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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본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보내던 시기에 한 학기에 두 번, 서로 다른 교수님이 삼손과 관련한 설교를 선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앞선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어서 다른 교수님이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신 경우였습니다. 어쩌면 두 분의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설교이기도 했는데요. 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설교였습니다. 두 분 모두 삼손의 이야기를 주제로 신학적인 관점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무척 달랐습니다.
먼저 설교하신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지적하시면서 삼손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삼손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로 영적 상태의 변질을 지적하셨습니다. 삼손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사의 사역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졌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교수님은 삼손이 7번의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정리하시면서 삼손이 힘을 쓰는 사건마다 사용되는 표현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습니다.
삼손이 초자연적인 힘을 쓴 세 번의 경우에서 교수님은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첫 번째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난 14장 6절에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라고 표현되었고, 내기에 진 삼손이 베옷 삼심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마련하기 위해 아스글론에 내려간 14장 19절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러 온 15장 14절에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후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즉 삼손이 힘을 쓸 때마다 “삼손이”(삿 16:9) “삼손이”(삿 16:12), “삼손이”(삿 16:14) 라는 일반적인 서술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는 인간 삼손의 모습이 조명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마지막 7번째 사건에서 머리털이 밀린 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삼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여기서 설교자는 “내가”라는 말에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삼손을 이미 떠나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설교자는 삼손이 하나님을 점차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게 된 것이 그가 파멸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평가합니다.
그러자 몇 주 후에 다른 교수님께서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서 ‘과연 삼손이 파멸하였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교수님은 히브리서의 말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브리서 11장 32~33절)
이 말씀을 중요하게 보도록 요청하면서 삼손은 여러 번 실수하였고 실패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셨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설교자는 삼손이 다곤 신을 섬기는 제사의 자리에서 그들이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삿 16:24)고 말하던 순간에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설교자 교수님은 이와 같은 설교를 하시며 오늘날의 기독교가 삼손의 잘못과 같은 많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승리를 만들어 가실 것이라며 눈물 어린 설교를 하셨습니다.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던 매우 흥미롭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두 편의 설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실패가 있고 타락이 있고 변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주님께로 다시금 돌아가는 삼손의 이야기가 있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사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저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멋지다, 훌륭하다.” 생각보다는 “아쉽다, 좀 더 잘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비록 다곤 신전에 모였던 블레셋 사람 삼천 명을 죽이는 큰일을 하였지만, 그가 조금 더 자신을 관리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런 생각은 더 강해집니다. 사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받고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의 여정은 참으로 안타까웠고, 마지막은 참으로 비극적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삼손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떠나 그의 출생은 특별했습니다.>
삼손의 안타까운 삶과는 무관하게 성경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알립니다. 삼손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마노아와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해 줍니다. 단 지파의 가족 중에서 마노아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임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향해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사사기 13장 3~5절)
그런데 이때 아내의 남편 마노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남편에게 사자가 전한 예언을 알려 줍니다. 며칠 후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나타나서 이전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하는데, 그 내용이 사사기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사기 13장에는 삼손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난 셈입니다. 첫 번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두 번째는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세 번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부모는 삼손을 키웠겠지요. 이렇게 특별하게 키운 아이가 삼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특별하게 키운 것과는 다르게 교육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삼손은 건달 같기도 하고 망나니 같기도 합니다. 부모의 신앙적인 교육이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의 첫 번째 이야기는 그가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아내로 삼는 내용입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과 결혼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어 가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신실하였는지, 나실인으로 정결하게 살았는지를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첫 번째 이야기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삼손은 여자에게 너무 약했습니다. 나실인은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삼손은 여자 문제조차도 스스로 해결하고 제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 세 여인이 등장하지요. 첫째는 딤나에 사는 블레셋 여인으로 삼손은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그 후에 큰 문제가 생겼지요. 이어서 가사에 사는 기생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세 번째로는 삼손을 파멸로 이끈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가 나옵니다. 이처럼 그는 늘 여인의 품에 있었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 파멸한 것이 삼손의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힘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위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장군의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 속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힘을 사용한 첫 번째 이야기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젊은 힘 센 사자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결혼 잔치에서 하객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내지요. 그 수수께끼는 삼손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 내용을 알려 주고, 결국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게 됩니다. 그때 삼손이 화를 내면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들 삼십 명을 쳐 죽이고 옷을 약탈해 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삼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기도하는 모습은 단 한 번, 최후에 다곤 신전에서 했던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결정적인 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출생에 비해 삼손의 생애는 안타까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과연 나실인답게 살았을까요? 이것 또한 매우 의심이 됩니다. ‘나실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 민수기 6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나실인은 여호와께 거룩한 자를 의미합니다. 첫 규정은 이렇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민수기 6장 3절)
