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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에 나를 세우소서
<어려움을 지나 왔던 시간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의 배려로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저를 알아보시고도 모른 척 지나가 주신 분들도 계셨고, 오셔서 기쁘게 인사를 나누어 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지나친 분도 한 분 계셨습니다. 저를 보고 지나치시면서 “우리 목사님하고 너무 닮으셨다. 그렇지?”라고 동행자에게 말씀하시며 지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든 참 감사했고 기뻤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제가 공부했던 보스턴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고, 그곳에서 지금도 사역하고 있는 저의 벗인 목사님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또 제가 과거에 목회하였던 교회의 성도들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곳에 계시는 소망교회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누렸습니다.
제가 보스턴에 며칠 머물지는 않았지만, 혼자 그 지역을 여기저기 다니는 일정을 나름대로 가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스턴 시내도 돌아보고, 특별히 제가 공부했던 학교와 도서관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아파트와 지역에도 가서 그 지역은 어떻게 변했는지 둘러보았는데, 저에게는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추적해 가던 중에 갑자기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35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금 심각하게 고민이 되어서 친구 목사님께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다시 35년 전으로 돌아가면 더 잘 살 수 있을까요?” 그러자 즉시 답이 왔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 수는 없을걸요?”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학교 도서실에서 수많은 책을 보면서 어떤 후회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더 열심히 연구해 보고 싶고, 책도 더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아장아장 걸어가던 우리 아이도 좀 더 사랑해 주고, 아내도 좀 더 사랑해 주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항상 아쉬움과 후회가 있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에 대한 야속함도 느껴지곤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어려웠던 시간도 함께 떠올렸습니다. ‘35년 전으로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다시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IMF의 위기 속에서 과연 유학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고요. ‘맡은 교회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는 사역을 다시 감당해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받았던 박사학위를 다시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마다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기도했었는지 그날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하실 것 같습니다. 인생을 30년, 40년, 50년쯤 전으로 돌이켜서 다시 시작하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앙의 여정은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가는 길입니다.>
제가 유학 시절부터 붙잡았던 말씀이 여럿이 있지만, 제가 정말 마음에 두고 때마다 외우고 기도했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저는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마음에 담아 자주 외우곤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 61:2, 새번역)
특별히 저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라는 탄원을 늘 마음에 담고 때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이 기도를 참으로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좋게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한 적도 있었고, 조금 나쁘게는 욕망을 가지고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보스턴으로 가니 제가 공부하면서 드렸던 기도가 더욱 생각났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 위에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하지 않고 직접 박사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던 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까다로운 과정을 모두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던 때가 또 있었습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지원하고 이사회에 올라갔음에도 반복해서 거부될 때였습니다. 수많은 시간들, 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정말 나의 힘으로는 오를 수 없는 저 바위에 나를 좀 올려 주십시오.’라고 힘겹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바라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아마 힘겹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 지금 이 자리에도 이 기도를 드려야 할 분들이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 61:2, 새번역)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기도가 될 수 있겠죠. 사업을 시작하고 날마다 초조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이 기도를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도 이 기도를 붙잡으시면 좋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신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끝에서라도 주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탄원했습니다.>
이제 조금 더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이 기도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즉, 다윗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입니다. 다윗이 바라고 그토록 원했던 것, ‘내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저 바위’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어 성경의 텍스트 순서는 개역개정과 다르게 시작합니다.
“땅 끝에서부터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다윗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땅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울부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의 기도인 것은 분명한데, 어느 때에 드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기도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드린 기도인지, 왕이 된 다음에 드린 기도인지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를 이스라엘의 왕위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기도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한 기도라고 추측할 수 있죠. 그런데 다윗이 생각하는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왕권이 된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 기도의 끄트머리에서 왕을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립니다.
