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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의 번짐 : 은혜에서 사명으로

에베소서 2:8~10

김경진 목사

2026.01.11

<세상에서 선함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2026년 두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새해의 주제인 선함의 번짐이 이제는 조금 더 익숙하게 다가오실지 모르겠습니다. 선함이라는 덕목은 사실 기독교만의 덕목은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선함을 덕목으로 꼽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선을 행하는 것을 귀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이렇듯 선을 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받을 만한 일로 여겨집니다. 심지어는 제도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나 보상을 주는 제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함은 공통의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선행도 스펙이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유행하는 말인데, 선행이 순수한 동기를 넘어서서 하나의 경쟁력이나 실력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대학 입시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봉사활동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이웃을 향한 애정과 사랑의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선행이 생활 기록부에 들어가는 점수가 되었습니다. 헌혈을 한 번 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했다는 자부심보다는 봉사 점수로 여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취업 시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면접 자리에서 종종 다뤄지는 질문 중 하나는 사회 공헌을 한 경험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자 봉사 점수와 경력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합니다.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활동은 해외 봉사단 파견으로, 이를 위해 수백 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기도 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다른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장에서 여겨지는 선행은 단지 어떤 기업이나 조직에 들어가려는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권장하는 것이 사회 현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왜 선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장려할까요? 여기에는 매우 실용적인 이유들이 있다고 합니다. 선행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선행은 상호부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면, 언젠가 내가 어려워졌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인 상호 약속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약속이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더 발전해서 요즘 진화론자들은 선행을 향한 동기를 사람의 신체 안에 새겨진 생존 본능으로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선행이나 서로 돕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선행은 경제적으로도 사회 비용을 줄이는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서로 믿고 도와야지만 경찰 인력을 늘리지 않아도 되고, CCTV 등의 비용도 절감됩니다. 심리학에서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남을 도울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선행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은 사회적인 비용을 줄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지역 뉴스를 다루었던 신문인 ‘스프링필드 모니터(Springfield Monitor)’에 1897년 8월 26일 자로 실린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링컨의 일화입니다. 링컨이 마차를 타고 진흙 길을 가던 중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과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동승자에게 이런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선행은 결국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동승자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라고 하면서 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마침 그들이 탄 마차가 늪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통나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강둑 위에서 한 마리의 늙은 암퇘지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유는 새끼 돼지들이 늪에 빠져서 익사할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그것을 보고 마차를 세우고는 뛰어 내려가서 진흙과 물에 빠진 돼지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서 강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다시 마차로 돌아왔을 때 동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브, 방금 이 일에서 이기심은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러자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이봐 친구, 바로 이것이 이기심의 정수라네. 내가 저 고통스러워하는 어미돼지와 새끼들을 두고 그냥 갔더라면,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네. 나는 나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라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행의 종착지에는 항상 나 또는 우리가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그토록 존경받을 만한 링컨의 선행조차도 이와 같은 개인적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이기심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에게 이득이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회와 세상이 우리에게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선행에 대한 강조는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종교 속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에서는 선행을 ‘보시(布施)’라는 말로 부릅니다. 탐욕을 버리고 공덕을 쌓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내가 베푼 선이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있죠. 또한 ‘업, 혹은 업보(Karma)’와 같은 논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선행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분들이 선행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삼죠.

