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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은 어디에 갔을까
<‘소속과 정체성’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특별한 본문인 “깨끗함을 받은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는 ‘감사’의 주제로 많이 다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10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은혜를 입은 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감사의 주제는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오늘의 본문을 감사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이 숨겨 두고 있는 또 다른 주제인 ‘소속과 정체성’에 대한 관점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주제는 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때로는 나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큰 이득이나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때로는 나에게 큰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나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태생적으로나 삶의 여정을 통해서 어디엔가 소속이 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얻고 살아갑니다. 이 소속과의 정체성의 관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1)
이 한 절에 세 장소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 지점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잇길을 가고 계셨을까요? 이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 즉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있던 적대감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오래된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다윗, 솔로몬 시대에는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했습니다. 그때부터 둘은 형제이면서도 적국과 같이 경쟁하는 나라가 됩니다. 남왕국 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가 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분열한 채로 도중에 전쟁과 여러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적대감이 더욱 고조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후, 앗수르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한 하나의 정책을 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지역에 있던 백성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오게 해서 그들이 함께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과 섞여 자기 민족의 혈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혈통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던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남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이렇게 된 사마리아인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을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사건들이 또 이어졌습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의 시기를 거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지으려 하는 유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땅인 그리심산에 성전을 따로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결국 유다는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을 공격하고 파훼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인종적, 종교적인 차이가 쌓여 가면서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극한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서로 적대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두 지역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누가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이어서 공적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 3장에서 9장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속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결정하시고 방향을 바꾸십니다. 이제 수난과 영광을 받으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트십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그곳을 가시려는 시도를 하십니다. 하지만 사마리아는 다른 유대인들에게도 그랬듯이 예수님에게도 그 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눅 9:51~56)
예수님은 이제 사마리아를 직접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 지역을 따라 이동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경계를 따라가시다가 요단 동편으로 넘어가서 밑으로 내려오시고, 다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시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누가복음 9~19장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위에 갈릴리 아래 사마리아 지역이 있고, 사마리아 아래에 유대 지역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 지역을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요단강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여리고로 들어간 후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도 이와 같은 길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다시 오늘 본문의 첫 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눅 17:11~12a)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던 길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서로 배척하고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땅들의 경계선이었습니다. 한쪽 마을은 갈릴리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반대편 마을은 사마리아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소속과 정체성을 잃었지만, 믿음을 보인 이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마을은 나병 환자들만 살고 있던 마을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 나병 환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쫓겨나서 변방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들이 10명이나 그 마을에 살고 있었으니, 그 마을은 나병 환자 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지역에서 살다가 나병 환자가 된 이들이 그 경계선으로 나왔겠죠. 또한 사마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쫓겨난 나병 환자들도 그 경계선으로 몰려나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어울려서 살고 있던 마을이 예수님께서 지금 당도하신 마을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소속되어 살던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갈릴리에서 쫓겨났고, 또 어떤 이들은 사마리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만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고 새로운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은 나병 환자입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종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병을 진단받고 ‘이런 병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나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희귀병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도 아마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피부병을 겪게 되었는데,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서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본 그들은 멀리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2b~13)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라고 부릅니다. 몇 명의 유대인이 그곳에 있었는지, 몇 명의 사마리아인이 그곳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입니다. 함께 병을 앓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반응하시죠.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눅 17:14a)
예수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먼저 제사장을 향하여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몸의 변화는 없습니다. 아직 고쳐진 바가 없습니다. 아직도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믿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런데 열 사람 모두 말씀에 순종하며 제사장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죠. 실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명이 모두 그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매우 놀랍기도 합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였고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던 중에 그들은 각각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4b)
<깨끗함을 받은 이들은 그 길로 자신이 되찾기를 바라는 소속이 있는 곳을 향해 갔습니다.>
