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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사순절의 오용 문제를 거론하며 금욕이 향락을 낳은 역설을 지적했습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순절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절제, 금욕, 금식… 이와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40’이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Τεσσαρακοστή(테사라코스테, 영어:Lent) 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 기간은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어서 부활절 바로 전날인 성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을 우리는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지켜져 온 교회의 귀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본래 세례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후보자들은 약 3년 동안 세례받을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는 시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례받을 만한 자격이 검증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40일의 훈련을 받으며 준비하는 기간을 거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금식과 절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례자들을 위한 특별 준비 기간으로 시작된 사순절은 이후 수도사들에 의해서 절제와 금욕의 특별한 수도 기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6세기경 만들어진 베네딕트 수도규칙서에는 사순절과 관련한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섬김의 분량에 어떤 것을 이 시기에 더 늘릴 것이니, (곧) 특별한 기도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릴 것이다.”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수도사들의 규례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장되었습니다. 특별히 중세 시대 이르렀을 때에는 절제와 금욕에 대한 강조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평신도들 중에서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기간에 금식을 할 뿐만 아니라 거친 직물로 짠 옷을 맨살 위에 입고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고행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채찍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달아서 살점이 찢겨나가기까지 고행에 동참한 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행을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신앙적으로 더 굳건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절제와 금욕이 사순절의 주된 관심사가 되면서 흥미로운 세속적 절기가 탄생합니다. 우리말로는 사육제라고 불리는 카니발입니다. 소위 사육제는 주현절부터 재의 수요일 전날인 화요일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라틴어로는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고 하는 이 단어는 ‘고기에 안녕을 고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카니발이라고 불렸습니다. 즉 사순절 바로 직전에 고기를 실컷 먹어두는, 일종의 이별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순절 규율이 엄격했던 시기에는 가정에서 고기, 버터, 치즈, 우유, 심지어 계란조차 보관되는 일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전에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소비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불란서 같은 곳에서는 재의 수요일 전날인 화요일을 ‘뚱뚱한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이 기간을 ‘버터 주간’이라고도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하여 시작된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카니발로 이어지는, 금욕의 사순절 직전에 먹고 마시며 즐기는 다양한 행사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현상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카니발 기간 동안에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욕망을 추구하였고, 자연히 방탕한 향락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도 남미나 유럽에서 일어나는 카니발을 보면 이런 일들이 스스럼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금욕을 행하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도리어 더 방탕해지고 많은 죄를 짓는 일들이 역설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이면서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을 중세 시대의 폐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에 미신이 몰래 기어들어와 교회를 크게 해롭게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강요 VI. xii. 19)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더욱 사악한 시대가 이어졌는데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에 감독들의 무능과 훈련 부족, 그리고 그들의 지배욕과 폭력적인 엄격함이 덧붙여졌다. 양심을 치명적인 쇠사슬로 결박시키는 사악한 법들이 통과되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모독적인 견해들이 계속 쌓여서 마침내 모든 오류의 깊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기독교강요, IV. xii. 21)
금욕과 금식 전이라는 이유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칼뱅은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순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칼뱅이 우려한 사순절의 오용 문제 앞에 잠시 머무르며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본래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순절에 고통을 느끼길 원하실까요? 고통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는 것을 묵상하기를 원하시면서 우리 또한 피 흘리는 경험을 하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사순절을 보내기 전에 카니발을 열고 온갖 탐욕과 인간의 본능을 마음껏 드러냄으로써 용서받아야 할 죄목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맥락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서 박해나 고난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된다면 주님의 사역이 의미 없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과적으로는 그야말로 칼뱅이 말하였듯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지나가던 젊은이가 차를 멈추고는 묻습니다. “어르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어디에 가십니까? 제가 마을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이 고맙다고 하며 차를 탔습니다. 한참 가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이 할머니가 머리에 계속 짐을 이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차에 타셨는데 그만 내려놓으세요.” “내가 차를 얻어 탄 것도 미안한데 짐까지 맡길 수 있나? 내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
