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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들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를 향해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진 비유도 없을 것입니다. 세계와 교회 역사에 걸쳐 이만큼 큰 영향을 미친 말씀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야기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를 만나 가진 소유를 전부 빼앗기고 죽게 될 만큼 상처를 입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돕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피하여 도망갑니다. 제사장에 이어 또 다른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지만, 그조차도 피하여 다른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 주고, 포도주와 기름을 부으며 상처가 낫도록 도와줍니다. 나귀에 강도 만난 자를 태워서는 주막까지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그를 간호하다가 떠날 때가 되자,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맡기죠. 그리고는 상처 난 사람, 강도 만난 이 사람을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혹여나 돈이 부족하면 돌아와서 값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을 세웠고, 어떤 사람은 자선 단체를 세웠고, 또 어떤 사람은 노숙인과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 비유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늘 저는 제 자신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향해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만큼 영향을 미쳤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이 됩니까?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며 감동을 받아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말씀을 읽고도 특별한 반응이나 사건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무력함 때문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실천 없음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이 살아 있는 능력이 되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하며 본문 말씀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날이 선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상황 속에서 나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오죠.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본문에 두 가지 말씀이 나타납니다. 10장25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누가복음 10장 25절 중)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누가복음 10장 29절 중)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또는 자기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장 25절 중)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누가복음 10장 26절 중)
그러자 율법교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장 27절 중)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대답에 응하는 대답을 주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누가복음 10장 28절 중)
정교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율법 교사 간의 대화가 끝나는 듯 보이는 이때, 율법 교사가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장 29절 중, 새번역)
사실 이 질문은 굉장히 뾰족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율법 교사의 질문 앞에 둡니다. 무언가 작심하고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될 것이다.”하는 말씀을 받고 “네,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당시 랍비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원 안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혈연과 종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원이 펼쳐지듯 이웃과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까이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겠죠? 조금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웃의 제일 마지막에는 민족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 민족들이 이웃의 범위에 속해 있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 원 안에 들어 있는 사람만이 이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은 자신들과 같은 관점으로 이웃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들도 쉽게 만나고, 심지어는 세리와 창녀도 쉽게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눅 7:34)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이웃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날이 선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고정 관념을 깨트리시는 질문으로 되물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당시 엄청난 현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 안에 사마리아인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넣으셨을까요? 매우 의도적인 예수님의 행동이자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로부터 멸망당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앗수르의 왕은 앗수르 민족들을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통혼 정책을 펼치죠. 한마디로 앗수르 민족과 통혼해서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민족성이 바뀌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남유다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는 했지만 민족성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주전 5세기경,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을 짓고자 그들이 돌아옵니다. 그때에 사마리아에 있었던 사람들이 성전 짓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이 거부를 합니다. 그들이 이방 민족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동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4세기경,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성전을 따로 만들게 됩니다. 그 성전이 바로 그리삼 산에 있었던 성전입니다. 그런데 주전 128년경에 유대 사람들이 습격을 하고 이 성전을 파괴하고 맙니다.
그 후 주후 8년 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 몰래 들어옵니다. 유월절 하루 전날 성전 주위에 죽은 사람들의 뼈를 사방에 뿌려 성전을 더럽히자, 그해 유월절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민족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전쟁과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며 서로 원수 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방문하시고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을 때, 그 여인이 말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왜 나에게 말을 걸어오십니까?” 당시의 상황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짐작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의 이웃관은 무엇입니까?” 물으며 도전하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은 지금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네가 만약에 강도의 습격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죽을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 마침 그렇게도 존경하던 제사장 곧 나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너는 ‘나를 도와주겠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너를 보고는 지나쳐 버렸다. 이번에는 레위인이 들어왔다. 네가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니 무엇인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너를 보고는 다른 길로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서 너는 ‘나의 이웃이 아닌데…’ 생각했겠지만 그가 너를 보고는 다가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주막까지 데려가서 정성껏 간호해 주기를 부탁하며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맡겼다면 누가 과연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
결국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바탕을 둔 이웃관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스스로를 중심으로 해서 옆에 있는 가족, 친구, 민족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 함께 살고 있는 경건한 사람만이 이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죠. “이웃이 누구인가? 나에게 고정된 것인가?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을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고 바꾸십니다. 이웃의 개념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이웃은 고정되어 있지 않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이웃이 될 수 없고,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돌보면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 이웃입니다. 율법학자는 완성된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편으로서의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정되지 않은 이웃, 끊임없이 변하는 이웃, 오늘 만나는 사람 그리고 끊임없이 만나는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 됨의 의미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 비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떠났죠. 그러나 여전히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아직 떠나지 못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지 못했다면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비유 가운데 나타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강도 만난 자를 돕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왜 그들은 강도 만난 자를 돕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실패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왜 그들은 이웃을 돕는 일에 실격했습니까?
