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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 보고 듣고 만지는 하나님의 사랑

요한복음 1:14

김지철 목사

2024.10.06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송을 들으니 제 마음도 벅차오릅니다. 늘 보고 싶었지만 멀리서 성도님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강단에 서니 지난 16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목회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도 드렸지만 때로는 아픔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지난 16년간의 목회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창립 47주년 기념 예배에 어떤 말씀을 증거해야 할까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최고의 사랑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면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면 데이트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하면 사귀다가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식을 올려 함께 살아갑니다.

사랑이란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실제로 하려고 하면 상처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려고 하는데 저 사람이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나를 배반하면 어떻게 될까?’ 사랑이란 어마어마한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별 볼 일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을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면서 큰 모험을 하십니다. ‘내가 이들을 사랑해서 이 땅에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 저들이 받아들일 것인가? 저들도 마음을 열어서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결단하며 성육신의 사건을 만드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은 하나님의 사랑의 모험이자 하나님의 엄청난 결단과 용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뜻을 품고 이 땅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육신이 왜 필요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가까이 있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들어와 우리의 문제 해결하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과감한 결단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과감한 자기 변신이 곧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 사건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으로 변신하셨습니다.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들리는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으로 만지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 뒷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가까이, 사랑 때문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창조주가 피조물처럼 되셨다”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분이 죄인의 모습처럼 오셨습니다. 하늘의 존재가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원으로 계실 분이 인간의 순간과 시간 속에 꺼져 갈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게 왜 힘든 사건일까요? 영원하신 분이 물질의 세계, 인간 몸의 세계로 오실 때, 결국 그 몸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

 

