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예배자의 유혹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
요즘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지시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20장 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리고 나머지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 율법을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 왕에게 갈 것을 명하십니다. 바로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 말씀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출애굽기 3:18 중)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바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아론과 더불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선포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더욱 완강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며 횡포를 부립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성을 건축하는 데 사용할 벽돌을 굽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벽돌 재료도 주지 않으면서 같은 분량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아래 신음하며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보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준비한 열 재앙을 바로 앞에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앞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재앙을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나누며 읽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장면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하나님이 끈질기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바로는 끈질기게 하나님의 백성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낼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여기서는 두 곳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8장 1절과 9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섬기게 하려는 바로 왕,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하나님! 바로 이 둘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출애굽기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일강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첫 번째 재앙을 시작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재앙을 집행하셨습니다. 개구리가 물에서 올라오게 만드는 재앙을 일으키셨고,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을 일으키셨으며, 파리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재앙도 내리셨습니다. 이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가 등장할 때, 드디어 바로가 모세와 타협을 시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내줄 마음이 없었던 바로는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잠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마음을 비칩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마음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바로가 재앙을 당하면서 네 번에 걸쳐서 모세와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타협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장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의 타협이 제사 곧 ‘예배’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시내산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과정을 끈질기게 방해했고, 타협안을 내놓으면서까지 이스라엘의 예배를 가로막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특히 바로의 네 가지 타협안을 ‘예배’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바로의 타협안을 살펴보며, 이것이 어떻게 예배와 관련이 있는지, 나아가 우리 예배자들은 어떤 유혹 앞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말씀 속에 잘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만 예배하는 민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관된 의지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 받기를 원하시며,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목적은 바로 ‘예배’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는 종말의 날 모든 피조물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13 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의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예배, 곧 섬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사흘 길을 가서 호렙산, 즉 시내산에 이르러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킬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시작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 사탄은 편리하게 예배드리라고 유혹합니다. >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예배, 시내산에서의 귀한 예배를 꿈꾸는, 나아가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드릴 온전한 예배를 꿈꾸고 있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이때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네 가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타협안이 오늘 본문 25절에 나타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출애굽기 8:25)
이 제안은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일부는 허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이 타협안은 “너희가 예배는 드리되, 사흘 길을 나가 예배드리지 말고, 여기 곧 애굽 땅에서 예배를 드려라.”라는 제안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이 조금은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마 지금도 인터넷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평면적인 의미에서, 곧 게으름을 피우거나 헌신이나 정성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 전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편함을 위해서 인터넷과 같은 편리한 매체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유혹을 오늘 본문의 바로 왕의 제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고생할 필요가 있겠니? 사흘 길까지 나가서 꼭 예배를 드려야만 하겠니? 그냥 이곳에서, 이 방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안 되겠니? 기도하고, 묵상하고,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은혜 내려주시지 않겠니? 그래도 좀 아쉽다면 소망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리면 되지 않겠니?” 이와 같은 타협안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매체를 통해 예배드릴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몸이 연약해서, 혹은 병이 들어 먼 곳에서 홀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까지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는 이 말 앞에 부담을 가져야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편의성과 편리함으로 계산되는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라는 말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애굽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속 곧 이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는 곳, 사탄의 힘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애굽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강의 신, 땅의 신, 하늘의 신, 대기의 신, 그 외에도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하나님도 동시에 섬기라는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예배하자는 제안입니다. 세상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원리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그 원칙과 삶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께도 예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유혹은 세상의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살면서, 마치 장신구처럼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살아가듯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괜찮다는 유혹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히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출8:26) 또한 모세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8:27)
< 사탄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
