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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베스의 기도는 꽤나 이기적인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꽤나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만, 23년 전만 하더라도 야베스라는 이름은 믿는 사람조차 잘 알지 못한 이름이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부르스 윌킨슨(Bruce Wilkinson) 박사님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라는 책을 쓴 다음부터입니다. 이 책은 2000년에 영어로 출판되었고, 다음 해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출판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 5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2년 만에 800만 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윌킨슨 박사가 마지막 학기를 보낼 때, 당시 교목이었던 리차드 슘(Richard Seume) 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본문으로 설교한 것을 듣고는 자신의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늘 암송해 왔다지요. 약 30년이 넘는 동안 기도를 반복해 왔는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독자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윌킨슨 박사는 네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추구하라.
둘째, 더 넓은 지경을 간구하라.
셋째, 주님의 손이 함께하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라)
넷째, 사탄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켜 주시기를 구하라.
윌킨슨 박사는 아침마다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고, 이 기도문을 여러 곳에 부착해서 볼 때마다 기도하라고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하기도 합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교회를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하기 시작하라.”(『야베스의 기도』, 137쪽) 책이 많이 읽히면서 많은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붙잡고 생활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마 지금도 야베스의 기도를 붙잡고 기도하며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알려지게 된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내용적으로 본다면 복에 관련한 평범한 내용 같고, 분량으로 보아도 그다지 많지도 않은 이 책이 어떻게 순식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신기합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죠. ‘사람들이 복 받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복을 찾고 있구나.’
그래서인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우려 섞인 반응을 내놓기도 합니다. 성서학자 송병현 박사는 그의 책에서 야베스의 기도의 광풍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숨에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지켜보면서 기복적이고 성공 위주로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씁쓸하다.”(『엑스포지멘터리 역대상』, 132쪽) 비교종교학자로서 알려진 오강남 교수는 『예수가 외면한 한 가지 질문』(2002)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윤리성이 결여된 기도, 이기적인 기도, 미성숙한 기도라고 평가하였습니다(256-261쪽).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베스의 기도를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상 4:10a)
제가 읽는 중에 여러 번 등장하는 ‘나’, ‘내게’라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 기도를 읽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 쭉 뽑아서 꽉 채워 놓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안에 숨겨진 마음을 어떻게 이리도 잘 알았을까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야베스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도의 결과를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b)
이 부분에서 조금 혼란스럽기는 합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기도를 드려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배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 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도 배웠고요. 환란이나 고난이 와도 주님만을 따르게 해 달라는 간청의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배워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들 위한 기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기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빌고 기도하시는 내용도 있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기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처럼 이기적으로 보이는 기도를 드려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기적으로 들릴 법한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과 함께 여러분에게 두 가지 의미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이 말씀을 붙잡으며 힘을 내어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기도 못 할 것 같아. 하나님께서 왜 이런 기도를 들어주셨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말씀의 깊은 뜻이 깨달아지며 기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길 원합니다.
우선 야베스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기도가 놓인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역대기를 읽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야베스 기도 본문까지 읽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는 긴 족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낯설고 익숙지 않은 이름들을 읽느라고 우리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장은 아담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이삭에 이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야곱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상 2장은 야곱의 열두 지파를 다루면서 먼저는 유다 지파의 족보를 다룹니다. 역대상 3장으로 가면 다윗에서부터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의 왕 여고냐(여호야긴),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스룹바벨과 그 자손들의 족보가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4장으로 넘어가면 유다 지파 중에서 남은 자들의 족보가 다루어집니다. 바로 이 부분에 오늘 본문인 야베스의 기도가 자리합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유다 지파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긴 족보가 나열되는 중에 이상하게도 야베스의 이름이 나오면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또다시 족보가 이어집니다. 참 이상하다는 의문이 드는 흐름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귀환하면서 그들의 역사를 다시 쓴 책이 역대기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먼 바벨론까지 잡혀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하며 스스로에게 물었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기록된 책이 역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문이 있는 바로 앞의 내용들을 보면 족보들이 이어지는데 주로 지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지명과 인명이 혼용되어 사용되는 족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드고아의 아버지’, ‘베들레헴의 아버지’, ‘그돌의 아버지’, ‘브누엘과 후사의 아버지’ 등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버지 할 때, 이 명칭은 예루살렘 주변의 지역이고 과거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들의 이름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중심으로 그들의 기업이 거주한 땅입니다.