하나님 비슷하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다른 것들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형상 금지를 하나님 스스로 깨뜨리셨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처럼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처럼 똑같이 아픈 모습으로, 우리가 피 흘리는 것처럼 똑같이 피 흘리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금령을 스스로 파괴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고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제한하고 축소하셨습니다. 작아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낮고 천한 죄인을 위해 어디까지 작아지셨겠습니까?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포용할 수 없다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야기합니다(대하 6:18). 하나님이 이 땅의 지구촌에 오셨고,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 오셨으며, 한 여인의 몸에 작은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자기를 축소하고 제한하셨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기를 작정하셨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저를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과 어쩌면 저렇게도 다를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더 큰 것과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사람들의 전쟁들은 왜 일어날까요? 땅을 더 차지하고 재물을 탐하며, 더 높은 권력과 강력한 힘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크고 많으며, 높고 더 강력한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전쟁 속에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뒤집습니다. 높이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계십니다. 특별히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뭘까요?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 죄악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죄책감에 의해서 어떻게 살지 몰라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죄 속에서 죽게 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살려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죄와 불의가 가득한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 사건 안에는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하나님의 엄청난 애통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연약하며 하나님과 적대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까? 그 속에 자기 자신을 낮추고 인간을 위해 아들의 죽음까지 내어놓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나 같은 자를 사랑하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육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이 주는 세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육체가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설 존재입니다. 한 점의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내 몸과 내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소중한 축복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내 가슴이 호흡하고 내 심장이 뛰며, 내 손과 발이 움직이고 두 발로 서 있는 내 몸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의 삶으로 모든 삶을 종결한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 나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군요. 내가 아직 호흡하고, 나의 눈이 보며 귀가 듣고 있군요. 손과 발이 아직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군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며 내 몸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임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발로 서며 놀라운 생명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제일 먼저 하셨던 사역은 병든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다가가지 않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가까이 가셔서 손을 대셨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눈과 몸을 만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치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김경진 목사님께서 수요일에 치유 기도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서 우리를 좌절케 하는 첫 번째가 무엇일까요? 아픈 것입니다. 나의 아픔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만 압니까? 자기만 압니다. 내 몸이 어딘가 쑤시고 움직일 때마다 나를 콕콕 찌르는 고통이 있을 때 우리는 당혹해 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사역은 더 아프지 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치유받고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이 축복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중보기도 하면서 서로 손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육신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진정한 ‘임마누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 집터를 마련하고 동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내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홀로 외롭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임마누엘의 사건이 경험됩니다. “너는 고아가 아니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야. 하나님이 너의 아바 아버지가 되신단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을 인도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이것이 지속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거기에 임마누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반 절을 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b)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땅에 사는 존재야. 그렇다고 땅만 보아서는 안 돼. 하늘의 신비와 능력이 있어. 하늘에 하나님의 보물의 이야기가 있어. 그것을 놓치면 안 돼. 너희들은 이 땅만 쳐다보며 일희일비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야.” 하늘의 신비를 붙잡고 이 땅에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땅의 세계가 전체가 아니며 하늘의 세계가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자리가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니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떻게, 어떤 형태로 죽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시고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따라 우리도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낮아지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작아지고 비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처녀 때 가졌던 많은 꿈을 때로는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녀들이 건강하고 씩씩하며 용기 있게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어머니들이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이것은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있습니다. 지식의 힘, 돈과 재물의 힘이 있습니다. 권력의 힘과 예술적 달란트의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을 가지고서 성육신의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잘난 체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며, 더 교만해지려고 합니다. 열등감이 있는데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보다 못하고 낮은 사람을 억누르고 조롱하며, 함부로 대하고 학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교회는 대형 교회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가득한 분들이 많습니다. 돈과 재물을 지닌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와 권력, 예술적 재능과 달란트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해석학과 사랑의 신앙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하면서 내 배만 불리고 남과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면 그 인생은 불행한 삶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과감하게 탈출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순간, 무엇인가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며 기득권의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봉착한 많은 이유 중 첫 번째는 영적 힘을 지닌 목사들이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보존을 위한 보호막으로 기득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세습과 은퇴 연장의 문제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내려가려 하지 않고 더 높아지려 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는 좋은 장로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로가 되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갖지 못한 벼슬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와 장로가 되면 성도님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권력을 지닌 것처럼 힘을 마구 휘두르려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계속 갈등과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남을 섬기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있으므로 이 세상이 더 멋진 세상이 될까? 생명과 치유가 가득한 풍요로운 세상이 될까? 나 같은 사람으로 인해 누군가 다시 새로운 에너지와 용기를 갖고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며 우리에게 주신 세상적인 힘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칩니까? 왜 사회에서 직분을 얻고 영향력을 가지라고 권면합니까? 목표가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올라간다면 올라갈수록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에 멈추게 됩니다.

소망교회가 4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탄식하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아파하고 소외된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 나서는 교회가 된다면 소망교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고 ‘우리끼리 있는 것이 좋으니 우리끼리 모이자. 우리끼리 모이니 신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성육신의 마음을 품는 것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몸, 돈과 재물, 지식, 달란트, 사회적 직분과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이 땅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줄까?’, ‘사랑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우리 가슴속에 있기를 원합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남편들은 성육신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보이는 사랑, 들리는 사랑, 만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눈동자를 보면서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들리게 하세요. 투명 인간처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아내를 감싸안고 보여 줘야 합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이 있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입니다.

여러분, 여기 청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기억이 안 나겠지만, 엄마 아빠는 어렸을 때 끊임없이 여러분을 안고 쓰다듬어 줬습니다. 볼에 수없이 뽀뽀하고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해서 다 잊었습니다. 청년들은 부모님을 향해 나아가세요. 보이는 사랑, 들리는 사랑을 해 주세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어서 정말 고맙다고, 내가 이만큼 자라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부모님을 안아 주세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넘쳐나게 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보여 주기 위해, 들리기 위해, 그리고 손으로 만지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성도로서 성육신의 마음을 갖고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생명과 치유 및 회복의 사건이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그 속에 인간이 얼마나 귀한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건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봐라. 자기의 것으로 스스로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저 복된 교회와 성도들을 봐라.”라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The Incarnation: God’s Visible, Audible, and Tangible Love

 

John 1:14

 

Today’s Scripture is John 1:14: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This verse may be said to be the summary of the Book of John, and even perhaps the entire Bible. Faith is to trust and love God—through Jesus Christ.

