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소통과 이해를 위한 신앙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다양한 예배 형식 중에서 우리가 이어오고 있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살펴봅니다.>
지난 2주에 걸쳐서 세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물세례는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인지, 또 성령 세례는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떤 의미인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일생일벗을 통해서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도 꽤 계실 텐데요. 그분들에게 우리 소망교회 예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구별해서 알려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혁이 이루어진 지 507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어떻게 개혁교회가 과거 중세 교회와 달라지게 됐는지, 왜 우리는 가톨릭교회와 다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드리는 것이 잘 드린 예배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름대로 기준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기준 중에 특별히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 기준을 저는 ‘극화의 관점’ 혹은 ‘재연의 관점’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편하게 말씀드리면 ‘재연으로서의 예배’라는 표현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예배의 관점은 마치 연극을 하듯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연극에는 대본과 무대, 배우가 있습니다. 연극은 배우가 그 대본을 따라서 그대로 연기를 해 냅니다. 그러면 연극이 이루어지죠. 마치 예배에서도 마치 연극을 하듯이 무대는 예배당이 되고 예배당 안에서 맡은 사람들이 극화된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을 ‘재연으로서의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들리실 수도 있고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조금 쉽게 이해되실 것 같습니다. 유교의 제사를 한번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유교 제사에는 제사법이 있죠. 이 제사법이 마치 극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사법에 따라서 제사가 드려질 것입니다. 제삿날이 정해지고 사람들에게 제사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집니다. 그리고 음식의 종류와 놓는 방식, 제사의 순서도 정해지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제사법을 따라서 그대로 재현해야 올바른 제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홍동백서라는 방식을 따라 제사상을 차릴 때 붉은색의 계열은 동쪽에 놓고 흰색의 것은 서쪽에 놓아야 합니다. 또한 법칙에 따라 제사에는 남자만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재현 혹은 극화로서의 예배관입니다.
유대교 역시 비슷한 예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제사의 종류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제사의 종류를 정하셨죠. 제사를 드리는 절기도 정해 주셨습니다. 또한 누가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 대제사장이 하는 역할과 일반 백성들이 하는 역할들이 다릅니다. 어떤 재물을 바쳐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나 곡식 등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나 닭으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제사법이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에도 재연으로서의 예배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교단들이 꽤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라든지 가톨릭 같은 예전적인 교회에는 제의적인 관점, 재연으로서의 관점이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합니다. 이러한 재연의 요소는 우리 개신교 안에도 드물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식과 같은 것이 재연으로서의 의식입니다. 세례에는 정해진 사람과 방식이 있죠. 세례는 아무나 베풀 수 없습니다. 반드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세례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적절한 방식에 따라 신앙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분명한 선언도 있어야 합니다. 만약 목회자가 없다면 절차 없이 아무나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또한 물이 없다고 모래를 가지고 세례를 줘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세례를 받기는 했는데 평생 찜찜하게 살아갔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세례를 받긴 했는데 마음이 늘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뭐가 잘못됐는지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물로 분명히 세례를 받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선언도 받았답니다. 목사님이 집례하지 않았느냐 물으니, 당연히 목사님이 집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찜찜한 구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그 친구가 세례받을 때 목사님께서 자신의 이름 중 한 자를 잘못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도 항상 자신이 세례를 받았는지 늘 고민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재연으로서의 예배’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 자도 틀려서는 안 됩니다. 한 자가 틀리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유교 제사도 마찬가지고 일반 모든 종교의 제의적 관점, 재연으로서의 예배 관점은 이런 상황을 만들곤 합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예배의 관점에서 ‘이해’를 바라는 새로운 방향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제사법과 관련된 또 하나의 관점은 ‘이해의 차원에서 예배를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받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주장된 것입니다. “제대로 드린 예배(effective worship)”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교회의 매일 반복되는 예전을 보면서 “이 예배 속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이해되지 않는 예배가 과연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이후 개혁교회는 이해가 가능한 예배를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장로교회의 예배가 이를 따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열심히 자국어로 번역하였고 설교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예배의 한 관점으로 부각했고 말씀을 읽고, 쓰고, 듣고, 해석하는 일을 격려하며 예배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 외에도 오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감정적 경험’, ‘격앙 경험’의 관점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뜨거워지는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좋은 예배로 보는 경험으로서의 예배관입니다. 이런 예배관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오늘의 주제와는 조금 멀기 때문에 언젠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배의 다양한 유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예배관 사이에 중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넘어가고 있었던 지점에 예배관의 충돌도 일어났습니다. 재연으로서의 예배관과 이해로서의 예배관 사이의 충돌입니다. 당시 중세 교회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틴어를 당시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라틴어를 읽는 사제들 중에도 라틴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음가대로 읽기는 했지만 뜻을 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16세기 뉘른베르크에 살았던 사람 중 약 95%의 사람이 라틴어를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늘 반복적으로 진행되었기에 그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참석하면 예배를 드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중세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재연으로서의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유교 제사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죠. 유교 제사를 드릴 때 ‘유세차’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유세차’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너, 세차하러 다녀와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유세차’라는 음성이 들리면 ‘아,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제사가 진행되는구나.’