이제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오늘 본문 중 28절입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출애굽기 8:28 중)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너무 자주 가지는 말라. 예배만 드리고 와라. 봉사나 섬김이나 교육 같은 데까지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이와 같은 의미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길을 나가서 예배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이라는 땅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 예배만을 목적으로 사흘 밤, 사흘 낮을 걸어가는 정성스러움을 지키라는 의미, 또한 예배에 모든 것을 걸고 기대하며 나가는 예배를 드리라는 의미이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곧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말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온전하게 예배만을 집중하지는 말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너무 자주 나가지는 말라. 교회 일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너무 많은 시간 드리지는 말라. 약간만, 조금만, 잠시만 드려라. 너무 멀리 나에게서,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세상 권력 잡은 자에게서 떠나지는 말라.”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너희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만한 거리에 있어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세상으로 돌아와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사탄에게로 돌아와라.”라는 유혹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예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직 사흘 길을 떠나는 그 길, 그 여정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 사탄은 신앙의 전수를 방해합니다. >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참으로 신기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평범한 바로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유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열 가지 재앙 속에서 바로의 세 번째, 네 번째 타협안이 나타납니다. 그중 세 번째 타협안은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경험한 후 제시됩니다. 출애굽기 10장 10~11절의 말씀입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출애굽기 10:10~11 중)
바로의 세 번째 유혹은 “너희가 예배하러 가기 위해 사흘 길을 가는 것까지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 너희만 가라.” 장정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괜찮은 제안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사흘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우니 아이들을 남겨두고 다녀오라는 말은 선의의 제안처럼 보입니다. 아이들까지 그 어려운 사흘 길을 떠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편하게 장정들만, 어른들만 다녀오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도 나중에 장정이 된 후에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 아이들,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하느라 힘들었는데 사흘 길까지 나가 예배드리는 건 체력도 많이 소모될 텐데, 그냥 내가 혼자 다녀오마. 내가 대신 가서 기도해 주마. 내가 너의 몫까지 예배하고 돌아오마.” 이렇게 타협할 수 있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사흘 길을 떠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애굽 땅에 아이들을 남겨두라는 제안은, 아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그저 애굽 땅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바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우리의 2세들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을 믿음에서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세상의 권력 잡은 자요,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 권력과 권세 잡은 자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며 다가옵니다. “너희만 가서 예배를 드려라. 아이들은 내 지배 아래 둘 것이다. 나 바로는, 나 사탄은, 나 세상은 너희 자녀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게 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약 아이들을 애굽에 두고 사흘 길을 갔다면, 필경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두고 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의미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집요하게 아이를 두고 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 사탄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굽히지 않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이 삼 일간 온 땅에 머물렀을 때, 바로는 마지막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10장 24절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출애굽기 10:24)
세상의 왕답게 바로는 가축들 곧 재물과 관련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세상은 결국 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세속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도 물론 돈이 필요하고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돈과 재물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바로 왕 역시 예배드리러 나가는 자들에게 “양과 소는 두고 가라.”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재산은 남겨두고 몸만 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으나, 몸으로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만도 얼마나 귀한 일이냐? 그저 한 번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귀한 일이니, 몸만 가라.”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더 깊은 의미는 “예배는 드리러 가되 제물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물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지만 바로는 지금 그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요구하는 짐승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는 양과 소를 두고 가라고 명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가지고 가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양과 소는 어떤 동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소와 양과 염소를 통해 그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는 지금,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킨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애굽의 맏아들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신약의 사건과 어떻게 연관시키시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의 문설주에 그 보혈을 발라 주시고, 사흘간 무덤에 갇히셨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언젠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며 사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제물을 드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마지막 타협안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되 몸만 가라. 소와 양은 남겨두고 가라.” 이 말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결해 주신 유일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라는 유혹입니다.
< 완전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 유일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님, 그분과 함께 우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왕 곧 사탄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그저 너의 힘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라고 유혹합니다. 그냥 나가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온전하고 유일하신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네 가지 유혹을 하며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자들에게도 세상의 권세자인 사탄은 수없이 유혹합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예배를 드려라. 이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떠나가지는 말라. 아이들을 두고 너희만 예배를 드려라. 제물을 놓아두고 빈손으로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유혹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27)
우리 주님도 사십 일을 굶으신 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4:10 중)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Temptations to the Worshipper
Exodus 8:25-32
These days, we are reading Exodus in our early morning prayer meetings. Exodus is a story about God rescuing the Israelites fromEgypt. God does this out of His promise with Abraham, Isaac, and Jacob. This40-chapter book can be divided into two parts: first, the journey out of Egyptand, second, God’s instructions on worship and the building of the tabernacle. In a word, Exodus is a story about God leading the Israelites out of Egypt to make them worshipHim properly.