 

When two people are in love, they do all they can to become closer to each other. They go out on dates, propose, get married, and live together. A married couple becomes one in body andsoul. This is the successful love. C.S. Lewis said, “To love at all is to be vulnerable.”Love exposes us to the hurts of betrayal, rejection, and loss.

 

The Incarnation of Christ is God’s greatest love toward man intended to love and draw close to man. It is God’s radical self-transformation to love the sinful man, the very antithesis of the holy God.

 

  1. The Incarnation means that the Word became flesh. It shows God’s zeal for man. Through the Incarnation God narrowed the gap, laid a bridge, and restored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Himself. God descended to man’s level. The Incarnation was God’s adventure toward man. Why did He do this? Because of love.

 

  1. Why is the Incarnation God’s radical decision and the substance of His love?
  • Because God invisiblebecame visible. He met man’s demand, “Show Yourself!”Because God inaudible became audible. He made Himself heard by this transformation. Because God intangible became tangible. Man could touch Him! The Incarnation was the Creator becoming the creation, the heavenly Being becoming a man of the earth, Holiness becoming a sinner, and Eternity becoming a moment. It meant that the eternal, spiritual Being ofheaven became a material, evanescent being. This is because the material world inevitably vanishes.

“You shall not make for yourself an idol in the form of anything in heaven above or on the earth beneath or in the waters below.”(Exodus 20:4)

Why does God command us not to make an idol in the form of Himself? Because it denigratesour Creator to a creation. Why is the Incarnation such a groundbreakingincident? Because it was God’s recantation of His own command. He destroyed His own command to man.

  • The Incarnation was a restraint on and reduction of God. God did not fear becoming small. This is the greatness of love. He limited and belittled Himself for lowly sinners. Even the heavens cannot hold God; yet He was born as a baby on earth, in Bethlehem, Palestine. He became a fetus in a womb (C.S. Lewis). God decided to reduce Himself because of His compassionate love for man. Man’s wars are attributable to his greed for power, land, economic wealth, and political clout. Their goals are always to gain more, to get something greater and more powerful. This is true of the Russo-Ukrainian War, the Israel-Hamas War, and the Israel-Hezbollah conflicts, which are essentially turf wars.
  • Jesus came to earth to die. He did not shrink back from death. He died for our sins and unrighteousness. He who came to die for us showed us the greatest love. God showed His amazing love by giving up His son.“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Romans 5:8) The climax of God’s love was the Crucifixion of His only Son, His own body. He did this because of love!

 

  1. The Gifts of the Incarnation – Three Blessings
  • Our body is precious too. We will all face death, but as long as we live, our bodies are precious. We will eventually return to dust, but here on earth we are magnificent, precious beings created in His image. Life is precious. Praise God for the sole fact that you are alive and breathing and your heart is beating. Sing to the Lord that you can feel with your hands and stand on your feet! Don’t be sick for too long. If you are sick, your parents and loved ones will be sick.
  • We experience the true Immanuel. That the Word“made his dwelling among us” means that He is with us and walks with us (“shekinah”). Our lives are not like that of orphans. We have the eternal Immanuel. The birth of Jesus!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they will call him Immanuel’–which means, ‘God with us.’” (Matthew 1:23)

  • He made us see the glory of heaven.

“We have seen his glory, the glory of the One and Only, who came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1:14b)

Jesus tried to tell the story of heaven to humans who dwell on earth. He declared the world of heaven to men who look down only at the earth. The earth is not all. There is a world of heaven. Death is not the end of this world. There is a glorious world of life beyond.

 

Our mothers were like that. They were not afraid of becoming little and lowly for their children. They wanted their children to grow up to be righteous, healthy, brave, and confident. Powerful peoplebelieve competence, such as knowledge, money, power, and talent, is power. They think one must not have a sense of inferiority. To overcome it, they brag, are arrogant, and mock and abuse the weak.