이슬람교에서는 ‘자카트(Zaka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수입의 일정 부분을 반드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의무 조항입니다. 자카트는 ‘정화’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내가 가진 부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부가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들의 것을 나눠줘야 나의 재산이 깨끗해지고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선행을 통하여 자신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정화될 수 있다고 가르치죠. 이렇듯 선한 행실은 여러 종교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효용의 가치로 선행을 격려하는 이유와 여러 종교에서 선행을 가르치는 이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선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이 말씀 속에는 선행이나 선함에 대한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선행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선행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이 선행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하는 전제 조건을 먼저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일반적으로 선행의 요구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통 구원의 결과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선한 행위가 강조되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가르치는 인과응보의 사상과 자력 구원의 체계입니다. 내가 먼저 선을 쌓아야만 나중에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업보(Karma)라고 부르는 것은 선한 업을 쌓아야만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말씀은 그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고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기독교 외에 이렇게 구조가 바뀌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기독교는 그 사실을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σεσῳσμένοι[sesōsmenoi], 완료형)’에 사용된 헬라어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사랑을 받겠습니까? 아이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모든 돌봄을 거저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카리스(χάρις[charis])’, 즉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실적이나 스펙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무조건적으로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전에 이미 구원이 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의 동기는 거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선행과 관련해서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차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선행을 통해서 구원으로 가는 기차표를 얻는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표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 열차의 표가 쥐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선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차 안에서 우리가 부르게 되는 노래와 같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행복하고 즐거운 축제와 같은 곳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도구로서 끊임없이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권에 양파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 못된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살면서 좋은 일은 하나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어서 결국 불바다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래도 천사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구해 줄 만한 것이 없는지 찾기 위해 할머니의 인생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살면서 단 한 번 했던 선행을 찾았습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뿌리를 하나 뽑아서 가난한 여인에게 주었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서 그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지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선행과 구원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이유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끌어 올려 줄 만한 것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든든한 밧줄을 만들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세상과 다른 종교가 선함을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나머지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천사가 할머니에게 양파 줄기 하나를 내밉니다.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의 발을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뒤에 붙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의 것이 아니라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렸고, 할머니는 다시 불바다로 떨어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할머니의 선행이 왜 실패했습니까? 그에게 선행은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직 나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는 사람들 중에 이 할머니처럼 양파 줄기를 붙잡듯 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구원과 보상을 위해 행하는 선행은 결과적으로는 ‘자기애(自己愛)’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양파 줄기에 매달린 이웃을 걷어차고서라도 나만 올라가면 된다는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양파 줄기를 붙잡고 홀로 살려고 했던 할머니의 선행이 거래였다면,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효도와 연결해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는 이유가 장차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효도이겠습니까? 숭고한 도덕이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거래일 뿐입니다. 그 마음속에는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가 얻을 이익에 대한 생각뿐일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먹이고 키워 준 부모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그 사랑에 겨워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노력은 선행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정한 선행의 동기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우리의 인생은 ‘거래’에서 벗어나서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지 염려하는 두려운 질문은 사라지고, 이미 받은 구원의 기쁨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 생각하는 것이 참된 선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을 행하는 작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여기서 ‘만드신 바’라는 헬라어는 ‘포이에마(ποίημα[poiema])’입니다. 이는 ‘걸작품(Masterpiece)’과 ‘시(Poem)’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기계적으로 찍어 내지 않고, 마치 시인이 단어 하나를 고르는 듯이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술가는 예술품을 만들 때 작가의 의도를 그 안에 담습니다. 성경은 ‘우리’, ‘나’라는 작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부터 ‘선한 일을 하는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재료를 통해 우리를 다시 빚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에게는 작품에 걸맞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함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6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꿈꾸는 ‘선함의 번짐’은 선한 행위로 자부심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갖추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대로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내 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이웃과 일터,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으로서의 선함’입니다.

이번 한 주간 누군가에게 작은 선을 베풀 때, 이런 마음으로 고백해 봅시다. “이것은 나의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번져 갈 뿐입니다. 내가 하는 이 작은 일이 나의 자부심이나 나를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나를 통해서 번져 갈 뿐입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가 선행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선행은 ‘스펙’이 아니라 ‘사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에 걸맞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포이에마’답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번지게 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The Spread of Goodness: From Grace to Mission

 

Ephesians 2:8-10

 

 

It is now the second Sunday of 2026. Our theme for this year, “The Spread of Goodness,” may sound a bit more familiar to you now.

 

When we talk about this theme some may say, “Doing good—isn’t this a value prized by everyone and all religions, not just by Christians? And doesn’t society also encourage goodness and priase those who do good? This emphasis on doing good deeds is not unique to Christianity. Don’t all religions and all societies ultimately pursue this value?”

