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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으로 가득합니다.>
2023년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런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지금 있는 걸까요?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결심으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그동안은 교회에 잘 나오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잘 나와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또 오랫동안 예배당의 한 자리를 지키며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예배하리라 결심하시며 나와 계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온라인이지만 정해진 시간, 예배자로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나오신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각자 나름의 이야기들이 다 있으시겠죠. 긴 시간 동안 연구를 해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고,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전부 사실로 확인되어서 내가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씀하실 분이 혹시 계실까요? 아마 이곳에 계신 많은 분들은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누군가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장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정작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몰랐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는 자가 왔다!” 라고 선포하면서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요한복음 1장 7절입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7)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고 있는 그때에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내셔서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전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중)
이 고백, 이 증언을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형제인 시몬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 1:41 중)
이 이야기를 듣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빌립을 만나시는 예수님, 그리고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 말씀 속에도 증언이라는 내용이 보다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가지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중)
한마디로 “내가 만났다!”, “내가 경험했다!” 하는 빌립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a)
이 말씀은 평범한 질문 같지만 오고 오는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은 질문, ‘과연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는 과연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종종 회의론에 빠지게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을 찾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빌립은 나다나엘의 방향을 틀어서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6b)
빌립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메시야일 가능성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립은 그저 아주 단순히 “와서 보라!” 하고 말합니다. 와서 보면 알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경험으로의 초대입니다. 만남으로의 초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를 만나보라. 경험해 봐라. 그러면 네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될 것이고,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요한복음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증언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가 설명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스스로 깨우쳐서 알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증언의 종교이지, 설명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증언과 고백이 이어지는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에 관한 고백이 넘쳐나는 곳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소망교회가 2023년 올 한 해에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고백이 가득한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전도를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이 가짜약을 팔 듯이 예수님을 변호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여러분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증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그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유창한 언변이 아닙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하고 초청하는 일로 충분합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증언의 이야기에는 주님이 우리를 먼저 보시고 찾아오신 사건이 선행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헬라어로 ‘휴리스코’(εὑρίσκω, heuriskó)라는 단어인데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열심히 찾고 노력해서 발견한다는 의미이죠. 이 단어가 한국어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εὑρίσκω)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3)
여기에서 ‘만나’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휴리스코’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빌립을 찾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연한 만남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유독 빌립에 관심을 두고 계셨습니다.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의 흐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예배자로 모여 앉아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휴리스코’라는 단어가 계속 이어집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를 발견합니다. 여기서 ‘찾아’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휴리스코입니다. 빌립이 의도를 가지고 그를 찾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접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발견한 예수님, 그분을 소개하려는 마음 때문이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의도를 가지고 찾아간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이 보여 준 모습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εὑρίσκω)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중)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찾아냈다! 내가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본다면 누가 먼저 찾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을 먼저 찾아내셨습니다. 우리가 고백적으로 주님을 찾았다, 만났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주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셨고,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찾은 사람은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와서 보라!” 하고 초청할 뿐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드러진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보다’라는 뜻을 가진 ‘호라오’(ὁράω, horaó)라는 단어와, ‘이두’(ἰδού, idou)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많이 등장하지만 요한복음 1장 전체적으로도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실 때 요한복음 1장에 ‘보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타나는지 살펴보시면 또 다른 관점을 얻게 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보다’라는 단어가 나오죠. “와서 보라!” 하는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대로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나아갔을 겁니다. 초청에 응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흥미로운 내용이 나타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가는 상황인데,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요 1:47 중)
평범한 말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오고 있는데 실은 누가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빌립을 발견하셨듯이 예수님은 나다나엘도 이미 발견하고 계셨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호렙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도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며 모세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 그를 보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출 3:3~4 중)
흥미로운 내용의 전개입니다. 늘 우리가 보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보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발견하시고, 우리를 보십니다.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나다나엘이 주님께로 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b)