왕의 날을 더하여 주시고, 왕의 해를 더하여 주셔서, 오래오래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왕이 오래도록 왕위에 앉아 있게 하시고,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로 우리 왕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시 61:6~7, 새번역)
만약에 다윗이 생각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왕권이라면,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기 전에 당시의 왕인 사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권을 놓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우를 바꾸어서 생각해 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기도를 드렸다고 한번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미 왕이 된 후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더욱 왕권이 아니겠죠. 그러므로 언제 드린 기도였든지 간에, 다윗이 구한 것이 이스라엘의 왕권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기도 속 ‘저 바위’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달려갔을까요? “하나님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겠죠. 그때라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골리앗을 무찔러야 하는 과제였을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윗은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다양한 과제들을 헤쳐 나갔습니다. 사울을 피해 엔게디 요새에서 생존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아기스의 수하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내가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에 나를 올려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는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나라를 이끌면서 정치적으로 고통스러운 여러 상황을 마주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더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왕이지만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겪으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경건처장으로 있을 때 총장님이 바뀌곤 했습니다. 총장님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총장님이 항상 새벽기도회에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어떻게 새벽기도까지 나오실까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총장님은 “총장이 되고 나니 하나님께 의탁할 일이 너무 많아서 기도를 빠질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도 그랬겠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과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길이 막혔습니다. 더 이상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는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어떤 자리나 고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 기도는 이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복잡하고 더럽고 힘든 사업의 자리, 온갖 문제가 엉켜 있는 삶의 현실 속에서 나를 좀 구조해 달라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해결책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의 한 모습입니다.
<다윗은 현실의 문제를 넘어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다르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땅끝’이라는 표현을 한번 주의해서 봅시다. 다윗은 ‘땅끝에서부터 내가 부르짖는다(울부짖는다)’라고 표현하며 나의 기도에 유의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 ‘땅끝’도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 절망과 당면한 모든 문제를 지칭합니다. 내가 처한 현실, 죽음이 왕 노릇하며 거짓과 실수가 난무하고 불의가 성행하는 모든 상황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자가 넘어지고 불의한 자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이상한 모습, 악한 행위가 보호받고 선한 사람이 미련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바로 ‘땅끝’입니다.
다윗은 땅끝에서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땅끝에서 기도하는데, 더 오를 수 있는 땅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땅끝에서 또 다른 땅끝으로 간들 무슨 희망이나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바위’는 이 세상의 바위, 조금 더 높은 땅, 이 땅에 속한 단단한 평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와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인간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간구한 이 기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내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나를 바위 위로 올려 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과제 앞에서 이 기도를 드리며 날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기도가 땅끝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면, 다윗은 세상의 모든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즉, 다윗의 기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나를 영적인 차원으로, 하나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 삶의 문제만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있도록 나를 끌어올려 달라는 영적 탄원의 기도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바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반석’의 의미를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풀어 줍니다. 이 해석대로 다윗의 기도에서 바위(반석)를 예수 그리스도로 읽으면 뒤에 이어지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시 61:2~3, 새번역)
다윗이 인도받기 원하던 그 높은 바위는 신약에 와서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그 반석을 영적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진정한 피난처이자 원수의 공격 앞에서 견고한 망대가 되실 그 반석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땅끝에서도 마침내 마주하게 될 땅끝에서도 당당하게 반석 위에 서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봅시다. 인생을 살면서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그 바위들을 하나둘씩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씩 올라가고 또 정복해 갑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였으니, 사실은 모두가 은혜였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위인 것 같았는데 올라갈 수 있었으니, 은혜가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시간들을 거치며 올라갈 수 없었던 바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씩 올라가곤 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업, 좋은 직책, 재물과 명예라는 높은 바위 위에 힘들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내가 오를 수 없는 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자리가 크게 보이고, 재물과 명예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한 달을 건강하게 살아 내는 것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연약해지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 한 달만이라도 건강하게 자녀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나의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 이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인생을 지나가면서 점점 바위의 종류가 달라지죠.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 서는 날, 우리는 죽음이라는 원수 앞에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그분, 부활의 소망을 주실 그 든든한 바위 위로, 내 힘으로는 올라설 수 없는 그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
“하나님 땅 끝에서 우리가 울부짖습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그 마지막 때에 다다르기 전에도 여전히 이 기도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함께 평생 함께해야 할 기도입니다. 인생의 과제 앞에서도, 병약했을 때도,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다가 마침내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드릴 기도의 제목입니다.
저의 여행 마지막 날, 어느 교회에 들어갔더니 이런 문구가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Here I Stand: Where Do You Stand?”(내가 여기 있나이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라고 질문하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구원자이시며 나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구원의 능력 위에 서 있습니다. 진정한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Psalm 61:1-4
Dear Church, I am so happy to see you again. Thank you for giving me a break. During my vacation, some of you kindly pretended not to notice me, while others came over and happily said hello. There was one person, however, who I ended up “ignoring” because I just didn’t know how to respond. Spotting me, she said to her husband, “He looks just like our pastor, doesn’t he?” Whichever way you greeted me, I am grateful.
