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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도 각 처소에서 예배드리실 때,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신문을 보니, 8월 한 달간 교회를 통한 코로나19 감염 환자 수가 1,460여 명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두 주 동안에는 교회를 통한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참담한 심정을 맛봐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혐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주소, 즉 세상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는가? 세상의 빛으로 살고 있는가? 혹시 우리만의 공허한 구호는 아니었는가?’라는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목회자인 저는 절망과 좌절 대신 ‘희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단계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다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과격하고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확신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19와 함께 이 땅에 만연한 이단의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내세적이고 종말론적인 열광주의자들의 모습도 확인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 현세적이며 정치적인 열광주의자들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정치적 과잉 시대에 놓여 있는지, 지금 얼마나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 보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마스크로 막으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던 우리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진리라는 이름 아래, 세상 사람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려 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스크를 통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맡게 하셨습니다. 내 속의 썩은 냄새를 맡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자 교회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본질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로, 하나님의 귀한 군사로, 하나님의 참된 제자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현실’, 곧 ‘주님의 제자 됨을 증명하지 못하는 현실’로 진단했습니다. 그 원인을 ‘사랑의 열매’가 없는 삶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 ‘주님의 말씀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열매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며, 우리의 제자 됨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면, 그 사랑의 표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칭해 주신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아가고 접촉해야 하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 빛과 소금 된 삶이란 착한 행실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의 현장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현장이라면, 그 답 또한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칭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그분을 드러내는 존재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제자들, 교회,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교회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또 16절에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행동, 행실, 행위와 같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산상수훈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유명한 팔복이 서두입니다. 그리고 팔복 뒤에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두 번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 세 번째 단락인데,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율법의 내용을 하나씩 짚어 가시며 재해석 해 주십니다. 이어 7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예수님이 또다시 행실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행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행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4)
이어 26절에서 주님은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6)
여기서도 행실, 행위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한 사람과 행동하지 않은 사람에 관한 비교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여기서도 행실, 행동, 행위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어떤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귀신을 내쫓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는데, ‘주여,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주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착한 행실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불법을 행한 것이라고 간주하십니다.
< 동기와 의도까지 선해야 진실로 착한 행실입니다. >
그렇다면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착한 행실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중)는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산상수훈의 본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착한 행실을 중심으로 산상수훈을 분석하면, 앞뒤로 그 행위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두 부분인 5장 3~12절까지는 팔복 말씀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관한 축복의 말씀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은 착한 행실이 어떤 동기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전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동기가 불손한 행위에 마음이 상하곤 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보기 좋은 행동을 할지라도 그 행위를 착한 행실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동기로 그 행위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착한 행위의 동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이 가난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애통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실이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여야 합니다. 화평케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는 행위여야만 합니다. 의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는 행위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행실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착한 행실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만이나 우월감이나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나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이나 분열을 일으키는 의도나 정돈되지 않은 복잡한 생각으로 시작되는 행위는 결코 착한 행실이 될 수 없습니다. 바르지 않음이나 의롭지 않음이나 불의를 도구로 이루어지는 행위 역시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착한 듯이 보이는 행동을 많이 했을지 모릅니다. 선행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일을 착한 행실이라고 보지 않을까요? 왜 우리가 한 모든 일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요? 원인이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의 동기가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의도와 동기까지 진정으로 선했던 것일까요? 혹시 우리의 봉사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우리의 영향력을 높이고 과시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말씀 이후에 율법을 재해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새롭게 정리해 주시기 전에, 이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이 말씀 후에 주님은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주님의 재해석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토록 준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착한 행실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이 말씀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고수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착한 행실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형제에게 가서 화목한 뒤에 돌아와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아래 더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고수해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강행해야겠습니까? 혹시 우리의 이 신념이 지고 싶지 않다는 승부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어떤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은 아닙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황에서, 또 감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행위를 과연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실까?’라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안에 진정한 착한 행실이 없었기에, 그동안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성도가 됩시다. >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시며, 우리가 실행해야 할 착한 행실의 모범을 알려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재해석하실 때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을 재해석하실 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발하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주라’고 명하십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재해석하시면서는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시되, 보다 날카롭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칼날을 더 날카롭게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칼날을 자신에게 들이대라고 명령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먼저 반성하며, 칼날을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착한 행실은 동기도 좋아야 하고, 내용도 좋아야 합니다. 내용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악을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착한 행실입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또는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들, 원망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며, 참 사랑을 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참으로 힘들어하고 어려움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쏟아지는 비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러분에게 또다시 그리스도인의 역할만 강조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장, 우리의 삶의 자리를 직시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봅시다. 진정으로 착한 행실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You Are the Light and the Salt
Matthew 5:13-16
Last week, I talked about how our current state failed to glorify God and prove ourselves as His disciples. And the solution was love. To bear the fruit of love, we must remain in Him and His Word.Last week’s message urged us to examine ourselves to see if we really are dwelling in Him.