In chapter 3 where Moses meets God for the first time at Mt. Horeb, God tells Moses His name and instructs him to go to Pharaoh and say, “The Lord, the God of the Hebrews, has met with us. Let us take a three-day journey into the wilderness to offer sacrifices to the Lord our God.” (Exodus 3:18) When Moses delivers this message, Pharaoh’s oppression only gets worse, and the Israelite people call out to God out of misery. Finally, God sends Moses again to Pharaoh to declare ten plagues.
In the ten plagues, we see a fierce tug-of-war going on between God and Pharaoh: God desperately wanting to rescue the Israelites versus Pharaoh tightly holding on to themto keep them from worship. Each time God sends Moses and Aaron to Pharaoh, He orders them to say the same thing.The following order in chapter 8 is repeated in chapter 9.
Then the Lord said to Moses, “Go to Pharaoh and say to him, ‘This is what the Lord says: Let my people go, so that they may worship me.” (Exodus 8:1)
God sends ten calamitiesto Egypt, including blood, frogs, and lice. When the fourth plague flies strikes, Pharaoh starts to arrange a compromise with Moses as described in today’s passage. Although he had no real intention to free the Israelite people, Pharaoh hints that he may let them go according to Moses’ demand. However, this is just a compromise.
In Exodus, there are a total of four scenes where Pharaoh tries to negotiate with Moses. When we look at them from the perspective of worship, we will be able to learn what true worship is and how we must worship. Furthermore, we will be able to learn how the enemy interferes with our worship and what he says to keep us from true worship.
Let’s ask the most fundamental question. Why did God want to deliver Israel from Egypt? It was to make them worship Him alone as stressed in Exodus 8:1: “[…] so that they may worship me.” (Exodus 8:1) This was God’s consistent will. In Isaiah God says that the Israelites are “the people I formed for myselfthat they may proclaim my praise.” (Isaiah 43:21) The reason God sent Jesus to die for our sins on the cross was to make us praise, worship, and bless Him. God wants us to glorify and praise Him as stated in Revelation: “To him who sits on the throne and to the Lambbe praise and honor and glory and power,for ever and ever!” (Revelation 5:13) This is precisely what God wanted from the Israelites in Exodus: to flee Egypt, go the three-day journey to Mount Horeb, and worship Him alone.
However, today’s passage describes how Pharaoh tries to compromise this goal. Pharaoh suggests four compromise proposals to Moses who dreamed of worshipping God wholeheartedly at Mount Sinai and ultimately in the land of milk and honey.
The first of these compromise proposals appear in verse 25 of today’s passage: “Then Pharaoh summoned Moses and Aaron and said, ‘Go, sacrifice to your God here in the land.’” (Exodus 8:25) So, the first compromise goes something like this: ‘Worship your God, but worship Him here, in Egypt, instead of going the three-day journey.’
One way to interpret this is to understand this kind of worship as“easy and comfortable worship.” For example, “comfortable worship” may be a temptation to those who want to stay at home and watch the internet service instead of coming to church. Of course, some have no choice but to worship online, including the weak, the ill, and the old. But, for others, “comfortable worship” is not true worship.
Another deeper meaning of this first compromise can be found in the phrase “here in this land.” Pharaoh wanted the Israelites to worship God in Egypt. What does this mean? It means to worship God in a land where Satan rules, where worldly power rules. Egypt was a land that served all kinds of gods, including the river, the land, the heavens, and the air. Ultimately, Pharaoh is proposing to Moses that the Israelites serveboth God and gods of Egypt, that is, both God and the world. In other words, worship God, while holding on to the ways of the world. Furthermore, this is the enemy tempting us, ‘It’s okay to hang on to the ways of the world while attending church. There is no harm in having God as a trinket, is there?’
However, Moses firmly refuses. He clearly says, “That would not be right.” He goes on to say, “We must take a three-day journey into the wilderness to offer sacrifices to the Lord our God, as he commands us.”
In response, Pharaoh proposes a second compromise: “Pharaoh said, ‘I will let you go to offer sacrifices to the Lord your God in the wilderness, but you must not go very far.’”(Exodus 8:28) What is the meaning behind this temptation? Yes, you can go to church and worship, but not too often. Go to church and attend services, but don’t commit yourself. Don’t go too deep. Don’t serve in Sunday schools or get involved in other services.