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제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재연으로서의 예배에는 ‘이해’에 대한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재연만 분명하게 하면 제사가 잘 드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영미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 중에 ‘Hocus Pocus(호커스 포커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그중 하나는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뜻도 있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를 영어로 번역하고 싶으면 이 표현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한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hoc est corpus meum(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 This is my body,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 중에 예수님의 몸을 들듯이 떡을 들면서 선포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예배드리던 사람들은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제 무엇인가 마술이 펼쳐지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나 보다’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나온 말이 ‘호커스 포커스’라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이어진 로마 교회의 라틴어 예배는 전 세계적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가톨릭에서 한국어로 예배를 드린 지는 이제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알 수 없는 라틴어로 예배가 드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예배의 성격이 ‘재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대로 재현되기만 하면 예배가 잘 드려졌다고 생각하는 관점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한 움직임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말씀을 위한 자리로 나아온 것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관점의 예배에 많은 불편을 느꼈습니다. 내가 왜 예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들리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일지, 어떤 내용일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예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말씀은 개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잘 전해 줍니다. 구약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 개혁 시대의 상황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듯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약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이해로서의 예배가 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에 장로교회의 예배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시기였습니다. 스룹바벨이 1차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2차, 3차로 귀환하면서 개혁을 단행하고 성벽을 건축하던 시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모두 건축하고, 그 뒤로 예루살렘 성벽까지도 완전히 중수한 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느헤미야 8장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 8:1)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듣기를 간청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제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레위인들도 반차대로 배정하였고, 역할도 다 나누었습니다. 정한 절기들도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성전의 제사는 ‘재연의 예배’로서 완전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또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 성벽도 완전하게 중수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할까요?
재연으로서의 예배로 볼 수 있는 성전의 예배는 아주 온전하게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도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말씀에 대해 갈급함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른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나와 앉았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 8:2~3)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 아마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나왔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로서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해로서의 예배’에서 중요한 주도권은 백성에게 있습니다. 주체가 백성입니다. 그들은 결코 끌려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문 앞에 모여서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길 청하는 사람들, 곧 주체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 중심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자발성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씀 듣기를 청하였고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함께 말씀을 ‘이해’하는 예배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4절 이후는 말씀이 선포되는 장면을 그림처럼 우리에게 묘사합니다.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느 8:4~6)
말씀을 듣는 예배의 순서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매우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에스라가 율법을 읽을 때 그 옆에 서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에스라와 함께 서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구절에는 느헤미야 총독도 서 있습니다. 그리고 듬성듬성 레위인들의 이름도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읽는 과정에 모든 사람이 함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낭독자인 에스라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청중이나 듣는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라와 더불어 많은 족장들이 함께 서서 말씀을 읽었다고 묘사합니다. 그들이 읽으면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함께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납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느 8:7~8)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통역해 주는 일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통역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른 언어로도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성경이 어떤 뜻인지 알기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해석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앞서 거명한 모든 사람이 함께 서서 말씀을 읽고 통역하며 해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말씀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에스라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가 함께 말씀을 읽는 일에 함께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수고는 그저 읽고 통역하는 일을 넘어 해석하며 깨닫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9a)
함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의 본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동을 한 모습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삶에 다가가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오늘은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9~10) 그러자 그 말씀에 그들은 또다시 반응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느 8:12)
이것이 ‘말씀 중심의 예배’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말씀 중심의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가 보다 더 의미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또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돕는 이들도 중요합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평신도들이 서로 말씀을 읽어 주고 함께 알아 가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통역과 해석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전달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 감동하게 되고 함께 울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웃고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소망교회에도 주일마다 말씀이 전파되지만, 이 말씀이 구역 예배를 통해서 함께 다시 해석되고 또다시 반복되고 통역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이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전달됩니다. 그 옆에는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소망교회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 8장 12절의 말씀을 제가 읽습니다.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느 8:12b)
이 축복이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Faith For Communication and Understanding
Nehemiah 8:7-12
What does it mean to worship well? Every Sunday we come to church with an intent to worship well. Then how must we worship in order to worship properly? As Christians, how must we worship? What is good worship?
