규칙과 율법을 따라, 아니 보다 구체적인 규율을 따라 안식일도 지키고, 부정한 것도 만지지 않는 매우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의로움과 정의를 향한 고집은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이 거하실 장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에서도 그와 같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완벽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완전한 아내, 완전한 남편, 완전한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정말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고,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철저히 감당하는 완벽한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 ‘행복’이 없음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도리어 비난과 상처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완벽한 남편인데 무엇이 모자랍니까? 완벽한 아내인데 무엇이 모자랍니까? ‘상대방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남편 때문에 아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완벽한 아내 때문에 남편이 들어갈 자리, 그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최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 또 다른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우울증의 원인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완벽하려고,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너무 의롭게 살려다가 마음의 병이 걸린 것은 아닐까?’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다 보면,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타협’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만 잘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돼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말라. 너무 악하게 살려고도 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극단을 피한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때로는 견디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자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아, 막살자는 말이구나.” 이렇게 이해하신다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정말 불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완벽함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경험합니다. >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적절하게 타협했더라면,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 전도자의 말씀처럼, 너무 의롭게 살려다가 그만 어려움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 가지 귀중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의로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비뚤어진 정의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을 다스리며 살았지만, 그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 문제로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요셉이었다면 억울하다며 감옥에서라도 보디발의 아내를 상소하고 문제를 제기했을 텐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억울함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풀었고, 만나는 사람에게 풀어내었습니다. 총리가 된 다음에도 보디발을 잡아들이거나 그의 아내를 소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의 삶의 어렵고 굴곡진 문제들을 풀어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를 그저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 그 공간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혹시 요셉이 보복을 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창세기 50:19~20 중, 새번역)

형제들의 잘못과 불의를 바로잡기보다는, 형들의 불의와 잘못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요셉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 그 빈자리를 내어놓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너무 의로운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빈 공간을 두고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주님께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저 그런 존재입니다.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이 계실 공간을 마련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의 여정을 걸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Be Incomplete

