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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일서 4: 9 ~ 11

김경진 목사

2019.04.14

<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

어느 교회 목사님 사무실에 초라한 행색의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몸은 건장해 보였지만,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눈빛은 매서웠고, 여기저기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만 같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마주 앉자 그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유치장에 오셔서 설교하실 때 그곳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때 목사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과 16범입니다. 어려서부터 늘 그늘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유치장을 나서면 새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여러 계획도 세웠습니다.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옛 친구들도 멀리하고, 직업도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저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전과자’라고 하면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게 일할 수 있는 곳을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그의 태도와 목소리는 비장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감했습니다. 어쩌면 전과 16범이라는 이 사람 앞에서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선뜻 일자리를 소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고의로 접근한 것인지 사기꾼인지도 모르고, 더욱이 소개해 줄 만한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더니 행동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목사입니까? 당신이 설교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교회가 얼마나 사랑합니까? 교회에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합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그 날 나에게 감명을 줬던 당신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줄 알았는데, 다 소용없습니다. 모두 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부모에게서 버려졌습니다. 보호소에서 자랐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성장해서 혼자 무엇이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도벽에 빠졌고,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결혼도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와 아이는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나는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런 말장난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도, 이 교회도 모두 가짜입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다 말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전과 16범인 그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하셨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늘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의심이 생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 고난의 연속인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

지난 수요일은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꼭 100일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길고 무게가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며 기쁜 일도 많았지만, 가슴 한편을 힘들게 하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교우들의 어려운 사정을 주님께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저의 페이스북에 짤막한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우리 교회 영아부 부장님의 글이었습니다. 작년 2월 ‘아이의 눈이 사시가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던 부모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오민서, 병명은 뇌종양이었습니다. 아이는 현재 5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난 4월 4일, 건강이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 요청과 함께 감사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도하고 있지만, 그 글을 보며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과 통회하며 함께 기도하는 것이 목회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기도 제목 가운데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뇌암 판정을 받고 33번 방사선 치료 중인 젊은 딸을 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낙상사고를 당한 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결국 오른쪽 몸 전체를 못 쓰게 된 피아니스트 딸을 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경제적 파산 위기를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도 있었습니다. 20대 후반 레지던트 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마비가 된 지 24년…. 그동안 의료사고도 당하고, 이제는 암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사연도 올라왔습니다.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지금까지 장기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8살 소년의 이야기도 올라왔습니다. 11년 전 남편을 잃고 최근 다시 아들을 잃었습니다. 며느리는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최선을 다하던 사업까지 문을 닫게 되어 소망이 끊어진 성도님의 사정도 올라왔습니다. 남편과의 이혼,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 은행 대출 상환의 독촉, 건강 악화 등 환난이 한꺼번에 몰려와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사정도 올라왔습니다. 폐암, 담낭암, 대장암, 유방암, 췌장암, 뇌종양, 들어볼 수 있는 모든 병명은 다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사정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해 매일 울며 하나님께 정의를 구하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도 그랬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두 분의 성도님을 백혈병으로 잃었습니다. 젊은 청년을 심장마비로 잃었습니다. 힘 있게 사업하던 분들이 사업을 접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께 이런 불평을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늘 이런 식이시군요. 지난번에도 병을 고쳐 주지 않으시더니, 이번에도 같은 병으로 또 다른 성도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 한 번쯤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됩니까? 남은 아이들, 남은 부인, 가족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사랑이 많으시다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모질게 하십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우스갯소리 중에 “교회에 나가면 평균 79세에 죽고, 교회에 안 나가면 평균 79살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거나, 안 나가거나의 차이가 79‘세’와 79‘살’의 차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 비아냥거리며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결국 똑같이 죽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긍휼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을 향해 대들던 전과자처럼, 고난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절규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까?”