포도주 정도가 아니라 어떤 술도 마시지 말며, 심지어 포도즙도 마시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이어지는 나실인의 규정은 이렇습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민수기 6장 5~6절)
그렇다면 삼손은 나실인의 규정을 잘 지켰을까요? 물론 삼손이 머리털을 밀지 않는 규정은 마지막까지 지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나실인 규정은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첫 번째 약속인 ‘포도주와 독주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조항은 14장 10절에서 깨집니다. 14장 10절에 의하면 삼손은 딤나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후에 잔치를 벌입니다. 당시 풍속에 의하면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었는데, 이 잔치의 주빈(主賓)이 삼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술잔치에 주빈이 일주일 내내 술을 안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손이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을 깨트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성경에 삼손이 술을 마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독주를 마시지 않았다고 삼손을 변호해 주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을 변호하기에는 그의 잘못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 되는데 삼손은 이 조항도 아주 가볍게 깨트립니다. 14장 5~6절에 따르면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다 젊은 사자를 죽이지요.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맛보고 부모에게 가져갑니다. 죽은 사자를 만졌을 뿐 아니라 죽은 시체 속에 있었던 꿀을 먹은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은 죽은 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부정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 붙어 있는 꿀을 먹음으로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을 아주 가볍게 파기하고 맙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삼손의 머리카락이 들릴라에게 밀릴 때 나실인의 서약이 깨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머리털이 밀린 사건은 엄밀히 말하자면 마지막 남은 하나의 보루였을 뿐입니다. 삼손은 머리털만 자르지 않았을 뿐, 나실인으로서의 약속을 서서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삼손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힘이 머리털을 자르지 않은 데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삼손의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잊고 세상에 서서히 몸과 마음을 담그고 있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세상에 마음과 몸을 모두 빼앗겨 버린 채, 그저 한 가닥 약속으로 남은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았을 뿐 하나님과 이미 멀어진 인생을 살고 있는 삼손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적인 교육도 효과가 없었고,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유혹의 문제를 극복해 내지 못하고 세상에 서서히 빠져드는 삼손의 모습, 그러면서도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모습에서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의 안타까운 생애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았습니까?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약점과 문제, 생득적인 욕심과 정욕과 생각을 잘 다스렸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발을 담근 채 하나 남은 교회 출석이라는 명분, 헌금 생활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신앙을 유지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참으로 재미있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신앙의 마지노선, 삼손이 생각하는 그 선을 넘자마자 급격하게 무너졌음을 알려 줍니다. 삼손은 머리털이 밀리자마자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간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과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하나, 머리카락을 자르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도 남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두 눈이 뽑혔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마치 다곤 신의 승리처럼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삼손의 실패를 축하하며 축제를 벌이는 순간에 삼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승리라는 최후 결말을 만들어 내도록 하셨습니다.
신화 같은 삼손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조차 이용하셔서 승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보도록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버리시는 시점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사용하시는 시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언제 버리셨습니까? 이방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설 때였을까요? 아닙니다.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만지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였을까요? 아닙니다. 이후에도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정말 마지막까지,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한 가지나마 지키는 그 시점까지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삼손을 언제부터 다시 사용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장 22절)
라는 말씀이지요. 왜 있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씀 앞의 내용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빼고 맷돌을 돌리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밀린 상태여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머리털이 자라난다고 달라질 이유도 없지요. 머리카락이 자라나면 다시 힘이 생기는 것도 논리상 아닙니다. 나실인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한 가닥 희망의 말씀으로 이곳에 넣어 두셨습니다. “머리털이 밀렸지만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털이 자라서 머리를 덮어 가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삼손이 나실인으로 약속을 지키며 살았던 것처럼 보시겠다는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삼손의 마지막 기도와 연결됩니다. 삼손이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힘을 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삼손처럼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이미 거룩함을 잃어버렸음에도 마지막 한 가지 신앙의 틀을 붙잡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존재는 아니었는지, 오늘 주님은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손의 처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털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머리털이 밀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머리털이 자라나는 작은 변화를 보시며 그곳에서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장 22절)
우리 모두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바라고 계십니다.
