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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심하라

마가복음 6: 45 ~ 52

김경진 목사

2020.02.02

<질병 앞에 무력한 인간의 실존을 마주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47년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해안에 위치한 조용한 도시, 오랑이라 불리는 곳에 전염병 페스트가 번져가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간의 군상을 다룬 작품입니다. 거리로 나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쥐 떼를 보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그것이 페스트의 시작이었습니다. 페스트가 오랑 시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한 의사가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 그것이 서양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페스트』 본문은 최윤주 역본(열린책들, 2014)에서 가져왔습니다.
(최윤주 역, 『페스트』, 61쪽) 사라졌다고 믿었던 페스트가 온 동네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는 대혼란에 빠집니다. 결국 정부 당국이 페스트 발병을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안심하라’인데, 불안을 부추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최근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우한시 출입이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소설의 한 대목이 생각났습니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한 리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미지의 인물이지만, 끝까지 페스트와 싸우며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고 노력한 타루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축배를 들던 무렵, 그는 작은 실수로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또 전염병의 재앙을 신이 내린 형벌로 생각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설교하는 신부 파늘루도 있습니다. 우연히 오랑시에 체류하다 도시 봉쇄로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곳 출신도 아니고 이 도시와 무관하다며 계속 항변하면서 문제를 회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페스트로 감염된 오랑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도 함께 오랑시 시민이 되어 페스트와 싸우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은 나름의 입장을 가지며 여러 생각을 대변해 줍니다. 무신론적 성자라고 평가받는 까뮈이기에, 본 작품에서도 그는 유신론적 입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페스트가 오랑시에 퍼졌을 때 그에 대응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합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페스트와 싸우려고 결정합니다. 신부 파늘루는 오랑시에 임한 페스트 재앙을 오만하고 사악하고 눈먼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 페스트를 통해 사악한 자들을 징벌하려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가 하는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이 페스트와 무관하지 않다면 그것은 반성할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악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 당연합니다…그렇습니다. 반성할 시간이 왔습니다…형제 여러분, 선과 악, 분노와 연민, 페스트와 구원을 만물 속에 마련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바로 이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협하는 바로 이 재앙이 여러분을 드높이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153-159쪽)”
그런데 페스트는 파늘루 신부가 선포한 말씀처럼 신이 제시한 반성의 기회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신부 파늘루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듯이 까뮈는 예심판사인 오통의 어린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리외와 동료 의사 카스텔이 만든 새로운 혈청을 오통의 아들에게 투여하지만, 아이는 도리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자는 ‘어린아이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악의 결과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신부 파늘루도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죠.”(354쪽) 우리 같은 신앙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말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공허한 소리처럼, 또 독백처럼 들리는 울림일 뿐입니다.
소설의 중심에는 의사 리외와 타루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 세상을 저는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354쪽) 라고 말하며, 페스트와 격렬히 싸우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해 그날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며 저항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편 오랑 시에 잠시 들렸다가 갇히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의 관점은 우리의 모습을 참 많이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오랑시 사람이 아니므로 자신과 이 일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는 그에게 페스트가 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나는 전혀 상관없지.’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을 대변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랑시의 한 시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도 페스트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실존적 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 작품의 전면에는 의사 리외와 타루, 랑베르, 익명의 인간들의 영웅적인 투쟁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허탈한 결말, 또 허무한 내용이 공존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작 페스트를 물러가게 한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온’입니다. 맹렬하던 추위가 주춤해지면서 페스트가 힘을 잃어 갑니다. 그렇게 페스트가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도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설교하던 신부 파늘루도, 인간의 힘으로 저항하며 어떻게든 이겨내려 노력한 타루도, 죄 없는 어린아이도, 결국 페스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를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것, 잠에서 깨면 사라지고 마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재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악몽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사람들(이다.”(64쪽) 끊임없는 재앙 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라는 서글픈 독백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페스트가 물러가고, 오랑시는 기쁨의 축제를 벌입니다. 오랑시의 문이 열리고 환호하는 시민들이 나타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의사 리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참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 (508쪽)
페스트를 읽으실 분들이 많을 텐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조금 길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즘 우한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보며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동안 숨어 있던 페스트균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즘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소독하고, 질병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신앙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러한 때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신부 파늘루의 입장도 많이 공감됩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말입니다. 재난을 만날 때마다, 또는 질병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유신론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입장이 재난이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마가복음 6장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풍랑’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풍랑’이란 단어를 페스트라는 전염병과 연결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점점 더 알려지고 유명해지시던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들로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놀라며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 벳세다로 가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리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홀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날은 저물었고 바람이 거세게 붑니다.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14:24 중) 큰 풍랑이 일어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요? 왜 하필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후에 풍랑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요? 분명히 제자들은 흥분된 채로 배에 올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자신들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로운 능력을 경험하고는 용기를 얻에 배에 올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배를 띄워 바다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절로 힘이 났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벳세다라는 목표 지점도 있었습니다. 바다가 그리 크지 아니하니 얼마든지 쉽게 건너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이 지나도록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바람이 그들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바다는 늘 그렇습니다. 마치 페스트균 같습니다. 마치 페스트균이 옷장에 숨어 있던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바닷속에도 거센 풍랑이 숨어 있습니다. 풍랑은 때로 인간을 삼킬 듯이 급하게 달려듭니다. 바다는 어떤 날은 평온해 보이지만, 어떤 날은 맹렬합니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항해를 떠나지만, 늘 그렇게 바다가 평온한 건 아닙니다. 숨어 있던 맹렬함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성이 나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기세입니다.
사실 이 풍랑의 공격이 이미 첫 번째 공격이 아니었음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큰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이 죽을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바다가 평온해졌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정복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마치 페스트균이 정복된 것처럼 온전한 바다가 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을 지나 5장을 넘어 6장이 되었을 때, 또다시 바다는 성을 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바람 앞에 힘껏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밤새 한 일은 바람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바람이 무슨 연고인가?’ 때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람이 일어났는가?’ 바람의 이유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나가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난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만나는 풍랑은 이유가 없을 때도, 또 이유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 풍랑을 이기기 위해 힘껏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풍랑이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사나운 바람으로 죄 없는 아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풍랑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아이가 페스트에 희생되었듯이, 신부 파늘루가 페스트의 희생양이 되었듯이, 누구든지 풍랑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배에 탔는가가 상관없을 만큼 큰 풍랑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풍랑에 휩쓸리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두 곳에서 대조적으로 다룹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4장과 6장입니다. 먼저 마가복음 4장 35~39절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4:35~39)

