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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이후 –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 13 ~ 23

김경진 목사

2019.12.29

<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첫 성탄절은 고요하고 거룩했습니다.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누가복음 2:11~12 중)

2000여 년 전 첫 성탄절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선포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라고 전했습니다. 첫 성탄절, 이날은 이전의 날들과는 전혀 다른 날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나게 하신,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잉태하게 하신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육신을 입고 침투해 들어오신 기적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송을 불렀고, 별을 포함한 온 우주가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동방박사들은 귀한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들에 있던 목자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 마구간으로 달려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경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그 밤은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유만으로도 고귀하고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인간의 역사와 시간 가운데 ‘예수 탄생’의 거룩한 자취가 뚜렷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베들레헴은 당시 작은 고을이었으나, 미가의 예언대로 가장 축복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베들레헴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성지가 되어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복된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밤, 그러니까 첫 번째 성탄절은 비록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의 명으로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다니는, 그래서 여관방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밤이었지만, 성경은 그 밤을 ‘평화로운 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또 오고 오는 세대가 그 밤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밤은 인간의 어떤 소리조차, 어떤 소음조차 방해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마구간의 어떤 짐승 소리조차 아기 예수님을 깨울 수 없는 거룩하고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이 거룩한 밤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 밤을 기다리며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미가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미가 5:2 중)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이사야 25:9 중)

마침내 이 예언이 이루어지던 날, 바로 그날이 첫 번째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중)

성탄절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날입니다. 모든 인간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구원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이루어진 지극히 거룩하고 축복 된 날입니다.

< 성탄 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

첫 번째 성탄절, 그 밤의 베들레헴 마구간을 상상해 봅니다. 동방박사들이 왕으로 오신 주님을 경배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이어 목자들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며 경배합니다. 하늘에서는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말구유 앞에는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예물이 가지런히 놓입니다. 해산한 마리아는 지친 듯 몸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돌보느라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던 천군과 천사들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목자들 역시 양떼를 돌보는 일상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고향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납니다. 잠시 하늘의 나라가 침투해 들어와 고요했던 베들레헴 거리가 다시 세상의 것으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합니다. 세속적인 시간으로 포위되어 갑니다.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마구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구간의 짐승 냄새도 마리아와 요셉의 코를 찌릅니다.
그렇게 하루를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그날 이후, 사실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거룩한 날 이후, 특별히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신 사건으로 로마 황제가 내린 호적 등록 명령이 취소된 것도 아닙니다. 구레뇨는 여전히 수리아를 다스리는 총독이었고, 여관은 사람들로 붐벼났으며, 강대국 로마도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즉 세상은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천사들의 특이한 활동 소식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어떤 열심당원의 쿠데타나 전쟁 소식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어떤 세력이 로마 병정을 무찌르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습니다. 로마와 유대, 헤롯의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 힘을 더욱 강력하게 하려는 듯,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려는 듯, 인구 조사는 여전히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성탄절 이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아기 예수는 8일 동안 부모의 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8일 동안에도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애굽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특별한 천사의 계시를 받은 이들이 가는 길에 줄을 서 환송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저 피난민처럼 애굽으로 들어간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님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이 이 세상에 큰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리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은 베들레헴 지역에 재앙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 앞에서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고, 결국 당시 왕권을 지키고자 했던 헤롯이 유대 땅 베들레헴 인근의 두 살 아래 모든 사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사건이 그 땅에 비극이 되고 만 것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게 한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성탄 이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베들레헴에서 그 일은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들레헴은 어머니의 울음이 가득한 슬픈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일어난 일입니다. 아기 예수가 부모님과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도 어떤 징조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평화의 왕 예수님이 오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합니다. >

