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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2010년 5월 8일 유코피아닷컴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이름이 뭐요?”
“주 예수 그리스도인데요.”
구체적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일(현지 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햄프턴에서 한바탕 ‘예수 그리스도’ 소동이 벌어졌다. ‘주님’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차에 치여 타박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각 현장에 출동, 쓰러진 남성의 신원을 확인하려 했다. 이름을 묻자 그 남성은 고통을 참아가며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라고 말했다. 경찰은 처음엔 간신히 목숨을 건져 감사 기도를 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이름이 뭐냐’고 다시 물어도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짜증을 참아가며 다시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화가 난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운전면허증을 받아 본 경찰은 깜짝 놀랐다. 정말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50세)’였던 것!
‘그리스도’를 친 운전자는 브리트니 칸타렐라(20세).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그리스도’는 화를 버럭 냈다. 그러면서 경찰에 “법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요구대로 경찰은 칸타렐라에게 티켓을 발부, 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행인들은 ‘그리스도’의 ‘비그리스도’적인 행태에 한마디씩 던졌다. “무슨 주님이 저래…. 이름값도 못 하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서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름값도 못 하는 그리스도, 이름값도 못 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만큼 가치 있고 무게가 나가는 이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요? 어느 정도로 그 무게를 산정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분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따르고 있습니까? 물론 단번에 완전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중 하나라도 우리의 마음에 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하고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 등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이미 성경에는 수많은 표현으로 예수님이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음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표현으로 예수님을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들이 여러분에게도 와닿습니까? 어떤 정의와 표현이 예수님을 가장 잘 나타내고, 내 삶에도 잇대어 있습니까? 즉 내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은 ‘위대한 성인 중 한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위대한 스승’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춘기 학생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단 세 글자로 표현했습니다. “좋은 분!” 조금 더 자세히 써 보라고 했더니, 한 글자를 더 적습니다. “참 좋은 분!”
<세례 요한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옥에 들어간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기다리는 ‘오실 자’가 ‘예수’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기다린 ‘오실 자’, 그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세례 요한이 꿈꿨던 메시아 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요청한 선지자입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식량 삼아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세례 요한은 오실 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요단강으로 나왔을 때, 그는 그들의 죄를 자복하게 하며 세례를 받도록 요청했습니다. 광야로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호통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기대한 ‘오실 분’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마태복음 3장 1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태복음 3:10)
이어 그가 기다리던 오실 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1~12)
이로 볼 때, 세례 요한이 기대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며, 알곡은 모아들이되 쭉정이는 태워 버리는 심판의 주,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예수님을 세례 요한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후 예수께 세례를 베푼 후, 예수님이 자신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는 ‘아, 이분이 내가 생각하고 기다리던 분이 맞구나!’라고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치유와 회복 사역에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행보에 세례 요한은 실망감 또는 기대 이하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따라 살펴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지속적으로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4장 17절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2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개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5~7장은 산상수훈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 산상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8장에 나타납니다. 8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8장 1절 이후의 말씀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고치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8장 5절부터는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8장 14절부터는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또 16절부터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다시 28절로 가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무덤 사이에서 고치십니다. 9장으로 넘어가면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회복시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역 내내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고 고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치유와 회복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불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9장 14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나와 항의합니다. 항의 내용은 ‘금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인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혼인집에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또다시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9장 18절 이후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절 이후에는 맹인을 고치시며, 32절 이후부터는 말 못 하는 사람을 회복하신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이 나타나므로 특별한 행적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런 뒤 이어진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인 11장입니다. 세례 요한이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물은 것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오실 분은 이런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맞습니까? 과연 내가 당신을 믿고 더는 오실 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어쩌면 세례 요한은 ‘다른’ 예수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며 정의로 길을 인도하시는 예수님, 세상을 바르게 펴시며 공의롭게 다스리는 그런 예수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는 저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한 스스로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를 알리신 내용은, ‘병 고치는 자’, ‘약한 자를 돕는 자’, ‘죽은 자를 살리는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게 관련된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부정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데, 자신의 생일날 딸이 춤을 추어 기쁘게 해 주자 원하는 청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고, 결국 헤롯은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합니다. 시대의 예언자이자 유대인에게 존경받던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옥에서 죽임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2절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마태복음 14:12)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사실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행동이 조금 아쉽게 느껴집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마태복음 14:13)
