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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베드로전서 2: 9 ~ 12

김경진 목사

2022.01.09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22년 1월 두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소망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오늘 나눌 말씀은 우리 소망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주일 저는 한 단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였죠. 생명이 죽어 가고 약해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살려야 하겠다는 설교였습니다.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고, 또 생명이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 모두가 생명 사역에 동참해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은 3년 전부터 여러 번 말씀드린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여서 세상에 전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또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제가 부임했던 초기에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전해 드렸죠. 그 말씀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예술가이시며, 그분의 창조 활동 안에는 예술성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해서 온 세상이 탄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예술성을 가지고 있고, 이 예술가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예술성이 드러나는 신앙을 살기 위한 세 가지 실천 방안도 논하였습니다. 먼저는 예술의 원동력인 사랑을 언급하며 사랑이 없이는 예술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부터 기술과 예술은 구분됩니다. 두 번째로 예술은 보잘것없는 재료를 가지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행위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예술적 삶을 산다고 할 때는 주위에 가치 없는 것들을 통하여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저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시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예술 법칙을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예술에는 조화와 예술이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술적인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 삶 안에도 조화가 있어야 하고 균형이 잡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3년 전 드렸던 말씀에 이어 오늘의 설교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흐름상으로는 지난 설교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항상 회자되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움의 회복’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주제는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의 방향성을 두고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해 온 주제입니다. 리처드 해리슨(Richard Heries)은 책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예술』에서 한탄하듯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도 교회가 이것을 숨겨 왔다.” 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숨긴 채 선교와 봉사 위주의 신앙만 강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은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이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특별히 개신교회가 예배, 예전 형식이 가지는 아름다움마저 제거함으로써 예배 안에서조차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결과 신자들이 경건하고 신앙적인 자리에 이르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진단은 사실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개신교회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당시 이 개혁은 무엇이 옳고 바른 신앙인지를 고민하면서 거행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며 바른 신앙을 세워 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개신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건 사실입니다.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바른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옳고 그름을 판별해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이 다를 때마다 계속되는 분열 속에 여러 교파가 생겨나기도 했죠. 결국 루터 파, 영국의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와 같은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만 해도 장로교회라는 교단 명을 가진 교단이 무려 150여 개 이상 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성주의 사회, 모더니티 사회가 개신교회를 성장시킨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류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과학적인 사고보다 개인의 느낌과 감정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죠. 따라서 이제는 “맞고 틀리다”로 구분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맞고 틀리는지를 가늠하고 구별하는 데 익숙했던 개신교회의 정신은 포스트모던 시대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맞다, 틀리다만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정신은 자신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로 세계적인 위기가 도래한 가운데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고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맞다, 틀리다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맞고 틀리고만 말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틀린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며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 희생을 통하여 온전한 공의를 이루시며 선을 이루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는 잘못을 덮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틀린 것을 그대로 두시며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틀린 것, 잘못된 것, 추한 것을 숨기거나 그 위에 아무리 아름답게 덧칠을 하더라도 속은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회칠한 무덤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보셨다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공의로운 심판 없이 그저 인간들을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회칠한 무덤을 아름답게 보지 않으시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을 희생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죄로 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예술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죄는 죄로 판별하되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전하여 주시는 모습, 이것이 하나님의 예술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즐거움이 따르며, 그분의 장엄하심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 갑니다.>

자, 이러한 전제를 놓고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까요? 시편 27편 4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다윗의 시 중 일부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을 경험했던 다윗이 인생의 마지막에 요구했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며 안식하길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용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노암’(נֹעַם, noam)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동시에 ‘유쾌하다’, ‘즐겁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후자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단어를 ‘즐겁다’로 번역한 구절들이 꽤 있습니다. 잠언 3장의 말씀이 한 예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잠 3:13~17)

