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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아들 유다

창세기 49: 8~12

김경진 목사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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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 8~12

8~12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원인을 제공한 분은 아버지입니다. 저에게 뭐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아버지 책임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요셉을 미디안 사람 상인들에게 팔아넘기자고요. 그래요. 제가 맞습니다. 제가 숫염소를 잡아 요셉이 입었던 옷에 피를 묻히고, 아버지께 가지고 와서 요셉의 옷이 맞는지 살펴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셨습니까? 왜 우리로 하여금 형제 요셉을 먼 곳에 팔아넘길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까! 왜 조금이라도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나의 어머니 레아를 그렇게도 사랑하지 못하셨습니까?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죽하면 어머니가 첫째 아들을 낳고 르우벤이라 불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비참한 처지를 돌보셨다’라고 어떻게 그렇게 이름을 붙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유다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 레아가 낳은 네 번째 아들 유다입니다. 왜 그렇게도 작은어머니 라헬만을 사랑하셨습니까. 어린 시절 저는 어머니의 얼굴에 깃든 어두움을 보며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언제나 남편 주위를 서성거려야만 하는 비참한 여인의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저는 사랑받지 못한 아내가 낳은 여섯 아들 중 네 번째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억하고는 계시는지요. 저는 레아가 당신께 낳아 드린 여섯 아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중에서 네 번째 아들 유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도 둘째로 태어나셨다면서요. 쌍둥이 형제의 둘째 말입니다.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지 못하셔서 얼마나 괴로우셨습니까?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거짓으로 양가죽을 팔뚝에 메고 형 에서에게 들어갈 축복을 모두 받고 나오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그렇게도 잘 아시는 아버지께서 왜 우리 형제들을 그렇게 대우하셨냐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아들이라기보다는 일꾼처럼, 종처럼 대우하셨습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요셉과 베냐민은 아버지가 정말 사랑하며 아꼈던 라헬이 낳은 자식들이지요. 게다가 작은어머니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곧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아이를 두고 말입니다. 그러니 애틋한 정이 느껴질 수밖에 없으셨을 겁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 옆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추워서 떨고 있는 다른 아들들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른 채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는 아들들, 그런 인생들을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버지도 그렇게 경험하셨다면서 왜 그것을 모르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혀 주셨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 형제들은 들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양들을 치고 있는데 그 아이는 채색옷만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좋아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도 들으셨죠. 어느 날 그 아이가 꿈을 꾸고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창 37:7)

얼마나 발칙한 말입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한마디 꾸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아이가 또다시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창 37:9 중)

그때도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저는 요셉이 그러한 꿈을 꾸었다고 말했을 때 제 마음이 섬뜩했습니다. ‘아, 이 아이가 아버지의 모든 축복을 다 가지고 가겠구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주시는 축복이 나에게서 멀어져 간다는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야말로 멀어져 가는 축복을 사기 위해서 형 에서에게 팥죽으로 장자권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거짓으로 몸단장을 하고 아버지를 속이면서 축복을 도둑질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부전자전인가요. 저도 요셉에게로 갈 축복을 도둑질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우리가 먼 곳에 나가 있었을 때 요셉이 우리에게로 오더군요. ‘도단’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이심전심이었는지 형제들은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마자 하나같이 “요셉을 죽이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충동적이고 순간적인 것이었지요. 그만큼 형제들의 증오는 하늘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첫째 형님 르우벤만은 요셉을 감싸더군요. “요셉을 죽이지 말고 구덩이에 가두자.”라고 제안한 사람이 첫째 형님 르우벤이었습니다. 우리의 화가 풀린 다음에 요셉을 집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제가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운명! 운명이었습니다. 축복받을 운명을 한번 가로채 보자는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우리는 이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말고, 차라리 그 아이를 상인들에게 넘겨주자. 팔아넘기자.”
저는 요셉을 죽이기보다 팔아넘기는 쪽으로 형제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에게 새로운 운명을 던져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너를 종으로 멀리 팔아넘겨도 과연 우리가 너에게 절하게 될까? 할 수 있으면 어디 한번 해 봐라. 내가 너를 팔아넘기면 과연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네가 해 볼 수 있을 만큼 해 봐라.” 아버지, 아버지가 큰아버지 에서의 축복을 빼앗고 아버지를 속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요셉에게 돌아갈 축복을 빼앗기 위해 요셉을 팔아넘겼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이것은 사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도 묻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까지 해도 요셉입니까? 이렇게 해도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요셉에게 절하도록 하실 것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요셉을 윗사람으로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까?”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요셉을 잃으신 후로 막내 베냐민만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다시 보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없어지면 아버지의 사랑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내려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정작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더욱더 마음을 닫으셨고, 오직 베냐민만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렀고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던 우리 집에도 양식이 떨어지는 상황이 도래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죠. “애굽에는 훌륭한 제상이 있어서 양식을 비축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그곳에 가서 먹을 것을 좀 얻어오렴.” 물론 그때도 아버지는 베냐민을 내어놓지 않으셨습니다. 베냐민은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만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그곳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애굽의 총리를 만났을 때 우리는 정탐꾼으로 오해받았고, 삼 일간 옥에 갇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시므온을 옥에 남겨둔 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정탐꾼이 아니라는 증거로 막내아들 베냐민을 애굽 총리에게 데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옥에 갇힌 시므온을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므온이 잡혀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냐민을 끝내 내어놓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식을 얻기 위해, 또 시므온을 구하기 위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모든 오해가 풀리고 양식과 함께 돌아오는 도중에 불행한 일이 또다시 생겼습니다. 베냐민이 타고 있던 나귀에 실린 양식 자루에서 애굽 총리의 은잔이 발견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결국 다시 잡혀가게 되었고 이번에는 베냐민을 그들의 종으로 남겨 두고 돌아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십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 아들 유다는 아버지와 베냐민을 위해서 애굽의 총리이신 그분께 이렇게 탄원했습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 44:33~34)