오늘 본문인 6장의 내용과 유사점도 많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과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습니다. 먼저 두 본문에서 똑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날이 저물 즈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어 차이점으로는, 마가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지 않으셨는데, 마가복음 4장에서는 함께 타셨습니다. 두 번째로 밤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4장에서는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반면 6장에서는 예수님이 배에 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힘을 내 강풍을 이겨내려고 노력합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6장에서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고생하는 모습이 포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멀리 계시다고 생각했기에, 제자들이 기도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자신들의 힘으로 버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풍랑 앞에 선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둘 다 제자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오늘 본문에 소개됩니다. 바로 풍랑과 싸우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답이겠습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으니, 하나의 관점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풍랑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치 『페스트』에서 리외와 타루가 그랬던 것처럼 문제를 직면하고 최선을 다해 저항합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어느 순간 풍랑이 잠잠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최선을 다해 버틴 것입니다. 풍랑을 압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풍랑이 잦아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한 일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셨다’라는 것입니다. 멀리 계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을 보셨겠습니까? 망원경으로 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밤 사경쯤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나아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만 의지하며 안심합시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큰 풍랑으로 요동치던 캄캄한 밤입니다. 빛도 없는 그 밤, 흉흉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천천히 걸어오셨을까요? ‘바람에 옷을 휘날리며 제자들에게 달려오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습이 큰 은혜가 됩니다. 주님께서 달려오시며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에게는 바다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디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달려오시는 예수님, 바다를 마른 땅처럼 밟고 오시는 예수님,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실 때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법합니다. 그동안 그런 일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랑 속에서 힘 있게 노를 저으며, 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기억해야 했을 것입니다. 바로 능력이 충만하신 예수님, 그분을 말입니다. 바로 그날 낮에 예수께서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어도 좋습니다. 풍랑을 막으며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예수님이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꼬집습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복음 6:51~5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걱정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질병이 속히 사라지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신부 파늘루의 오류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병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질병에 맞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힘겨운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고 있을 때 바다를 가르며 달려오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달려오시는 그분은 기적을 베푸시며, 오천 명을 먹이시며, 오늘 말씀 이후의 사건처럼 병자들을 고치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가운데는 페스트도 있고, 풍랑도 있습니다. 그 풍랑은 늘 바다에 잠재되어 있고, 페스트도 장롱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질병을 견디면 또 다른 질병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싸울 것이고, 기도도 할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편입니다.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삶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주님, 영생하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참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안심하라.”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로, 치열한 삶의 자리로, 병마와 싸우는 저항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며, 폭풍을 장애로 여기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해 달려올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Take Courage!