During my vacation, I visited Boston where I studied. It had been quite a while since I visited the city, and I had the pleasure of meeting pastor friends still ministering there, members of the church I used to serve, as well as some members of Somang Church.
I also had the chance to visit the places where I used to study alone and the neighborhood that I lived in. During my visit, however, a thought suddenly occurred: ‘If I gave up everything and went back 35 years, would I be able to live a better life?’ As I seriously pondered this question, I sent a Kakao Talk message to a pastor friend: “Do you think I would have lived a better life if I went back 35 years?” His answer was, “A better life than the one you have now? Impossible!”
On the one hand, I was grateful, but, on the other hand, I felt an urge to go back in time and relive my life. One of the reasons had to do with spotting piles of books and materials in the library. They made me want to go back in time and study with greater passion. Another reason was that I wanted a second chance to love and care for my wife and children more deeply.
Many thoughts crossed my mind, including regrets about the past and sadness about time lost.
At the same time, I remembered all the hardships during my studies in the U.S. If I went back 35 years, would I still be admitted to the PhD program for theological studies at Boston University? Would I be able to finish my studies amidst the 1997 Asian Financial Crisis? Could I serve and lead the church that I served, helping it to grow and stabilize? Would I be able to get my doctoral degree all over again? I remembered how anxious I had been and how hard I had prayed during my doctoral studies in the U.S.
You may have had similar thoughts. If someone asked you if you wanted to go 30-40 years back in time, you would have similar thoughts.
Whenever I faced hard times, including my studies in the U.S., I held on to a particular Bible verse. That verse is in the Scripture that we read today: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I call as my heart grows faint;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Psalm 61:2)
Holding these words to my heart in the Revised New Korean Standard Version, I would say them in my prayers: “When my heart grows weak, I call to You from the ends of the earth. Guide me to that rock that I cannot climb by myself (translated).” I especially cherished the latter part of this prayer.
Looking back, I said this prayer a lot. Sometimes, I prayed it out of hope, and, at other times, out of desire. But whenever I met hardships or difficulty, I leaned on this prayer.
Visiting Boston made me recall how I prayed this prayer during my studies.
Studying in the U.S. was a “rock higher than I.” Being directly admitted to a PhD course at a prestigious American university without getting a master’s degree in the U.S. was also a rock higher than I. Receiving my PhD after meeting all the strict course requirements was also a rock higher than I.
There was a time when I prayed Psalm 61:2 in all earnestness. It was when the board of the Presbyterian University and Theological Seminary (PUTS) rejected my application for professorship eight times, even though I was first on the list of candidates. During this time, I prayed daily, “Lord, place me on that rock higher than I.”
Dear Church, how about you? Would you also like to pray this prayer in times of difficulty and trials?
Many of you will feel the need for this prayer, including those of you sitting here today.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I call as my heart grows faint;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Psalm 61:2)
Students preparing for the College Scholastic Ability Test will be saying this prayer. People anxiously starting a new business will be praying it too. I hope those facing intractable problems and tribulations will pray this prayer.
Perhaps, this is faith.
Isn’t faith to acknowledge that we cannot do it and to entrust ourselves to God? The fact that we can call upon His name even from the ends of the earth is grace. That God hears our prayers is also grace.
My friends facing hard times, may you pray like this: “Lord, lead me to that rock that is higher than I. Lord, there is a rock I cannot climb by myself. Lord, lead me to it.”
What is that rock you cannot climb on your own?
Psalm 61 has a superscription: “For the director of music. […] Of David.” This psalm is known as David’s prayer. What was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that David so wanted to climb?
In the Hebrew text, the structure of verse 2 is different from that of the Korean translation. It starts like this: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translated).”
David is at the ends of the earth. There he cries out to God: “Lord, lead me to that rock that I cannot climb with my strength.”
No clue is given in Psalm 61 about its historical context. Did David pray this prayer before becoming king over Israel? Or after? We cannot know.
Our first guess is that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may indicate the throne of Israel. If we take this view, David would have written this psalm before his kingship.
But if we take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to be the throne, one thing cannot be explained: the fact that David prays for the king in the last section of the psalm:
“Increase the days of the king’s life, his years for many generations. May he be enthroned in God’s presence forever; appoint your love and faithfulness to protect him.” (61:6-7)
If David considered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to be the throne, he would not be praying for the increased years of the king, that is, the longevity of Saul.