아마도 같은 날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간 걸 보아서 제사가 있었던 날이라고 보입니다.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사 드리는 일을 도와야 한다는 상황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규율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제사가 다 중단되겠죠.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멀리 두고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 돕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일정과 계획,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이웃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함께하고 그 사람의 장소에 함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계획과 생각의 파괴를 의미하고, 나의 일정의 파괴까지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도와야겠다. 혹은 이것을 하면 나의 일정이 모두 망가지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이만큼 돈을 모은 다음에… 이 정도로 경력을 쌓은 다음에… 내가 충분히 준비된 다음에… ’ 그러나 그때가 되면 고정된 이웃은 있을지 몰라도 정작 우리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그때 그 자리에 단 한 번 있을 뿐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갑을 열어 봅니다. 그중 얼마는 집안 식구들과 식사할 비용입니다. 얼마는 아이의 학비입니다. 얼마는 부모님께 드릴 용돈입니다. 이 돈 저 돈 떼고 보니 남는 돈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지갑을 닫습니다. 이렇듯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결코 도울 수 없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 강도 만난 사람을 보지 못해서 그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기만 하면 나는 얼마든지 도울 자신이 있다.’ 장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85년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죠. 신대원 1학년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한참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인기 상영 중이었습니다. 12월 31일 마지막 날,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홀로 길을 걷던 중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저 사람을 내가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 옆에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물기가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 사람 술을 드시고 실례를 하신 것 같은데 내가 꼭 도와야 할까?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면서 송구영신 예배에 갈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데, 그의 옆에 있던 물기가 물이 아닌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다가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힘이 저를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 내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모함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라도 이 사람을 붙잡고 고치려고 하다가 내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어떻게 될까?’ 여러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길을 바꾸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도망을 가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이켜 그분에게 다시 돌아가는데 발걸음이 얼마나 느렸는지, 한참이나 느리게 가면서도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그분을 발견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 기억이 납니다. 멀찌감치 갔을 때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부축하면서 택시를 붙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만약 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겠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분을 만나면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훈련을 받고 있었던 저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도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오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여리고로 향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카타바이노’ 즉 ‘내려가다’라는 단어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금 전 저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그들이 제사를 위해야 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거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예수님의 비유는 반대입니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질문에는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시는 부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말씀을 읽다가 저의 눈에 여관 주인이 들어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말하고 부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어쩌면 예수님만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단어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 속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여관 주인을 불러서는 “이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심지어 두 데나리온을 남기면서 혹시 돈이 부족하면 돌아올 때 다 갚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이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만약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돌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만이라도 돌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리어 여관 주인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비용을 들여 강도 만난 자를 싸매 주고 고쳐 주는 분을 옆에서 본 사람, 그 모습에 감동한 사람, 그리고 그를 돌보아 달라고 비용을 받은 사람, 혹여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다시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받은 재물은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라고 맡기신 두 데나리온입니다. 그들을 돌보아 주라는 주님의 부탁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보태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관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막의 주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미 싸매 주시고 고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그들이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돌보는 것입니다. 비용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입니까? 나는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까? 그들을 찾아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여관 주인은 한 번 되어 보십시다. 여관 주인에게 필요한 마음은 성실함일 것입니다. 주님께 이미 약속을 받았으니, 두 데나리온도 받았으니 우리는 청렴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 일을 부탁하고 계십니다.
At Least Be the “Good Innkeeper”
Luke 10: 25-37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which is today’s passage, is probably the most famous of all Jesus’ parables. No other lesson has impacted the history of the world or of the Church.