이런 내용이 소개되는 흐름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먼저는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것을 읽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요?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70여 년 이상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들, 정착민들이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땅이었는데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비집고 들어가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야베스의 기도를 읽으면서 이와 같은 탄원을 함께 올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광대하고 위대한 땅을 구했다기보다 돌아가야 할 땅,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바로 그 땅을 찾게 해 달라는 의미이지 않았을까요? 웅대하고 야심찬 기도라기보다 고향 땅을 찾게 해 달라는 소박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광활한 평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 폐허가 된 땅, 황량하게 된 땅으로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자취를 감춘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 틈에 들어가서 땅을 일구고, 조금씩 확장을 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야베스의 기도는 고통을 준 존재에서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로의 회복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하면서 조금 더 중요하고 논쟁이 될 만한 해석으로 넘어가 보고자 합니다. 족보가 이어지는 중에 등장하는 이름 ‘야베스’, 그 야베스의 이름을 본문 역대상 4장 9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대상 4:9)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대상 4:9)
특별히 성경은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통’이라는 해석을 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본다면 야베스라는 단어가 고통으로 직접 번역될 수는 없지만, 언어적인 유희를 통해서 ‘야베스’와 ‘고통’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새번역이 본문의 의미를 보다 잘 전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성경은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생각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베스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고통을 겪으면서 낳았기 때문에 야베스 곧 고통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정체성을 알려 주기 때문에 초기 인생이 고통스러웠다고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가정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고, 민족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고, 나라가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어머니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해산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즉 다른 아이와 달리 힘겹게 고비를 넘기며 야베스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야베스’ 곧 ‘고통’이라 짓습니다.
자,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난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대상 4:9, 새번역)
제가 본문을 새번역으로 읽어 드렸습니다. 개역개정판에는 고통이라는 단어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에 의하면 역대상 4장 9절은 이렇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상 4:9, 개역개정)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마는 원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새번역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하는 말과, 야베스가 기도하는 내용 중에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달라’는 표현에서 같은 단어 ‘야차브’(עָצַב atsab)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났는데,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야베스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은 어머니에게 고통을 드리며 나왔는데 자신은 고통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야베스가 하나님께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번역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성경들이 이 번역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원문으로 보면 1인칭 외에 다른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 왔는데, 주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lə·ḇil·tî 라고 읽는 부분에 that not
- ‘ā·ṣə·bî 라고 읽는 부분에 I may cause pain
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NKJV(뉴 킹제임스 버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You would keep me from evil, that I may not cause pain! (NKJV)
다시 말하면 “악에서 구하소서! 악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읽게 되면 그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난 사건과 그의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전에 고통을 유발하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빕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누구에게든지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을 따르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읽을 수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자신이 고통받지 않는 것도 좋지만, 남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참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따라 고백하는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이 자라납니다.>
이 해석을 확장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 연결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관점에서 이 기도는 어떻게 바꾸어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근심을 주는 자녀, 고통을 주는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배신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고통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의 자리로 보내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부르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때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주님께 고통을 드리는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고통을 드리지 않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포로에서 귀환하는 백성들도 기도합니다. “하나님,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께 고통을 드리는 민족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론 야베스가 드린 기도를 보편적인 의미에서 자신이 고통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포로에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이 기도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하나님, 우리가 고통 중에 태어났습니다. 포로라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제 이 고통을 풀어 주시고, 심판의 길을 풀어 주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아마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간 상황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대상 4:10) 라는 구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자주 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기도합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에서 이 표현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 야베스의 족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다 지파 족보 사이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49장에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받은 축복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 49:8)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창 49:9)
유다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손과 관련됩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움켜쥔 것을 가지고 위로 올라갈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고 모든 것을 이끌고 나아가는 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과연 유다는 용사였습니다. 그 유다를 통하여 다윗이 나왔고, 솔로몬이 나왔고,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분명 용사였습니다. 그들의 손은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손을 통하여 많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였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손은 그만 쇠사슬에 묶이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들의 손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 이러한 유다 지파 중의 한 사람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손으로 원수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다는 축복을 주셨기에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내 힘으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내 손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감싸 주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나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시오.” 이것이 유다 지파 야베스가 올린 기도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십시오.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복에 복을 더해 주십시오.’라는 표현에서 기복주의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이런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 같고 당연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변화가 감지됩니다.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셨습니까?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 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제단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 포로로 끌려가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른 신이 아닙니다. 바알도, 아세라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 주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그분만이 복 주실 분임을 믿으며 고백합니다. 주님의 도우시는 손을 구합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성경은 야베스가 올려 드린 기도의 결말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대상 4:10b, 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문을 붙잡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결단이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Prayer of Jabez
1 Chronicles 4:9-10
The name Jabez may be familiar to us now, but 23 years ago it was not so in Korea—even to Christians.