Reversely, imagine David was praying Psalm 61 after he became king. If we take this view,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cannot be the throne for he has already ascended to it.
Therefore,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cannot be the throne whichever way we think about it—either before or after David’s ascension to the throne.
Then, what was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for David?
If it was before his ascension to the throne when he was going through many tribulations, we may say the rock was something that allowed him to overcome the difficulties and sufferings in life. But even after becoming king, David faced all kinds of political conundrums and many difficult situations and realities as the country’s leader.
Every time he faced hardships, I imagine he would have prayed this prayer of Psalm 61 to God: “Lord, the road is blocked. I cannot find the way. I cannot possibly handle this with my own strength. Lord, help me.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Therefore, “the rock” does not represent a position or a state. It is rather a metaphor for solutions to life’s problems.
Psalm 61 is a prayer asking God to get me out of this harsh, difficult reality. It is a prayer asking God to deliver me from this complicated, corrupt, and painful reality of life and the harsh reality of business. In a word, it is asking for a solution. Therefore,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is a metaphor for the solution to a problem that we ourselves cannot solve or handle.
This is what David means by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As David sings,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he beseeches God to pay attention his prayer.
Here “the ends of the earth” is also a metaphor. It symbolizes all the pain, hardship, suffering, despair, and problems of this world. “The ends of the earth” refers to this world, to our reality.
It is talking about our reality filled with despair, our situation ruled by death, and our reality marked by lies, schemes, and unrighteousness. It refers to our world where the honest fall and the unrighteous seem to thrive. A world where evil deeds are protected and the righteous are considered foolish. “The ends of the world” represent all these.
David cries out to God in prayer: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Where at the ends of the world will you be able to find a rock that you can climb on to? What hope will you find by moving to another place within the ends of the world? Therefore,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cannot be referring to a higher or firmer ground within this world.
It points to a different dimension altogether, another world that is not of this world. This is what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means.
Therefore, the meaning of this prayer of David offered in times of hardship is twofold.
First, he is praying, “Lord, lead me to that rock that is too high for me to climb,” as he feels he cannot do anything with his own strength in times of trials and difficulties in this life. Therefore, we may pray this prayer as we seek God’s help every day in the face of difficult tasks and harsh realities in our lives. David would also have experienced God leading him to the rock that he could not climb in his life and setting him firmly there.
Yet, this prayer of David has another ultimate, spiritual meaning.
If Psalm 61 is a prayer for those crying out to God from the ends of the world, David is, in effect, praying that God will save him from all the problems in this world. That is, he is asking God to help him push aside all the things of this world and to pull him up to a spiritual dimension, God’s dimension, a dimension not of this world.
I believe “the rock higher that is than I” symbolizes Jesus Christ our Lord. Our Lord spoke to us through Paul:
“For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of the fact, brothers and sisters, that our ancestors were all under the cloud and that they all passed through the sea. They were all baptized into Moses in the cloud and in the sea. They all ate the same spiritual food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1 Corinthians 10:1-4)
If we interpret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in Psalm 61 as Jesus Christ, the prayers of Psalm 61, including that which follows verse 2, become very natural even though they are in the Old Testament: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I call as my heart grows faint;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strong tower against the foe.” (Psalm 61:2-3)
The rock that David wanted to be led to is Jesus Christ whom God sent to earth in the New Testament. David confesses that this rock is his true refuge and strong tower against his foe.
Think of our lives. So many things in life make us think, ‘How can I possibly climb that rock with my strength?’ But we climb and conquer them one by one. However, since climbing these rocks was not within our power in the first place, everything is grace.
We climb these rocks higher than us by God’s grace as we go through trials.
As we get older,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comes to represent different things. While, previously, status, wealth, and honor seemed important to us, living one more month in good health becomes a challenge and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as we age.
We pray to God daily as we think of this rock that we cannot climb on our own.
Finally, when we stand at the ends of the earth at the end of our life, we will await the Lord who will deliver us from death, our foe. Death is the reality of this world. At our very last, we will pray this prayer again:
“From the ends of the earth I call to you, I call as my heart grows faint; lead me to the rock that is higher than I.” (Psalm 61:2)
God helps us on earth. But He continues to be our God in the eternal place beyond death. May we live victoriously in this barren world, holding on to this prayer of David and living in God’s grace.