< 하나님은 사랑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1장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2 중)

구약은 창세기로 시작해 말라기로 마무리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말씀을 요약하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것이 구약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항변하듯이 외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항변하던 전과 16범 이야기는 우리 교회 원로목사님이 설교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아마 우리 소망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 같습니다. 곽 목사님은 당시 그 전과범을 호통치며 다
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모를 뿐이오! 사랑을 받고도 모르는 당신이 문제요. 당신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내가 말해 볼까요? 당신은 사랑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오. 당신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없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누군가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도 당신에게 사랑을 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높은 데서 떨어지지 않게 보호해 주고, 매일 씻겨 주며, 밥을 먹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아내가 있었습니다. 자식도 있었습니다. 모두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단지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척박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랑을 알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말라기 3장 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라기 3:1)

이 말씀은,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큰 사건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즉 자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까?”라는 절규가 메아리처럼 울리던 그 시대가 흘러가고, 마침내 주님이 오신 그때를 신약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는 말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항변했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말라기는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 포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너무나 힘듭니다.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 없고, 신앙도 지키기 어려운 이 사막 같은 세상이 너무 괴롭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말라기가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 즉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세대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선인과 악인, 병자와 건강한 자, 남자와 여자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악과 죽음, 멸망이 극복되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건강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업 번창 여부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 곧 그분의 수난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상황이나 여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시고 이 세상을 넘어서는 희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희망입니다. 이 희망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다시는 살아 있는 몸으로 그 성을 나올 수 없음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의 환호가 들립니다. 그들의 외침이 이내 다른 외침으로 바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호산나!” 하고 외친 이들은 그 진정한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님은 그 외침을 진실 된 피조물의 요청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표식인 것입니다.

< 사랑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

인생을 살면서 참 안타깝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마다 주님은 십자가 지신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 선명한 못 자국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틀 후면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난 지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476명의 승객을 태운 배가 그만 좌초해 304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배에는 단원고의 어린 학생이 324명이나 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왜 일어났을까?’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 유족이라면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바다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내 딸을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도 내 아들을 잃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며 죽어간 모든 이들을 향한, 또 모든 이들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지입니다.
세월호 사건뿐이겠습니까? 지난 3월 26일은 천안함 사건으로 희생된 40여 명의 아들들을 기리는 날이었습니다. 또 얼마 전 우리는 강원 지역의 산불 재해를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고,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승객을 가득 태우고 떠난 비행기가 추락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잃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전국 각지 병원에서는 이런저런 암과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고, 대학 입학을 축하하며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가스유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예비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말로 그들을 위로하며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희망을 전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2019년 수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을 보내면서, 아들을 모함과 배신, 폭력과 조롱, 모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자리로 들여보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깊이 묵상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선포하길 원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십자가! 수난주간에 그 십자가를 묵상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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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 9 ~ 11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니까? >

어느 교회 목사님 사무실에 초라한 행색의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몸은 건장해 보였지만,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모습입니다. 눈빛은 매서웠고, 여기저기 문신이 새겨져 있을 것만 같은 사람입니다. 목사님이 마주 앉자 그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이 유치장에 오셔서 설교하실 때 그곳에 있던 사람입니다. 그때 목사님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과 16범입니다. 어려서부터 늘 그늘진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새롭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유치장을 나서면 새 생활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여러 계획도 세웠습니다. 유치장에서 나오자마자 옛 친구들도 멀리하고, 직업도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저에게 일자리를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전과자’라고 하면 얼굴색이 달라지면서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게 일할 수 있는 곳을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그의 태도와 목소리는 비장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난감했습니다. 어쩌면 전과 16범이라는 이 사람 앞에서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선뜻 일자리를 소개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이 고의로 접근한 것인지 사기꾼인지도 모르고, 더욱이 소개해 줄 만한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사님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더니 행동이 난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목사입니까? 당신이 설교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교회가 얼마나 사랑합니까? 교회에 사랑이 있습니까? 아니,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합니까? 다 거짓말입니다. 그래도 혹시 그 날 나에게 감명을 줬던 당신만큼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 줄 줄 알았는데, 다 소용없습니다. 모두 다 거짓말쟁이들입니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부모에게서 버려졌습니다. 보호소에서 자랐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성장해서 혼자 무엇이라도 해 보고 싶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도벽에 빠졌고, 전과자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결혼도 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내와 아이는 다 도망가고 없습니다. 나는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런 말장난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도, 이 교회도 모두 가짜입니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다 말뿐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전과 16범인 그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하셨겠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늘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의심이 생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 고난의 연속인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

