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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 8 ~ 10
8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보여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로 말미암음이라 하고
9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
해마다 절기가 되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우크라이나 일러스트 작가가 쓴 ‘전쟁일기’는 가족의 깊은 연대를 보여 줍니다.>
가족이 무엇일까요? 가족만큼 끈끈하고 뜨겁고 강력한 연대가 있을까요? 전쟁도 끊을 수 없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깊은 사랑의 연대가 바로 가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올가 그레벤니크(Olga Grebennik)의 가정은 일상 속에서 느슨한 것처럼 보이는 가정의 연대를 경험하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큰 위기가 닥치자 그녀의 가정은 강력한 연대로 바뀝니다. 위기 속에서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죠.
아이의 팔뚝에 이름을 새기고 전화번호를 적을 때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니 자신의 팔에도 같은 방식으로 이름을 적고 생년월일을 새겨 넣을 때 그녀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죽은 다음에라도 가족의 품에 안기기를 원하는 소원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요? 동원령으로 국경을 넘을 수 없는 남편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포옹을 아내와 했을 때, 울고 있는 아이들을 차례로 안아 주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버스를 타고 전장으로 나가야만 하는 아빠의 마음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그의 뒤로 점점 떠나가는 버스를 보는 올가, 남겨진 두 아이들의 손을 잡고 막막한 국경선에서 울고 있는 한 어머니이자 연약한 아내였던 올가를 생각해 봅니다.
올가 그레벤니크, 그녀는 서른 중반의 전도유망한 우크라이나의 일러스트 작가입니다. 그녀가 삽화를 그린 동화책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그녀는 아홉 살 아들과 네 살 된 딸을 데리고 아파트 지하실로 대피합니다. 그늘지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감정을 추스르고자 그림일기를 적어 나가기 시작하죠. 그렇게 보름 정도 작성한 일기장이 약 3주 전, <전쟁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작가가 SNS에 올린 몇 장의 그림을 한국의 한 출판사가 보면서 세계 최초로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책에는 피난민으로 전락한 그레벤니크 가족과 이웃의 일상이 담겨 있습니다. 폭격 소리에 다급하게 짐을 싸던 모습, 기계 설비로 가득한 지하실에서 토끼 인형을 쥐고 잠이 든 딸의 모습, 피난 중에도 새 친구를 사귀며 두려움을 이겨내는 아들의 모습, 어둑한 지하 공간에서도 밝은 기운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 온몸으로 절망하는 황망한 표정의 자화상까지…. 전쟁 전에 올가의 그림은 화려한 색감과 판타지의 한 장면 같은 그림체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그녀의 그림은 무채색의 크로키에 가깝습니다. 정교하고 날렵했던 펜 선은 황급하고 투박한 연필 자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전쟁 아흐레 되던 날에 그레벤니크가 피난길에 오릅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택시를 부릅니다. 훗날 택시가 오기까지 10분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씁니다. “내 인생 35년을 모두 버리는 데 고작 10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그레벤니크는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 근처 도시인 르비우에 당도합니다. 그러나 남편은 국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남자가 계엄령으로 출국이 금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결국 그레벤니크 가족은 국경에서 생이별을 합니다. 그리고 피난 열차에서 다시 씁니다. “열차는 이 세상의 모든 눈물로 가득하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마 볼 수 없는 실상입니다.
올가가 그린, 이름과 생년월일과 전화번호가 적힌 아이의 팔뚝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제 마음속에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이 한 장의 그림이 뉴스가 차마 전하지 못한 전쟁의 참상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그녀가 아이의 팔뚝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었을 때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한 가족이야!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로 너를 잃지 않을 거야
혹시 우리 중 누가 죽게 될지라도 결국 찾아내고 말 거야!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든, 살아서든 죽어서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
아이의 팔뚝에 새겨 둔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는 하나의 정보를 넘어서 올가의 고백이자 선언이며 맹세였습니다. 올가 가족의 사랑과 연대의 표식이며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설령 올가 자신이 잘못되더라도 누구든 이 아이들을 돌보아 달라는, 사회를 향한 한 가족의 외침이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이 표식을 보는 사람은, 우리가 어떻게 되었든 서로 만나게 해 주세요. 우리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기도이며 청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의 팔뚝에 새겨진 올가의 글씨가 이토록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묶인 기초 단위로서의 가정을 통해 사랑을 훈련하고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고, 논리로 다 파악될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입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신비한 마법과 같은 사랑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힘은 너무도 강력하여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만큼 위대합니다. 이 사랑을 받고 아이들은 자라납니다.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배우고 경험합니다. 당연히 받는 사랑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신비합니다. 사랑으로 단단하게 묶인 가정은 늘 함께 걱정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연대합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신비로운 장소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을 알고, 가정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가정 안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우리에게 그럴 마음을 창조하셔서 어렵지 않게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이 없고, 엄마와 아빠가 없다면 아마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고, 경험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의 보금자리이며 우리를 자신 있게 만들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하며 두려워하지 않게 만드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살아갈 이유를 주는 것이 나의 가정이고, 내가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바로 나의 가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로서의 가정은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무너져 내렸고 변질되어 왔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후 그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려 하죠. 아내를 품지 못하고 사랑으로 덮지 못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고 결국은 살해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가족을 향한 비난, 가족을 향한 분냄, 살의와 살인이 가족 가운데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이지만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가정은 사랑을 나누고 경험하는 자리가 아니라, 경쟁과 분노와 살의로 가득한 자리가 될 수 있음을 성경은 알려 줍니다.
