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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 어느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 말씀을 많이 들으셨고, 또 많이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읽으실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사실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전 같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주제들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명령 그 자체에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을 바쳐라. 죽여서 바치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보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비윤리적인 명령을 하실 수 있는가? 과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명령인가?’ 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비윤리적이고 비인륜적인 일까지 포함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외아들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마치 광신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하나님을 따르려면 자기 아들까지도 바쳐야만 하는가? 그 정도로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어렵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놓이게 됩니다. 아들을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을 만한 신앙의 행위인지 고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믿음의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브리서 11장 17절)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실 우리는 조금 의기소침해집니다. ‘과연 나는 이와 같은 믿음을 보여 드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늘 자신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내가 믿음에 있어서는 영원히 이류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열등감을 던져 주곤 합니다.
물론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Horace Bushnell은 아버지가 손과 밖을 묶는 자리에서 장성한 이삭이 반항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앙 교육을 잘했길래 이삭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잘 전수한 사람이라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힘을 빠지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열등감이 생기는데, 아들 이삭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본문은 큰 부담감을 줍니다.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계시진 않으실까?’ 질문을 던지며 읽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참 무거운 본문이 되고는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만 하는 말씀일까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적인 내용과 은혜로운 말씀의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늘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읽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내용만 들어 있는가? 아니면 혹시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만 집착해서 읽다 보니 혹시 다른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21장과 연결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이 얼마나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문이 얼마나 치밀하고 의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이야기는 그냥 쓰인 본문이 아닙니다. 아주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도 잘 짜인 구조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건과 연결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앞선 창세기 21장의 본문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1장은 어떤 말씀입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이지요.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종으로부터 얻은 이스마엘이었고, 다른 한 명이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을 받고 얻은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좁은 사라는 이삭만이 기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어미 하갈을 내어 쫓을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요청에 대해 들어주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이스마엘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르자 어미 하갈이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애통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주시고, 그에게 오셔서 물을 주시고 위로하여 주셨다는 내용이 창세기 21장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1장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세기 22장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두 이야기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본문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두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요. 21장에서는 종으로부터 얻은 첫 아들 이스마엘을 포기하고 내쫓아야 하는 문제에 처했고, 22장에서는 그토록 오래 기다려서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21,22장 모두 비윤리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21장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과 그 소생인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비윤리적인 요구를 합니다. 한 가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인륜적인 요구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사건 모두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21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신만을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면,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21장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2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스마엘과 하갈, 이삭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1장과 22장의 이야기는 상호 연결된 구조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21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라가 말합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창세기 21장 10절 중, 새번역)
터무니없는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창세기 21장 12절 중, 새번역)
창세기 22장도 동일한 패턴으로 전개됩니다. 22장에는 하나님의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중, 새번역)
첫 번째는 이스마엘을 버리라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는 이삭을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요청 모두를 받아들이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21장 14절 말씀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창세기 21장 14절 중, 새번역)
22장도 같은 패턴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창세기 22장 3절 중, 새번역)
그리고 21장에서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면서 떠날 준비를 하게 합니다. 22장 역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일러 주신 모리아 땅 어느 산에 떠날 준비를 하며,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합니다. 떠날 준비를 마친 후에 21장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22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집을 나서게 됩니다. 엄마와 아들이 집을 나서고, 아빠와 아들이 집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1장 16절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옆에 안타까워하는 엄마 하갈의 모습이 나타나죠. 22장 또한 동일한 구조를 가집니다.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22장에서는 이삭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21장처럼 감정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칼을 들고 아들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갈의 마음과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장면도 비슷합니다. 21장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창 21:17, 새번역)고 기록되어 있다면, 22장은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창 22:11, 새번역)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포되는 내용도 동일합니다.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창세기 21장 17절 중, 새번역)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창세기 22장 12절 중, 새번역)