It became a globally recognized namethrough Dr. Bruce Wilkinson’s book The Prayer of Jabez. After its publication in English in 2000, the Korean translation was rolled out in 2001. The book was a bestseller in the U.S. with 5 million copies sold in the first year and another 3 million in the following year.
When the book first came out, I remember one church member asking me, “Pastor, a book called The Prayer of Jabez has come out. But is Jabez Jacob?”
Dr. Wilkinson writes that after hearing a sermon on the prayer of Jabezby his chaplain in Dallas Theological Seminary, he started praying the prayer every day by reciting it. After three decades, he had experienced amazing changes, which is why he urges his readers to do the same.
Dr. Wilkinson proposes four points in his book:
First, pray for God’s blessing.
Second, ask God to enlarge your territory.
Third, ask for God’s hand to be with you. (Ask for His power.)
Fourth, pray that God will protect you from Satan.
He also encourages readers to not only pray the prayer of Jabez every morning but to post it everywhereso that they will pray it whenever they see it. Lastly, he advises in his book to start praying the prayer of Jabez for their friends, family, and church.
Now, I have explained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prayer of Jabez became so well-known.
But to tell you the truth, the book in itself does not reveal an extraordinary truth; nor is itlong. Yet it became an instant bestseller. How? After some thought, we may reach the conclusion that people love to be blessed.
Many have voiced their concern over people’s such tendency.
Dr. Song Byung-hyun, a Bible scholar, writes that the instant global success of The Prayer of Jabez and the sensation created by it left him feeling rather bitter because the church appears to have become success-oriented and prosperity-driven. (p. 132, Exposimentary Bible Study: 1 Chronicles)
Oh Kang-nam, a professor of comparative religion, belittled the prayer of Jabez, calling it a selfish prayer that lacks morality in his book The One Question Jesus Avoided (p. 256-261, 2002)
Then let us read Jabez’s prayer again:
“Jabez cried out to the God of Israel,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1 Chronicles 4:10a NIV)
This was Jabez’s prayer. “Bless me”;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and “keep me from harm so that I will be free from pain.” However hard I think about it, his prayer does seemself-centered as critics claim. It does appear to be an immature prayer.
But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its result? It says, “And God granted his request.”(1 Chronicles 4:10b NIV)
God answered Jabez’ prayer. Why did God answer such a seemingly selfish prayer? This is the question we face whenever we think of Jabez’s prayer.
Shouldn’t the following be our prayer? “God, let me live today for Your glory alone. Lord, help me cast everything aside for You. Help me follow You and You alone, no matter what trials or tribulationsmay come.”
But what was Jabez’s prayer? Jabez appears to ask only for his own well-being. How can God answer such a prayer?
Today I want to unlock the secret of this prayer.
Before we study the contents of Jabez’s prayer, we must first consider the context of and the circumstances under which it was prayed.
These days we are studying Chronicles in our early morning prayer meetings. We are now reading chapter 4 of 1 Chronicles. Those of you attending the early morning prayer service will know this, but chapters 1-9 of 1 Chronicles is composed of the genealogy of the people of Israel. We are having a rather hard time reading all these unfamiliar names every morning.
First Chronicles chapter 1 deals with the genealogy from Adam to Abraham, Isaac, and Israel (that is, Jacob); while chapter 2 writes on the genealogy of Israel by first listing the names of people belonging to the tribe of Judah.
Chapter 3 lists the genealogy from David to Jehoiachin, Judah’s king who was taken captive to Babylonia; Zerubbabel who returns from Babylonian captivity; and his descendants. Chapter 4 deals with the rest of genealogy of the tribe of Judah.