 

Of course, on the surface, there doesn’t seem to be much difference between the goodness pursued by Christians and the goodness pursued by other religions and society. But, with some scrutiny, we will find that the former is signigicantly difference from the latter. Today, I would like to talk about by why Christianity emphasize goodness, based on the words given to us in Ephesians.

 

As I mentioned, the society we live in generally considers doing good a very noble thing. When we do good, we are praised and encouraged by others. Our institutions even give incentives and compensation to citizens who do good deeds.

 

Brothers and sisters, have you ever heard people say, “Good deeds is also a credential”? This captures Korea’s reality where good deeds are treated more as a personal asset, a competitive edge, and a skill rather than an act done from a pure motive.

 

A prime example of this is Korea’s college admittance process. In the past, volunteer work was an expression of care for our neighbors; however, it has now merely become “points” that students must accumulate for their school records. When a student donates blood, the joy of saving a life is often overshadowed by thoughts like, How many service hours can I get credited for this?

 

I don’t know the exact reasons, but it seems that it’s not easy for young people to join the Air Force these days. To get into the military branch they want, I have heard that volunteer experience is now necessary.

 

What about the job market? Large companies and public enterprises almost always ask applicants about their “social contribution experiences” in job interviews. It’s ironic to see young people compete fiercely to get into overseas volunteer programs — the competition ratio exceeds 100:1 — just to secure a job at a reputable firm. I feel bitter about this reality where our young have to win in yet another competition to help others. In such a world, people’s good deeds become a mere “skill” that shows just how committed they are and how ready they are to serve the organization.

 

Then why do people of this world think it is good to do good deeds? Why are good deeds so encouraged in our lives? The answer lies in very practical reasons — the many benefits of good deeds.

 

Sociologically, good deeds are strongly related to mutual aid. It can be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a social contract based on reciprocity: If I help someone in need today, I might receive help from others when I am in need someday.

 

These days, some evolutionists explain this motivation as survival instinct. They argue that good deeds and helping each other are necessary for humanity’s survival.

 

In psychology, there’s a concept called “helper’s high.” When we help others, our brains release dopamine, which makes us happy. Thus, good deeds can be viewed as “emotional vitamins” for ourselves. Therefore, doing good is both necessary and beneficial to us.

 

Economically, good deeds significantly reduce social costs. Trusting and helping one another contributes to lowering societal expenses such as policing and installing CCTVs.

 

As such, the world’s discussion on good deeds ultimately ends with “my/our” benefit. According to the world, we teach and encourage good deeds because it is beneficial to us. This is the reason society and the world emphasize good deeds.

 

This emphasis on good deeds can also be easily found among the great religions throughout human history.

 

For instance, in Buddhism, good deeds are referred to as “dāna” (T/N: Sanskrit for “generosity” or “givining”). It is seen as a practice that involves abandoning greed and accumulating merit. The idea of “karma,” or cause and effect, where the good I do will ultimately return to me, has inspired many to engage in altruistic acts.

 

In Confucianism, good deeds are seen as a way to practice “ren (仁),“ humanity’s natural heart. As the first step to cultivating oneself, regulating the family, governing the state, and bringing peace to the world (修身齊家治國平天下), good deeds have been encouraged as a virtue of the “junzi,” the ideal person, whose aim is moral perfection.

 

In Islam, “zakat” requires individuals to give a portion of their income to the poor. The term “zakat” means purification. In Islam, it is believed that our wealth contains a share belonging to the needy, and by sharing it, our possessions are purified and blessed. It is also thought that performing such good deeds purifies one’s greedy heart.

 

Thus, in various religions, good deeds are encouraged and deemed an essential part of spiritual practice.

 

Thus far, we have explored why people encourage good deeds based on their practical benefits and the various reasons why different religions teach and promote acts of kindness. So, how does the Christian perspective on good deeds differ from these views?

 

On August 26, 1897, The Springfield Monitor published an article featuring an anecdote about Abraham Lincoln, America’s 16th president.

