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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과 용서를 구하다
누가복음 11:2~4
김경진 목사
2025.03.09
<누가복음에 있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기도의 핵심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흔히 말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주기도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문은 마태복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 6장에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마태복음과 비교해서 비교적 짧고 단순합니다. 그래서 도리어 기도의 핵심 가치가 더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중요한 때마다 항상 기도하시고 늘 기도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기도하셨고, 그때 성령께서 임재하셨다고 전합니다. 또 제자 열두 명을 선택하실 때도 예수님은 밤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다음에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앞으로 있을 수난을 준비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끊임없이 중요할 때마다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도 그런 맥락 속에서 이어집니다. 오늘 역시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에 답하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을 이렇게 하라고 먼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 11:2)
이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오늘 주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이 관점을 가지고 오늘 주님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우리를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3~4절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 11:3~4)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가 2절 한 절에 요약되어 있다면, 우리를 위한 기도는 3~4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간결한 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세 가지가 잘 드러나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위하여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선 세 번째 기도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간단하게만 보기 위해서 먼저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탄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시험에 들어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 오는 시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시험에 들면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하지 못하다가 의미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인생이 가장 가치 있게 되도록 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세 번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나머지 두 가지 기도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르치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육신과 영혼에 반드시 필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먹는 것, 매일의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헬라어 본문으로 보면 ‘일용할’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epiousio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특이하게도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곳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기 문서인 ‘디다케’에서도 주님의 기도에만 드러나는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일용할’이라는 뜻으로 번역된 데에는 라틴어 초기 번역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는 이 단어를 ‘매일’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일용할 양식’을 ‘매일의 빵’이라는 뜻인 ‘panis quotidianus(daily bread)’라는 단어로 해석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성경들이 이 단어를 ‘일용할’, ‘날마다 얻는’, ‘매일의 양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다르게 해석했던 사람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제롬은 ‘에피우시오스’를 ‘매우 중요하다’, ‘매우 필수적이다’라는 뜻을 가진 ‘supersubstantialis(super substantial)’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는 ‘매일’, ‘날마다 먹는 양식’의 의미를 넘어서 ‘필수적이다’, ‘꼭 필요한 양식’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 등 새로 번역된 성경들은 이 의미를 조금 더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눅 11:3, 새번역)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눅 11:3, 공동번역개정판)
우리에게 필요한 먹을 것을 날마다 주십시오. (눅 11:3, 새한글성경)
어떤 분들은 ‘일용할’이나 ‘필요한’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차이점이 매우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명령하신 기도는 우리의 육신이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영혼이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안에는 날마다의 육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매일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영혼이 다시 채워지는 아름다운 양식을 구하는 기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예배 예식에는 성찬을 받기 직전에 항상 주기도문을 함께 읽곤 하였습니다. 그때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이 주님의 귀한 식탁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성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양식과 구원이 꼭 필요한 것처럼 용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늘 더 깊이 보려고 하는 두 번째 내용으로 넘어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눅 11:4a)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게 우리가 꼭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위한 기도문을 세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라면,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을 위한 매일의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또한 종국적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용서가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우리를 위한 기도문을 세 문장으로 줄였을 때, 우리가 반드시 빼놓지 않아야 할 만큼 용서가 중요한 기도의 제목인가? 매일의 양식은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구원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니 두 가지 기도의 내용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죽나요? 우리가 용서를 받지 못하면 허무한 인생으로 끝이 나나요? 언뜻 보면 용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부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하고 받고 나누는 용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양식만큼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용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 주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용서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었죠. 만약에 그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죄의 짐을 지고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감히 이 땅에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이 땅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또 서로 용서하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실천하고 정의를 외치며 정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는 정의롭기 어렵습니다. 늘 실수하고 판단에 오류가 있으며 정욕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기도 합니다. 