In today’s message, I will continue to answer last week’s question “How can we give glory to God?” I want to talk about another way to glorify Him—more specifically, how to make the world glorify Him.
In the past two weeks, the Korean Church has been under fire. The current harsh attacks on it by the world are probably unprecedented. There have been, of course, misunderstandings and hidden intentions of the government and the press, but still the Koran Church has been dealt a big blow.
The coronavirus is demanding us to live a new normal, a new way of life in a new order. The Church will have the hardest time adjusting to this new era.
Who are we to the world? Who must we be to the world? Our Lord taught us to be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This has been an important self-portrait of the Church and Christians.
But how are we seen by the world today? It appears we have lost our saltiness and become useless. We are trampled by the world around us. How has it come to this? A lot of Christians are now disappointed in themselves. I can feel their deep frustration and sadness at what the world now thinks of the Church.
Yet, as a pastor, I see hope. I believe the coronavirus is God’s active and radical way of rebuilding the Korean church. This conviction continues to grow even now. I believe the situation we are currently facing is not God’s judgement, but His invitation. Our good God is inviting us to go to the next level.
Through Covid-19 God revealed how pervasive heresy has become in Korea. It was revealed that heretics are transmundane, eschatological fanatics. They abused “the end day” to create fanatics. But God then revealed an earthly, political fanaticism within us, the Korean Church. Is this the kind of church that God wants? God seems to be asking this question to the Korean Church.
Then He shut us up. With masks. We had been talking too much. We had been teaching too much doctrine to the world in the name of faith and truth. But God covered our mouths. He made us smell our own rotting stench filling our masks.
Now, God is calling us to go back to the essence of faith. He is calling us to be the Church and the saints that we should be and to give glory to God.
Then how can we be the salt and the light of theearth? How can we glorify Him? Let’s read Matthew 5:16 from Today’s Scripture: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 16)
Interestingly, our Lord calls God “your Father in heaven.” Our Father in heaven is invisible to the world. But who makes Him visible? Who makes Him be seen to the world? Us. Christians and the Church.
But what is the reality? We have made our invisible God detestable in the world’s eyes. The world now mocks and despises Him because it sees us, the Church.
An important word in verse 16 is “good deeds.” Jesus ordered us to make the world see our good deeds and glorify God.
Recently, we have seen how theKorean Church and Christians have lost touch with the world. How should we approach the world? Our Lord tells us that it must be done with good deeds. Then what is good deeds? What must we do specifically?
Conduct, deeds, and good deeds are critical and constant themes of the Book of Matthew. Good deeds is also a central topic of our Lord’s Sermon on the Mount.
The Sermon on the Mount spans from Matthew chapter 5 to chapter 7. It begins with the eight blessings, which starts with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Then comes Today’s Scriptureon being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and giving glory to God through our good deeds.Jesus then talks about how He came not to abolish the Law but to fulfill it, giving a fresh interpretation of the Law. This sermon ends in chapter 7.
At the very end of this sermon, the matter of good deeds is once again emphasized. Let’s read Matthew 7:21: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Matthew 7: 21)
The importance of deeds is again emphasized for the last time in the parable of the house built on the rock, the last part of the Sermon on the Mount. In Matthew 7:24 Jesus says, “Therefore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puts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on the rock.” (Matthew 7:24) In verse 26, He says again, “But everyone who hears these words of mine and does not put them into practice is like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on sand.” (Matthew 7:26)
Jesus even said the following:“Many will say to me on that day, ‘Lord, Lord,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in your name drive out demons and in your name perform many miracles?’Then I will tell them plainly,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 (Matthew 7:22-23)
Therefore,an important criterionof our Lord’s judgement in the last day is our deeds. In the verse above, Jesus tells us that casting out demons and performing miracles in His name are not the good deeds He wants.
Then what is good deeds? We can interpret and break down the Sermon on the Mount, focusing onJesus’ teaching to make the world see our good deeds and glorify our Father in heaven. By doing this, we will find that two different perspectives on good deeds appear before and after Today’s Scripture.
In the passage preceding it—that is, in Jesus’ sermon on the 8 blessings (Matthew: 3-12)—our Lordtalks about the motives of good deeds. In other words, the motive is more important that the deed itself. The motive is the reason behind an action.
Even when somebody apparently does a good deed, we are offended if we sense an ulterior motive. In such a case, we don’t regard that deed as a good deed. This is what Jesus is getting at. Our Lord is stressing that a good deed is one done by someone poor in spirit.
A good deed coms from a mourning heart. It must begin from a gentle and compassionate heart. It must stem from a pure and clean heart. It must be done with an intent to make peace. To uphold righteousness, someone who does a good deed must even be prepared to be persecuted. In other words, a good deed must come from a good heart.