두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식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분이 아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7~18절에서 천사가 이스마엘을 ‘아이’라고 부른 것과 22장 12장에서 이삭을 ‘아이’라고 표현한 것 역시 공통점입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창세기 21장 18절 중, 새번역)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창세기 22장 17절 중, 새번역)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을 발견하게 하셨다면(창 21:19), 고개를 든 아브라함에게는 수풀 속에 있는 숫양 한 마디를 보게 하십니다(창 22:13).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브엘세바라는 지명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21,22장의 연결된 구조는 ‘위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해 줍니다.>
장황한 비교였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 21,22장이 서로 평행 구조를 가진 본문임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듯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22장은 단독적인 본문이 아니라 앞선 본문과 이어지는, 마치 한 쌍을 이루는 연관성이 있는 본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의 연결되는 구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며 오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본문의 동일한 구조가 전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치켜세웠습니다. 아마도 22장을 21장과 떼어서 단독적인 본문으로 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1장과 연결해서 살펴본다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두 본문이 아브라함의 순수한 믿음과 순종을 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동일하게 순종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연결해서 본다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위기 속에 있는 사람’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마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신과 이삭만을 선택해 주길 강력하게 원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사라를 선택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자가 생겼고, 버려진 자가 생겼고, 억울한 자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도 이스마엘과 하갈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쫓겨난 이스마엘과 하갈을 버려두지 않으신 하나님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자와 같은 사람, 버려진 인생과 같은 이스마엘에게 다가가 주시고 그와 평생 함께하시기를 약속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2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22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 어느 산으로 갑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도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셨던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멈춰 서게 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아들까지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믿음의 열등감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도리어 이 본문이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선언과도 같았다고 예측합니다. 오늘 사건은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는 아들을 바쳐야만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해방의 언어였다는 뜻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신을 달래기 위해 아들을 잡아 바치는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이 일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던 것이 고대 근동 사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아들을 바치는 행위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 속에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바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바치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제물은 여호와께서 손수 준비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제물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셔서 인간과의 모든 관계를 해결하신 제물, 그 제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라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리며 그분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바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물이 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100세에 얻은 아들이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열 수는 없었습니다. 이삭도 죄인이고, 아브라함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제물을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발견된 숫양이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례요한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 중)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노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생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가 아들을 바쳤듯이 너희도 무엇인가를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본문이 아닙니다. 전 재산을 드려야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하나님의 해방의 선언입니다. 물론 아들을 바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요구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드릴 예물을 친히 준비하시겠다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들까지도 바치라고 하시는 혹독한 요구, 혹독한 시험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자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 같은 삶을 살게 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동행해 주신다는 희망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가와 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입니다. 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God Will Provide
Genesis 22: 9-14
Today’s Scripture, a well-known one, is about Abraham’s sacrifice of his only son Isaac to God on Mount Moriah. It is in this story that the Father of Faith is born. Whenever you read this story, what comes to your mind?
Frankly, Abraham’s story of faith places a heavy burden on us today in many respects.
First, how must we interpret God’s command to sacrifice one’s son? Is it moral or ethical? Does following God mean that we have to do such inhumane and immoral acts?
Second, to those of us living in this modern world today, Abraham seems fanatical when he goes off on his journey to sacrifice Isaac. Does following God entail such difficult jobs as sacrificing one’s son? Is sacrificing one’s son a commendable, religious act?
Of course, many parts of the Bible praise Abraham’s faith as an amazing act of faith. In Hebrews, God praises Abraham’s strong faith with these words: “By faith Abraham, when God tested him, offered Isaac as a sacrifice. He who had embraced the promises was about to sacrifice his one and only son.” (Hebrews 11:17)
So whenever we read Genesis chapter 22, we are gripped by a fear that we, too, must be ready to sacrifice our children in order to please God. And when we find ourselves incapable of doing so, we become disappointed in ourselves. Thus,it is true that today’s passage gives us a feeling of perpetual inferiority in terms of our faith.
There are, of course, diverging interpretations on this passage. Horace Bushnell, a scholar of Christian education, emphasizes how Abraham successfully educated his son on faith, which is evidenced in Isaac’s nonresistance against his father. In short, Bushnell is saying that Isaac was able to obey his father and follow his father’s faith because Abraham had raised him well in faith.