On my last day in Boston, I visited a church where on each pew there were booklets titled, “Here I Stand: Where Do You Stand?” This question caught my attention. And this was my answer: “I stand on Jesus Christ, my Savior and my Rock.”
My friends, where do you stand?
시편 61:1~4
1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2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3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4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어려움을 지나 왔던 시간을 돌아보면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은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러분의 배려로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행 중에 저를 알아보시고도 모른 척 지나가 주신 분들도 계셨고, 오셔서 기쁘게 인사를 나누어 주신 분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때 그냥 지나친 분도 한 분 계셨습니다. 저를 보고 지나치시면서 “우리 목사님하고 너무 닮으셨다. 그렇지?”라고 동행자에게 말씀하시며 지나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든 참 감사했고 기뻤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제가 공부했던 보스턴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방문이었고, 그곳에서 지금도 사역하고 있는 저의 벗인 목사님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또 제가 과거에 목회하였던 교회의 성도들도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곳에 계시는 소망교회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누렸습니다.
제가 보스턴에 며칠 머물지는 않았지만, 혼자 그 지역을 여기저기 다니는 일정을 나름대로 가진 시간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스턴 시내도 돌아보고, 특별히 제가 공부했던 학교와 도서관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가 살았던 아파트와 지역에도 가서 그 지역은 어떻게 변했는지 둘러보았는데, 저에게는 매우 유익하고 의미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추적해 가던 중에 갑자기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내가 지금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35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조금 심각하게 고민이 되어서 친구 목사님께 이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다시 35년 전으로 돌아가면 더 잘 살 수 있을까요?” 그러자 즉시 답이 왔습니다. “지금보다 더 잘 살 수는 없을걸요?” 한편으로는 감사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하다면 다시 한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학교 도서실에서 수많은 책을 보면서 어떤 후회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더 열심히 연구해 보고 싶고, 책도 더 열심히 읽고, 더 많은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아장아장 걸어가던 우리 아이도 좀 더 사랑해 주고, 아내도 좀 더 사랑해 주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항상 아쉬움과 후회가 있습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에 대한 야속함도 느껴지곤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미국에서 공부하며 어려웠던 시간도 함께 떠올렸습니다. ‘35년 전으로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다시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IMF의 위기 속에서 과연 유학을 지속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고요. ‘맡은 교회를 안정시키고 성장시키는 사역을 다시 감당해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받았던 박사학위를 다시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마다 얼마나 초조하고 힘들었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기도했었는지 그날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러하실 것 같습니다. 인생을 30년, 40년, 50년쯤 전으로 돌이켜서 다시 시작하겠냐고 묻는다면 아마 여러분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하시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신앙의 여정은 불가능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가는 길입니다.>
제가 유학 시절부터 붙잡았던 말씀이 여럿이 있지만, 제가 정말 마음에 두고 때마다 외우고 기도했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시 61:2)
저는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마음에 담아 자주 외우곤 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 61:2, 새번역)
특별히 저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라는 탄원을 늘 마음에 담고 때마다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가 이 기도를 참으로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좋게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한 적도 있었고, 조금 나쁘게는 욕망을 가지고 기도한 적도 있었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보스턴으로 가니 제가 공부하면서 드렸던 기도가 더욱 생각났습니다. 제가 유학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 위에 올라간 것 같았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석사 과정을 하지 않고 직접 박사 과정으로 들어갈 수 있던 것도 내 힘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까다로운 과정을 모두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 기도를 간절하게 드렸던 때가 또 있었습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지원하고 이사회에 올라갔음에도 반복해서 거부될 때였습니다. 수많은 시간들, 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정말 나의 힘으로는 오를 수 없는 저 바위에 나를 좀 올려 주십시오.’라고 힘겹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바라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아마 힘겹고 어려운 시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 이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마 지금 이 자리에도 이 기도를 드려야 할 분들이 꽤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 61:2, 새번역)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들의 기도가 될 수 있겠죠. 사업을 시작하고 날마다 초조하게 살아가는 분들도 이 기도를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도 이 기도를 붙잡으시면 좋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신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끝에서라도 주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탄원했습니다.>
이제 조금 더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이 기도는 <다윗의 시>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즉, 다윗의 기도로 알려진 기도입니다. 다윗이 바라고 그토록 원했던 것, ‘내 힘으로 올라갈 수 없는 저 바위’라고 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히브리어 성경의 텍스트 순서는 개역개정과 다르게 시작합니다.