This is the story in short. A man met a band of robbers on his way down to Jericho. The thieves beat him and stripped him of all this clothes, leaving him almost dead. First,a priest passed by, but ignored him. Next, a Levite came, but he, too, passed him by. Finally, a Samaritan came. Having pity on the man, he poured oil and wine on his wounds, and bandaged him. Then, placing this stranger on his donkey, he took him to an inn to take further care of him. The next day, as the Samaritan was leaving, he gave two denarii to the innkeeper and said, “Please take care of this man. I will pay for any further expenses when I return.”
This is all there is to the story. What a simple and ordinary tale. Yet it transformed the lives of many. Inspired by it, some founded hospitals, someprovided for the homeless, while others started charity work for the poor, orphans, and widows. Some even helped strangers on the highway with broken cars. Countless charity work and medical/welfare foundations were established in the name of the “Good Samaritan.”
Nothing would be more tragic if a parable with such unparalleled influence on Christians for centuries fails to move us today. Why are we not moved by this parable today? Why does it not impact me today?
The truth is, it’s not because we don’t know the morale of the story. The problem is not that we are ignorant of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today. The problem is that we are indifferent to the parable, and thus do not live it out. Then how can we make this lesson truly ours? I pray that the Holy Spirit will guide me as preach on this parable today.
First, let’s think about the context of the story. As you may know, the parable was told as Jesus was having a tense conversation with an expert of the law:
“On one occasion an expert in the law stood up to test Jesus […].” (Luke 10: 25)
“But he wanted to justify himself, so he asked Jesus […].” (Luke 10: 29)
In these two sentences, we can sense the tense atmosphere between Jesus and the teacher of the law.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was told in this context and ambience.
An expert in the law came to Jesus and asked, “What must I do to inherit eternal life?” (Luke 10: 25) Jesus asked back, “What is written in the Law? How do you read it?” (Luke 10: 26) The expert in the law answered, “Love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and with all your mind.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Luke 10:27) At this Jesus replied, “You have answered correctly. Do this and you will live.” (Luke 10:28)
So far, the dialogue seems to be going smoothly. But when the conversation seems to have come to an end, the teacher of the law abruptly asked this question: “And who is my neighbor?” (Luke 10: 29)This question was thrown at Jesus like a dagger by the teacher who wanted to test Jesus and justify himself. It hides an overt conflict—for the teacher of the law is actually implying, ‘I agree with you that we should love our neighbors. But what on earthis your definition of neighbor? Start explaining.’
At the time, the Jews did not consider everyone their neighbors, following the interpretation of rabbis. At the center of the circle of relationships, there were the Jews themselves. Then there were; their families, connected through religion and blood; their friends and relatives who believed inGod; and the Israelites, their people. Finally,in the most outer circle, there were those who were not Israelites or of the same blood, but had converted to Judaism.
The Jews believed that only those within this circle were their “neighbors.”However, they found that Jesus did things that attacked this worldview. He was messing with their boundaries. He met pagans, prostitutes, tax collectors, and the sick. This is why the Jewish leaders called Jesus“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Luke 7: 34) in a derogative way.
For these reasons, the expert of the lawboldly asked Jesus, “Yes, you are right. Of course, we must love our neighbors. But who do you think our neighbors are? What is your view on‘neighbors’ that you should befriend all these prostitutes and tax collectors?” This is the true intention of his question, which was, in fact, an invective and challenge to Jesus. It wasa dagger meant to pierce Him.
Jesus’ answer to this malicious question was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This parable was actually an accurate reflection of the time. Why did Jesus mention the Good Samaritan in his parable? What was his intention?
A study of Israel’s ancient history tells us that the Samaritans had originally belonged to the Israelite people. However, in 722 BC, when the Israelites were defeated by the Assyrians, the king of Assyria moved Assyrians to the region of Samaria and encouraged intermarriage. Due to this integration policy, the Israelites in the north lost their pure Jewish heritage.
Accordingly, the Jews in the south started to erase the Samaritans from their ethnicity. Around 500 BC, when the Samaritans offered to help the Jews who had returned from Babylon to rebuild the Temple of Jerusalem, the Jews refused and even denied themparticipation in the worship after the Temple’s restoration. This led the Samaritans to build a separate temple on Mt. Gerizim around 400 BC. But the Jews, displeased with this, attacked them in 128 BC, destroying their temple as well.
