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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서 배우라

마태복음 18: 1 ~ 6

김경진 목사

2019.05.05

<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입니다. >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자녀가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문(愚問)입니다. 선택을 강요한다는 측면에서도 적절한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어린이날,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부모가 자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모든 일을 해내기가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받아들고,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생각납니다. 아이에게는 첫 번째 세상 나들이였습니다. ‘이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장 먼저 보여줄까?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줄까?’라고 고민하며, 아이의 눈을 가린 뒤 제일 처음 보여줄 것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이곳이 네가 살게 될 집이야.”라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아이를 방에 눕히고 바라보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정말 한참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아이가 울면 젖도 먹이면서 한나절쯤 지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언제 가지?’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아이는 이제부터 저와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 큰일 났구나!’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의 시간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입히고, 옷을 빨고, 신발을 신기고,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유치원을 보내고, 초등학교를 보내고,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마중을 나가고, 공부를 시키고, 숙제를 같이 하고,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함께 긴장하고, 예방주사를 맞히고….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마치 폭격 맞은 것 같은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당연히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과제처럼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엄마와 아빠 모두가 힘겨울 정도로, 아이를 키워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옳은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이가 공부를 위해 멀리 떠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었는지 말입니다. 많은 과제와 힘겨운 일들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축복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가 원해서 태어났습니까? 부모가 서로 사랑해서 태어났지요. 또 아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주고 싶어서 젖도 주고, 옷도 입히고, 신발도 신겨주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부모들이 해 주고 싶어서, 그러면 부모인 우리가 행복해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누구를 위해 한 일입니까? 부모를 위해 곧 우리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아닐까요?
아이들은 우리의 보배요, 축복입니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렸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살만한 용기도 얻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도 생겼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공부시켜 주고, 아이들의 계획을 짜 준다고 해도, 아이들이 살만한 이유나 용기를 얻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더욱 옳은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 이처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시는 위로요,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대할 때마다 무거운 짐이나 부모에게 주어진 형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멸시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존재만으로 부모에게 기쁨과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습니다.

<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

때로 자녀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후회가 들 때가 있습니다. ‘좀 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걸…. 아이에게 좀 더 최선을 다할 걸…. 아이와 함께 자전거도 타고, 연도 날리고, 별도 바라볼 걸….’이라는 후회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 후회와 생각을 고쳐 잡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를 내가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움을 표출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같은 어린이날, 우리는 귀한 자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우리 자녀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많은 분에게 자녀가 있거나, 앞으로 자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크든 작든, 그들은 우리의 분깃이며 상급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은 그저 부모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존재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자녀가 부모에게 또 어른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곧 ‘자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의 통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그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중)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히 어른들에게 위로를 선사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 인간이 돌이켜야 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녔다고. 다시 말해, 성인들이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린아이는 그저 어른이 되기 전, 도상에 있는 정도의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인간의 온전하고 모범적인 모습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태복음 18:5)

즉 예수님은,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까지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 곳입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본다면, 천국은 어린아이들이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가득한 곳,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곧 우리의 자녀들과 천국, 그리고 예수님의 현존을 연결시키셨습니다. “어린아이 안에 천국이 있다. 그리고 아이들 안에 주께서 계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아이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그와 같은 문화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수천 년 전부터 어린아이들 안에서 천국을 보라고 말씀하셨고, 어린아이들의 삶과 그들 안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바로 그 안에 예수님의 현존이 함께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도 신기하고 대단한 말씀일 정도로, 그 말씀은 위대한 말씀이었습니다.

< 어린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을 배웁니다. >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마태복음 18:3 중)

여기에 ‘돌이켜’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모델이며, 어른을 회개의 자리를 이끄는 인도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죄를 덜 지었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또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겸손해진다는 뜻일까요? 흐름상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겸손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겸손을 배우며,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한 어른들도 겸손하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이 말씀은 앞선 3절 말씀과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3절 말씀, 즉 다시 말하면 ‘자기를 낮춘다’라는 것은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시편 131편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1~3)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히 갓난아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아이는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품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며, 부모만 바라며,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낮아짐이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모습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할 때부터 부모에게 자녀는 근심이 됩니다. 물론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모든 힘을 빼며, 그 안에서 평온을 누리는 참다운 자녀 됨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어린아이입니다. >