시간이 흘렀습니다.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이 작고 작은 동방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 땅에 주님을 믿는 많은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바로 우리처럼 주님께 예배드리는 많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축하하는 2019년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오심을 찬양했고,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나누며 감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탄절을 보낸 후에도 이 세상은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국회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북한의 정권이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이 바뀐 것도 아니고, 일본 수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일본이 성탄절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국회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고, 정치는 분열되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북한이 가진 핵무기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 이후, 북한을 향한 미국의 무력시위가 강해질 것이란 예고도 보고되는 형국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지는 것 같아 불안한 시기를 보내야 하는 한반도 정황입니다. 마치 성탄이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기업 간 경쟁과 견제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피 말리는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득을 취하기 위해 분투하며, 아직도 가난한 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고생하는 반면 부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 그 이후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얼마 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슬픈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대구의 한 주택가에서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40대의 부모와 14세 중학생 아들, 11세 초등학생 딸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업 실패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보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이 땅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또 어떤 이단들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예수께서 오신 일이 결국은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한 예언의 말씀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지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다급하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때 하나님의 정의의 나라, 약속하신 그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절규하듯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며 상처 주기 일쑤입니다. 서로 존중하지도 못합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원수가 되고, 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사이에 너그러움이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생각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며,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왕이시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는데, 그 흔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데, 그 평화의 왕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 성탄은 평화의 전주곡이요, 샬롬의 출발점입니다. >

오늘 우리는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나고, 1월 6일까지 성탄의 절기를 보내는 중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은 것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가? 예수님을 믿고 어떤 선물이 주어졌는가? 나는 어떤 복을 받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계산하면서 어떤 분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 고뇌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올 한 해를 지워 버리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에 의미를 두며, 우리가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즉각적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지만, 예수님으로 하여금 묵묵히 인간 삶의 모든 여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12세 즈음 성전에 올라가셨으며, 30세가 될 때까지 가족과 함께하시며,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왔습니다. 마치 이 땅에 태어나신 지 30여 년 동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면서 아직까지 그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탄절에 세상이 갖지 못한, 아니 소유할 수 없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부터 역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 생명은 한동안 숨겨져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귀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의 전주곡이요, 샬롬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 땅에 참 평화가 탄생했습니다. 이 땅이 갖지 못한 진정한 평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평화의 시작입니다.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비로소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죽어 있던 물구덩이에 새로운 물이 들어오듯이, 길이 열리고 신선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탄생의 의미입니다.
아직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 평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 평화는 강력하여 언젠가 온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평화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참 평화가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아기 예수가 긴 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태복음은 평화의 왕이 오시자마자 베들레헴 지경에 때아닌 살육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평화의 왕이 오셨다면 그 거점인 베들레헴만이라도 평화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은 얼마 되지 않아 수없이 많은 아이가 죄 없이 죽어간 절규와 탄식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주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보다 고통을 주는 것 같은 주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홉 달 동안 마리아의 몸에 계셨던 것처럼, 시간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성장의 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때가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드러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 마침내 주님의 평안이 우리의 삶에 도래할 것입니다. >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30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셔야 했을 뿐만 아니라, 공생애 3년을 보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말 없는 어린 양과 같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 부활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긴 시간, 깊은 과정, 또 그만한 어려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긴 시간, 고난의 시간을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와 함께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위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천지가 진동하는 그날, 정의가 살아서 숨 쉬고 공의의 심판이 칼날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양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을 마음껏 노래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이 땅에 온전한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날이 이루어지기까지 예수님의 평화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성장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날이 이루기까지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더러움과 추함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성탄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복음서에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큰 호수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심한 풍랑이 일자 제자들이 무서워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에서 평안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불안과 두려움, 절망을 표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다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9) 이 ‘잠잠하라’는 표현을 영어 성경은 ‘Peace’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납게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주님께서 “평안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풍랑은 여전히 일고 있습니다. 평안을 빌어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배 안에 계셨지만, 배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제자들을 두려움에 휘몰아 넣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이미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평안하라.”라고 말씀하시자 온 바다가 평안해지더니, 배도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바다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 도리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해 주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상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주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말입니다.
상황은 바뀐 것 같지 않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11:3)라고 묻던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After Christmas, Nothing Has Changed

Matthew 2:13-23

“Today in the town of David a Savior has been born to you; he is the Messiah, the Lord. This will be a sign to you: You will find a baby wrapped in cloths and lying in a manger.”(Luke 2:11-12)

Two thousand years ago on the very first Christmas, the angels declared these words to the shepherds. That first Christmas was an entirely different, special day. It was the very day “the Word became flesh.” On this amazing day, a great company of the heavenly host sang praises to God, the whole universe, including the stars, revolved around the small town of Bethlehem, and the Magi traveled all the way from the east to worship baby Jesus with precious gifts like gold, frankincense, and myrrh.