Do we have criteria? Well… I am not sure if I have those. But the truth is every worshiper has his/her own criteria for proper worship.
For example, sometimes you leave church filled with joy, saying, “The service was so graceful today”, while on other Sundays you think, ‘I should have stayed home.’
What are our criteria forsuch responses? In these cases, it is clear that the worshiper had a certain notion of what good worship ought to be. Then what is your criteria for good worship?
Let me make a guess. I can do this not because I have some superpower to see through you, but thanks to my knowledge gained from studying liturgy. Listening to the following perspectives on worship, you will find that you lean toward one of them:
The first perspective on worship is based on a basic and general criterion on good worship,which is considered important in most religions. This criterion judges worship from the perspective of reenactment and dramatization. In short, it considersthatworship is conducted like a performance of a play.
For example, a play normally consists of a script, a stage, and actors. In a play actors act on stage according to a script, and the people watch it being performed on stage. This is how the first perspective understands worship. Of course, it is up to the audience to immerse themselves and participate in the play.
Some of you may be appalled, thinking, ‘How profane to see worship in such a way!’ But in truth most religions adopt this criterion on what makes good worship.
Let’s take for example“jesa,” the Confucian ancestral rites. There are certain rules on how the rites mustbe conducted, which are strictly followedin performing the rites. The dates for jesa are determined;only those who are eligible may take part; there are strict rules for the types and placing of the food; and the order of events is determined as well. You cannot perform jesaas you want; you must abide by the laws.
For example, the dishes must be placed on the table according to rule ofhong-dong-baek-seo, meaning the red dishes must be placedon the east while the white dishes on the west. If there is a male-only rule, only male relatives can take part. Such rituals are based a perspective that sees worship as a reenactment or dramatization. The ancestral rites of Confucianism also adopt this perspective that sees worship as reenactment and dramatization. There are set rules for the rites.
God presented to His people the method in which sacrifices must be offered to Him.
God stipulated the types of sacrifices, including the burnt offering, the grain offering, the guilt offering, the sin offering, and the peace offering; determined the seasons for the sacrifices; toldHis people who should perform the sacrifices and how; and stipulated the types of offerings.
Bulls, lambs, goats, doves, and grain were allowed, but not pigs, chicken, or other animals. The lay Israelite was not allowed to perform the duty of priests.
From this perspective of worship, whether the sacrifice has been reenacted properly in accordance with the stipulated ways and by the accredited person becomes critical.
Such a view has existed within Christianity too. The Catholic Church of the Middle Ages viewed worship from this point of view; otherchurches today such as the Catholic Church and the Orthodox Church also adopt this view.
For example, while the bishop is allowed to perform certain liturgical acts, the priest is not and is given other roles. If such rules are not followed, the service can become invalid.
This view that sees worship as reenactment is also found in Protestant churches today.
Baptism is a good example. Baptisms can only be performed by a minister, that is, an accredited person. They require sufficient education, an appropriate catechism, and the baptizand’spublic confession of faith. Furthermore, water must be used and the minister has to say,“I baptize you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A baptism is valid only with all these elements.
From this point of view, the worshiper thinks that the worship has been well conducted when reenactment and dramatization have beendone well.
For Christianity, this perspective, which has established itself throughout the millennia through Judaism, the Orthodox Church, and the Catholic Church,serves as a practical criterionfor proper worshipas well as a practical answer to “What is effective worship?”
Before the Reformers raised objections, worship as reenactment was considered absolute. Even though services were conducted in Latin, worship of the Medieval Church could last for more than a millennium because of this liturgical theology that saw worship as reenactment.
The second perspective of worship prioritizes understanding. This liturgical theology,argued by Reformers influenced by humanism,believes that proper worship must aid the worshiper’s understanding and contribute to his edification. From this point of view, each order of service must help the worshiper to understand God.