그렇게 가던 중에 나음을 입은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사람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폄하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이미 대단한 믿음을 보여 준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으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치유와 기적을 지금 경험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레위기 14장을 보면 이 나병 환자들에 대한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을 앓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에 어떻게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몸이 깨끗하여지면 그들은 각자 살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의 경계에서 제사장이 그의 몸이 깨끗해졌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우슬초와 홍색실을 가지고 새 한 마리의 피를 그에게 7번 뿌리는 정결 예식을 거행합니다. 또한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몸을 씻는 의식을 합니다. 그리고 7일을 기다린 후, 8일째 되는 날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성전 회막 문 앞에서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를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 제사를 드리고서 다시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을까요? 모두 다 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살았던 고향을 향하여 열심히 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 가족들과 정겨운 이웃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향해 각자 달려가고 있었겠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던 중에 그들은 몸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힘을 내어서 아마 자신의 마을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그들이 살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나병 환자는 자신의 살던 마을로 갔을 것이고, 사마리아인은 또 자신이 살던 그 마을로 돌아갔겠죠.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예배의 장소였던 그리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제사를 드리고 자신의 공동체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한번 마음에 그려 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쫓겨나 서로 위로하며 한 마을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깨끗해진 몸을 얻자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로, 갈릴리 사람은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서로를 적대하는 곳으로 소속됩니다. 자신의 마을에 한 구성원이 되어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에게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병이 낫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으로의 회복,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입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과거의 자리 그대로 유대인 또는 사마리아인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 다시 소속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다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됩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실은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었든, 유대인이었든 그것은 그다지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주제가 될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그가 누구이든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열 명의 나병 환자와 같이 집으로 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을로 향하다가 자신이 깨끗하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끗해진 몸으로 예수님께 나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렇게 그는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은 주님의 치유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놀라운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특별히 요한복음 4장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의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물었죠.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그리심산에서 예배하고 있는 자신들과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비교하면서 드렸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 21, 23)
이 놀라운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서 몇 사람이 유대인이었는지, 또 몇 사람이 사마리아에 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깨끗하여진 몸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고, 또 일부는 깨끗하여진 몸으로 그리심산 성전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상과 가정을 회복하고 제사를 드리며 자신의 모든 것들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고, 그리심산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예배해야 할 대상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엎드립니다. 한마디로 예배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참된 예배자가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도 아니요, 그리심에 속한 사람도 아닌,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예수님께 엎드리며 감사를 전했다고 하는 본문 속에 나오는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톤’(εὐχαριστῶν)이라는 단어입니다.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라는 ‘감사를 드리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유카리스트’(Eucharist, 성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라는 이 단어 속에는 ‘성찬’이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개념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깊이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눅 17:14, 새번역)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깨끗해진 몸을 보여드렸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각 지역마다 제사장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진정한 제사장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이야말로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 아니셨습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 아니십니까?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께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사람, 진정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받는 기도 요청이 종종 있고, 또 요청하지 않으셔도 제가 기도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병에서 나음을 얻기 위해서, 위기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 또 사업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낫기 원하는가? 나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또 ‘무엇을 위해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가? 회복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성공하기를 위해 기도하는가? 성공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런 질문을 던져 볼 때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연예인이 만든 유행어 중에,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돈 벌면 뭐 하겠나 소고기 사 먹겠지.” 그 말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병 나으면 뭐 하겠나 과거로 돌아가겠지. 소속된 곳의 정체성을 다시 찾을 뿐이지.” 그것이 회복의 목적일까요? 주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회복시킨다면, 너희는 어디에 속할 것이냐? 너희가 회복하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 어떤 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지요. 어떤 이는 하던 사업의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또 어떤 이는 다시 거들먹거리는 교만한 자리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을에 살고 있던 나병 환자 아홉은 병 들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눅 17:17~18)
왜 허무한 인생, 허무한 일상으로 그저 돌아가 버렸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세상적으로 본다면 마땅한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와 나음을 얻고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애틋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 입은 자답게 참된 예배자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Where Did the Nine Go?
Luke 17:11-19
The story of Jesus healing the ten lepers, unique to the Gospel of Luke, is often preached under the theme of “gratitude.” As Jesus was traveling, He healed ten lepers, among which only one returned to thank Jesus. This story is considered very important because it teaches us about the attitude we should have as recipients of grace.
Gratitude is undoubtedly a very powerful message of today’s passage. Therefore, it is appropriate to first examine today’s text from the perspective of gratitude, as we usually do.
However, today I want to look at today’s passage from a slightly different angle—from the perspective of “belonging and identity,” which is another hidden theme of this passage. If this doesn’t make sense to you at first, then you are now ready to listen to this sermon.
Let’s begin.
In our lives, the question “Where do I belong?” can sometimes be critical.