 

While riding in a carriage down a muddy road, Lincoln once had a debate with a fellow passenger. Lincoln contended that all human good deeds ultimately stem from selfishness. However, his companion argued against Lincoln’s opinion. At that moment, as they were passing through a marsh, they saw an old sow crying out in distress on the riverbank. The reason was that her piglets were in danger of drowning in the mire. Upon seeing this, Lincoln stopped the carriage, jumped down, and began to lift the piglets out of the mud and water, placing them on the riverbank. When Lincoln returned to the carriage, his companion asked, “So, Abe, where’s the selfishness in that act?” Lincoln replied, “Well, my friend, that’s the essence of selfishness. If I had left that suffering mother and piglets behind, I wouldn’t have had peace in my heart all day. I did that to find peace for my own heart.”

 

Does this mean we should do good deeds because they bring us comfort? While such psychological effects, like “helper’s high,” do provide significant benefits, this is not the reason the Bible gives for doing good.

 

So,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the reasons for good deeds? Today’s Scripture tells us: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and this is not from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not by works, so that no one can boast.” (Ephesians 2:8-9 NIV)

 

This passage reveals something very important regarding good deeds and the spread of goodness: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Generally, in most religions, the requirement to do good deeds is connected to salvation. In such cases, good deeds are always required as a precondition for obtaining the result of salvation.

 

Most religions operate on the principles of cause and effect and self-salvation. They suggest that one must accumulate good deeds first in order to achieve salvation later.

 

This is the principle of karma in Buddhism, which teaches that one must accumulate good karma to be born into a good place in the next life or to reach nirvana. In Buddhism, good deeds are seen as the cause, that is, the precondition for the result, salvation.

 

Confucianism is similar. While it is more accurately an ethical system, it teaches that one must first cultivate oneself through good deeds to achieve sagehood and social peace, as expressed in the saying “修身齊家治國平天下” (cultivating oneself, managing the family, governing the state, and bringing peace to the world).

 

Islam follows the same principle. On the Day of Judgment, good deeds will determine a person’s fate.

 

However, today’s passage from Ephesians 2:8 completely changes this structure. To my knowledge, there are no other examples, outside of Christianity, where such a structure is altered.

 

God’s requirement toward us to do good deeds is not a condition for salvation. God has already granted us salvation first.

 

“For it is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Note that this is written in the past perfect tense.

 

Brothers and sisters, what has a newborn baby done for its parents that makes them love and care for it so deeply? Is it because the baby changes its own diapers? Or because the baby brings home money? No, the baby has done nothing at all. The baby has simply been born; it receives all the care it needs for the sole reason that it is the parents’ child.

 

This is what the Bible calls “charis (χάρις),” or grace. We have not earned any merit or qualifications to receive salvation from God. Yet, God has adopted us as His children and has given us every spiritual blessing from heaven as a gift. Understanding this order of things — that salvation has already come “before” we do any of our good deeds — is central to the Christian faith.

 

Herein lies a significant difference from other religions. Generally, in other religions, the motivation for doing good often stems from a fear of going to a bad place or a desire to receive blessings. However, the motivation for good deeds in Christianity comes from the joy and gratitude of having received salvation as a gift. That is, God’s grace comes first.

 

Therefore, Christians must not be mistaken about good deeds. Our good deeds are not a ticket to heaven. That ticket to salvation has already been freely given to us by Jesus. Through faith, we have received the ticket to salvation.

 

So, what are good deeds to us? For Christians, good deeds may be compared to the songs we sing on the train to salvation. It may also be compared to a festival that we, as God’s children, happily enjoy in this world as we journey toward our final destination.

 

Salvation and good deeds are not bound together by conditions, but are tied together by love and joy. Gratitude generates good deeds. The joy of salvation leads us to goodness. The grace of salvation given freely to us by the Lord guides us to a path of voluntary goodness.

 

The following is a story in Dostoevsky’s novel The Brothers Karamazov.

 

Once, there was a wicked old lady who, after her death, was cast into a fiery abyss because she had done no good deeds. However, her guardian angel searched for a way to rescue her and remembered a single good deed she had done, which was giving an onion bulb to a beggar woman. Upon hearing this, God said, “Take that onion and let her hold onto it. If she comes out of the fire holding the onion, she will go to heaven; if the onion breaks, she will remain in the fire.”