This is probably the view thatmost of us, Presbyterians, adopt. What does it mean when a church member says to the pastor at the end of the service, “Pastor, I was so filled with grace today,”as he leaves church? “The service was so good.” What does this mean? Wouldn’t it be a short way of saying, “Pastor, I learned a lot from your sermon today. Thank you.”
To people with such a view, meaningless, repetitive rituals are frustrating and irritating. They appreciate and are comforted byexplanatory sermons and feel they have worshiped properly when they hear such sermons. Services held by such denominations as the Presbyterian Church adopt this view. Christians who adopt this view place emphasis on understanding in worship.
Another perspective is to view worship as an experience. Christians with this view think worshipought to be passionate. Worshipers must praise ardently; Amens should beshouted with more gusto; and the sermon must move the hearts of the congregants.
People who adopt this viewbelieve thattrue worship is one that leads worshipers to shed tears and stirs them emotionally. Traditionally, denominations such as the Methodist Church, the Pentecostal Church, and the Full Gospel Church, have adopted this view.
Our view of worship will eitherbelong to one of the above perspectives, or stand somewhere in between.
I explained in detail the types of views on worship. During the transition from the Middle Ages to the Reformation, there was a clash between the view that saw worship as dramatization and the one that emphasized understanding.
The Medieval Church conducted all masses in Latin. Barely anyone understood them. Even among the clergy,manyonly read Latin texts without understanding their meaning.
Yet worship during the Middle Ages naturally endured.
But from 1347 the Black Death devasted Europe for three years. Laymen were not allowed to handlethe dead who had died from what was called“God’s Curse.” Only God’s agents, the clergy, were allowed to do this job, causing manypriests tosuccumb to the disease.
Due to a shortage of priests, the Church was forced to ordain a mass of unqualified clergymen, many of whom did not understand Latin.
In short, these priests were only capable of sounding out Latin texts and did not understand what they meant. Although the Vulgate, the Latin Bible, was considered and read as the authoritative Bible text, few could interpret its meaning. According to historical records, in 16C Nurnberg, a big city, the Latin illiteracy reached 95%.
In short, masses were conducted in an incomprehensible language. Yet they endured because they were performed in a set order, in a repetitive way. In other words,medieval worship persisted even thoughthe worshipers were unable to understand it.
This is a characteristic of worship as reenactment. This can be compared to jesa rites to which no one raises an objection even though incomprehensible terms are used. No one asks what “Yu-se-cha”means upon hearing “Yu-se-cha in the month of XX in the year XXXX” at the beginning of a jesaceremony. Everyone just thinks that the ceremony has started.
Today “hocus-pocus”usually refers to a chant to conjure magic. But this word actually originates from a phrase used in medieval mass. “Hoc est corpus meum,” which means“This is my body,” was a Latin phrase used during mass.
Masses in Latin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persisted globally even until the 1960s, including in Korea. It has only been about six decades since the Korean Catholic Church startedworshiping in Korean.
Isn’t this surprising?
Yet worship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endured for thousands of years, which attests to the power of worship as reenactment.
However, the Reformers felt uncomfortable withthis worship. They wanted to know why they were worshiping,understand God’s word, and hear its interpretation. They earnestly desired worship that enabledcongregants to hear and understand the word of God.
Interestingly, today’s Scripture from Nehemiah talks about a reformation through an Old Testament story. In it we will find a valuable answer tothe question“How can we maximize worship as understanding?”
The time was when the Israelites returned to Jerusalem from Babylonian captivity. Zerubbabel had led the first group of Israelites to Jerusalem and had rebuilt the Temple; Ezra and Nehemiah continued the work by carrying out a reform and rebuilding the walls of Jerusalem.
Today’s passage describes the events after the construction of the Temple and the rebuilding of the walls of Jerusalem. In Nehemiah 8:1 the situation is described as such:
“All the people assembled as one man in the square before the Water Gate. They told Ezra the scribe to bring out the Book of the Law of Moses, which the LORD had commanded for Israel.”(Nehemiah8:1)
The Israelites, as a whole,voluntarily gathered at the Water Gate and desired to hear the Law of Moses. In a word, they were hungry for the word. They had built the Temple, appointed Levites to do their duty regarding Temple sacrifices, and ensured that they observed the festivals. Furthermore, they even edified the walls of Jerusalem so that the Temple would be guarded well.