말씀 속에 등장하는 ‘즐거운’이라는 표현이 히브리어로 노암입니다. 즉 아름답다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즐겁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27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호와의 유쾌하심을 내가 보고 싶다, 유쾌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기분 좋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내가 주의 성전에서 보고 싶다.” 다윗에게는 즐거워하고 기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노암이라는 단어의 숨은 뜻을 찾아가다 보면 시편 90편의 말씀도 조금 달리 보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여러분, 이 말씀 속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숨겨 있습니다. 바로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은총’이라는 단어 앞에 각주를 달고서 뜻이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주 우리 하나님의 즐거움, 유쾌함, 아름다움을 내게 내려주시어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일이 견고해지도록 요청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와 맞닿아지길 원한다는 고백이죠.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고 유쾌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술적 활동을 즐겁게 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정수시요, 태고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두루 입고 계시며 아름다움의 본체이십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주님을 늦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자비하심도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야 진정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하나님, 유쾌해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에는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이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짊어지듯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듯이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즐거운 일이 될 때에 신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회복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살펴볼 말씀은 시편 8편 1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여기에서 사용된 ‘아름답다’는 אַדִּיר(addir)입니다. ‘장엄하다’, ‘웅장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웅장한지, 장대한지, 위대한지요!”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도 움직이시고 바다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 길을 내심으로 멋진 예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술성을 말할 때 불가능은 없다는 말과 함께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시며 장엄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다움은 단지 작은 것을 만지고 다듬는 것을 뛰어넘어 웅대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아름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 내시며 그분의 덕을 널리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말씀은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택함받은 족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으시다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우리로 제사장,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아테레’(ἀρετή, areté)라는 단어는 ‘덕’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탁월함으로도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탁월함으로 번역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성,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섬세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덕을 널리 알리도록 부름받은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가 아테레라는 단어를 덕으로 번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장엄하심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덕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썩어 가며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덧칠을 하여서 잠시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지만 속은 썩어 가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세상은 썩어갈 수밖에 없고, 생명이 없으면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이고 아름답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 갈 때에 비로소 세상에 아름다움이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생명에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생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씀은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며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질 때에 세상은 진정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아름다운 성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길 원합니다. 즐거움과 유쾌함, 긍정의 마인드, 따뜻한 말, 절제된 입술, 덕을 세우는 손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함께하십시다.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Making the World Beautiful

1 Peter 2:9-12

Today is the second Sunday of 2022. Last week, I preached an important word that I hope will lead our church going forward: “life.” I talked about a vision to build a church that does His will on earth by begetting life, nurturing life, and making life prosper in this world that is losing and killing it.

Today, I want to share my second vision for our church—by talking about another important wordconnected to life: “beauty.” The crux of my message today is this: I hope that our church will restore the beauty of God, share it with the world, and care for the world with it.

Italked about this theme when I first came to Somang Church. In a message titled, “God Is An Artist” I preached that God is the Creator of the whole world and all His acts of creation were artistic. In short, I talked about “God the Artist.” I also stressed that we, too, must become artists like God, for we were created in His image. We must contribute to this world, displaying His creative and artistic spirit.

I suggested three ways to live out this“artistic faith.” First, an artistic faith must start with love and sacrifice. Second, we must make the best out of worthless ingredients. Third, true art is balanced and harmonious—just as God created the world in harmony. I encouraged you to live as Christians who possess the artistry of God, to be artists of the Christian faith.

I will preach today’s message in a similar vein.

In diagnosing the current status of the Korean Church and prescribing a solution, we must consider problem of “restoring beauty.” I believe the restoration of beauty is a critical virtue that must be restored particularly inProtestant churches, including Reformed churches and Presbyterian churches, born after the Reformation.

Richard Harries wrote in Art and the Beauty of Godthat churches concealed God’s beauty even when it was clear that God is beautiful. He pointed out that churches became dry and lifeless, devoid of life’s beauty and happiness, as theyplaced sole emphasis on missions and service. Reformed churcheseven lost the beauty in their services as they eliminated all beautiful elements in their worship form since the Reformation. The result was not a holier and faithful Christian life, but an estrangementfrom God.

Brothers and sisters, what is your view?

