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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충만한 사람

사도행전 6: 2 ~ 6

김경진 목사

2020.05.31

이천 년 전 성령강림 사건이 오늘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님들께도 문안을 드립니다. 성령강림주일인 오늘, 우리가 모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길 소원했는데, 아직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많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배의 형식도 바뀌었고, 삶의 모습들도 바뀌었으며, 학교생활과 직장 생활도, 음식을 먹는 것도, 식당에 가는 것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우한 폐렴으로 시작된 코로나19가 이제는 우리 삶 전 영역에서 상수가 되어 가는 실정입니다. 많은 분이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을 우려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또 경제를 위해서도, 모든 영역에서 코로나19의 향후 전개에 관한 관심이 높습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19 감염병의 상황 속에서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면서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우선 “성령강림주일에 모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길 원한다.”라고 말씀드린 것도 있지만, 성령강림주일 자체가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절의 가장 중요한 모습 중 하나는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인데, 우리가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부활주일에는 부활절 헌금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성령강림주일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의미 있을까?’라는 여러 고민과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코로나19와 관련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마치 코로나19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강림도 삶의 전 영역을 바꾼 사건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강림은 모든 사고와 세계관, 모든 사업이나 일들, 가정생활에서 예배드리는 방식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의 강림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삶의 상수로 두고 있는가? 기준점으로 두고 있는가?’ 코로나19라는 지나가는 질병조차 우리 삶의 상수로 두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엄청난 사건인 성령강림을 삶의 상수로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인 성령강림을 삶의 모든 결정과 토대로 두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적어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강림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부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처음 교회가 탄생하던 날,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그 날의 모습을 사도행전 2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1~4, 새번역)

극적인 성령강림을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져서’라는 표현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이 말씀 이후에 성경과 초대교회 교인들, 기독교 세계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생성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성령 충만’은 기독교의 용어이자 교회의 특별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라고 권면합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충만은 기독교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가장 동경하고 바라는 축복 된 신앙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도달하고 싶은 신앙의 목표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싶다. 내가 언젠가는 성령의 충만을 꼭 받아야지.” 하는 바람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령 충만을 주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지요.”라고 말하면, “아직은 아닙니다.”라고 피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성령은 조금만 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겠지만,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진심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내 모든 일상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모두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성령 충만을 꺼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어느 때가 되면 그때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성령 충만을 꼭 받고 싶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지평을 열어 주는지를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상태, 어떤 모습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즘 코로나19 감염증이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어떻게 코로나19에 감염되는지, 감염되었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여러 진단 방식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이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어느 때 성령 충만이 일어나며, 무엇을 위해 일어나고,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성령의 충만을 말하기 전에, ‘충만’이라는 단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충만하다’, ‘가득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성령 충만’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는 두 종류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플레로오(πληρόω)’라는 동사가 있고, 이와 같은 용법 아래 있는 형용사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있습니다. 이와 비교되는 용법 가운데 ‘플렛도(πλήθω)’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성경 여러 곳에서 ‘가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표현에서도 이 두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네 단어를 말씀드렸는데 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들이 있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플레레스(πλήρης)’와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라는 두 단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곳에는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며, 또 어떤 곳에서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사용되기도 하고,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로 다르게, 혹은 교차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의 원칙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두 단어가 사용되는 용처를 살펴보면, 나름대로 용법과 차별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살펴보고 싶은 단어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입니다. ‘만족하다’, ‘채우다’, ‘가득 차다’, ‘꽉 차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언가 꽉 채워지는 모습을 표현하기에,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에스겔서 16장 28절에는 이 단어가 성적인 만족이 일어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이때 ‘그것을 끌어올려 가득 배에 채웠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라는 표현 말입니다.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입니다. 즉각적 혹은 순간적으로 꽉 찬 상태를 말합니다. 바다에 그물을 내려놓자 한꺼번에 물고기가 차는 장면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서는 주인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없자 종들을 시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10)

여기서도 ‘가득한지라’라고 할 때,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꽉 차게 되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4장 28절이나 6장 11절, 5장 26절에서도 이러한 용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누가복음 5:26)