Ecclesiastes 7:15-27

The title of my sermon today is “Be Incomplete.”
Today’s passage contains verses that are hard tounderstand.First, let’s look at verse 16. “Do not be overrighteous,neither be overwise—why destroy yourself?” This does not sound like the Bible. It does not sound moral, either. Compared to this verse, verse 17 whichreprimands evil and foolishness seems more moral: “Do not be overwicked,and do not be a fool—why die before your time?”
Verse 18 is even more difficult to understand. “It is good to grasp the oneand not let go of the other.Whoever fears God will avoid all extremes.”What does this mean? Interestingly, “the one” signifies righteousness and “the other” evil. In other words, it is telling us to live in the “grey area,” living righteously to some extent and doing evil to some extent. Don’t try to be too righteous or too evil. Just live somewhere in between.
Can you call this a moral teaching? Is this a true wisdom that the Bible is trying to teach us? Indeed, it is perplexing. Why do such verses appear in the Bible?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se complex verses, we need to study the broader context of Ecclesiastes. The book starts with these words: “‘Meaningless! Meaningless!’ says the Teacher. ‘Utterly meaningless!Everything is meaningless.’” (Ecclesiastes 1:2) Solomon, the Teacher that enjoyed just about everything in the world, describes his wisdom and labor as follows: “What do people gain from all their laborsat which they toil under the sun?Generations come and generations go,but the earth remains forever.The sun rises and the sun sets,and hurries back to where it rises.” (Ecclesiastes 1:3-5) Although Solomon was a wise and prosperous king who ruled the entire kingdom of Israel, hefound everything in this world to be meaningless. Even the greatest of men passed away, leaving nomark. Only the earth remained forever. The world went on. It did not budge despite his efforts. So, the final wisdom gained by Solomon is that all is meaningless.
Verse 15 describes in more detail why everything is meaningless. “In this meaningless life of mine I have seen both of these:the righteous perishing in their righteousness,and the wicked living long in their wickedness.” (Ecclesiastes 7:15) This explainswhy life seems futile to the Teacher. Meaninglessness is a recurrent theme in Ecclesiastes, including chapter 8 verse 11: “When the sentence for a crime is not quickly carried out, people’s hearts are filled with schemes to do wrong.”The Teacher finds life meaningless since the evil are compensated while the righteous punished. Therefore, his conclusion is not to be too righteous. Does this sound right to you? What do you think?
Parents who send their kids off toschoolfor the first time often say, “If you want to make a lot of friends, don’t try to look too smart. Kids don’t like know-it-alls.” When I was in college, Korea was under military authoritarian rule. At that time, many parents advised their children in college not to get involved in anti-government protests. They would commend their children for wanting justice and equality for Korea, but they didn’t want it to be their child leading the protests. They wanted to protect their children from ruining their lives.
Perhaps today’s scripture can be understood along these lines. Perhaps it should be understood asa piece of heartfelt advice of a loving parent genuinely concerned for his/her child’s wellbeing.
Yet, it is still hard to find an upright, Godly moral in this scripture. It still sounds as if it is telling us to compromise with the world. To live half-heartedly. It sounds like the meek advice of a loving, but powerless parent who can’t do anything about the injustices of the world. It sounds like the proverb that goes, “The cornered stone meets the mason’s chisel.”
Countless people have tried to change the world to no avail. We have seen how righteous men—for example, insiders who blew the whistle on their corrupt companies—suffered. Their struggle for justice was lonely. It destroyed their lives. So, perhaps that is why the Bible is telling us not to be too righteous, to compromise with the world. Is this truly how we should understand today’s passage?
How can we understand the seeming “immorality” of this passage? In order to fully understand it, we mustunpack the meaning of verse 18. “It is good to grasp the oneand not let go of the other.Whoever fears God will avoid all extremes.” This verse is telling us the reason why we must avoid all extremes. It is because we fear God.
On the one hand, it is not difficult to understand why we must avoid evil out of our fear of God. How can someone commit evil if he feared God? On the other hand, however, it is not easy to understand why we must avoid righteousness because we fear God. It is hard to say that a righteous mandoes not fear the Lord. An important clue that allows us to grasp the full meaning of this is found in verse 20: “Indeed, there is no one on earth who is righteous,no one who does what is right and never sins.” (Ecclesiastes 7:20) The Teacher knows that no one on earth is righteous. No one can be completely righteous. Yet, people pursue righteousness. They fight for it. But that righteousness can never be reached. Therefore, the meaning of “don’t try to be too righteous” is something like this: “Don’t think of yourself as righteous. Don’t think you are righteous because you do righteous things.”
People who try to be righteous aim to achieve justice through their righteousness. Such people do not need God. Their righteous deed is their god. Justice is their god. Their faith is their god. That is why the Bible tells us to avoid both extremes—both extreme evil and extreme righteousness. The Pharisees tried to live righteous lives, but Jesus scolded them because they stubbornly pursued righteousness, leaving no room for God.
Therefore, today’s passage is not about making compromises. It’s not about giving up on the world. It’s not about living a well-to-do life for ourselves, either.
It is about fearing God. Today’s scripture is telling us to fear God. If we truly fear God, then we must leave room for Him. Don’t be too obsessed with doing right or evil but leave room for God to do His work. The important thing for us is not righteousness or evil, but giving God space to work. Even though we may or may not understand why something is happening to us, even though we may have to just bear it, we must meditate on God’s good will. That is the wisdom that the Teacher is teaching us today.
Joseph was such a person. He tried to live a righteous life. If he had compromised with the world, he would have slept with Potiphar’s wife and escaped prison. But he didn’t. He lived righteously. And he suffered for it. Just as today’s scripture points out to us: “Do not be overrighteous, […] why destroy yourself?”
However, we find something precious in Joseph’s faith. He was not obsessed with preserving his own righteousness. He was notbent on clearing his name or correcting the injustices done to him. If I were him, I would have spent all my time in prison trying to prove my innocence, making appeals and filing suits against Potiphar’s wife. But, he didn’t. In the Bible, there is no record of him summoning Potiphar or his wife after becoming Prime Minister of Egypt.
Joseph left room for God. He was a truly God-fearing man. After Jacob’s death, Joseph’s brothers worried that Joseph might take revenge on them. But this was Joseph’s reassurance to them: “Don’t be afraid. Am I in the place of God? You intended to harm me, but God intended it for good to accomplish what is now being done, the saving of many lives.”(Genesis 50:19-20)
Dear Church, I pray that you leave room for God. Leave some empty space for Him to work. God is not looking for someone perfect. Or someone who is overrighteous. He is looking for someone who leaves room for Him to work, someone who humbly seeks His will. Don’t try to do everything yourself. Leave it to God. This is true Godliness. Dear Church, let’s not be overrighteous. Let’s leave room for God. Let’s be “incomp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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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7: 15 ~ 18