 

Somang Church is a megachurch attended by people with knowledge, wisdom, money, wealth, worldly status, power, and talent. However, after coming to Christ, we must show thehermeneutics of God’s love.

 

We must reflect on ourselves to see if we, as believers who attend church, live only for our own interests, strive to preserve our own power, and try to increase our own wealth. If we are living as such, we must radically break free. When men possess something, they want to protect their vested rights.

 

The crisis of the Korean church is that pastors, those with spiritual power, strive to protect their vested rights, using their rights as a shield for self-preservation. This is seen in hereditarypastoral succession and the extension of the retirement age of senior pastors. They don’t want to descend but wish to ascend. There are many good elders. But elders must not be under the delusion that becoming an elder is to clinch a title or position that they did not get in this world. Pastors and elders must serve their congregation; but when they get it wrong, thinking they have great power and wielding it, problems arise in the church.

Power is God’s gift to us to serve others.

We as believers must make this world a better, more beautiful and abundant world filled with life. Why do our children have to study so hard? They must go forward in this world, knowing why they have to work and wield influence in this society with a role.

Somang Church must have a faith of the Incarnation. We must always remember and go to placeswhere there is distortion, weeping, hurt, and neglect. The church is still hope. Christians are the hope of the world.

Ourhealth, wealth, money, knowledge, artistic talent, social position, and ability must be used to make this world a better, more beautiful world. We must use them to bless the world.

Husbands, make sure that your wives hear your words of love. Thank them for being at your side. Show them your love. Don’t be an invisible person in your home. Be a tangible person. Hug your wife. Pat them on the back.

Remember how our parents hugged and kissed us when we were little? Children, make yourselves heard to your parents even when you are grown up. Say “Thank you” and show them your gratitude. Hug them.

Just as God became visibleand tangible to us, Christians must be seen and tangible to the world. We must show Jesus’ incarnational love by giving up what is ours for love, for the people w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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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가장 크게 드러납니다.>

 

찬양대의 아름다운 찬송을 들으니 제 마음도 벅차오릅니다. 늘 보고 싶었지만 멀리서 성도님들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 강단에 서니 지난 16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목회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납니다. 여러분에게 기쁨도 드렸지만 때로는 아픔도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성도님들의 사랑을 통해서 지난 16년간의 목회를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창립 47주년 기념 예배에 어떤 말씀을 증거해야 할까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최고의 사랑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면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면 데이트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사랑하면 사귀다가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식을 올려 함께 살아갑니다.

사랑이란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실제로 하려고 하면 상처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려고 하는데 저 사람이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나를 배반하면 어떻게 될까?’ 사랑이란 어마어마한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 하는 용기 있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별 볼 일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을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시면서 큰 모험을 하십니다. ‘내가 이들을 사랑해서 이 땅에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 저들이 받아들일 것인가? 저들도 마음을 열어서 사랑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결단하며 성육신의 사건을 만드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은 하나님의 사랑의 모험이자 하나님의 엄청난 결단과 용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커다란 뜻을 품고 이 땅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성육신이 왜 필요했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가까이 있기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 삶에 들어와 우리의 문제 해결하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과감한 결단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과감한 자기 변신이 곧 성육신입니다. 이 성육신 사건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으로 변신하셨습니다. 들리지 않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들리는 하나님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손으로 만지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실 수 있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 뒷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가까이, 사랑 때문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창조주가 피조물처럼 되셨다”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분이 죄인의 모습처럼 오셨습니다. 하늘의 존재가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영원으로 계실 분이 인간의 순간과 시간 속에 꺼져 갈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게 왜 힘든 사건일까요? 영원하신 분이 물질의 세계, 인간 몸의 세계로 오실 때, 결국 그 몸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분이 자기를 낮추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

 