Samson’s Hair and God
Judges 16: 15-22
While I was teaching at the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two professors gave two consecutive sermons in one semester. Both sermons used the same passage: the story of Samson. They revealed two contrasting theological viewpoints on the same subject and was hotly debated among the students. The two professors shared their respective theological views on Samson, which were totally different.
The first professor preached that we must learn from Samson’s mistakes, warning against man’s pride. The critical reason behind Samson’s failure was his spiritual deterioration. Although at first Samson depended on God in his ministry as Israel’s judge, he gradually became desensitized toward Godand finally no longer trusted in God and acted as if his source of strength came from within.
The first professorsummarized the seven times that Samson used his supernatural strength, carefully pointing out how the Bible’sdescription changes. The first three times the Bible says,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him.”In the first instance—when Samson met a lion at the vineyards of Timnah—the Bible says,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him.” (Judges 14: 6) In the second instance, too—when he went down to Ashkelon to get thirty linen garments and thirty sets of clothes after he lost a bet—it is recorded, “Then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him.” (Judges 14: 19) Finally, in the third instance, when the Philistines came to seize him, the Bible says,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him.”(Judges 15: 14)
However, from the fourth instance to the sixth, there are no such expressions. In chapter 16, it only says, “he snapped the bowstrings” (16:9), “he snapped the ropes” (16:12), and “he pulled up the pin” (16:14), which tells us that God’s spirit was no longer upon Samson and there was only the man himself left in him.
Finally, this is how the Bible describes Samson’s final and seventh attempt to use his supernatural strength: “He awoke from his sleep and thought, ‘I’ll go out as before and shake myself free.’ But he did not know that the Lord had left him.” (Judges 16: 20) The first professor stressed Samson’s usage of “I” in this verse and the fact that the Lord had already left him.
The first professor pointed out that the critical cause behind Samson’s demise was his dependence on his own strength rather than God’s. At this, the second professor raised the question of whether Samson was a failed judge or not. Quoting Hebrews below, he stressed that Samson was a man of faith used by God, despite his continuous mistakes:
“And what more shall I say? I do not have time to tell about Gideon, Barak, Samson and Jephthah, about David and Samuel and the prophets, who through faith conquered kingdoms, administered justice, and gained what was promised; who shut the mouths of lions” (Hebrews 11: 32-33)
The second preacher emphasized that Samson showed the world that God was alive by bringing down the Temple of Dagon when his enemies taunted, “Our god has delivered our enemyinto our hands,the one who laid waste our landand multiplied our slain.”(Judges 16: 24)He also preached that although Christianity today has committed many sins and mistakes, God will eventually restore it and achieve His victory through it—just as He did with Samson.
The two starkly contrasting sermons gave us much food for thought.
Indeed, Samson’s story is one of man’s failure, fall, and deterioration. Yet, it also tells the story of a man’s return to God and God’s restoration and usage of that man as a great judge of Israel.
What came to your mind as you read Samson’s story?
Samson’s story has always left me with a frustration—rather than a respect and praise for the protagonist. Although Samson did achieve a great victory at the end by killing 3,000 Philistines at the Temple of Dagon, he could have done better by controlling himself. The more I read into this story the more my frustration grows.
Samson enjoyed many gifts and privileges from when he was born. Yet, his life’s journey was frustrating,and his life ended tragically. What made his life so miserable?
Unlike his pitiful life, his conception and birth were extraordinary. Samson was born after a special sign. Judges chapter 13 describes how his parents conceived him. Manoa from the Tribe of Dan had a wife who was barren and childless. But an angel of God appeared to her with this prophecy:
“The angel of the Lordappeared to her and said, ‘You are barren and childless, but you are going to become pregnant and give birth to a son. Now see to it that you drink no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and that you do not eat anything unclean. You will become pregnant and have a son whose head is never to be touched by a razor because the boy is to be a Nazirite, dedicated to God from the womb. He will take the lead in delivering Israel from the hands of the Philistines.’”(Judges 13: 3-5)
Manoa wasn’t there when the angel came to his wife, so he was told what the angel had said about the boy and how to raise him. And a few days later, the angel reappeared to Manoa, giving him the same message. So, you can see that God’s instructions for Samson’s upbringing are mentioned three times in Judges chapter 13. Samson was forbidden to drink wine or fermented drink, eat anything unclean, or cut his hair. God commanded his parents to raise him as a Nazirite. And so they did.