Yesterday’s news reported that a young Korean who had been detained by Israel for being on board a Gaza-bound aid ship was deported and is now returning to Korea via a third country. In such a situation, your nationality becomes critical.
The question “Where do I belong?” can sometimes define our identity, give us strength, or become a serious weakness.
Our identity as Koreans and our sense of belonging to Korea will give us great pride today, with K-culture sweeping the world. Each of us, either innately or through our life journey, comes to belong somewhere and gets our identity there.
Today’s passage begins like this:
“Now on his way to Jerusalem, Jesus traveled along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 (Luke 17:11 NIV)
In this single verse, three place names are mentioned. It is very unusual for Luke to mention three locations simultaneously. This means that Jesus was on his way to Jerusalem and was passing between Samaria and Galilee.
Why was Jesus passing through that area on His way to Jerusalem? To understand this situation well, we need to consider two facts.
First, we must understand the hostility that existed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There was a deep-seated and longstanding hostility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This dates back to the time of Israel’s division into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and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fter the split, Jerusalem was the capital of Judah, and Samaria the capital of Israel. The two kingdoms were divided for a long time, sometimes waging war against each other.
But there was another reason for the heightened hostility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When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was destroyed by the Assyrians, the Assyrians relocated many of the Israelites and brought in other ethnic groups into Samaria. As a result, the Israelites living in Samaria naturally became ethnically mixed. Later, the people of Judah refused to see the Samaritans as their kin and even despised them.
The situation worsened when the people of Judah returned from Babylonian captivity and began rebuilding the temple in Jerusalem. The Samaritans interfered with the rebuilding efforts. They even built their own temple on Mount Gerizim.
Over time, these historical, racial, and religious differences built up, leading to extreme hostility and total disconnection between the Jews and the Samaritans by the time of Jesus.
Luke’s Gospel vividly illustrates this reality. Jesus began His public ministry by being baptized in the Jordan River. He mainly ministered in Galilee, a region inhabited by Jews. Luke 3–9 mainly focus on His Galilean ministry.
But Jesus soon resolved to go to Jerusalem and changed His direction. He intended to pass through Samaria to reach Jerusalem, but the Samaritans would not accept Him because He was a Jew.
“As the time approached for him to be taken up to heaven, Jesus resolutely set out for Jerusalem. And he sent messengers on ahead, who went into a Samaritan village to get things ready for him; but the people there did not welcome him, because he was heading for Jerusalem.” (Luke 9:51-53 NIV)
This explains why Jesus could not pass through Samaria and traveled along the border of Galilee and Samaria. As many Jews did back then, Jesus also entered Jericho and Jerusalem from the east of the Jordan. This journey is recorded in Luke 9-19.
Understanding this, let’s look again at the first verse of today’s passage:
“Now on his way to Jerusalem, Jesus traveled along the border between Samaria and Galilee. As he was going into a village, […]” (Luke 17:11-12a NIV)
The path Jesus took was along the border area between Samaria and Galilee. It was a territory of hostility, divide, and antagonism. One side was Galilee, inhabited by Jews, and the other side was Samaria, inhabited by Samaritans.
As He was passing through this border region, Jesus happened to enter a village. Ten lepers were living there. The lepers could not live in the village they originally belonged to. They were not allowed to enter it until their skin disease was healed. So they were forced to live in a village on the outskirts.
That village was probably a place where Jewish lepers from Galilee and Samaritan lepers who were expelled from Samaria gathered. They probably shared a sense of belonging and created a new community there, after being expelled from their home villages. Their identity no longer came from being a Jew or a Samaritan. Their sense of belonging came from being lepers—people suffering from the same disease, living in a village for lepers.
When they saw Jesus come into the village, they cried out loudly from a distance:
“They stood at a distance and called out in a loud voice, ‘Jesus, Master, have pity on us!’” (Luke 17:12b-13 NIV)
They refer to themselves as “us.” It does not matter how many are Jewish or Samaritan among them. They are just “us”—we who are suffering from leprosy.
At that moment, Jesus responds to their cry:
“When he saw them, he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Luke 17:14a NIV)
Jesus did not heal them on the spot. He required faith from them. He told them to go and show themselves to the priests.
The ten obeyed Jesus. They showed Him faith. And they were healed on their way to the priests.