 

Brothers and sisters, the structure of this story illustrates the belief that salvation is gained by good deeds. It shows our belief that our good deeds will ultimately lead to salvation.

 

But what happens next in the story? The guardian angel presented the onion to the old lady, who cautiously began to climb up holding onto the onion. But then, other prisoners began to cling to her. So the old lady kicked them away, saying, “This is my onion, not yours!” As soon as she said that, the onion broke, and she fell back into the fire.

 

Dear friends, why did the old lady’s good deed fail? Because it was not an act of love for others; it was merely a “rope” for her own salvation.

 

Among those who diligently perform good deeds with a religious fervor, some are like this old lady, accumulating good deeds as if holding on to their “onion.” They think, I will have to dedicate this much to receive a great reward in heaven, or If I give this much, God will like me more.

 

However, good deeds performed for personal salvation and personal compensation are ultimately only an expansion of self-love. Underneath, there lies hidden a deep-seated selfishness that wishes, Only I will climb up my onion even if it means kicking at all my neighbors dangling on it.

 

The world continuously urges us to climb the “ladder of good deeds.” It tempts us to achieve a higher moral standard or to build impressive credentials through service in order to be finally recognized and rewarded with salvation. However, the Bible completely reverses this order.

 

If the good deed of the lady who held onto the onion was a “transaction,” then the good deeds spoken of in the Bible are “love.” We can discover this difference in the concept of “filial piety.”

 

If you show a deep filial piety toward your parents solely for the “inheritance,” then that is not a noble morality, but a mere business “transaction.” Beneath such actions is a selfish calculation about your personal gains, rather than a love for your parents.

True filial piety, however, is different. You are so thankful for the fact that your parents brought you into this world and raised and fed you unconditionally all those years that you cannot help loving them back and serving them. Isn’t this true filial piety?

 

The good deeds that the Bible talks about can be seen as a “universal filial piety” toward God. God does not propose a deal to us saying, “Do you want to go to heaven? Do this much good work.” Instead, He gave us the most precious gift of salvation through His only Son, Jesus Christ, when we were yet sinners and completely unqualified.

 

Once we realize this grace, our lives shift from “transaction” to “love.” The fearful question, “What must I do to be saved?” disappears, and we begin to think in our hearts, “How can I please the Lord, who saved a sinner like me?”

 

So, how can we, as those who have received salvation as a gift, please the Lord? Let’s look at verse 10.

 

“For we are God’s handiwork, created in Christ Jesus to do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in advance for us to do.” (Ephesians 2:10 NIV)

 

Here, “handiwork” is translated from the Greek word “poiema (ποίημα),” which means “masterpiece” or “poem.”

 

When God created us, He did not produce us mechanically, but crafted us with care, just as a poet chooses each word thoughtfully.

 

You see, when an artist creates a work, he/she imbues it with “the artist’s intent.” What is God’s intent embedded in us as His masterpiece? It is “to do good works.”

 

The reason God remolded us with the finest material, Jesus Christ, is to display His goodness to the world through our lives. In other words, good deeds are not tools to build our reputation; they are God’s “exhibitions” that reveal the artistry of our Creator. When we live good lives, people do not see us; they see God, who shaped us. Our good deeds are magnificent artworks that display God.

 

Now, what are the “good works” that God wants to show the world through us? Is it merely about living morally good lives? “Goodness” in the Bible refers to acts that reflect the character of God. It is to have our gazes set on where God’s gaze rests. The world may show goodness to those who will benefit them, but we, as God’s masterpieces, reach out to the weak who have no way of paying us back. The world does good works to prove themselves, but we extend forgiveness and patience to others just as the Lord has done for us.

 

Being honest in your workplace, speaking words of blessing instead of criticism in your home, wiping away someone’s tears in a place where no one sees—this is the life of “poiema” that God has prepared for us. It’s not about grand achievements; it’s about the small pieces of our lives coming together to form a beautiful poem that exhibits God’s goodness.