느헤미야 8:7~12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9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10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 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다양한 예배 형식 중에서 우리가 이어오고 있는 관점과 다른 관점을 살펴봅니다.>
지난 2주에 걸쳐서 세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물세례는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인지, 또 성령 세례는 어떻게 받을 수 있고 어떤 의미인지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히 일생일벗을 통해서 교회에 처음 나오는 분들도 꽤 계실 텐데요. 그분들에게 우리 소망교회 예배가 어떤 것인지 조금 더 구별해서 알려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개혁이 이루어진 지 507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어떻게 개혁교회가 과거 중세 교회와 달라지게 됐는지, 왜 우리는 가톨릭교회와 다른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드리는 것이 잘 드린 예배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나름대로 기준이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대한 기준 중에 특별히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기준이 하나 있습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 기준을 저는 ‘극화의 관점’ 혹은 ‘재연의 관점’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편하게 말씀드리면 ‘재연으로서의 예배’라는 표현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예배의 관점은 마치 연극을 하듯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연극에는 대본과 무대, 배우가 있습니다. 연극은 배우가 그 대본을 따라서 그대로 연기를 해 냅니다. 그러면 연극이 이루어지죠. 마치 예배에서도 마치 연극을 하듯이 무대는 예배당이 되고 예배당 안에서 맡은 사람들이 극화된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을 ‘재연으로서의 예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들리실 수도 있고 혼란스러우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조금 쉽게 이해되실 것 같습니다. 유교의 제사를 한번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유교 제사에는 제사법이 있죠. 이 제사법이 마치 극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제사법에 따라서 제사가 드려질 것입니다. 제삿날이 정해지고 사람들에게 제사에 참여할 자격도 주어집니다. 그리고 음식의 종류와 놓는 방식, 제사의 순서도 정해지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제사법을 따라서 그대로 재현해야 올바른 제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홍동백서라는 방식을 따라 제사상을 차릴 때 붉은색의 계열은 동쪽에 놓고 흰색의 것은 서쪽에 놓아야 합니다. 또한 법칙에 따라 제사에는 남자만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재현 혹은 극화로서의 예배관입니다.
유대교 역시 비슷한 예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제사의 종류를 지정해 주셨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라는 제사의 종류를 정하셨죠. 제사를 드리는 절기도 정해 주셨습니다. 또한 누가 어떻게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 주셨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 대제사장이 하는 역할과 일반 백성들이 하는 역할들이 다릅니다. 어떤 재물을 바쳐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소, 양, 염소 그리고 비둘기나 곡식 등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돼지나 닭으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이렇듯 제사법이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에도 재연으로서의 예배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교단들이 꽤 있습니다. 동방정교회라든지 가톨릭 같은 예전적인 교회에는 제의적인 관점, 재연으로서의 관점이 중요한 관점으로 자리합니다. 이러한 재연의 요소는 우리 개신교 안에도 드물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세례식과 같은 것이 재연으로서의 의식입니다. 세례에는 정해진 사람과 방식이 있죠. 세례는 아무나 베풀 수 없습니다. 반드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베풀어야 합니다. 또한 세례를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적절한 방식에 따라 신앙이 공개적으로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물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분명한 선언도 있어야 합니다. 만약 목회자가 없다면 절차 없이 아무나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또한 물이 없다고 모래를 가지고 세례를 줘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세례를 받기는 했는데 평생 찜찜하게 살아갔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세례를 받긴 했는데 마음이 늘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뭐가 잘못됐는지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물로 분명히 세례를 받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선언도 받았답니다. 목사님이 집례하지 않았느냐 물으니, 당연히 목사님이 집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찜찜한 구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알아보았더니, 그 친구가 세례받을 때 목사님께서 자신의 이름 중 한 자를 잘못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도 항상 자신이 세례를 받았는지 늘 고민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재연으로서의 예배’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 자도 틀려서는 안 됩니다. 한 자가 틀리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유교 제사도 마찬가지고 일반 모든 종교의 제의적 관점, 재연으로서의 예배 관점은 이런 상황을 만들곤 합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예배의 관점에서 ‘이해’를 바라는 새로운 방향이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로 제사법과 관련된 또 하나의 관점은 ‘이해의 차원에서 예배를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받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주장된 것입니다. “제대로 드린 예배(effective worship)”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중세 교회의 매일 반복되는 예전을 보면서 “이 예배 속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예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가”, “이해되지 않는 예배가 과연 예배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이후 개혁교회는 이해가 가능한 예배를 끊임없이 추구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드리고 있는 장로교회의 예배가 이를 따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성경을 열심히 자국어로 번역하였고 설교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예배의 한 관점으로 부각했고 말씀을 읽고, 쓰고, 듣고, 해석하는 일을 격려하며 예배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 외에도 오늘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서 다 말씀드리지는 못하지만, ‘감정적 경험’, ‘격앙 경험’의 관점이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뜨거워지는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좋은 예배로 보는 경험으로서의 예배관입니다. 