“And as they went, they were cleansed.” (Luke 17:14b NIV)
But the Bible records that one of them, who was a Samaritan, returned to Jesus.
So what happened to the other nine?
We often look down on the nine who did not return to Jesus, saying they lacked faith, but actually they showed great faith and obeyed Jesus’ words.
Jesus clearly instructed them,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That was His command, and they did just that. Their obedience led to their miracle and healing.
Now, where did they go after that?
According to the law in Leviticus 14, they were supposed to return to the boundary of their hometowns and first show themselves to the local priests. Only after these priests confirmed that they were clean could they go to the gate of the tabernacle where they had to show themselves again to the priests there and offer sacrifices. This meant a Jewish leper would be reintegrated into his/her community by going to Jerusalem and offering sacrifices there.
Think about it. When those ten lepers heard Jesus’ command, where would they have headed first? Most likely, they would have raced toward their own villages, where their families, neighbors, and loved ones lived.
They would have realized their bodies had been healed as they were heading home with faith in Jesus’ words. With renewed strength, they would have raced back to their villages. Their only hope was to return to the place where they belonged.
The Jewish leper would have gone back to his village and the Samaritan leper to his. The Samaritans had no reason to go to Jerusalem, since they had their own place of worship on Mount Gerizim. They would have shown themselves to the priests there to rejoin their community.
Now let’s picture this process. Ten lepers who had been driven out of their villages were living together and comforting one another. For them, there was no difference between Jews and Samaritans. They were a community afflicted by the same disease.
But once they were healed, each of them headed back to their original homes—Samaritans to Samaria, Galileans to Galilee. They will now treat each other with hostility. They will rejoin their previous hometowns and live as a member of that community.
For them, being cleansed and healed simply meant returning to their normal lives—that is, regaining their former place of belonging.
They will become somebody’s son/daughter, a Jew, or a Samaritan. They will return to their old positions. They will belong to their old communities once again. Their identities will be restored as a Jew or a Samaritan.
But there was one man. One of the ten, whom the Bible explicitly says was a Samaritan, was different. He, like the other nine lepers, was on his way home. He discovered he had been healed on his way home. Immediately he turns back. He returns to Jesus, his Healer.
Nobody ordered him to do this. It wasn’t Jesus’ command, either. With his healed body, he simply came back to Jesus and fell at His feet. And he gave glory to God.
He returned to Jesus and became a man who belonged to Jesus.
At this point, I am reminded of John 4.
It is the story about the Samaritan woman. When Jesus meets her, He asks for a drink. The woman, taken aback, asks back, “How is it that you, a Jew, ask for a drink from me, a Samaritan woman?” Then she asks Jesus a question:
“Our ancestors worshiped on this mountain, but you Jews claim that the place where we must worship is in Jerusalem.” (John 4:20 NIV)
She compares her people worshiping on Mount Gerizim with the Jews worshiping in Jerusalem. Jesus answers:
“‘Woman,’ Jesus replied, ‘believe me, a time is coming when you will worship the Father neither on this mountain nor in Jerusalem. Yet a time is coming and has now come when the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the Spirit and in truth, for they are the kind of worshipers the Father seeks.’” (John 4:21, 23 NIV)
This remarkable teaching is shown in today’s passage. The Bible does not specify how many of the ten lepers were Jews or Samaritans.
However, some of them went to Jerusalem with their healed bodies, while others headed to Mount Gerizim with their healed bodies. They would have regained normalcy, their families, and all that they had enjoyed in the past, living in the communities they had belonged to.
But one was different. He did not go back to that place. He didn’t go to Mount Gerizim or to Jerusalem. He returned to the true object of worship—Christ Himself. At Jesus’ feet, he fell on his knees and worshiped. In that moment, he became a true worshiper.
He neither belonged to Jerusalem nor to Mount Gerizim. He belonged to Jesus.
Let’s listen carefully again to what Jesus said:
“Go, show yourselves to the priests.” (Luke 17:14 NIV)
Yet one Samaritan came back to Jesus and showed his healed body to Jesus. He offered his body to the true Priest, Jesus, and gave glory to God. He became a true worshiper.