A deed that is born from pride, a sense of superiority, self-interest, a desire for revenge, an intent to stir conflict, or impure and complex thoughts is not a good deed. Anact that uses unrighteousness or wrongdoing is not a good deed, either.
We Christians may have done deeds that “appear” good, but have failed to show to the world genuinely gooddeeds. We must reflect on the motives of our “good deeds.”
Then, in the passage following Today’s Scripture, our Lord reinterprets the Law. This is what He says in Matthew 5:17:“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Matthew 5:17)
Jesus goes on togive a detailedreinterpretation of the Law. His fresh interpretation of “you shall not murder” in verse 21 provides us with a critical perspective. Jesus says that although you have heard murderers will face judgement, anyone who is angry at a brother or sister will face judgement.
In addition to this amazing teaching, He says,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or sister has something against you,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them;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Some say that, to Christians, worship is life. They cannot give it up. That is why Christians must gather for worship even in the pandemic.Such people say that Christians cannot give up their faith—no matter what others say—even if it means spreading thecoronavirus.
However, our Lord orders us to be reconciled with our brothers first, and then to come and offer our gifts, if we remember that they have something against us.
If this is the Lord’s teaching, how can we gather for worship, risking more infections and hatred from the world, when we can worship online? Would this be “the good deed” that God wants from us? I believe that we failed to be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world because we lack good deeds.
In the Sermon on the Mount, our Lord talks about a proactive life attitude. He tells us not to fight our enemies and forbids us to take an eye for an eye. He teaches us to love our enemies and our neighbors, instead of hating them. This is the good deed.
The motives must be good, and the specific actions must be more meaningful, too. We must trust God to repay evil. We must love even our enemies. This is the good deed that Jesus wants from us. A good deed is to be reconciled with our brothers and to love our enemies.
Are we really being the light and the salt of the earth through our good deeds? In this pandemic, let us re-establish the right attitude we must take toward the world.
Our Lord speaks to us: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glorify your Father in heaven.” (Matthew 5:16)
마태복음 5: 13 ~ 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도 각 처소에서 예배드리실 때,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신문을 보니, 8월 한 달간 교회를 통한 코로나19 감염 환자 수가 1,460여 명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지난 두 주 동안에는 교회를 통한 확진자가 속출하면서 참담한 심정을 맛봐야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혐오의 시선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주소, 즉 세상 사람들이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시 생각해 봅니다. ‘과연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는가? 세상의 빛으로 살고 있는가? 혹시 우리만의 공허한 구호는 아니었는가?’라는 성찰과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동시에 목회자인 저는 절망과 좌절 대신 ‘희망’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단계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우리 한국 교회를 다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과격하고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확신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청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코로나19와 함께 이 땅에 만연한 이단의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내세적이고 종말론적인 열광주의자들의 모습도 확인하게 해 주셨습니다. 또 현세적이며 정치적인 열광주의자들도 보게 하셨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얼마나 정치적 과잉 시대에 놓여 있는지, 지금 얼마나 무너져 내리고 있는지 보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을 마스크로 막으셨습니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던 우리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진리라는 이름 아래, 세상 사람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려 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스크를 통해 내 속에서 올라오는 악취를 맡게 하셨습니다. 내 속의 썩은 냄새를 맡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자 교회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본질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존재로, 하나님의 귀한 군사로, 하나님의 참된 제자로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현실’, 곧 ‘주님의 제자 됨을 증명하지 못하는 현실’로 진단했습니다. 그 원인을 ‘사랑의 열매’가 없는 삶에서 찾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사랑의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 ‘주님의 말씀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게 맺어진 열매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며, 우리의 제자 됨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세상에 나아가야 한다면, 그 사랑의 표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칭해 주신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아가고 접촉해야 하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 빛과 소금 된 삶이란 착한 행실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의 현장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는 현장이라면, 그 답 또한 오늘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칭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그분을 드러내는 존재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제자들, 교회,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이 땅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교회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또 16절에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표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것인가? 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 어떻게 관계를 회복하며 하나님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해답은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행동, 행실, 행위와 같은 표현은 마태복음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포함된 산상수훈의 중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그 유명한 팔복이 서두입니다. 그리고 팔복 뒤에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이 부분을 두 번째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이 세 번째 단락인데,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며, 율법의 내용을 하나씩 짚어 가시며 재해석 해 주십니다. 이어 7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예수님이 또다시 행실에 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행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산상수훈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행실이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4)
이어 26절에서 주님은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태복음 7:26)
여기서도 행실, 행위가 등장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동한 사람과 행동하지 않은 사람에 관한 비교가 나타납니다. 주님은 심지어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여기서도 행실, 행동, 행위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어떤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귀신을 내쫓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했는데, ‘주여, 주여’라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주님께서 그들의 행실을 착한 행실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불법을 행한 것이라고 간주하십니다.