자, 주님께서 그분께로 나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바라보십니다. 그냥 겉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속을 살피시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다나엘을 마치 성인처럼 이해해 오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 속에 사실은 숨겨진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야곱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속이는 자입니다.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b)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네가 진짜 이스라엘이다! 네 속에 야곱이 없다.”는 뜻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말씀 뒤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꿈과도 연결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나신 그 지점에서 야곱에 대한 생각을 끌어올리시고는 그에게 접근하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은 속이는 자인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야기를 지금 나다나엘을 만나시면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도 보입니다. “너는 원래 야곱과 같은 속이는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속이는 자로 보지 않겠다. 간사한 자로 보지 않겠다. 너는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이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주님의 결단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간사한 것이 하나 없는 순결한 존재입니까? 나다나엘이 간사한 것이 없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저 주님에 의해서 발견되어진 존재요, 주님께서 나를 보아 주셨기 때문에 은혜 입은 존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참 이스라엘로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있을 뿐입니다. 죄인임에도, 속이는 자임에도, 간사한 자임에도 우리를 흠 없는 존재로 주님께서 받아 주시기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늘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분과 함께하는 미래로 초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자, 그런데 ‘보다’의 현재적인 의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로 향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나다나엘이 과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였을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때부터 그를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미 찾으셨다는 뜻이고, 발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했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아마도 그곳에서 나다나엘이 야곱과 관련한 묵상을 깊이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올 때 야곱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닌가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는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하는 말씀은 나다나엘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나는 너를 그렇게 본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였더라면, 그럼에도 자신을 향하여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면, 아마도 그의 마음은 미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 그럼에도 오늘도 우리를 보시면서 “너는 간사한 것이 없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은혜, 이것이 나다나엘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 그리고 이어지는 ‘보다’라는 단어는 미래로 확장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50~51)
여기에도 ‘보라’에 해당하는 동사 ‘호라오’가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형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보러 나온 나다나엘을 먼저 보셨고, 찾으셨고, 마음속까지도 들여다보셨습니다. 그의 과거까지도 알고 계셨죠. 그리고 이제 그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미래로 함께 나가자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로 나다나엘을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루하루 변화되어 가는 일상 속에서 주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이 생기고, 증언의 자리에도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 속에 닫혀 있지 않고, 현재에 머물러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도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함께 예배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함께 보고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사역의 자리에 함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더욱더 확신해 갔을 것입니다. 이후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나다나엘은 함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이 그 사실을 담담히 알려 줍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1~2)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나다나엘은 주님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을 바라보며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누린 은혜입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의 문제로 힘들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가정의 문제, 학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너희가 보리라. 나와 함께 가면 볼 것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초청에, 주님의 손에 우리의 손을 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이 경험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사변과 생각의 구조 속에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역동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여러분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와서 보라! 이미 나의 과거를 아시는 주님,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꿰뚫고 계시는 주님,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함께 가자.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너희가 보게 되리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The Man Who Went to See Jesus
John 1:43-51
This is the second Sunday of 2023. Today I want to start my sermon with a question:How have we all come here?
Some of you may be attending church today as part of your New Year’s resolution. Others may have been coming to church all their lives, sitting here with a firm determination that they will come to church service until their health fails them. Still others may be worshiping online with a heart to worship at a given time in a prepared manner.
How did we come topossess faith? How did we come to believe in God and receive Christ as our Savior?
How many of us would be able to say, “After years of studying the Bible myself, I have finally confirmed that God truly exists, that Jesus is the Son of God, and that all that is written in the Bible is true. Therefore, I believe in Jesus and attend church.”
In the Bible, we do not see anyone who came to believe in Jesus on his own, through his own studies and thinking. Instead, it tells us that people’s faith starts from somebody else’s “testimony.” This is also what is says in today’s Scripture, John.
John starts with these words that describe the coming of Jesus: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John 1:5)
Then it goes on to say that there was a man who came to testify concerning that light, that is, John the Baptist:
“He came as a witness to testify concerning that light, so that through him all might believe.” (John 1:7)
In short, the Bible tells us that the gospel started with somebody’s testimony about Jesus. John the Baptist knew who Jesus was when he first saw Him. This is what he says about Him:
“Look,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ohn 1:29)
Hearing this, two of John’s disciples, one of which is Andrew, decide to follow Jesus. After meeting Jesus, however, Andrew immediately goes to his brother, Simon Peter, and tells him about Jesus. And after Peter hears this testimony, “We have found the Messiah”(John 1:41), he goes to meet Jesus.