지난 수요일은 제가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꼭 100일째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길고 무게가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며 기쁜 일도 많았지만, 가슴 한편을 힘들게 하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 교우들의 어려운 사정을 주님께 아뢰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전 저의 페이스북에 짤막한 글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우리 교회 영아부 부장님의 글이었습니다. 작년 2월 ‘아이의 눈이 사시가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던 부모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은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오민서, 병명은 뇌종양이었습니다. 아이는 현재 5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번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지난 4월 4일, 건강이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 요청과 함께 감사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도하고 있지만, 그 글을 보며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과 통회하며 함께 기도하는 것이 목회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찌 이뿐이겠습니까? 기도 제목 가운데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습니다. 뇌암 판정을 받고 33번 방사선 치료 중인 젊은 딸을 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몇 년 전 낙상사고를 당한 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결국 오른쪽 몸 전체를 못 쓰게 된 피아니스트 딸을 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경제적 파산 위기를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도 있었습니다. 20대 후반 레지던트 과정 마지막 단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마비가 된 지 24년…. 그동안 의료사고도 당하고, 이제는 암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사연도 올라왔습니다.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고 지금까지 장기간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8살 소년의 이야기도 올라왔습니다. 11년 전 남편을 잃고 최근 다시 아들을 잃었습니다. 며느리는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갔습니다. 최선을 다하던 사업까지 문을 닫게 되어 소망이 끊어진 성도님의 사정도 올라왔습니다. 남편과의 이혼,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 은행 대출 상환의 독촉, 건강 악화 등 환난이 한꺼번에 몰려와 힘들어하는 성도들의 사정도 올라왔습니다. 폐암, 담낭암, 대장암, 유방암, 췌장암, 뇌종양, 들어볼 수 있는 모든 병명은 다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사정이었습니다. 너무나 억울한 일을 당해 매일 울며 하나님께 정의를 구하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의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제가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도 그랬습니다. 어린 자녀를 둔 두 분의 성도님을 백혈병으로 잃었습니다. 젊은 청년을 심장마비로 잃었습니다. 힘 있게 사업하던 분들이 사업을 접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아야 했습니다.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께 이런 불평을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늘 이런 식이시군요. 지난번에도 병을 고쳐 주지 않으시더니, 이번에도 같은 병으로 또 다른 성도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 한 번쯤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면 안 됩니까? 남은 아이들, 남은 부인, 가족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사랑이 많으시다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모질게 하십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기독교를 비방하는 우스갯소리 중에 “교회에 나가면 평균 79세에 죽고, 교회에 안 나가면 평균 79살에 죽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거나, 안 나가거나의 차이가 79‘세’와 79‘살’의 차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 비아냥거리며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소용이냐? 결국 똑같이 죽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긍휼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을 향해 대들던 전과자처럼, 고난당한 사람들은 이렇게 절규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까?”

< 하나님은 사랑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1장 2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1:2 중)

구약은 창세기로 시작해 말라기로 마무리됩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서 하나님은 구약의 말씀을 요약하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것이 구약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 항변하듯이 외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항변하던 전과 16범 이야기는 우리 교회 원로목사님이 설교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아마 우리 소망교회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 같습니다. 곽 목사님은 당시 그 전과범을 호통치며 다
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오! 당신이 모를 뿐이오! 사랑을 받고도 모르는 당신이 문제요. 당신이 얼마나 사랑을 받았는지 내가 말해 볼까요? 당신은 사랑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세상에는 사랑이 없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이미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오. 당신이 어떻게 태어났습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 없이 태어날 수 있었습니까? 당신은 태어나자마자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까? 자식도 아닌 아이에게 젖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당신은 누군가의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닐 때도 당신에게 사랑을 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높은 데서 떨어지지 않게 보호해 주고, 매일 씻겨 주며, 밥을 먹여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아내가 있었습니다. 자식도 있었습니다. 모두 당신을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단지 당신이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우리의 눈이 열리면,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척박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랑을 알지 못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다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말라기 3장 1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말라기 3:1)

