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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새로운 살 길

히브리서 10: 19 ~ 20

김경진 목사

2019.06.23

<학도병의 편지>

1950년 6・25전쟁 당시 포항여자중학교는 중요방어선 중 한 곳으로, 71명의 학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이우근’ 학도병도 이 전투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에게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저는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편지를 쓴 다음 날, 이우근 학도병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편지는 그의 품 안에 있던 수첩에서 발견되었다.

< 한국전쟁의 상흔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편지 속 학도병처럼 전사한 사람은 한국군 137,899명, 유엔군 40,670명, 북한군 508,797명, 중공군 148,600명으로 총 835,966명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수류탄과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전우들이 모두 주검이 되는 끔찍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가 무려 835,966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반인들, 즉 시민들의 사망에서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된 이들의 수는 990,968명이었습니다. 대략 잡아 희생자 수가 무려 200만 명에 육박합니다. 이 전쟁으로 약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30만 명의 전쟁미망인이 생겼으며,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습니다.
69년 전 일어난 이 참혹한 전쟁이 바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의 참화였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전쟁의 책임은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강행한 북한과 김일성 정권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용인하고 도운 소련과 중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전쟁에 책임을 지거나 사과한 일이 없습니다.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적의, 적화의 야욕은 지금까지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연평도 포격이나 서해안에서 일어난 천안함 격침 사건이 그러하고, 최근 그들이 개발했다고 자랑하는 핵무기가 그러합니다. 최근 북한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자신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할지라도 북한이 호전적이지 않다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정부 혹은 국가라는 주장은 증명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참으로 이와 같은 북한을 앞에 두고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걱정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처럼 예배드리던 어느 날 북한군이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언제 어느 때 또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별히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은 걱정과 염려가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북한은 전쟁 전부터 북한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대량 학살을 감행한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죽음과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참다운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전쟁 중에도 북한군은 수없이 기독교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원당교회에서 73명, 봉남교회에서 73명, 영암읍교회에서 24명, 야월리교회에서 65명, 덕암교회에서 22명 등 여러 교회당에서 북한군에 의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 땅은 아마 오늘날 북한과 같은 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권이 말살되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얼어붙은 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이라는 틀 안에 갇혀 버린, 그래서 자아비판과 인민재판, 노동교화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장악하려 합니다. >