Mark 6:45-52

The current situation surrounding the spread of a novel coronavirus (2019-nCoV) that started in Wuhan, China reminds me of Camus’ novel of 1947, The Plague. This existential novel depicts how man responds to a deathly plague that sweeps the quiet town of Oran.

The novel’s diverse characters reflect some of our own thoughts and responses today regarding the Wuhan coronavirus. Dr. Rieux and Jean Tarrou, the two main protagonists, work to combat the plague by faithfully carrying out their roles. Raymond Rambert, a visiting journalist who gets trapped in Oran, thinks that the plague should not and cannot affect him because he is not from the town. Religious leaders also respond to the disaster in their own ways, including a week of prayer. Father Paneloux believes that the plague is God’s punishment against the evil and the blind of Oran.

Many of us are scared because of the recent outbreak. We are doing everything we can to protect ourselves from the disease, by wearing masks and so on. But as Christians, how should we interpret this crisis and what must we do? In answering this question, I want to share with you chapter 6 of Mark. An important theme of this passage is “storm.”

Prior to today’s passage, Jesus performed a miracle by feeding five thousand people. Then He ordered the excited disciples to go ahead of Him to Bethsaida. But later that night, while Jesus was on land, the disciples strained at the oars because the wind was against them.

The sea can be fierce—like the plague. A seemingly calm sea may hold a fierce storm within, just as a plague’s virus may lie hiding in a closet. Sometimes a storm at sea can devour men. The disciples fought the storm. This was all they could do. We may ask, ‘Why did this storm come?’ But not all storms have a cause.

There was a reason to the Great Flood in Noah’s age. But, sometimes, there is no clear cause for a storm. The disciples met such a storm and worked hard to overcome it. Sometimes, storms don’t go away by prayer. We may lose a child to a storm even after praying. We cannot say that all disasters are God’s punishment. Jonah was to blame for the storm that befell him. But, sometimes, there is no one to blame for a storm.

A closer look at the Bible reveals that there are two contrasting stories about the disciples meeting a storm. In Mark chapter 4 the disciples meet a storm, too:

“That day when evening came, he said to his disciples, ‘Let us go over to the other side.’ Leaving the crowd behind, they took him along, just as he was, in the boat. There were also other boats with him. A furious squall came up, and the waves broke over the boat, so that it was nearly swamped. Jesus was in the stern, sleeping on a cushion. The disciples woke him and said to him, ‘Teacher, don’t you care if we drown?’ He got up, rebuked the wind and said to the waves, ‘Quiet! Be still!’ Then the wind died down and it was completely calm.” (Mark 4: 35-39)

The passage above has many interesting similarities with today’s passage of chapter 6. First, Jesus told His disciples to go over to the other side when evening came. Of course, the difference is that in chapter 6 Jesus was not on the boat with them, while in chapter 4 He was. Second, the disciples met a fierce storm. In chapter 4 Jesus is sound asleep on the boat, and the disciples have to wake Him. But in today’s passage He is not on the boat with them, which is why they must exert their own efforts to fight the storm. In chapter 4, they ask Him for help, but in chapter 6 they do not cry out to Jesus or pray. It seems they gave up praying because they thought Jesus was far away. That is why they tried to overcome the storm themselves.

