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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 : 19 ~ 23
19 ~ 23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성경은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여러분은 요셉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들이자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산 인물, 결국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린 인물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 시작점을 설명합니다. 이제 요셉은 사랑 받던 아들에서 고난 받는 종 곧 노예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한편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한 단어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단어입니다. 바로 ‘형통’입니다. 억울하고 노예 신분으로 팔려 가는 그 시작점에 성경은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고 증언합니다.
혹시 실수일까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2절에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3절에도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23절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라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성경은 반복적으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분명 요셉의 정황은 고난과 억울함의 연속인데도 말입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2절에서 한 번 막히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형통과 전혀 다른 접근이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세기 39:2 중)
이 본문이 어떻게 풀이됩니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라는 말 다음에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기대할 것 같습니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사랑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말씀이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본문이 적절히 이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2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었다.” 이는 무슨 뜻입니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애굽에서 탈출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셔서 노예 신분으로 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셔서 그를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셨다.” 이런 말씀이 되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형통입니까? 과연 이런 삶을 축복 받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요셉의 인생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릴 때 나이가 17세였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을 섬기기 시작할 때 나이는 30세였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팔려 가 왕을 돕기 시작할 때까지, 그 기간이 13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요셉은 노예 신분으로 살았고, 감옥에서 죄수 신분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인생을 가리켜 과연 ‘형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요셉의 인생을 한 번 되짚어 봅시다. 요셉이 정말 억울했던 때는 언제였겠습니까? 적어도 세 번 요셉은 대단히 힘겨운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형들에게 배신당해 팔려 갔을 때입니다. ‘어떻게 형이 동생인 나를 팔아넘길 수 있을까? 내가 믿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를 이렇게 곤궁에 몰아넣을 수 있을까?’ 아마 수없이 이런 질문을 던지며 고투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디발의 집에서 그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을 때일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요셉은 젊은 나이였습니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법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뿌리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믿음으로 유혹을 넘어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단호히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뿌리침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리어 모함당하고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감옥에 갇힙니다. 참으로 참혹한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가리켜 과연 ‘형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요셉에게 어려웠던 시간은 잠시 희망을 발견했지만 또다시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들어왔을 때 그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며 그가 곧 왕을 섬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당신이 감옥에서 나가시거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왕에게 내 억울한 사정을 잘 말씀해 주십시오.” 창세기 40장 14~15절입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창세기 40:14~15)
한 번만 부탁했겠습니까? 감옥에 있는 동안 수없이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서 풀려 나가는 순간 다시 한 번 간절하게 자신의 바람을 알렸을 것입니다. 때문에 술 맡은 관원장이 풀려났을 때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 이제 내게도 해방의 소식이 오겠구나.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구나. 이제 자유를 주시겠구나.’ 이렇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장 마지막 절에서 요셉의 절망스러운 상황이 묘사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게다가 다음 장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만 이년 후에…”
아마 만 2년이라는 이 시간은 요셉에게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켜 주시리라 기대했는데, 그렇게 하루하루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2년 동안이나 억울한 자리에서 그는 멈춰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창세기 39~40장에는 요셉이 경험한 13년간의 고난의 여정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참 불행하고 희망을 바랄 수 없던 요셉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성경은 그 가운데 ‘형통’이란 단어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으로 요셉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너희가 보기엔 요셉의 인생이 참 고통스럽고 힘든 것 같지? 그런데 사실 그의 인생은 형통한 인생이란다.”라고 말입니다.
형통한 인생이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과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형통이라고 생각하며, 어떤 삶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형통’과 ‘성공’을 일이 잘 되고, 상황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재물이 점점 많아지고, 위치도 점점 높이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장에서 부장으로 올라가고, 20평대 아파트에서 30평으로 넓혀 가고, 수도권에 살다 서울로 옮겨 가고, 서울에서도 더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소위 “성공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형통’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만약 이와 같은 형통관과 성공관을 갖고 살아가면, 우리는 불행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공관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20평 아파트를 갖는 순간 3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부러워지고, 30평 아파트에 사는 순간 40평 아파트에 살고 싶고, 40평을 갖는 순간 더 큰 평수를 가진 사람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늘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 뒤를 따라가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실패자요 아직 도상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관을 갖고 살다 보면 우리는 늘 피곤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늘 뒤따르는 삶을 사는 것 같아 불안하며 근심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기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성장기가 있고, 성숙해 가는 과정이 있으며, 노쇠해져 가는 과정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생의 흐름 아닙니까? 사람은 결코 무한히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면 성숙해지는 과정이 있고, 노쇠한 후 결국 죽어가는 과정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큰 집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 힘이 모자라 그 집을 다 관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
고 맙니다. 결국엔 평수를 줄여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에는 한 평도 되지 않는 자리에 눕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팽창, 무한한 성공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보면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공은 그런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형통은 그런 형통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의 여정을 전하시며 바로 이 삶 안에 ‘형통’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형통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오늘 본문 2절과 3절, 그리고 23절에 나타납니다. 요셉이 형통했다는 말씀이 등장할 때마다 함께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창세기 39:2 중)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는 구절 앞에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3절과 23절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세기 39: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세기 39:23 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형통입니까? 무엇이 성공이며 번영입니까? 오늘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그 어떤 고통이나 두려움도 우리를 사로잡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형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또 왜 이것이 성공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시 얻게 된 인기, 잠시 가지는 권력,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재물도 결코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늙어가고 시들어지며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계시니,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하신 분을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성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삶, 그것이 번영이며 형통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적인 의미의 성공관을 갖게 되면, 나이든 사람은 실패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 어떤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장애인에게 어떤 성공과 형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에게서 어떤 형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형통이라고 믿으면 누구나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이든 사람도 형통하고, 죽음을 앞둔 사람도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애인도 형통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형통합니다. 누구라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입니다.