God wanted the Israelites to go the full three-day journey to worship Him because He wanted them to leave Egypt behind completely. He wanted them to risk everything for worship. But, Pharaoh,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ells us not to go too far. Don’t go to church too often. Don’t go too deep. Don’t give too much offering. Don’t spend too much time, either. Practice moderation. Give just a little. Don’t stray far from me Satan, the world, the ruler of the world.In other words, go just far enough from Egypt so you can always turn back. This is having one foot on the world and one on church. It’s amazing how the Bible reveals how the enemy is as work within us today through these simple words of Pharaoh.
The third compromise appears in chapter 10 which describes the plague of locusts: “Pharaoh said, ‘The Lord be with you—if I let you go, along with your women and children! Clearly you are bent on evil. No! Take only the men and worship since that’s what you have been asking for.’” (Exodus 10:10-11) In other words, you may go the three-day journey and worship, but don’t take your children. Just your men. On the surface, this seems like a decent proposal. But there is a big trap.
Today, we fall into this trap often. We allow our children to stay at home instead of going to church because we think they must study. We make the excuse that they are too tired. “A three-day journey for worship” is too much for them. So, parents worship in their stead. Pharaoh’s proposal to leave children behind is a temptation that blocks children from becoming God’s people. By leaving them behind, the children automatically serve Pharaoh and the ways of Egypt. We think we are doing what’s best for them, but, in fact, we are losing them. Pharaoh represents Satan, the ruler of the world. That power tempts us even today. Just take your men to worship. Leave your children with me, under my rule. I, Satan, will prevent you from taking your kids to God.
If the Israelite people had left their children behind, they would surely have wanted to come back to Egypt for them. Our hearts lie with our children. Therefore, coming to worship without them is failing. Satan knows this. That is why Pharaoh persistently demands Moses to leave without their children.
Yet, Moses does not give in, and God continues to strike Egypt with plagues. When the ninth calamity darkness strikes, Pharaoh makes his final offer: “Go, worship the Lord. Even your women and children may go with you; only leave your flocks and herds behind.” (Exodus 10:24) Finally, Pharaoh’s hidden intentions are revealed—that is, to guard his property. This is how the world works. We, including Christians, need money and wealth to survive. But the world is interested in only money and wealth. Therefore, a deeper meaning of this temptation is as follows. ‘Go serve your God. But don’t take sacrifices with you. Go empty-handed. God will accept you as you are, even without sacrifices, won’t He?’
At this point, we must seriously consider an important fact. Let’s take a deeper look at the last part of the ten plagues. The ninth plague was utter darkness for three days. Then comes the final plague, the death of every firstborn. However, the Lord will pass over any door marked with blood. What does this remind you of? Jesus, of course! Jesus, the lamb who marked our doors with blood by dying on the cross. Jesus who was buried and raised to life.
God ordered Abraham to give his son as a sacrifice. And Isaac followed his father for three days and asked him where the lamb for the burnt offering was. When it was time to give Isaac as an offering, God himself provided the lamb. It was Jehovah-Jireh.
The spiritual meaning of Pharaoh’s final proposal is as follows: ‘Go and worship. But go empty-handed. Leave your cattle behind.’ In other words, it is a temptation to leave Jesus Christ—the one and only sacrifice that connects us wholly to God—behind, as we go to worship.
When we worship, we must have Jesus who gave himself as the one and only perfect offering for us. However, Pharaoh, Satantempts us to go empty-handed. He tempts us, saying it’s okay to go with nothing to give to God. But we need Christ’s blood. We need the precious blood. We become true worshippers only through Jesus Christ, theonly perfect sacrifice.
Pharaoh suggests four compromises to Moses. In the same way, the ruler of the world, Satan, tempts us worshippers today. Worship your God here in Egypt. Go and worship but don’t go too far. Worship, but leave your children behind. Leave your sacrifices behind and go empty-handed.
Dear Church, how must we respond to such temptations? Whenthe devil tempted him after fasting for forty days, Jesus said, “Worship the Lord your God, and serve him only.” Even now, God seeks perfect worshippers.