As such, Samson was raised in a very special way. Yet, despite this special upbringing, the Bible does not mention anything extraordinary about its result. Instead, Samson is described as a troublemaker. It appears that his parent’s spiritual upbringing had no bearing on his character at all.
In the first major incident in Samson’s story, he, a Nazirite, went down to Timnah to marry a Philistine woman, despite his parents’ opposition. As I studied his story in preparing for this message, I found myself questioning, again and again, ‘Did Samson ever once live faithfully in the eyes of God as a Nazirite?’
The very first incident had to do with marrying a gentile woman. Women were his perpetual weakness, which he never overcame. A Nazirite is supposed to have the highest level of self-control. Yet, Samson could not even control his lust for women. Three women appear in Samson’s story: first, the Philistine woman in Timnah, second, the prostitute in Gaza, and third, Delilah, the woman in the Valley of Sorek who ultimately destroyed him. Samson never escaped a woman’s arms. His life was ruined because he was tempted by women.
And what about his strength? Did he ever use it to defeat the enemy by fighting in Israel’s battles? No. The first time heused it was when he killed a lion on the way to Timnah to meet the woman he fell in love with. The second time was when he gave a riddle to the guests at his wedding, wagering thirty linen garments and thirty sets of clothes. No one knew the answer to the riddle but himself, but, at his wife’s badgering, he revealed the secret, losing the bet with his enemies. Samson thenwent down to Ashkelon and killed30 men in his rage, giving their clothes to those who explained the riddle.
Samson’s greatest problem, however, was that he did not maintain a clear, upright relationship with God. The only time his prayer is mentioned in the Bible is when he prayed at the Temple of Dagon. Samson did not live a life of prayer until he was hit with a critical crisis.
I even have doubts as to whether Samson lived as a Nazirite.
Who is a Nazirite? Numbers chapter 6 records in detail the rules concerning a Nazirite. A Nazirite is someone who has dedicated himself to God. The first rule is that “they must abstain from wine and other fermented drink and must not drink vinegar made from wine or other fermented drink. They must not drink grape juice or eat grapes or raisin.” (Numbers 6: 3) A Nazirite could not even drink grape juice, let alone wine. The rules continue: “During the entire period of their Nazirite vow, no razor may be used on their head. They must be holy until the period of their dedication to the Lordis over; they must let their hair grow long.Throughout the period of their dedication to the Lord, the Nazirite must not go near a dead body.” (Numbers 6: 5-6)
Then did Samson observe these rules? It appears that he kept the rule on his hair to the very end. But it is clear that he did not keep the rest very well.
First, he broke the rule forbidding him to drink wine in Judges 14:10 which tells us that he had a feast after getting a gentile wife in Timnah. According to the custom, such a feast would last for 7 days. And as the groom, the main guest, 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for Samson to stay away from wine. In this sense, Samson had already broken the first rule on being a Nazirite.
However, the Bible does not explicitly say that Samson drank wine. So, some may feel an urge to defend him. Still, he committed far too many wrongs to be excused.
A Nazirite is not supposed to eat or even touch anything unclean. Yet, Samson very easily broke this rule. In Judges 14:5-7 Samson killed a lion on his way to Timnah. A few days later, he even ate the honey from the lion’s carcass, bringing it to his parents. Samson not only touched a dead lion, but ate the honey that grew in it. The Old Testament tradition considers both a dead body and a carcass unclean. Samson broke this second rule, too, by eating the honey from a dead lion.
Many readers mistakenly believe that Samson broke his vows as a Nazirite by letting his hair be shaved by Delilah. Buta careful reading of Judges reveals that this was only the last violation in a series of broken vows. Samson, with only his hair left untouched, had already broken and forgotten his vows as a Nazirite. But he did not know it. He thought his strength came from his untouched hair. It was a psychological and symbolic thing.
