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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 : 35 ~ 43
35 ~ 43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야이로가 주님께 간절히 요청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이 전문 병원이었는데, 한 주에 한 번 방문해 채플실에서 기도 요청서를 읽고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이 저의 사역이었습니다.
당시 기도 요청서에 적힌 기도를 읽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어떤 기도를 읽을 때면 ‘이 아이는 지금쯤 하나님나라에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떤 기도문에는 “하나님, 하루만 우리 아이와 더 살게 해 주세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또 “아이 대신 제가 죽을 테니, 아이만은 살려 주세요.”라는 내용도 여러 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북하게 쌓인 사연을 접할 때마다 ‘아, 세상에 이렇게 많은 부모가 아이를 위해 아파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마음도 먹먹해졌고,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야이로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로서 열두 살 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어땠겠습니까? 더는 희망이 없을 것 같은 딸아이를 보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 아빠가 꼭 너를 고쳐줄게. 조금만 기다려.”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고 밖으로 나섰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란 이름이 들립니다. ‘언젠가 이 마을에 다녀가셨다는 분, 그분을 찾아가 우리 딸을 고쳐 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렇게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는데, 마을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근처에 계셨는데, 배를 타고 다른 지방으로 건너가셨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어떻게 할지 기다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배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외칩니다. “예수님이 오신다!” 어느덧 바닷가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야이로도 그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셨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쌌습니다. 야이로도 그분을 향해 나섭니다. “조금 비켜 주세요. 제발 비켜 주세요. 제 딸이 아프단 말이에요. 조금만 길을 비켜 주세요!” 이렇게 사람들을 밀쳐 가며 예수께로 향했을 것입니다.
그는 회당장이란 직책도 잊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회당장인데 예수님에게 가서 딸을 고쳐 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가…. 하지만 내 아이만 살 수 있다면, 내 딸만 고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못할까?’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며 예수께 나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간곡히 요청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내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셔서 살려 주옵소서!” 오늘 본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 21~23절입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5:21~23)
그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예수님도 아무 말 없이 그의 눈빛을 보시곤 함께 가기로 결정하십니다. 이제 야이로에게는 한 가닥의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제 내 딸이 살 수 있을까? 이분이 정말 내 딸을 고쳐 주실까?’ 다만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입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딸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그때까지만 버텨 주면 좋겠는데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런 불안과 염려 속에서 야이로는 예수님을 모시고 급한 발걸음을 뗍니다.
야이로 앞에 장애물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은 급한데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갈수록 많아진 군중 때문에 이리저리 떠밀려 갈 정도입니다. 야이로는 더욱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여러분! 좀 비켜 주세요. 제 딸이 죽어갑니다. 빨리 가야 합니다. 좀 비켜 주세요. 비켜 달라니까요. 오, 하나님! 이 사람들을 좀 치워 주세요. 예수님, 조금만 더 빨리 가시죠.” 이런 외침과 간구 속에서 급하게 움직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상황을 묘사합니다. 함께 본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5장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마가복음 5:24)
이렇게 사람들을 밀쳐대며 앞으로 가던 중 갑자기 예수님이 가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꼼짝하지 않으십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 내용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마가복음 5장 25~3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마가복음 5:25~32)
이러한 상황에서 야이로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답답하고 안절부절못했을까요? 야이로의 심정이 느껴지십니까? “예수님, 급해요. 지금 빨리 가셔야 해요. 나중에 그 사람을 찾으면 안 될까요? 조금만 서둘러 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오더니 자신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장황하게 자신의 이야기도 시작합니다.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여러 의사에게 보이며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허비했는데 아무 효험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나을 것이란 생각으로 무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다고 고백합니다. 이때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 이 내용만 보면 굉장히 멋진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선 한 사람, 야이로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마가복음 5장 33~34절입니다.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마가복음 5:33~34)
이럴수록 시간은 지체됩니다. 야이로의 마음은 급해집니다. 왜 하필 중간에 여인이 나타나 자신의 길을 가로막는지 답답합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더 서둘러 주면 좋겠는데, 그 자리에서 계속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야이로가 느끼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요?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예수님, 너무 느려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 줄 수 없을 것만 같은 예수님입니다. 심지어 ‘혹시 내 딸을 살려낼 자신이 없어서 시간을 벌고 계시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듭니다. 이런 분을 과연 믿어도 되는지 의심마저 드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두려움을 넘어선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야이로는 이런 예수님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 주시며 “그래, 뛰어가자!”라고 말씀해 주시는 예수님, 나보다 내 문제를 더 걱정하며 단숨에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은 뛰어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시간을 허비하며 문제를 방치해 놓으십니다. 이런 주님을 과연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야이로는 이런 예수님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내 문제에 집중해 주시는 예수님,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도 일단 거절하고 내 문제부터 돌봐 주시는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은 내 문제가 아니라 다른 여인의 문제에 더 관심을 쏟고 계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예수님은 내 문제에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런 주님을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리하여 결국 걱정했던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 중 35절은 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마가복음 5:35 중)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더욱이 그때는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실 때’입니다. 왜 그날따라 주님이 말씀이 많으셨을까요? 왜 그토록 말씀을 끊지 않으셨을까요?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라는 구절은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 예수께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서 일하고 계실 때에” 바로 그때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입니다.