사실 공산주의는 산업사회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 비인간화의 문제를 보완하려는 하나의 대안 철학에서 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에 적용되었을 때 큰 문제점들이 드러났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지주와 소작인, 기업인과 노동자 계급과 계층의 구별은 분열과 반목, 투쟁을 양산했습니다. 인류가 행복해지고 비인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발한 공산주의가 도리어 인간을 피폐하게 했고, 게으르게 만들었으며, 계층 간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1인 혹은 1당 독재가 가능한 왜곡된 이념과 정치체계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념에는 ‘공평’과 ‘정의’라는 핵심 가치가 있었으나, 정작 ‘박애’와 ‘사랑’이라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바로 이러한 정신과 이념을 우리는 죽음의 문화, 죽이는 태도, 죽이는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1인 독재가 가능한 나라, 그것도 3대에 이르도록 세습이 되지만 도리어 백두혈통이라 칭송받으며 독재가 공고하게 유지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인간의 인간 됨,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권리,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나라, 바로 그 나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야망을 이 땅에서도 이루려 하는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이 휴전 상태로 대치하며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의 문화에서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한 가정 혹은 소수의 지배자들을 위해 모두가 희생되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남한의 현실이 만만하거나 녹록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남한은 북한에 비해 매우 훌륭한 정신과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유주의, 자유경제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북한과 비교해 훨씬 나은 상황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특히 ‘죽음의 문화’와 관련하여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로운 경쟁을 표방했던 자유경제체제는 무한한 경쟁을 유도하여 낙오자들을 속출하게 했습니다. 무역 전쟁이 일어났고, 새로운 전쟁을 계속해서 양산하게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로 지금까지 발전해 왔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으며, 또 다른 전쟁의 자리에 내몰리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속출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자들이 나오고, 정권을 잃거나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러나 이긴 자들은 세상의 방식으로 약자를 죽이려 달려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세상의 방식이요, 세상의 법칙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서 증오와 반목, 신경증적 태도와 적개심, 우울증이 만연한 현실입니다.
이처럼 또 다른 심연, 또 다른 죽음의 현실이 이 땅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한 아내가 남편을 극도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일가족 4명이 한 장소에서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 자율 경쟁이 보장되는 이 땅, 이 나라이지만, 이 땅에서도 결코 행복한 소식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달란트를 존중하고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의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 자유민주주의가 도리어 방종과 또 다른 태만을 낳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어떤 사상이나 체제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우리는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것이 행복하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체제인가?’ 하는 물음도 던져보게 됩니다. 공산주의는 또 어떻습니까? 사회주의는 어떻습니까?
사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재산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정신이 바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주요한 철칙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실제 상황 가운데서는 이러한 정신과 이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평등과 정의를 추구했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나 자유경제체제가 올바르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면서 무한한 발전을 이루어 오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래서 많은 창의적인 일들이 일어났고, 산업 발전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방종과 타락, 그 밖의 수많은 문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도 예수님의 정신을 반영한 체제이자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들의 인권을 인정하셨고, 어린아이들의 권리도 존중해 주셨습니다. 병자들과 함께하셨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그분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 민주주의요, 자유경제체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상은 무언가가 빠져있는 듯 보입니다. 이 땅에서도, 또 다른 땅에서도 온전한 체제, 온전한 평화, 온전한 기쁨과 온전한 해방감을 느끼지는 못하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빠진 것입니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무엇이 빠져 있길래, ‘공평’과 ‘정의’와 ‘평등’이라는 너무도 멋진 구호를 외치고 있음에도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까? 또한 ‘자유’와 ‘인권’을 그토록 강조하는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에서도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활개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통일. 우리는 통일을 기다리며, 통일된 미래를 생각합니다. 통일된 미래에 우리는 어떤 체제, 어떤 체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자유민주주의? 아니면 공산주의? 무엇이 우리를 밝고 옳은 길로 인도해 주겠습니까?
물론 언뜻 드는 생각은 공산주의보다는 자유민주주의가 올바른 체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제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가 있는 곳에서 참 자유와 정의가 실현됩니다. >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매우 중요한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신 ‘희생’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공산주의에도 없고 자본주의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공평과 정의, 평등을 내세우는 공산주의 사상에서도 빠져버렸고,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며 보장한다는 민주주의 사상에서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인권은 귀한 것입니다. 자유도 귀합니다. 평등도, 공평도, 정의도 귀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 모든 건 예수님의 생각과 정신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식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의 ‘희생’이었습니다. 정의의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공평이나 평등이란 단어의 나열도 아니었습니다. 자유의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죄에서 자유 함을 얻게 하시기 위해, 사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을 몸소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공의로운 정의, 이 정의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희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도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기희생’.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부활 후 강조하신 ‘용서’입니다. 자기희생과 용서.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에도 없고, 민주주의에서도 발견되지 못하는,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까지 선포하며 강조하시는, 동시에 이 세상은 이루지 못하고 있는 덕목이자 정신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그렇고 우리의 가정도 비슷합니다. 정의로운 가정,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공평한 가정,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가정, 여건이 신장 되는 가정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방식은 ‘자기희생’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희생, 아내는 아내로서의 희생, 그 희생이 있는 곳에서 정의와 공평 그리고 자유가 나타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서 비로소 정의와 공평, 자유가 실현됩니다.

< 자발적 희생과 용서만이 이 나라와 시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

찬송가 515장은 1952년 6・25 당시 지어진 찬송입니다. 1절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가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비탄한 심정으로 노래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또다시 죽어 나가는 현장에서 이렇게 탄식하며 노래합니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러나 이 개탄한 상황이 전쟁뿐이겠습니까? 지금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억압과 압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에서 살고 있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을 생각하면서 다시 1절의 가사를 살펴보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러나 어찌 이것이 북한만의 일이겠습니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과연 이 노랫말에서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남한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 노랫말을 살펴봅시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어느 곳에서든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그러나 다음 2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정의를 외칠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자유를 외칠 사람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희생당할 사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 그 사람입니다.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또한 3절과 4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살아 계신 주 하나님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다
생명수는 홀로 예수 처음이요 나중이라
주님 너를 부르신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다시 사신 그리스도
만백성을 사랑하사 오래 참고 기다리네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희생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을 우리 주님이 지금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통일선교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전쟁 69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통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통일이 된다면 이 세상, 이 땅을 과연 온전하게, 바람직하게, 행복하게 만들어 갈 자신이 있습니까? 민주주의면 됩니까? 자유경제체제면 됩니까? 공산주의면 됩니까? 사회주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발적인 희생, 그리고 용서. 이것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이것만이 세상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분이 바로 새로운 살 길입니다. 이 예수님을 붙잡고 이 땅을 변화시키기를 다짐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Jesus, A New and Living Way