Such a diagnosis of Protestant churches is connected to the Reformation, a unique historical event. Protestantism thought deeply about what is right and wrong during this special historical period. Judging right from wrong was considered critical in rebuilding the right faith. Indeed, such efforts contributed greatly to building the Protestant Church. This discerning attitude is also a core identity of Protestantism.

But in our search for the right faith, we became accustomed to perpetually judging right from wrong. This led to constant conflicts wheneverdifferent opinions came up.This discernment and the division that followedstarted from the Reformers, and this is why we have diverse denominations today—such as Lutherans, Anglicans, Presbyterians, Methodists, and Baptists.

Such division, however, also served as a momentum for growth of Protestantism, especially in the modern era characterized by reason and science. But in the “postmodern” age, people’s way of thinking changed completely—moving away from reason.Sensibility became more important than reason, and what the individual felt became cardinal. As we entered a society that no longer judged right from wrong but acceptedindividual tastes and thoughts, Protestantismlost touch with the world and the spirit of the time.

As a result, in this modern world—particularly, in this post-modern society—people came to feel that theProtestant church was something distant. They feel discomfort rather than attraction toward Protestantism. The reason why Korean churches are being scorned by Koreans in the current global crisis started by the pandemic is connected to these characteristics of the Protestantism.

As I preached to you repeatedly, we must go beyond “right/wrong” and move toward God’s beauty. If we talk about what is “right,” then there is no “right” person for we are all sinners before God. But God sent Jesus Christ to this world to bear the sins of mankind on the cross. God achieved good and justice through sacrifice, which shows His artistry. I hope that we, too, may have this artistry of God in our faith lives.

But one thing must be made clear. God’s beauty is not about compromising the truth or ignoring wrongs. Jesus called people who did this “whitewashed tombs.” Hiding, covering over, or beautifying what is wrong, untrue, and ugly is not beautiful. Nor does it look good in God’s eyes. If God thought that whitewashed tombs were beautiful, He would not have sent His Son to bear the sins of the world. He would have simply accepted all sinners, without giving a just judgement.

But God paid the price forsin by dying on the cross. Hesacrificed Himself and saved mankind because He is a just God. Failing to see sin for what it is is not God’s beauty. God judged sin as sin—yet went beyond this by sacrificing Himself on the cross so that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would come to all who believed. This the beauty of God.

Now based on such premises, let’s delve deeper. How can we describe and define God’s beauty? In order to make this world beautiful, which attributes of God must we follow? What must the Church restore?

First, let’s look at Psalm 27:4:

“One thing I ask from the Lord, this only do I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Psalm 27:4)

In his last wish, David asked that he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forever and gaze on the beauty of the Lord. David did not say he wished to see God’s justice all the days of his life. Nor did he say he wished to see God’s justice on earth. His earnest desire was to see His beauty.

What does this beauty mean then? The Hebrew word used for beauty is “נֹעַם (noam).” But this word also means “happy” and “pleasant”, which is why“noam” is translated “pleasant” in many places in the Bible.

For example, let’s look at Proverbs 3.

“Her ways are pleasant ways, and all her paths are peace.” (Proverbs 3: 17)

The original word for “pleasant” in the above verse is “noam,” the Hebrew word that means “beautiful.”

So when David sang that he wanted to see the beauty of God in Psalm 27, we may say that he wanted to see God happy and pleased. Can you imagine God in a pleasant, happy, and joyous state? Well, this was what David wanted to see as he walked closely with Him.

When we uncover the deeper, hidden meanings of “noam,” we come to see Psalm 90 in a different light.

“May the favor of the Lord our God rest on us; establish the work of our hands for us—yes, establish the work of our hands.” (Psalm 90:17)

In the New Korean Revised Version, there is a footnote to “favor” which explains that the original word used for favor is “noam”, the Hebrew word for “beauty.” If we apply the meaning of beautyto this verse, it may read as such: “May the ‘beauty’ of the Lord our God rest on us so that the work of our hands will be established.” The psalmist is asking God to establish the work of his hands through His pleasant and beautiful work of art.

Based on such verses, God can be defined as a beautiful God who does artistic activities for us in a happy and pleasant way.