예수님이 의외로 너무 담담하게 세례 요한의 처형 소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마디 좋은 추모사라도 남기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전에도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을 존귀하게 여기셨고, 위대한 인물로 평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저 배를 타고 홀연히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답지 않은, 예수님의 이름값답지 않은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문을 깊이 묵상하던 중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엄청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는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엄청난 사건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전환, 세례 요한의 길과 예수님의 길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 12절과 13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마태복음 14:12~13)
세례 요한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열립니다. 이때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하십니다.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이 구절은 위대한 출정식과 같은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빈 들로 가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또 빈 들이란 어디입니까? 빈 들은 세례 요한이 거주했던 곳이자 사역했던 광야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곳에 세례 요한은 없습니다. 새로운 날이 도래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서십니다. 그곳에서 사역을 수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빈 들로 나아오는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또 병자들을 고치며 돌봐 주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태복음 14:14)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빈 들로 나왔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호통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며 금식과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도 빈 들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 요한과 사뭇 다릅니다. 우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병자들이 오자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치유와 회복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아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기적이 ‘오병이어’며 ‘칠병이어’ 기적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행적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키시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이 11장 18~19절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의 예를 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태복음 11:18~19 중)
“세례 요한이 금식하고 있을 때는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이제 내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니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오늘 설교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구세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모든 칭호가 다 맞으며, 의미 있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칭호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흐름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치유와 회복을 허락해 주시는 분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누구라도 당신 곁으로 초청해 주시는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인지, 생명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실 하나만큼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아픔이 있습니까? 굶주림이 있습니까? 목마름이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생명을 주시며, 갈증을 해소해 주시고, 배고프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어떤 이야기로도, 어떤 칭호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 예수님은 정말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깊이 사랑하시는 분, 어떤 사랑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정하신 그리고 정의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 한 분만을 마음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소망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태복음 11: 2 ~ 6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2010년 5월 8일 유코피아닷컴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올라왔습니다.
“이름이 뭐요?”
“주 예수 그리스도인데요.”
구체적인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6일(현지 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노스햄프턴에서 한바탕 ‘예수 그리스도’ 소동이 벌어졌다. ‘주님’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차에 치여 타박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각 현장에 출동, 쓰러진 남성의 신원을 확인하려 했다. 이름을 묻자 그 남성은 고통을 참아가며 “주 예수 그리스도(Lord Jesus Christ)”라고 말했다. 경찰은 처음엔 간신히 목숨을 건져 감사 기도를 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이름이 뭐냐’고 다시 물어도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 짜증을 참아가며 다시 질문을 했지만 대답은 똑같았다. 화가 난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운전면허증을 받아 본 경찰은 깜짝 놀랐다. 정말 이름이 ‘주 예수 그리스도(50세)’였던 것!
‘그리스도’를 친 운전자는 브리트니 칸타렐라(20세).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그리스도’는 화를 버럭 냈다. 그러면서 경찰에 “법대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스도’의 요구대로 경찰은 칸타렐라에게 티켓을 발부, 법원에 출두할 것을 명령했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행인들은 ‘그리스도’의 ‘비그리스도’적인 행태에 한마디씩 던졌다. “무슨 주님이 저래…. 이름값도 못 하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을 조롱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서 그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름값도 못 하는 그리스도, 이름값도 못 하는 그리스도인.” 우리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그만큼 가치 있고 무게가 나가는 이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요? 어느 정도로 그 무게를 산정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그분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따르고 있습니까? 물론 단번에 완전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중 하나라도 우리의 마음에 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을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하고 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 하나’ 등으로 이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이미 성경에는 수많은 표현으로 예수님이 정의되고 있습니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음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선한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그밖에도 수많은 표현으로 예수님을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정의들이 여러분에게도 와닿습니까? 어떤 정의와 표현이 예수님을 가장 잘 나타내고, 내 삶에도 잇대어 있습니까? 즉 내게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어떤 분은 ‘위대한 성인 중 한 분’으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위대한 스승’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사춘기 학생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단 세 글자로 표현했습니다. “좋은 분!” 조금 더 자세히 써 보라고 했더니, 한 글자를 더 적습니다. “참 좋은 분!”