15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18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 지혜로운 삶이란 무엇입니까? >

제가 이 강단에서 설교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오래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수차례 설교를 했지만, 오늘처럼 마음이 가벼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굉장히 가벼운 마음으로 설교단에 섰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설교 제목이 “불완전하라”이기 때문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 7장 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전도서 7:16)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과연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새번역 성경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 (전도서 7:16 중, 새번역)

이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훈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다워 보이지도 않습니다. ‘과연 이 말씀에 우리가 따라야 할 중요한 가치나 교훈이 있는가?’ 하는 질문도 생깁니다. 그래도 이어지는 17절은 이해할 만합니다.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전도서 7:17)

악에 대하여,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하여 책망하는 듯한 이 말씀은 윤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의 내용 즉 “의롭게 살지도 말고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는 말씀은 조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망언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뒷부분에 또 이어집니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전도서 7:18 중)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기서 ‘이것’은 무엇이고 또 ‘저것’은 무엇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의로움’을, ‘저것’은 ‘악’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정도 의롭게 살면서 어느 정도 악하게 살아라.” 한마디로 “중간쯤 살아라.”라는 말입니다. “너무 튀지도 말고, 너무 바르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너무 악하게 살려고 하지도 말고, 그냥 대강대강 살아라.”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과연 이 내용이 정말 성경이 전하는 참 지혜일까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것일까요?

< 전도자가 인생의 지혜를 전합니다. >

이 말씀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전도서의 전체적인 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모든 것을 누렸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전도자로서 얻게 된 자신의 지혜를 이렇게 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다. 해는 여전히 뜨고, 또 여전히 져서, 제자리로 돌아가며, 거기에서 다시 떠오른다. (전도서 1:3~5, 새번역)

지혜의 왕, 번영을 이룬 왕으로 이스라엘을 호령한 솔로몬, 또 자신이 가진 지혜와 힘으로 열심히 나라를 통치한 솔로몬이었지만, 그 어떤 힘이나 지혜로도 꿈쩍하지 않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을 보며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가고, 결국엔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바닷가에서 수없이 성을 지어보고 집도 지어보지만, 파도가 몰아치면 금세 허물어지는 모래성과 같은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처럼 수없이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 보려 했지만,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도 했지만, 바닷물이 휩쓸고 가면 여전히 모래알만 남는 것처럼 허무를 경험합니다.
세상은 꿈쩍하지 않고 도도히 자기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려 보았지만, 결국 전도자가 얻은 마지막 지혜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세상의 도도한 흐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지혜를 추구했던 솔로몬이 얻은 마지막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가운데, 그가 그토록 헛되다고 토로한 이유 중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 15절입니다.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도 있으니 (전도서 7:15)

전도자는 허무한 삶 속에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의롭게 살면 다 잘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망하는 사람이 있고, 악하게 살면 큰 벌을 받을 것이라 여겼는데 도리어 장수하는 자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전도자로 하여금 인생의 허무를 느끼게 했습니다. 때문에 전도서의 여러 곳에서 그는 이 고뇌를 토로합니다. 전도서 8장 11절입니다.