Augustine writes in Confessions that God is the essence of beauty in his famous line “Beauty, ever ancient, ever new.” He also laments that he loved this Beauty only late life.

As an Artist, God paints, creates, and sings of beauty happily. A happy and pleasant feeling is found in God’s beauty.

When I say our faith must become beautiful, it also means that our faith must not become a heavy burden or an arduous duty.If we want God’s beauty to be realized in our own faith, our faith must be full of happiness and joy.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God’s people live together in unity!” (Psalm 133:1) The Hebrew used for pleasant in this verse is “ נָעִים(na’iym)”. Na’iym means joyful and pleasant.

Second, I want to look at Psalm 8:1, another verse that sheds light on the beauty of God.

“Lord, our Lord, how majestic is your name in all the earth! You have set your glory in the heavens.” (Psalm 8:1 NIV)

The Hebrew word for “majestic” is “ אַדִּיר (addir).” But the New Korean Revised Version translates this as “beautiful.” So, in Korean, this psalm reads, “How beautiful is your name on all the earth!”

When we speak of His beauty, we must always think of His greatness and majesty. His beauty reveals His magnificence and grandness. His beauty is not small. We must not be sad, always looking down at the ground. God moves the heavens and the seas. He displayed His magnificent artistry by parting the Red Sea.

God’s artistry includes His almightiness. Nothing is impossible for our Great God. So when we speak of His beauty, we must always remember His greatness and omnipotence.

Therefore, when we say Christians make this world beautiful, it means that they achieve impossible things with the Almighty God. Beauty goes beyond caring for little things and achieves great and magnificent things. The beautiful ministry of Christians is about achievingamazing things with our amazing, great God.

Third, let’s look at Genesis 1:

“Then God looked over all he had made, and he saw that it was very good!” (Genesis 1:31)

The Hebrew word for “good” is “טוֹב (tobe),” which isused widely in the Bible. Tobe has many usages—including “to taste good,” “to look good,” “a good place,” etc. It is also used to express God’s wholeness. It is also considered the word that best expresses beauty in the Old Testament.

Therefore, God’s creativity is bound to be displayed. It is revealed to our eyes. It is true that Christianity has alwaysbeen afraid to make visible things ever since God warned the Israelites not to make images in the Old Testament. We have always been cautious about creating visual images in accordance withGod’s command not to make any graven image.

Yet God has always been a God who reveals, a God who speaks to His people by letting them see with their eyes.

The Old Testament prophets saw before they spoke. God asked Jeremiah and Amos, “What do you see?” before He made them speak about what they saw.

Job also expressed his realization with these words:

“I had only heard about you before, but now I have seen you with my own eyes. I take back everything I said, and sit in dust and ashes to show my repentance.” (Job 42:5-6)

Jesus also told the crowds to look at the birds in the sky, to look at the seeds sown in the fields, to look at the fields full of harvest. Our Lord also said that those whose hearts are pure will see God and explained the kingdom of God as if drawing a picture.

The incarnation is also the same. The words in John, which says that the Word became flesh among us, clearly describes Jesus as the One who came to us visibly. As such, God comes to us visibly by stimulating our eyesight. He reveals His presence to us by letting us see with our eyes.

A faith that restores beauty is to restore such visible things. Such a faith displays God through visible things. As we already see all around us, the whole earth testifies to His existence.

Let’s study today’s passage in connection to this. Today’s text is important to the Protestant Church because it is served as a critical verse in the Reformers’ assertion that all believers are priests.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God’s special possession,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Peter 2:9)

This is what the Lord is saying to us through Peter: ‘You are all a chosen people. It doesn’t matter if you are a Jew or a gentile. You are all a royal priesthood.’ The Reformers asserted that the above verse meant that each Christian is a royal priest before God.

What does God want to achieve by appointing each of us royal priests? He wants each of us to declare the praises of Him, that is, His goodness and beauty. The purpose of our being, the very thing that God wants from us, is to declare His beauty and goodness.

