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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 13 ~ 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어린아이의 인권이 보호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5월 첫 번째 날이자 첫째 주일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5월 첫째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가정마다 어린아이가 있다는 것은 희망이고 축복입니다. 교회에서 어린 세대들이 나고 자라는 일 또한 희망이고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 속에 가정의 미래가 있고, 교회의 미래가 있고, 국가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어린이들이 주인공으로 세워지는 기회가 많죠. 가정마다 한 자녀를 둔 경우들이 많다 보니 어린아이들이 공주처럼, 왕자처럼 사랑과 귀염을 받고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이 처음 시작되었던 1922년만 하더라도 어린이는 사회에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애들’ 또는 ‘어린 것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존중받지 못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농사와 공장에서 값싼 노동력으로 치부되기 일쑤였습니다. 당연히 교육받지 못한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이러한 상황은 성경 속 시대와도 비슷합니다. 로마 시대에는 자녀들이 부모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심지어 원치 않는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일도 흔했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로 태어나면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지기에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른의 소유물이면서 동시에 힘도 없고 불완전한 존재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수를 셀 때에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이 모이는 곳에 아이들은 함부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데에는 수천 년의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떤 사회학자는 19세기가 여성을 발견한 시대라면, 20세기는 어린이의 발견시대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어린아이의 지위가 제대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물론 세계 어느 지역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계산되고 있고,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우리에겐 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본다면 당연하듯 보이는 일이지만, 말씀드린 대로 이천 년 전 상황을 상상하신다면 당시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파격적이었을지,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을지 짐작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고 제자들끼리 ‘누가 큰 자인가’ 다투는 장면에서부터 흐름이 이어집니다. 누가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누가 예수님 옆에 있을 수 있는지 논쟁하는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이 함께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마가복음 10장만 본다면 가정 안에서 약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문제와 관련하여서, 그리고 어린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고 있죠.
<성경 속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어린아이를 향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조금 넓은 관점에서 본문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십니다. 그곳에서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셨고 환상을 경험하시죠. 영적인 깊은 체험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 곁에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함께합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놀라운 시간이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모든 제자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지는 않으셨습니다. 남겨 두고 간 제자, 산 아래에 두고 간 제자들은 예수님이 내려오시자 어려운 국면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귀신들린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그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일이 이렇게 진행되고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시는데, 자연스럽게 제자들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생겨납니다. 산 위에 올라간 제자들은 놀라운 영적 경험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남겨진 제자들은 귀신 하나 제대로 쫓아내지 못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누가 더 큰 자인가, 누가 더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제자들인가, 누가 더 수제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 한 명을 데리고 오십니다. 그 아이를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그를 안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요한이 말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금하였습니다.” 참 아이러니 아닙니까? 예수님을 바짝 따르던 제자들, 그중의 세 명은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도 올랐는데 예수님을 따르지 않던 사람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금하였다고 말하죠. 이야기를 들으신 주님께서 “금하지 말라”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다. 누구든지 이 작은 자들 중에서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장면이 바뀝니다. 장소도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여전히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누군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축복을 받길 원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이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아니, 어떻게 너희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느냐?” 이런 의미였겠죠. 마음 한편에는 ‘어린아이가 있을 자리는 없다. 우리가 있을 자리도 마땅치 않은데 너희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따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께서 ‘노하셨다’, ‘분내셨다’, ‘화를 내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 중)