As such, the Bible introduces two contrasting scenes of the disciples in a storm. In one scene they wake Jesus, while in the other they fight hard against the waves themselves. Which response is the right one? Since the Bible tells us of both ways, there is no need to insist on one.

In this sense, today’s scripture is extremely meaningful. The disciples fought against the storm—just as Dr. Rieux and Jean Tarrou did in The Plague. It wasn’t easy, but they resisted the storm as best they could because they knew it could die down at some point. This is what the disciples did.

Interestingly, Jesus “saw” them straining at the oars. He “saw” them fighting the storm from afar. Seeing them, He walked on water across the crashing waves and said, “Take courage! It is I. Don’t be afraid.” (Mark 6:50) Our Lord crossed raging waters to help His disciples. He walked on water like dry land to go to them.

The Bible says that the disciples were scared because they thought Jesus was a ghost. This is understandable. Still, they should not have forgotten this one thing as they strained at the oars: Jesus had fed five thousand people that very afternoon. They should have remembered that Jesus was a Lord who performed miracles. That is why the Bible points out, “Then he climbed into the boat with them, and the wind died down. They were completely amazed, for they had not understood about the loaves; their hearts were hardened.” (Mark 6: 51-52)

Today, we have come to worship the Lord, but we are still anxious about the spread of the Wuhan coronavirus. I hope that this epidemic will end soon. Debating whether the outbreak is God’s punishment or not may be making the same mistake as that of Father Paneloux in The Plague.

However, we can still pray to God about this crisis and disease. And we can fight against it. It may be a hard battle. But just as Jesus walked on water and rushed to the disciples when He saw them straining at the oars, He will do the same for us. He has His eyes on us and will run toward us when we need Him. Remember that Our Help is One who is capable of miracles, feeding the five thousand, and healing the sick.

Plagues may come, and storms may rise up against us. Storms are always lying under the sea, and plagues are hiding in our closets. When we overcome this disease, another will come. But, each time, we will fight them to the end. And, we will pray. We may not understand why outbreaks happen. It may seem unfair. But Our Lord is on our side.

He says, “Take courage!” Jesus did not speak these words, assuming that He would live only this life on earth. Our Everlasting Lord with an everlasting life spoke these words: “Take courage!” So, we are comforted by them whether dead or alive.

Dear Church, let’s hold on to these words as we read His Word, pray, go back to our daily struggles, and fight. Our Lord has His eyes on us and runs to us across the storm. So, “Take cour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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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6: 45 ~ 52

