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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는 사람을 위한 염려

마태복음 6: 25 ~ 32

김경진 목사

2019.09.15

< 염려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상하게 합니다. >

오늘 말씀은 염려하는 사람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염려하지 말라고 설교해야 할지, 또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정작 저 자신이 한 주간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도 염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주위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폐해가 잘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인간에게 큰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염려라는 독한 병입니다.
인간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염려라는 질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는지, 염려라는 장막에 갇혀 인생을 허비했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을 불행으로 만드는 단초에는 늘 염려라는 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염려처럼 끈질긴 것도 없습니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는지,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위로해줄 때는 고개를 끄떡이지만, 그 설명이 끝나기도 무섭게 돌아서면 또다시 ‘하지만…’이라며 염려하는 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염려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염려가 시작되지만 결국 이 염려가 모든 인격과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염려가 힘을 발휘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옆에 있는 또 다른 사람도 염려하게 되고, 이어 또 다른 사람도 염려에 전염됩니다.
게다가 염려처럼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worry’라는 단어의 어근의 뜻은 ‘물어뜯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물어뜯어서 우리로 찬송과 기도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주님은 염려가 우리의 몸과 목숨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5)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근원적인 염려를 예로 들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또는 의류점에 가서 어떤 옷을 고를지 정도의 선택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먹고 살아갈 수는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염려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가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실제로 몸이 상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염려로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 불안해집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의심이 많아집니다. 조급해집니다. 나중에는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과 가족에게 신경질 부리고 안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 상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염려는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 염려는 오늘의 삶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염려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가져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므로 오늘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염려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염려란 우리의 마음을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는 않을까? 혹시 시집을 못 가는 건 아닐까? 혹시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혹시 아이가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혹시 학교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게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불행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미래는 불행 속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신나게 내리막으로 뛰어 내려갑니다. 엄마는 따라 내려가면서 말합니다. “안 돼! 안돼!” 왜 안 된다고 할까요? 뛰다가 넘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아이가 뛸 때 함께 뛰면서 기분 좋게 뛰어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아이가 넘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뛰어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엄마는 염려 때문에 그 시간을 충일하게 보내지 못합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부모 역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대학입시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하느라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합니다. 심지어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정작 제대로 공부를 못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현실로 가져와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래서 결국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는 못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귀던 사람이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아기를 못 갖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아직 결혼도 안 했고,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아빠의 사업이 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직 아빠는 사업을 구상 중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먼저 앞으로 달려가서 걱정하는 것일까요? 걱정하느라 오늘이라는 귀한 날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

< 염려는 정작 쓸모없는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

세 번째로 우리는 종종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염려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아주 고전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아서 랭크’라는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몇 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많이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보겠습니다.
늘 걱정과 염려가 많아서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아서 랭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염려하느라 매일매일 힘들고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염려하는 날’로 정하는 것입니다. 염려 상자를 만들어 염려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내용을 적어 상자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곤 그 염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 수요일에만 염려 상자를 열어 적어둔 내용을 읽으며 염려하기로 정한 것입니다. 드디어 수요일이 되어 염려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과연 많은 염려 종이들이 나왔습니다. 한 장씩 한 장씩 읽어 가면서 본격적으로 걱정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사이에, 한 주간도 안 되는 그 사이에, 저절로 많은 염려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는 걱정거리가 안 된 것들이 70% 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자주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병원에 가서 MRI 촬영을 합니다. 간에 알갱이 몇 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CAT Scan을 촬영하자고 합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걱정과 염려가 생깁니다. ‘혹시 간암일 수도 있다는데 간암이면 어떡하지? 간암이란 진단이 나오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술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자연치유를 선택해야 할까? 자연치유를 위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누가 나를 따라와 줄까? 하던 일은 어떻게 하나? 사표를 내야 하나? 아니면 휴직 처리를 해야 하나? 개인사업이라면, 내가 하던 이 사업을 누가 맡아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수술을 받는다면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까? 혹시 수술을 받다가 의사 선생님이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배우자는 어떻게 하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저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염려들은 며칠 후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질 걱정거리입니다. 즉 쓸모없는, 쓸데없는 걱정들입니다.