Hebrews10:19-20

The Korean War was a cruel, fratricidal tragedy. The horrorthat erupted on June 25, 1950 lasted for more than three years and took the lives of hundreds of thousands. The total death toll was 835,966. Ten million families were separated, 300 thousand women widowed, and100 thousand orphaned.
The primary responsibility lies with the Kim Il-Sung regime of the North that started the war. The Soviet Union and China also aided the regime’s plans. However, none of these countries have acknowledged their responsibility orapologized. And the North’s belligerent behavior and ambition to invade the South continue to be a reality today. The sinking of the Cheonan, the attack on Yeonpyeong Island, and the nuclear weapons that the North takes so much pride in are all examples of this reality. No one would be able to say that North Korea is a peace-loving country.
In the face of such threats from the North, how can we assure our security? Many Christians in the South worry and pray. June 25th of 1950 was a Sunday, like today. North Korea attacked the South when Christians were worshipping, like us this morning. So, many of us—particularly, Christians who have experienced the horrors of socialism—live in constant fear that such a war may erupt on the Korean Peninsula again.
Even before the Korean War, North Korea persecuted and massacred countless Christians. As a result, many Christians fled to the South. Even now, there is no real freedom of religion in North Korea. During the War, North Korean soldiers massacred many Christians, including 73 in Wondang Church, 73 in Bongnam Church, and 65 in Yawollee Church.
Had it not been for the United Nations’ decision to send troops to the Korean Peninsula and the help of countries such as the United States, this land would resemble North Korea today. A cold, dark land with no human rights or freedom of worship.
Although socialism emerged as an alternative philosophy that aimed to solve the ills of rapid industrialization and dehumanization, it revealed massive problems when applied to the real world. Separating the classes only worsened social division, hostility, and struggle. Man’s dream of building a happy society only made man destitute, lazy, and hateful toward each other. Furthermore, it evolved into a distorted form of authoritarianism. It stressed justice and equality, but lost love and benevolence. This is a spirit that kills, a culture that kills, an attitude that kills. North Korea has become an authoritarian society where a third-generation power succession is praised, where human rights are ignored, where there is no freedom of religion. We are technically at war with such a regime.
Therefore, as we commemorate the Korean War, we cannot but pray earnestly to God. We say it is peaceful now. It may seem peaceful since we are not engaged in combat with North Korea. However, we must be keenly aware of the fact that our brethren in the North are living in fear and terror, in a culture of death, and in poverty, with no proper guarantee of human rights. We must pray desperately for them.
But does this mean that life in South Korea is all well and good? Unlike the North, South Korea accepted good values and political systems such as capitalism, market economy, and democracy. It developed into a “better”, more prosperous society than the North. However, can we confidently say that we are free from a culture of death?
A free market economy and the fierce competition that followed left many behind. New wars such a trade wars plague us. Even in a country that upholds human rights and freedom, many suffer and are torn by a different kind of “war.”Many feel deprived, feel hatred and antagonism, and are depressed and psychologically ill. A curtain of death hangs over this land, too. Recently, we were shockedby the news that a woman killed her ex-husband in the most atrocious way. A father killed himself after killing his wife and children. Even in this free democracy where freedom, human rights, and autonomous competition are guaranteed, life is far from rosy.
Communism and democracy. It is fortunate that we are living in a democratic society, but when we think about it, we cannot but ask, ‘Is this system what God really wants?’ Communism envisioned a society where the poor would be taken care of and wealth shared—which was what Jesus taught us—but, in reality, it fell far short of man’s dreams. But, what about democracy and free competition? Democracy stressed freedom and human rights and it did foster creativity and industrial development. Still, democracy has its own dark shadows.
Jesus valued individual talent. He had compassion on the marginalized. He recognized the rights of women and children, understanding their pain. Jesus embraced children, talked to women, and really listened them. Jesus was with the sick and the poor, listening to their smallest cries. If this was what Jesus was like, then it seems democracy and free competition are missing something. Thus, it seems that there is no perfect system, perfect peace, perfect joy or perfect liberation in either South or North Korea.
Then, what is missing? What is missing in socialism? And what is missing in democracy? Why are these political systems not perfect? Where can we find a way to solve these problems?
We talk about 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a lot. We earnest wait for it. Then, which political system should a unified Korea adopt? Free democracy? Or communism as the North wishes? Which system will guarantee a bright and upright future? An immediate response to this would be democracy. We think democracy is “better” than socialism, that democracy is the “right” system. However, as Christians, we must think deeper. We must consider the most important missing piece that both systems—or any other political system for that matter—lack: Jesus Christ. We have lost Christ Himself.
Today’s passage speaks to us about Jesus: “Therefore, brothers and sisters, since we have confidence to enter the Most Holy Place by the blood of Jesus, by a new and living way opened for us through the curtain, that is, his body,” (Hebrews 10:19-20)
A very important ministry of Jesus on earth was to sacrifice himself.He gave up his life for us on the cross. Sacrifice is the missing piece in capitalism and communism. The sacrifice of Jesus is what is missing in communism’s political philosophy of justice and equality. Sacrifice is the missing piece in democracy’s spirit of freedom and human rights. Justice, equality, freedom, and human rights are all incredibly valuable. These are qualities that even Jesus stressed. God’s kingdom on earth should also be built on these precious principles.
However, Jesus achieved his work by sacrificing himself on the cross. Not by shouting slogans on justice. Not by going on and on about equality. Not by declaring a bill of freedom. In order to grant us freedom, to give us perfect freedom from sins, to set us free from Satan’s grip, he sacrificed himself by giving his life for us on the cross. To achieve God’s justice, he gave himself up on the cross. Sacrifice. That is what Jesus showed us. That is what we are missing.
Jesus Christ. Sacrifice. Forgiveness. These are the missing pieces. Sacrifice and forgiveness, neither of which are found in democracy or communism, are the virtues of Jesus that have yet to be realized in our world. We have yet to accomplish them in our society and homes. We can build just, fair homes that uphold freedom and human rights. We can build homes that empower women.
But we must remember that the most important ingredient in achieving all these is self-sacrifice. Husbands must sacrifice themselves. Wives must do the same. Only through this self-sacrifice can we accomplish justice, equality, and freedom. And where there is forgiveness, there is justice, equality, and freedom.
The following are the lyrics of hymn 515 which was written in 1952, during the Korean War. The first verse describes the chaos of the time. In the darkest of times when hundreds of thousands were being killed, the singer sings the following:
Lift your eyes and look to heav-en,
From a world of cha-os be-low,
Where the cries of wound-ed spir-its
Sound a-round us wher-e’er we go.
Hav-ing lost the road, they wan-der,
Mill-ing throngs, they’ve lost the light too,
Like the pro-di-gal, ex-haust-ed!
O be-liev-er! What will you do?