또 욕심에 이끌려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제가 설교에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로 시작하는 찬송가를 인용하며 그 작사자인 김활란 박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찬송시를 적을 당시에 그는 애국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가 찬송가에 수록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그는 1936년 이후에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 내용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어떤 분이 저에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친일 행각을 벌인 사람의 찬송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성경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을 유혹해서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그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서 죽인 다윗의 노래와 기도가 아직도 시편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가 했던 한 번의 잘못으로 그의 모든 인생을 판단하셨다면 어쩌면 우리는 시편의 아름다운 주옥과 같은 노래들을 나누지 못했을 것입니다. 친일 행적을 두둔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잘한 점과 못한 점을 함께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한 점은 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잘못한 것은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저 한 번 잘못으로 모든 인생을 다 끝내 버린다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잘못에 회개하고 대가를 치렀다면, 그것을 잊어 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나같이 허물 많고 자주 실수하는 사람도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갈 만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가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연예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 가수가 참 노래를 잘하는데, 아깝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가 십수 년 전에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대마초를 피우는 바람에 구속되어 오랜 시간 동안 형을 살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재기하려고 하면 항상 악성 댓글과 비난이 쏟아져서 노래를 부르려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정말 재능 있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에 한 어린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많은 매체들이 악성 댓글과 거친 비난에 대해 우려 섞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 번 잘못할 수 있죠. 그리고 또 한두 번 더 잘못할 수도 있죠. 인간인데 어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회개하고 대가를 치렀다면, 그리고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는 공동체, 재기가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은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눅 11:4, 새번역)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 용서가 없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번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다 평가하고 정죄했다면 아마도 가정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참아 주고 누군가는 또 기다려 주고, 누군가는 용서해 주었기에 가정이 원만하고 지탱되었겠죠. 용서는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와 경험이 부족하고 사실은 판단력도 부족합니다. 여기에 쏠릴 수도 있고, 저기에 쏠릴 수도 있죠. 이런 문구에 서명할 수도 있고, 저런 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를 구하며,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의 사역이 없었다면,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를 얻지 못하고 어쩌면 파멸 가운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용서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용서하고 싶죠. 그런데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도 안 하는데, 어떻게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동의합니다. 당연히 회개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죄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은 자기에게 못을 박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을 향하여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 크고 놀라운 용서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고 더 기다리실 줄 아셨고, 그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예상하며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님의 기도를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눅 11:4)
언젠가 제가 운전하던 중에 정차해 있었는데 뒤에서 차가 와서 들이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100% 뒤차의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나가 보니까 뒤에 범퍼가 상당히 상했습니다. 받은 차도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받은 차를 가만히 보니, 하루하루 힘든 노동을 하는 것 같은 차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참 어렵게 산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차 여기저기에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여러 번 사고가 있었다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그분이 당황한 듯 나오더니, 어제 보험이 마감해서 오늘 들지 않았는데 큰일이 났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잘 고친 다음 자신에게 알려 주면 비용을 보내 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돌아와서 견적을 받고 전화할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그분이 돈을 내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쁨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은 제가 앞에 서 있는 차를 살짝 들이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가서 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충돌이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인사하는데, 앞의 차주분께서 굉장히 화가 난 듯이 확 튀어나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인가 큰 소리를 외치려고 하다가 저를 알아보시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되었으니 가시라고 해서 저도 한 번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용서가 있는 세상, 이것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나라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온통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모두 허물도 많고 죄도 많습니다. 서로를 향한 분노를 가지고 서로 정의를 외치지만, 이것은 이 나라와 우리를 살릴 수 없는 길입니다. 용서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내가 살고 우리가 살며 사회가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며, 용서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살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용서로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빛, 주님의 등불 되는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Seeking Food and Forgiveness
Luke 11:2-4
In today’s passage Jesus teaches His disciples to pray. This is known to us as the Lord’s Prayer. But the prayer in today’s passage is a bit different from the Lord’s Prayer commonly recited by us. It is simpler.
The Lord’s Prayer recited in church comes from Matthew. In Matthew 6 Jesus teachesthis prayer as He gives the Sermon on the Mount. So the Lord’s Prayer that we recite in public worship is taken from Jesus’ Sermon on the Mount.
According to the Synoptic Gospels, Jesus taught the Lord’s Prayer to His disciples twice—once as He gave the Sermon on the Mount, and another time when a disciple asked Him how to pray which is written in today’s Scripture from Luke 11.