여기서 ‘심히 두려워하였다.’라는 표현이 원어로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생기면서 온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다.’, ‘꽉 차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뜻을 가리킵니다.
6장에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내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화를 내었다.’라는 표현이 헬라어로는 ‘화로 가득 채워졌다.’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화가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으로 화가 나고 그것이 온 마음을 지배했다.’라는 뜻입니다. ‘머리까지 화가 올라왔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들인데, 성령 충만과 관련해서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해져서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순간적으로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도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져서 설교하는데, 이때도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사용됩니다.
또한 사도행전 4장 31절에서 베드로가 풀려난 뒤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데, ‘성령이 충만해졌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순간적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는 독특하고 특별한 상황 속에서 성령님의 주도적이며 계시적인 사건이 나타날 때 사용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순간에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심을 성경의 여러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자에게 성령 충만이 허락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이 항상 한곳에 머무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우리 안에 머무는 성령의 역사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시급한 상황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3,000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한순간에 구원을 얻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최초의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령 충만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충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주시는 충일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방언이 나타나고, 때로는 능력이 나타나며, 권능이 나타나고, 병 고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성령의 충만이 허락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성령의 충만이 허락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부어주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도록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병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모든 성도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한 정성과 열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온 교우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병자가 낫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모습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와 온 교우가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해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부어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에는 언제나 역동성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면, 성령 충만을 통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충만’에 관한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이 단어도 한 어원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조금 다르게 사용되곤 합니다. 이것은 바로 ‘플레로오(πληρόω)’와 더불어 사용되는 ‘플레레스(πλήρης)’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점차 충만해져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5장 12절에 온몸에 나병이 덮인 환자가 나오는데, 이때 ‘나병이 덮였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번져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9장 36절에 다비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때도 ‘가득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사도행전 9:36)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에서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가득하다, 꽉 찼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루아침에 꽉 찬 것은 아닐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선행을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끊임없이 선행이 이어지던 중에, 그 선행이 점점 더 가득 차 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플레레스(πλήρης)’가 때로는 순간적인 가득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러한 구분에 동의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레레스(πλήρης)’와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의 단어 구별은 조금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듯 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0절에서 오병이어 사건 후에 열두 광주리가 남아 가득하게 되었다는 장면에서도 이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는데, 물론 갑자기 가득 찬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에 갑자기 떡과 물고기가 가득 찼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 가는 과정, 즉 하나둘 담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쌓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하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성령 충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떡 하나를 쌓듯이 하나의 단계를 쌓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또다시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또 다른 봉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해 가는 중에 점차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거두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은 세례식과 입교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분들 역시 성령 충만의 과정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시작하셨고,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때 성령의 충만이란 꾸준하고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된 성령의 활동과 사역이며,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이 자라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6장 3~4절도 이러한 맥락에서 연결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행전 6:3~4)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찾으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고르라.’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게 아니라 점차 성령이 충만해져 가는 모습으로, 사역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자 하시는 그때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성령의 충만이라는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해졌다.’라는 표현 역시 점차적으로 바뀌어 가는 의미의 성령 충만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여기서 사용되는 성령의 충만함이란 지속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며,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용되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명령 역시 점진적이며 점차적인 성령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과정을 중시하는 ‘플레레스(πλήρης)’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의 열매’가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을 중시하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의 은사’ 또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성품을 바꾸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동시에 사건을 일으키면서 즉각적이자 현상적인 성격 아래 능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일시적인 채워짐을 대표하고 있고, 성령의 열매는 지속적인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 그 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열매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의 충만은 언제고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나서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와 같은 사역을 통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점차 변화시켜 가시는, 말씀과 기도로 변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면서 올바른 의미의 성령 충만을 누리고 경험하시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A Man Filled with the Spirit

Acts 6:2-6

Today is Pentecost. I was hoping we would all gather for worship, but, unfortunately, we still aren’t able to. Since February, we have been vigilant against Covid-19. The virus has changed our lives, affecting the way we go to school, work, restaurants, and even church.

A lot of people are now talking about a “post-Covid” life, as the virus has changed our way of life forever. Covid-19 has now become a constant in our lives, affecting the way we do business, educate, and engage in cultural and religious activities. This is being felt, not taught.

I was troubled by an observance of Pentecost amid Covid-19 because we cannot all gather for this special celebration. As you may well know, Pentecost occurred when the disciples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praying in Mark’s upper room. It was hard to accept that we cannot be all together. It felt like we were failing to observe Pentecost.

Then I thought, “What did Pentecost, or the descent of the Spirit, mean to the early Christians?” And I linked this question to Covid-19. Wasn’t the Spirit’s descent similar to the outbreak of Covid-19 in some ways?