After this incident, the Samaritans, who were waiting for their day of revenge, snuck into Jerusalem around 800 AD on the eve of the Passover, the biggest Jewish festival, and desecrated the temple by scattering bones of dead people, which prevented the Jews from observing the Passover that year. Such events turned the Jews and the Samaritans into enemies, causing the Jews to regard the Samaritans no better than filthy pigs. In is in this context that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 in John Chapter 4 says this to Jesus when He asked her for a drink: “You are a Jew and I am a Samaritan woman. How can you ask me for a drink?”
Therefore, considering this historical context regarding the Jews and the Samaritans, you can easily imagine the pure shock of the people of the time who heard Jesus speak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When Jesus was confronted by the expert of the law who challenged him with the question ‘What then is your view and definition of neighbor?’,Jesus responded squarely to his hidden intention by telling a story whose brave protagonist was someone the Jews abhorred, a Samaritan.
So this was what Jesus was trying to say: ‘Imagine you met a thief. But your most revered priest just passes you by. Then a holy Levite ignores you, too. Would you still be able to say that they are your neighbors? Does the same blood or religion make someone your neighbor? To the person who has been beaten and robbed, the one who helps and saves him is his neighbor. Is this not true? No matter his race, religion, or faith, the one who helps you is your true neighbor. Am I not correct?’
Then at the end of the story Jesus asked this question: “Which of these three do you think was a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erefore, to Jesus’ calculated question the teacher of the law was left with no choice but to answer, “The one who had mercy on him.”
Jesus turned an extremely self-centered question—“Who is my neighbor?”—into a truly great one: “Who is the neighbor to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is should be our Eureka moment.
Indeed, this amazing parable prompted countless people to leave their lives to go to the afflicted. In past history and in the present, we have witnessed, and continue to see, these countless people who held on to Jesus words “Go and do likewise”.
Sadly, however, not everyone left their way of living to serve their neighbors. Some continue to live in their self-centered bubble, refusing to include others into their definition of “neighbor.” If this is the state that we are in, what must we do? How can we become a Godly person who servers his neighbor like the Good Samaritan?
First, a man who is “ready” can help the man fallen into the hands of robbers.
Some may think, ‘I haven’t yet met a man who has fallen into the hands of robbers. If there aren’t such people around me, I don’t have to go out of my way to seek them out, do I? The Good Samaritan did not go out hunting forafflicted people.There will be a time when somebody needs my help, I’m sure. Wouldn’t it be enough to help that person then? If that is the case, then I am certain I will be of service to my neighbors.’ This is what you may be thinking.
Let me tell you a rather painful story about myself. I think it was on New Year’s Eve of 1985. I had planned to attend the New Year’s Eve service at Youngnak Church after watching a movie with a friend. After seeing Amadeus, I said goodbye and headed for Youngnak Church alone. But,as I was walking down Euljiro, I saw a man sprawled on the ground. First, I thought he was drunk. There was a lot of what seemed to be water on the pavement, and I first thought was his urine. But upon a closer look, I found that it was blood—blood gushing from his head.
My heart was pounding, but I was at a loss. I looked around, but there was no one. What should I do? After somethinking, a thought suddenly occurred. ‘What if I help him in this deserted street and he dies or his condition gets worse? Wouldn’t people blame me? Make me a murder suspect?’ I started to run.Pure fear made me run. After a few moments, I saw from a distance people crowding to the scene. I wanted to tell them what had happened, but was afraid that I might be taken as a criminal or a thief. So I kept silent. I just passed them by. As I was running from the scene, the 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crossed my mind.
I had heard this famous story countless times. Whenever I listened to it, I thought I would be the “Good Samaritan” when the situation arose. But here I was—the priest and the Levite who passed by. I stopped in my tracks. I mustered my courage and retraced my steps. But my steps weren’t quick—for I was desperately hoping that someone else would rescue the man before I arrived.
When I finally approached the scene, I saw some men lifting him up and putting him on a taxi. A Defense Forces guard was taking him to a hospital in a taxi. That day, I saw in myself the priest who passed by theman who met robbers and Peter who did not have the courage to say he was Jesus’ disciple. Then I went to the New Year’s Eve service, which I can’t remember at all. All I remember was the guilt, the pain, and my prayers of deep shame.