In pastoral ministry, I often pray for healing, for deliverance from crises, and for restoration of business. Yet, I sometimes ask myself these questions:
For what do we want healing? What will be different when we are healed? Why do we want restoration? What will change when we are restored? For what do we want success? What will change when we have success?
After we are healed, we will return to our former lives, right? We will regain our old identity and sense of belonging and will be able to work again, right? Then is that the purpose of our healing? Is that the purpose of our restoration?
The Lord asks us, “If I heal you, where will you go? Where will you belong? Where do you want to return after your recovery?”
Some will return to their families. Some will return to their work or business. Others might return to the proud, arrogant position they held before.
Nine out of the ten lepers who lived in the same village returned to their previous lives before they were sick. They went back to their old lives. That was all. But one leper did not go back to his old life; instead, he lived a new life. He was reborn as a new person. He was resurrected with a new identity.
The Lord asks:
“Were not all ten cleansed? Where are the other nine? Has no one returned to give praise to God except this foreigner?” (Luke 17:17-18 NIV)
The Lord sorrowfully asks why the nine just went back to their empty, ordinary lives. He asks with sadness why they wished to merely regain their old way of life, even after receiving so much grace.
Where did the nine go? From the world’s perspective, they headed in the right direction. But our Lord feels a deep sadness for those who are satisfied to return to their old lives, even after receiving grace and healing.
Let us listen carefully to the gentle and longing words of our Lord who seeks true worshipers. And let us go to Him. As those who have received grace, may we kneel before Jesus as true worshipers and give glory to God.
누가복음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소속과 정체성’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특별한 본문인 “깨끗함을 받은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는 ‘감사’의 주제로 많이 다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10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는데,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은혜를 입은 자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말씀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감사의 주제는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오늘의 본문을 감사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본문이 숨겨 두고 있는 또 다른 주제인 ‘소속과 정체성’에 대한 관점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디에 속해 있는가?’라는 주제는 때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때로는 나의 정체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큰 이득이나 힘이 되기도 합니다. 반대로 때로는 나에게 큰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나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태생적으로나 삶의 여정을 통해서 어디엔가 소속이 되고, 그 안에서 정체성을 얻고 살아갑니다. 이 소속과의 정체성의 관점에서 오늘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1)
이 한 절에 세 장소의 명칭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갈릴리 그리고 사마리아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 지점을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잇길을 가고 계셨을까요? 이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 즉 갈릴리 사람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있던 적대감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오래된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다윗, 솔로몬 시대에는 같은 민족이었습니다. 이후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했습니다. 그때부터 둘은 형제이면서도 적국과 같이 경쟁하는 나라가 됩니다. 남왕국 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이 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가 됩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분열한 채로 도중에 전쟁과 여러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적대감이 더욱 고조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후, 앗수르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한 하나의 정책을 폈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부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다른 지역에 있던 백성들을 사마리아 지역으로 오게 해서 그들이 함께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마리아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민족과 섞여 자기 민족의 혈통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혈통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던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남유다에 살던 백성들은 이렇게 된 사마리아인들을 동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들을 경멸하기까지 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사건들이 또 이어졌습니다. 남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의 시기를 거치고 돌아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지으려 하는 유다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땅인 그리심산에 성전을 따로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이후 결국 유다는 그리심산에 있는 성전을 공격하고 파훼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인종적, 종교적인 차이가 쌓여 가면서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극한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서로 적대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두 지역 사이로 지나가십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누가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이어서 공적 사역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이 내용이 누가복음 3장에서 9장까지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이 속에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자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으로 가실 것을 결정하시고 방향을 바꾸십니다. 이제 수난과 영광을 받으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트십니다. 처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그곳을 가시려는 시도를 하십니다. 하지만 사마리아는 다른 유대인들에게도 그랬듯이 예수님에게도 그 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눅 9:51~56)