이런 예배관은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만족을 추구합니다. 오늘의 주제와는 조금 멀기 때문에 언젠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배의 다양한 유형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예배관 사이에 중세 교회에서 개혁교회로 넘어가고 있었던 지점에 예배관의 충돌도 일어났습니다. 재연으로서의 예배관과 이해로서의 예배관 사이의 충돌입니다. 당시 중세 교회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라틴어를 당시에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심지어 라틴어를 읽는 사제들 중에도 라틴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음가대로 읽기는 했지만 뜻을 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사된 바에 따르면 16세기 뉘른베르크에 살았던 사람 중 약 95%의 사람이 라틴어를 모르는 문맹이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것을 들을 뿐이었습니다. 늘 반복적으로 진행되었기에 그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참석하면 예배를 드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중세 교회의 예배였습니다.
이것은 재연으로서의 예배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유교 제사를 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죠. 유교 제사를 드릴 때 ‘유세차’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이 ‘유세차’라는 말을 듣고 그 말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너, 세차하러 다녀와라.”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유세차’라는 음성이 들리면 ‘아,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제사가 진행되는구나.’라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제사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재연으로서의 예배에는 ‘이해’에 대한 의미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재연만 분명하게 하면 제사가 잘 드려졌다고 생각합니다. 영미권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 중에 ‘Hocus Pocus(호커스 포커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인데, 그중 하나는 ‘수리수리 마수리’ 같은 뜻도 있습니다. 수리수리 마수리를 영어로 번역하고 싶으면 이 표현을 쓰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라틴어로 미사를 드릴 때 사용한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 “hoc est corpus meum(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 This is my body, 이것은 나의 몸이니라)”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사제가 미사 중에 예수님의 몸을 들듯이 떡을 들면서 선포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마 예배드리던 사람들은 문장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호크 에스트 코르푸스 메움’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제 무엇인가 마술이 펼쳐지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몸으로 변하나 보다’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나온 말이 ‘호커스 포커스’라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이어진 로마 교회의 라틴어 예배는 전 세계적으로 19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가톨릭에서 한국어로 예배를 드린 지는 이제 60여 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알 수 없는 라틴어로 예배가 드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예배의 성격이 ‘재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대로 재현되기만 하면 예배가 잘 드려졌다고 생각하는 관점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한 움직임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말씀을 위한 자리로 나아온 것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관점의 예배에 많은 불편을 느꼈습니다. 내가 왜 예배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자신의 언어로 들리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일지, 어떤 내용일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예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말씀은 개혁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잘 전해 줍니다. 구약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 개혁 시대의 상황으로 우리를 끌고 가는 듯 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구약의 말씀을 통해 어떻게 하면 이해로서의 예배가 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을까에 대해 매우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을 통해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에 장로교회의 예배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예배에 임해야 할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시기였습니다. 스룹바벨이 1차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복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2차, 3차로 귀환하면서 개혁을 단행하고 성벽을 건축하던 시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모두 건축하고, 그 뒤로 예루살렘 성벽까지도 완전히 중수한 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느헤미야 8장 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느 8:1)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을 듣기를 간청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제사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레위인들도 반차대로 배정하였고, 역할도 다 나누었습니다. 정한 절기들도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성전의 제사는 ‘재연의 예배’로서 완전하게 잘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또 잘 보호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 성벽도 완전하게 중수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할까요?