Jabez also belongs to the tribe of Judah. But in this long list of names of the tribe of Judah, Jabez’s name is mentioned in a surprising and unusual way: his prayer to God is described. After the insertion of his prayer, the Bible’s enumeration of names continues.
My point is that the location of Jabez’s prayer is unusual. This fact must first be noted.
We must also note one more fact: Chronicles rewrites previous biblical history after the people of the Kingdom of Judah returned to Jerusalem from Babylonian captivity. That is, the readers of Chronicles at the time it was written were none other than the people of Judah returning to their homeland after decades of captivity.
The genealogy preceding the prayer of Jabez mostly consists of names of people and places. It lists names of people mixed with the names of places.
For example, it mentions “the father of Tekoa,” “the father of Bethlehem,” “the father of Gedor,” “the father of Hushah,” and so on.These places, in the vicinity of Jerusalem, were also the regions that had been inhabited by the tribe of Judah. So the above is the typical genealogy that appears before Jabez’s prayer is suddenly introduced.
At this stage we may ask this question: the part where Jabez prays, “enlarge my territory”—what would this have meant to the readers when Chronicles was written?
The readers were those Israelites returning from captivity to their homeland, Jerusalem. But there were other people living in their land who had made a home there for more than 70 years. There were foreigners and settlers there. The Israelites had to squeeze in between them. This would have been a truly difficult and arduous task.
As these Israelites readJabez’s prayer, wouldn’t they have prayed the following to God?
“Lord, enlarge my territory.” This would not have been a request for a vast and grand land, but a plea to be able to regain the land they ought to return to, the very land that God had given them. Seen from this perspective,wouldn’t you say this prayer was just a simple, honest one asking God to give them back their homeland, rather than a grand and ambitious one? The Israelites were not heading toward a vast plain or a new land. They were simply returning to the very land that God had given them—to the land that was now devastated and in ruins.
Having established this context, I now want to move to a more important, but controversial, interpretation regarding Jabez’s prayer.
Jabez. This name appears rather oddly in a long list of names. But this is what today’s Scripture says about the meaning of the name:
“Jabez was more honorable than his brothers. His mother had named him Jabez, saying, ‘I gave birth to him in pain.’” (1 Chronicles 4:9 NIV)
The New Living Translation (NLT) says, “There was a man named Jabez who was more honorable than any of his brothers. His mother named him Jabez because his birth had been so painful.” (1 Chronicles 4:9 NLT) In particular, the NLT adds a footnote to Jabez: “Jabez sounds like a Hebrew word meaning ‘distress’ or ‘pain’.”
Although the Hebrew word “Jabez” does not mean “pain,” the Bible makes a connection between Jabez and pain through word play. In this sense, the NLT succeeds in delivering the meaning of the original textwith more clarity.
The child’s name reminded the person calling it of pain. That is why his name was Jabez. The Bible explains that it was because his mother gave birth to him in pain. Since Old Testament names reflect a person’s identity, we may infer that Jabez’s early life was full of pain. More specifically, he may have inflicted extreme pain on his mother when he was born. Her delivery of Jabez may have been more difficult and dangerous than that of her other children. That is why he was named Jabez.
Now, this man, who had inflicted great pain on his mother during childbirth, prays:
“Please be with me in all that I do, and keep me from all trouble and pain!” (1 Chronicles 4:10 NLT)
In the New Korean Revised Version (NKRV), there is no mention of “pain.” Instead the NKRV translates the above verse as something like, “let me be free of worry/grief.” The use of “pain” in the above NLT, therefore, wellcaptures the meaning of the original text because the Hebrew text uses “atsab (עָצַב),” which means “pain,” in both the statement of Jabez’s mother about giving birth in pain and Jabez’s prayer to be free from pain.
Jabez came into this world inflicting pain on his mother. But now he is praying to God that he may be free from pain. A connection may be made between these two statements through the common word “pain,” but this link is rather awkward.
Jabezcaused his mother pain, but now he himself doesn’t want pain in his life? This is hardly logical.
Now, this is where my sermon gets tricky. I want to discuss the matter oftranslation.