The two main characters of today’s passage,Philip and Nathanael, however, describe their experience of hearing the testimony concerning Jesus in a more detailed and lively manner.
After Philip meets Jesus, he finds Nathanael and tells him:
“We have found the one Moses wrote about in the Law, and about whom the prophets also wrote—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John 1:45)
So this is what Philip is saying to Nathanael: “I have met Him! I have experienced Him!” But Nathanael’s first response was to use his reason to judge Jesus:
“‘Nazareth! Can anything good come from there?’ Nathanael asked.”(John 1:46a)
Whenever we use our reason to judge, determine, and think, we end up being skeptical. How can Jesus save us all? How can someone born in Nazareth be my Savior?
But Philip redirects Nathanael:
“‘Come and see,’ said Philip.’”(John 1:46b)
Philip does not explain in words how something good can come from Nazareth. He does not enumerate the conditions or the possibility that Jesus is the Messiah. He simply says, “Come and see.”
This is an invitation to an experience, to an encounter.
Meet Jesus for yourself. Experience Him. Then you will know about Him and profess that He is the Savior. This is what Philip is saying.
As such, the Book of John is full of testimonies of people who met Jesus. In fact, Jesus the Son of God is not someone you can explain in words. He is not someone you come to know by your own understanding. He is not someone you can understand by studying.
In this sense, Christianity is a religion of testimony, not one of explanation. The church is a place full of people’s testimonies and confessions about theirpersonal experiences and encounters with Jesus.
Where there is a plethora of confessions about “my encounter” with Jesus, there is a healthy is church. It is my hope that Somang Church will be filled with such confessions and testimonies in 2023.
ManyChristians are afraid to evangelize. They worry about how they might make another person come to Christ. But Jesus does not want you to spread the gospel, as if you are selling counterfeit drugs. He wants you to testify about your real experiences with Him and to glorify Him through these testimonies.
Evangelism is not done with eloquent words. It is done through confession and conviction. Simply inviting a person to “come and see” is enough. Simply leading another person to encounter Jesus is enough. Because God makes the next move.
Two words stand out in today’s passage.
The first is “to find,” which in the original Greek is “εὑρίσκω (heuriskó).” It means “to find, especially through hard efforts.”Although this word is hard to spot in the Korean Bible because it is often translated as “to meet,”it is more easily found in the English Bible as instanced in the following verse:
“The next day Jesus decided to leave for Galilee. Finding (εὑρίσκω) Philip, he said to him, ‘Follow me.’” (John 1:43)
Here the Greek word for “find” is “εὑρίσκω (heuriskó).”
Jesus “found” Philip. Considering the original Greek verb,Jesus made the effort to find him. He did not just happen to meet him coincidentally. Jesus may have met thousands of people and passed by crowds. But He did not pass by Philip. Jesus found him and stopped in front of him.
Dear brothers and sisters, how have we come to sit here today? We are all sitting here because our Lord found us in the infinite grace of God.
The word “heuriskó,” that is, “to find,” is repeated in other verses of today’s passage.
After meeting Jesus, Philip goes to Nathanael. Here “heuriskó” is used again. Now it is Philip who “finds” Nathanael. He does not just go to him without a purpose, but goes deliberatelyto tell him about Jesus. In short, Philip tries to evangelize Nathanael.
He says to Nathanael:
“We have found (εὑρίσκω) the one Moses wrote about in the Law, and about whom the prophets also wrote—Jesus of Nazareth, the son of Joseph.”(John 1:45)
Philip says to Nathanael, “I have found Him. I have found Him.” But really, who found Philip in the first place? Jesus.
We may confess that wefound Jesus. We may say we encountered Him. The truth is, however, that He found us first. We are here today because of Him, because He found us.
Therefore, there is no need tobe afraid when we share the gospel. Those who have been found by Jesus will come to Him. It is enough to say to them, “Come and see!”
The second word that stands out in today’s passage is “to see,” which in the original Greek is “ὁράω (horaó)” or “δού (idou).” This word, whichrecurs in today’s text, is also frequently used in the entire chapter of John 1.
Philip says to Nathanael, “Come and see.” Following these words, Nathanael goes to see Jesus.