In Samson I see us. We, too, may have forgotten our relationship with God, becoming friends with the world, in body and in spirit. Aren’t we, by any chance, living a life like Samson who gave his heart and body to the world and drifted away from God, believing that he had kept his promise with God by leaving just his hair untouched? Samson’s spiritual upbringing from birth came to nothing. Samson failed to overcome his weakness, gradually become immersed in the world, and felt a false sense of security in his hair. Aren’t we a bit like him?
Dear Church, how have we lived? Did we live as we were taught? Did we control our weaknesses, problems, lust, and desire, and thoughts? Did we keep our promise with God? Or were we friends with the world, with only our names listed in the church and the tithes register?
Interestingly, as soon as Samson crossed the final line, the one last rule that Samson tried to keep, destruction came all too quickly. As soon as his head was shaved, he felt the power of God leave him.
In truth, Samson had already left God. Yet, it appeared that he still possessed God’s power. But when he cut that last line that connected him to God, his hair, God left him completely, even in terms of His relationship with him.
He was taken prisoner, his eyes were gouged out, and his enemies mocked him. It appeared that Dagon had prevailed. But, at the very scene of the enemy’s feast, God moved Samson’s heart. He made it turn to God. He made Samson pray earnestly. And Samson, for the very last time, destroyed the Temple of Dagon, achieving God’s victory, not Dagon’s.
Yes, it is a myth-like story. Despite Samson’s weaknesses and failures, God turned his life into a masterpiece. Despite man’s mistakes and failures, God uses even them to achieve His victory.
In the story of Samson today, there are some aspects on which God makes us refocus: the point in which He abandons Samson and the point in which He uses him again.
When did God abandon Samson? Was it when he decided to marry a Philistine woman? Was it when he broke the rules forbidding a Nazirite to touch a carcass or eat an unclean animal? No. Even after these incidents, the Spirit of the Lord came powerfully upon him. As long as Samson kept at least one rule on being a Nazirite, which for Samson was not cutting his hair, God did not leave him.
To us, this is grace.
Then when did God use Samson again? There is an interesting verse in today’s passage that seems out of place and rather unnecessary: “But the hair on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had been shaved.”(Judges 16: 22) Logically, we cannot understand why this verse is needed.
The previous passages are about Samson getting his eyes gouged out and being shackled to a grinding grain. His head has been shaved, leaving him powerless. There is no reason why this powerless state must change just because his hair grows back. It is not logical that his power would grow with his hair. His hair will not restore him to a Nazirite.
Yet, God places a verse of hope right here. Samson’s hair began to grow back after it was shaved. As God watched Samson’s hair grow back, God probably decided to see him as a faithful Nazirite who kept His commands. This, I believe, is the hidden meaning behind that verse.
This is also related to Samson’s last prayer. When Samson prayed his last prayer, God listened and gave him a supernatural strength one last time. This was God’s grace.
Dear Church, I want us to look back on ourselves. Haven’t we lived like Samson? Haven’t we been that pathetic man who thought he was a child of God, even when he had lost all holiness? Even when all he had was one last appearance of faith? God is asking us these questions to us today through the story of Samson.
At the same time, God makes us see His love and grace that restore Samson by making his hair grow back—even after his miserable failure. Our Lord loves us to the end. And He waits for us to the end. Even in a situation where our head has been shaved and it seems that all is over, our Lord watches us as our hair grows back and speaks words of hope in that place of failure.
I hope these words will encourage you: “But the hair on his head began to grow again after it had been shaved.”(Judges 16: 22)
사사기 16: 15 ~ 22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흥미롭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본문입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며 보내던 시기에 한 학기에 두 번, 서로 다른 교수님이 삼손과 관련한 설교를 선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앞선 교수님의 설교를 듣고 이어서 다른 교수님이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신 경우였습니다. 어쩌면 두 분의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설교이기도 했는데요. 학생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설교였습니다. 두 분 모두 삼손의 이야기를 주제로 신학적인 관점을 설파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무척 달랐습니다.
먼저 설교하신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교만을 지적하시면서 삼손의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삼손이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로 영적 상태의 변질을 지적하셨습니다. 삼손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사의 사역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각해졌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힘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교수님은 삼손이 7번의 초자연적인 힘을 사용하였다는 내용을 정리하시면서 삼손이 힘을 쓰는 사건마다 사용되는 표현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습니다.