But do these lyrics only apply to times of war? What about the situation in North Korea today where countless people are destitute, sick, and oppressed, living in unspeakable conditions? And what about the situation in the South? Can you say for sure that the lyrics above do not apply to our own reality? Whether it be a communist country or a free democracy, we hear “cries of wounded spirits,” and many “having lost the road” wander. “O believer, what will you do?”
Yet, Godis not looking for someone who will declare justice or freedom. He is looking for someone who will sacrifice himself and lay down his life, like Jesus.Take a closer look at the underlined parts of verse 2:
Lift your eyes and look to heav-en,
From a dark-en’d wor-ld be-low,
Where so ma-ny shout their nos-trums
But the wa-ters of life don’t flow.
Our Re-deem-ing Lord seeks work-ers,
Who will la-bor, faith-ful and true.
Where is some-one who will an-swer?
O be-liev-er! What will you do?

The following are verses 3 and 4. In these verses, you will be able to find that God is seeking someone who will sacrifice himself, holding on to the living water, Jesus.

Lift your eyes and look to heav-en,
To a liv-ing life-giv-ing Lord.
Weak we are, but still He calls us;
Heav-en’s bid-ding comes by His word.
Christ, a-lone the liv-ing wa-ter,
First and last, e-ter-ni-ty through,
He is Lord! It’s you He’s call-ing.
O be-liev-er! What will you do?

Lift your eyes and look to heav-en,
He who came a-gain from the grave,
He, in love for all earth’s peo-ples,
Still is wait-ing, one more to save.
Yet the Lord, our lov-ing Sav-ior,
Has a day of just judg-ment too,
Ev-‘ry day the Day draws near-er.
O be-liev-er! What will you do?