출애굽기 8: 25 ~ 32
25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26
모세가 이르되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애굽 사람이 싫어하는 바인즉 우리가 만일 애굽 사람의 목전에서 제사를 드리면 그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우리를 돌로 치지 아니하리이까
27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28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간구하라
29
모세가 이르되 내가 왕을 떠나가서 여호와께 간구하리니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바로의 백성을 떠나려니와 바로는 이 백성을 보내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다시 거짓을 행하지 마소서 하고
30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니
31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그 파리 떼가 바로와 그의 신하와 그의 백성에게서 떠나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32
그러나 바로가 이 때에도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
요즘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회 시간에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지시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는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 20장 정도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리고 나머지 20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신 후 율법을 허락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그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장면이 인상 깊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소개하신 하나님이 모세에게 바로 왕에게 갈 것을 명하십니다. 바로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출애굽기 3장 18절 말씀입니다.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사흘 길쯤 광야로 가도록 허락하소서 하라 (출애굽기 3:18 중)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바로 왕에게 나아갑니다. 아론과 더불어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선포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더욱 완강한 모습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하며 횡포를 부립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성을 건축하는 데 사용할 벽돌을 굽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벽돌 재료도 주지 않으면서 같은 분량을 만들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아래 신음하며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를 다시 보내 바로를 만나게 하시고, 준비한 열 재앙을 바로 앞에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앞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일곱 재앙을 새벽기도회에서 함께 나누며 읽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장면을 하나하나 읽다 보면, ‘하나님이 끈질기게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바로는 끈질기게 하나님의 백성을 내놓지 않으려고 하는구나.’ 하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낼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여기서는 두 곳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8장 1절과 9장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출애굽기 9: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섬기게 하려는 바로 왕,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려는 하나님! 바로 이 둘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출애굽기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
하나님은 나일강의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첫 번째 재앙을 시작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재앙을 집행하셨습니다. 개구리가 물에서 올라오게 만드는 재앙을 일으키셨고, 티끌이 이로 변하는 재앙을 일으키셨으며, 파리가 온 땅에 가득하게 되는 재앙도 내리셨습니다. 이 네 번째 재앙인 파리 떼가 등장할 때, 드디어 바로가 모세와 타협을 시도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내줄 마음이 없었던 바로는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잠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마음을 비칩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마음은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일종의 타협안이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다 보면, 바로가 재앙을 당하면서 네 번에 걸쳐서 모세와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타협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장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의 타협이 제사 곧 ‘예배’와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시내산에서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이 과정을 끈질기게 방해했고, 타협안을 내놓으면서까지 이스라엘의 예배를 가로막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특히 바로의 네 가지 타협안을 ‘예배’의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이 네 가지 바로의 타협안을 살펴보며, 이것이 어떻게 예배와 관련이 있는지, 나아가 우리 예배자들은 어떤 유혹 앞에 서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려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는 말씀 속에 잘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셔서 하나님만 예배하는 민족으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관된 의지였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하나님이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배 받기를 원하시며, 찬송과 경배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게 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목적은 바로 ‘예배’ 받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는 종말의 날 모든 피조물이 다음과 같이 외친다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요한계시록 5:13 중)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의 질문과 대답은 이렇습니다.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 예배, 곧 섬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사흘 길을 가서 호렙산, 즉 시내산에 이르러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킬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 사건의 시작입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입니다.
< 사탄은 편리하게 예배드리라고 유혹합니다. >
이와 같은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온전한 예배, 시내산에서의 귀한 예배를 꿈꾸는, 나아가 장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드릴 온전한 예배를 꿈꾸고 있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이때 바로는 모세와 아론에게 네 가지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그 첫 번째 타협안이 오늘 본문 25절에 나타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 (출애굽기 8:25)
이 제안은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일부는 허용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이 타협안은 “너희가 예배는 드리되, 사흘 길을 나가 예배드리지 말고, 여기 곧 애굽 땅에서 예배를 드려라.”라는 제안입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도 이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이 조금은 당황스러우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마 지금도 인터넷으로 예배드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선 이 말씀은 평면적인 의미에서, 곧 게으름을 피우거나 헌신이나 정성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주님 전에 나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편함을 위해서 인터넷과 같은 편리한 매체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유혹을 오늘 본문의 바로 왕의 제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라, 그러나 고생할 필요가 있겠니? 사흘 길까지 나가서 꼭 예배를 드려야만 하겠니? 그냥 이곳에서, 이 방에서 혼자 예배드리면 안 되겠니? 기도하고, 묵상하고, 나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은혜 내려주시지 않겠니? 그래도 좀 아쉽다면 소망교회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리면 되지 않겠니?” 이와 같은 타협안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매체를 통해 예배드릴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몸이 연약해서, 혹은 병이 들어 먼 곳에서 홀로 예배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인터넷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까지 마음의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는 이 말 앞에 부담을 가져야 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편의성과 편리함으로 계산되는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라는 말이 가지는 또 다른 의미는 ‘애굽에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 속 곧 이 세상의 권력이 지배하는 곳, 사탄의 힘이 지배하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라는 말입니다. 애굽은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땅이었습니다. 강의 신, 땅의 신, 하늘의 신, 대기의 신, 그 외에도 다양한 신들을 섬기면서 하나님도 동시에 섬기라는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예배하자는 제안입니다. 세상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의 원리와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 그 원칙과 삶의 자세를 버리지 않은 채 하나님께도 예배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유혹은 세상의 원리와 방식을 따라 살면서, 마치 장신구처럼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살아가듯이 교회에 다니는 것도 괜찮다는 유혹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히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함은 부당하니이다.”(출8:26) 또한 모세는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출8:27)
< 사탄은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라고 유혹합니다. >
이제 바로는 두 번째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오늘 본문 중 28절입니다.