조금 전 우리는 유아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유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에 순종함으로 유아세례를 받습니다. 유아들이 결정권을 행사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부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아이의 구원을 위해 여기까지 나왔으며, 그로 인해 유아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안으시고 키워주실 것입니다. 힘을 빼고 그저 품 안에 안겨 있으면 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자 어린아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통로가 바로 자녀들이고, 어린아이들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통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통로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들과 자녀들, 손주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들이 철없이 다가와서 안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어떻게 주님 앞에 주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지혜’를 얻는 어린이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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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8: 1 ~ 6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입니다. >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자녀가 부모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문(愚問)입니다. 선택을 강요한다는 측면에서도 적절한 질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어린이날, 한 번쯤 던져볼 만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부모가 자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부모가 되어 보니 자식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모든 일을 해내기가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받아들고, 처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생각납니다. 아이에게는 첫 번째 세상 나들이였습니다. ‘이 아이에게 어떤 것을 가장 먼저 보여줄까?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줄까?’라고 고민하며, 아이의 눈을 가린 뒤 제일 처음 보여줄 것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이곳이 네가 살게 될 집이야.”라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아이를 방에 눕히고 바라보는데 얼마나 신기하던지, 정말 한참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아이가 울면 젖도 먹이면서 한나절쯤 지났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이가 언제 가지?’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아이는 이제부터 저와 함께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 큰일 났구나!’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동의 시간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입히고, 옷을 빨고, 신발을 신기고,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유치원을 보내고, 초등학교를 보내고, 아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마중을 나가고, 공부를 시키고, 숙제를 같이 하고,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함께 긴장하고, 예방주사를 맞히고….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마치 폭격 맞은 것 같은 집에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당연히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과제처럼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엄마와 아빠 모두가 힘겨울 정도로, 아이를 키워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은 옳은 말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아이가 공부를 위해 멀리 떠난 뒤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우리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었는지 말입니다. 많은 과제와 힘겨운 일들을 안겨 주기도 했지만, ‘그 아이와 함께한 시간이 축복이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위해서 존재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아이가 원해서 태어났습니까? 부모가 서로 사랑해서 태어났지요. 또 아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달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주고 싶어서 젖도 주고, 옷도 입히고, 신발도 신겨주었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서, 부모들이 해 주고 싶어서, 그러면 부모인 우리가 행복해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해 주곤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누구를 위해 한 일입니까? 부모를 위해 곧 우리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아닐까요?
아이들은 우리의 보배요, 축복입니다.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렸으며, 힘을 얻었습니다. 살만한 용기도 얻었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살아야 할 이유도 생겼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공부시켜 주고, 아이들의 계획을 짜 준다고 해도, 아이들이 살만한 이유나 용기를 얻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야 할 이유와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 더욱 옳은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증언합니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 이처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시는 위로요,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대할 때마다 무거운 짐이나 부모에게 주어진 형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멸시를 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어린이는 존재만으로 부모에게 기쁨과 의미를 주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시는 선물이요,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보다 부모가 자녀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가 훨씬 많습니다.

<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

때로 자녀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후회가 들 때가 있습니다. ‘좀 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걸…. 아이에게 좀 더 최선을 다할 걸…. 아이와 함께 자전거도 타고, 연도 날리고, 별도 바라볼 걸….’이라는 후회입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그 후회와 생각을 고쳐 잡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를 내가 놓치지 말았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움을 표출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같은 어린이날, 우리는 귀한 자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동시에 우리 자녀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많은 분에게 자녀가 있거나, 앞으로 자녀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크든 작든, 그들은 우리의 분깃이며 상급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녀들은 그저 부모에게 위안과 기쁨을 주는 존재일까요? 이에 대해 오늘 본문은, 자녀가 부모에게 또 어른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곧 ‘자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의 통로다’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그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3 중)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단순히 어른들에게 위로를 선사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오히려 우리 인간이 돌이켜야 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지녔다고. 다시 말해, 성인들이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린아이는 그저 어른이 되기 전, 도상에 있는 정도의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우리가 모델로 삼아야 할, 인간의 온전하고 모범적인 모습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마태복음 18:5)