Dear Church, we have designated this week as a special week for unification and North Korea missions. We are also commemorating the 69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Are we really preparing ourselves for unification? What kind of unification do we envision? Are we confident that we will be able to build a whole, upright, and happy society when the two Koreas are unified? Will free democracy do the job? Or will communism and socialism do it? Neither. The one essential thing we need is Christ.
We know the answer. It’s Jesus Christ. Christ’s self-sacrifice and forgiveness. These are what will change the world. Jesus. He is the new and living way. I pray that you become precious people of God who will change the world by tightly holding on to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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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 19 ~ 20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학도병의 편지>

1950년 6・25전쟁 당시 포항여자중학교는 중요방어선 중 한 곳으로, 71명의 학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이우근’ 학도병도 이 전투에 참전하였다.

1950년 8월 10일 목요일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니에게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를
생각해 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저는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니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편지를 쓴 다음 날, 이우근 학도병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편지는 그의 품 안에 있던 수첩에서 발견되었다.

< 한국전쟁의 상흔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에서 편지 속 학도병처럼 전사한 사람은 한국군 137,899명, 유엔군 40,670명, 북한군 508,797명, 중공군 148,600명으로 총 835,966명이었습니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 수류탄과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서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고,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전우들이 모두 주검이 되는 끔찍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가 무려 835,966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반인들, 즉 시민들의 사망에서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된 이들의 수는 990,968명이었습니다. 대략 잡아 희생자 수가 무려 200만 명에 육박합니다. 이 전쟁으로 약 1,0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30만 명의 전쟁미망인이 생겼으며,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습니다.
69년 전 일어난 이 참혹한 전쟁이 바로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의 참화였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전쟁의 책임은 전쟁을 준비하고 남침을 강행한 북한과 김일성 정권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용인하고 도운 소련과 중국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전쟁에 책임을 지거나 사과한 일이 없습니다.
북한의 호전적인 태도와 끊임없는 적의, 적화의 야욕은 지금까지도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바입니다. 연평도 포격이나 서해안에서 일어난 천안함 격침 사건이 그러하고, 최근 그들이 개발했다고 자랑하는 핵무기가 그러합니다. 최근 북한에서는 천안함 사건이 자신들과는 관련 없는 일이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할지라도 북한이 호전적이지 않다거나 평화를 사랑하는 정부 혹은 국가라는 주장은 증명해 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참으로 이와 같은 북한을 앞에 두고 어떻게 우리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걱정하며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950년 6월 25일은 주일이었습니다. 오늘처럼 예배드리던 어느 날 북한군이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언제 어느 때 또 이런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특별히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은 걱정과 염려가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일찍이 북한은 전쟁 전부터 북한의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대량 학살을 감행한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이 죽음과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참다운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전쟁 중에도 북한군은 수없이 기독교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원당교회에서 73명, 봉남교회에서 73명, 영암읍교회에서 24명, 야월리교회에서 65명, 덕암교회에서 22명 등 여러 교회당에서 북한군에 의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참전과 도움이 없었다면, 이 땅은 아마 오늘날 북한과 같은 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인권이 말살되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얼어붙은 땅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상과 이념이라는 틀 안에 갇혀 버린, 그래서 자아비판과 인민재판, 노동교화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민족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장악하려 합니다. >