바로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출애굽기 8:28 중)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 교회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너무 자주 가지는 말라. 예배만 드리고 와라. 봉사나 섬김이나 교육 같은 데까지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이와 같은 의미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흘 길을 나가서 예배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이라는 땅을 완전히 떠나라는 의미, 예배만을 목적으로 사흘 밤, 사흘 낮을 걸어가는 정성스러움을 지키라는 의미, 또한 예배에 모든 것을 걸고 기대하며 나가는 예배를 드리라는 의미이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예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곧 세상의 권세 잡은 자는 말합니다.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 온전하게 예배만을 집중하지는 말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너무 자주 나가지는 말라. 교회 일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라. 너무 많은 시간 드리지는 말라. 약간만, 조금만, 잠시만 드려라. 너무 멀리 나에게서,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세상 권력 잡은 자에게서 떠나지는 말라.”
이 말의 또 다른 의미는 “너희는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좋다. 하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만한 거리에 있어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세상으로 돌아와라. 하나님을 섬겨라. 그러나 여차하면 사탄에게로 돌아와라.”라는 유혹입니다. 한 발은 세상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예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직 사흘 길을 떠나는 그 길, 그 여정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 사탄은 신앙의 전수를 방해합니다. >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참으로 신기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처럼 평범한 바로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유혹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오지는 않지만, 열 가지 재앙 속에서 바로의 세 번째, 네 번째 타협안이 나타납니다. 그중 세 번째 타협안은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을 경험한 후 제시됩니다. 출애굽기 10장 10~11절의 말씀입니다.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출애굽기 10:10~11 중)
바로의 세 번째 유혹은 “너희가 예배하러 가기 위해 사흘 길을 가는 것까지도 허락할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 너희만 가라.” 장정들만 가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괜찮은 제안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사흘 길을 가는 것은 어려우니 아이들을 남겨두고 다녀오라는 말은 선의의 제안처럼 보입니다. 아이들까지 그 어려운 사흘 길을 떠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편하게 장정들만, 어른들만 다녀오면 어떻겠습니까? 아이들도 나중에 장정이 된 후에 나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 아이들, 공부해야 하니까, 공부하느라 힘들었는데 사흘 길까지 나가 예배드리는 건 체력도 많이 소모될 텐데, 그냥 내가 혼자 다녀오마. 내가 대신 가서 기도해 주마. 내가 너의 몫까지 예배하고 돌아오마.” 이렇게 타협할 수 있습니다. 어른인 우리는 사흘 길을 떠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애굽 땅에 아이들을 남겨두라는 제안은, 아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라는 유혹입니다. 그저 애굽 땅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바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애굽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바로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 우리의 2세들을 배려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을 믿음에서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바로는 세상의 권력 잡은 자요, 사탄을 의미합니다. 그 권력과 권세 잡은 자는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며 다가옵니다. “너희만 가서 예배를 드려라. 아이들은 내 지배 아래 둘 것이다. 나 바로는, 나 사탄은, 나 세상은 너희 자녀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게 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약 아이들을 애굽에 두고 사흘 길을 갔다면, 필경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을 두고 홀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결국 실패를 의미합니다. 사탄은 바로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집요하게 아이를 두고 가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 사탄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굽히지 않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이 삼 일간 온 땅에 머물렀을 때, 바로는 마지막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10장 24절입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출애굽기 10:24)
세상의 왕답게 바로는 가축들 곧 재물과 관련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세상은 결국 재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세속이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백성도 물론 돈이 필요하고 재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돈과 재물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바로 왕 역시 예배드리러 나가는 자들에게 “양과 소는 두고 가라.”라고 명합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재산은 남겨두고 몸만 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으나, 몸으로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것만도 얼마나 귀한 일이냐? 그저 한 번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귀한 일이니, 몸만 가라.”라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더 깊은 의미는 “예배는 드리러 가되 제물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제물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하지만 바로는 지금 그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요구하는 짐승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는 양과 소를 두고 가라고 명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가지고 가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양과 소는 어떤 동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소와 양과 염소를 통해 그들에게 경배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바로는 지금,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일으킨 열 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애굽의 맏아들이 죽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재앙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신약의 사건과 어떻게 연관시키시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시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우리의 문설주에 그 보혈을 발라 주시고, 사흘간 무덤에 갇히셨다가 부활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됩니다.