<세례 요한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당시 옥에 들어간 세례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아마 세례 요한은 옥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기다리는 ‘오실 자’가 ‘예수’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기다린 ‘오실 자’, 그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을까요?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세례 요한이 꿈꿨던 메시아 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를 요청한 선지자입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식량 삼아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 세례 요한은 오실 분을 기다리며, 그분의 길을 곧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요단강으로 나왔을 때, 그는 그들의 죄를 자복하게 하며 세례를 받도록 요청했습니다. 광야로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호통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기대한 ‘오실 분’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마태복음 3장 10절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마태복음 3:10)
이어 그가 기다리던 오실 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1~12)
이로 볼 때, 세례 요한이 기대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며, 알곡은 모아들이되 쭉정이는 태워 버리는 심판의 주,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예수님을 세례 요한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후 예수께 세례를 베푼 후, 예수님이 자신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셨을 때, 그는 ‘아, 이분이 내가 생각하고 기다리던 분이 맞구나!’라고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치유와 회복 사역에 집중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행보에 세례 요한은 실망감 또는 기대 이하의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따라 살펴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지속적으로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4장 17절에서 주님은 세례 요한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23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개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5~7장은 산상수훈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모든 말씀을 마치신 후 산상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8장에 나타납니다. 8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8장 1절 이후의 말씀은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고치시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이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8장 5절부터는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때도 예수님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8장 14절부터는 주님이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또 16절부터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다시 28절로 가면, 예수님이 귀신 들린 두 사람을 무덤 사이에서 고치십니다. 9장으로 넘어가면 침상에 누워 있는 중풍병자를 회복시키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님은 사역 내내 많은 사람을 치유하시고 고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자마자 치유와 회복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불만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 장면이 9장 14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나와 항의합니다. 항의 내용은 ‘금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인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불평합니다. 예수님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혼인집에 신랑이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 뒤 예수님은 또다시 사람들을 고치십니다. 9장 18절 이후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절 이후에는 맹인을 고치시며, 32절 이후부터는 말 못 하는 사람을 회복하신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시고 가르치신 내용이 나타나므로 특별한 행적은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런 뒤 이어진 본문이 바로 오늘 본문인 11장입니다. 세례 요한이 마음을 가다듬고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물은 것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오실 분은 이런 분이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이 맞습니까? 과연 내가 당신을 믿고 더는 오실 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됩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어쩌면 세례 요한은 ‘다른’ 예수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며 정의로 길을 인도하시는 예수님, 세상을 바르게 펴시며 공의롭게 다스리는 그런 예수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는 저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각한 스스로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실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 스스로를 알리신 내용은, ‘병 고치는 자’, ‘약한 자를 돕는 자’, ‘죽은 자를 살리는 자’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게 관련된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의 부정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데, 자신의 생일날 딸이 춤을 추어 기쁘게 해 주자 원하는 청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요한의 머리를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고, 결국 헤롯은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합니다. 시대의 예언자이자 유대인에게 존경받던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옥에서 죽임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2절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마태복음 14:12)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사실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의 행동이 조금 아쉽게 느껴집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마태복음 14:13)
예수님이 의외로 너무 담담하게 세례 요한의 처형 소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한마디 좋은 추모사라도 남기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전에도 주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세례 요한을 존귀하게 여기셨고, 위대한 인물로 평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저 배를 타고 홀연히 떠나버리십니다. 예수님답지 않은, 예수님의 이름값답지 않은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장면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본문을 깊이 묵상하던 중 바로 이 장면이야말로 엄청난 전환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시대는 끝나고 예수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엄청난 사건을 알려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전환, 세례 요한의 길과 예수님의 길이 극명하게 갈리는 지점이 12절과 13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마태복음 14:12~13)
세례 요한은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열립니다. 이때 주님은 비로소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하십니다.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이 구절은 위대한 출정식과 같은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빈 들로 가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또 빈 들이란 어디입니까? 빈 들은 세례 요한이 거주했던 곳이자 사역했던 광야를 가리킵니다. 이제 그곳에 세례 요한은 없습니다. 새로운 날이 도래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리에 서십니다. 그곳에서 사역을 수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빈 들로 나아오는 큰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또 병자들을 고치며 돌봐 주셨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태복음 14:14)