The contents of the prayer in Luke are rather short and simple compared to that of Mark. Therefore, we may say the core values of prayer aremore clearly revealed in Luke.
First, Luke 11 starts by explaining the context and situation under which Jesus taught the Lord’sPrayer:
“One day Jesus was praying in a certain place. When he finished, one of his disciples said to him, ‘Lord, teach us to pray, just as John taught his disciples.’”(Luke 11:1)
According to the Gospel of Luke, Jesus always liked to pray. It records that He prayed whenever there was something particularly important. According to Luke, Jesus prayed after getting baptized and when He chose the Twelve. He also went to a solitary place to pray after the miracle of feeding 5,000 people with five fish and two loaves of bread. He prayed on the Mount of Transfiguration too.
Likewise, today’s text states that one day Jesus prayed in a certain place. Seeing this, a disciple asked Him how to pray. Today’s passage records the model prayerJesus taught His disciplesupon this request.
As I said earlier, the content of the prayer is quite simple. First, Jesus teaches them that they should start their prayer like this:
“He said to them,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Luke 11:2)
This part is the prayer toward God, the prayer for God. There is a lot I can say about it, but in order not to digress fromtoday’s message I will not preach about it further.
The sectionsfollowing this first part are prayers seeking our needs. What did Jesus teach His disciples to seek? Looking at the Lord’s Prayer from this perspective, we will find something interesting.
Why don’t we read the entire part? Let’s read it together: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Luke 11:3-4 NIV)
While verse 2 summarizes the prayer toward God, verses 3 and 4 wraps up the prayer for us.
Then what did Jesus teach us to seek? There are largely three. First, give us our daily bread. Second, forgive our sins. Thir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These are the three prayersthat Jesus teaches us to pray for ourselves.
First, let’s think of the third prayer. Let us not be tempted. This petition can be seenas a prayerseekingto always remain in the grace of God’s salvation.
The purpose of Jesus coming to earth was to save us, was it not? But if we fail to enter the grace of salvation because we fall into temptation, we will become the most miserable people on earth. In this sense, asking fordeliverance from temptation is an absolutelynecessary and desperate prayer.
I wish to quickly wrap up this third prayer in order to study the other two prayers in more detail. The first is “give us each day our daily bread.”
What do men live on? Food. We live on our daily food. Then what is this “daily bread” that Jesus speaks about?
In the original Greek text, the word “ἐπιούσιος (epiousios)” is used for “daily.” This is a very specialword that appears only in the Lord’s Prayer in Luke and Matthew. Accordingly,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its clear meaning.
The translation of “epiousios” into “daily”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Latin translation. When the Greek Bible was translated into Latin, “panis quotidianus” was used, which means “daily bread.” But Jerome used a different translation for epiousios: “supersubstantialis,” which means “super substantial” or “extremely critical.”
Therefore, the meaning of epiousios goes beyond “daily” andincludes“critical” and “essential.”
In this sense, we may say the New Living Translation (NLT) conveys the meaning of Jesus’prayer more clearly. The NLT writes:
“Give us each day the food we need,” (Luke 11:3 NLT)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CEV) also translates it as such:
“Give us each day the food we need.”(Luke 11:3 CEV)
The Revised New Korean Standard Version (RNKSV) and the New Korean Translation (NKT) also translate this verse in a similar vein, conveying the meaning of“food we need.”
You may ask what is so different between “daily food” and “the food we need.”The answer, however, is related to Jesus’ words when He was tempted by the devil: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on bread alone, but on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Matthew 4:4)
In other words,Jesus’ prayer asking for the food we need is, on the one hand, a prayer asking for the food for our bodies but, on the other, one asking for the food for our souls.
Now let’s move to the second part of Jesus’ teaching on we must pray for. This is what He says: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Luke 11:4a)
This is what I realized. Jesus taught us what we must pray for in a very simple and uncomplicatedmanner. He specifically pointed out three things to pray for.
I can understand the need to pray for our daily food—both material and spiritual. I can also understand the need to pray for deliverance from temptation. But why is forgiveness so important?