< 내 영역을 벗어난 염려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

네 번째로 예수님은 염려해도 소용없는 것들을 우리가 염려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6장 27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닌데, 하나님의 영역을 붙잡고 쓸데없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염려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라고 우리는 염려합니다. 그렇게 걱정한다 해서 우리가 암에 걸리지 않습니까?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암에 걸리는 것은 우리의 염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산 위에 좋은 집을 사서 살고 계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분이 매우 큰 염려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산 위의 아주 좋은 집에 살면서도 늘 마음에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염려를 품고 계셨습니다. ‘그럼 차라리 도시에 내려와 사시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에 살면서 매일매일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계셨습니다. 여러분, 산불이 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1~2)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계획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생각하고, 염려해도 하나님이 세워 주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염려를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이 오늘 본문 30절에 나타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30)

‘나의 신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공중의 새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백합화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꽃들도 공중의 새들도 하나님께서 입히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믿으라. 너희는 나를 믿는 자들이 아니냐? 나의 자녀들이 아니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렵게 자수성가한 친구가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열심히 가족만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했고, 직업이 없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자신이 벌어오는 것으로 살림을 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끊이지 않았던 친구입니다. 늘 가계부를 적고, 하루하루 필요한 물건을 계산하고, 집을 옮기는 문제, 전세를 얻는 문제, 동생들에게 가게를 얻어 주는 문제, 아버지의 건강 문제 등으로 늘 씨름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세례를 받던 날 제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제 내게도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다. 나의 걱정과 근심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이제 내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린아이가 소파 위에서 아버지에게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붙잡아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까르르 웃고 다시 올라갑니다. 소파에 올라가 다시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받아냅니다. 아이는 또다시 웃고 다시 올라가 뛰어내립니다. 만약 이 아이가 ‘아빠가 혹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지?’라고 염려했다면 뛰어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아빠를 믿기 때문에 뛰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즐겁게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이가 됩니다. 염려가 사라지면 놀이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 나라에 둘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

두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질적인 것, 명예, 건강 등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염려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죽어도 하나님 나라가 약속돼 있으니, 무엇을 겁낼 것인가? 내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며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염려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축복의 약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덤으로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욕심에 매여 염려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생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나님을 위하여, 보다 복 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서 선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 염려 대신 ‘감탄’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

또 한 가지, 세 번째로 염려를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8~29 중)

염려와 반대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 오늘 이 말씀에 숨겨져 있습니다. 염려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무엇일까요? 바로 ‘감탄’입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시며 감탄의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백합화를 보면서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백합화를 밟고 지나가면 어떻게 하지? 홍수가 나서 백합이 물에 차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백합은 왜 하필이면 저곳에 피었을까? 왜 하필이면 저 큰 나무 아래서 싹이 났을까? 저 큰 나무 때문에 백합이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처럼 얼마든지 들판의 백합을 보며 걱정하고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며 염려 대신 감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멋진가? 이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가!”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어머니를 미리부터 치매 환자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웃으셨구나!’라고 환호하면 되는 것입니다. “멋지시네요. 아직 몸이 움직이시네요. 잘 걸으시네요. 하나님,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와 이렇게 좋은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공부 못해서 좋은 학교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걱정과 염려를 미리 앞당겨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에게 허락해 주셨지? 공부가 문제냐? 지금 네 모습 자체로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감탄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또 감사는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이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강조해서 말씀드린들 여러분의 염려가 얼마나 많이 사라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감탄하십시오. 믿으십시오. 주님의 나라를 구하십시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32)

WorryingForThe Worried
Matthew 6:25-32

I give this sermon today with a worry in my heart for those who worry. As I was preparing mymessage, however, I found myself worrying. Everyone knows they should not worry. So, Iwas worried that I would not be able to speak effectively about such an obvious topic. What a paradox!

Everyone worries. No one is free from worry. It is a human disease. In human history, countless people suffered from this truly insidious disease. Man wasted his precious time in its shadows. Worry is poisonous. It makes man unhappy. It is unrelenting. When somebody tells us there’s no need to worry, we immediately acquiesce.But as soon as he goes away, we say, “But, what if…?”Worry is contagious, too. It starts in our mind and thoughts, but soon spreads to our whole life and body. It makes others worry, too.

Furthermore, worryingshakes our faith. Few things undermine our faith as much as worry. Did you know that the etymology of the word is “to slay, kill or injure by biting and shaking the throat”? Worry bites our heart and soul and chokes our prayers and praises. In thisregard, worry and faith are antithetical.