Who can become the neighbor of the man fallen to the hands of robbers? Through this incident, I realized one thing: Only one who is “ready” can be his neighbor. I realized that knowledge alone does not make someone the neighbor of the robbed man. One must have not only a heart to help, but also a heart that is “ready” to put that willingness into action.
Second, you must break free from your self-centered frame of thought to help the afflicted man.
When we think more deeply about theParable of the Good Samaritan, doubts arise as to whether we will be able to help our neighbors like the Good Samaritan when the time comes. Consider the priest and the Levite in the story. What do their failures teach us? Why made them fail in helping their neighbor?
Considering the fact that a priest and a Levite both happened to pass by that day, it is highly likely that it was a day of worship. The two were probably busily on their way to the temple to serve at the altar. And they had to stay away from anything unclean according to the law. If the man was dead, they could not give their sacrifices for they would be unclean. This may have been the dilemma of the priest and the Levite.
Almost everyone wants to help the afflicted. Yet a man immersed in his own schedule, plans, and set of ideas, cannot easily help his neighbor. Becoming a neighbor to someone meansspending time with him and going to where that afflicted person is. This means that my plans and my schedule will be ruined. A man who thinks, ‘I’ll help him after the service (or aftersuch and such for that matter)since helping him now will ruin my whole schedule,’ will never be able to help his neighbor.
If you are thinking to help others after building a career, after saving a certain amount of money, after you think you are fully ready, then there may be no one to help then. The man fallen to the hands of robbers is foundonly at a certain time and place.
Let’s say someone is in trouble. You want to help. So you look in your wallet. You find some money but it’s for groceries, for your child’s school fees, and for your parents’ stipend. After setting all these aside, there is none left to give. So you close your wallet. A man who cannot set aside his life and daily cares cannot help the afflicted man.
Yes, it’s hard. It’s not easy to become the Good Samaritan. Then what must we do?
Third, if we cannot be the Good Samaritan, can’t we at least be the “Good Innkeeper”?
Perhaps the real intention of this parable lies elsewhere. Jesus did, of course, tell us to “do likewise.” But perhaps the parable is pointing to Jesus Christ Himself who came to us—the ones fallen into the hands of the robbers—as the Good Samaritan.
One phrase catches our attention: “he took pity on him.” When the Good Samaritan met the man who fell into the hands of robbers, the Bible says, “he took pity on him.” This is the same phrase used in the scene where Jesus “had pity on” the sick and healed them. By using this particular word, the parable is telling us that the Good Samaritan is Jesus Himself who came to us.
Then who are we? Perhaps we are the innkeeper. The Samaritan says to the innkeeper, “Look after him. And when I return, I will reimburse you for any extra expense you may have.”
Aren’t we this innkeeper then? Jesus became the neighbor to the man who was robbed. He bandaged his wounds, healed him, and entrusted him to the innkeeper. Then He said, “Take good care of him. If it costs you more, I will pay back everything when I return.”
We are not the Good Samaritan. We can never be. Rather, we are the innkeeper. We are the very people who witnessed the One who bandaged, cured, and paid for the wounded man. We are the ones who have been given money to take care of him. We have been promised a reimbursement for any further costs. We are the innkeeper.
Our wealth is the two denarii that Jesus gave the innkeeper to care for the wounded man. He asked us to look after him. He promised us to give us more for any further expenses. We are the innkeeper.
Dear brothers and sisters, if we cannot be the Good Samaritan, can’t we at least be the “Good Innkeeper”? There are those that Jesus has entrusted to us. Our Lord has already bandaged and cured them. Our mission is to look after them until they are well. We have already been given the expenses. And we have a promise.
Whose neighbor am I? To whom do I have meaning? Find them, and be a “Good Innkeeper” to them—if not a Good Samaritan. A good heart is an essential quality of the innkeeper. An evil innkeeper may just kick the man out after receiving the money.
I feel an urge to change the title of today’s sermon to “The Parable of the Good Innkeeper.”
Dear brothers and sisters, be the “Good Innkeeper.”