욕망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 가정은 족쇄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성적 탐닉에 빠진 이들에게 가정은 무덤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장주의에 빠진 사람들, 성공주의에 빠진 이들에게 가정은 그저 잠을 재워 주는 숙소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돈이 많으면 돈 때문에 싸우게 되고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은 대로 가정은 해체됩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은 우리가 진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과 같은 위기 속에서, 혹은 가족의 위기 가운데서 본질의 회복을 잠시 경험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위기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던 일도 중요하지 않고, 쌓아온 모든 것도 그저 휴지 조각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딱 한 가지,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고 위로가 됨을 알게 됩니다. 가족의 깊은 연대와 사랑을 경험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창조 질서로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며 경탄하는 아담에게서 우리는 가족의 깊은 연대와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에서 되찾아야 하고, 다시 경험해야 할 모습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어그러지고 무너진 가정이 있다면 깊은 사랑의 연대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때, 그리고 자신의 모든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깊은 사랑의 연대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세우는 아름다운 가정을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내고,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분 스스로 모든 가정의 가장이 되어 주시겠다며 약속의 징표를 보여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 정보가 들어간 아이의 팔뚝, 이것을 표현한 올가의 그림을 보면서 저는 문득 출애굽기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시던 그날은 어떠했을까요? 출애굽기 12장 39절이 전합니다.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출 12:39)
그날의 분위기를 머릿속에 그려 봅니다. 올가 그레벤니크가 35년의 삶을 10분 만에 정리해야 하였듯이, 이스라엘 민족도 400년이 넘게 살아온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탈출한 사람의 숫자도 어마어마했습니다. 도시 전체가 빠져나온 셈이니까요. 여러모로 그 밤은 요란했습니다. 이집트인의 거주 구역에서는 장자를 잃은 슬픔으로 소리쳤고 이스라엘인의 거주 구역에서는 급작스런 탈출로 소란스러웠습니다. 길을 안내하며 외치는 소리, 아이들이 울어 젖히는 소리, 아이들을 단속하느라 고함치는 소리, 가축이 우짖는 소리… 황급하고 시끄러운 분위기가 깊은 밤을 가득 채웠을 겁니다. 전쟁 중 피난민의 행렬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난리 통에 아이를 잃어버리진 않을까 염려했겠죠. 그들도 올가처럼 아이의 팔뚝에 이름과 생일을 적어 두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출 13:9)
여기서 “손의 기호”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오트’이고 표식을 의미합니다. 저명한 구약학자 마르틴 노트(Martin Noth)에 따르면 ‘손에 새긴 표’는 손에 새기는 문신과 같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이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신없이 애굽을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엄마가 되어 주시고 아빠가 되어 주시듯, 그들의 손과 미간에 친히 기호를 새겨 주시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마치 올가 그레벤니크가 자녀들에게 이름과 생년월일을 새겨 주었듯이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손에 표식을 심어 주신 것이죠.
“너희는 나의 가족이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다. 내 표식을 너에게 새긴다. 너는 내가 구원해 낼 것이다. 반드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다. 내 말을 너에게 새겨 넣는다. 말씀을 너의 입에, 너의 미간에 새겨 둔다. 너는 내 것이다. 내 말이 너희와 함께 있는 한 너희는 살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며 맹세입니다.
출애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한 가족이 되십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아빠가 되시고, 섬세하게 살피는 엄마가 되십니다.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떠나고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4~16)
하나님은 우리와 한 가족이 되시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이름을 그의 손바닥에 새기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비를 베푸시지만, 죄된 인간은 여전히 주님을 배반하며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난 탕자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어 또다시 사랑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십자가에 새겨진 선명한 못자국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하셨습니다.