The night of Jesus’ birth became a holy, precious night for the sole reason that He was born. Since that night, the holy marks of our Savior were permanently imprinted on the history and time of mankind. Bethlehem, a small town, became the most blessed place on earth, as Micah prophesized.

The first Christmas was a bustling and busy night with no room for our Savior because Emperor Augustus had ordered everyone to be registered for a census. But the Bible describes that night as peaceful. Succeeding generations called it “silent night, holy night.” Nothing—not even man’s whisper or the silent mooing of cattle—could interfere with God’s holy night. No man could ever replicate this holiest of nights. This silent, holy, and blessed night was designed by God for man. Countless prophets prophesized about it and waited for this night:

“The virgin will conceive and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Isaiah 7:14)

“But you, Bethlehem Ephrathah,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out of you will come for me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whose origins are from of old,from ancient times.” (Micah 5: 2)

Finally, when the day arrived, the heavenly host sang, “Glory to God in the highest heaven,and on earth peace to those on whom his favor rests.” (Luke 2: 14) It was indeed the most blessed of days, the holiest of nights. It was the day when “the Word became flesh,” the day man had been waiting for throughout history, the day God sent His Son to save the world.

I try to imagine that very first Christmas in the stable. The Magi arrive joyfully to worship our Lord. Then the shepherd come and happily praise baby Jesus who is wrapped in a cloth. Beautiful, heavenly music fill the air with the angels praising Jesus. Precious gifts from the Magi are placed on the floor. Mary is lying on the hay, still recovering from childbirth, and Joseph is tired from taking care of baby Jesus all night.

Then morning comes. The angels and the great company of the heavenly host are now gone. The shepherds have also gone off to tend their sheep. The Magi are nowhere to be seen either since they have started their long journey back to where they came from. The streets of Bethlehem, which were silent and holy for a night, are now busy, bustling, and secular again. The sound of people talking, arguing, and fighting over at the inn make their way into the quiet stable. And the overpowering stench of cattle fill the air as Mary and Joseph care for baby Jesus.

After that holy night, nothing really had changed in the world. Nothing spectacular happened after Jesus was born. The census was not canceled. Quirinius was still the governor of the province of Roman Syria, the inn was still bustling with people, Rome was still a great power, and the world went on as it always did. There were no special movements of the angels. There was no news of anew war or a coup d’état in Israel. No news of a special group who resisted and defeated the Romans. King Herod was still strong and becoming stronger with plans to raise taxes.

Nothing changed after that day. Baby Jesus was circumcised in 8 days like all other Jewish boys, and during those 8 days no miracles took place. Joseph, Mary, and baby Jesus fled to Egypt, but, there,no Magi or angels greeted them this time. The birth of Jesus did not seem to have a seismic impact on the world. Instead, His birth only incited a tragic disaster in Bethlehem, an infanticide against all Jewish boys under the age of two.

Even after Jesus came, the world was still ruled by King Herod, and his soldiers ruled Bethlehem. Nothing really changed in Bethlehem. There was only disaster. Mothers wept as their babies were killed. This was what happened after Jesus was born. When Jesus’ family escaped to Egypt, there were no special signs or miracles, either.

Thousands of years have passed since then. The news of Jesus finally reached the“Land of the Morning Calm.” One hundred and forty years ago, the Korean Peninsula saw its first believer. People in this land came to believe in Him, the Christ.

A few days ago we celebrated the 2019th Christmas as we praised and remembered our Savior. Everyone, the young and old, came together to thank God for baby Jesus, our Savior.