But even this interpretation makes us lose heart. If only Abraham’s “faith” had been stressed, we would only have to suffer from a sense of inferiority. But discovering that Isaac’s obedience came from Abraham’s praiseworthy“education” does not liberate us, butburdens us more heavily.
Then what is it that God is trying to tell us through this passage? I wish to discover this with you today.
Does this passage really contain only burdensome lessons that make us feel inferior? Is there no grace and freedom in it? Aren’t we, by any chance, missing the core message of the gospel in our excessive focus on Abraham’s “great faith”?
I wish to rediscover the meaning of Genesis 22 from the perspective of God’s grace upon us.
In order to discover the sheer joy held in this passage, we must first understand just how intentionally and meticulously it is being narrated. Today’s passage from Genesis 22 is not just “any story.” It is, in fact, written with the most delicacy. Furthermore, it does not exist independently, but is amazingly and intricately connected to other events in the Bible.
First, we must know that this passage is closely linked to the preceding chapter, which records how Hagar and Ishmael were sent away from Abraham’s home.
To Abraham, Ishmael and Isaac were both his sons, but the narrow-minded Sarah demands Hagar and her son to be sent away because only Isaac must get the inheritance. God tells Abraham to do as Sarah says, and Hagar and Ishmael are sent away. Finally, they are on the brink of dying in the wilderness of Beersheba. At this moment, God saw Hagar’s sorrow and sent angels to comfort her and give her water.
Then how is this story linked to today’s passage which describes Abraham sacrificing Isaac? The two, in fact, have some common structures and elements, which are important.
First, they are both related to Abraham’s son, Isaac. Furthermore, Abraham must give up his sons in both stories. In chapter 21, he is faced with banishing Ishmael. Then, in chapter 22, he mustagain sacrifice his other son, Isaac, to God.
Another common factor is that both stories start with an “immoral request” from God. In chapter 21, Sarah demands that Abraham kick Ishmael out. In chapter 22, God demands that Abraham sacrifice his only son whom he got at the age of 100. Both are “unimaginable, immoral, and inhumane” requests.
Another common trait is that both events have a hidden intention of confirming Abraham’s love. In chapter 21, Sarah wants to know if Abraham loves her enough to banish his concubine and her son. In chapter 22, God wants to know if Abrahams loves Him to the point of sacrificing his only son conceived at the age of 100.
The events in chapter 21 occur as a wife tries to confirm her husband’s love, and in the process others—Hagar and Ishmael—get abandoned. In chapter 22, as well, God wants to reaffirm Abraham’s love for Him. And in that process, another soul is abandoned and cast aside: Isaac.
Let me compare the two passages in more detail.
First, let’s look at verses Genesis 21:10 and Genesis 21:12. In 21:10, Sarah demands, “Get rid of that slave woman and her son, for that woman’s son will never share in the inheritance with my son Isaac.” (Genesis 21:10) But in verse 12, God commands, “Listen to whatever Sarah tells you.” (Genesis 21:12) So, eventually, it is God’s command that Abraham follows in sending Ishmael away.
Let’s look at Genesis 22:2. Here Abraham follows God’s command again. “Sacrifice him there as a burnt offering on a mountain I will show you.” (Genesis 22:2)
One command is to abandon Ishmael and the other is to abandon Isaac.
Then look at the verses that follow. “Early the next morning […]” (Genesis 21:14) Take a look at 22:3 as well: “Early the next morning Abraham got up and loaded his donkey.” (Genesis 22:3)
Let’s also look at the second part of Genesis 21:14: “Abraham took some food and a skin of water and gave them to Hagar. He set them on her shoulders and then sent her off with the boy.” (Genesis 21:14) This is Abraham getting ready to send Hagar and her son off. Chapter 22 has an identical structure. After receiving God’s command to sacrifice Isaac, Abraham prepares wood for the sacrificial fire early the next morning. In chapter 21 Hagar and Ishmael accompany Abraham on his journey, while in chapter 22 Isaacaccompanies him.