여러분,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내가 고통을 나누고, 내가 절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사순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불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금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죠. 여러분, 어떤 병사가 몰려오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전세가 좋지 못하여 다른 병사에게 이곳을 본인이 사수할 테니 모두 후퇴하여 목숨을 보존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에 다른 병사들은 후퇴하면서 다음을 모색해야겠지요. 그런데 어떤 병사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겠냐며 도망가지 않고 울고 있다면 사수하는 병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함께 죽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살아서 다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희생하는 병사가 바라는 것일까요? 생명을 멋지게 살아내는 것이 생명을 구해 준 병사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그러하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사형 선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창피함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으니 너는 살아라.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있다. 너는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순절을 보낸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20)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이 우리를 향하여 정죄하는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 기쁨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5)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행을 하거나 절제를 하거나 금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을 금욕과 고행이 아닌 자발적인 기쁨을 따라 보내며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 신앙인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난 주간만큼은 금식하리라 마음을 먹고 야심차게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있죠. 온전한 40일 금식은 아니더라도 마음만큼은 결연하고 진지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언한 이후부터 먹을 것들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금식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지고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시작한 금식인데 주님은 없고 먹을 것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부활 주일이 속히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급기야 부활 주일로 넘어가는 토요일 밤 12시가 되었을 때, 식욕을 참지 못하고 엄청나게 먹고는 그만 탈이 나고 맙니다. 정작 부활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절기에 배앓이를 하는 신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순절에 먹는 것을 그저 힘들게 참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이 바로 이런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번에 100일 동안 다이어트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식단을 절제하고 하루하루 보냅니다. 물론 힘이 듭니다. 먹을 것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100일까지 잘 참았습니다. 그리고 101일 째에 먹지 못한 것을 마구 먹게 된다면 다이어트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다이어트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식단을 조절하고 먹을 것을 조심해서 먹었다면 시간이 문제겠습니까? 100일이 문제겠습니까? 101일째가 문제겠습니까? 다시 말해 100일이라는 기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고,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몸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군선교하는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입대하는 우리 젊은 군인들이 지혜로워진 것 같습니다. 군대를 들어오면서 몸짱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젊은이들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기왕에 하는 군생활이니 1년 6개월이든, 2년이든 열심히 운동해서 훌륭한 몸을 만들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힘들게 훈련받았는데 도리어 몸을 만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임한다고 합니다. 부대에 헬스장까지 만들어 주었더니 고된 훈련 후에도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제는 군선교의 일원으로 헬스장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간 젊은이가 힘들게 고역으로 훈련받는다면 분명 지긋지긋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염두에 두며 건강한 몸을 만들기로 결단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창의적인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절도 그렇습니다. 그저 절제하고, 힘들게 금욕과 금식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사순절은 도리어 고통스러운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살피고,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금식과 절제를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험을 ‘사순절에 누리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을 선물로 받습니다. 새 사람이 되는 의식입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다시 물에서 나올 때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새 옷을 입고, 새 존재로 태어납니다.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스스로 경험합니다. 존재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날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며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기대감 있는 시간입니다. 새 존재의 아름다운 습관과 삶의 방식을 함께 배워 가는 창조적인 기간입니다. 단순히 참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규칙서를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릴 것이다.” 수도원에서 힘든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사순절을 지켰던 수도사들을 기억해 봅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이면서 동시에 삼일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나라 사랑에 관한 말씀은 드리지 못하였지만, 사순절의 기쁨을 나누는 이 말씀을 나라를 가꾸는 방법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삼일절,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자유 대한민국이 만들어졌고, 오늘 우리가 이 나라에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국권의 회복을 외치면서 열망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죽지만 너희는 살아라! 이곳에서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봐라! 참된 자유가 있는 나라로 가꾸어 보아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순국의 선열들이 이슬처럼 사라진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는 일제 강점과 같은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나라의 체질을 바꾸어 가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나라를 건강한 나라로 만들겠다, 부정직하고 나태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고 세상의 흐름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힘 있는 나라로 가꾸어 가며 이 나라를 지켜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에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권리도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이 나라를 멋지고 행복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고난이나 금욕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바라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The Joy of Lent
Galatians 6:15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Lent. Lent is a translation of the Greek word“Τεσσαρακοστή,” which means “forty,” and refers to the 40 days lasting from Ash Wednesday to Holy Saturday.