삼손이 초자연적인 힘을 쓴 세 번의 경우에서 교수님은 “삼손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다”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셨습니다. 첫 번째 딤나의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난 14장 6절에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라고 표현되었고, 내기에 진 삼손이 베옷 삼심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마련하기 위해 아스글론에 내려간 14장 19절에서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러 온 15장 14절에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후 네 번째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동일한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즉 삼손이 힘을 쓸 때마다 “삼손이”(삿 16:9) “삼손이”(삿 16:12), “삼손이”(삿 16:14) 라는 일반적인 서술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는 인간 삼손의 모습이 조명되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마지막 7번째 사건에서 머리털이 밀린 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 삼손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삿 16:20) 여기서 설교자는 “내가”라는 말에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삼손을 이미 떠나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설교자는 삼손이 하나님을 점차 의식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게 된 것이 그가 파멸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평가합니다.
그러자 몇 주 후에 다른 교수님께서 삼손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서 ‘과연 삼손이 파멸하였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교수님은 히브리서의 말씀,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히브리서 11장 32~33절)
이 말씀을 중요하게 보도록 요청하면서 삼손은 여러 번 실수하였고 실패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하셨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설교자는 삼손이 다곤 신을 섬기는 제사의 자리에서 그들이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삿 16:24)고 말하던 순간에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설교자 교수님은 이와 같은 설교를 하시며 오늘날의 기독교가 삼손의 잘못과 같은 많은 잘못을 저지르지만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돌이키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승리를 만들어 가실 것이라며 눈물 어린 설교를 하셨습니다.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던 매우 흥미롭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두 편의 설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실패가 있고 타락이 있고 변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주님께로 다시금 돌아가는 삼손의 이야기가 있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사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저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멋지다, 훌륭하다.” 생각보다는 “아쉽다, 좀 더 잘하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비록 다곤 신전에 모였던 블레셋 사람 삼천 명을 죽이는 큰일을 하였지만, 그가 조금 더 자신을 관리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런 생각은 더 강해집니다. 사실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것을 받고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의 여정은 참으로 안타까웠고, 마지막은 참으로 비극적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을까요?
<삼손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떠나 그의 출생은 특별했습니다.>
삼손의 안타까운 삶과는 무관하게 성경은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알립니다. 삼손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서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사사기 13장은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아버지 마노아와 어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해 줍니다. 단 지파의 가족 중에서 마노아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임신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향해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사사기 13장 3~5절)
그런데 이때 아내의 남편 마노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남편에게 사자가 전한 예언을 알려 줍니다. 며칠 후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나타나서 이전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하는데, 그 내용이 사사기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사기 13장에는 삼손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난 셈입니다. 첫 번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두 번째는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세 번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삼손을 나실인으로 키우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따라 부모는 삼손을 키웠겠지요. 이렇게 특별하게 키운 아이가 삼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특별하게 키운 것과는 다르게 교육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삼손은 건달 같기도 하고 망나니 같기도 합니다. 부모의 신앙적인 교육이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나실인으로 태어난 삼손의 첫 번째 이야기는 그가 딤나에 내려가서 블레셋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아내로 삼는 내용입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여인과 결혼을 하지요. 그래서 저는 삼손의 이야기를 읽어 가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한 번이라도 신실하였는지, 나실인으로 정결하게 살았는지를 의심의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첫 번째 이야기가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삼손은 여자에게 너무 약했습니다. 나실인은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삼손은 여자 문제조차도 스스로 해결하고 제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에 세 여인이 등장하지요. 첫째는 딤나에 사는 블레셋 여인으로 삼손은 그녀와 결혼을 합니다. 