The NLT, NIV, and the NKRV all translate Jabez’s prayer to mean “God, help me so that I may be free from trouble and keep me from pain.” In fact, most Bible versions translate this part as such.
But the original Hebrew text may be read and interpreted in another way. Since the original text does not mention an object to the infinitive, this verse has been generally interpreted as Jabez, as the object of pain, asking to be free from pain. But another interpretation is possible and has been put forth: Jabez may be interpreted as the subject who inflicts pain.
What if we follow the latter interpretation?
(לְבִלְתִּ֣י lə·ḇil·tî):that not
(עָצְבִּ֑י‘ā·ṣə·bî):I may cause pain
The New King James Version, which adopts this interpretation, translates this verse as follows:
“You would keep me from evil, that I may not cause pain!” (1 Chronicles 4:10 NKJV)
“Keep me from evil. Protect me from evil. So that I will no longer cause pain to others!” This is what the above is saying. If we read it this way, Jabez’s prayer follows more naturally from, and is logically connected with, his birthwhich caused his mother great pain.
If we adopt this interpretation, Jabez’s prayer would mean something like this: “Lord, I was someone who caused pain to others in the past. I inflicted great pain on my mother. But now I pray to You, Lord. From now on let me not cause pain to anyone.”
And from the Israelites’ perspective, wouldn’t the prayer have had the following meaning? “Lord, until now,we have only given You pain. But now your children, the Israelites, are returning to You. And we pray to You. Lord, we no longer want to be children who cause You pain. This is our desire.”
Through Jabez’s prayer, the Israelites returning from Babylonian captivity were praying their own prayers to God. They prayed that they would no longer cause Him pain.
It is, of course,possible to interpret Jabez’s prayer as a request to be “free from” pain. From this viewpoint, how would the Israelites returning from Babylonian captivity have read it? They would have interpreted it as saying, “Lord, you have let us be born in pain. But now, please, remove that pain from us. Please let us not experience such a pain again.”
Whichever interpretation we chose, it is important that the Israelites rememberedthe prayer of Jabez as they returned home from a state of captivity.
Lastly, let me explain one last point—the part where Jabez prays, “Let your hand be with me.”(1 Chronicles4:10)
It is entirely possible for us to pray such a prayer to God; and we do so often. Yet this expression in Jabez’s prayer has a particular significance.
Where does Jabez belong to in terms of genealogy? To the tribe of Judah. Then let’s first consider God’s blessing to this tribe.
In Genesis 49 Jacob, Judah’s father, prays this blessing over Judah:
“Judah, your brothers will praise you; your hand will be on the neck of your enemies; your father’ sons will bow down to you.”(Genesis 49:8 NIV)
In God’s prophecy for Judah we see the expression “hand.” Whose hand is this? It is Judah’s. God is blessing Judah that his hand will be on the neck of his enemies.
Indeed, the tribe Judah turned out to be a warrior. Through Judah David and Solomon were born.
But what happened after them? The tribe of Judah failed to serve God wholly and were taken as captives to Babylonia. They lost the power of their hand.
But now a man from the tribe of Judah, Jabez, is praying to God. Lord, now let “Your” hand help me:
“Let your hand be with me.”(1 Chronicles4:10)
Jabez is confessing, “Lord, I have now realized that there is nothing I can to with my own strength. I thought I was doing things with my own hand. But now I know. Your hand must be with me. Only then will I live.”
That is why Jabez starts his prayer with the following words:
“Oh, that you would bless me and enlarge my territory. Let your hand be with me, […].”
Eventually Jabez seeks God’s blessing. Then he asks for His helping hand. This is Jabez’s prayer. In today’s sermon I revisited this prayer from the perspective of the Israelites praying it as they made the arduous journey home fromBabylonian captivity.
It was an earnest prayer asking that their lost land be restored to them, that they would no longer cause God pain… But even such things could not be done with their own strength; so they sought God. This was the prayer of Jabez.