Early Christians prepared for baptisms during Lent. In those times, the church verified the faith of those who wanted to convert to Christianity by examining them for three years beforetheir baptism. The final phase of this examination was a forty-day period leadingto their baptism, during which they prepared themselves for it. Of course, fasting and self-control were required during this period.
Lent, which originally began as a season for preparing for baptisms, later evolved into a special period for practicing ascetism, including fasting and self-control, among Christian monks.
This is what the Rule of Saint Benedict, a book of precepts for Benedictine monks written in around AD 600, says about Lent:
“During these days, therefore, we will add to the usual measure of our service something by way of private prayer and abstinence from food or drink, so that each of us will have something above the assigned measure to offer God of his own will with the joy of the Holy Spirit (1 Thess 1:6). In other words, let each one deny himself some food, drink, sleep, needless talking and idle jesting, and look forward to holy Easter with joy and spiritual longing.” (Rule of Saint Benedict, chapter 49)
Such rules,originally kept by monks, graduallyextended and were applied to all Christians.In particular, during the Middle Ages, the emphasis on self-control and abstinence reached its climax.
Accordingly, even medieval lay Christians would voluntarily inflict physical pain on themselves as penance. They would not only fast during Lent, but many would also wear a cilice, a garment made of coarse cloth, close to their skin and flog themselves.
As abstinence and self-control became a focus of Lent, an interesting secular festival was born: Carnival.
Carnival is the period that originally lasts from Twelfth Night to Fat Tuesday, the day before Ash Wednesday, and comes from the Latin “carne vale,” which means “farewell to meat.” In short, it was a kind of farewell ceremony before people abstained from eating meat.
In the period when strict rules on Lent were observed, families were not even allowed to store such foods as meat, butter, cheese, milk, eggs, fat, or bacon during the season of Lent. Therefore, during the week leading up to Ash Wednesday people would have feasts,eating fatty foods and pastries. This is why in Germany and France the Tuesday before Ash Wednesday was called “Fat Tuesday,” and in Russia and Slavic nations the week leading to Lent was called “Butter Week.”
However the focus of Carnival, which was originally to observe Lent well, shifted to eating, drinking, and enjoying diverse events before Lent. As people lustfully pursued the flesh before practicing abstinence like unfettered colts, Carnival quickly became secularized and later turned into a culture of indulging in sensual pleasures and debauchery.
The original intent of practicing abstinence during Lent for sanctification paled; people came to commit more sins and live in debauchery during the period leading to Lent, justifying themselves that they will bepracticing penance anyway during Lent. Lent, which had originally focused on self-control and abstinence, started to go in the wrong direction.
Accordingly, John Calvin, the reformer and founder of the Presbyterian Church, pointed out that the observance of Lent was an ill of the medieval period. Hestates the problem of Lent in hi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ut the first thing always to be avoided is, the encroachment of superstition, as formerly happened, to the great injury of the Church.” (Calvin, Institutes, IV. xii, 19)
He also says:
“Worse times followed. To the absurd zeal of the vulgar were added rudeness and ignorance in the bishops, lust of power, and tyrannical rigour. Impious laws were passed, binding the conscience in deadly chains. The eating of flesh was forbidden, as if a man were contaminated by it. Sacrilegious opinions were added, one after another, until all became an abyss of error. And that no kind of depravity might be omitted, they began, under a most absurd pretence of abstinence, to make a mock of God;” (Calvin, Institutes, IV. xii. 21)
Dear Church, as the season of Lent begins, it would serve us well to consider Calvin’s concerns over the abuse of Lent.
Does God really want us to feel pain and flog ourselves during this season? Does He want us to bleed too so that we may meditate on the blood of Jesus? Or does He want us to heap up sin by guiltlessly gratifying all kinds of human desires and lust by holding a Carnival before Lent?