We die without our daily necessary food. Without a final salvation, our lives will be meaningless. So the first two prayers, I can understand.
But do we die if we don’t forgive? Can we not survive without forgiveness? At first glance, forgiveness appears to be a secondary problem in life.
However, we need to think more deeply. Through this prayer, Jesus is teaching us what is most critical to man. If there is one thing we tend to overlook, it is forgiveness. Being forgiven by God and forgiving each other. These are as essential to man as his daily food.
Without food, we die. We cannot survive. Likewise, without forgiveness, we cannot live. This is somethingto be pondered deeply.
If God had not sent His Son to earth to forgive our sins and to receive us, and if, as a result of this, we did notreceive God’s forgiveness, we would surely have beendestroyed with our burden of sin. But because our Lord forgave and received us, we dare live with hope in this world. The prayer Jesus taught us contains this very secret.
We are beings that must be forgiven by God; beings that must forgive and be forgiven by others.
We shout justice and desire to practice it. But we ourselves are far from perfect. We always make mistakes, err in our judgment, cannot overcome desires, and make the wrong decisions due to greed.
Not long ago, I introduced a hymn in my sermon that starts with “Ev’rything dark! Bleak, black.” The composer was Dr. Kim Hwal-lan (or Helen Kim). I explained that the hymn reflects her patriotism and concern for Korea at the time of composition. I also added, however, that she showed a pro-Japanese attitude in the years following 1936.
After that sermon, someone approached me carefully, remarking that it was interesting that a pro-Japanese composer’s song still remained in our hymnbook. I could guess what this person was trying to say. So I said, “Interestingly, the Bible is also like that in many ways.”
The songs and prayers of the man who seduced another man’s wife, made her his wife, and murdered her husband by sending him off to a battlefield are still compiled in the Bible. If God had judged David on his one mistake, all those beautiful songs of faith would be lost to us.
I am not trying to defend pro-Japanese conducts. But shouldn’t we be able to see both a person’s virtues and vices in our assessment? Shouldn’t we be able to see his/her merits, while learning from his/her demerits so that our future generation will not make the same mistake again?
In particular, if that person has paid the price for his/her wrong and has repented, shouldn’t we forget that wrong and allow that person to start anew? Wouldn’t that make it possible for sinful, erring people like us to live on?
I heard someone say this about a celebrity: “He was a great singer, but what a shame. He was greatly popular about a decade ago, but after spending some time in prison for doing drugs, he couldn’t make a rebound. Every time he tried to make a comeback, people posted negative online comments. For years, he couldn’t see light. How unfortunate for such a talented person.”
Not long ago, a young Koreanactress ended her own life. After this incident, various media voiced concern over toxic online comments and online criticism.
A person can make a mistake. But if that person repents, pays for his/her wrong, and does not repeat that mistake, shouldn’toursociety be ready to help him/her recover? Wouldn’t it be less suffocating if our society allowedus to get back up again?
These days, the term “setting history straight” is used often. But I think this expression must be defined more properly. Setting history straight must not be an endeavor to erase everything eternally, including the merits, based on the discovery of one wrong thing. We must assess history correctly, acknowledging the merits as well as the demerits.
I am aware that this is the true purpose of setting history straight. But weoften make the mistake of turning someone into an irredeemable person just because of one wrongdoing. That is why our Lord teaches us to pray like this:
“and forgive us our sins,as we forgive those who sin against us.” (Luke 11:4 NLT)
Just as we cannot live without food, we cannot live without forgiveness. Therefore, we must learn to forgive. Only then can we live.
This is the same for our families. If husbands and wives cannot forgive each other, they cannot live. If we judge our family based on one wrong and never give a second chance, that family has no hope.
This is the same with society. We all lack wisdom, experience, and judgement. We may lean toward this side or that; we may sign up under a certain slogan or join a certain group. Later we may regret it.
But we must first understand man’s weakness, and accept our own weaknesses. We are beings who need forgiveness.
Today is the first Sunday of Lent. This is a season to remember Jesus’ suffering, His ministry of bearing the Cross to save us.