What is interesting is that Ishmael and Isaac both almost die. In 21:16, Ishmael is dying of thirst. The Bible describes the agony of Hagar watching him.Chapter 22 has the same structure. When it is time to sacrifice Isaac, Abraham lays Isaac on the firewood and ties him up. Then he raises a knife. How do you think Abraham would have felt as he raised his hand to kill his son? Although the Bible doesn’t say, he would have felt what Hagar felt as she saw her child dying. Ishmael and Isaac are both on the verge of death. Hagar and Abraham, who are with them, must watch. This same structure is seen in both chapter 21 and chapter 22.
But at the most critical moment, God intervenes dramatically. In 21:17, it says, “the angel of God called to Hagar from heaven and said to her, ‘What is the matter, Hagar?’” Let’s now look at 22:11. “But the angel of the Lordcalled out to him from heaven, ‘Abraham! Abraham!’” (Genesis 22:11) As you can see, in both scenes, an angel of the Lord calls from heaven.
Then what does the angel say in each scene? In chapter 21, the angel says, “God has heard the boy crying as he lies there.” (Genesis 21:17) And in chapter 22 the angel says, “Now I know that you fear God.” (Genesis 22:12) This means that God “knew.” God heard, and God knew. This is the level of God’s perception. God’s perception!
And in both chapters the angels refer to Abraham’s son as “the boy.” “God has heard the boy crying.” (Genesis 21:17) “Do not lay a hand on the boy.” (Genesis 22:5)
And God’s blessings declared by the angel have the same structure, too. “Lift the boy up and take him by the hand, for I will make him into a great nation.” (Genesis 21:18)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Genesis 22: 17)
Another similarity appears in 21:19 and 22:13. In the former verse, God opens Hagar’s eyes and makes her see water. In the latter, it says, “Abraham looked up and there in a thicket he saw a ram caught by its horns.” When God made Abraham look up and turn his gaze, he spotted a ram.
In chapter 21 Ishmael lives thanks to God’s help, and in chapter 22 Isaac is brough to life from near death.
Finally, the name of the region, Beersheba, is identical in the two stories.
Through this lengthy comparison, we come to understand that today’s Scripture from Genesis 22 is not a stand-alone story, but one intertwined with the previous chapter. Therefore, chapter 22 is more properly interpretedby understanding this connection.
Then what is the message conveyed to us through this repeating structure? Perhaps, by reading chapter 22 as an independent story, we have made too much of Abraham’s faith that sacrificed Isaac. When we connect it to chapter 21, however, we may gain a different, fresh perspective.
Then what do we find through a comparison of the two chapters? Of course, we discover Abraham’s obedience. In both chapters, Abraham was faithful to God’s command. It is clear that he was a man of true obedience and faith.
But we also discover something else: God’s help and care. In other words, the two chapters show us clearly what God has done and is doing for us.
First, chapter 21 is about conflicts in human relationship that arise in the process of fulfilling God’s will. Sarah was adamant about Abrahamchoosing her and her son alone. In the end, Abraham did do as she wanted and banished Hagar and Ishmael. Thus, a person was abandoned, wronged, and left behind. Yet, God drew near to that person. He heard his cry, gave him His covenant, and walked closely with him throughout his life. God is a helping God.
This is the same in chapter 22, which is about God-man relationship. It’s a story about a man’s effort to please God. This was why Abraham was willing to sacrifice Isaac. He was in a situation where he had to sacrifice his son in order to please God. For Isaac, he had to give his life to please God. But God drew near to Abraham. He saw his faith, gifted him with His covenant, and was with him his whole life. Here, too, God is a helping God.
Unlike our take from the story of Abraham sacrificing Isaac, which usually tends to be a sense of inferiority by comparing our faith to Abraham’s, theologiansclaim that Genesis 22 was actually a liberating story for the people living in the ancient Near East. That is, the events in Genesis chapter 22 were not burdensome to them, in the sense that they felt “obliged to sacrifice their sons,” but liberated them instead. At the time, sacrificing children to gods was common. In order to communicate with or appease a god, or to make a god one’s “own god”, people in the ancient Near East frequently, and quite naturally, sacrificed their sons. So, scholars say that Genesis chapter 22 actually liberated people in those times from such practices.