We often say we “participate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is phrase, mentioned by the saint Paul and the apostle Peter, means that God’s children will experience persecutions, sufferings, and death in this world for proclaiming the gospel; it does not mean that we must whip and torture ourselves.
This is because Jesus was flogged and suffered for us. If wesuffer again when Jesus has already suffered for us, doesn’t that makeHis suffering and ministry meaningless? Wouldn’twe be making“a mock of God” as Calvin said?
Let me tell you a story. An old womanwas walking in the countryside, carrying a heavy load on her head. A young man driving past stopped and asked, “Mam, where are you going? May I take you to the nearest village?” Thanking him for his kindness, she got in the car. After a while, however, the young man noticed that she was still carrying her load on her head. He asked, “Mam, why are you still carrying that in the car? Please put it down.” The old woman replied, “Young man, how can I put it down? I have burdened you enough by accepting this ride. I’ll carry my own load.”
Our walk of faith is often like this. We disrespect God by thinking it will please Him to carry our own load, to take part in His pain, and to practice abstinence during Lent.
The war in Ukraine is still going on. What if a fellow soldier said to you, “The battle situation is not good here because the enemy is approaching.You and your men should retreat and save your lives while I hold the battle line.”?You would retreat and get readyto fight the next battle while your fellow soldier holds the line there. Can you imagine saying this? “Oh, I could not possibly leave you behind. I would feel too bad.” Can you imagine staying behind and crying next to that soldier? How would he feel?Staying behind and getting killed would hardly be returning his bravery and favor. Wouldn’t he want you to survive and to win the war against Russia in other battle grounds? Living your life magnificently—wouldn’t that be repaying his sacrifice?
This is how our Lord feels too. He laid down His life for us. He was stricken for our transgressions. He took the death penalty for us; He carried our shame on the cross.
What would our Lord want? Wouldn’t He want us to live since He suffered and died for us? Live, for I have stood in this place to save you. Isn’t this what our Lord wants?
Therefore, observing Lent means to be born again as men and women of Christ by contemplating with thanksgiving the love of Christ who suffered on the cross to save us.
Therefore, Paul confesses in Galatians 2:
“For through the law I died to the law so that I might live for God.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and I no longer live, but Christ lives in me. The life I now live in the body,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atians 2:19-20)
Our Lord took on all the condemnation that the law heaps on us and was crucified for us. Therefore, we have been set free from all bondage of the law. The cross of Christ has made us dead to the law and alive with God. We have been born again with a new life. This is the very joy of Lent.
That is why Paul proclaims in Galatians 6:
“Neither circumcision or uncircumcision means anything; what counts is the new creation.” (Galatians 6:15)
Observing the law is not what matters; what matters is whether we have been born as a new creation. Penance, self-control, and abstinence are not what matters; the meaning of Lent is to be born as a new man, a new woman.
During Lent and Passion Week, we often practice fasting after ambitiously setting out to fast. Although we do not completely fast for the whole 40 days, our heart and will are determined. Fasting a day is bearable, but after proclaiming a fast, each day becomes an eternity.
The more we think about fasting the more painful it gets; you spend the whole day thinking about food. Eventually you eagerly await Easter for food. Finally at midnight of Easter, we can no longer control ourselves and go on an eating binge, ending up with a stomachache. So on Easter Sunday, the very day we ought to be filled with joy, we are sick.
Is this the kind of fasting that God wants?
Let’s say someone goes on a diet. He is determined to control hisdiet for 100 days. So each day he strictly controls his food consumption. Of course, it’s hard. All he can think of is food. But he controls himself well for 100 days. But what would happen if he startedeating all he wanted without restraint from day 101? Would that really be a diet?
What was the reason he went on a diet in the first place? Wasn’t it to become healthier? If he had controlled his diet to become healthy, the length of his diet would not matter so much. Nor would restraints on certain foods. What matters is whether his health improved or not.