But something interesting is noted. This is what the Bible says happened when Nathanael went to see Jesus:
“When Jesus saw Nathanael approaching,”(John 1:47a)
Nathanael goes to see Jesus, but who in fact is seeing Nathanael? It is Jesus. Just as Jesus first found Philip, Jesus first saw and found Nathanael.
A similar scene appears in Moses’ story. In Exodus 3 Moses sees a burning bush on Mount Horeb. He moves toward it to get a better look. Here the Bible also says that the Lord “saw” Moses approaching the bush:
“So Moses thought, ‘I will go over and see this strange sight—why the bush does not burn up.’ When the Lord saw that he had gone over to look, […].” (Exodus 3:3-4a)
How fascinating! As such, we think it is we who see, but it is actually God who sees us first. Jesus finds us and sees us first.
Let’s return to John. Seeing Nathanael come to Him, Jesus says:
“Here truly is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 deceit.”(John 1:47b)
In the KJV this verse starts with “Behold,” which means “to see.”So Jesus “sees” Nathanael. But He sees not just his appearance but his innermost being.
Dear brothers and sisters, when we come to see and encounter Jesus, it is actually Jesus who first sees us. What’s more, He sees inside us.
If the Lord can see our innermost being, who is able to stand before Him? But Jesus’ words spoken to Nathanael appear to be those of praise. He says that “there is no deceit” in Nathanael. So, in the past, whenever I read this verse, I felt Nathanael was a great man worthy of praise.
But one day I came to see it from a different perspective. The expression “there is no deceit” reminded me of Jacob and his character. This different perspectivewas reinforced by Verse 51 which connects to Jacob’s dream in Bethel. Jesus says to Nathanael that he will see “heaven open,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John1:51) So Jesus is saying to Nathanael, “You are a true Israelite. There is no Jacob in you. ”
Jacob was a man who always deceived God, but in Genesis 32 God gives him a new name: Israel. This is what Jesus is referring to as He converses with Nathanael.
Accordingly, this passage from John can be read as follows: “You, Nathanael, are like Jacob who always deceives. But I will not see you as such. I will not see you as a deceitful person. You are my chosen people. You are Israel.”
This is the resolve Jesus makes as He speaks to Nathanael:“Here truly is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 deceit.”(John 1:47b).
Today we too have come to the Lord. But who are we? What are we like? Are we without deceit, without blemish? No, we are not. We have been found by Jesus. That is all. We are just men and women who have received His grace. Jesus sees and accepts us as “a true Israelite.” Even though we are sinners and deceivers, He sees us as His children without blemish. This is the present me. Therefore, we live our present always in grace.
But the meaning of “to see,” which is in the present, is extended to the past:
“‘How do you know me?’ Nathanael asked. Jesus answered, ‘I saw you while you were still under the fig tree before Philip called you.’”(John 1:48)
We have no way of knowing what Nathanael was doing under the fig tree before Philip called him. But Nathanael himself would have known. And Jesus is saying that He knowswhat he was doing and thinking then.
What was Nathanael doing under the fig tree? Taking a positive view, we may imagine that he was meditating on the story of Jacob. If this were the case, Nathanael would have been encouraged by Jesus’ words which referred to Jacob’s story.
On the other hand,we may imagine that he was having negative thoughts or doing something deceitful under the fig tree. If this were the case, Jesus’ words would have made him feel he was caught red-handed.Nevertheless, Jesus called him a true Israelite.
Personally, I think Nathanael would have felt both ashamed and grateful at Jesus words, “Here truly is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 deceit,” if he had been doing something shameful under the fig tree.
It appears Jesus finds Philip in the first part of today’s passage and Nathanael in the latter, but the truth is Jesus had already seen and found Nathanael earlier on.
Our Lord knows everything about us—even our past. But regardless of our past, He sees our present as having no deceit or blemish. This is God’s grace.
This word “to see” extends once again to encompass the future:
“Jesus said,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at.’ He then added, ‘Very truly I tell you, you will see heaven open,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John 1:50-51)
Here the verb “ὁράω (horaó),” which means “to see,” is used twice in the Greek New Testament—but in the future tense.