하나님 비슷하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과 견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다른 것들은 다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형상 금지를 하나님 스스로 깨뜨리셨습니다. 왜일까요?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인 우리처럼 연약한 모습 그대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아파하는 것처럼 똑같이 아픈 모습으로, 우리가 피 흘리는 것처럼 똑같이 피 흘리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자신의 금령을 스스로 파괴하신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고 낮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제한하고 축소하셨습니다. 작아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낮고 천한 죄인을 위해 어디까지 작아지셨겠습니까?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포용할 수 없다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이야기합니다(대하 6:18). 하나님이 이 땅의 지구촌에 오셨고,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 오셨으며, 한 여인의 몸에 작은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자기를 축소하고 제한하셨습니다.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작아지고 또 작아지기를 작정하셨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볼 때마다 저를 비롯한 사람들의 모습과 어쩌면 저렇게도 다를까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더 큰 것과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뽐내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합니다. 사람들의 전쟁들은 왜 일어날까요? 땅을 더 차지하고 재물을 탐하며, 더 높은 권력과 강력한 힘을 갖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크고 많으며, 높고 더 강력한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갈등과 분쟁, 그리고 전쟁 속에는 이러한 인간의 마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뒤집습니다. 높이 올라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계십니다. 특별히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뭘까요? 이 땅에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인간 죄악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본성 안에는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죄책감에 의해서 어떻게 살지 몰라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간을 죄 속에서 죽게 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살려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죄와 불의가 가득한 이 땅에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아들을 내어놓으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 사건 안에는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하나님의 엄청난 애통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내가 죄인 되었을 때, 내가 연약하며 하나님과 적대자가 되었을 때,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 없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아들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왜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까? 그 속에 자기 자신을 낮추고 인간을 위해 아들의 죽음까지 내어놓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나 같은 자를 사랑하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육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육신의 사건이 주는 세 가지 선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육체가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 설 존재입니다. 한 점의 흙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명백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내 몸과 내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 소중한 축복인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내 가슴이 호흡하고 내 심장이 뛰며, 내 손과 발이 움직이고 두 발로 서 있는 내 몸이 소중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의 삶으로 모든 삶을 종결한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면서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 나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군요. 내가 아직 호흡하고, 나의 눈이 보며 귀가 듣고 있군요. 손과 발이 아직도 이렇게 움직이고 있군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생명을 사랑하며 내 몸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축복임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손으로 만지고 내 발로 서며 놀라운 생명의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제일 먼저 하셨던 사역은 병든 사람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다가가지 않는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은 가까이 가셔서 손을 대셨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눈과 몸을 만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치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김경진 목사님께서 수요일에 치유 기도회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너무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서 우리를 좌절케 하는 첫 번째가 무엇일까요? 아픈 것입니다. 나의 아픔은 다른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만 압니까? 자기만 압니다. 내 몸이 어딘가 쑤시고 움직일 때마다 나를 콕콕 찌르는 고통이 있을 때 우리는 당혹해 하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행하신 사역은 더 아프지 말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치유받고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이 축복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중보기도 하면서 서로 손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육신을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진정한 ‘임마누엘’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성경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가운데 집터를 마련하고 동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코 내버려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때로 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홀로 외롭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임마누엘의 사건이 경험됩니다. “너는 고아가 아니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야. 하나님이 너의 아바 아버지가 되신단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을 인도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 때 천사들은 이렇게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이것이 지속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 거기에 임마누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세 번째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반 절을 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b)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땅에 사는 존재야. 그렇다고 땅만 보아서는 안 돼. 하늘의 신비와 능력이 있어. 하늘에 하나님의 보물의 이야기가 있어. 그것을 놓치면 안 돼. 너희들은 이 땅만 쳐다보며 일희일비하면서 사는 인생이 아니야.” 하늘의 신비를 붙잡고 이 땅에 당당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땅의 세계가 전체가 아니며 하늘의 세계가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자리가 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니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합니다. 어떻게, 어떤 형태로 죽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시고 예수 믿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약속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을 따라 우리도 가정과 삶의 현장에서 낮아지며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그랬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작아지고 비천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처녀 때 가졌던 많은 꿈을 때로는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녀들이 건강하고 씩씩하며 용기 있게 이 땅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어머니들이 얼마나 낮아지셨습니까?