Of course, significance of the latter pales in comparison to that of the former, considering the historical and biblical significance of Pentecost. Yet, the two have one thing in common: they changed life forever. I came to mediate on the fact that Pentecost was something of a “coronavirus” to the early Christians in that it changed everything, in ways more powerful than Covid-19.

Just as Covid-19 changed everything, the Spirit’s descent was “the event” for early Christians, becoming the source of life-altering changes. The coming of the Sprit changed their worldviews, life patterns, way of business, education, cultural life, religious life, and attitudes.

If Covid-9 changed our lives forever, how can Pentecost, the Spirit’s descent, “not” change the life and worldview of believers forever? Furthermore, do we believers perceive the Spirit’s descent as “the event” of our lives? As an invariable in our lives? Although the world might not know it, the descent of the Spirit is a “Covid-19” to us believers.

Therefore, there must be a “before” and “after” for believers who experience Pentecost. We need a “post-Pentecost” mindset.

Acts 2 describes the first Pentecost, the day the Church and Christianity began:

“When the day of Pentecost came, they were all together in one place. Suddenly a sound like the blowing of a violent wind came from heaven and filled the whole house where they were sitting.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All of them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began to speak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enabled them.” (Acts 2:1-4)

This passage describes a dramatic coming of the Spirit. The phras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stands out. This is a phrase often used in the Bible and in Christianity, ever since it appeared in Acts 2. The expression “filled with the Holy Spirit” is a “post-Pentecost” term.

That is why in Ephesians 5:18 Paul advises, “Do not get drunk on wine, which leads to debauchery. Instead, be filled with the Spirit.” (Ephesians 5:18)

There are many places in the Bible that mention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n the post-Pentecost era,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was like the heart of Christianity. Believers desire this blessed state the most, making it a spiritual goal.

Then what does it mean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What kind of state is it? Just as a coronavirus patient displays certain symptoms, what symptoms are found in a person filled with the Spirit? Let’s delve into these questions.

Before we study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we must first scrutinize the word “be filled with.” Although there are many Greek words that signify “to be filled with” or “to be full,” two most frequently used ones in the Bible related to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are as follows: the verb pleroo (πληρόω) whose adjective form is pliris (πλήρης); and the verb plethon (πλήθω) which is also used in the form of piplemi (πίμπλημι).

In many places in the Bible, these Greek words are used to indicate “to be filled with.” To express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sometimes pliris is used, while in other places plethon/piplemi is used. Sometimes the two are used in indistinguishable ways, but a closer look reveals that they indicate two different meanings and are used distinctively.

First, let’s look at the word plethon/piplemi. This means to be satisfied and full, but with an emphasis on the very moment of being full, thereby expressing the very instant when something is completely filled. In a Greek translation of Ezekiel 16:28, plethon/piplemi is used to express sexual satisfaction.

Let’s also read Luke 5:5-7 with a focus on the usage of plethon/piplemi:

“Simon answered, ‘Master, we’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n’t caught anything. But because you say so, I will let down the nets.’ When they had done so, they caught such a large number of fish that their nets began to break. So they signaled their partners in the other boat to come and help them, and they came and filled both boats so full that they began to sink.”

Here the word plethon/piplemi is used to describe the fish filling the boats. When the men pulled up the nets, they saw in that instant that their nets were completely full.

As we can see, the word plethon/piplemi is used to describe a certain state where something/someone is instantly filled with something. For example, plethon/piplemi is used in the Bible when the Pharisees suddenly got extremely angry at Jesus in Luke 4. In this case, plethon/piplemi means that the Pharisees were immediately “filled with” anger, as if they would explode.

Furthermore, plethon/piplemi is used in many other places in the Bible, including Luke1 and Acts 4:

“When Elizabeth heard Mary’s greeting, the baby leaped in her womb, and Elizabet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In a loud voice she exclaimed: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child you will bear!’” (Luke 1:41-42)

“His father Zechariah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prophesied.” (Luke 1:67)

“Then Peter, filled with the Holy Spirit, said to them: ‘Rulers and elders of the people!’” (Acts 4:8)

“After they prayed, the place where they were meeting was shaken. And they were all filled with the Holy Spirit and spoke the word of God boldly.” (Acts 4:31)

In all the underlined parts above, the Greek word plethon/piplemi is used.