그 후에 큰 문제가 생겼지요. 이어서 가사에 사는 기생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세 번째로는 삼손을 파멸로 이끈 소렉 골짜기의 여인 들릴라가 나옵니다. 이처럼 그는 늘 여인의 품에 있었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 파멸한 것이 삼손의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사용한 힘은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을 위해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장군의 이야기는 삼손 이야기 속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힘을 사용한 첫 번째 이야기는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딤나로 내려가는 길에 젊은 힘 센 사자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결혼 잔치에서 하객들에게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걸고 수수께끼를 내지요. 그 수수께끼는 삼손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 내용을 알려 주고, 결국 사람들이 수수께끼를 풀게 됩니다. 그때 삼손이 화를 내면서 아스글론에 내려가서 그곳 사람들 삼십 명을 쳐 죽이고 옷을 약탈해 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삼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기도하는 모습은 단 한 번, 최후에 다곤 신전에서 했던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결정적인 위기가 도래하기 전까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출생에 비해 삼손의 생애는 안타까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과연 나실인답게 살았을까요? 이것 또한 매우 의심이 됩니다. ‘나실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나실인에 대한 규정은 민수기 6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나실인은 여호와께 거룩한 자를 의미합니다. 첫 규정은 이렇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민수기 6장 3절)
포도주 정도가 아니라 어떤 술도 마시지 말며, 심지어 포도즙도 마시지 말라는 규정입니다. 이어지는 나실인의 규정은 이렇습니다.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의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의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민수기 6장 5~6절)
그렇다면 삼손은 나실인의 규정을 잘 지켰을까요? 물론 삼손이 머리털을 밀지 않는 규정은 마지막까지 지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나실인 규정은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첫 번째 약속인 ‘포도주와 독주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조항은 14장 10절에서 깨집니다. 14장 10절에 의하면 삼손은 딤나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후에 잔치를 벌입니다. 당시 풍속에 의하면 결혼 잔치는 7일간 계속되었는데, 이 잔치의 주빈(主賓)이 삼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함께하는 술잔치에 주빈이 일주일 내내 술을 안 먹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삼손이 나실인의 첫 번째 규정을 깨트린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성경에 삼손이 술을 마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독주를 마시지 않았다고 삼손을 변호해 주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을 변호하기에는 그의 잘못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것을 먹어서도 안 되는데 삼손은 이 조항도 아주 가볍게 깨트립니다. 14장 5~6절에 따르면 삼손은 딤나로 내려가다 젊은 사자를 죽이지요.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죽은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맛보고 부모에게 가져갑니다. 죽은 사자를 만졌을 뿐 아니라 죽은 시체 속에 있었던 꿀을 먹은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은 죽은 것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부정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죽은 사자의 몸에 붙어 있는 꿀을 먹음으로 나실인의 두 번째 규정을 아주 가볍게 파기하고 맙니다.
삼손의 이야기를 읽는 많은 사람들은 삼손의 머리카락이 들릴라에게 밀릴 때 나실인의 서약이 깨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머리털이 밀린 사건은 엄밀히 말하자면 마지막 남은 하나의 보루였을 뿐입니다. 삼손은 머리털만 자르지 않았을 뿐, 나실인으로서의 약속을 서서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삼손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힘이 머리털을 자르지 않은 데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삼손의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잊고 세상에 서서히 몸과 마음을 담그고 있는 우리 모습을 봅니다. 세상에 마음과 몸을 모두 빼앗겨 버린 채, 그저 한 가닥 약속으로 남은 머리카락만 자르지 않았을 뿐 하나님과 이미 멀어진 인생을 살고 있는 삼손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신앙적인 교육도 효과가 없었고,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유혹의 문제를 극복해 내지 못하고 세상에 서서히 빠져드는 삼손의 모습, 그러면서도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삼는 모습에서 우리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의 안타까운 생애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았습니까? 배운 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약점과 문제, 생득적인 욕심과 정욕과 생각을 잘 다스렸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제대로 지키었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발을 담근 채 하나 남은 교회 출석이라는 명분, 헌금 생활이라는 명분만 가지고 신앙을 유지해 오지는 않았습니까?
참으로 재미있게도 삼손의 이야기는 신앙의 마지노선, 삼손이 생각하는 그 선을 넘자마자 급격하게 무너졌음을 알려 줍니다. 삼손은 머리털이 밀리자마자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간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과 이미 떠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하나, 머리카락을 자르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도 남지 않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두 눈이 뽑혔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마치 다곤 신의 승리처럼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삼손의 실패를 축하하며 축제를 벌이는 순간에 삼손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간절히 기도를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삼손이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승리라는 최후 결말을 만들어 내도록 하셨습니다.