사람들은 왜 서슴지 않고 죄를 짓는가? 악한 일을 하는데도 바로 벌이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전도서 8:11, 새번역)

그의 처연한 외침이 들립니다. “이 세상의 일이 참 헛되도다. 악한 자가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가운데 있구나!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고, 악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의인이 받고 있구나! 이를 보고도 어찌 헛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전도자는 자신만이 터득한 방식으로 지혜를 전합니다.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 전도자의 지혜는 단순한 조언이나 권고가 아닙니다. >

전도자의 권고가 틀린 말입니까? 이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어린 자녀를 향해 부모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학교에 들어가면 친구들이 많이 생길 거야. 공부하면서 혹시 네가 아는 것이 나오더라도, 너무 많이 아는 척하지 마. 그러면 친구들이 너를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조금 모른 척하는 게 좋아.” 물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천재를 가진 부모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 동시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요?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이 고향에 다녀오면 꼭 부모님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독재 타도, 민주화, 정의, 평등과 같은 이슈가 상당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혹여 자식들이 데모한다고 앞장서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부모님에게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아들아, 딸아, 정의도 좋고, 평등도 좋다. 내 아들이, 내 딸이 그런 생각하는 것은 나도 찬성이고 자랑스럽다. 그런데 절대로 앞서지는 마라. 절대로 시위하면서 앞장서지는 말아라. 나는 네가 불행하게 되는 것은 싫다.”
‘혹시 오늘 본문 말씀이 그와 같은 논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이 지혜자의 조언은 마치 우리 아버지의 조언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조언 같기도 합니다. 아들과 딸을 아끼고 미래를 걱정하는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진심 어린 충고 같기도 합니다. “세상이 악하니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러다 다친다. 그저 중간쯤 살아라.” 이와 같은 사랑스러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사실 우리는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윤리’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과 대강 타협하며 살라.”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도 괜찮다.”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듯 보입니다. 사탄의 말도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힘을 쓰지 못하고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면서도 그저 사랑 가득한, 그러나 힘없는 아버지, 어머니의 충고처럼 느껴지는 이 말씀….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실 그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려움을 당한 많은 의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의인이 세상을 올바르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힘만으로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갔습니다. 물론 이 땅에 민주화도 이루어졌고, 많은 것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크게 보면, 그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갔던 수많은 의인의 삶은 종적도 없고 흔적도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보다 못해 비리를 고발한 고발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의 힘든 삶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던 사람들이 받았던 고난을 우리는 지켜보았습니다. 무서운 정치 세력 앞에서 홀로 섰던 외로운 투사들의 이후 피폐한 인생을 우리는 너무 많이 목도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건드리지 마라.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대강 살아라. 타협해라.”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 말씀이 그와 같은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과연 어떤 뜻이겠습니까? 그저 사랑 넘치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극단을 피합니다. >

오늘 본문의 비윤리성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본문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보면서, 마지막 부분의 문장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도서 7:18 중)

사실 이 번역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조금 더 명료하게 번역한 새번역 성경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전도서 7:18, 새번역)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극단을 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습니다. 악하게 살면 안 되지요. 하나님이 계신데 어떻게 악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의 극단 곧 악을 피합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살려는 사람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상 흐름으로는 마치 그렇게 이해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롭게 살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이후 등장하는 말씀과 연결할 때 그 의미가 명료해집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전도서 7:20, 새번역)

이것이 단서입니다. 지혜자는 의인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완벽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의를 추구합니다. 바름을 추구합니다. 정의를 추구합니다. 의를 쟁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는, 인간인 우리가 도저히 쟁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살지 말라’는 말씀은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마라. 의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우리는 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면서 그 의로운 노력 때문에 내가 의롭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전히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의롭게 만들어낸다 할지라도, 내가 의롭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은 나 때문에 의롭지 않은 세상이 될 뿐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오늘 본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의로움을 통하여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정의가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로운 일이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하나님을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신념이 하나님을 대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의와 신념, 정의를 이룩하려는 데 모든 초점을 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를 피한다.”