이것은 어머니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힘이 있습니다. 지식의 힘, 돈과 재물의 힘이 있습니다. 권력의 힘과 예술적 달란트의 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을 가지고서 성육신의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잘난 체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며, 더 교만해지려고 합니다. 열등감이 있는데 힘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보다 못하고 낮은 사람을 억누르고 조롱하며, 함부로 대하고 학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소망교회는 대형 교회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가득한 분들이 많습니다. 돈과 재물을 지닌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와 권력, 예술적 재능과 달란트를 가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해석학과 사랑의 신앙에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하면서 내 배만 불리고 남과는 상관없는 삶을 산다면 그 인생은 불행한 삶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과감하게 탈출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순간, 무엇인가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며 기득권의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위기입니다. 한국 교회가 어려움을 봉착한 많은 이유 중 첫 번째는 영적 힘을 지닌 목사들이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데 있습니다. 자기 보존을 위한 보호막으로 기득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세습과 은퇴 연장의 문제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내려가려 하지 않고 더 높아지려 하고 있습니다.

소망교회는 좋은 장로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로가 되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갖지 못한 벼슬을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와 장로가 되면 성도님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권력을 지닌 것처럼 힘을 마구 휘두르려고 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계속 갈등과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남을 섬기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도는 이런 고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있으므로 이 세상이 더 멋진 세상이 될까? 생명과 치유가 가득한 풍요로운 세상이 될까? 나 같은 사람으로 인해 누군가 다시 새로운 에너지와 용기를 갖고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며 우리에게 주신 세상적인 힘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칩니까? 왜 사회에서 직분을 얻고 영향력을 가지라고 권면합니까? 목표가 명백하지 않은 상태에서 올라간다면 올라갈수록 교만해지고 자기 자랑에 멈추게 됩니다.

소망교회가 47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육신의 신앙과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탄식하는 곳이 어디 있는지, 아파하고 소외된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 나서는 교회가 된다면 소망교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절하고 ‘우리끼리 있는 것이 좋으니 우리끼리 모이자. 우리끼리 모이니 신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에 교회는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성육신의 마음을 품는 것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여러분, 건강한 몸, 돈과 재물, 지식, 달란트, 사회적 직분과 능력을 갖고 계십니까? ‘이 땅을 어떻게 아름답게 만들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 줄까?’, ‘사랑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우리 가슴속에 있기를 원합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요?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남편들은 성육신의 사랑을 해야 합니다. 보이는 사랑, 들리는 사랑, 만지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내의 눈동자를 보면서 “당신이 나와 함께 있어 줘서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와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들리게 하세요. 투명 인간처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아내를 감싸안고 보여 줘야 합니다. 아내를 소중히 여기는 남편이 있는 가정은 복받은 가정입니다.

여러분, 여기 청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잘 기억이 안 나겠지만, 엄마 아빠는 어렸을 때 끊임없이 여러분을 안고 쓰다듬어 줬습니다. 볼에 수없이 뽀뽀하고 내 사랑하는 아들, 내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장성해서 다 잊었습니다. 청년들은 부모님을 향해 나아가세요. 보이는 사랑, 들리는 사랑을 해 주세요. 아버지가, 어머니가 있어서 정말 고맙다고, 내가 이만큼 자라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 주세요. 그리고 부모님을 안아 주세요.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넘쳐나게 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보여 주기 위해, 들리기 위해, 그리고 손으로 만지기 위해서 낮아지셨습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로서,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성도로서 성육신의 마음을 갖고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 속에 생명과 치유 및 회복의 사건이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그 속에 인간이 얼마나 귀한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사건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봐라. 자기의 것으로 스스로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저 복된 교회와 성도들을 봐라.”라고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교회, 주님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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