여기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빈 들로 나왔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호통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며 금식과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예수님도 빈 들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세례 요한과 사뭇 다릅니다. 우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병자들이 오자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치유와 회복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나아가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기적이 ‘오병이어’며 ‘칠병이어’ 기적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행적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며,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고,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키시며,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또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이 11장 18~19절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세례 요한의 예를 들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마태복음 11:18~19 중)
“세례 요한이 금식하고 있을 때는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이제 내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니 죄인들의 친구라고 하는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오늘 설교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구세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 모든 칭호가 다 맞으며, 의미 있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칭호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흐름을 통해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신 분, 그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약한 자에게 힘을 주시며, 치유와 회복을 허락해 주시는 분입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누구라도 당신 곁으로 초청해 주시는 자비와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나의 구세주인지, 생명인지, 하나님의 아들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사실 하나만큼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힘들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혹시 아픔이 있습니까? 굶주림이 있습니까? 목마름이 있습니까?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생명을 주시며, 갈증을 해소해 주시고, 배고프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어떤 이야기로도, 어떤 칭호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분, 예수님은 정말 참 좋으신 분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깊이 사랑하시는 분, 어떤 사랑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주님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사역을 정하신 그리고 정의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우리를 고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 한 분만을 마음에 품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소망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3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예수님은 누구신가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0장, 9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마11:2~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1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 설교의 제목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일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고, 그분을 따르며 섬기는 것일까? 완전한 정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중요한 이유 한 가지를 나누려 합니다.
설교의 요약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세례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 한 분”으로 생각할 것이며, 베드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마르다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물었던 한 사람(세례요한)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가 기대했던 예수님의 모습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며 알곡을 모아들이며 쭉정이는 태워 버리는 심판의 주님이었습니다(마11:11~12). 그리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고 말씀을 전하실 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기대하던 예수님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행보는 세례요한에게 조금 실망스럽거나, 기대이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을 따라 살펴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계속해서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을 고쳐주셨기 때문입니다(마4:23). 예수님의 주된 사역이 병을 고치시고 약한 것을 고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내가 기다리던 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물었습니다. 그는 공의로 심판을 하시는 예수님!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시며, 그들을 정의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 세상을 바르게 펴시고 공의로 다스리는 분! 그런 예수님을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병을 고치는 자요, 약한 이를 돕는 자요, 죽은 자를 살리는 자로 자신을 생각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던 예수님께서 그냥 배를 타고 떠나셨습니다(마14:11-12). 그리고 빈들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향하여 죄를 회개하라고 선포했던 세례요한과는 다르게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모인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 위해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흐름을 통하여 그리고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비교를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규명해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약한 자들을 고쳐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눈먼 사람도, 문둥병자도, 앞을 못 보는 사람도 맞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기적을 통해서라도 빵을 주시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의 말씀 속에서 비춰진 예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고쳐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여러분이 목마르지 않게 하여 주시고, 여러분이 배고프지 않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나누기
1. 누군가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함께 나눠보세요.
2. 예수님께로 나아갈 때, 우리를 고쳐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
나의 시선과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귀하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죽은 자들도 살리실 것을 믿습니다.
이 귀한 주님을 믿으며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모든 자녀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