 

Dear friends, the “spread of goodness” we envision in 2026 is not about proving how great we are. We have already received an overwhelming grace from God. This grace should not just remain within us; it must flow through us to our neighbors, our workplaces, and the world. This is the goodness as a mission.

 

This week, when you do a small act of goodness for someone, confess this: “This is not my goodness; it is God’s grace spreading through me, who loved me first.” When we do so, our good deeds will become not a “credential” but the “Gospel.” As God’s “poiema,” His poem, may you spread goodness in all the world this blessed week through your beautifu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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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8~10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세상에서 선함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거래의 수단으로 전락해 있습니다.>

 

2026년 두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새해의 주제인 선함의 번짐이 이제는 조금 더 익숙하게 다가오실지 모르겠습니다. 선함이라는 덕목은 사실 기독교만의 덕목은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선함을 덕목으로 꼽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역시 선을 행하는 것을 귀한 덕목으로 여깁니다. 이렇듯 선을 행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받을 만한 일로 여겨집니다. 심지어는 제도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나 보상을 주는 제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함은 공통의 덕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선행도 스펙이다”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우리나라에서 특별히 유행하는 말인데, 선행이 순수한 동기를 넘어서서 하나의 경쟁력이나 실력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말하는 표현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대학 입시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봉사활동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이웃을 향한 애정과 사랑의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선행이 생활 기록부에 들어가는 점수가 되었습니다. 헌혈을 한 번 하면 생명을 살리는 일에 헌신했다는 자부심보다는 봉사 점수로 여기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취업 시장에서도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면접 자리에서 종종 다뤄지는 질문 중 하나는 사회 공헌을 한 경험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자 봉사 점수와 경력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쓴다고 합니다.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활동은 해외 봉사단 파견으로, 이를 위해 수백 대 일의 치열한 경쟁률을 뚫기도 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다른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그런 장에서 여겨지는 선행은 단지 어떤 기업이나 조직에 들어가려는 수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행을 권장하는 것이 사회 현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왜 선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장려할까요? 여기에는 매우 실용적인 이유들이 있다고 합니다. 선행이 주는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으로 선행은 상호부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면, 언젠가 내가 어려워졌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인 상호 약속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약속이 암묵적으로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선행을 한다고 합니다.

조금 더 발전해서 요즘 진화론자들은 선행을 향한 동기를 사람의 신체 안에 새겨진 생존 본능으로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선행이나 서로 돕는 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선행은 경제적으로도 사회 비용을 줄이는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서로 믿고 도와야지만 경찰 인력을 늘리지 않아도 되고, CCTV 등의 비용도 절감됩니다. 심리학에서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남을 도울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선행은 나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같이 선행은 사회적인 비용을 줄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지역 뉴스를 다루었던 신문인 ‘스프링필드 모니터(Springfield Monitor)’에 1897년 8월 26일 자로 실린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링컨의 일화입니다. 링컨이 마차를 타고 진흙 길을 가던 중에, 함께 타고 있던 사람과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동승자에게 이런 주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선행은 결국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그 동승자는 반대 의견을 냈습니다. “우리의 선행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지 않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라고 하면서 논쟁이 격화되었습니다.

마침 그들이 탄 마차가 늪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통나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강둑 위에서 한 마리의 늙은 암퇘지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유는 새끼 돼지들이 늪에 빠져서 익사할 위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링컨은 그것을 보고 마차를 세우고는 뛰어 내려가서 진흙과 물에 빠진 돼지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서 강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링컨이 다시 마차로 돌아왔을 때 동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브, 방금 이 일에서 이기심은 어디에 있다는 거지?” 그러자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이봐 친구, 바로 이것이 이기심의 정수라네. 내가 저 고통스러워하는 어미돼지와 새끼들을 두고 그냥 갔더라면,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네. 나는 나의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이라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선행의 종착지에는 항상 나 또는 우리가 얻는 이익이 있습니다. 그토록 존경받을 만한 링컨의 선행조차도 이와 같은 개인적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이기심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가르치고 격려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에게 이득이 있다는 기대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회와 세상이 우리에게 선행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이런 선행에 대한 강조는 인류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종교 속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에서는 선행을 ‘보시(布施)’라는 말로 부릅니다. 탐욕을 버리고 공덕을 쌓는 수행의 과정입니다. 내가 베푼 선이 결국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있죠. 또한 ‘업, 혹은 업보(Karma)’와 같은 논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선행의 동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믿는 분들이 선행을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삼죠.