But, even after this 2019th Christmas, nothing seems to have changed in this world.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 remains divided. The North Korean regime has not collapsed. The American President is still in power, and the Japanese Prime Minister is still in place. Japan did not change its stance toward Korea after Christmas. Korean politics is still a mess, and North Korea continues to threaten the world and Korea with its nuclear weapons. In fact, the United States is prepared to strengthen its military show-of-force against North Korea after Christmas.

On the economic front, competition has not disappeared after Christmas, either. Companies must continue to engage in cut-throat competition to make profit. The world still works for its own interest, the poor still suffer, and the rich continue to maximize their wealth. Nothing has changed after Christmas, the coming of Jesus.

On this year’s Christmas eve a few days ago, a family in Daegu was found dead in their own home. A father in his forties, his wife, their 14-year-old son, and their 11-year-old daughter died together. According to news reports, they seemed to have committed suicide after the father’s business failed. Thousands of years have passed sinceJesus came to earth. Yet, this world is still filled with grief.

Accordingly, some question the meaning of the coming of Jesus. Some heresies say that His coming has ended in failure. Others say that Jesus is no longer our hope. They voice these doubts:Did Jesus really give peace to the world? When will the prophecy “peace to those on whom his favor rests” come true?

There is no peace in the church, either. Christians fight and hurt each other. They don’t even respect each other. Our hearts are not kind or generous. We have no true, Godly peace. Secular values continue to overpower us, and we judge people with the world’s eyes. We cannot but cry out, “O, King of Peace, where are you?”

On this last Sunday of 2019, we ask ourselves, ‘What was the result of following Christ this year? What have I gained? What blessings?’Some may even feel wronged or depressed. Why did God allow these difficult, painful, and incomprehensible things in my life? Others may just want to erase the whole year.

Yet, why is Christmas of 2019 still meaningful? Why do we still put our hope in Jesus? To answer these questions, we need to meditate on how God carried out His work after the first Christmas.

As I mentioned, Jesus’s birth did not impact the world instantaneously. God sent His only Son, but He made Jesus quietly go through all the life journeys of man. Jesus was circumcised on the 8th day, went to the temple when he was 12, assisted His father as a carpenter, and lived with His family until the age of 30. Then He started His ministry.

This is how God works for us in this world. On that first Christmas, He gave us the everlasting life—the one true life, Jesus Christ, His Son. A groundbreaking event that gave hope to humanity. But that life was one that grew.

The reason why Christmas is so precious is this: The peace God gave us “started” on that very day Jesus was born. His nativity was the prelude for peace on earth, the beginning of Shalom. Because of Jesus, true peace on earth was “born.” It began. It did not become complete. Fresh water started to flow into a puddle of rotting water. This is the meaning of Jesus’ nativity.

God’s peace was weak, coming in the form of a human child. But, inside, His peace was surely there. And it would cover over the whole world. But not yet. His peace was not complete. Not even close. We must wait a long time for God’s kingdom, His true peace. Just as the world had to wait for the birth of Jesus.

When Jesus was born, peace did not come to Bethlehem, but disaster. Yet, the Lord did not do anything then. Because of this, some despise the Lord. They refuse to come to Him. They refuse to believe in Him. They despise God for giving pain instead of peace. But Jesus was in May’s womb for 9 months. Likewise, He is with us in our time. And after a long period of growth, He manifests Himself to us.

As Jesus started His ministry, He said that He came to give us“peace.” But to achieve this, our Lord had to bear the cross and was slain like a lamb. To give us peace He had to do His ministry, die on the cross, and be resurrected.

To give us true peace Jesus had to travel a long road of suffering. After being resurrected, He went up to heaven, saying He would come again. Finally, when He comes again, the prophecy of “glory in heaven and peace on earth” will be fulfilled.

When He comes again, the heaven and earth will be shaken. Justice will thrive and the sword of righteousness will be drawn. The heaven and angels will praise the Lord and His children clothed in white will joyfully praise Him. On that day, great things will happen. On the Second Coming of Jesus, perfect peace will come.

