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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손을 내미시다

마태복음 8 : 1 ~ 4

김경진 목사

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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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 : 1 ~ 4

1 ~ 4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나병은 정서적 고통이 동반되는 질병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요즘은 ‘나병’이란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센병 내지 한센스병이라고 합니다. 이 병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피부에 심한 변형이 생기며, 신경세포가 손상돼 점차 합병증이 나타나고, 피부가 썩고 고름이 생기다가 결국 사지가 무감각하게 되면서 통각마저 사라지게 되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불에 손이 닿아도 뜨거운 줄 모르고,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잘려도 통증을 느낄 수 없는 병입니다.
과거에는 한센병이 불치병이자 전염병이었기에 한센병자는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거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설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5~46절에는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병에 걸린 환자는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살아야 했고, 서서히 진행되는 병과 수십 년을 싸워 가며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사회에서는 차별과 박대를 당하고, 경제적으로는 궁핍하게 살며, 신체적으로는 코가 떨어져 나가고 발가락도 떨어져 나가는 자신을 지켜보며 죽음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나병에 대해 성경이 이렇게 많이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개인적으로는 나병이 치유되는 사건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성경에 자주 나병이 치유되는 장면이 나타나서인 것 같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나병도 엘리사에 의해 고침 받았고, 열 명의 나병 환자를 주님께서 한꺼번에 고쳐 주셨으며, 또 나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이적이 성경 곳곳에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병이 어떤 병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마치 그 병이 쉽게 치유되는 병인 것처럼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주님이 나병을 고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접할 때마다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나병 정도는 쉽게 고치시나 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나병의 증상을 살펴보면, 결코 낫기 쉬운 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본문이 제 마음속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단 4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인데도, 하나님이 한 사람을 특별하게 만나고 계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저 쓱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이 치유 사건을 살펴보며, 그때 제가 느낀 감동을 여러분께 전하고자 합니다. 잘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감동이 잘 전달되도록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오늘 본문 중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말씀은 2절입니다.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라고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저 일상적인 말씀 같지만, 사실 이 구절은 일상적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앞서 전한 것처럼 나병 환자는 누구와도 함께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예수님이 막 산에서 내려오시던 중이었고, 많은 이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군중이 몰려왔기에, 만약 그 사람이 나병 환자임을 알았다면 그 사람을 쫓아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저지 받지 않고 예수님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장면이 가능합니까? 아마 그는 철저히 자신을 가렸을 것입니다. 자신의 비뚤어진 코가 보이지 않도록, 잘려진 손가락이 보이지 않도록 옷으로 감싸고 숨겼을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나병 환자로 여기지 못하도록 철저히 위장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 앞까지 군중을 뚫고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황은 4절에서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라고 하신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금 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을 속이고, 군중 속에서 비밀스레 예수님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그가 다가온 순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부정한 자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율법을 들이대며 “부정한 자가 왜 여기 왔느냐?”라고 엄포를 놓았을 테지만, 주님은 야단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를 받아들이시며,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그때 나병 환자가 예수님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매우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주님께 모든 가능성이 달려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나의 운명이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능력에는 한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능력의 주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그때 주님은 말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대십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너무 놀랍고 은혜로웠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망가지고 볼품없는 얼굴, 그 썩어가는 몸을 주님이 어루만져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던 순간 나병 환자는 속으로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안 돼요! 저에게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부정하게 됩니다.’ 아니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예수님이 내가 나병 환자인 것을 모르시는 게 아닐까?’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이미 그에게 가 닿았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부정한 것이 닿아도, 예수님의 완전하고 온전한 손은 부정하게 되거나 훼손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그런 손입니다. 어떤 부정도 예수님의 손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어떠한 죄악도 예수님의 손을 부정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능력의 손’ 곧 ‘하나님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군중이, 예수님이 손댄 사람이 나병 환자임을 알았다면 예수님을 멀리하려 했을 것입니다. 부정하게 되었다고 판단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틈을 타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이 또한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손이 그에게 닿는 순간 나병 환자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동안의 모든 억울함과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십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산에 오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이 그 내용입니다. 또한 그 산상수훈이 오늘 본문 바로 앞인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서 팔복을 비롯해 주기도문 등 다양한 천국 복음을 설파하셨습니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님의 말씀을 받았던 것처럼 산 위에서 모든 백성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강화가 끝난 후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 중 앞 절에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8장 1절의 내용입니다. 이후 8~9장에 걸쳐 주님은 10가지 기적을 몸소 행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기적이 오늘 본문 내용인 ‘나병 환자 치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결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뒤 처음으로 사람에게 손을 내밀고 계시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정하다고 평가되는 이 사람, 나병 환자에게 예수님의 첫 번째 손이 닿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극적이고 놀라운 장면입니까? 여러분은 이 장면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저는 이 장면이 이렇게 보입니다. 태초에 한 손이 있었습니다. 흙을 가지고 아담을 빚던 손, 바로 하나님의 손입니다. 그 손으로 사람을 만드실 때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인간을 빚어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빚어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한 그 시점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나병 환자’였습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손가락은 달아나고 모든 것이 망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망가진 사람, 사람이라고 하기 어려운 사람, 사람으로 여겨질 수 없는, 그만큼 변하고 변질돼 버린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워 숨었듯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아 피부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군중 속에 숨어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입니다.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담과 하나님의 손닿음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손을 펴시며 나병을 앓던 그 사람에게 손을 대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첫 번째 손대심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네가 이렇게 망가졌구나. 내가 너를 아름답게 창조하였는데, 네가 이렇게 변했구나. 이제 내가 창조의 손으로 다시 너를 만져 주겠다. 내가 다시 너를 새롭게 하겠다.’
나병 환자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나병 환자가 자기 몸에 손을 대며 고쳐 주시는 은혜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병을 앓고 있던 군대장관 나아만도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가 자기 몸에 손을 얹어줄 것을 기대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입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노라 (열왕기하 5:11)