이슬람교에서는 ‘자카트(Zakat)’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수입의 일정 부분을 반드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의무 조항입니다. 자카트는 ‘정화’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내가 가진 부에 가난한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일부가 혼합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들의 것을 나눠줘야 나의 재산이 깨끗해지고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더 나아가서 선행을 통하여 자신의 탐욕스러운 마음이 정화될 수 있다고 가르치죠. 이렇듯 선한 행실은 여러 종교 수행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은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효용의 가치로 선행을 격려하는 이유와 여러 종교에서 선행을 가르치는 이유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선행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이 말씀 속에는 선행이나 선함에 대한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선행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조금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선행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이 선행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하는 전제 조건을 먼저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일반적으로 선행의 요구는 대부분의 종교에서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보통 구원의 결과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선한 행위가 강조되곤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가르치는 인과응보의 사상과 자력 구원의 체계입니다. 내가 먼저 선을 쌓아야만 나중에 구원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업보(Karma)라고 부르는 것은 선한 업을 쌓아야만 다음 생에 좋은 곳에 태어나거나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말씀은 그 구조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제가 연구하고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기독교 외에 이렇게 구조가 바뀌어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고, 기독교는 그 사실을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구원을 받았으니(σεσῳσμένοι[sesōsmenoi], 완료형)’에 사용된 헬라어는 완료형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혜택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면, 이 말씀을 다른 말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으니”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부모에게 무엇인가를 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아이가 사랑을 받겠습니까? 아이는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모든 돌봄을 거저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카리스(χάρις[charis])’, 즉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만한 어떤 실적이나 스펙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무조건적으로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전에 이미 구원이 임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의 동기는 거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우리가 선행과 관련해서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천국으로 끌고 가는 기차표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들은 선행을 통해서 구원으로 가는 기차표를 얻는다는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표는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구원 열차의 표가 쥐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선행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차 안에서 우리가 부르게 되는 노래와 같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행복하고 즐거운 축제와 같은 곳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선행입니다. 선행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도구로서 끊임없이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권에 양파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 못된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살면서 좋은 일은 하나도 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 보니 착한 일을 한 것이 없어서 결국 불바다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래도 천사는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구해 줄 만한 것이 없는지 찾기 위해 할머니의 인생을 꼼꼼히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그가 살면서 단 한 번 했던 선행을 찾았습니다.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뿌리를 하나 뽑아서 가난한 여인에게 주었던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서 그가 양파를 붙잡고 나오게 하라. 만약 불바다에서 나오면 천국으로 가지만, 양파가 끊어지면 불바다에 남게 되리라.”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종교가 가지고 있는 선행과 구원의 구조를 반영합니다. 또한 세상 속에 많은 사람들이 선행을 하는 이유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끌어 올려 줄 만한 것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든든한 밧줄을 만들어 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세상과 다른 종교가 선함을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나머지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천사가 할머니에게 양파 줄기 하나를 내밉니다. 내민 양파를 붙잡고 할머니가 조심조심 기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바다 속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할머니의 발을 붙잡고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뒤에 붙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들을 발로 걷어차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의 것이 아니라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양파는 뚝 끊어져 버렸고, 할머니는 다시 불바다로 떨어져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할머니의 선행이 왜 실패했습니까? 그에게 선행은 타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오직 나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선을 행하는 사람들 중에 이 할머니처럼 양파 줄기를 붙잡듯 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의 구원과 보상을 위해 행하는 선행은 결과적으로는 ‘자기애(自己愛)’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양파 줄기에 매달린 이웃을 걷어차고서라도 나만 올라가면 된다는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양파 줄기를 붙잡고 홀로 살려고 했던 할머니의 선행이 거래였다면,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효도와 연결해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지극정성으로 효도하는 이유가 장차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과연 진정한 효도이겠습니까? 숭고한 도덕이 아니라 비즈니스적인 거래일 뿐입니다. 그 마음속에는 부모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기가 얻을 이익에 대한 생각뿐일 것입니다. 진정한 효도는 나를 아무 조건 없이 먹이고 키워 준 부모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그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그 사랑에 겨워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노력은 선행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정한 선행의 동기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나면 우리의 인생은 ‘거래’에서 벗어나서 ‘사랑’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지 염려하는 두려운 질문은 사라지고, 이미 받은 구원의 기쁨 속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 생각하는 것이 참된 선행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을 행하는 작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여기서 ‘만드신 바’라는 헬라어는 ‘포이에마(ποίημα[poiema])’입니다. 이는 ‘걸작품(Masterpiece)’과 ‘시(Poem)’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기계적으로 찍어 내지 않고, 마치 시인이 단어 하나를 고르는 듯이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내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러한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술가는 예술품을 만들 때 작가의 의도를 그 안에 담습니다. 성경은 ‘우리’, ‘나’라는 작품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바로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부터 ‘선한 일을 하는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고의 재료를 통해 우리를 다시 빚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품인 우리에게는 작품에 걸맞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선함을 드러내야 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으로서 우리는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목적입니다.