Therefore, the Bible adds at the end of Jabez’s prayer:
“And God granted his request.”(1 Chronicles 4:10b NIV)
역대상 4: 9~10
9~10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기도는 꽤나 이기적인 기도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꽤나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만, 23년 전만 하더라도 야베스라는 이름은 믿는 사람조차 잘 알지 못한 이름이었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부르스 윌킨슨(Bruce Wilkinson) 박사님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라는 책을 쓴 다음부터입니다. 이 책은 2000년에 영어로 출판되었고, 다음 해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출판한 지 1년 만에 미국에서 500만 부 이상이 팔렸고, 2년 만에 800만 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에서 윌킨슨 박사가 마지막 학기를 보낼 때, 당시 교목이었던 리차드 슘(Richard Seume) 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본문으로 설교한 것을 듣고는 자신의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늘 암송해 왔다지요. 약 30년이 넘는 동안 기도를 반복해 왔는데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면서 독자들에게 야베스의 기도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윌킨슨 박사는 네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추구하라.
둘째, 더 넓은 지경을 간구하라.
셋째, 주님의 손이 함께하시기를 간구하라.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라)
넷째, 사탄이 다가오지 못하게 지켜 주시기를 구하라.
윌킨슨 박사는 아침마다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고, 이 기도문을 여러 곳에 부착해서 볼 때마다 기도하라고 제안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하기도 합니다. “가족과 친구 그리고 교회를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하기 시작하라.”(『야베스의 기도』, 137쪽) 책이 많이 읽히면서 많은 사람들이 야베스의 기도를 붙잡고 생활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마 지금도 야베스의 기도를 붙잡고 기도하며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알려지게 된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내용적으로 본다면 복에 관련한 평범한 내용 같고, 분량으로 보아도 그다지 많지도 않은 이 책이 어떻게 순식간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 생각할 때마다 신기합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죠. ‘사람들이 복 받기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복을 찾고 있구나.’
그래서인지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우려 섞인 반응을 내놓기도 합니다. 성서학자 송병현 박사는 그의 책에서 야베스의 기도의 광풍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단숨에 국제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지켜보면서 기복적이고 성공 위주로 변질된 교회의 모습을 보는 듯해서 씁쓸하다.”(『엑스포지멘터리 역대상』, 132쪽) 비교종교학자로서 알려진 오강남 교수는 『예수가 외면한 한 가지 질문』(2002)에서 야베스의 기도는 윤리성이 결여된 기도, 이기적인 기도, 미성숙한 기도라고 평가하였습니다(256-261쪽).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베스의 기도를 제가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상 4:10a)
제가 읽는 중에 여러 번 등장하는 ‘나’, ‘내게’라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 기도를 읽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야, 내가 정말 원하는 것 쭉 뽑아서 꽉 채워 놓았구나.’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안에 숨겨진 마음을 어떻게 이리도 잘 알았을까 생각하시는 분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비평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야베스의 기도는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기도의 결과를 어떻게 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b)
이 부분에서 조금 혼란스럽기는 합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기도를 드려도 되는 것인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좋은 기도라고 배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 버릴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도 배웠고요. 환란이나 고난이 와도 주님만을 따르게 해 달라는 간청의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라고 배워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른 사람들 위한 기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기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빌고 기도하시는 내용도 있지 않습니까. 얼마든지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기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처럼 이기적으로 보이는 기도를 드려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기적으로 들릴 법한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저는 본문과 함께 여러분에게 두 가지 의미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는 이 말씀을 붙잡으며 힘을 내어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기도 못 할 것 같아. 하나님께서 왜 이런 기도를 들어주셨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말씀의 깊은 뜻이 깨달아지며 기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길 원합니다.
우선 야베스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기도가 놓인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 역대기를 읽어 가고 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에 야베스 기도 본문까지 읽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하고 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는 긴 족보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낯설고 익숙지 않은 이름들을 읽느라고 우리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장은 아담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 이삭에 이어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야곱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상 2장은 야곱의 열두 지파를 다루면서 먼저는 유다 지파의 족보를 다룹니다. 역대상 3장으로 가면 다윗에서부터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의 왕 여고냐(여호야긴),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오는 스룹바벨과 그 자손들의 족보가 다루어집니다. 그리고 4장으로 넘어가면 유다 지파 중에서 남은 자들의 족보가 다루어집니다. 바로 이 부분에 오늘 본문인 야베스의 기도가 자리합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유다 지파 중에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긴 족보가 나열되는 중에 이상하게도 야베스의 이름이 나오면서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또다시 족보가 이어집니다. 참 이상하다는 의문이 드는 흐름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이 귀환하면서 그들의 역사를 다시 쓴 책이 역대기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먼 바벨론까지 잡혀가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고향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하며 스스로에게 물었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기록된 책이 역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문이 있는 바로 앞의 내용들을 보면 족보들이 이어지는데 주로 지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지명과 인명이 혼용되어 사용되는 족보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드고아의 아버지’, ‘베들레헴의 아버지’, ‘그돌의 아버지’, ‘브누엘과 후사의 아버지’ 등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버지 할 때, 이 명칭은 예루살렘 주변의 지역이고 과거 유다 지파가 차지한 땅들의 이름입니다. 누구누구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 중심으로 그들의 기업이 거주한 땅입니다.