엘리사가 손을 대줄 것을 기대조차 못했습니다. 다만 손을 병든 곳 위에서 흔들어 고쳐 주지 않을까 기대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 주지도 않았습니다.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만 명할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손을 대지 않고 나아만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처럼 엘리사가 손을 대지 않고 나병을 고쳤다면, 하물며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손을 내미셨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말로 간단히 치유하지 않으시고, 그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사람들을 속이면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온 그 사람을 예수님은 완전히 받아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손을 내밀면 예수님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 더러운 몸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입니다. 부정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나병 환자가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이것은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보시면서 바라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은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 모습으로, 창조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 그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지니신 분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어느 누가 감히 이런 명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오직 우리 주님만이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즉시 나병이 나았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새로운 살이 나고, 코가 돌아오고, 손과 발, 몸이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 만약 즉시 나병이 낫지 않았다면, 이내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즉시 그의 병을 낫게 하셔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마태복음 8:4 중)

예수님이 완전하게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회복을 입증하고, 완전한 시민이자 사회인으로, 나아가 완전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은 이러한 비밀스런 만남을 매우 투박하게 알려줍니다. 반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조금 다르게, 이 나병 환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서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이런 사실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를 비밀스럽게 만나주셨던 장면을 그대로 남겨두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이 어떻게 들립니까? 또 어떻게 보입니까? 물론 여러분은 나병에 걸리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격리될 만한 심각한 상태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 앞에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추한 모습을 주님께 고백함으로 깨끗함을 입읍시다.

나병 환자.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아름다운 몸이 사라지고, 얼굴은 부스러지며, 미소도 사라지도, 손가락도 잘려 나간 사람, 참으로 보기에도 역겨운 그 사람. 혹시 우리가 이런 사람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초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탐욕과 죄악으로 가득 차 이웃을 괴롭히는 사람. 그래서 얼굴은 항상 성이 나 있고, 몸은 상처투성이며, 보기에도 역겨운 얼굴을 가진 사람.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이렇게 보기 싫게 변해 버린 것은 아닙니까? 혹시나 우리가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예수께 나온 나병 환자,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아 몸을 꽁꽁 싸매고 또 싸맨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옷이라도 벗으면 치부가 드러나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예수님 앞에서조차 옷을 벗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이 혹시 우리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께 나아온 나병 환자.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감각이 무뎌지고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사람입니다. 뜨거운 불에 몸이 닿아도 고통을 느낄 수 없으며,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알지 못합니다. 죽어가고 있으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 모습, 마치 영적 감각을 잃어버리고, 도덕적 감각마저 잃어버리고, 삶의 방향성마저 잃어버린 채 무감각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몸을 만져 주십니다. 우리의 더러운 곳에 손을 대십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해 주시는 우리 주님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밀스럽게 숨겨놓은 내 추한 모습을 보시면서 그 위에 손을 얹어 주시는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자리가 나병 환자가 경험했던 은혜의 자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우리의 추한 모습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조용히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간구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대답하실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우리 몸에 손을 대시고 안수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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