Recently I had an opportunity to talk to missionaries ministering to the military. I asked them what new recruits are interested in or concerned about these days. They replied that they are interested in and set their goals on getting fit during their time in the military. These days, young men doing mandatory service, try to get fit and gain muscle out of their own will, instead of just letting those two years go by.
In the past new recruitsconsidered military training tough and harsh, but these days they consider it an opportunity to get fit. Furthermore, when one of the units built a gym, the men even continued to work out in the gym even after a hard day of training. I even read a missions report,sayingbuilding gyms had a positive effect on missions.
Isn’t this getting to the essence? If a young man in the military considers his training only as toilsome and painful work, it will merely be a torturous and exhausting experience. But if he approaches it with a different perspective, considering it an opportunity to become fit and to gain an assetfor his future, his military service will become a valuable andindispensable time of his life.
This applies to Lent too. If we approach it from the perspective that during this period there are only “don’ts,” such as self-control, abstinence, and fasting, and only suppress ourselves, it will become a painful experience.
But if we examine our hearts, considering it a season to be reborn as a new creation, and practice fasting and self-control, reflecting on our spiritual life, it will become an infinitely positive experience.
I wish to call this the “joy of Lent.”
Our Lord said: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the new creation has come: The old has gone, the new is here!” (2 Corinthians 5:17)
Yes. Our Lord has created us as a new creation. The joy of Lent is to advance toward that new being.
This is what early Christians did. They got baptized and got new names as gifts. Baptism was a ceremony of becoming a new person. They were immersed deeply in water and when they emerged, they heard God’s voice: “This is my beloved son, my beloved daughter.” They were born as new beings wearing new clothes.
Lent is the period of awaiting this existential change and preparing for that day with joy.
Therefore, Lent is not just a season of pain and suffering. It is a time of joy and rejoicing, a time of being reborn as a new creation, and a season to learn the beautiful habits and way of life of new beings.
Lent is not just a period of withstanding, restraining, and suppressing; it is a time of experiencing the joy and happiness of resembling Christ.
I hope that this year’s Lent will become a holy and joyful experience of building and changing yourselves into men and women of God.
Today, the first Sunday of Lent, is also theSundaythat commemorates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Although I didn’t speak on love of our countrywith today’s passage, why don’t we apply the lesson we learned from the joy of Lent to loving this nation?
What must we do for our country? Must we not build a healthy society and improve its fundamentals so that painful histories such as the Japanese colonial rule over Korea will not happen again?
I think it would be good to spend today, thinking, ‘I will commit my life to building the Republic of Korea into a marvelous and strong nation that benefits the world and positively impacts the global flow. Korea will be a healthy nation—not a dishonest, lazy country dependent on foreign powers.’
To achieve this, we must withstand many things. We must share the pain. Sometimes, we must concede our rights. We must be willing to concede at times to make this country healthier. If we love our country with such a mindset, if we take on our work not unwillingly but willingly, we will be able to make Korea a great and happynation with the help of God.
It is my hope that you will all become children of God who experience the joy of Lent, that is, the joy of being reborn as a new creation with a willing heart, instead of forcefully subjecting yourselves to suffering and abstinence. This is what our Lord wants of us today.
갈라디아서 6: 15
15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칼뱅은 사순절의 오용 문제를 거론하며 금욕이 향락을 낳은 역설을 지적했습니다.>
사순절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대해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순절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절제, 금욕, 금식… 이와 같은 단어들이 떠올려지실지 모르겠습니다. ‘사순절’이라는 말은 ‘40’이라는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Τεσσαρακοστή(테사라코스테, 영어:Lent) 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는데요. 이 기간은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어서 부활절 바로 전날인 성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을 우리는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부터 지켜져 온 교회의 귀한 전통이기도 합니다.