이 말씀은, 앞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큰 사건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즉 자신의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실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까?”라는 절규가 메아리처럼 울리던 그 시대가 흘러가고, 마침내 주님이 오신 그때를 신약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는 말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항변했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말라기는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 포로의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너무나 힘듭니다.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 없고, 신앙도 지키기 어려운 이 사막 같은 세상이 너무 괴롭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말라기가 던지는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 즉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이 땅에 오신 사건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 사랑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세대와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선인과 악인, 병자와 건강한 자, 남자와 여자를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악과 죽음, 멸망이 극복되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4장 9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건강 여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업 번창 여부에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십자가 곧 그분의 수난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상황이나 여건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시고 이 세상을 넘어서는 희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희망입니다. 이 희망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다시는 살아 있는 몸으로 그 성을 나올 수 없음을 아셨음에도, 주님은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호산나, 호산나!” 외치는 사람들의 환호가 들립니다. 그들의 외침이 이내 다른 외침으로 바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칠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호산나!” 하고 외친 이들은 그 진정한 의미조차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주님은 그 외침을 진실 된 피조물의 요청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표식인 것입니다.

< 사랑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

인생을 살면서 참 안타깝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묻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게 사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때마다 주님은 십자가 지신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그 선명한 못 자국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이틀 후면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난 지 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그 날,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476명의 승객을 태운 배가 그만 좌초해 304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배에는 단원고의 어린 학생이 324명이나 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이 왜 일어났을까?’라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아마 유족이라면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바다에서 아들을 잃었습니다. 내 딸을 바다에서 잃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도 내 아들을 잃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며 죽어간 모든 이들을 향한, 또 모든 이들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지입니다.
세월호 사건뿐이겠습니까? 지난 3월 26일은 천안함 사건으로 희생된 40여 명의 아들들을 기리는 날이었습니다. 또 얼마 전 우리는 강원 지역의 산불 재해를 경험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모든 것을 잃었고, 앞으로의 삶을 걱정해야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승객을 가득 태우고 떠난 비행기가 추락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잃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전국 각지 병원에서는 이런저런 암과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있고, 대학 입학을 축하하며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가스유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예비 대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무슨 말로 그들을 위로하며 어떤 희망을 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희망을 전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2019년 수난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을 보내면서, 아들을 모함과 배신, 폭력과 조롱, 모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자리로 들여보내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깊이 묵상하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구원을 노래합니다. 이 고백을 여러분과 함께 선포하길 원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를 구원하신 주님, 하나님의 그 사랑, 그 십자가! 수난주간에 그 십자가를 묵상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9년 4월 1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0장, 20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일4:9-1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1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며 서로를 격려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의심이 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나님께 항변하듯 말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절규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설교의 요약

그러나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나는 결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사랑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모를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눈이 열리면 주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척박하고 힘들고 고통스런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보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살아하셨다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3장 1절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주실 큰 계획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신약성경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말라기가 물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최고 행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은 정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선물이었습니다. 바로 영생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진정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요일4:9, 롬5:8).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상황과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생명으로 이끌어 내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이 세상을 넘어서는 희망을 갖도록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호산나 소리를 들으시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표적입니다. 못 자국이 선명한 그 손이,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며, 죽어간 모든 이들을 향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리셨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쁨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합3:17-18). 십자가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는 한 주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나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나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다른 이들에게 십자가를 소개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담긴 크신 사랑을 깨닫고, 발견할 수 있도록 서로를 축복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사랑의 자취를 볼 수 있게 하오소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친히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보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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