예수님은 이제 사마리아를 직접 통과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 지역을 따라 이동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도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의 경계를 따라가시다가 요단 동편으로 넘어가서 밑으로 내려오시고, 다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시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이 과정을 누가복음 9~19장이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위에 갈릴리 아래 사마리아 지역이 있고, 사마리아 아래에 유대 지역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 지역을 타고 이동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요단강 동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여리고로 들어간 후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도 이와 같은 길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내용을 이해하고 다시 오늘 본문의 첫 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눅 17:11~12a)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던 길은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서로 배척하고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땅들의 경계선이었습니다. 한쪽 마을은 갈릴리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반대편 마을은 사마리아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으로 소속과 정체성을 잃었지만, 믿음을 보인 이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마을은 나병 환자들만 살고 있던 마을로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서 나병 환자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쫓겨나서 변방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 환자들이 10명이나 그 마을에 살고 있었으니, 그 마을은 나병 환자 촌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도 갈릴리 지역에서 살다가 나병 환자가 된 이들이 그 경계선으로 나왔겠죠. 또한 사마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쫓겨난 나병 환자들도 그 경계선으로 몰려나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어울려서 살고 있던 마을이 예수님께서 지금 당도하신 마을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소속되어 살던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갈릴리에서 쫓겨났고, 또 어떤 이들은 사마리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함께 만나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고 새로운 소속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더 이상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정체성은 나병 환자입니다.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종 치료를 위해 병원에서 병을 진단받고 ‘이런 병도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나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희귀병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마을에 살고 있는 이들도 아마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피부병을 겪게 되었는데,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지금 그곳에서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본 그들은 멀리 서서 이렇게 외칩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2b~13)
그들은 스스로를 ‘우리’라고 부릅니다. 몇 명의 유대인이 그곳에 있었는지, 몇 명의 사마리아인이 그곳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입니다. 함께 병을 앓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반응하시죠.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눅 17:14a)
예수님은 그들을 그 자리에서 직접 고쳐 주지는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먼저 제사장을 향하여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몸의 변화는 없습니다. 아직 고쳐진 바가 없습니다. 아직도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믿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런데 열 사람 모두 말씀에 순종하며 제사장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성경이 전하는 이야기죠. 실은 대단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명이 모두 그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매우 놀랍기도 합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였고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가던 중에 그들은 각각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4b)
<깨끗함을 받은 이들은 그 길로 자신이 되찾기를 바라는 소속이 있는 곳을 향해 갔습니다.>
그렇게 가던 중에 나음을 입은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왔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종종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사람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폄하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은 이미 대단한 믿음을 보여 준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네 몸을 보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었으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치유와 기적을 지금 경험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레위기 14장을 보면 이 나병 환자들에 대한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나병을 앓던 사람이 고침을 받은 후에 어떻게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에 몸이 깨끗하여지면 그들은 각자 살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고향의 경계에서 제사장이 그의 몸이 깨끗해졌는지를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우슬초와 홍색실을 가지고 새 한 마리의 피를 그에게 7번 뿌리는 정결 예식을 거행합니다. 또한 옷을 빨고 털을 모두 밀고 몸을 씻는 의식을 합니다. 그리고 7일을 기다린 후, 8일째 되는 날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성전 회막 문 앞에서 속건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를 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경우에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 제사를 드리고서 다시 유대인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을까요? 모두 다 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이 살았던 고향을 향하여 열심히 갔을 것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 가족들과 정겨운 이웃들이 살고 있는 그곳을 향해 각자 달려가고 있었겠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던 중에 그들은 몸이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욱 힘을 내어서 아마 자신의 마을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그들이 살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 나병 환자는 자신의 살던 마을로 갔을 것이고, 사마리아인은 또 자신이 살던 그 마을로 돌아갔겠죠.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예배의 장소였던 그리심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제사를 드리고 자신의 공동체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그림으로 한번 마음에 그려 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마을에서 쫓겨나 서로 위로하며 한 마을에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들은 깨끗해진 몸을 얻자 각자의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로, 갈릴리 사람은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 서로를 적대하는 곳으로 소속됩니다. 자신의 마을에 한 구성원이 되어 다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들에게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에게 병이 낫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상으로의 회복,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입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과거의 자리 그대로 유대인 또는 사마리아인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 다시 소속됩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다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됩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실은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었든, 유대인이었든 그것은 그다지 이 이야기 속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이 중요한 주제가 될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그가 누구이든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열 명의 나병 환자와 같이 집으로 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을로 향하다가 자신이 깨끗하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그는 길을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낫게 해 주신 예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깨끗해진 몸으로 예수님께 나와 엎드립니다. 그리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렇게 그는 예수께 돌아왔고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한 사람은 주님의 치유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놀라운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특별히 요한복음 4장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 사마리아의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라고 물었죠. 그리고 그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0)