사순절은 본래 세례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당시 세례 후보자들은 약 3년 동안 세례받을 자격이 있는지 검증하는 시간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세례받을 만한 자격이 검증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40일의 훈련을 받으며 준비하는 기간을 거쳤습니다. 자연스럽게 금식과 절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례자들을 위한 특별 준비 기간으로 시작된 사순절은 이후 수도사들에 의해서 절제와 금욕의 특별한 수도 기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6세기경 만들어진 베네딕트 수도규칙서에는 사순절과 관련한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섬김의 분량에 어떤 것을 이 시기에 더 늘릴 것이니, (곧) 특별한 기도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릴 것이다.” (『베네딕트 수도규칙서』, 49장)
수도사들의 규례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장되었습니다. 특별히 중세 시대 이르렀을 때에는 절제와 금욕에 대한 강조가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평신도들 중에서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육신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기간에 금식을 할 뿐만 아니라 거친 직물로 짠 옷을 맨살 위에 입고는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며 고행하는 사람들도 상당했다고 합니다. 채찍에 날카로운 갈고리를 달아서 살점이 찢겨나가기까지 고행에 동참한 분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행을 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신앙적으로 더 굳건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시대였습니다.
이렇게 절제와 금욕이 사순절의 주된 관심사가 되면서 흥미로운 세속적 절기가 탄생합니다. 우리말로는 사육제라고 불리는 카니발입니다. 소위 사육제는 주현절부터 재의 수요일 전날인 화요일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라틴어로는 ‘카르네 발레(Carne Vale)’라고 하는 이 단어는 ‘고기에 안녕을 고하다’라는 의미를 담아 카니발이라고 불렸습니다. 즉 사순절 바로 직전에 고기를 실컷 먹어두는, 일종의 이별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순절 규율이 엄격했던 시기에는 가정에서 고기, 버터, 치즈, 우유, 심지어 계란조차 보관되는 일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순절 전에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소비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불란서 같은 곳에서는 재의 수요일 전날인 화요일을 ‘뚱뚱한 화요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이 기간을 ‘버터 주간’이라고도 명명했습니다.
그런데 사순절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하여 시작된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카니발로 이어지는, 금욕의 사순절 직전에 먹고 마시며 즐기는 다양한 행사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현상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카니발 기간 동안에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욕망을 추구하였고, 자연히 방탕한 향락 문화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도 남미나 유럽에서 일어나는 카니발을 보면 이런 일들이 스스럼없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사순절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금욕을 행하던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도리어 더 방탕해지고 많은 죄를 짓는 일들이 역설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이면서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뱅은 사순절을 지키는 것을 중세 시대의 폐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에 미신이 몰래 기어들어와 교회를 크게 해롭게 한 적이 있는데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기독교강요 VI. xii. 19)
이어서 그가 말합니다.
“더욱 사악한 시대가 이어졌는데 사람들의 잘못된 열심에 감독들의 무능과 훈련 부족, 그리고 그들의 지배욕과 폭력적인 엄격함이 덧붙여졌다. 양심을 치명적인 쇠사슬로 결박시키는 사악한 법들이 통과되었다. 고기를 먹는 것은 마치 사람을 더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금지되었다. 모독적인 견해들이 계속 쌓여서 마침내 모든 오류의 깊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어리석게도 금욕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하나님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기독교강요, IV. xii. 21)
금욕과 금식 전이라는 이유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본 칼뱅은 사람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순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칼뱅이 우려한 사순절의 오용 문제 앞에 잠시 머무르며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본래 우리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순절에 고통을 느끼길 원하실까요? 고통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피 흘리시는 것을 묵상하기를 원하시면서 우리 또한 피 흘리는 경험을 하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사순절을 보내기 전에 카니발을 열고 온갖 탐욕과 인간의 본능을 마음껏 드러냄으로써 용서받아야 할 죄목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고, 사도 베드로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맥락은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 속에서 박해나 고난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대신 당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고난을 대신 짊어지셨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고난을 받게 된다면 주님의 사역이 의미 없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결과적으로는 그야말로 칼뱅이 말하였듯이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지나가던 젊은이가 차를 멈추고는 묻습니다. “어르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어디에 가십니까? 제가 마을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이 노인이 고맙다고 하며 차를 탔습니다. 한참 가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이 할머니가 머리에 계속 짐을 이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차에 타셨는데 그만 내려놓으세요.” “내가 차를 얻어 탄 것도 미안한데 짐까지 맡길 수 있나? 내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