In other words, when the Bible describes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t uses a special word plethon/piplemi to express that the Holy Spirit worked in an active and revelatory way under a unique and special circumstance. Plethon/piplemi is used when the Holy Spirit works and intervenes in a dynamic way. Acts chapter 2—which describes the first Pentecost—shows how dynamically the Spirit worked, coming down on the disciples suddenly and filling them instantaneously. When plethon/piplemi is used, it usually refers to a special, one-time, and instantaneous filling of the Spirit at a special time.

In other words, God allows us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at a special time. However, this state does not last forever or remain in us continuously. It remains momentary. It helps us do the ministry God has given us to do. To complete the work He has given us—or to achieve His special will—God fills us with the Holy Spirit for an instant or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In a critical situation where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was urgent, God filled Peter and the disciples with the Holy Spirit. As a result, more than 3,000 people came to the Lord that day. Under extreme persecution, Stephen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becoming the first Christian martyr in the Bible. This is what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means.

We need to remember that when the Bible talks about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t is to express a momentary state of being Spirit-filled in order to do a God-given work. When such filling of the Spirit occurred, tongues, power, and healings happened. But all these were for the fulfillment of God’s will and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benefit of the people who displayed these powers.

Many people talk as if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gives us a mysterious power that solves all of our problems and guarantees our faith forever. But no. God fills us with the Spirit for a certain period of time, according to His purpose and need, and can always take it away from us. In other words, the state of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s not something we can possess at our own will. But the problem is that people want to maintain this state. When they feel they have lost this state, they become crestfallen.

To accurately understand what plethon/piplemi means in terms of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let’s assume there is a sick brother in our church, and we pray for him. At that moment, the whole congregation becomes filled with the Spirit, and the brother is healed. The preacher preaches, and the preacher and the whole congregation become filled with the Spirit. They all receive the word with joy. This is what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looks like. It is not about possessing a certain state, but refers to a gift frequently given to us from God, according to our needs.

Therefore, plethon/piplemi means that God can always fill us with the Holy Spirit dynamically. It is a power that God can fill us with whenever and wherever we need it. It’s not something we possess within us, but a filling we experience in His power.

In contrast, the Greek word pleroo/pliris is a little bit different. This also means “to be filled”, but is used in a different way compared to plethon/piplemi. It is used to express the “process” of becoming full.

For example, in Luke 15:12 a man with leprosy appears. Here pliris is used to describe the leprosy spreading all over his body, emphasizing the gradual spread of the disease. As a result, his whole body becomes filled with the disease.

In Matthew 14:20 pliris is also used to describe the twelve baskets filled with bread. It may, of course, imply that the baskets became suddenly full, but it can also mean that the twelve baskets were gradually filled—one by one. As each basket became full, all twelve became filled. This emphasizes the process.

From this perspective we can understand 1 Corinthians 12:3 better: “Therefore I want you to know that no one who is speaking by the Spirit of God says, ‘Jesus be cursed,’ and no one can say, ‘Jesus is Lord,’ except by the Holy Spirit.” (1 Corinthians 12:3)

No one can confess Christ as Lord without the Holy Spirit. This is the beginning of faith, and this confession means that the work of the Spirit has already started. As this work grows, a believer is baptized, and eventually he/she even experiences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The verse above implies that the state of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s a result of a steady, continuous process. Being Spirit-filled is not something entirely special or alien, but a state born out of the Holy Spirit working and growing in us.

The sentences that use pleroo/pliris in the Bible are quite interesting.

“Brothers and sisters, choose seven men from among you who are known to b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We will turn this responsibility over to them and will give our attention to prayer and the ministry of the word.” (Acts 6:3-4)

Here, the word pliris is used to describe “be full of the Spirit.” The same Greek word is used in Acts 11:24 to tell us that Barnabas was full of the Spirit. As such, pliris is often used to describe a person being full of the Spirit, in terms of his character.

In other words, being full of the Spirit refers to the whole process in which the Holy Spirit continuously works and achieves His will in us. Through the Spirit, we confess Christ as Lord and come to know Christ better. Through the ministry of the Holy Spirit, we bear the fruit of the Spirit such a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This is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When Ephesians 5:18 orders us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it is telling us to gradually fill—pleroo/pliris—ourselves with the Spirit to eventually become completely filled with Him. Here, to be filled with the Spirit means that the Spirit slowly becomes part of our character. This is not something that happens all at once, but a gradual filling of the Spirit that allow us to be satisfied in Christ.