이런 내용이 소개되는 흐름 속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먼저는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하는 기도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것을 읽고 있던 독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까요?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70여 년 이상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방인들, 정착민들이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땅이었는데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와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비집고 들어가야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러니 야베스의 기도를 읽으면서 이와 같은 탄원을 함께 올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십시오.” 광대하고 위대한 땅을 구했다기보다 돌아가야 할 땅,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바로 그 땅을 찾게 해 달라는 의미이지 않았을까요? 웅대하고 야심찬 기도라기보다 고향 땅을 찾게 해 달라는 소박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광활한 평야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주신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 폐허가 된 땅, 황량하게 된 땅으로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자취를 감춘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 틈에 들어가서 땅을 일구고, 조금씩 확장을 해 나가야만 했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야베스의 기도는 고통을 준 존재에서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로의 회복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하면서 조금 더 중요하고 논쟁이 될 만한 해석으로 넘어가 보고자 합니다. 족보가 이어지는 중에 등장하는 이름 ‘야베스’, 그 야베스의 이름을 본문 역대상 4장 9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대상 4:9)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야베스는 그의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통을 겪으면서 낳은 아들이라고 하여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불렀다. (대상 4:9)
특별히 성경은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통’이라는 해석을 달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로 본다면 야베스라는 단어가 고통으로 직접 번역될 수는 없지만, 언어적인 유희를 통해서 ‘야베스’와 ‘고통’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새번역이 본문의 의미를 보다 잘 전달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자, 성경은 아이의 이름을 떠올리면 고통이 생각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베스라고 합니다. 어머니가 고통을 겪으면서 낳았기 때문에 야베스 곧 고통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름은 정체성을 알려 주기 때문에 초기 인생이 고통스러웠다고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가정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고, 민족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고, 나라가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어머니가 그를 매우 고통스럽게 해산했을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즉 다른 아이와 달리 힘겹게 고비를 넘기며 야베스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야베스’ 곧 ‘고통’이라 짓습니다.
자,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난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대상 4:9, 새번역)
제가 본문을 새번역으로 읽어 드렸습니다. 개역개정판에는 고통이라는 단어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에 의하면 역대상 4장 9절은 이렇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대상 4:9, 개역개정)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마는 원어의 의미를 살린다면 새번역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앞에서 어머니가 ‘수고로이’ 낳았다고 하는 말과, 야베스가 기도하는 내용 중에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달라’는 표현에서 같은 단어 ‘야차브’(עָצַב atsab)가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났는데,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야베스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은 어머니에게 고통을 드리며 나왔는데 자신은 고통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야베스가 하나님께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번역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성경들이 이 번역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원문으로 보면 1인칭 외에 다른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 왔는데, 주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 lə·ḇil·tî 라고 읽는 부분에 that not
- ‘ā·ṣə·bî 라고 읽는 부분에 I may cause pain
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래서 NKJV(뉴 킹제임스 버전)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You would keep me from evil, that I may not cause pain! (NKJV)
다시 말하면 “악에서 구하소서! 악으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다른 이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읽게 되면 그가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면서 태어난 사건과 그의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의미가 통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는 전에 고통을 유발하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저를 낳아 주신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빕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누구에게든지 고통을 주지 않는 존재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히브리어 원문을 따르면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읽을 수도 있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자신이 고통받지 않는 것도 좋지만, 남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참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따라 고백하는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는 믿음이 자라납니다.>
이 해석을 확장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 연결해 보십시다. 이스라엘 민족의 관점에서 이 기도는 어떻게 바꾸어 볼 수 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근심을 주는 자녀, 고통을 주는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배신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고통인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의 자리로 보내시고, 포로로 잡혀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부르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때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그동안 저희는 주님께 고통을 드리는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새 약속의 땅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고통을 드리지 않는 자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서 포로에서 귀환하는 백성들도 기도합니다. “하나님,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께 고통을 드리는 민족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론 야베스가 드린 기도를 보편적인 의미에서 자신이 고통당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포로에서 귀환하는 백성들에게 이 기도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하나님, 우리가 고통 중에 태어났습니다. 포로라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이제 이 고통을 풀어 주시고, 심판의 길을 풀어 주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아마도 이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해석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 간 상황 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대상 4:10) 라는 구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기도를 자주 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기도합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에서 이 표현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 야베스의 족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유다 지파 족보 사이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다 지파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49장에 유다가 아버지 야곱에게 받은 축복입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창 49:8)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창 49:9)