But today’s passage goes beyond even that.
Our God tells us an amazing story through the events in Genesis 22. He tells us that our faith is based on Jehovah Jireh, which means “God will provide.”
To have fellowship with God, man even attempted to sacrifice his son. But God stopped this. And Hedeclared, “God will provide.” Jehovah Jireh… God will prepare the sacrifice Himself.
God will prepare His sacrifice Himself…! God does not receive sacrifices prepared by man, but He will make man praise Him with sacrifices that He Himself has prepared.
This sacrifice is none other than Jesus Christ.
Abraham desired to serve God and have fellowship with Him even to the point of sacrificing his son Isaac… but God stopped it all. Instead,He gave Jesus Christ His Son as a sacrifice and made peace between man and God.
The ram that Abraham saw when he lifted his eyes and sacrificed to God was Jesus. John the Baptist saw this when he saw Jesus come toward him: “Look,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ohn 1:29)
Therefore, today’s passage is not about our own efforts. It does not stress makinga sacrifice on our part. It is not a demand to sacrifice our sons. Actually, it is the opposite.
Yes, the storydoes start with an insane demand to sacrifice one’s son. But it ends with God’s sheer grace. Therefore, it is about God’s grace. It is a story about how God Himself prepares the sacrifice for us. It is the gospel.
God wants us to discover freedom in today’s passage. He wants us to see hope. He does not want us to feel that it is a test or an inhumane request about sacrificing our son. He wants us to see His everlasting love that is with us to the end and prepares our needs.
God Himself prepared His Only Son as a sacrifice because He loved us and wanted a relationship with us. There is nothing for us to do. God is grace. This is the gospel that God wants to share with us today.
창세기 22: 9 ~ 14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믿음은 때로 우리에게 부담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땅, 어느 산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의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입니다. 이 말씀을 많이 들으셨고, 또 많이 읽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읽으실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사실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예전 같지는 않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주제들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명령 그 자체에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을 바쳐라. 죽여서 바치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보며 ‘어떻게 하나님께서 비윤리적인 명령을 하실 수 있는가? 과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명령인가?’ 하는 질문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비윤리적이고 비인륜적인 일까지 포함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외아들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은 마치 광신자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런 그를 보며 ‘하나님을 따르려면 자기 아들까지도 바쳐야만 하는가? 그 정도로 하나님을 따르는 일이 어렵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놓이게 됩니다. 아들을 바치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평가 받을 만한 신앙의 행위인지 고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믿음의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칭찬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브리서 11장 17절)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사실 우리는 조금 의기소침해집니다. ‘과연 나는 이와 같은 믿음을 보여 드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늘 자신 없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내가 믿음에 있어서는 영원히 이류가 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열등감을 던져 주곤 합니다.