Today’s scripture from Matthew is about worry. First, Jesus tells us that worrying hurts our life and body: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es?” (Matthew 6:25)

Jesus points to man’s most fundamental worries such as what to eat, drink, and wear. These worries are not so much about choosing a menu at a restaurant or picking a dress at a store. They imply deeper concerns such as ‘Will I be able to make ends meet?’, ‘Will I ever get married?’ or ‘Will I ever get to buy an apartment for my family?’ But what does Jesus say to us who are worried about such things? He says, “Is not life more than food, and the body more than clothes?” This means that worry can hurt our body and destroy our life. Jesus is telling us that it is meaningless if your worrying about what to wear hurts you.

When our hearts are filled with worry, we become anxious, afraid, doubtful, and even depressed. We get irritated at the people around us, too. Worry bites and strangles. It hurts our body and soul, and sometimes even takes lives. It is a serious hazard. Furthermore, it can destroy families and communities. That is why Our Lord tells us not to worry.

Second, we must not worry because worryingprevents us from living today to the fullest. Worrying makes us anxious about the future, even before it happens. Henri Nouwen writes that worrying is “to fill our time and place long before we are there.” He also writes that worrying“is a mind filled with ‘ifs.’”

We say to ourselves, ‘What if I have cancer? What if I get into an accident? What if I can’t get married? What if it rains? What if my son falls down? What if he doesn’t come home from school?’ Filling our mind with these “what ifs” is worrying. And when we do this, we cannot live the present to the fullest. We drag an unrealized future to the present and fill our minds with worry and concern. This prevents us from living the present to the fullest.

That is why Jesus says,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Matthew 6:34) Worry is like a locust that gnaws a precious fruit called today. Therefore, when we worry, wewaste the present. Worrying fills our future with unhappiness. Therefore, we must never worry.

Let me tell you a well-known anecdote on worrying. There was once a businessman called Arthur Rank who was always worried. He was sick and tired of worrying. So, one day, he decided to do all his worrying on one day, Wednesday. Whenever something worried him, we would write that down on a piece of paper and put it in his “worry box.” And, every Wednesday, he would open the box and worry about the things that he had written. However, the amazing thing was that, when he opened the box on Wednesday, he found that 70 percent of the things that he had worried about had already been solved.

It’s not just Arthur Rank. Look around. We really do worry about things that we need not worry about. Why don’t we also write down our worries and reflect on them? Are they really things that we ought to worry about?

Furthermore, Jesus points out that our worrying is useless: “Can any one of you by worrying add a single hour to your life?” (Matthew 6:27) By these words, Jesus is pointing out that we, quite often, needlessly worry about things over which only God has authority. We say to ourselves, ‘What if I have cancer?’ But does our worrying prevent us from getting cancer? Cancer has nothing to do with worrying about it.

This is what Psalm 127 says: “Unless the Lordbuilds the house,the builders labor in vain.Unless the Lordwatches over the city,the guards stand watch in vain.In vain you rise earlyand stay up late,toiling for food to eat—for he grants sleep to those he loves.” (Psalms 127:1-2)

Then how can we free ourselves from worry? The first way is found in verse 30: “If that is how God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her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ir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you of little faith?” (Matthew 6:30)

By this, Jesus is telling us that we must be conscious of who we are. We are not pagans, but God’s children. That is our identity and status. We are not birds of the air or grass of the field. God feeds and clothes even the birds and the flowers. If so, will He not do much more for us—you of little faith? Jesus tells us to have faith in Our Father. Faith makes us overcome worry. Faith defeats worry.

Second, Jesus tells us that we can overcome worry by looking at other things—that is, by concentrating on more fundamental things. Jesus tells us in verse 33,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Matthew 6:33) To overcome worry, our life views must change. When our thoughts are on material things, honor, and health, we will never free ourselves from worry or anxiety.

‘What if I get cancer? Yes, I could die. But, how can that hurt me?! Even if I were to die, God promised me His kingdom, so what’s there to fear? I’ll just give those fears up to God and live the present to the fullest. I will live a life connected to eternity.’ Jesus is telling us to think and live like this. What’s more, He blesses us when we do: “[…]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Matthew 6:33) How precious this is! Jesus is promising us that if we live for His kingdom, He will provide us with all we need.