누가복음 10: 25 ~ 37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익히 들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우리를 향해 질문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진 비유도 없을 것입니다. 세계와 교회 역사에 걸쳐 이만큼 큰 영향을 미친 말씀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이야기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를 만나 가진 소유를 전부 빼앗기고 죽게 될 만큼 상처를 입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봅니다. 그러나 그는 그를 돕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피하여 도망갑니다. 제사장에 이어 또 다른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지만, 그조차도 피하여 다른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기며 다가가서 상처를 싸매 주고, 포도주와 기름을 부으며 상처가 낫도록 도와줍니다. 나귀에 강도 만난 자를 태워서는 주막까지 데려다 주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그를 간호하다가 떠날 때가 되자,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이 사람을 맡기죠. 그리고는 상처 난 사람, 강도 만난 이 사람을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혹여나 돈이 부족하면 돌아와서 값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원을 세웠고, 어떤 사람은 자선 단체를 세웠고, 또 어떤 사람은 노숙인과 고아, 과부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길을 잃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 비유 말씀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늘 저는 제 자신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향해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 말씀이 우리에게 그만큼 영향을 미쳤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이 말씀은 살아 있는 능력이 됩니까?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이 말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며 감동을 받아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말씀을 읽고도 특별한 반응이나 사건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의 무력함 때문일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실천 없음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이 살아 있는 능력이 되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바뀔 수 있을지 생각하며 본문 말씀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날이 선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상황 속에서 나온 주님의 말씀입니다.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오죠.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본문에 두 가지 말씀이 나타납니다. 10장25절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누가복음 10장 25절 중)
29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누가복음 10장 29절 중)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또는 자기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누가복음 10장 25절 중)
예수님께서 대답하시죠.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누가복음 10장 26절 중)
그러자 율법교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장 27절 중)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의 대답에 응하는 대답을 주십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누가복음 10장 28절 중)
정교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율법 교사 간의 대화가 끝나는 듯 보이는 이때, 율법 교사가 한 가지 질문을 다시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0장 29절 중, 새번역)
사실 이 질문은 굉장히 뾰족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한다는 말씀을 율법 교사의 질문 앞에 둡니다. 무언가 작심하고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될 것이다.”하는 말씀을 받고 “네, 그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당시 랍비들이 가진 이웃에 대한 개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원 안의 중심에 자신이 있고, 혈연과 종교를 중심으로 하나의 원이 펼쳐지듯 이웃과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까이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겠죠? 조금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웃의 제일 마지막에는 민족은 다르지만,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방 민족들이 이웃의 범위에 속해 있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 원 안에 들어 있는 사람만이 이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만히 살펴보니 예수님은 자신들과 같은 관점으로 이웃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들도 쉽게 만나고, 심지어는 세리와 창녀도 쉽게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눅 7:34)고 비난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율법 교사가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 잘 알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이웃을 규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아주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예수님께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날이 선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고정 관념을 깨트리시는 질문으로 되물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당시 엄청난 현실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비유 안에 사마리아인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넣으셨을까요? 매우 의도적인 예수님의 행동이자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사마리아인들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로부터 멸망당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앗수르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앗수르의 왕은 앗수르 민족들을 사마리아인들과 함께 살게 하면서 통혼 정책을 펼치죠. 한마디로 앗수르 민족과 통혼해서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던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민족성이 바뀌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남유다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는 했지만 민족성은 지킬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주전 5세기경, 예루살렘에 새로운 성전을 짓고자 그들이 돌아옵니다. 그때에 사마리아에 있었던 사람들이 성전 짓는 일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유대인들이 거부를 합니다. 그들이 이방 민족과 피가 섞였다는 이유였습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더 이상 동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전 4세기경,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지역에 성전을 따로 만들게 됩니다. 그 성전이 바로 그리삼 산에 있었던 성전입니다. 그런데 주전 128년경에 유대 사람들이 습격을 하고 이 성전을 파괴하고 맙니다.
그 후 주후 8년 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 땅 예루살렘에 몰래 들어옵니다. 유월절 하루 전날 성전 주위에 죽은 사람들의 뼈를 사방에 뿌려 성전을 더럽히자, 그해 유월절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민족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전쟁과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오고 가며 서로 원수 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방문하시고 사마리아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을 때, 그 여인이 말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유대인으로서 어떻게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왜 나에게 말을 걸어오십니까?” 당시의 상황에서 제기되었던 질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 짐작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의 이웃관은 무엇입니까?” 물으며 도전하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은 지금 그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전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죠. “네가 만약에 강도의 습격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죽을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 마침 그렇게도 존경하던 제사장 곧 나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던 그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너는 ‘나를 도와주겠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너를 보고는 지나쳐 버렸다. 이번에는 레위인이 들어왔다. 네가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니 무엇인가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너를 보고는 다른 길로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를 보면서 너는 ‘나의 이웃이 아닌데…’ 생각했겠지만 그가 너를 보고는 다가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주막까지 데려가서 정성껏 간호해 주기를 부탁하며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맡겼다면 누가 과연 너의 이웃이 되겠느냐?”