물론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학자인 Horace Bushnell은 아버지가 손과 밖을 묶는 자리에서 장성한 이삭이 반항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신앙 교육을 잘했길래 이삭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순종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며,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아들에게도 잘 전수한 사람이라는 기독교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힘을 빠지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만 들어도 열등감이 생기는데, 아들 이삭을 신앙적으로 잘 교육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 큰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본문은 큰 부담감을 줍니다. ‘나는 과연 아브라함처럼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계시진 않으실까?’ 질문을 던지며 읽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참 무거운 본문이 되고는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요구만 하는 말씀일까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적인 내용과 은혜로운 말씀의 내용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늘 저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본문을 읽어 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고,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내용만 들어 있는가? 아니면 혹시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에만 집착해서 읽다 보니 혹시 다른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는 21장과 연결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 본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이 얼마나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문이 얼마나 치밀하고 의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친 이야기는 그냥 쓰인 본문이 아닙니다. 아주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도 잘 짜인 구조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독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건과 연결되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앞선 창세기 21장의 본문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1장은 어떤 말씀입니까?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이지요.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명은 종으로부터 얻은 이스마엘이었고, 다른 한 명이 이삭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을 받고 얻은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좁은 사라는 이삭만이 기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과 어미 하갈을 내어 쫓을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요청에 대해 들어주라고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십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이스마엘이 거의 죽기 직전에 이르자 어미 하갈이 울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애통함을 보신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주시고, 그에게 오셔서 물을 주시고 위로하여 주셨다는 내용이 창세기 21장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21장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창세기 22장은 어떻게 연결됩니까? 두 이야기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본문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두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요. 21장에서는 종으로부터 얻은 첫 아들 이스마엘을 포기하고 내쫓아야 하는 문제에 처했고, 22장에서는 그토록 오래 기다려서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21,22장 모두 비윤리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21장에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첩인 하갈과 그 소생인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비윤리적인 요구를 합니다. 한 가족으로서 있을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마찬가지로 2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소중한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십니다.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인륜적인 요구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사건 모두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21장에서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신만을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면,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신을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하십니다. 21장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2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이스마엘과 하갈, 이삭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21장과 22장의 이야기는 상호 연결된 구조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두 본문을 조금 더 자세하게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21장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라가 말합니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창세기 21장 10절 중, 새번역)
터무니없는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너에게 말한 대로 다 들어 주어라.” (창세기 21장 12절 중, 새번역)
창세기 22장도 동일한 패턴으로 전개됩니다. 22장에는 하나님의 요청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그를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장 2절 중, 새번역)
첫 번째는 이스마엘을 버리라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는 이삭을 버리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가지 요청 모두를 받아들이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21장 14절 말씀입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창세기 21장 14절 중, 새번역)
22장도 같은 패턴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창세기 22장 3절 중, 새번역)
그리고 21장에서 아브라함은 먹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면서 떠날 준비를 하게 합니다. 22장 역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일러 주신 모리아 땅 어느 산에 떠날 준비를 하며, 번제에 쓸 장작을 준비합니다. 떠날 준비를 마친 후에 21장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이, 22장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집을 나서게 됩니다. 엄마와 아들이 집을 나서고, 아빠와 아들이 집을 나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 죽음 직전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21장 16절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이스마엘이 죽어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옆에 안타까워하는 엄마 하갈의 모습이 나타나죠. 22장 또한 동일한 구조를 가집니다. 21장에서는 이스마엘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22장에서는 이삭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21장처럼 감정적인 흐름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지만 칼을 들고 아들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을 상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갈의 마음과 거의 같았을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장면도 비슷합니다. 21장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창 21:17, 새번역)고 기록되어 있다면, 22장은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창 22:11, 새번역)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포되는 내용도 동일합니다.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창세기 21장 17절 중, 새번역)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창세기 22장 12절 중, 새번역)
두 본문에서 하나님의 인식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그분이 아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17~18절에서 천사가 이스마엘을 ‘아이’라고 부른 것과 22장 12장에서 이삭을 ‘아이’라고 표현한 것 역시 공통점입니다. 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창세기 21장 18절 중, 새번역)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창세기 22장 17절 중, 새번역)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을 발견하게 하셨다면(창 21:19), 고개를 든 아브라함에게는 수풀 속에 있는 숫양 한 마디를 보게 하십니다(창 22:13).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마엘과 이삭 모두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두 이야기에 브엘세바라는 지명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21,22장의 연결된 구조는 ‘위기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해 줍니다.>