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질병 앞에 무력한 인간의 실존을 마주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947년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해안에 위치한 조용한 도시, 오랑이라 불리는 곳에 전염병 페스트가 번져가면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간의 군상을 다룬 작품입니다. 거리로 나와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쥐 떼를 보며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그것이 페스트의 시작이었습니다. 페스트가 오랑 시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듣자 한 의사가 이렇게 독백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 그것이 서양에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페스트』 본문은 최윤주 역본(열린책들, 2014)에서 가져왔습니다.
(최윤주 역, 『페스트』, 61쪽) 사라졌다고 믿었던 페스트가 온 동네에 퍼지게 된 것입니다. 페스트로 인해 오랑시는 대혼란에 빠집니다. 결국 정부 당국이 페스트 발병을 선포하고 도시를 봉쇄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안심하라’인데, 불안을 부추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최근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우한시 출입이 차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소설의 한 대목이 생각났습니다.
『페스트』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 있습니다.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려고 노력한 리외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미지의 인물이지만, 끝까지 페스트와 싸우며 부당한 죽음을 거부하려고 노력한 타루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전염병이 사라졌다고 축배를 들던 무렵, 그는 작은 실수로 전염병의 희생자가 되고 맙니다. 또 전염병의 재앙을 신이 내린 형벌로 생각하며 회개해야 한다고,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설교하는 신부 파늘루도 있습니다. 우연히 오랑시에 체류하다 도시 봉쇄로 발이 묶인 신문기자 랑베르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곳 출신도 아니고 이 도시와 무관하다며 계속 항변하면서 문제를 회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페스트로 감염된 오랑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도 함께 오랑시 시민이 되어 페스트와 싸우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은 나름의 입장을 가지며 여러 생각을 대변해 줍니다. 무신론적 성자라고 평가받는 까뮈이기에, 본 작품에서도 그는 유신론적 입장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페스트가 오랑시에 퍼졌을 때 그에 대응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조금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 내용이 전개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집단 기도 주간을 설정합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페스트와 싸우려고 결정합니다. 신부 파늘루는 오랑시에 임한 페스트 재앙을 오만하고 사악하고 눈먼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나님께서 페스트를 통해 사악한 자들을 징벌하려 하신다고 선언합니다. 때문에 스스로를 돌아보며 회개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가 하는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이 페스트와 무관하지 않다면 그것은 반성할 순간이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악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 당연합니다…그렇습니다. 반성할 시간이 왔습니다…형제 여러분, 선과 악, 분노와 연민, 페스트와 구원을 만물 속에 마련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바로 이곳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협하는 바로 이 재앙이 여러분을 드높이고 여러분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153-159쪽)”
그런데 페스트는 파늘루 신부가 선포한 말씀처럼 신이 제시한 반성의 기회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신부 파늘루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듯이 까뮈는 예심판사인 오통의 어린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고통스러운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리외와 동료 의사 카스텔이 만든 새로운 혈청을 오통의 아들에게 투여하지만, 아이는 도리어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이 이야기에서 저자는 ‘어린아이의 죽음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악의 결과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신부 파늘루도 그 현장을 지켜보면서 마음 아파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하는지도 모르죠.”(354쪽) 우리 같은 신앙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말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공허한 소리처럼, 또 독백처럼 들리는 울림일 뿐입니다.
소설의 중심에는 의사 리외와 타루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고통을 당하는 이 세상을 저는 죽는 날까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354쪽) 라고 말하며, 페스트와 격렬히 싸우는 사람들로 묘사됩니다. 페스트를 퇴치하기 위해 그날그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며 저항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한편 오랑 시에 잠시 들렸다가 갇히게 된 신문기자 랑베르의 관점은 우리의 모습을 참 많이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자신은 오랑시 사람이 아니므로 자신과 이 일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는 그에게 페스트가 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습니다. ‘나는 전혀 상관없지.’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을 대변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오랑시의 한 시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도 페스트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실존적 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 작품의 전면에는 의사 리외와 타루, 랑베르, 익명의 인간들의 영웅적인 투쟁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참으로 허탈한 결말, 또 허무한 내용이 공존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작 페스트를 물러가게 한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온’입니다. 맹렬하던 추위가 주춤해지면서 페스트가 힘을 잃어 갑니다. 그렇게 페스트가 물러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도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설교하던 신부 파늘루도, 인간의 힘으로 저항하며 어떻게든 이겨내려 노력한 타루도, 죄 없는 어린아이도, 결국 페스트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를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흔히 재앙이란 비현실적인 것, 잠에서 깨면 사라지고 마는 악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재앙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악몽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사라지는 것은 사람들(이다.”(64쪽) 끊임없는 재앙 가운데 사라지는 것은 인간이라는 서글픈 독백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페스트가 물러가고, 오랑시는 기쁨의 축제를 벌입니다. 오랑시의 문이 열리고 환호하는 시민들이 나타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의사 리외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참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깨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 (508쪽)
페스트를 읽으실 분들이 많을 텐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조금 길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요즘 우한에서 일어난 일을 지켜보며 몇십 년, 아니 몇백 년 동안 숨어 있던 페스트균이 다시 살아난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즘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열심히 소독하고, 질병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신앙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러한 때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신부 파늘루의 입장도 많이 공감됩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말입니다. 재난을 만날 때마다, 또는 질병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인간의 지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유신론적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한 입장이 재난이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마가복음 6장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읽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풍랑’이라는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이 ‘풍랑’이란 단어를 페스트라는 전염병과 연결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점점 더 알려지고 유명해지시던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들로 나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놀라며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라고 재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 벳세다로 가 있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무리를 피해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홀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건너갑니다. 날은 저물었고 바람이 거세게 붑니다.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저었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14:24 중) 큰 풍랑이 일어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왜 하필 그날이었을까요? 왜 하필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후에 풍랑 사건이 일어난 것일까요? 분명히 제자들은 흥분된 채로 배에 올랐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자신들도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로운 능력을 경험하고는 용기를 얻에 배에 올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배를 띄워 바다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절로 힘이 났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벳세다라는 목표 지점도 있었습니다. 바다가 그리 크지 아니하니 얼마든지 쉽게 건너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이 지나도록 건너편으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바람이 그들을 가로막은 것입니다.
바다는 늘 그렇습니다. 마치 페스트균 같습니다. 마치 페스트균이 옷장에 숨어 있던 것처럼, 평온해 보이는 바닷속에도 거센 풍랑이 숨어 있습니다. 풍랑은 때로 인간을 삼킬 듯이 급하게 달려듭니다. 바다는 어떤 날은 평온해 보이지만, 어떤 날은 맹렬합니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항해를 떠나지만, 늘 그렇게 바다가 평온한 건 아닙니다. 숨어 있던 맹렬함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성이 나면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기세입니다.
사실 이 풍랑의 공격이 이미 첫 번째 공격이 아니었음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도 큰 풍랑으로 인해 제자들이 죽을 위기를 모면한 적이 있습니다. 이후 바다가 평온해졌습니다. 바다가 잠잠해졌기 때문에 정복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마치 페스트균이 정복된 것처럼 온전한 바다가 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을 지나 5장을 넘어 6장이 되었을 때, 또다시 바다는 성을 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일어난 바람 앞에 힘껏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밤새 한 일은 바람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 바람이 무슨 연고인가?’ 때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람이 일어났는가?’ 바람의 이유를 물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요나가 탔던 배가 풍랑을 만난 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만나는 풍랑은 이유가 없을 때도, 또 이유를 모를 때도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풍랑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 풍랑을 이기기 위해 힘껏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풍랑이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고, 아무리 기도해도 사나운 바람으로 죄 없는 아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모든 풍랑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 없는 아이가 페스트에 희생되었듯이, 신부 파늘루가 페스트의 희생양이 되었듯이, 누구든지 풍랑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배에 탔는가가 상관없을 만큼 큰 풍랑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풍랑에 휩쓸리면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풍랑과 싸우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다가오십니다.>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이야기를 두 곳에서 대조적으로 다룹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4장과 6장입니다. 먼저 마가복음 4장 35~39절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마가복음 4:35~39)