Until that day, Jesus’ kingdom of peace continues to grow in us. So, until that final day, we live with both Jesus’ peace in us and the ugliness and sins of this world.

So, what should we see in this reality which appears“unchanged” even after Christmas? As we hear the angels declare “peace on earth,” we expectantly wait for the kingdom of peace that will finally come, although it has not yet come. We must look to Jesus who is working right at our side to give us peace.

In the Gospel of Mark, Jesus calms the storm. When Jesus and His disciples were out on the lake, a fierce storm started to rock their boat, and the disciples weretrembling in fear. Yet Jesus was sound asleep. The disciples thought they would surely die, but Jesus only rebuked the wind and the waves with these words: “Peace, be still.” (Mark 4:39 KJV) Jesus ordered “peace” to the sea.

These words do not just apply to the Sea of Galilee. They are the will and purpose of Jesus, King of Peace, toward us as individuals, our homes, our society, and all of mankind.

On this first Sunday after Christmas, I hope we will all be able to see God who is startinganew in order to give us true peace through Jesus beingborn into this world. Today, the peace of heaven starts anew in us. It has not been fully attained yet, but we put our trust in the Lord who will fulfill it.

I hope we will remember Jesus’ words to John the Baptist who asked, “Are you the one who is to come?”

“Blessed is anyone who does not stumble on account of me.” (Matthew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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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 13 ~ 23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19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20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첫 성탄절은 고요하고 거룩했습니다.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누가복음 2:11~12 중)

2000여 년 전 첫 성탄절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선포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라고 전했습니다. 첫 성탄절, 이날은 이전의 날들과는 전혀 다른 날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육신으로 나게 하신,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잉태하게 하신 놀라운 날이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육신을 입고 침투해 들어오신 기적의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송을 불렀고, 별을 포함한 온 우주가 베들레헴을 중심으로 움직였으며, 동방박사들은 귀한 예물인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들에 있던 목자들은 천사들의 음성을 듣고 마구간으로 달려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경배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날 그 밤은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이유만으로도 고귀하고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인간의 역사와 시간 가운데 ‘예수 탄생’의 거룩한 자취가 뚜렷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오신 베들레헴은 당시 작은 고을이었으나, 미가의 예언대로 가장 축복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2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베들레헴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성지가 되어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복된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밤, 그러니까 첫 번째 성탄절은 비록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의 명으로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몰려다니는, 그래서 여관방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밤이었지만, 성경은 그 밤을 ‘평화로운 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또 오고 오는 세대가 그 밤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밤은 인간의 어떤 소리조차, 어떤 소음조차 방해하거나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거룩한 시간이었습니다. 마구간의 어떤 짐승 소리조차 아기 예수님을 깨울 수 없는 거룩하고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그 이후 인간은 이 거룩한 밤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 밤을 기다리며 예언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 7:14 중)

미가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미가 5:2 중)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이사야 25:9 중)

마침내 이 예언이 이루어지던 날, 바로 그날이 첫 번째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중)

성탄절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 날입니다. 모든 인간이 기다려 온 하나님의 구원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이루어진 지극히 거룩하고 축복 된 날입니다.