What would have become of us if Jesus’ ministry of forgiveness and reconciliation had not existed? We would have perished without receiving the forgiveness of God. But because Jesus forgave us our sins on the Cross, we now have hope.
We often say, “I want to forgive. But the person who needs forgiveness won’t admit his/her wrong or repent. How can I just unconditionally forgive him/her first?” This sounds so right. Our hearts feel this way. I sometimes feel this way too.
But let’s have a think. Did Jesus forgive people on the Crossbecause they repented? Did He forgive them because they admitted their wrongs?
Didn’t Jesus pray like this?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Luke 23:34)
Even when they did not repent, our Lordsaid a prayer of forgiveness over them. This is true forgiveness.
Let’s look at the Lord’s Prayer again.
“Forgive us our sins, for we also forgive everyone who sins against us.”(Luke 11:4 NIV)
Dear Church, this nation is in deep confusion and turmoil. It is full of people who claim only they are right. Even when they have so many weaknesses and sins. With rage against one another, people shout justice. But none of this can save us, our country, or our society.
We must build a world with forgiveness, a society with forgiveness. Only then can I live, can we live, and canthissociety become a livable world.
That is why our Lord taught us to pray for forgiveness. Just as food is essential to us, forgiveness is too. We Christians are the very people who know this, the very people who have been called to proclaim this to the world.
By seeking and praying for forgiveness, and by forgiving, may we all save our homes, society, nation, and the world.
누가복음 11:2~4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누가복음에 있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기도의 핵심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흔히 말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주기도문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님의 기도문은 마태복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한 번은 마태복음 6장에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제자들의 요청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는 마태복음과 비교해서 비교적 짧고 단순합니다. 그래서 도리어 기도의 핵심 가치가 더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중요한 때마다 항상 기도하시고 늘 기도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기도하셨고, 그때 성령께서 임재하셨다고 전합니다. 또 제자 열두 명을 선택하실 때도 예수님은 밤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다음에도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앞으로 있을 수난을 준비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끊임없이 중요할 때마다 자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도 그런 맥락 속에서 이어집니다. 오늘 역시 예수님께서는 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에 답하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기도의 시작을 이렇게 하라고 먼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눅 11:2)
이 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오늘 주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에는 다루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을까요? 이 관점을 가지고 오늘 주님의 기도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우리를 위한 기도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3~4절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 11:3~4)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가 2절 한 절에 요약되어 있다면, 우리를 위한 기도는 3~4절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간결한 기도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세 가지가 잘 드러나고 있죠. 첫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위하여 드려야 할 기도의 제목입니다.
우선 세 번째 기도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간단하게만 보기 위해서 먼저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탄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시험에 들어 구원의 은혜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장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 오는 시험도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시험에 들면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하지 못하다가 의미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인생이 가장 가치 있게 되도록 해 달라는 탄원입니다. 동시에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세 번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고, 나머지 두 가지 기도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르치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육신과 영혼에 반드시 필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기도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먹는 것, 매일의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헬라어 본문으로 보면 ‘일용할’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피우시오스’(ἐπιούσιος[epiousios])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특이하게도 주님께서 가르치신 주기도문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두 곳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초기 문서인 ‘디다케’에서도 주님의 기도에만 드러나는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단어가 ‘일용할’이라는 뜻으로 번역된 데에는 라틴어 초기 번역이 큰 역할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라틴어로는 이 단어를 ‘매일’이라는 뜻으로 번역하여 ‘일용할 양식’을 ‘매일의 빵’이라는 뜻인 ‘panis quotidianus(daily bread)’라는 단어로 해석했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성경들이 이 단어를 ‘일용할’, ‘날마다 얻는’, ‘매일의 양식’으로 해석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할 때 다르게 해석했던 사람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제롬은 ‘에피우시오스’를 ‘매우 중요하다’, ‘매우 필수적이다’라는 뜻을 가진 ‘supersubstantialis(super substantial)’라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에피우시오스’라는 단어는 ‘매일’, ‘날마다 먹는 양식’의 의미를 넘어서 ‘필수적이다’, ‘꼭 필요한 양식’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 등 새로 번역된 성경들은 이 의미를 조금 더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공동번역, 새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 주십시오. (눅 11:3, 새번역)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눅 11:3, 공동번역개정판)