From the perspective of pliris, the fruit of the Spirit is important when we talk about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But from the viewpoint of piplemi—which emphasizes a sudden and momentary filling of the Spirit—the gifts of the Spirit are precious.

However, one thing is clear.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contains both aspects: an instant filling of the Spirit and a gradual and continuous filling of the Spirit. Spiritual gifts represent the former, while the fruit of the Spirit represents the latter.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s a process that starts the moment we confess Christ as Lord as well as an ongoing journey that continues even now. At the same time, from the perspective of plethon/piplemi,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is a gift and grace that God gives us whenever we need it at a certain time.

Next week, the first round of elections for elders will begin. Who should we elect? Shouldn’t we pick elders who are full of the Spirit like Stephen and Phillip? I hope you pray and vote for candidates who have the fruit of the Spirit and a godly character. Pray also that you yourself will become such Spirit-filled people.

The Spirit-filled state that I talked about today can be found in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gentleness, and self-control.

As we celebrate Pentecost, I hope you will correctly understand and experience being filled with the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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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6: 2 ~ 6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이천 년 전 성령강림 사건이 오늘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성도님들께도 문안을 드립니다. 성령강림주일인 오늘, 우리가 모두 함께 모여 예배드리길 소원했는데, 아직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많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하고 계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여러분께도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배의 형식도 바뀌었고, 삶의 모습들도 바뀌었으며, 학교생활과 직장 생활도, 음식을 먹는 것도, 식당에 가는 것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우한 폐렴으로 시작된 코로나19가 이제는 우리 삶 전 영역에서 상수가 되어 가는 실정입니다. 많은 분이 코로나19 이후의 상황을 우려합니다. 교회를 위해서도,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또 경제를 위해서도, 모든 영역에서 코로나19의 향후 전개에 관한 관심이 높습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19 감염병의 상황 속에서 성령강림주일을 보내면서 참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우선 “성령강림주일에 모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길 원한다.”라고 말씀드린 것도 있지만, 성령강림주일 자체가 주는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성령강림주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강림절의 가장 중요한 모습 중 하나는 성도가 함께 모이는 것인데, 우리가 함께 모이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부활주일에는 부활절 헌금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의미가 있었는데, ‘성령강림주일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의미 있을까?’라는 여러 고민과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코로나19와 관련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니, ‘마치 코로나19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처럼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강림도 삶의 전 영역을 바꾼 사건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의 강림은 모든 사고와 세계관, 모든 사업이나 일들, 가정생활에서 예배드리는 방식까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의 강림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삶의 상수로 두고 있는가? 기준점으로 두고 있는가?’ 코로나19라는 지나가는 질병조차 우리 삶의 상수로 두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에게 엄청난 사건인 성령강림을 삶의 상수로 두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적인 사건인 성령강림을 삶의 모든 결정과 토대로 두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즉 ‘적어도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강림 이전과 이후에 변화된 부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처음 교회가 탄생하던 날, 성령께서 강림하시던 그 날의 모습을 사도행전 2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1~4, 새번역)