“땅 끝에서부터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다윗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땅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말은 ‘울부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 기도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 수 있는 단서가 거의 없습니다. 다윗의 기도인 것은 분명한데, 어느 때에 드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기도문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드린 기도인지, 왕이 된 다음에 드린 기도인지도 명료하지 않습니다.
먼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를 이스라엘의 왕위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기도는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한 기도라고 추측할 수 있죠. 그런데 다윗이 생각하는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왕권이 된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기도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 기도의 끄트머리에서 왕을 위한 기도를 이렇게 드립니다.
왕의 날을 더하여 주시고, 왕의 해를 더하여 주셔서, 오래오래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왕이 오래도록 왕위에 앉아 있게 하시고,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로 우리 왕을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시 61:6~7, 새번역)
만약에 다윗이 생각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왕권이라면,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되기 전에 당시의 왕인 사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권을 놓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우를 바꾸어서 생각해 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기도를 드렸다고 한번 가정해 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미 왕이 된 후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더욱 왕권이 아니겠죠. 그러므로 언제 드린 기도였든지 간에, 다윗이 구한 것이 이스라엘의 왕권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토록 바라고 원했던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기도 속 ‘저 바위’는 상황에 따라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달려갔을까요? “하나님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물맷돌을 들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겠죠. 그때라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골리앗을 무찔러야 하는 과제였을 것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다윗은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며 다양한 과제들을 헤쳐 나갔습니다. 사울을 피해 엔게디 요새에서 생존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했습니다. 블레셋에서는 아기스의 수하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은 “내가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에 나를 올려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이 된 다음에는 이런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었을까요? 아마도 그는 나라를 이끌면서 정치적으로 고통스러운 여러 상황을 마주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더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왕이지만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겪으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경건처장으로 있을 때 총장님이 바뀌곤 했습니다. 총장님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총장님이 항상 새벽기도회에 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어떻게 새벽기도까지 나오실까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 이렇게 마음을 쓰시는지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총장님은 “총장이 되고 나니 하나님께 의탁할 일이 너무 많아서 기도를 빠질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도 그랬겠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과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길이 막혔습니다. 더 이상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다윗이 말하는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어떤 자리나 고정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 기도는 이 어렵고 힘든 현실 속에서 나를 빼내어 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복잡하고 더럽고 힘든 사업의 자리, 온갖 문제가 엉켜 있는 삶의 현실 속에서 나를 좀 구조해 달라는 탄원의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또 다른 말로 말하면 해결책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주님께 의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말하는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의 한 모습입니다.
<다윗은 현실의 문제를 넘어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다르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땅끝’이라는 표현을 한번 주의해서 봅시다. 다윗은 ‘땅끝에서부터 내가 부르짖는다(울부짖는다)’라고 표현하며 나의 기도에 유의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이 ‘땅끝’도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 절망과 당면한 모든 문제를 지칭합니다. 내가 처한 현실, 죽음이 왕 노릇하며 거짓과 실수가 난무하고 불의가 성행하는 모든 상황을 의미합니다. 정직한 자가 넘어지고 불의한 자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이상한 모습, 악한 행위가 보호받고 선한 사람이 미련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바로 ‘땅끝’입니다.
다윗은 땅끝에서 “내가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소서”라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땅끝에서 기도하는데, 더 오를 수 있는 땅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땅끝에서 또 다른 땅끝으로 간들 무슨 희망이나 해결책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도에서 ‘바위’는 이 세상의 바위, 조금 더 높은 땅, 이 땅에 속한 단단한 평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와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인간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간구한 이 기도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세상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내 힘으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나를 바위 위로 올려 달라는 간구입니다. 우리도 어려운 과제 앞에서 이 기도를 드리며 날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할 것입니다. 다윗도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렇게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기도가 땅끝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면, 다윗은 세상의 모든 문제로부터의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즉, 다윗의 기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나를 영적인 차원으로, 하나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 삶의 문제만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넘어설 수 있도록 나를 끌어올려 달라는 영적 탄원의 기도입니다.