사실 공산주의는 산업사회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 비인간화의 문제를 보완하려는 하나의 대안 철학에서 태동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상황에 적용되었을 때 큰 문제점들이 드러났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지주와 소작인, 기업인과 노동자 계급과 계층의 구별은 분열과 반목, 투쟁을 양산했습니다. 인류가 행복해지고 비인간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발한 공산주의가 도리어 인간을 피폐하게 했고, 게으르게 만들었으며, 계층 간 갈등과 반목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1인 혹은 1당 독재가 가능한 왜곡된 이념과 정치체계를 형성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이념에는 ‘공평’과 ‘정의’라는 핵심 가치가 있었으나, 정작 ‘박애’와 ‘사랑’이라는 가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바로 이러한 정신과 이념을 우리는 죽음의 문화, 죽이는 태도, 죽이는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1인 독재가 가능한 나라, 그것도 3대에 이르도록 세습이 되지만 도리어 백두혈통이라 칭송받으며 독재가 공고하게 유지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인간의 인간 됨,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권리,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나라, 바로 그 나라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야망을 이 땅에서도 이루려 하는 북한과 우리 대한민국이 휴전 상태로 대치하며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죽음의 문화에서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가난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한 가정 혹은 소수의 지배자들을 위해 모두가 희생되고 있는 북한의 주민들을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 남한의 현실이 만만하거나 녹록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남한은 북한에 비해 매우 훌륭한 정신과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유주의, 자유경제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민주주의라고 하는 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북한과 비교해 훨씬 나은 상황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특히 ‘죽음의 문화’와 관련하여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유로운 경쟁을 표방했던 자유경제체제는 무한한 경쟁을 유도하여 낙오자들을 속출하게 했습니다. 무역 전쟁이 일어났고, 새로운 전쟁을 계속해서 양산하게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존중되는 나라로 지금까지 발전해 왔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했으며, 또 다른 전쟁의 자리에 내몰리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이 속출하고, 경쟁에서 낙오되는 자들이 나오고, 정권을 잃거나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러나 이긴 자들은 세상의 방식으로 약자를 죽이려 달려드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세상의 방식이요, 세상의 법칙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서 증오와 반목, 신경증적 태도와 적개심, 우울증이 만연한 현실입니다.
이처럼 또 다른 심연, 또 다른 죽음의 현실이 이 땅에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한 아내가 남편을 극도의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엄마는 자신의 아이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일가족 4명이 한 장소에서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 자율 경쟁이 보장되는 이 땅, 이 나라이지만, 이 땅에서도 결코 행복한 소식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달란트를 존중하고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의 사람을 존중하는 우리 자유민주주의가 도리어 방종과 또 다른 태만을 낳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잃은 어떤 사상이나 체제도 완전할 수 없습니다. >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우리는 물론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것이 행복하고 다행스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면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체제인가?’ 하는 물음도 던져보게 됩니다. 공산주의는 또 어떻습니까? 사회주의는 어떻습니까?
사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재산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정신이 바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주요한 철칙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실제 상황 가운데서는 이러한 정신과 이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평등과 정의를 추구했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나 자유경제체제가 올바르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면서 무한한 발전을 이루어 오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자유와 인권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래서 많은 창의적인 일들이 일어났고, 산업 발전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결과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방종과 타락, 그 밖의 수많은 문제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민주주의도 예수님의 정신을 반영한 체제이자 이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의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들의 인권을 인정하셨고, 어린아이들의 권리도 존중해 주셨습니다. 병자들과 함께하셨고,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그분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 민주주의요, 자유경제체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상은 무언가가 빠져있는 듯 보입니다. 이 땅에서도, 또 다른 땅에서도 온전한 체제, 온전한 평화, 온전한 기쁨과 온전한 해방감을 느끼지는 못하니까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빠진 것입니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무엇이 빠져 있길래, ‘공평’과 ‘정의’와 ‘평등’이라는 너무도 멋진 구호를 외치고 있음에도 온전하지 못한 것입니까? 또한 ‘자유’와 ‘인권’을 그토록 강조하는 민주주의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에서도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가 활개치고 있는 것입니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통일. 우리는 통일을 기다리며, 통일된 미래를 생각합니다. 통일된 미래에 우리는 어떤 체제, 어떤 체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자유민주주의? 아니면 공산주의? 무엇이 우리를 밝고 옳은 길로 인도해 주겠습니까?
물론 언뜻 드는 생각은 공산주의보다는 자유민주주의가 올바른 체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제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가 있는 곳에서 참 자유와 정의가 실현됩니다. >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9~20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신 매우 중요한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생명을 내어놓으신 ‘희생’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공산주의에도 없고 자본주의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공평과 정의, 평등을 내세우는 공산주의 사상에서도 빠져버렸고,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며 보장한다는 민주주의 사상에서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인권은 귀한 것입니다. 자유도 귀합니다. 평등도, 공평도, 정의도 귀한 것입니다. 더욱이 이 모든 건 예수님의 생각과 정신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방식은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의 ‘희생’이었습니다. 정의의 구호가 아니었습니다. 공평이나 평등이란 단어의 나열도 아니었습니다. 자유의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죄에서 자유 함을 얻게 하시기 위해, 사탄의 노예 되었던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희생을 몸소 감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정의, 공의로운 정의, 이 정의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희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도 희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자기희생’.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부활 후 강조하신 ‘용서’입니다. 자기희생과 용서. 이것이 바로 공산주의에도 없고, 민주주의에서도 발견되지 못하는,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까지 선포하며 강조하시는, 동시에 이 세상은 이루지 못하고 있는 덕목이자 정신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그렇고 우리의 가정도 비슷합니다. 정의로운 가정,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공평한 가정, 얼마든지 이룰 수 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가정, 여건이 신장 되는 가정을 얼마든지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방식은 ‘자기희생’입니다.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희생, 아내는 아내로서의 희생, 그 희생이 있는 곳에서 정의와 공평 그리고 자유가 나타납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서 비로소 정의와 공평, 자유가 실현됩니다.