우리에게 필요한 먹을 것을 날마다 주십시오. (눅 11:3, 새한글성경)
어떤 분들은 ‘일용할’이나 ‘필요한’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한다면 차이점이 매우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 4:4)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명령하신 기도는 우리의 육신이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영혼이 먹을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떡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양식을 구하는 기도 안에는 날마다의 육적인 양식뿐만 아니라 매일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영혼이 다시 채워지는 아름다운 양식을 구하는 기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의 예배 예식에는 성찬을 받기 직전에 항상 주기도문을 함께 읽곤 하였습니다. 그때 성찬을 받는 사람들은 이 주님의 귀한 식탁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성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양식과 구원이 꼭 필요한 것처럼 용서도 우리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오늘 더 깊이 보려고 하는 두 번째 내용으로 넘어가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눅 11:4a)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게 우리가 꼭 기도해야 할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의 기도문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우리를 위한 기도문을 세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라면,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육신과 영혼을 위한 매일의 양식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또한 종국적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겨납니다. 용서가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우리를 위한 기도문을 세 문장으로 줄였을 때, 우리가 반드시 빼놓지 않아야 할 만큼 용서가 중요한 기도의 제목인가? 매일의 양식은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구원을 얻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은 허무로 끝납니다. 그러니 두 가지 기도의 내용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죽나요? 우리가 용서를 받지 못하면 허무한 인생으로 끝이 나나요? 언뜻 보면 용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매우 부차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것이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그리고 서로 하고 받고 나누는 용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양식만큼이나 매우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용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 주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그 위에서 우리에게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용서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었죠. 만약에 그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죄의 짐을 지고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감히 이 땅에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이 땅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을 꿈꾸고 부활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는 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또 서로 용서하며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정의를 실천하고 정의를 외치며 정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나와 우리는 정의롭기 어렵습니다. 늘 실수하고 판단에 오류가 있으며 정욕을 이기지 못해 무너지기도 합니다. 또 욕심에 이끌려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제가 설교에서 “캄캄한 밤 사나운 바람 불 때”로 시작하는 찬송가를 인용하며 그 작사자인 김활란 박사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찬송시를 적을 당시에 그는 애국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시가 찬송가에 수록되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러나 그는 1936년 이후에 친일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그 내용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나서 어떤 분이 저에게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친일 행각을 벌인 사람의 찬송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성경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남편이 있는 여인을 유혹해서 자신의 아내로 만들고, 그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서 죽인 다윗의 노래와 기도가 아직도 시편에 남아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가 했던 한 번의 잘못으로 그의 모든 인생을 판단하셨다면 어쩌면 우리는 시편의 아름다운 주옥과 같은 노래들을 나누지 못했을 것입니다. 친일 행적을 두둔하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평가할 때 잘한 점과 못한 점을 함께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한 점은 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잘못한 것은 다시는 그런 실수가 없도록 후대의 교훈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저 한 번 잘못으로 모든 인생을 다 끝내 버린다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잘못에 회개하고 대가를 치렀다면, 그것을 잊어 주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나같이 허물 많고 자주 실수하는 사람도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갈 만합니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떤 가수에게 지극한 애정을 갖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연예인의 이야기를 하다가 그 가수가 참 노래를 잘하는데, 아깝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가 십수 년 전에 아주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대마초를 피우는 바람에 구속되어 오랜 시간 동안 형을 살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재기하려고 하면 항상 악성 댓글과 비난이 쏟아져서 노래를 부르려다가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정말 재능 있는 그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어서 안타깝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얼마 전에 한 어린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많은 매체들이 악성 댓글과 거친 비난에 대해 우려 섞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한 번 잘못할 수 있죠. 그리고 또 한두 번 더 잘못할 수도 있죠. 인간인데 어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회개하고 대가를 치렀다면, 그리고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는 공동체, 재기가 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은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우리가 용서합니다. (눅 11:4, 새번역)