여러분,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내가 고통을 나누고, 내가 절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사순절에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불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금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죠. 여러분, 어떤 병사가 몰려오는 적군을 앞에 두고 전세가 좋지 못하여 다른 병사에게 이곳을 본인이 사수할 테니 모두 후퇴하여 목숨을 보존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그 자리를 지키는 동안에 다른 병사들은 후퇴하면서 다음을 모색해야겠지요. 그런데 어떤 병사가 미안해서 어떻게 하겠냐며 도망가지 않고 울고 있다면 사수하는 병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함께 죽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살아서 다른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희생하는 병사가 바라는 것일까요? 생명을 멋지게 살아내는 것이 생명을 구해 준 병사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그러하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맞을 채찍을 대신 맞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사형 선고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창피함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니,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으니 너는 살아라.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하여 이 자리에 있다. 너는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순절을 보낸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으로 나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20)
우리 주님께서는 율법이 우리를 향하여 정죄하는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율법에 대하여 죽게 하였고,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 기쁨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갈 6:15)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고행을 하거나 절제를 하거나 금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사순절의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을 금욕과 고행이 아닌 자발적인 기쁨을 따라 보내며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길 소망합니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 신앙인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고난 주간만큼은 금식하리라 마음을 먹고 야심차게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있죠. 온전한 40일 금식은 아니더라도 마음만큼은 결연하고 진지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선언한 이후부터 먹을 것들이 눈에 더 들어옵니다. 금식하면 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지고요. 주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시작한 금식인데 주님은 없고 먹을 것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부활 주일이 속히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급기야 부활 주일로 넘어가는 토요일 밤 12시가 되었을 때, 식욕을 참지 못하고 엄청나게 먹고는 그만 탈이 나고 맙니다. 정작 부활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절기에 배앓이를 하는 신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과연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일까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순절에 먹는 것을 그저 힘들게 참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금식이 바로 이런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다이어트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번에 100일 동안 다이어트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식단을 절제하고 하루하루 보냅니다. 물론 힘이 듭니다. 먹을 것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100일까지 잘 참았습니다. 그리고 101일 째에 먹지 못한 것을 마구 먹게 된다면 다이어트한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다이어트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식단을 조절하고 먹을 것을 조심해서 먹었다면 시간이 문제겠습니까? 100일이 문제겠습니까? 101일째가 문제겠습니까? 다시 말해 100일이라는 기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건강한 식습관을 가지고, 건강한 몸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몸을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최근 군선교하는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입대하는 우리 젊은 군인들이 지혜로워진 것 같습니다. 군대를 들어오면서 몸짱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젊은이들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기왕에 하는 군생활이니 1년 6개월이든, 2년이든 열심히 운동해서 훌륭한 몸을 만들고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힘들게 훈련받았는데 도리어 몸을 만드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임한다고 합니다. 부대에 헬스장까지 만들어 주었더니 고된 훈련 후에도 자발적으로 운동을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제는 군선교의 일원으로 헬스장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대에 들어간 젊은이가 힘들게 고역으로 훈련받는다면 분명 지긋지긋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염두에 두며 건강한 몸을 만들기로 결단하고 시간을 보낸다면 창의적인 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절도 그렇습니다. 그저 절제하고, 힘들게 금욕과 금식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사순절은 도리어 고통스러운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살피고, 영적 생활을 점검하고, 금식과 절제를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하려고 노력한다면 행복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험을 ‘사순절에 누리는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새롭게 지으셨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그러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새로운 이름을 선물로 받습니다. 새 사람이 되는 의식입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다시 물에서 나올 때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새 옷을 입고, 새 존재로 태어납니다.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스스로 경험합니다. 존재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날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 고난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며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기대감 있는 시간입니다. 새 존재의 아름다운 습관과 삶의 방식을 함께 배워 가는 창조적인 기간입니다. 단순히 참고, 견디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기간이 사순절입니다.