성도 여러분, 2026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꿈꾸는 ‘선함의 번짐’은 선한 행위로 자부심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선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조건을 갖추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대로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내 안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고, 이웃과 일터,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으로서의 선함’입니다.

이번 한 주간 누군가에게 작은 선을 베풀 때, 이런 마음으로 고백해 봅시다. “이것은 나의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번져 갈 뿐입니다. 내가 하는 이 작은 일이 나의 자부심이나 나를 세우는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제 나를 통해서 번져 갈 뿐입니다.” 이 마음으로 우리가 선행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의 선행은 ‘스펙’이 아니라 ‘사명’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에 걸맞은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포이에마’답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번지게 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선함의 번짐 : 은혜에서 사명으로” (엡2:8~1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04, 31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내가 선한 일을 할 때,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마음은 없었는지 돌아봅시다.

 

<설교의 요약>

기독교가 말하는 선함과 세상이 말하는 선함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는 “선행도 스펙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봉사활동은 입시 점수가 되고, 사회공헌 경험은 취업의 필수 조건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선행의 종착지에는 ‘나’의 이익이 있습니다. 여러 종교도 내가 먼저 선을 쌓아야 나중에 구원을 얻는다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2장 8-9절은 말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일반적으로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부모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돌봄을 거저 받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기 전에 이미 구원이 임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선행의 동기는 두려움이나 욕망에서 오지만, 기독교 선행의 동기는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는 기쁨과 감사에서 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할머니는 양파 줄기를 붙잡고 불바다에서 올라오다가, 다른 죄수들이 매달리자 “이건 내 양파야!”라며 발로 걷어찼고, 양파는 끊어져 다시 떨어졌습니다. 그녀에게 선행은 ‘나만 구원받기 위한 밧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유산을 위해 효도한다면 그것은 거래입니다. 하지만 참된 효도는 아무 조건 없이 기르고 먹여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행은 하나님을 향한 ‘우주적인 효도’입니다.

10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 즉 ‘걸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빚으신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선행은 내 스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는 ‘전시’입니다. 일터에서 정직을 지키는 것, 가정에서 축복의 말을 하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는 삶입니다.

이번 한 주간, 누군가에게 작은 선을 베풀 때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이것은 내 선함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번져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선행은 ‘스펙’이 아니라 ‘복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이에마’답게,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 세상에 번지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누기>

1. 내가 해왔던 선한 일들을 돌아볼 때, 거래와 감사의 마음 중 어느 쪽이 더 컸는지 나누어 봅시다.

2. 한 주간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낼 구체적인 선한 일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랑의 번짐이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주제를 받아들고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를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웁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지게 하시고, 또 이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여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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