< 인생의 행복은 완벽에 있지 않습니다. >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 규칙과 율법을 따라, 아니 보다 구체적인 규율을 따라 안식일도 지키고, 부정한 것도 만지지 않는 매우 의롭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의로움과 정의를 향한 고집은 있었지만, 정작 ‘하나님이 거하실 장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삶에서도 그와 같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완벽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완전한 아내, 완전한 남편, 완전한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정말 완벽한 남편, 완벽한 아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감당하고,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철저히 감당하는 완벽한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에 ‘행복’이 없음을 볼 때가 있습니다. 도리어 비난과 상처가 있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완벽한 남편인데 무엇이 모자랍니까? 완벽한 아내인데 무엇이 모자랍니까? ‘상대방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남편 때문에 아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완벽한 아내 때문에 남편이 들어갈 자리, 그 공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최근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 또 다른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우울증의 원인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완벽하려고,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너무 의롭게 살려다가 마음의 병이 걸린 것은 아닐까?’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하다 보면,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타협’을 뜻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만 잘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돼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바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말라. 너무 악하게 살려고도 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극단을 피한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때로는 견디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자가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다 해서 의롭게 사는 것을 포기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아, 막살자는 말이구나.” 이렇게 이해하신다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 정말 불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완벽함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경험합니다. >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적절하게 타협했더라면, 감옥에 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마치 오늘 전도자의 말씀처럼, 너무 의롭게 살려다가 그만 어려움을 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한 가지 귀중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의로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비뚤어진 정의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을 다스리며 살았지만, 그 때문에 힘들어하거나 그 문제로 동분서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요셉이었다면 억울하다며 감옥에서라도 보디발의 아내를 상소하고 문제를 제기했을 텐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억울함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풀었고, 만나는 사람에게 풀어내었습니다. 총리가 된 다음에도 보디발을 잡아들이거나 그의 아내를 소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의 삶의 어렵고 굴곡진 문제들을 풀어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를 그저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 그 공간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죽었을 때, 요셉의 형제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혹시 요셉이 보복을 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창세기 50:19~20 중, 새번역)

형제들의 잘못과 불의를 바로잡기보다는, 형들의 불의와 잘못을 통해 일어난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인 요셉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자리, 그 빈자리를 내어놓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너무 의로운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의로움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빈 공간을 두고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주님께로 나오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을 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그저 그런 존재입니다.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이 계실 공간을 마련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렇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신앙의 여정을 걸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6월 30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불완전하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5장, 37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전 7:15-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3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전7:16). 아무리 생각해도 교훈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같지 않습니다. 왜 이런 말씀이 성경말씀에 나오는 것일까?

설교의 요약

지혜의 왕으로, 번영을 이룬 왕으로 이스라엘을 호령했던 솔로몬이었지만,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세상을 보면서 그는 헛되다(전1:2)고 고백합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허무한 삶을 사는 동안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채로 오래 오래 사는 악인도 있음(전7:15)’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세상과 타협하며 살라는 것(전7:16) 같습니다. 마치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튀면 두들겨 맞는다는 세상의 지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본문의 비윤리성을 우리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고민과 연구에 있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7:18)과 20절의 말씀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전7:20 새번역)을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혜자는 의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의를 추구하며 쟁취하지만, 그 의는 우리가 도저히 쟁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살지 말라”는 뜻은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지 말라. 내가 의로운 일을 하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의로움을 통하여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일, 정의, 자신의 신념이 하나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을 향한 고집은 하나님이 거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의로움이나 악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지키려는 의로움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비뚤어진 정의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리, 그 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창50:19-20) 하나님께서 일 하실 수 있는 빈자리를 만들어 놓을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완벽하고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자신을 겸손히 낮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누기

1. 나의 힘과 능력으로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 가운데 그 분께서 직접 일하신 공간을 찾으십니다.

나의 삶의 자리, 가정, 일터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있습니까?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불완전합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이 인간다움임을 깨닫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님의 품에 안겨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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