The Hebrew word used in this verse is “ἀρετή (areté),” which means goodness and virtue. In many places in the Bible it is translated “excellence.”

This is how I read this verse: “We are God’s chosen people, God’s kingly priests. We are His holy nation, and His special possession. God has done this to call us out of the darkness and to make usstep into the light. He has done this so we may declare His excellence and beauty.”

In short, God wants us toshow His beauty and excellence and declare His exquisite saving virtue. This is His will for us.

In order to declare His excellence and beauty, we must first possess a beautiful character. In this sense, the Korean translation “beautiful virtue” strikes a chord. It is our beautiful virtue that reveals His excellence and majesty.

Pastor Kim Jie-Chul, Somang’s second senior pastor, included “character-building” in his vision for the church. I believe this is essential to Christiansif we want to make this world beautiful.

Pastor Kwak Sun-hee, our founding pastor, stressed anonymous giving. Our church has always prided itself on this. I think anonymous giving is a magnificent artistry, a beautiful act that displays God’s excellence and majesty.

From now on, our path must be one that displays God’s magnificence. We must display the beauty of God and Christians. By doing so, Somang Church will be seen as a beautiful church full of beautiful people.

The world is still in decay, devoid of all beauty. Making the world beautiful is to make it into the kingdom of God. A man who possesses life is beautiful. When we create life with life, the world will be full of wholesome beauty.

To make the world beautiful with the life of the gospel means to transform the world into a better place with the life of people who have been born gain through the gospel. When the world is transformed into a better, livable place through such people, true beauty will be restored in this world.

I hope that we will try harder to build a beautiful character. Let’s make the world a more beautiful and warmer place by being pleasant and positive,saying kind words, controlling our speech, and doing virtuous acts. God, the Artist, will also be ple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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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 9 ~ 12

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2022년 1월 두 번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소망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어쩌면 오늘 나눌 말씀은 우리 소망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주일 저는 한 단어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였죠. 생명이 죽어 가고 약해지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참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살려야 하겠다는 설교였습니다. 생명을 낳고 생명을 키우고, 또 생명이 번성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 모두가 생명 사역에 동참해야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단어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실은 3년 전부터 여러 번 말씀드린 단어이기도 합니다.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소망교회와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여서 세상에 전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또한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는 제가 부임했던 초기에 드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술가이시다’라는 제목의 말씀으로 전해 드렸죠. 그 말씀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예술가이시며, 그분의 창조 활동 안에는 예술성이 가득하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해서 온 세상이 탄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예술성을 가지고 있고, 이 예술가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저는 예술성이 드러나는 신앙을 살기 위한 세 가지 실천 방안도 논하였습니다. 먼저는 예술의 원동력인 사랑을 언급하며 사랑이 없이는 예술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부터 기술과 예술은 구분됩니다. 두 번째로 예술은 보잘것없는 재료를 가지고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행위라고 전해 드렸습니다.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게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으로서 예술적 삶을 산다고 할 때는 주위에 가치 없는 것들을 통하여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세 번째로 저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시며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예술 법칙을 말씀드렸습니다. 진정한 예술에는 조화와 예술이 반드시 공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술적인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에는 우리 삶 안에도 조화가 있어야 하고 균형이 잡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3년 전 드렸던 말씀에 이어 오늘의 설교를 이어 가고자 합니다. 흐름상으로는 지난 설교와 연결되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교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향한 방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항상 회자되는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아름다움의 회복’이라는 표현입니다. 이 주제는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의 방향성을 두고 이야기할 때마다 등장해 온 주제입니다. 리처드 해리슨(Richard Heries)은 책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예술』에서 한탄하듯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답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인데도 교회가 이것을 숨겨 왔다.” 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숨긴 채 선교와 봉사 위주의 신앙만 강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은 삶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이어 왔다고 지적합니다. 특별히 개신교회가 예배, 예전 형식이 가지는 아름다움마저 제거함으로써 예배 안에서조차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 결과 신자들이 경건하고 신앙적인 자리에 이르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비판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한 진단은 사실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특수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개신교회가 태동하는 과정에서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당시 이 개혁은 무엇이 옳고 바른 신앙인지를 고민하면서 거행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내세우며 바른 신앙을 세워 가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이 개신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한 건 사실입니다. 개신교회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바른 신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옳고 그름을 판별해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옳고 그름에 관한 생각이 다를 때마다 계속되는 분열 속에 여러 교파가 생겨나기도 했죠. 결국 루터 파, 영국의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순복음교회와 같은 다양한 교파들이 생겨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만 해도 장로교회라는 교단 명을 가진 교단이 무려 150여 개 이상 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이성주의 사회, 모더니티 사회가 개신교회를 성장시킨 배경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류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에게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이성과 과학적인 사고보다 개인의 느낌과 감정이 중요시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죠. 따라서 이제는 “맞고 틀리다”로 구분되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맞고 틀리는지를 가늠하고 구별하는 데 익숙했던 개신교회의 정신은 포스트모던 시대와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맞다, 틀리다만을 강조하는 개신교회의 정신은 자신만을 고집하는 사람들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코로나로 세계적인 위기가 도래한 가운데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분노와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도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고 보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맞다, 틀리다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맞고 틀리고만 말한다면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틀린 사람이고,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버려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며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그 희생을 통하여 온전한 공의를 이루시며 선을 이루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하게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는 잘못을 덮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틀린 것을 그대로 두시며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틀린 것, 잘못된 것, 추한 것을 숨기거나 그 위에 아무리 아름답게 덧칠을 하더라도 속은 썩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회칠한 무덤마저도 아름다움으로 보셨다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으셨을 겁니다. 공의로운 심판 없이 그저 인간들을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회칠한 무덤을 아름답게 보지 않으시며 죄에 대한 형벌을 반드시 이루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을 희생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죄로 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예술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죄는 죄로 판별하되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용서와 화해를 전하여 주시는 모습, 이것이 하나님의 예술성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즐거움이 따르며, 그분의 장엄하심을 따라 세상을 변화시켜 갑니다.>