To Nathanael who has come to see Him, Jesus says that He will see greater things with Him.
What does this mean? Jesus is inviting Nathanael to a future with Him. He is inviting him to go together. Jesus is saying He will lead Nathanael to amazing experiences.
What does it mean to believe in Christ? It means to experience God’s amazing love and grace in the countless events of our ever-changing daily lives, as we walk with Jesus.
Therefore, our faith is open to the future. It is not trapped in the past. It does not remain in the present. We are on a continuous journey. In that journey, we move toward the future with Jesus. This is the reason we are gathered here today, the reason we believe in and worship God.
According to John, what was the first incident that Nathanael experienced after becoming Jesus’ disciple? It was the miracle at the wedding in Cana, the transformation of water into wine. Nathanael would surely have been there.
Nathanael was also there when Jesus was raised to life. John 21 calmly records:
“Afterward Jesus appeared again to his disciples, by the Sea of Galilee. It happened this way: Simon Peter, Thomas (also known as Didymus), Nathanael from Cana in Galilee, the sons of Zebedee, and two other disciples were together.”(John 21:1-2)
The Bible tells us that Nathanael was with Jesus to the end.
Dear brothers and sisters, the reason we believe in Christ and come before Him in worship is because the Lord is with us, leads us, and reveals His presence to us. He will reveal that He is alive in our lives until the day we meet Him in heaven. This is our faith.
Some of you will be praying for your businesses. Others will be praying for your family, study, health, and so on. Behold! You will see that God will be with you. Behold! You will see that He is working. Therefore,come and see!
Dear Somang Church, I invite you to this very experience. It is my hope that you will experience a faith that dynamically experiences the Lord, not a religion trapped in ideas and thoughts.
Come and see! Our Lord, who already knows our past and sees our present with loving eyes, invites us to a new future:
“You believe because I told you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You will see greater things than that.”
요한복음 1: 43~51
43~51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성경에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으로 가득합니다.>
2023년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런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 여기에 지금 있는 걸까요?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로운 결심으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그동안은 교회에 잘 나오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잘 나와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죠. 또 오랫동안 예배당의 한 자리를 지키며 건강이 허락되는 날까지 예배하리라 결심하시며 나와 계신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온라인이지만 정해진 시간, 예배자로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주님 앞에 나오신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각자 나름의 이야기들이 다 있으시겠죠. 긴 시간 동안 연구를 해 보니 하나님이 계신 것이 분명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분명하고, 성경이 말하는 내용이 전부 사실로 확인되어서 내가 예수를 믿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씀하실 분이 혹시 계실까요? 아마 이곳에 계신 많은 분들은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의 믿음이 누군가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1장 5절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지만 정작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몰랐던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는 자가 왔다!” 라고 선포하면서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갑니다. 요한복음 1장 7절입니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7)
빛이 세상에 왔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고 있는 그때에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내셔서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복음이 예수님에 대한 증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전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그가 누구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요 1:29 중)
이 고백, 이 증언을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라고 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는 자신의 형제인 시몬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서 증언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요 1:41 중)
이 이야기를 듣고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 1장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빌립을 만나시는 예수님, 그리고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 말씀 속에도 증언이라는 내용이 보다 자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가지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중)
한마디로 “내가 만났다!”, “내가 경험했다!” 하는 빌립의 고백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이성적으로 판단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요 1:46a)
이 말씀은 평범한 질문 같지만 오고 오는 세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은 질문, ‘과연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는 과연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종종 회의론에 빠지게 합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답을 찾기 어려울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빌립은 나다나엘의 방향을 틀어서 그의 생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요 1:46b)
빌립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메시야일 가능성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빌립은 그저 아주 단순히 “와서 보라!” 하고 말합니다. 와서 보면 알 것이라는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경험으로의 초대입니다. 만남으로의 초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를 만나보라. 경험해 봐라. 그러면 네가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될 것이고, 그분의 제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요한복음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증언이 가득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가 설명으로 증명해 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스스로 깨우쳐서 알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증언의 종교이지, 설명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증언과 고백이 이어지는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예수에 관한 고백이 넘쳐나는 곳이 건강한 교회입니다. 저는 우리 소망교회가 2023년 올 한 해에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과 고백이 가득한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이 전도를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분이 가짜약을 팔 듯이 예수님을 변호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여러분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증언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그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유창한 언변이 아닙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확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 하고 초청하는 일로 충분합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증언의 이야기에는 주님이 우리를 먼저 보시고 찾아오신 사건이 선행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어는 헬라어로 ‘휴리스코’(εὑρίσκω, heuriskó)라는 단어인데 ‘발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열심히 찾고 노력해서 발견한다는 의미이죠. 이 단어가 한국어 성경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이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εὑρίσκω)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 1:43)
여기에서 ‘만나’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휴리스코’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빌립을 찾아내셨다는 뜻입니다.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연한 만남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유독 빌립에 관심을 두고 계셨습니다. 그를 찾아내셨습니다.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 이야기가 본문의 흐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예배자로 모여 앉아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안에서 우리 자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입니다.