야이로의 절망이 느껴집니까? 아이를 살리려고 그렇게도 애썼건만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순간입니다. 주저앉아 울고 싶은 야이로의 심정이 느껴집니까? 갑자기 끼어든 한 여인 때문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만 같은 심정입니다. 예수님이 길게 이야기하지만 않았어도 됐을 텐데, 왜 그리 길게 이야기하셨는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그 여인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내 딸이 살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과 미움, 좌절과 실망이 뒤섞여 야이로를 괴롭힙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망하고 있던 야이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주님께는 우리 모두가 소중한 자녀입니다.
오늘 본문의 흐름을 살펴보면, 야이로가 예수께 요청했던 내용과 예수님이 행하신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께 엎드려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오셔서 내 딸에게 손을 얹어 구원을 받아 살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요청 그대로 주님은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 오셨고 집안까지 들어오십니다. 야이로의 딸에게로 다가가 손을 잡으시고 짤막히 외치십니다. “달리다굼!” 그리곤 소녀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야이로가 원하던 방식 그대로 이뤄 주신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야이로에게 군중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특히 혈루증 앓던 여인은 야이로에게 어떤 존재로 여겨졌을까요? 장애물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살면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주위에 있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야이로도 원하는 것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다른 것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게 치워 버려야 할 장애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달랐습니다. 어쩌면 혈루증 앓던 여인 외에도, 그 여인만큼이나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고 있던 사람들이 또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야이로가 보기에는 군중 혹은 장애물이었지만, 우리 주님께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소중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는 흥미롭게도 12년이라는 공통된 기간이 등장합니다. 야이로가 딸아이와 즐겁고 행복하게 살던 그 12년 동안 한 여인은 혈루증으로 고통당하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며, 오로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던 시간이었습니다. 야이로가 그토록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여인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썼고 간절하게 그분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야이로의 믿음에 대한 영웅적인 결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중심을 차지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이 내용을 따로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이 이야기는 서로 얽혀지면서 예수님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마침내 야이로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혈루증 앓던 여인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야이로는 이 일을 통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기도도 들어주시는 분이구나. 나를 위해 일하시는 분이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구나. 나의 주님이기도 하지만, 너의 주님, 당신의 하나님도 되시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서 믿음의 삶을 삽시다.
언젠가 자녀의 대입수능고사를 앞두고 한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신 분이 교회에서 이렇게 기도해 주더란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배운 것, 아는 것만 나오게 해 주시고, 모르는 것 나오면 찍어도 맞게 해 주시고, 실수해도 맞게 해 주시고, 밀려 써도 맞게 해 주시고, 점수 잘 안 나와도 좋은 대학에 가게 해 주세요.”
혹시 우리의 기도가 이렇지는 않습니까? 물론 언뜻 듣기엔 참 간절한 기도 같고 좋은 기도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모습이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나만을 위한 하나님, 나의 필요만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만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군중이나 장애물이 되는 구조,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은 내 축복의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는 구조는 잘못된 방식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고, 사회로부터 기독교를 고립시켜 온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언젠가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는데, 찬양대원들이 열심히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독 두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분은 뭐가 그렇게 기쁜지 얼굴에 환한 미소와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듯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칸 아래 계시던 한 분은 당시 무슨 어려운 사정이 있었는지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눈물을 흘리고, 찬송을 해도 눈물을 흘리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슨 문제가 그분을 그토록 슬프게 했는지, 그 모습 또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 마음에 찾아온 깨달음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구나! 어떤 사람은 주님께 나아와 기쁘게 찬양하고, 어떤 사람은 슬픈 마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며 기도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구나.’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주님의 은총을 누리는 한 공동체입니다.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쁘며, 때로는 좋은 일이 있고, 때로는 나쁜 일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주님의 자녀입니다. 다른 사람을 제치고 먼저 달려가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오늘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님의 은혜가 족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다른 사람만 돌봐 주시고 내 기도는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투정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의 기도는 들어주셨는데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십니까?”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주님 앞에 서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