글쎄요. 제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베냐민도 죽게 내버려두었다면, 아니 차라리 베냐민도 그곳에 그저 종으로 살게 내버려두고 왔다면 아버지께서 베냐민에게 하실 축복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까요? 이참에 베냐민도 사라지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그럼에도 이 못난 아들 유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시는 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굽 총리에게 제가 대신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그곳에 앉아 있던 총리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이 우리를 시험했던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제국을 다스리는 자가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며 과거에 요셉이 말했던 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열 한개 별이 자기를 향해 절하더라.’라는 꿈입니다.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을 보며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그때 저는 아버지가 섬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하나님은 결국 의도하신 뜻대로 이루시고야 마는 분이라는 사실을요. 우리가 그토록 방해를 했지만, 다시는 요셉이 일어날 수 없도록 종으로 팔기까지 했지만, 하나님은 도리어 그 상황을 이용하셔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팔아넘긴 그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 되었다니! 우리의 잔꾀와 저항과 배신과 속임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도구가 되었다니….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은 참으로 높고도 깊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하나님은 복을 주실 자에게 복을 내려 주시고, 그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은 유다입니다. 찬양의 이름을 가진 유다입니다.
주목받지 못했던 유다, 사랑받지 못하던 어머니 레아의 아들, 야곱의 여섯 아들 중 네 번째 어느 틈에 끼어 있어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 아들, 사랑받는 요셉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워했던 유다. 이것이 유다의 이력서입니다.

<사랑받지 못했던 유다,
그러나 그가 베푼 희생으로 가문에 위대한 역사가 이어집니다.>

지난 주일 나누었던 말씀에는 이스마엘이 조연이었다면, 오늘은 야곱 가문의 조연으로서 유다가 나온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 오늘 말씀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운명적 사건, 바로 그 사건이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죽기 전 야곱은 아들들을 모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그때 유다에게 주어진 축복이 본문 말씀입니다.