오늘 본문인 6장의 내용과 유사점도 많고, 차이점도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과 흥미로운 유사점이 있습니다. 먼저 두 본문에서 똑같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날이 저물 즈음 건너편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이어 차이점으로는, 마가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지 않으셨는데, 마가복음 4장에서는 함께 타셨습니다. 두 번째로 밤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4장에서는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워 도움을 청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반면 6장에서는 예수님이 배에 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힘을 내 강풍을 이겨내려고 노력합니다. 4장에서는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6장에서는 소리를 지를 수 없었습니다.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밤새도록 고생하는 모습이 포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멀리 계시다고 생각했기에, 제자들이 기도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저 열심히 자신들의 힘으로 버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풍랑 앞에 선 두 가지 대조적인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둘 다 제자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깨우고,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오늘 본문에 소개됩니다. 바로 풍랑과 싸우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답이겠습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겠습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있으니, 하나의 관점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풍랑과 맞서 싸웠습니다. 마치 『페스트』에서 리외와 타루가 그랬던 것처럼 문제를 직면하고 최선을 다해 저항합니다. 쉽지 않은 싸움이지만, 어느 순간 풍랑이 잠잠해질 수 있다고 믿었기에 최선을 다해 버틴 것입니다. 풍랑을 압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풍랑이 잦아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버티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한 일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셨다’라는 것입니다. 멀리 계시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을 보셨겠습니까? 망원경으로 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미 보고 계셨습니다.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애쓰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밤 사경쯤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나아오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만 의지하며 안심합시다.>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큰 풍랑으로 요동치던 캄캄한 밤입니다. 빛도 없는 그 밤, 흉흉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천천히 걸어오셨을까요? ‘바람에 옷을 휘날리며 제자들에게 달려오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모습이 큰 은혜가 됩니다. 주님께서 달려오시며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에게는 바다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어디든지 가능합니다.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풍랑 속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달려오시는 예수님, 바다를 마른 땅처럼 밟고 오시는 예수님,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실 때 유령인 줄 알고 무서워했습니다. 충분히 그럴 법합니다. 그동안 그런 일이 없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풍랑 속에서 힘 있게 노를 저으며, 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적어도 한 가지는 기억해야 했을 것입니다. 바로 능력이 충만하신 예수님, 그분을 말입니다. 바로 그날 낮에 예수께서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어도 좋습니다. 풍랑을 막으며 애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 예수님이 담겨 있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꼬집습니다.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마가복음 6:51~5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을 걱정하면서 예배의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질병이 속히 사라지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지 아닌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신부 파늘루의 오류에 빠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질병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질병에 맞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힘겨운 싸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고 있을 때 바다를 가르며 달려오신 것처럼,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달려오시는 그분은 기적을 베푸시며, 오천 명을 먹이시며, 오늘 말씀 이후의 사건처럼 병자들을 고치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가운데는 페스트도 있고, 풍랑도 있습니다. 그 풍랑은 늘 바다에 잠재되어 있고, 페스트도 장롱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 질병을 견디면 또 다른 질병이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생명을 걸고 싸울 것이고, 기도도 할 것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고,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편입니다.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삶만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주님, 영생하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참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안심하라.”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로, 치열한 삶의 자리로, 병마와 싸우는 저항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며, 폭풍을 장애로 여기지 않으시며, 우리를 위해 달려올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안심하십시오.