장황한 비교였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 21,22장이 서로 평행 구조를 가진 본문임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듯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22장은 단독적인 본문이 아니라 앞선 본문과 이어지는, 마치 한 쌍을 이루는 연관성이 있는 본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의 연결되는 구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전해 주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며 오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본문의 동일한 구조가 전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을 치켜세웠습니다. 아마도 22장을 21장과 떼어서 단독적인 본문으로 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1장과 연결해서 살펴본다면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두 본문이 아브라함의 순수한 믿음과 순종을 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동일하게 순종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본문을 연결해서 본다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로 ‘위기 속에 있는 사람’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 두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해 무엇인가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마찰이 담겨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자신과 이삭만을 선택해 주길 강력하게 원했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사라를 선택하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자가 생겼고, 버려진 자가 생겼고, 억울한 자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도 이스마엘과 하갈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쫓겨난 이스마엘과 하갈을 버려두지 않으신 하나님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자와 같은 사람, 버려진 인생과 같은 이스마엘에게 다가가 주시고 그와 평생 함께하시기를 약속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2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22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 어느 산으로 갑니다. 그 자리에 하나님도 함께하고 계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셨던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멈춰 서게 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이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아들까지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믿음의 열등감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도리어 이 본문이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선언과도 같았다고 예측합니다. 오늘 사건은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는 아들을 바쳐야만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해방의 언어였다는 뜻입니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신을 달래기 위해 아들을 잡아 바치는 행위가 만연했습니다. 이 일이 마땅한 것처럼 여겨지던 것이 고대 근동 사회였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오늘 본문이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아들을 바치는 행위를 원치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 속에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바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자신의 아들까지도 바치는 시도를 통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도리어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막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제물은 여호와께서 손수 준비하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제물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셔서 인간과의 모든 관계를 해결하신 제물, 그 제물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존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면서라도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리며 그분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바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제물이 달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100세에 얻은 아들이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열 수는 없었습니다. 이삭도 죄인이고, 아브라함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제물을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 발견된 숫양이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세례요한이 이렇게 선언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장 29절 중)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노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생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가 아들을 바쳤듯이 너희도 무엇인가를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본문이 아닙니다. 전 재산을 드려야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는 하나님의 해방의 선언입니다. 물론 아들을 바치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요구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의 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드릴 예물을 친히 준비하시겠다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들까지도 바치라고 하시는 혹독한 요구, 혹독한 시험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자가 되었을지라도, 하나님께 버려진 존재 같은 삶을 살게 될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도 동행해 주신다는 희망의 말씀을 들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다가와 주실 뿐만 아니라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받으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입니다. 귀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2021년 3월 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창 22:9-1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3장, 9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22:9-1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바치는 내용입니다. 이 본문은 현대인들에게 여러 면에서 부담스런 주제들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이 도덕적이며 윤리적인가?’라는 질문과 ‘나는 아브라함처럼 가장 귀한 것을 바칠 준비가 됐는가’라는 신앙적 열등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질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실까요?
설교의 요약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 창세기 22장은 앞 장 21장의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21장은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는 이런 공통점이 있습니다. 1) 두 본문이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이스마엘과 이삭)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이고, 2) 두 본문 모두 한 결 같이 하나님의 비윤리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고, 3) 모두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21장은 사라의 아브라함의 사랑 요구, 22장은 하나님의 아브라함의 사랑 요구)가 내면에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두 본문의 비교를 통해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우리는 두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살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무엇을 하셨으며 또한 하고 계신지를 밝히 보여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창 21장은 하나님이 버려진 자(하갈과 이스마엘)를 돌보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창 22장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아들을 버리려할 때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을 돌보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아들을 바쳐야하는 부담감을 주기 위한 본문이 아니라 사람과 제도에 의해 버려지는 사람에게, ‘내가 돕겠다’라는 은혜의 선언입니다.
당시의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잡아 바치는 행위가 흔하였습니다. 우상을 달래기 위해서 또한 신을 자신과 가문의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바치는 것은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제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살고 있었던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이 본문은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을 선언해 주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바치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막으십니다. 인간이 만든 번제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번제물을 마련하신다는 겁니다. 그 번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떤 노력을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을 손수 준비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유, 희망, 은혜를 보기 원하십니다.
나누기
1. 오늘 본문(창 22장)을 읽을 때마다 어떤 부담을 느끼셨나요?
2. 오늘 말씀을 듣고, 우리는 어떤 부담에서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어떻게 일상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사십니까?
마무리 기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내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