결국 율법학자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바탕을 둔 이웃관에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스스로를 중심으로 해서 옆에 있는 가족, 친구, 민족 그리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 함께 살고 있는 경건한 사람만이 이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에게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중요한 말씀은 이것이죠. “이웃이 누구인가? 나에게 고정된 것인가? 누가 나의 이웃인가?” 라는 질문을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것인가?”라고 바꾸십니다. 이웃의 개념을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시키신 것입니다.
사실 이웃은 고정되어 있지 않죠.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합니다. 그냥 지나쳐 버리면 이웃이 될 수 없고, 그들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돌보면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게 이웃입니다. 율법학자는 완성된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고정되어 있는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나의 편으로서의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정되지 않은 이웃, 끊임없이 변하는 이웃, 오늘 만나는 사람 그리고 끊임없이 만나는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이웃 됨의 의미를 돌아보게 합니다.>
이 비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떠났죠. 그러나 여전히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아직 떠나지 못했다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지 못했다면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비유 가운데 나타난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로부터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강도 만난 자를 돕지 못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왜 그들은 강도 만난 자를 돕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실패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왜 그들은 이웃을 돕는 일에 실격했습니까?
아마도 같은 날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간 걸 보아서 제사가 있었던 날이라고 보입니다. 성전으로 올라가서 제사 드리는 일을 도와야 한다는 상황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규율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면 모든 제사가 다 중단되겠죠.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멀리 두고 떠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 돕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일정과 계획,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이웃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간에 함께하고 그 사람의 장소에 함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의 계획과 생각의 파괴를 의미하고, 나의 일정의 파괴까지 의미하기도 합니다. ‘제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도와야겠다. 혹은 이것을 하면 나의 일정이 모두 망가지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이만큼 돈을 모은 다음에… 이 정도로 경력을 쌓은 다음에… 내가 충분히 준비된 다음에… ’ 그러나 그때가 되면 고정된 이웃은 있을지 몰라도 정작 우리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웃은 곁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는 그때 그 자리에 단 한 번 있을 뿐입니다.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갑을 열어 봅니다. 그중 얼마는 집안 식구들과 식사할 비용입니다. 얼마는 아이의 학비입니다. 얼마는 부모님께 드릴 용돈입니다. 이 돈 저 돈 떼고 보니 남는 돈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지갑을 닫습니다. 이렇듯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결코 도울 수 없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직 강도 만난 사람을 보지 못해서 그래. 강도 만난 사람을 보기만 하면 나는 얼마든지 도울 자신이 있다.’ 장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저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85년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죠. 신대원 1학년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한참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인기 상영 중이었습니다. 12월 31일 마지막 날,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홀로 길을 걷던 중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쓰러져 있구나. 저 사람을 내가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는데 그 옆에 흥건하게 펼쳐져 있는 물기가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 사람 술을 드시고 실례를 하신 것 같은데 내가 꼭 도와야 할까?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면서 송구영신 예배에 갈 수는 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데, 그의 옆에 있던 물기가 물이 아닌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렇게까지 피가 흘러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놀랐고 당황했습니다.