6세기,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규칙서를 다시 읽어 보고 싶습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절을 기다릴 것이다.” 수도원에서 힘든 노동이 아니라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사순절을 지켰던 수도사들을 기억해 봅니다.
오늘은 사순절의 첫 주일이면서 동시에 삼일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은 나라 사랑에 관한 말씀은 드리지 못하였지만, 사순절의 기쁨을 나누는 이 말씀을 나라를 가꾸는 방법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삼일절, 수많은 순국선열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희생,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자유 대한민국이 만들어졌고, 오늘 우리가 이 나라에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서, 국권의 회복을 외치면서 열망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나는 죽지만 너희는 살아라! 이곳에서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봐라! 참된 자유가 있는 나라로 가꾸어 보아라!” 라는 마음을 가지고 순국의 선열들이 이슬처럼 사라진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는 일제 강점과 같은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나라의 체질을 바꾸어 가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 나라를 건강한 나라로 만들겠다, 부정직하고 나태하고 외세에 의존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고 세상의 흐름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힘 있는 나라로 가꾸어 가며 이 나라를 지켜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에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권리도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양보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한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따라 이 나라를 멋지고 행복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고난이나 금욕이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바라고 원하시는 일입니다.
2023년 2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사순절에 누리는 기쁨” (갈 6:15)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70장, 54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갈 6:15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2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느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던 한 젊은이가 할머니를 보고는 마을까지 모셔드리겠다며, 할머니를 차에 태워드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고 있는데, 젊은이가 보니 할머니가 머리에 계속 짐을 이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할머니에게 “아이고 어르신, 차에 타셨는데 왜 짐을 머리에 계속 이고 계세요? 어서 내려놓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사양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차를 얻어 탄 것도 미안한데, 내 짐까지 맡길 수 있나? 내 짐은 내가 지고 가야지…”
설교의 요약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종종 위의 이야기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내가 고통을 나누고, 내가 절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이 사순절에 그런 유혹이 더 큽니다. 초대교회에서 지켜진 이 사순절은 본래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후 수도사들을 통하여 절제와 금욕으로 이어지고 중세 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확대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학대하거나, 엄격한 규율로 고기나 버터, 치즈와 우유 및 계란 등을 먹을 수도 없고 보관조차 허락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유럽에서는 사순절을 앞두고 새로운 절기가 탄생했는데, 이를 카니발 우리말로는 사육제라고 합니다. 이제 곧 금욕과 절제인 사순절이 시작되니, 금욕직전에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게걸스럽게 먹고, 마시고, 더 방탕한 향락을 즐기게 된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사순절에 우리가 고통을 느끼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는 극단적인 금욕이나 절제를 원하실까요? 아니면 카니발을 통해 온갖 탐욕과 인간의 본능을 마음껏 드러내며 훗날 용서받아야 할 것들을 쌓아놓기 원하실까요? 때문에 종교개혁자 칼뱅은 사순절의 오용과 폐해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사순절을 보낸다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묵상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과 함께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즉 새생명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때문에 이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태어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고행을 하거나, 절제나 금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사순절의 의미입니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사순절 동안 금식과 절제를 통하여 세례를 준비하고, 세례를 받을 때 새 사람이 되는 의식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다시 물 밖으로 나올 때, “내 사랑하는 아들, 딸”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새 옷을 입고 새 존재로 태어납니다. 이러한 존재의 변화를 기다리며 그 날을 기쁨으로 준비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은 그저 절제하고, 금욕하고, 금식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기간이 아닙니다. 참다운 사순절은 내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마음을 살피고, 우리의 영적 생활을 점검하며, 금식과 절제를 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기간이며, 새 존재의 아름다운 습관과 삶의 방식을 배워가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행복, 그 기쁨을 맛보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나누기
-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게 했던 금식이나 금욕 또는 절제의 경험이 있나요?
- 올해 사순절, 기쁨과 감사함으로 결단한 것들에는 무엇이 있나요?
마무리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으시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 사람으로 지으심을 감사합니다. 새 존재로 나아가는 기쁨의 사순절이 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