Today’s passage provides us with another way to overcome worry. Jesus says in verses 28 to 29, “And why do you worry about clothes? See how the flower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labor or spin.Yet I tell you that not even Solomon in all his splendor was dressed like one of these.” (Matthew 6:28-29)

These verses reveal an important perspective that fights worry. The opposite of worrying is marveling. Through His observation of the flowers of the field, Jesus teaches us to marvel. We can easily worry about the flowers in the field. ‘What if they get trampled? What if they get too much rain? What if they die?’ However, Jesus marvels at them. He says that they outshine Solomon’s splendor.

‘What if mom gets dementia?’ Don’t worry about something that hasn’t even happened yet. Don’t make her a dementia patient with your worrying. Instead, be glad about how bright and glowing she is now. Be thankful for her health today. Be thankful for spending time with her today.

‘What if my children’s grades fall and theyfail to get into a good college?’ Rather than worrying about your kids, marvel at how precious and adorable they are now. Thank God for allowing you such beautiful children. Grades are not the issue. See how wonderful they are! Marvel at them.Marveling leads to thanksgiving. Worries fade and thanksgiving and praise fill our hearts.

Our Lord speaks to us today: “So do not worry,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at shall we wear?’For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an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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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 25 ~ 32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 염려는 우리의 마음과 삶을 상하게 합니다. >

오늘 말씀은 염려하는 사람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설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염려하지 말라고 설교해야 할지, 또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정작 저 자신이 한 주간 많은 염려를 했습니다.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구도 염려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염려라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주위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폐해가 잘 느껴지지 않을 뿐이지, 인간에게 큰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 염려라는 독한 병입니다.
인간의 오랜 역사 가운데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염려라는 질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는지, 염려라는 장막에 갇혀 인생을 허비했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삶을 불행으로 만드는 단초에는 늘 염려라는 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염려처럼 끈질긴 것도 없습니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는지, 그 내용을 잘 설명해 주고 위로해줄 때는 고개를 끄떡이지만, 그 설명이 끝나기도 무섭게 돌아서면 또다시 ‘하지만…’이라며 염려하는 게 우리의 실상입니다.
염려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에서 염려가 시작되지만 결국 이 염려가 모든 인격과 몸을 지배하게 됩니다. 즉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염려가 힘을 발휘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옆에 있는 또 다른 사람도 염려하게 되고, 이어 또 다른 사람도 염려에 전염됩니다.
게다가 염려처럼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worry’라는 단어의 어근의 뜻은 ‘물어뜯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물어뜯어서 우리로 찬송과 기도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염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하나씩 설명해 주십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주님은 염려가 우리의 몸과 목숨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복음 6:25)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가장 근원적인 염려를 예로 들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말씀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어떤 메뉴를 선택할지, 또는 의류점에 가서 어떤 옷을 고를지 정도의 선택의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먹고 살아갈 수는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염려에 놓인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염려가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실제로 몸이 상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염려로 쌓이게 되면 그때부터 불안해집니다. 두려움이 생깁니다. 의심이 많아집니다. 조급해집니다. 나중에는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과 가족에게 신경질 부리고 안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뜯어 상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몸을 망가뜨리고, 심지어 목숨을 앗아가기도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때로 염려는 우리의 가정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 염려는 오늘의 삶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방해꾼입니다. >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염려는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앞당겨 가져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므로 오늘을 충일하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염려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무엇인가로 가득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염려란 우리의 마음을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암에 걸리지 않을까? 혹시 자동차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혹시 실직하지는 않을까? 혹시 시집을 못 가는 건 아닐까? 혹시 비가 오면 어떻게 하나? 혹시 아이가 뛰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혹시 학교 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식으로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혹시’로 가득 채우는 게 염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불행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 미래는 불행 속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느라 오늘이라는 시간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신나게 내리막으로 뛰어 내려갑니다. 엄마는 따라 내려가면서 말합니다. “안 돼! 안돼!” 왜 안 된다고 할까요? 뛰다가 넘어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안 된다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아이가 뛸 때 함께 뛰면서 기분 좋게 뛰어 내려가지를 못합니다. 아이가 넘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뛰어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엄마는 염려 때문에 그 시간을 충일하게 보내지 못합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부모 역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대학입시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라고 염려하느라 몸도 상하고 마음도 상합니다. 심지어 걱정 때문에 잠도 이루지 못합니다. 정작 제대로 공부를 못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됩니다.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미리 현실로 가져와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그래서 결국 오늘을 제대로 살아내는 못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귀던 사람이 갑자기 결별을 선언하면 어떻게 하지? 아직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아기를 못 갖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아직 결혼도 안 했고,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아빠의 사업이 망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직 아빠는 사업을 구상 중인데…. 우리는 왜 이렇게 먼저 앞으로 달려가서 걱정하는 것일까요? 걱정하느라 오늘이라는 귀한 날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까지 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