양식이 없으면 살 수 없듯이, 용서가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하고,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 용서가 없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서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지탱될 수 있었겠습니까? 한 번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다 평가하고 정죄했다면 아마도 가정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참아 주고 누군가는 또 기다려 주고, 누군가는 용서해 주었기에 가정이 원만하고 지탱되었겠죠. 용서는 그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혜와 경험이 부족하고 사실은 판단력도 부족합니다. 여기에 쏠릴 수도 있고, 저기에 쏠릴 수도 있죠. 이런 문구에 서명할 수도 있고, 저런 자리에 들어가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용서를 구하며, 용서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신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의 사역이 없었다면,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를 얻지 못하고 어쩌면 파멸 가운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용서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용서하고 싶죠. 그런데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도 안 하는데, 어떻게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동의합니다. 당연히 회개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한 걸음 물러서서 다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 죄인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은 자기에게 못을 박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음에도 그들을 향하여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참 크고 놀라운 용서의 차원입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고 더 기다리실 줄 아셨고, 그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예상하며 기다리실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님의 기도를 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눅 11:4)
언젠가 제가 운전하던 중에 정차해 있었는데 뒤에서 차가 와서 들이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100% 뒤차의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나가 보니까 뒤에 범퍼가 상당히 상했습니다. 받은 차도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받은 차를 가만히 보니, 하루하루 힘든 노동을 하는 것 같은 차였습니다. 한눈에 봐도 참 어렵게 산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차 여기저기에 흔적이 있는 것을 보니 여러 번 사고가 있었다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그분이 당황한 듯 나오더니, 어제 보험이 마감해서 오늘 들지 않았는데 큰일이 났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주면서 잘 고친 다음 자신에게 알려 주면 비용을 보내 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돌아와서 견적을 받고 전화할까 생각하다가, 아무래도 그분이 돈을 내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기쁨이 조금씩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은 제가 앞에 서 있는 차를 살짝 들이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가서 보니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충돌이었습니다. 죄송하다고 인사하는데, 앞의 차주분께서 굉장히 화가 난 듯이 확 튀어나오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인가 큰 소리를 외치려고 하다가 저를 알아보시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되었으니 가시라고 해서 저도 한 번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용서가 있는 세상, 이것을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나라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온통 자기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모두 허물도 많고 죄도 많습니다. 서로를 향한 분노를 가지고 서로 정의를 외치지만, 이것은 이 나라와 우리를 살릴 수 없는 길입니다. 용서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내가 살고 우리가 살며 사회가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에 대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세상에 전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위하여 기도하며, 용서로 가정과 사회와 나라를 살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용서로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빛, 주님의 등불 되는 그리스도인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5년 3월 9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양식과 용서를 구하다” (눅11:2~4)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38장, 36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주님께서 용서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불편함이 있다면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교의 요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시작한 뒤,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기도는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 이는 육신과 영혼을 위한 필수적인 양식입니다. 셋째,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구하는 기도입니다.
둘째,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용서를 간과하기 쉽지만, 용서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활란 박사의 찬송가 예화를 떠올립니다. 그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찬송가에 실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큰 죄를 지었지만 시편을 남겼습니다.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구별하고, 회개하면 용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사회도 회개하고 대가를 치른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순절을 맞아 예수님의 구원을 묵상합니다. ‘상대방이 회개하지 않는데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들 때, 예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하는 이들까지 용서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혼란스럽고, 각자 정의를 외치며 서로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용서를 구하며,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용서함으로 가정과 나라를 살려 나갑시다.
<나누기>
1.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가 서로 용서를 구하고, 또한 서로를 용서하는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그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역할과 사명 있을까요?
2. 구원의 문제와 양식의 문제처럼, 용서의 문제는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 문제입니다. 함께 각자 개인의 용서의 문제와 우리나라와 온 세계 가운데 용서함이 있도록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며 서로 용서하기를 바라시며, 또 하나님께 용서받기를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깁니다. 어지러운 이 세상 속에서 용서를 실천함으로 빛을 밝히는 우리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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