재연으로서의 예배로 볼 수 있는 성전의 예배는 아주 온전하게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일도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말씀에 대해 갈급함이 생겨난 것입니다. 어른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 나와 앉았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 8:2~3)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 아마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나왔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해로서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해로서의 예배’에서 중요한 주도권은 백성에게 있습니다. 주체가 백성입니다. 그들은 결코 끌려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문 앞에 모여서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길 청하는 사람들, 곧 주체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모였습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이해 중심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의 자발성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말씀 듣기를 청하였고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함께 말씀을 ‘이해’하는 예배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소통’이 필요합니다.>
4절 이후는 말씀이 선포되는 장면을 그림처럼 우리에게 묘사합니다.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느 8:4~6)
말씀을 듣는 예배의 순서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매우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에스라가 율법을 읽을 때 그 옆에 서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입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이 거명되었습니다. 그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 지파의 대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에스라와 함께 서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구절에는 느헤미야 총독도 서 있습니다. 그리고 듬성듬성 레위인들의 이름도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읽는 과정에 모든 사람이 함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낭독자인 에스라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청중이나 듣는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라와 더불어 많은 족장들이 함께 서서 말씀을 읽었다고 묘사합니다. 그들이 읽으면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함께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이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납니다.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느 8:7~8)
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고 통역해 주는 일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성경을 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통역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른 언어로도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나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성경이 어떤 뜻인지 알기 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해석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앞서 거명한 모든 사람이 함께 서서 말씀을 읽고 통역하며 해석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말씀의 사역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지도자 에스라뿐만 아니라 모든 평신도가 함께 말씀을 읽는 일에 함께 동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수고는 그저 읽고 통역하는 일을 넘어 해석하며 깨닫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느 8:9a)
함께 말씀을 이해하고 말씀의 본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동을 한 모습입니다. 말씀이 그들의 삶에 다가가게 된 것입니다. 레위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말합니다. “오늘은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9~10) 그러자 그 말씀에 그들은 또다시 반응합니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느 8:12)
이것이 ‘말씀 중심의 예배’의 모습입니다. 여기에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말씀 중심의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가 보다 더 의미 있는 예배가 될 수 있는지 중요한 힌트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또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도록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돕는 이들도 중요합니다. 목회자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평신도들이 서로 말씀을 읽어 주고 함께 알아 가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통역과 해석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전달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 감동하게 되고 함께 울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웃고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 소망교회에도 주일마다 말씀이 전파되지만, 이 말씀이 구역 예배를 통해서 함께 다시 해석되고 또다시 반복되고 통역됩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이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전달됩니다. 그 옆에는 함께 동역하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소망교회도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 8장 12절의 말씀을 제가 읽습니다.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느 8:12b)
이 축복이 우리 소망교회 모든 성도 여러분들에게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2024년 10월 27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소통과 이해를 위한 신앙” (느 8장 7-12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516장, 586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느 8장 7-12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0월 2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좋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잘 드리는 예배는 어떻게 드리는 예배일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설교의 요약
좋은 예배에 대한 한 가지 기준은 ‘재연의 관점’입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예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관점입니다. 예를 들어 연극에는 대본을 따라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습니다. 물론 연극에 몰입하고 함께 하는 관람자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의 예배는 유대교의 제사를 비롯하여 중세 카톨릭과 정교회 그리고 심지어 개신교회에서도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세례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두 번째는 예배를 ‘이해의 관점’에서 다루는 유형입니다. 이러한 이해는 인문주의(humanism)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것으로 예배자의 이해를 돕고 교화(edification)에 초점을 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재연의 관점’과 ‘이해의 관점’이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는데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심지어 많은 사제들이 라틴어를 몰랐습니다. 즉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예배가 드려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개혁가들은 이러한 예배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왜 예배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지 그 해석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개혁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시기에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모세의 율법을 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있었고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히브리어로 율법을 낭독하였는데 아람어로 통역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말씀을 해석하여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습니다.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역하고 해석하며 말씀을 잘 전달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감동하고, 함께 울며, 함께 기뻐하며,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소망교회는 이해를 추구하는 예배를 지향합니다. 전통적인 장로교회로서 제의적인 요소도 있고 재연의 요소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적용하는 소망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누기
- 좋은 예배는 어떠한 예배인지 각자의 생각이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동하며 기뻐했던 적이 있나요?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고 나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된 적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귀한 말씀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성령을 통하여 온전한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을 주시고 읽고 전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해석하고 통역하고 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밝히 드러나 모두가 그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소망교회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