< 동기와 의도까지 선해야 진실로 착한 행실입니다. >
그렇다면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착한 행실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중)는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산상수훈의 본의를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착한 행실을 중심으로 산상수훈을 분석하면, 앞뒤로 그 행위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두 부분인 5장 3~12절까지는 팔복 말씀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에 관한 축복의 말씀처럼 보이지만, 이 말씀은 착한 행실이 어떤 동기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전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동기가 불손한 행위에 마음이 상하곤 합니다. 상대가 아무리 보기 좋은 행동을 할지라도 그 행위를 착한 행실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한 행실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동기로 그 행위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착한 행위의 동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이 가난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애통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동이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실이어야 합니다. 청결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여야 합니다. 화평케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되는 행위여야만 합니다. 의를 지켜내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는 행위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착한 행실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착한 행실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만이나 우월감이나 이득을 얻으려는 의도나 원수를 갚으려는 생각이나 분열을 일으키는 의도나 정돈되지 않은 복잡한 생각으로 시작되는 행위는 결코 착한 행실이 될 수 없습니다. 바르지 않음이나 의롭지 않음이나 불의를 도구로 이루어지는 행위 역시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착한 듯이 보이는 행동을 많이 했을지 모릅니다. 선행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일을 착한 행실이라고 보지 않을까요? 왜 우리가 한 모든 일을 인정해 주지 않을까요? 원인이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의 동기가 잘못된 건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의도와 동기까지 진정으로 선했던 것일까요? 혹시 우리의 봉사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우리의 영향력을 높이고 과시하려는 목적은 아니었는지 돌아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말씀 이후에 율법을 재해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새롭게 정리해 주시기 전에, 이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17)
이 말씀 후에 주님은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한 주님의 재해석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토록 준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착한 행실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며,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이 말씀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는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현장 예배를 고수하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착한 행실인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형제에게 가서 화목한 뒤에 돌아와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이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아래 더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고수해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강행해야겠습니까? 혹시 우리의 이 신념이 지고 싶지 않다는 승부욕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는 어떤 우월감을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은 아닙니까?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상황에서, 또 감염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들으면서까지 현장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러한 행위를 과연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하실까?’라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안에 진정한 착한 행실이 없었기에, 그동안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성도가 됩시다. >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시며, 우리가 실행해야 할 착한 행실의 모범을 알려 주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재해석하실 때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율법을 재해석하실 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고발하고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도 내주라’고 명하십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재해석하시면서는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을 해석하시되, 보다 날카롭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칼날을 더 날카롭게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칼날을 자신에게 들이대라고 명령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칼날을 들이댈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먼저 반성하며, 칼날을 자신에게 적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한 행실이 무엇입니까? 착한 행실은 동기도 좋아야 하고, 내용도 좋아야 합니다. 내용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악을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착한 행실입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또는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들, 원망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착한 행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며, 참 사랑을 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참으로 힘들어하고 어려움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쏟아지는 비난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러분에게 또다시 그리스도인의 역할만 강조한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장, 우리의 삶의 자리를 직시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지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봅시다. 진정으로 착한 행실을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2020년 8월 3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빛이요 소금이라” (마 6:13-1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4장, 21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 6:13-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3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존재인가?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하고,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지난 두 주 동안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참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하나님은 코로나 19를 통해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시기 원하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설교의 요약
그럼,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원래 우리의 역할인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16절에 주목해야 할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는 최근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세상과는 참 많은 거리가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향하여 다가갈 수 있을까요? 주님은 착한 행실로 다가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착한 행실이란 무엇일까요?
‘행위, 행실’은 마태복음에 도도하게 흐르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7장에서 행위와 행실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마 7:21, 7:24, 7:26 등). 우리는 ‘착한 행실’을 중심으로 산상수훈을 해석하면 그 의미가 깊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산상수훈은 8복으로 시작됩니다. 8복 말씀은 ‘착한 행실의 동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애통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착한 행동이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잡하지 않은 청결한 마음으로, 화평케 하려는 의도를 가진 마음으로, 의를 지켜내는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착한 행실’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도와 동기를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8복 뒤의 율법을 재해석하십니다. 21절의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재해석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우리에게 예배는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배를 드리려다가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을 이루고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보다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말씀하십니다. 동기도 좋아야 하고, 내용도 깊어져야 합니다. 악을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착한 행실입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는 과연 착한 행실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요?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취해야 할 삶의 방향을 다시 정립해야겠습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나누기
1. 교회가 잃어버린 ‘착한 행실’은 무엇일까요?
2. 내가 예배하기 전에 형제에게 원망을 듣는지 아니 듣는지, 어떻게 나는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음을 회개합니다.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