‘휴리스코’라는 단어가 계속 이어집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그를 발견합니다. 여기서 ‘찾아’라고 하는 단어가 바로 휴리스코입니다. 빌립이 의도를 가지고 그를 찾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접근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발견한 예수님, 그분을 소개하려는 마음 때문이죠.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의도를 가지고 찾아간 것입니다. 전도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이 보여 준 모습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이야기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εὑρίσκω)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요 1:45 중)
그가 고백합니다. “내가 찾아냈다! 내가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러나 사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본다면 누가 먼저 찾은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빌립을 먼저 찾아내셨습니다. 우리가 고백적으로 주님을 찾았다, 만났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주님께서 나를 먼저 찾으셨고,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겁낼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찾은 사람은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와서 보라!” 하고 초청할 뿐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드러진 또 다른 단어가 있는데, ‘보다’라는 뜻을 가진 ‘호라오’(ὁράω, horaó)라는 단어와, ‘이두’(ἰδού, idou)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많이 등장하지만 요한복음 1장 전체적으로도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실 때 요한복음 1장에 ‘보다’라는 단어가 몇 번이나 나타나는지 살펴보시면 또 다른 관점을 얻게 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말하는 장면에서 ‘보다’라는 단어가 나오죠. “와서 보라!” 하는 단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대로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나아갔을 겁니다. 초청에 응했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흥미로운 내용이 나타납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가는 상황인데,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요 1:47 중)
평범한 말 같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려고 나오고 있는데 실은 누가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빌립을 발견하셨듯이 예수님은 나다나엘도 이미 발견하고 계셨습니다. 비슷한 장면이 호렙 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도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불붙은 떨기나무를 보며 모세가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 그를 보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출 3:3~4 중)
흥미로운 내용의 전개입니다. 늘 우리가 보는 것 같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보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발견하시고, 우리를 보십니다.
요한복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나다나엘이 주님께로 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b)
자, 주님께서 그분께로 나오고 있는 나다나엘을 바라보십니다. 그냥 겉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꿰뚫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 속을 살피시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나다나엘을 마치 성인처럼 이해해 오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본문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 속에 사실은 숨겨진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야곱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 야곱은 어떤 사람입니까? 속이는 자입니다. 간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금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말씀하시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요 1:47b)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네가 진짜 이스라엘이다! 네 속에 야곱이 없다.”는 뜻으로 바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말씀 뒤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는 말씀은 야곱이 벧엘에서 경험한 꿈과도 연결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만나신 그 지점에서 야곱에 대한 생각을 끌어올리시고는 그에게 접근하고 계셨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하나님은 속이는 자인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야기를 지금 나다나엘을 만나시면서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도 보입니다. “너는 원래 야곱과 같은 속이는 자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속이는 자로 보지 않겠다. 간사한 자로 보지 않겠다. 너는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이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주님의 결단이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는 표현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주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간사한 것이 하나 없는 순결한 존재입니까? 나다나엘이 간사한 것이 없어서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저 주님에 의해서 발견되어진 존재요, 주님께서 나를 보아 주셨기 때문에 은혜 입은 존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참 이스라엘로 받아 주셨기에 우리는 있을 뿐입니다. 죄인임에도, 속이는 자임에도, 간사한 자임에도 우리를 흠 없는 존재로 주님께서 받아 주시기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는 늘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분과 함께하는 미래로 초대하시며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자, 그런데 ‘보다’의 현재적인 의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로 향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요 1:48)
나다나엘이 과거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무엇을 하였을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때부터 그를 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미 찾으셨다는 뜻이고, 발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은 무엇을 했을까요? 많은 주석가들은 아마도 그곳에서 나다나엘이 야곱과 관련한 묵상을 깊이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올 때 야곱을 연상시키는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닌가 이해하기도 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는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나다나엘이 좋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하는 말씀은 나다나엘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에게는 간사함이 없다! 나는 너를 그렇게 본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였더라면, 그럼에도 자신을 향하여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면, 아마도 그의 마음은 미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 그럼에도 오늘도 우리를 보시면서 “너는 간사한 것이 없다. 너는 나의 백성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은혜, 이것이 나다나엘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 그리고 이어지는 ‘보다’라는 단어는 미래로 확장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 1:50~51)