즉 예수님은,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까지 연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들어간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 곳입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본다면, 천국은 어린아이들이 들어갑니다. 천국에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합니다.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어린아이들이 가득한 곳,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 곧 우리의 자녀들과 천국, 그리고 예수님의 현존을 연결시키셨습니다. “어린아이 안에 천국이 있다. 그리고 아이들 안에 주께서 계신다.”라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는 아이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그와 같은 문화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수천 년 전부터 어린아이들 안에서 천국을 보라고 말씀하셨고, 어린아이들의 삶과 그들 안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며, 바로 그 안에 예수님의 현존이 함께한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도 신기하고 대단한 말씀일 정도로, 그 말씀은 위대한 말씀이었습니다.

< 어린아이에게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을 배웁니다. >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마태복음 18:3 중)

여기에 ‘돌이켜’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보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야말로 천국에 들어갈 자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모델이며, 어른을 회개의 자리를 이끄는 인도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단순히 어리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죄를 덜 지었기 때문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까? 또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태복음 18:4)

여기서 ‘자기를 낮춘다’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겸손해진다는 뜻일까요? 흐름상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겸손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어린아이들이 어떻게 겸손을 배우며,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성숙한 어른들도 겸손하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이 말씀은 앞선 3절 말씀과 연결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는 3절 말씀, 즉 다시 말하면 ‘자기를 낮춘다’라는 것은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시편 131편에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편 131:1~3)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히 갓난아기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아이는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품에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며, 부모만 바라며,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낮아짐이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모습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자기 생각대로 하려고 할 때부터 부모에게 자녀는 근심이 됩니다. 물론 자아를 찾아가는 시기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모습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모든 힘을 빼며, 그 안에서 평온을 누리는 참다운 자녀 됨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어린아이입니다. >

조금 전 우리는 유아세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유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에 순종함으로 유아세례를 받습니다. 유아들이 결정권을 행사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부모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가 아이의 구원을 위해 여기까지 나왔으며, 그로 인해 유아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안으시고 키워주실 것입니다. 힘을 빼고 그저 품 안에 안겨 있으면 됩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이자 어린아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시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통로가 바로 자녀들이고, 어린아이들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통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키우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갑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통로입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어린이들과 자녀들, 손주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며 감사하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들이 철없이 다가와서 안기는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어떻게 주님 앞에 주님의 자녀로 살아야 할지 생각하는 ‘지혜’를 얻는 어린이주일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5월 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아이에게서 배우라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38장, 56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18: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존재할까요? 아니면 자녀가 부모를 위하여 존재할까요? 우리는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 때문에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기쁨을 누렸고, 힘을 얻었습니다. 살만한 용기도 그리고 살아야할 이유도 찾았습니다.

설교의 요약

성경은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127:3)고 말씀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에게 감사해야 할 것보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시간이 바로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며, 아이들이 우리에게 있는 시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아이를 주신 것을 기회로 알고 축복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그 시간을 채워가다 보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 주는 것들은 결코 짐이 되거나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귀한 자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동시에 자녀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자녀들은 그저 부모들에게 위안을 주고 기쁨을 주는 정도에 머무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어른들에게 위로를 주는 차원을 넘어서 우리 인간들이 돌아가야 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마18:3). 다시 말하면, 성인들이 온전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진정한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이들을 영접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영접하는 것으로까지 말씀하여 주셨습니다(마18:5).

그렇다면 천국은 누가 있는 곳입니까? 어린아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 우리들의 자녀들과 천국, 그리고 예수님의 현존을 연결시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4)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낮춘다.”는 말의 듯은 “어린아이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어린아이는 홀로 생존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갓 태어난 아이는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하며,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으며 부모만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낮아짐이고,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됨입니다(시131:1-3).

무언가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고 할 때부터 어린이는 부모에게 근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어린아이의 모습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어린이, 우리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통로입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고 배우는 귀한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누기

1. 자녀를 양육하며 새롭게 발견하거나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의존하며, 부모만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의존하며,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귀한 자녀를 주시어 우리의 삶이 위로를 받고, 복을 누리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자녀는 우리에게 짐이 아니오니, 감사함과 기쁨으로 양육하게 하옵소서. 자녀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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