그리심산에서 예배하고 있는 자신들과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비교하면서 드렸던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 21, 23)
이 놀라운 말씀이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 중에서 몇 사람이 유대인이었는지, 또 몇 사람이 사마리아에 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깨끗하여진 몸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고, 또 일부는 깨끗하여진 몸으로 그리심산 성전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일상과 가정을 회복하고 제사를 드리며 자신의 모든 것들을 회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고, 그리심산으로도 가지 않습니다. 그는 참으로 예배해야 할 대상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엎드립니다. 한마디로 예배한 것입니다. 그곳에서 참된 예배자가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속한 사람도 아니요, 그리심에 속한 사람도 아닌, 예수께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가 예수님께 엎드리며 감사를 전했다고 하는 본문 속에 나오는 ‘감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유카리스톤’(εὐχαριστῶν)이라는 단어입니다. ‘유카리스테오’(εὐχαριστέω)라는 ‘감사를 드리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단어에서 ‘유카리스트’(Eucharist, 성찬)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라는 이 단어 속에는 ‘성찬’이라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개념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깊이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눅 17:14, 새번역)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깨끗해진 몸을 보여드렸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각 지역마다 제사장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큼 진정한 제사장이 있었을까요? 예수님이야말로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 아니셨습니까? 예수님이 대제사장 아니십니까? 돌아온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나와서 그분께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보여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사람, 진정한 예배자가 된 것입니다.
목회하면서 받는 기도 요청이 종종 있고, 또 요청하지 않으셔도 제가 기도해야 할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병에서 나음을 얻기 위해서, 위기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 또 사업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서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낫기 원하는가? 나으면 무엇이 달라지나?’ 또 ‘무엇을 위해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가? 회복되면 무엇이 달라지나?’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성공하기를 위해 기도하는가? 성공하면 무엇이 달라지나?’ 이런 질문을 던져 볼 때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연예인이 만든 유행어 중에, 사람들이 많이 사용했던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돈 벌면 뭐 하겠나 소고기 사 먹겠지.” 그 말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병 나으면 뭐 하겠나 과거로 돌아가겠지. 소속된 곳의 정체성을 다시 찾을 뿐이지.” 그것이 회복의 목적일까요? 주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를 회복시킨다면, 너희는 어디에 속할 것이냐? 너희가 회복하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냐?” 어떤 이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지요. 어떤 이는 하던 사업의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또 어떤 이는 다시 거들먹거리는 교만한 자리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마을에 살고 있던 나병 환자 아홉은 병 들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눅 17:17~18)
왜 허무한 인생, 허무한 일상으로 그저 돌아가 버렸냐고 물으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말씀입니다.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세상적으로 본다면 마땅한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은혜와 나음을 얻고도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 예배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애틋한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혜 입은 자답게 참된 예배자로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홉은 어디에 갔을까” (눅17:11~19)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91, 317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간절히 기도한 일이 이루어졌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인가요?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라고 시작합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역사적, 인종적, 종교적 차이로 인한 깊은 적대감이 있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멸망 후 사마리아인들은 다른 민족과 혼혈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 지역을 따라 이동하셨습니다. 그 경계의 한 마을에 열 명의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갈릴리에서 쫓겨난 유대인과 사마리아에서 쫓겨난 환자들이 함께 살던 공동체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이제 유대인도 사마리아인도 아닌,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고, 열 명 모두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대단한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가던 중에 깨끗함을 받았고,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로 갔을까요? 율법에 따라 각자의 고향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공동체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으로, 사마리아인은 그리심산으로 갔겠지요. 그들에게 깨끗해진 것은 그저 일상으로의 회복, 이전 소속으로의 회귀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 돌아와 엎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은 그리심산으로도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고 참으로 예배해야 할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참된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홉은 병들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지만, 한 사람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답게, 참된 예배자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참된 예배자로 주님께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나누고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심을 감사합니다. 부르짖는 간절함도 있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믿음도 있어서, 주님께서 내려 주시는 큰 기적을 경험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다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아홉은 나음을 얻은 후에 옛 생활로 돌 아가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치유가 그저 옛 생활의 회복이 될 뿐이었습니다. 그저 과거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의 회귀가 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치유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놀라운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도 이처럼 새로운 존재가 되길 원합니다. 참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