< 성탄 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

첫 번째 성탄절, 그 밤의 베들레헴 마구간을 상상해 봅니다. 동방박사들이 왕으로 오신 주님을 경배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이어 목자들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보며 경배합니다. 하늘에서는 천군과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우신 말구유 앞에는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예물이 가지런히 놓입니다. 해산한 마리아는 지친 듯 몸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돌보느라 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옵니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던 천군과 천사들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목자들 역시 양떼를 돌보는 일상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도 고향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납니다. 잠시 하늘의 나라가 침투해 들어와 고요했던 베들레헴 거리가 다시 세상의 것으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합니다. 세속적인 시간으로 포위되어 갑니다. 여관에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떠드는 소리, 싸우는 소리가 마구간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마구간의 짐승 냄새도 마리아와 요셉의 코를 찌릅니다.
그렇게 하루를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를 맞이합니다. 그날 이후, 사실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거룩한 날 이후, 특별히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신 사건으로 로마 황제가 내린 호적 등록 명령이 취소된 것도 아닙니다. 구레뇨는 여전히 수리아를 다스리는 총독이었고, 여관은 사람들로 붐벼났으며, 강대국 로마도 위세를 떨치고 있었습니다. 즉 세상은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천사들의 특이한 활동 소식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어떤 열심당원의 쿠데타나 전쟁 소식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어떤 세력이 로마 병정을 무찌르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소식도 들리지 않습니다. 로마와 유대, 헤롯의 힘은 여전히 강력합니다. 그 힘을 더욱 강력하게 하려는 듯, 세금을 더 거두어들이려는 듯, 인구 조사는 여전히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성탄절 이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아기 예수는 8일 동안 부모의 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대인 남자아이들과 똑같이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8일 동안에도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애굽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특별한 천사의 계시를 받은 이들이 가는 길에 줄을 서 환송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저 피난민처럼 애굽으로 들어간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님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오심이 이 세상에 큰 폭발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리어 아기 예수님의 오심은 베들레헴 지역에 재앙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 앞에서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었고, 결국 당시 왕권을 지키고자 했던 헤롯이 유대 땅 베들레헴 인근의 두 살 아래 모든 사내를 죽이라는 명을 내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신 사건이 그 땅에 비극이 되고 만 것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게 한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성탄 이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도리어 베들레헴에서 그 일은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들레헴은 어머니의 울음이 가득한 슬픈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후 일어난 일입니다. 아기 예수가 부모님과 애굽으로 피신했을 때도 어떤 징조나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평화의 왕 예수님이 오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합니다. >

시간이 흘렀습니다.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이 작고 작은 동방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에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의 일입니다. 이 땅에 주님을 믿는 많은 가정이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백성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바로 우리처럼 주님께 예배드리는 많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억하며 축하하는 2019년 성탄절을 보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오심을 찬양했고,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나누며 감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성탄절을 보낸 후에도 이 세상은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국회가 달라진 것도 아니고, 북한의 정권이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미국 대통령이 바뀐 것도 아니고, 일본 수상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일본이 성탄절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국회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고, 정치는 분열되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북한이 가진 핵무기가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번 성탄 이후, 북한을 향한 미국의 무력시위가 강해질 것이란 예고도 보고되는 형국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지는 것 같아 불안한 시기를 보내야 하는 한반도 정황입니다. 마치 성탄이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기업 간 경쟁과 견제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피 말리는 대결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이득을 취하기 위해 분투하며, 아직도 가난한 자들은 어려움 속에서 고생하는 반면 부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 그 이후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
얼마 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 슬픈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대구의 한 주택가에서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40대의 부모와 14세 중학생 아들, 11세 초등학생 딸이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업 실패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는 보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지 수천 년이 지났지만, 이 땅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또 어떤 이단들은 이 땅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예수께서 오신 일이 결국은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한 예언의 말씀은 도대체 언제 이루어지는가?”라며 많은 이들이 다급하게 묻고 있습니다. 과연 어느 때 하나님의 정의의 나라, 약속하신 그 평화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절규하듯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 싸우며 상처 주기 일쑤입니다. 서로 존중하지도 못합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원수가 되고, 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사이에 너그러움이 없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생각이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며,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평가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화의 왕이시여,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셨는데, 그 흔적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데, 그 평화의 왕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 성탄은 평화의 전주곡이요, 샬롬의 출발점입니다. >