여기에도 ‘보라’에 해당하는 동사 ‘호라오’가 두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형으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보러 나온 나다나엘을 먼저 보셨고, 찾으셨고, 마음속까지도 들여다보셨습니다. 그의 과거까지도 알고 계셨죠. 그리고 이제 그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미래로 함께 나가자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미래로 나다나엘을 초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루하루 변화되어 가는 일상 속에서 주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이 생기고, 증언의 자리에도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 속에 닫혀 있지 않고, 현재에 머물러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도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함께 예배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함께 보고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사역의 자리에 함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더욱더 확신해 갔을 것입니다. 이후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나다나엘은 함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이 그 사실을 담담히 알려 줍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요 21:1~2)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나다나엘은 주님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을 바라보며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누린 은혜입니다.
여러분 중에 사업의 문제로 힘들어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가정의 문제, 학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로 기도하고 계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너희가 보리라. 나와 함께 가면 볼 것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의 초청에, 주님의 손에 우리의 손을 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 이 경험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사변과 생각의 구조 속에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역동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여러분에게 열리기를 바랍니다. 와서 보라! 이미 나의 과거를 아시는 주님,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꿰뚫고 계시는 주님,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함께 가자. 너희가 보게 될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너희가 보게 되리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2023년 1월 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예수를 보러 나간 한 사람” (요 1:43-5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92장, 52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1:43-5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월 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을까요? 긴 시간 연구를 해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의 타당성을 검증한 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경에는 그렇게 독자적인 연구나 이론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누군가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려줍니다.
설교의 요약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빛의 오심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한 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의 증언을 듣고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에게 메시야를 증언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경우는 조금 더 자세하고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 나다나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에서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며 대꾸할 뿐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나다나엘의 이러한 방향을 다시 바로 잡아줍니다.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 1:46b)
빌립은 단순하게 초대합니다. 경험으로의 초대이며 만남으로의 초대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증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증언의 종교이지 설명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증언과 고백이 이어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 그분에 대한 고백이 넘치는 곳에 건강한 교회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전도를 두려워합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게 만들 수 있을까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유창한 언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백과 확신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단어가 있는데, 바로 ‘발견한다, 찾는다’는 뜻을 가진 휴리스코(εὑρίσκω)와 ‘본다’는 뜻을 가진 호라오(ὁράω)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는 주님께서 먼저 빌립을 찾으셨다는 사실과 주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먼저 그를 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보기 전에,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찾으셨고 먼저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의 과거, 곧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있을 때(48절)도 그를 지켜보셨고, 그의 현재, 곧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47절)도 알아 보셨고, 더 큰 일을 보리라(51절)고 하시며 그의 미래 또한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과거 속에 갇혀있는 것도 아니요, 현재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지금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이끌어 가시며, 천국 가는 그날까지 우리 삶 속에서 주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가 바로 이 경험으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와보라! 이미 나의 과거를 보신 주님, 나의 현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 그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초청하십니다.
나누기
- 자신이 전도를 했거나, 전도를 받은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 묵상해봅시다.
마무리기도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아셨으며, 우리를 주목하여 보셨음을 이 시간 다시 확인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주님과 함께 새로운 모험의 길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에 기적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능력의 함께하심으로 구원의 신비를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