올가 그레벤니크가 아이의 팔뚝에 새겨 둔 정보는 사랑과 보호와 연대의 표식이었습니다. 아이의 뒤에 엄마가 있다는 표시였고, 설령 엄마가 잘못되더라도 누구든 이 아이를 돌봐 달라는 연대의 요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두심으로 사랑과 보호와 연대를 자처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버려졌다고 아우성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너를 잊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아드님의 손에 못자국을 새기심으로 사랑과 보호와 연대를 더욱 굳게 하셨습니다. 이 표시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합니다. 이 표시가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자 온 가족 주일입니다. 가족이란 참으로 미묘한 관계입니다. 높은 건물에 바짝 서면 꼭대기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줄 모르는 존재가 다름 아닌 가족입니다. 하지만 가족이야말로 사랑과 보호와 연대가 가득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실과 사랑으로 가득한 가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위기 속에서도 든든히 설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믿음의 가정은 더욱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족이 되어 주시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손바닥에 우리 이름이 새겨져 있고, 주님의 손바닥에 못박히신 사랑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가족이십니다.
오늘 같은 귀한 날에 우리 가정이 사랑으로 더욱 깊어지고,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손길을 더 깊이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녁에는 예배가 없고 각 가정에서 온 가족 예배로 드리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가족들의 손목이나 손바닥에 이름을 새기고 주님의 말씀을 새기고 예배를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올가 그레벤니크를 생각하며, 먼 옛날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가정을 회복할 때에 우리에게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가정은 주님께서 가장이 되십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에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5월 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사랑의 흔적을 새기다” (출 13:8-10)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99장, 57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 13:8-1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전쟁 속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한 가족의 일상을 삽화로 접하면서 가족이 무엇일까에 대해 깊이 생각합니다. 공포와 두려움 속 혹시 모를 참상을 대비하며 아이와 자신의 팔에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은 표식은 끝까지 책임지고, 함께 하겠다는 가족의 사랑과 연대를 강하게 느끼도록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은혜인 우리의 가정은 사랑의 연대로 단단히 묶여 있습니까?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신비로운 장소인 가정 본연의 모습을 잘 지켜오고 있습니까?
설교의 요약
가족은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을 배우고 경험하는 신비로운 장소이며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우리는 가정 안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정 안에 그 마음을 창조하셨기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창조된 가정이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변질되어 왔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 가인과 아벨의 시기 속에 살인이 일어나는 등 가족 본연의 모습이 어그러져 버렸습니다. 죄와 연결 된 욕망과 성공주의와 돈에 붙들리다보면 사랑의 연대로서 그렇게 창조된 가정이 해체되기도 하고 변질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가정의 회복은 우리가 진정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어쩌면 부차적인 것 일수 있는 내가 지금 붙드는 것들, 내가 탐닉하며 쌓고 있는 것들보다 지금 가족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함을 깨닫게 될 때, 가족 안에서 깊은 연대와 사랑을 경험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때 창조의 질서로서의 가정의 회복을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전쟁 속 한 가족이 팔에 표식을 새기는 것을 볼 때 출애굽기의 말씀이 연동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던 그날은 어떠했을까요? 얼마나 혼란스러웠겠습니까? 수 백만의 사람들이 빠져나온 그 밤은 전쟁 중 피난민 행렬과 다를 바 없는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없이 애굽을 탈출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히 부모가 되셔서 그들의 손과 미간에 표식을 새겨 주시는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가족이다. 내가 너의 아버지이다. 내 표식을 너에게 새긴다. 너를 반드시 구원해 낼 것이고 반드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맹세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이 그렇게 배반해도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가족의 이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새겨진 선명한 못 자국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롬 5:8)하여 주셨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입니다.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소중함을 잊고 있었다면, 세상살이에 붙들려 그 소중함을 놓치고 있었다면, 오늘 가족 본연의 의미를 더 깊이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가득한 사랑과 그 손길로 창조 된 가정은 사랑과 보호와 연대가 가득한 곳입니다. 가족이 주는 참 기쁨과 행복을 회복하고 누리는 주님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내게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때는 언제입니까?
2. 주님 세우신 가정의 사랑과 연대 속에 가족들의 손목에 어떤 생명의 말씀을 새겨주고 싶습니까?
마무리기도
가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경험케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식임을 고백합니다. 가정의 본질이 변질되거나 무너져 있다면 주님 우리 가정에 찾아오셔서 그 사랑과 연대가 온전히 회복되게 도와주옵소서. 거친 세상 속에서 날마다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가정 속에 있음을 날마다 발견하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