오늘 우리는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나고, 1월 6일까지 성탄의 절기를 보내는 중입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며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은 것이 내게 무엇을 주었는가? 예수님을 믿고 어떤 선물이 주어졌는가? 나는 어떤 복을 받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계산하면서 어떤 분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 고뇌하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해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올 한 해를 지워 버리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절에 의미를 두며, 우리가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즉각적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지만, 예수님으로 하여금 묵묵히 인간 삶의 모든 여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12세 즈음 성전에 올라가셨으며, 30세가 될 때까지 가족과 함께하시며, 아버지 요셉의 목수 일을 도왔습니다. 마치 이 땅에 태어나신 지 30여 년 동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두면서 아직까지 그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탄절에 세상이 갖지 못한, 아니 소유할 수 없는 참 생명,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인류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부터 역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 생명은 한동안 숨겨져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귀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날,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의 전주곡이요, 샬롬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 땅에 참 평화가 탄생했습니다. 이 땅이 갖지 못한 진정한 평화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 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평화의 시작입니다.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비로소 평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죽어 있던 물구덩이에 새로운 물이 들어오듯이, 길이 열리고 신선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탄생의 의미입니다.
아직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이지만, 그 속에 평화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 평화는 강력하여 언젠가 온 세상을 덮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평화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참 평화가 완성되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치 아기 예수가 긴 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태복음은 평화의 왕이 오시자마자 베들레헴 지경에 때아닌 살육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평화의 왕이 오셨다면 그 거점인 베들레헴만이라도 평화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곳은 얼마 되지 않아 수없이 많은 아이가 죄 없이 죽어간 절규와 탄식의 현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주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보다 고통을 주는 것 같은 주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아홉 달 동안 마리아의 몸에 계셨던 것처럼, 시간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성장의 긴 시간을 보낸 후에야, 때가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드러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 마침내 주님의 평안이 우리의 삶에 도래할 것입니다. >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30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셔야 했을 뿐만 아니라, 공생애 3년을 보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말 없는 어린 양과 같이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공생애와 십자가 죽음, 부활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긴 시간, 깊은 과정, 또 그만한 어려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긴 시간, 고난의 시간을 견디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나라와 함께 이 땅에 오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위대한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천지가 진동하는 그날, 정의가 살아서 숨 쉬고 공의의 심판이 칼날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군과 천사들이 찬양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을 마음껏 노래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이 땅에 온전한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날이 이루어지기까지 예수님의 평화의 나라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성장하며 자라나고 있습니다. 성탄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날이 이루기까지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의 더러움과 추함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성탄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복음서에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큰 호수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심한 풍랑이 일자 제자들이 무서워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에서 평안히 잠들어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불안과 두려움, 절망을 표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바다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막4:39) 이 ‘잠잠하라’는 표현을 영어 성경은 ‘Peace’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납게 파도치는 바다를 향해 주님께서 “평안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풍랑은 여전히 일고 있습니다. 평안을 빌어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배 안에 계셨지만, 배는 여전히 흔들립니다. 풍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제자들을 두려움에 휘몰아 넣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이미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평안하라.”라고 말씀하시자 온 바다가 평안해지더니, 배도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 말씀은 갈릴리바다에만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온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의 방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해 주셨는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지, 도리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무것도 안 해 주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상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면, 주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평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말입니다.
상황은 바뀐 것 같지 않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희망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마11:3)라고 묻던 세례 요한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

2019년 12월 2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성탄 이후 ?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04장, 114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2:13-23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2월 2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2000여 년 전 처음 시작된 성탄절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며 모든 인간들이 기다려온 하나님의 구원이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지극히 거룩하고 축복받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정말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셨는가?

설교의 요약

우리는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예수 믿고 어떤 선물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어떤 복을 받았는가? 질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계산하면서 도리어 억울한 생각이 드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행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년 성탄절이 의미가 있고, 또 주님께 우리가 희망을 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이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는 성탄 이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방식을 깊이 묵상함으로 그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즉각적으로 세상에 충격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첫 성탄절 날에 이 땅에 이 세상이 갖지 못한, 아니 소유할 수 없었던 참 생명,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성탄절이 귀중한 이유는 바로 예수께서 탄생하신 이날 이 땅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의 전주곡이요, 샬롬의 출발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 땅에 참 평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죽어 있던 물구덩이에 새로운 물이 들어오듯이 길이 열리고 신선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오심의 의미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류를 “너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탄 이후 ?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탄절을 보낸 첫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참 평안을 위해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 가운데 감사할 제목들이 있다면,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나의 삶의 참된 평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일 년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며, 아기 예수로 이 당에 오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과 함께 성장하며 나아가는 복된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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