언젠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바칠 제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으며 사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친히 준비하신 것으로 제물을 드리도록 해 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하나님이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바로의 마지막 타협안은 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배는 드리되 몸만 가라. 소와 양은 남겨두고 가라.” 이 말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결해 주신 유일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라는 유혹입니다.
< 완전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 유일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님, 그분과 함께 우리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왕 곧 사탄은 우리에게 빈손으로, 그저 너의 힘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라고 유혹합니다. 그냥 나가도 된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보혈’이 필요합니다. 참다운 예배자는 온전하고 유일하신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모세에게 네 가지 유혹을 하며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자들에게도 세상의 권세자인 사탄은 수없이 유혹합니다. “여기, 이 세상에서 예배를 드려라. 이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떠나가지는 말라. 아이들을 두고 너희만 예배를 드려라. 제물을 놓아두고 빈손으로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유혹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7절에서 모세는 말합니다.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대로 하려 하나이다 (출애굽기 8:27)
우리 주님도 사십 일을 굶으신 후 사탄의 유혹 앞에서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으니라 (마태복음 4:10 중)
하나님은 지금도 온전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2019년 6월 1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예배자의 유혹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83장, 420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 8:25-32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1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셔서 시내 산에서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만드시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삼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내여 줄 사람이 아니었기에 모세와 타협하려는 시도를 네 번에 걸쳐서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첫 번째 타협안 : 너희가 예배는 드리기는 하되, 사흘 길을 나가서 예배를 드리지는 말고 여기에서, 즉 애굽 땅에서 예배를 드리라는 제안입니다(25절). 이 말씀은 게으름을 피우거나 고통 없이 희생 없이 드리는 예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의 권력과 사탄의 힘이 지배하는 애굽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것으로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예배하라’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제안에 단호하게 “그리함은 부당하나이다”라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타협안 : 애굽 땅을 떠나는 것은 좋으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라(28절)는 제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 길을 나가서 예배하라 ? 애굽이라는 땅을 완전히 떠나서 예배만을 목적으로 나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하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은 좋지만, 언제든지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올 수 있는 거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타협안 : 너희가 예배하기 위하여 사흘 길을 가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은 데리고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사흘 길을 편하게 ‘너희들(장정들)만 가라’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이 제안에는 ‘아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게 하라’는 유혹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이들을 애굽에 놓고 사흘 길을 갔다면, 아마도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오려 했을 것입니다. 바로는 이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네 번째 타협안 :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말합니다(출10:24절). 재산을 남겨두고 몸만 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의 더 깊은 뜻은 예배는 드리되 제물을 가지고 가지는 말라는 의미입니다. 재물이 없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온전하게 연결하여 주실 유일한 제물,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예배를 드리는 유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유혹 앞에서 우리는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십일을 굶으신 후에 사탄의 유혹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온전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나누기
1. 온전한 예배자의 삶을 방해하는 유혹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바로가 모세에게 타협안을 제안하는 것처럼 악한 사탄은 우리에게 다양한 타협안으로 유혹합니다.
오늘 나는 어떤 타협안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온전한 예배자의 삶을 위해 서로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은 우리들이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온전히 예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사탄의 유혹과 세상의 유혹 가운데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자로 주님 앞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