극적인 성령강림을 나타내는 묘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충만해져서’라는 표현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묘사하는 이 말씀 이후에 성경과 초대교회 교인들, 기독교 세계에 ‘성령 충만’이란 용어가 생성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성령 충만’은 기독교의 용어이자 교회의 특별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5:18)라고 권면합니다. 성령강림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의 충만은 기독교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가장 동경하고 바라는 축복 된 신앙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도달하고 싶은 신앙의 목표 지점이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싶다. 내가 언젠가는 성령의 충만을 꼭 받아야지.” 하는 바람이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령 충만을 주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지요.”라고 말하면, “아직은 아닙니다.”라고 피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성령은 조금만 받고 싶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겠지만, 사실 그 안에 숨겨진 진심도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내 모든 일상이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모두 사역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목회자가 되어야 할 것 같고, 선교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성령 충만을 꺼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일상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어느 때가 되면 그때쯤 성령 충만을 받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령 충만의 의미를 알게 된다면, 성령 충만을 꼭 받고 싶으실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지평을 열어 주는지를 알게 된다면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상태, 어떤 모습을 ‘성령의 충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즘 코로나19 감염증이 확산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어떻게 코로나19에 감염되는지, 감염되었다면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여러 진단 방식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이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어느 때 성령 충만이 일어나며, 무엇을 위해 일어나고,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여러분과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성령의 충만을 말하기 전에, ‘충만’이라는 단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충만하다’, ‘가득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여럿 있습니다. 그중 ‘성령 충만’과 관련해 자주 사용되는 두 종류의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플레로오(πληρόω)’라는 동사가 있고, 이와 같은 용법 아래 있는 형용사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있습니다. 이와 비교되는 용법 가운데 ‘플렛도(πλήθω)’라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들이 성경 여러 곳에서 ‘가득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이란 표현에서도 이 두 종류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네 단어를 말씀드렸는데 비슷하게 발음되는 단어들이 있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해 ‘플레레스(πλήρης)’와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라는 두 단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곳에는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며, 또 어떤 곳에서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사용되기도 하고, 함께 사용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서로 다르게, 혹은 교차적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의 원칙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두 단어가 사용되는 용처를 살펴보면, 나름대로 용법과 차별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살펴보고 싶은 단어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입니다. ‘만족하다’, ‘채우다’, ‘가득 차다’, ‘꽉 차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무언가 꽉 채워지는 모습을 표현하기에, 시간적인 의미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에스겔서 16장 28절에는 이 단어가 성적인 만족이 일어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5장 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물을 던졌을 때 많은 고기가 잡힙니다. 이때 ‘그것을 끌어올려 가득 배에 채웠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라는 표현 말입니다. 이때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입니다. 즉각적 혹은 순간적으로 꽉 찬 상태를 말합니다. 바다에 그물을 내려놓자 한꺼번에 물고기가 차는 장면을 상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서는 주인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없자 종들을 시켜 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혼인 잔치에 사람들이 가득 차게 됩니다. 마태복음 22장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마태복음 22:10)

여기서도 ‘가득한지라’라고 할 때, ‘순간적으로 사람들이 꽉 차게 되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4장 28절이나 6장 11절, 5장 26절에서도 이러한 용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5장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시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누가복음 5:26)

여기서 ‘심히 두려워하였다.’라는 표현이 원어로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생기면서 온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다.’, ‘꽉 차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뜻을 가리킵니다.
6장에서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내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화를 내었다.’라는 표현이 헬라어로는 ‘화로 가득 채워졌다.’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화가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순간적으로 화가 나고 그것이 온 마음을 지배했다.’라는 뜻입니다. ‘머리까지 화가 올라왔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들인데, 성령 충만과 관련해서도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이 성령이 충만해져서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도 순간적으로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부친 사가랴가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도 같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 앞에서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해져서 설교하는데, 이때도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사용됩니다.
또한 사도행전 4장 31절에서 베드로가 풀려난 뒤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데, ‘성령이 충만해졌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즉 순간적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핌프레미(πίμπλημι)’는 독특하고 특별한 상황 속에서 성령님의 주도적이며 계시적인 사건이 나타날 때 사용되는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순간에 성령의 충만을 허락하심을 성경의 여러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는 자에게 성령 충만이 허락됩니다.

이처럼 성경의 용례를 살펴보면, 성령 충만이 항상 한곳에 머무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우리 안에 머무는 성령의 역사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시급한 상황일 때, 하나님께서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3,000명이 넘는 많은 사람이 한순간에 구원을 얻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를 통해 최초의 순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핌프레미(πίμπλημι)’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성령 충만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충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일시적으로 주시는 충일함’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방언이 나타나고, 때로는 능력이 나타나며, 권능이 나타나고, 병 고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성령의 충만이 허락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성령의 충만이 허락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성령의 충만을 부어주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도록 성령의 충만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병자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모든 성도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한 정성과 열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온 교우가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병자가 낫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모습입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설교자와 온 교우가 말씀을 청종하고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성령으로 충만해짐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은 소유하는 게 아닙니다.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부어주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에는 언제나 역동성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필요할 때,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면, 성령 충만을 통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로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첫 번째 의미입니다.