자, 이러한 전제를 놓고 조금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까?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할까요? 시편 27편 4절 말씀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27:4)

다윗의 시 중 일부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모든 일을 경험했던 다윗이 인생의 마지막에 요구했던 소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며 안식하길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곳에서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평생에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여기서 사용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노암’(נֹעַם, noam)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도 가지지만 동시에 ‘유쾌하다’, ‘즐겁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후자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단어를 ‘즐겁다’로 번역한 구절들이 꽤 있습니다. 잠언 3장의 말씀이 한 예입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잠 3:13~17)

말씀 속에 등장하는 ‘즐거운’이라는 표현이 히브리어로 노암입니다. 즉 아름답다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즐겁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27편에 기록된 다윗의 시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여호와의 유쾌하심을 내가 보고 싶다, 유쾌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기분 좋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내가 주의 성전에서 보고 싶다.” 다윗에게는 즐거워하고 기분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어 노암이라는 단어의 숨은 뜻을 찾아가다 보면 시편 90편의 말씀도 조금 달리 보입니다.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시 90:17)

여러분, 이 말씀 속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숨겨 있습니다. 바로 ‘은총’이라는 단어입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은총’이라는 단어 앞에 각주를 달고서 뜻이 ‘아름다움’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주 우리 하나님의 즐거움, 유쾌함, 아름다움을 내게 내려주시어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예술적 활동을 통하여 우리의 일이 견고해지도록 요청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 손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술적 경지와 맞닿아지길 원한다는 고백이죠.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고 유쾌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예술적 활동을 즐겁게 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정수시요, 태고의 아름다움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두루 입고 계시며 아름다움의 본체이십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내가 이 아름다운 주님을 늦게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자비하심도 아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마음을 흔든 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에야 진정 그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하나님, 유쾌해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모습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신 모습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름다움에는 즐거움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 아름답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이 해야만 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짊어지듯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듯이 살아가는 것은 신앙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즐거운 일이 될 때에 신앙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회복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관련해서 살펴볼 말씀은 시편 8편 1절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1)