예수님께서는 어른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기쁘게 맞아 주셨고, 그 아이들을 만지시며 안수하여 주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고 누가 예수님 옆에 앉을 수 있는지에 대한 크고 작은 논쟁이 불거지는 와중에 예수님은 정작 어린아이를 가까이에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어른만을 완성된 존재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어린아이는 육체적으로 아직 자라지 못하였고 정신적으로도 성장해야 하지만 주님은 어린아이를 부족한 인간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어른과 마찬가지로 맞아 주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에게 어린아이와 어른은 차이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찾아온 어린아이를 향하여 “조금 더 커서 와라.” 혹은 “지혜를 더 얻어서 와라. 더 많이 배워서 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인간 중에서 어느 누구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사람은 주님을 즉시 만날 수 있고 만날 자격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환영해 주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주님을 찾을 때에 주님은 그를 환영하시고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환영하시며 반기셨고 그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도 주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라고 표현된 무리입니다. 예수님께로 아이를 데리고 나온 사람들이지요.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막 10:13~14 중)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린아이들이 아빠 손에 이끌려서 주님께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범상치 않은 예수님의 손을 만져 보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복을 구하며 예수님을 찾아갔을 겁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께서는 맞아 주시며 안아 주셨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오기에 부족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도 환영하시며 기쁘게 맞아 주십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과 결단으로는 부족하지만 엄마아빠의 믿음을 통해 주님께로 나아오면 주님은 그 아이들도 맞아 주시고 안아 주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유아 세례 예식을 거행합니다. 유아 세례야말로 주님께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축복을 누리게 하는 자리입니다. 어린이 주일, 우리가 한 가지 결단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우리 가정의 아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데리고 나올 때 주님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 한 명 한 명을 안아 주시고 안수하여 주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6)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받아 주시고 영접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얼마나 귀한지를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막 9:37)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며 영접하는 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고 그 아이를 잘 돌보는 일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 가정에 주님을 보내 주셨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어 보입니다. 어린아이가 변형된 주님의 모습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될까요? 그럼에도 주님은 어린아이를 섬길 때 그를 보내신 주님을 영접하며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막 10:14~15 중)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지요. 아이들은 배우는 존재이고 어른들은 가르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이 아이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섬기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신비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죠. 우리에게 아이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길의 모델이요, 교사입니다. 전적인 신뢰, 순수함, 진실함, 그리고 마음껏 뛰노는 모습 속에서 어른들은 하나님 앞에서 뛰어노는 신앙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보내면서 ‘어린이들이 어떤 존재인가?’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봅니다.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받아들여진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이들을 선생님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은 복된 날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주님을 만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주님께로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아이를 섬기고 영접함으로써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주님 섬기는 법을 또한 가르쳐 주십니다. 전적인 신뢰, 순수함, 진실함, 그리고 놀이의 깊은 차원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어린아이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법을 가르쳐 주는 멋진 교사입니다. 우리에게 귀한 어린아이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5월 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3-1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563장, 57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10:13-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어린이가 있다는 것은 희망이고 축복입니다. 교회에도 어린자녀세대가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 속에 가정과 교회 그리고 국가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어린이날이 시작되었단 1922년만 하더라도 어린이들은 한 사회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성경 속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로마에서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이었습니다. 힘없고 불완전한 존재, 그래서 수를 셀 때에도 포함되지 못하고 어른들이 모이는 곳에 함부로 참여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어린이였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시고 제자들이 누가 더 큰지에 대해서 논쟁하는 말씀, 그리고 누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주제들과 더불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기쁘게 맞아 주셨고, 그 아이들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분명 제자도의 주제와 맥락 속에 들어있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누가 주님께 나올 수 있으며,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에게 나중에 더 커서 오라고 하십니까? 아직도 부족하고 모자라니 더 완성된 뒤에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며, 즉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어린아이라도 환영하시고 그들을 품어주시며 축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온 사람들, 즉 부모들입니다. 우리가 부모라면 꼭 결단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가정에 있는 어린이들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받아주시고 축복해주실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37절)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 가정에 주님을 보내어 주셨다는 의미이고, 주님을 섬기듯이 어린아이를 섬길 것을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어른들이 어린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 오염되지 않은 삶의 순수함과 진실함,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즐겁게 놀고 기뻐하는 모습 등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배워야 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나누기
1. 우리 가정에도 어린이가 있나요? (자녀, 손주, 조카 등/교회학교 학생도 포함) 그들을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 어린이들을 위한 기도의 제목들을 나누어 봅시다.
2. 내가 어린이에게 배워야할 삶의 자세가 있다면 특별히 어떤 부분입니까? (예, 전적신뢰의 태도, 순수함과 진실함, 유희적이고 창의적인 삶의 자세 등)
마무리기도
우리에게 어린아이들을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를 영접함이 곧 나를 영접함이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묵상하며, 우리에게 주신 아이들을 주님 섬기듯 정성으로 보살피게 하시고 배우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축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