성령 충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충만’에 관한 단어가 있습니다. 물론 이 단어도 한 어원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조금 다르게 사용되곤 합니다. 이것은 바로 ‘플레로오(πληρόω)’와 더불어 사용되는 ‘플레레스(πλήρης)’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점차 충만해져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둡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5장 12절에 온몸에 나병이 덮인 환자가 나오는데, 이때 ‘나병이 덮였다.’라는 표현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온몸에 나병이 번져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9장 36절에 다비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이때도 ‘가득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사도행전 9:36)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에서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가득하다, 꽉 찼다.’라는 표현입니다. 하루아침에 꽉 찬 것은 아닐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선행을 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끊임없이 선행이 이어지던 중에, 그 선행이 점점 더 가득 차 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플레레스(πλήρης)’가 때로는 순간적인 가득함을 나타낼 때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이러한 구분에 동의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플레레스(πλήρης)’와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의 단어 구별은 조금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듯 보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0절에서 오병이어 사건 후에 열두 광주리가 남아 가득하게 되었다는 장면에서도 이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레레스(πλήρης)’가 사용되는데, 물론 갑자기 가득 찬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에 갑자기 떡과 물고기가 가득 찼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차 가는 과정, 즉 하나둘 담겨지는 과정에서 점점 쌓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령의 역사하심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성령 충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떡 하나를 쌓듯이 하나의 단계를 쌓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또다시 성령의 충만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읽고, 또 다른 봉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신앙생활을 해 가는 중에 점차 성령 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거두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은 세례식과 입교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분들 역시 성령 충만의 과정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나는 아직 멀었다.”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시작하셨고, 그 안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이때 성령의 충만이란 꾸준하고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시작된 성령의 활동과 사역이며,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이 자라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6장 3~4절도 이러한 맥락에서 연결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행전 6:3~4)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찾으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을 고르라.’는 말씀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순간적으로 성령이 충만한 게 아니라 점차 성령이 충만해져 가는 모습으로, 사역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자 하시는 그때 성령의 충만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성령의 충만이라는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πλήρης)’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해졌다.’라는 표현 역시 점차적으로 바뀌어 가는 의미의 성령 충만입니다.
다시 요약하면, 여기서 사용되는 성령의 충만함이란 지속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심으로 이루어져 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며,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열매들이 조금씩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사용되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라는 명령 역시 점진적이며 점차적인 성령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과정을 중시하는 ‘플레레스(πλήρης)’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의 열매’가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상황을 중시하는 ‘핌프레미(πίμπλημι)’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령의 은사’ 또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통해 성품을 바꾸어 가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동시에 사건을 일으키면서 즉각적이자 현상적인 성격 아래 능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일시적인 채워짐을 대표하고 있고, 성령의 열매는 지속적인 채워짐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 그 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열매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성령의 충만은 언제고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순간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나서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와 같은 사역을 통해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점차 변화시켜 가시는, 말씀과 기도로 변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면서 올바른 의미의 성령 충만을 누리고 경험하시는 귀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0년 5월 3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성령이 충만한 사람” (행 6:2-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83장, 18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행 6:2-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3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코로나 19가 우리의 삶을 많이 바꿔놓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사업도, 교육도, 문화생활도, 신앙생활도 모두 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성령 강림이 무엇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코로나 19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요? 물론 어찌 하나님의 성령이 한갓 전염병의 창궐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마는,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초대교회 교인들에게도 성령 강림이 모든 것을 바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요약

    그럼 초대 교인들이 받은 성령 충만은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 성령 충만은 ‘순간적인 가득함’(핌프레미)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기도를 마치니,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행 4:31, 새번역). 이 구절은, 성령 충만이란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혹은 일시적으로 우리 안에 머무는 것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 충만의 시기에 방언이 있고, 능력도 있고, 권능도 있고, 병고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점차 충만해짐’(플레레스)을 의미합니다.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금씩 발전하면서 세례를 받게 되고, 성령의 충만함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꾸준한 지속적인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은 마음속에서 시작된 성령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자리를 넓혀가고 자라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6장 3절에서 사용된 단어가 바로 ‘플레레스’(지속적 충만)입니다. 지속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심으로 이루어 가시는 전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그리스도를 점점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충만은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가득 채워짐’과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가득 채워짐’의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일시적인 채워짐을 대표하고, 성령의 열매는 지속적인 채워짐을 대표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한 그 시간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계속되어 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우리에게 필요한 시점에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선물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하면서, 올바른 의미의 성령 충만함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성령 충만함’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어떻게 ‘성령 충만’을 생각하셨나요? 

 2. 지금도 지속적으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성령 충만(플레레스)이라 배웠는데, 내 삶에 지속적으로 변화고 싶은 부분은 무엇입니까?

 마무리 기도

    우리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 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하루하루 더욱 거룩으로 나아가는, 그래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 나가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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