< 염려는 정작 쓸모없는 경우일 때가 많습니다. >

세 번째로 우리는 종종 일어나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염려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아주 고전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아서 랭크’라는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몇 번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이야기를 해야 하나 안 해야 하나’ 많이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보겠습니다.
늘 걱정과 염려가 많아서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아서 랭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염려하느라 매일매일 힘들고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좋은 생각을 합니다. 일주일 중 하루를 ‘염려하는 날’로 정하는 것입니다. 염려 상자를 만들어 염려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내용을 적어 상자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곤 그 염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일주일 중 단 하루, 수요일에만 염려 상자를 열어 적어둔 내용을 읽으며 염려하기로 정한 것입니다. 드디어 수요일이 되어 염려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과연 많은 염려 종이들이 나왔습니다. 한 장씩 한 장씩 읽어 가면서 본격적으로 걱정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사이에, 한 주간도 안 되는 그 사이에, 저절로 많은 염려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는 걱정거리가 안 된 것들이 70% 이상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우리가 너무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자주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병원에 가서 MRI 촬영을 합니다. 간에 알갱이 몇 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CAT Scan을 촬영하자고 합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걱정과 염려가 생깁니다. ‘혹시 간암일 수도 있다는데 간암이면 어떡하지? 간암이란 진단이 나오면 가족들에게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술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자연치유를 선택해야 할까? 자연치유를 위해서 시골로 내려가면 누가 나를 따라와 줄까? 하던 일은 어떻게 하나? 사표를 내야 하나? 아니면 휴직 처리를 해야 하나? 개인사업이라면, 내가 하던 이 사업을 누가 맡아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수술을 받는다면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까? 혹시 수술을 받다가 의사 선생님이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배우자는 어떻게 하나? 자녀들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저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염려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 번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염려들은 며칠 후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이 “별문제 없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질 걱정거리입니다. 즉 쓸모없는, 쓸데없는 걱정들입니다.

< 내 영역을 벗어난 염려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

네 번째로 예수님은 염려해도 소용없는 것들을 우리가 염려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6장 27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태복음 6:27)

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닌데, 하나님의 영역을 붙잡고 쓸데없이 걱정하고 근심하며 염려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라고 우리는 염려합니다. 그렇게 걱정한다 해서 우리가 암에 걸리지 않습니까?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암에 걸리는 것은 우리의 염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한다고 암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산 위에 좋은 집을 사서 살고 계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남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분이 매우 큰 염려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산 위의 아주 좋은 집에 살면서도 늘 마음에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염려를 품고 계셨습니다. ‘그럼 차라리 도시에 내려와 사시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곳에 살면서 매일매일 ‘산불이 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계셨습니다. 여러분, 산불이 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1~2)

우리가 아무리 걱정하고, 계획하고, 잠을 자지 못하고, 생각하고, 염려해도 하나님이 세워 주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걱정과 염려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복입니다.

<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염려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염려를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이 오늘 본문 30절에 나타납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태복음 6:30)

‘나의 신분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공중의 새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백합화 정도가 아닙니다. “들의 꽃들도 공중의 새들도 하나님께서 입히고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를 믿으라. 너희는 나를 믿는 자들이 아니냐? 나의 자녀들이 아니냐?”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렵게 자수성가한 친구가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열심히 가족만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부양했고, 직업이 없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했습니다. 자신이 벌어오는 것으로 살림을 하느라 걱정과 염려가 끊이지 않았던 친구입니다. 늘 가계부를 적고, 하루하루 필요한 물건을 계산하고, 집을 옮기는 문제, 전세를 얻는 문제, 동생들에게 가게를 얻어 주는 문제, 아버지의 건강 문제 등으로 늘 씨름하던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세례를 받던 날 제게 했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제 내게도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다. 나의 걱정과 근심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의지할 분이 생겼으니, 이제 내 마음이 평안해진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린아이가 소파 위에서 아버지에게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붙잡아 줍니다. 그러면 아이는 까르르 웃고 다시 올라갑니다. 소파에 올라가 다시 뛰어내립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받아냅니다. 아이는 또다시 웃고 다시 올라가 뛰어내립니다. 만약 이 아이가 ‘아빠가 혹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하지?’라고 염려했다면 뛰어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아빠를 믿기 때문에 뛰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즐겁게 뛰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이가 됩니다. 염려가 사라지면 놀이가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 나라에 둘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