저는 이런 관점에서 ‘바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전 10:1~4)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반석’의 의미를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풀어 줍니다. 이 해석대로 다윗의 기도에서 바위(반석)를 예수 그리스도로 읽으면 뒤에 이어지는 기도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는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시 61:2~3, 새번역)
다윗이 인도받기 원하던 그 높은 바위는 신약에 와서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다윗은 그 반석을 영적으로 노래한 것입니다. 진정한 피난처이자 원수의 공격 앞에서 견고한 망대가 되실 그 반석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의 땅끝에서도 마침내 마주하게 될 땅끝에서도 당당하게 반석 위에 서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봅시다. 인생을 살면서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가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여러분도 지금 그 바위들을 하나둘씩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씩 올라가고 또 정복해 갑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바위였으니, 사실은 모두가 은혜였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위인 것 같았는데 올라갈 수 있었으니, 은혜가 아니었겠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어려운 시간들을 거치며 올라갈 수 없었던 바위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씩 올라가곤 합니다.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업, 좋은 직책, 재물과 명예라는 높은 바위 위에 힘들게 올라갑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내가 오를 수 없는 바위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좋은 자리가 크게 보이고, 재물과 명예 같은 것들이 중요하게 보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한 달을 건강하게 살아 내는 것이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연약해지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죠. “하나님, 한 달만이라도 건강하게 자녀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나의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 이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도가 됩니다. 인생을 지나가면서 점점 바위의 종류가 달라지죠. 그리고 마침내 땅끝에 서는 날, 우리는 죽음이라는 원수 앞에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 죽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그분, 부활의 소망을 주실 그 든든한 바위 위로, 내 힘으로는 올라설 수 없는 그 바위 위로 나를 올려 주십시오.”
“하나님 땅 끝에서 우리가 울부짖습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그 마지막 때에 다다르기 전에도 여전히 이 기도를 할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가 함께 평생 함께해야 할 기도입니다. 인생의 과제 앞에서도, 병약했을 때도,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도 기도하다가 마침내 마지막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드릴 기도의 제목입니다.
저의 여행 마지막 날, 어느 교회에 들어갔더니 이런 문구가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Here I Stand: Where Do You Stand?”(내가 여기 있나이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느냐?) 저는 이 문구를 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라고 질문하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구원자이시며 나의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구원의 능력 위에 서 있습니다. 진정한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나는 든든한 반석 위에 서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서 계십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5년 8월 3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오를 수 없는 저 바위에 나를 세우소서” (시61:1~4)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72, 312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과거의 시간이 있습니까?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설교의 요약>
시61:2의 새번역 말씀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 땅 끝에서 주님을 부릅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오늘 이 기도를 드리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대입입시를 준비하는 학생, 사업을 시작하여 날마다 초조하게 살아가는 분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분들도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땅 끝에서라도 주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 또한 은혜입니다.
‘오를 수 없는 바위’는 무엇입니까? 다윗이 있는 자리는 땅 끝이었습니다. 다윗이 기도하였던 오를 수 없는 바위는 왕권이 아닙니다. 모든 어려운 상황입니다. 내 힘으로 안 되는 모든 상황입니다. 이 기도는 나를 이 어렵고 힘든 현실에서 빼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땅 끝’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 절망, 당면한 문제들을 한마디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땅 끝은 이 세상, 나의 현실입니다. 절망이 뒤덮고 있는 현실, 죽음이 왕 노릇하고 있는 상황,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고 불의가 성행하는 이 상황입니다. 정직한 자가 넘어지고 불의한 자가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입니다. 악한 행위가 보호받고, 선한 사람이 미련한 사람처럼 여겨지는 이 세상이 땅 끝입니다. 다윗은 울부짖으며 기도합니다.
땅 끝에서 더 오를 수 있는 바위가 어디 있겠습니까? 현실 속에서 도움을 구할 뿐 아니라,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영적인 차원, 하나님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저 바위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반석입니다. (고전10:1~4)
인생의 마지막, 땅 끝에 서는 날, 죽음은 이 땅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원수에게서 주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실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 땅 끝에서 우리가 울부짖습니다. 내 힘으로 오를 수 없는 저 바위 위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시오, 죽음 너머 영원한 곳에서도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어디에 서 있습니까? 구원자이시며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 고난의 자리, 나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 그러나, 나는 믿음 위에, 그리스도 위에 내가 서 있습니까? 오늘의 말씀으로 함께 기도하며 주님께 나아가길 바랍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 소망교회의 강단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을 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 붙잡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