유다를 향하여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손과 관련됩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움켜쥔 것을 가지고 위로 올라갈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리고 모든 것을 이끌고 나아가는 지도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과연 유다는 용사였습니다. 그 유다를 통하여 다윗이 나왔고, 솔로몬이 나왔고, 수많은 왕들과 장군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은 분명 용사였습니다. 그들의 손은 능력이 있었고 그들의 손을 통하여 많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였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능력의 손은 그만 쇠사슬에 묶이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들의 손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 이러한 유다 지파 중의 한 사람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제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의 손으로 원수의 목덜미를 잡을 수 있다는 축복을 주셨기에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내 힘으로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내 손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나를 감싸 주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나의 인생을 이끌어 주십시오.” 이것이 유다 지파 야베스가 올린 기도입니다. 그래서 야베스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십시오.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주십시오.”
‘복에 복을 더해 주십시오.’라는 표현에서 기복주의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만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이런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복 내려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어 기도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 같고 당연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변화가 감지됩니다. 포로로 잡혀가기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임무를 주셨습니까?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 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같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제단이 훼손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 포로로 끌려가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른 신이 아닙니다. 바알도, 아세라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 주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그분만이 복 주실 분임을 믿으며 고백합니다. 주님의 도우시는 손을 구합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성경은 야베스가 올려 드린 기도의 결말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대상 4:10b, 새번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문을 붙잡고 희망을 가지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결단이 있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7월 2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야베스의 기도” (대상 4:9-1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10장, 490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대상 4:9-10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7월 2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브루스 윌킨슨 박사가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출판되고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 야베스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윌킨슨 박사는 야베스의 기도를 네 가지로 요약해서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추구하고, 둘째는 더 넓은 지경을 구하고, 셋째는 주님의 손이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고, 마지막으로 사탄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기를 구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했지만, 동시에 이 내용이 너무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설교의 요약
언뜻 보았을 때 야베스의 기도는 무척 이기적이고 기복주의적인 기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대상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나오는 위치를 살펴보면 이러한 오해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역대상의 말씀은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로 잡혀있던 백성들이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존의 이방인들과 정착민들의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사명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야심차고 기복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바로 그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구하는 소박하고 절실한 기도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은 고통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성경은 그의 어머니가 고통을 겪으면서 그를 낳았기 때문에 이름이 야베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고통 속에서 그리고 고통을 주며 태어났던 야베스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에게 복에 복을 더해 주시고, 내 영토를 넓혀 주시고,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우시어 불행을 막아 주시고,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대상 4:10, 새번역)
여기에서 고통을 받지 않게 해달라는 그의 간구는 히브리어의 문법상 주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영어성경인 NKJV번역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You would keep me from evil, that I may not cause pain”
즉 악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가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기도를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야베스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야베스가 속한 유다 지파는 움켜쥔 것은 결코 놓지 않는 용맹함을 자랑하던 지파였습니다.(창 49:8-9) 그러나 범죄하여 모든 힘이 빠진 그때, 그들은 자신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의 손이 우리를 붙드셔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또한 동일한 마음으로 야베스의 기도를 붙들며 기도해야 합니다.
나누기
- 내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 혹시 기복신앙이나 이기적인 기도가 될까봐 구하지 못한 기도제목이 있나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야베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마땅히 기도해야 할 바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복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도우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땅을 주시고,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