유다야, 너의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의 멱살을 잡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창 49:8,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축복 같기도 합니다.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유다 앞에서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과 동일한 꿈이 이제는 유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이 이어집니다.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 (창 49:9~10 중,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모든 형제를 다스리는 자가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임금님, 지휘봉, 사자 새끼 등 이 모든 표현을 통해서 유다를 왕으로 세우실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다에게는 정말로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후 성경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가문, 야곱의 족보에서 유다가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 1:1~2)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의 족보를 이야기하며 야곱이 요셉과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고 전합니다. 유다입니다. 요셉이 아니라 유다였습니다. 요셉의 역할이 너무나도 크고 어쩌면 주인공 같아서 유다가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의 가문의 역사가 유다를 통하여 이어져 왔다고 증언합니다. 야곱의 혈통을 이어 간 사람이 요셉이 아니라 유다였다는 것입니다. 그 유다에게서 다윗이 나오고, 솔로몬이 나오면서 위대한 가문이 됩니다. 그리고 이 가문을 통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됩니다. 사랑받지 못한 레아의 아들, 그것도 네 번째 아들, 아버지로부터 채색옷 한 벌 받아보지 못한 아들, 그 아들을 통하여 가문에 영예가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야곱에서 요셉으로 가문을 이어 가지 아니하시고 야곱에서 유다로 이어 가셨을까요? 왜 유다가 야곱의 후계자가 되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그에게 이러한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했다는 말입니까?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지만 우리는 유다의 삶 속에서 한 가지 중요한 자격을 보게 됩니다. 그가 넷째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냐민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애굽의 종이 되기를 자원하면서 그의 형제 베냐민을 내어놓아 달라는 장면에서 가족을 향했던 유다의 사랑, 희생정신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창 44:33, 새번역)

하나님의 축복이 유다에게 넘어가는 장면에서 우리는 위대한 섬김과 희생의 리더십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마치 우리를 향해서도 묻고 있는 듯합니다. “누가 이 집안의 어른이 될 것이냐? 누가 이 집안의 지도자가 될 것이냐? 누가 이 집안을 이끌어 나갈 자격이 있는 자인가? 자신을 희생하며 형제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는 바로 그 자가 집안을 다스리는 자가 될 것이며, 집안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집안의 미래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그런 가문에서 왕이 나올 것이다.”
이번 주간은 추석 명절로 마음이 분주해질 것입니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가족이 제대로 모여 본 적이 없으셨을 텐데 올해는 함께 모이는 분들이 꽤 많으실 줄로 압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이번 추석에는 야곱의 아들 유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곧 가문을 이어 가는 큰 축복이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누가 집안에서 가장 큰 사람인가요? 누가 첫째입니까? 자신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사람이 집안의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 집안을 이끌 미래의 주인공입니다. 사회 정치 문화의 영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세상을 위대하게 만들고 가족을 살려내고 사회도 살려내며 나라도 살려내게 될 것입니다. 또 그런 자들의 후손이 우리를 다스리는 왕이 될 것입니다. 복된 추석을 보내십시오. 기쁘게 가족들도 만나십시오. 그리고 오늘 배운 대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가족 가운데 사랑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의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9월 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야곱의 아들 유다” (창 46:8-12)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05장, 2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46:8-1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이번 주간은 추석 명절로 마음이 모두 분주할 것입니다. 코로나로 자주 못 만났던 가족들이 아마도 이번에는 많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가족들이 만날 때, 누가 집안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 가정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정치, 문화의 영역에도 동일하게 작용하는 리더십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설교의 요약

유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인 야곱을 많이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보여준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편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그들의 어머니인 라헬이기도 했고, 그녀는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결국 숨을 거두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편애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에 비해 유다는 아버지인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 레아의 아들이었고, 여섯 명의 아들 중 네 번째 아들이었을 뿐입니다. 유다는 영문도 모르고,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던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꿈까지 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직감적으로 그 꿈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형제들의 모함에 의해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을 때, 유다는 요셉의 운명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요셉을 죽이기보다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제안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까지 했는데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떻게 되는지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요셉은 그런 와중에도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요셉은 누가 보아도 주인공이고, 유다는 아무리 보아도 조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유다를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야, 너는 사자 새끼 같을 것이다… 임금의 지휘봉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휘봉이 자손만대에까지 이를 것이다”(창 49:9-10, 새번역). 그리하여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 1:1-2)

여기의 주인공은 요셉도 아니고 르우벤도 아니라, 바로 유다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유다가 이렇게 큰 축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44:33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동생인 베냐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될 것을 자원하면서 베냐민을 놓아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섬김과 희생의 리더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대속적 죽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섬기는 이가 리더이고, 리더는 섬겨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누기

1. 우리 가정에서 가장 큰 사람. 가장 많이 섬기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나는 어떻게 삶의 영역에서 섬김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계획해봅시다. (가정, 구역, 교회, 직장 등)

 

마무리기도

유다의 희생이 결국 모든 가족을 살리고 그를 변화시킨 것처럼, 우리 또한 다른 이를 먼저 섬기며 희생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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