신화 같은 삼손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조차 이용하셔서 승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보도록 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버리시는 시점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사용하시는 시점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언제 버리셨습니까? 이방 여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설 때였을까요? 아닙니다. 나실인으로서 시체를 만지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을 때였을까요? 아닙니다. 이후에도 삼손은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하는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정말 마지막까지,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한 가지나마 지키는 그 시점까지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삼손을 언제부터 다시 사용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서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바로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장 22절)
라는 말씀이지요. 왜 있어야 하는지 논리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말씀 앞의 내용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눈을 빼고 맷돌을 돌리게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밀린 상태여서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머리털이 자라난다고 달라질 이유도 없지요. 머리카락이 자라나면 다시 힘이 생기는 것도 논리상 아닙니다. 나실인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한 가닥 희망의 말씀으로 이곳에 넣어 두셨습니다. “머리털이 밀렸지만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머리털이 자라서 머리를 덮어 가는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은 삼손이 나실인으로 약속을 지키며 살았던 것처럼 보시겠다는 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삼손의 마지막 기도와 연결됩니다. 삼손이 주님께 기도할 때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힘을 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삼손처럼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이미 거룩함을 잃어버렸음에도 마지막 한 가지 신앙의 틀을 붙잡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존재는 아니었는지, 오늘 주님은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삼손의 처절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머리털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게 하십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머리털이 밀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은 머리털이 자라나는 작은 변화를 보시며 그곳에서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사사기 16장 22절)
우리 모두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바라고 계십니다.
2021년 7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삼손의 머리털과 하나님” (삿 16:15~2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89장, 31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삿 16:15~2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삼손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실패가 있고, 타락과 변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는 삼손의 이야기가 있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사사로 쓰시는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삼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설교의 요약
삼손은 특별한 계시를 통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의 부모들은 약속의 말씀을 따라 아이를 키웠을 겁니다. 그런데 특별하게 키운 것 치곤 그 신앙 교육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삼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번이라도 신실하게 살았을까?” 생각들 정도로 자기 마음대로 살았죠. 특히 여자에게 약해서 항시 여인의 품에 있었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서 파멸한 것이 그의 인생이었습니다. 또 그가 사용한 힘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삼손이 이스라엘을 위한 전장에 나가서 사용한 흔적이 없습니다. 자신의 소욕과 분노를 해소하기 위하여 그 힘을 사용했습니다. 무엇보다 삼손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위기가 도래하기까지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지 않았고, 부모가 나실인으로 키워왔음에도 나실인 규정들을 수시로 어겼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흔히 삼손의 머리카락이 들릴라에게 밀릴 때 그 나실인 서약이 깨졌다고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머리털이 밀린 사건은 그에게 마지막 남은 보루였을 뿐입니다. 이미 삼손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약속의 의미를 잊고 있었습니다. 상징적, 심리적으로 머리털을 자르지 않은 것, 거기에서 힘이 나온다고 봤던 것입니다. 삼손의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잊혀져가고 서서히 세상에 몸과 마음을 담그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그저 한 가닥 머리털이 밀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 삼손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 발을 담근 채 교회 출석, 헌금 생활이라는 명목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유지하진 않았습니까?
삼손은 머리털이 밀리자마자 하나님의 능력이 떠났음을 압니다. 이미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졌음에도 머리털이 잘리자 이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삼손의 이야기는 처절한 실패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실패조차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승리로 이끄십니다. 이를 통해 다시 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삼손을 버리는 시점과 다시 사용하는 시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한 가지라도 지키는 그 시점까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언제 삼손을 다시 사용하셨습니까?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고 달라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손의 머리털이 밀렸지만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마치 삼손이 나실인으로서 약속을 지키며 살았던 것처럼 봐주시겠다는 의지를 담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들으셨고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삼손의 실패는 처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것을 보며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 그 의지를 보여 주십니다. 우리 모습을 돌아봅니다. 삼손처럼 살아오진 않았습니까? 거룩함을 잃고서 마지막 남은 신앙의 틀의 한 가닥만 붙잡고 안일하게 살진 않았는지요? 오늘 이 말씀이 그런 우리에게 위로의 말씀, 희망의 다짐과 결단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삿 16:22)
나누기
1. 삼손처럼 거룩함을 잃고 상징적, 심리적으로 붙들고만 있는 머리털과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2. 삼손의 다시 자란 머리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며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마무리 기도
우리를 끝까지 품으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세상의 것에 발 담그고 한 가닥 신앙의 틀을 붙들고 안일하게 살고만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한 것처럼,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믿음으로 일어서게 하시고 주의 자녀답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