다가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큰 힘이 저를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혹시 내가 이 사람을 죽였다는 모함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라도 이 사람을 붙잡고 고치려고 하다가 내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어떻게 될까?’ 여러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길을 바꾸어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도망을 가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그래서 발걸음을 돌이켜 그분에게 다시 돌아가는데 발걸음이 얼마나 느렸는지, 한참이나 느리게 가면서도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그분을 발견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 기억이 납니다. 멀찌감치 갔을 때 한 사람이 그 사람을 부축하면서 택시를 붙잡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만약 그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겠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그분을 만나면 내가 어떻게 보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훈련을 받고 있었던 저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도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오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여리고로 향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카타바이노’ 즉 ‘내려가다’라는 단어가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중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조금 전 저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었다면 그들이 제사를 위해야 했기 때문에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기 어려웠을지도 모를 거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예수님의 비유는 반대입니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습이고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질문에는 사명을 감당하길 원하시는 부탁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할 수 없다. 나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말씀을 읽다가 저의 눈에 여관 주인이 들어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말하고 부탁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자, 그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어쩌면 예수님만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 ‘불쌍히 여겼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단어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 속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닮아 있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여관 주인을 불러서는 “이 사람을 끝까지 돌보아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심지어 두 데나리온을 남기면서 혹시 돈이 부족하면 돌아올 때 다 갚아 주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다가 이런 생각에 잠겼습니다. ‘만약 내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하더라도,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 그 사람들만이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돌아오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만이라도 돌볼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 도저히 될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리어 여관 주인 정도는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의 비용을 들여 강도 만난 자를 싸매 주고 고쳐 주는 분을 옆에서 본 사람, 그 모습에 감동한 사람, 그리고 그를 돌보아 달라고 비용을 받은 사람, 혹여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다시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받은 재물은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 주라고 맡기신 두 데나리온입니다. 그들을 돌보아 주라는 주님의 부탁의 말씀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보태어 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관 주인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막의 주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미 싸매 주시고 고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그들이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 돌보는 것입니다. 비용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입니까? 나는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까? 그들을 찾아 선한 사마리아인은 되지 못할지라도 여관 주인은 한 번 되어 보십시다. 여관 주인에게 필요한 마음은 성실함일 것입니다. 주님께 이미 약속을 받았으니, 두 데나리온도 받았으니 우리는 청렴하고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그 일을 부탁하고 계십니다.
2021년 9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성실한 여관 주인이라도 됩시다” (눅 10:25~37)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0장, 45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눅 10:25~37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2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없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습니다. 이에 감명을 받아 병원을 세우기도 하고, 노숙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자선의 일을 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양한 의료, 복지, 자선의 사업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이 내겐 어떤 영향력을 미쳤을까요? 지금껏 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지 못했다면, 어떻게 하면 이 교훈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할 수 있을까요?
설교의 요약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예수님과 율법 교사 간의 첨예한 논쟁 가운데 예수님께서 드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고받는 대화 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이 율법의 핵심임을 나누면서 율법교사가 의도성이 짙은 질문을 다시 예수님께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것입니다. 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졌을까요? 당시 유대의 율법해석에 따르면 누구든 유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이웃관은 고정되어 있는 관념이었습니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원을 그리며 혈연과 종교가 연결되어 큰 원을 그려가면서 그 원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경계를 넘어서 이방인들과 창녀, 세리 및 병자들을 친구 삼으신 예수님을 향한 율법교사의 독설과 도전의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강도만난 자가 있는데 그렇게 존경하는 제사장, 경건하다고 여기는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 강도만난 자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럼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는가?”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자기중심의 원을 그려 넣고 던졌던 질문을,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 수많은 사람들 모두 다 내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물음으로 바꿔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말씀이 아는 것으로 그침이 아닌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려면, “먼저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그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언제든 어려움에 처한 자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하나, 실행에 옮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준다는 것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시간과 장소에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틀, 계획에 갇혀 있는 사람은 삶의 여정 속에 만나는 이웃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 일정과 계획이 엉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선뜻 나설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되고자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존재에 대해 절망하지 말고 하나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을 여관주인에게 맡기며 당부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그 역할을 맡기셨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여관주인이 되어 예수님께서 맡기신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회복하는 일을 성실히 감당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받은 것들이 있다면 이는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이웃을 돌보아 주라고 맡기신 두 데나리온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모든 비용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도울 순 없더라도 성실한 여관 주인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누기
1. 내 안에 고정된 이웃의 경계가 있진 않습니까? 어려움에 처한 자를 보고도 순간 돕지 못하고 지나친 일이 있다면 어떤 이유였습니까?
2. 예수님께서 이웃을 돌보라고 내게 맡긴 두 데나리온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마무리기도
선한 목자 되신 주님, 두 데나리온을 맡기면서 “이 강도 만난 이웃을 잘 돌보라”는 주님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건강, 재물과 능력이 바로 주님께서 맡기신 두 데나리온임을 이 시간에 영의 눈을 열어 깨닫고 선한 청지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