여기에서 사용된 ‘아름답다’는 אַדִּיר(addir)입니다. ‘장엄하다’, ‘웅장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웅장한지, 장대한지, 위대한지요!”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 생각해야 할 것은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작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도 움직이시고 바다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홍해 바다에 길을 내심으로 멋진 예술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술성을 말할 때 불가능은 없다는 말과 함께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해도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이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시며 장엄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말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다움은 단지 작은 것을 만지고 다듬는 것을 뛰어넘어 웅대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과 함께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는 일이 우리 신앙인들이 해야 할 아름다운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오늘도 우리를 구원해 내시며 그분의 덕을 널리 선포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로 살펴볼 말씀은 오늘 본문인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주님은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택함받은 족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으시다는 것이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선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우리로 제사장, 자녀로 삼아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아테레’(ἀρετή, areté)라는 단어는 ‘덕’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되고, 탁월함으로도 번역됩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탁월함으로 번역되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덕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도 해석해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움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성,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섬세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덕을 널리 알리도록 부름받은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을 알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인격 또한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가 아테레라는 단어를 덕으로 번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장엄하심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덕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지금도 썩어 가며 아름다움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덧칠을 하여서 잠시 아름다워 보일 수는 있지만 속은 썩어 가고 부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생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세상은 썩어갈 수밖에 없고, 생명이 없으면 죽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건강한 사람이고 아름답습니다.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만들어 갈 때에 비로소 세상에 아름다움이 가득해집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생명에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생명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는 말씀은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세상을 변혁시키며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 만한 곳으로 만들어질 때에 세상은 진정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 소망교회가 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또 아름다운 성품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길 원합니다. 즐거움과 유쾌함, 긍정의 마인드, 따뜻한 말, 절제된 입술, 덕을 세우는 손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더 따뜻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이 일에 우리 함께하십시다.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도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19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세상을 아름답게” (벧전 2:9-1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8, 47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벧전 2:9-1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9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소망교회는 앞으로 두 가지 중요한 키워드를 붙들고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서고자 합니다. 그 하나는 지난주 말씀드린 생명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드릴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 가운데,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직접 희생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 속에서 보여 지기도 합니다. 앞으로 소망교회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하나님의 아름다움 속 어떤 모습들을 배워가야 할까요?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겠습니까?

  

설교의 요약

    종교개혁과 맞물린 개신교회의 정체성에는 바른 신앙을 고수하고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중요한 기치로 여겼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의 분열이 초래되기도 했고, 교회의 성장을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 속 이런 개신교회의 특성은 이기적 집단으로 비춰져서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넘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무조건 죄를 덮고 가거나 타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죄로 판단하되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희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가 일어나도록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시 27:4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머물며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좋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아름다움은 히브리어 노암입니다. 유쾌하고 즐겁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편 90편의 말씀엔 이 노암이 은총의 단어와 맞물려 사용됩니다. 즉 하나님의 즐거움, 유쾌함, 아름다움을 내려 주셔서 우리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해 달라(90:17)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이루어감에는 신앙생활이 힘들고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것으로 채워져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될 때 신앙의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또한 시편 8:1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 아디르는 장엄함과 웅장함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위대하시고 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작은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함이 없다는 그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것, 하나님과 함께 웅대하고 위대한 놀라운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 택하시고 불러 내셔서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아레테)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벧전 2:9)의 그 아름다움입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시고 원하시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신앙의 아름다움을 세우는 덕으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복음을 통해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때 진정한 아름다움의 회복은 일어날 것입니다. 앞으로 소망교회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잘 회복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움과 유쾌함의 긍정적 태도, 따뜻한 말과 절제 된 입술, 덕을 세우는 손, 이를 통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주님 손 붙들고 함께 나아가십니다. 이는 아름다운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나누기

1. 머릿속에 그려지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이 있다면 이를 말로 표현해보세요.

2. 내 안에 회복되어야 할, 소망교회가 세상에 비춰야 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마무리기도

    아름다우신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그 속에 함께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빛과 소금으로 나와 소망교회가 잘 사용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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