2020년 2월 2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안심하라” (막 6:45-5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6장, 40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막 6:45-5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2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La Peste)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해안에 있는 조용한 도시 ‘오랑(Oran)시’에 전염병 페스트가 번지면서 일어나는 인간 군상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페스트》 소설 속 도시처럼 격리된 중국 도시, 우한(武漢)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할까요?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6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풍랑’이라는 의미 있는 주제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직전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놀라운 기적을 본 사람들이 흥분하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그곳을 떠나라고 재촉하십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다가 거센 풍랑을 만납니다. 그리고 힘겹게 배를 제어하고 있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보면,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이야기는 오늘 본문 바로 두 장 앞인 막 4장에 한 번 더 언급이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장(막 6장과 막 4장)의 차이점은 막 6장에는 예수님이 함께 배에 타지 않으셨는데, 4장은 함께 타셨다는 겁니다. 막 6장에는 풍랑을 맞았을 때에 제자들은 스스로 힘을 내어 광풍을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고, 막 4장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워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한번은 예수님을 깨우고 있고, 한번은 자기들의 힘으로 그 풍랑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행동일까요? 성경은 둘 다 알려주고 있으니 한 가지에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건넜던 ‘바다’는 ‘페스트 균’과 같습니다. 평온해 보이는 바다 속에는 마치 페스트균이 옷장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거센 풍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풍랑은 때로 급하게 인간을 잡아먹을 듯 달려듭니다. 오늘 본문(막 6장)의 제자들은 풍랑과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 풍랑이 기도로 사라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풍랑으로 죄 없는 아이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애쓰는 제자들을 보고 있다(막 6:48)는 겁니다. 그리고 그 풍랑을 뚫고 오시며, 그 풍랑을 밟고 걷고 계시다는 겁니다(막 6:49).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막 6:50).

  우리는 지금의 이 질병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질병에 맞서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할 것은 지금 우리를 위해 달려오시는 그 분, 기적을 베푸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그 풍랑(질병)을 밟고 걷고 계신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이 ‘안심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자리로, 그리고 치열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나누기

 1. 나와 인류가 겪는 재앙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신이 내린 심판인가, 나를 연단시키는 과정인가요?

 2. 풍랑과 같은 재앙은 늘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으로 어떻게 이 재앙을 바라봐야하는가요?

 마무리 기도

    치료의 하나님, 이 풍랑 같은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최선을 다해 질병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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