< 자발적 희생과 용서만이 이 나라와 시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

찬송가 515장은 1952년 6・25 당시 지어진 찬송입니다. 1절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가는 그 역사의 현장에서 비탄한 심정으로 노래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또다시 죽어 나가는 현장에서 이렇게 탄식하며 노래합니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러나 이 개탄한 상황이 전쟁뿐이겠습니까? 지금 북한에서 자행되고 있는 수많은 억압과 압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곳에서 살고 있는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을 생각하면서 다시 1절의 가사를 살펴보십시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그러나 어찌 이것이 북한만의 일이겠습니까?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과연 이 노랫말에서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남한의 현장을 바라보며 이 노랫말을 살펴봅시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자유민주주의, 공산주의. 어느 곳에서든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 상한 영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그러나 다음 2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 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정의를 외칠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자유를 외칠 사람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희생당할 사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 그 사람입니다.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할 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또한 3절과 4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살아 계신 주 하나님
약한 자를 부르시어 하늘 뜻을 전하셨다
생명수는 홀로 예수 처음이요 나중이라
주님 너를 부르신다 믿는 자여 어이할꼬

눈을 들어 하늘 보라 다시 사신 그리스도
만백성을 사랑하사 오래 참고 기다리네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

생명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희생의 자리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을 우리 주님이 지금 찾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통일선교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전쟁 69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통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통일이 된다면 이 세상, 이 땅을 과연 온전하게, 바람직하게, 행복하게 만들어 갈 자신이 있습니까? 민주주의면 됩니까? 자유경제체제면 됩니까? 공산주의면 됩니까? 사회주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땅에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발적인 희생, 그리고 용서. 이것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이것만이 세상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분이 바로 새로운 살 길입니다. 이 예수님을 붙잡고 이 땅을 변화시키기를 다짐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6월 23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예수, 새로운 살 길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88장, 51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히 10:19-2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6월 2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1950년 6월 25일부터 3년 1개월간 지속된 한국전쟁 – 민족과 민족이 서로 죽이고 죽는 비극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 원당교회(73명), 봉남교회(73명), 영암읍교회(24명), 야월리교회(65명), 덕암교회(22명) 등 여러 교회당에서 북한군에 의한 집단적인 학살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

사실 공산주의는 산업사회로 급속한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에서 비인간화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적 철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의 상황에 적용되었을 때, 가난한 자와 부자, 지주와 소작인, 기업인과 노동자의 계급과 계층의 구별은 분열과 반목, 그리고 투쟁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이념 속에는 공평과 정의, 박애와 사랑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북한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남한 땅은 북한 땅에 비해서 자유주의, 자유경제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고 하는 체제를 받아들였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나 자유경제체제는 무한한 경쟁, 무역전쟁으로 낙오자들이 속출하게 만들었고,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서 증오와 방목, 그리고 신경증적 태도와 적개심, 우울증이 만연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부터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 그리고 모두가 함께 자신의 재산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 이와 같은 정신이 반영된 것이 바로 사회주의고 그리고 공산주의 아니었습니까? 민주주의 역시 개인의 달란트를 중하게 여기시고, 소외된 자(여인들, 어린이, 병자들)들과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정신을 반영한 체제였고, 이념이입니다.

물론 언뜻 드는 생각은 공산주의보다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올바른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공산주의, 민주주의, 그러나 그 모든 체계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으신 희생과 부활 후에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신 용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통일선교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6.25 69주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통일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통일이 되었을 때 어떤 통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 예수그리스도 자발적인 희생, 그리고 용서. 이것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나누기

1. 나라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분단의 조국의 통일과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희생과 용서로 가능합니다.

자발적인 희생과 용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있는 죽음의 세력, 전쟁의 기운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바로 그 자발적인 희생과 용서를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시켜나가는 주님의 복된 종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Connection 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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