두 번째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염려를 극복하는 방법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보다 근원적인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이 달라져야 한다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물질적인 것, 명예, 건강 등 세상적인 것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결국 우리는 염려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것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가 죽어도 하나님 나라가 약속돼 있으니, 무엇을 겁낼 것인가? 내가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며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염려가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축복의 약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덤으로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쓸데없이 욕심에 매여 염려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생의 가치관을 바꾸고 하나님을 위하여, 보다 복 되고 의미 있는 일을 위하여 노력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님께서 선물로 내려주실 것입니다.

< 염려 대신 ‘감탄’으로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

또 한 가지, 세 번째로 염려를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28~29 중)

염려와 반대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 오늘 이 말씀에 숨겨져 있습니다. 염려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무엇일까요? 바로 ‘감탄’입니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화를 보시며 감탄의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백합화를 보면서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백합화를 밟고 지나가면 어떻게 하지? 홍수가 나서 백합이 물에 차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백합은 왜 하필이면 저곳에 피었을까? 왜 하필이면 저 큰 나무 아래서 싹이 났을까? 저 큰 나무 때문에 백합이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처럼 얼마든지 들판의 백합을 보며 걱정하고 염려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며 염려 대신 감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그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구나!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멋진가? 이 자체로 얼마나 존귀한가!”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하지?’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어머니를 미리부터 치매 환자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웃으셨구나!’라고 환호하면 되는 것입니다. “멋지시네요. 아직 몸이 움직이시네요. 잘 걸으시네요. 하나님,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와 이렇게 좋은 시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공부 못해서 좋은 학교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걱정과 염려를 미리 앞당겨 불행한 삶을 살지 말고,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감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쁜 아이를 나에게 허락해 주셨지? 공부가 문제냐? 지금 네 모습 자체로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감탄하는 것입니다. 감탄은 감사로 이어집니다. 또 감사는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이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강조해서 말씀드린들 여러분의 염려가 얼마나 많이 사라지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합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감탄하십시오. 믿으십시오. 주님의 나라를 구하십시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31~32)

2019년 9월 1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염려하는 사람을 위한 염려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37장, 38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6:25-3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9월 1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느 누구도 “염려”라는 단어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는지 설명할 때면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하지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염려는 다시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염려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도 없으며,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도 없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염려에 관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설교의 요약

첫째, 예수님께서는 염려가 우리의 몸과 목숨을 상하게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25절) 우리의 마음이 염려로 가득할 때에 불안함, 두려움, 의심, 조급함으로 영혼이 상하게 되고, 때로 가정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둘째, 오지 않는 미래를 앞당겨 가져와서 걱정하고 염려하기 때문에 오늘을 충실하게 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혹시’하면서 생각하는 염려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염려한다면, 결코 오늘이라는 현실을 행복하고 충실하게 보낼 수 없습니다.(34절)

셋째,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염려해도 소용이 없는 것들을 염려한다고 말씀하십니다.(27절) 이 말씀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하나님의 영역에 관한 부분을 붙잡고 쓸데없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첫째, 나의 신분이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30절) 우리는 이방인도 아니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온전히 믿을 때에 염려를 극복하며 이겨낼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하라고 말씀하십니다.(33절)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가치관일 달라져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 명예, 건강, 이러한 것에 관심을 두면 우리는 결코 염려와 걱정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들의 백합화를 보시면서 감탄의 관점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28-29절) 염려의 반대는 ‘감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를 보시면서 감탄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지도 않는 미래를 걱정하느라 염려하지 말고, 지금 있는 모습에서 ‘감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탄은 감사로 이어질 것이며, 염려는 사라지고 감사와 찬송이 넘쳐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지금 내 삶을 붙들고 있는 가장 큰 염려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우리는 왜 염려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요?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하나님,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믿지 않는 자처럼 염려를 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시선을 주시며, 무엇보다 우리의 삶 속에 감탄사가 넘쳐나길 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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