삶의 역설적인 순간에 형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형통의 진정한 의미를 역설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형통을 이야기할 때 ‘잘 되는 것’, ‘점점 나아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의 형통도 있습니다. ‘완전히 망할 상태에서 그렇게 되지 않고 버티는 것’, 이 또한 또 다른 의미의 형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수많은 병원의 병동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드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오늘만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오늘 하루만이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가족의 얼굴을 보며 지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자신도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하루만 더 성공하게, 버틸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망해야 할 사람이 망하지 않고 버텨 내는 것, 이 또한 또 다른 의미 곧 역설적 의미의 형통입니다.
신명기 22장 23~24절을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2:23~24)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신 율법의 내용입니다. 이 율법은 당시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던 법입니다. 만약 이 법을 요셉에게 적용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소리를 질렀고 요셉을 죄인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요셉이 받아야 할 형벌은 사형입니다. 돌에 맡아 죽어야 합니다. 신명기 22장의 내용은 평범한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우에 관한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떤 신분의 사람입니까? 당시 노예였고,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다 현장에서 붙잡힌 누명을 쓰고 있습니다. 하찮은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다 발각되었다면 어떤 벌을 받는 게 마땅합니까?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돌에 맞지도, 사형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받은 형벌은 감옥에 잡혀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에게 형통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운명에서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이 역시 또 다른 의미 곧 역설적인 의미의 형통이란 것입니다.
요셉이 경험한 이와 같은 형통은 한 번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때 한 번 더 있었습니다. 형들이 요셉이 오는 것을 보곤 어떻게 마음먹었습니까? “그를 죽여 버리자.”고 말했습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한 형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바뀝니다. 구덩이에 넣고 조금 뒤에 죽이자고 했다가 마침내 이스마엘 상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곤 그들에게 팔아넘기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요셉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었는데, 팔려 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엔 노예 신분으로 팔려 간 게 참 억울한 일 같아 보이지만, 사실 죽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면 도리어 노예로 팔린 일은 형통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이 요셉의 삶에 나타난 또 다른 형통이란 말입니다.
어렵고 억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서 자꾸 넘어지고 쓰러질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바로 요셉이 경험한 형통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기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역전의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실 것이란 믿음도 있습니다. 나를 살려두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지금까지 지탱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나님께 둘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다른 의미의 형통입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형통은 있습니다.
세 번째로 또 다른 의미의 형통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요셉은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노예로 팔려 가고, 억울한 누명을 쓰며, 감옥에 가고, 그곳에서조차 사람들에게 잊혔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암울한 시간이요 절망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이 절망스러운 여정 가운데서도 자그마한 형통이 숨겨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노예로 팔려 왔지만, 하나님이 함께해 주심으로 주인에게 신의를 얻어 가정 총무가 되는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간수장에게도 신뢰를 얻어 감옥을 관리할 수 있는 작은 행복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하게 해 주셨다.”라고 증언합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 작은 행복이고, 요셉의 인생을 보면 굉장히 큰 고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삶을 형통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 인생의 순간마다 형통한 자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의 인생을 살펴보면, 애굽으로 팔려 오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만약 애굽으로 팔려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술 맡은 관원장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후 애굽 왕이 꿈을 꾸었을 때 해석하는 자리까지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나 꼭 필요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만 2년을 잊힌 존재로 살았습니다. 감옥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은혜였습니다. 왜입니까?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돌아가자마자 왕을 만나 요셉의 억울한 상황을 말했다면, 그래서 요셉이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중에 애굽 왕이 꿈을 꾸었을 때 해석할 사람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고, 요셉과 대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안전히 감옥에 두시고, 그로 하여금 2년 후 왕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고통의 연속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소소한 행복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노예생활 중에도, 감옥생활 중에도 작지만 기쁜 일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요셉이 경험한 또 다른 의미의 형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축복 받은 인생이요 형통한 삶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아들과 딸들의 어리광에 잠시 기쁠 수 있다면, 미래가 안 보이는 직장에서도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형통임을 기억하며 감사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로 인해 공동체가 복을 받는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요셉이 경험한 형통은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이 복 받게 되는 형통입니다. 요셉은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13년 동안이나 억울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요셉과 동시대를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7년의 대기근 기간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넘기고 그들 모두가 함께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왕실 역시 살아났고, 가족들 역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또 애굽에서 번성할 수 있었는데, 이 또한 요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이 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요셉이 그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와 함께한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또 다른 의미의 형통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생각하셔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셉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요셉으로 인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발견됩니다. 여러분은 가정에서 어떤 생각과 마음을 품고 살아가십니까? 부모로서 자녀를 대할 때 어떤 마음이십니까? ‘내가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게 고생하며 살지만, 내 고통이 평생 지속될 것 같지만, 그럼에도 내 고생으로 우리 가족이 잘 될 수만 있다면, 내 자녀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이 삶 역시 형통한 삶이고 성공한 삶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확장된 의미의 형통이란 것입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 행복을 누리고 복 받음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형통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형통한 삶을 사신 분입니다. 그분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살아나고 생명을 얻으며 부활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온 인류의 구원을 이뤄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인생은 가장 형통한 삶입니다. 온전한 형통을 이루어 내신 삶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희생양처럼 사회에서 희생될 때도 있습니다. 정의를 지키려다가 오히려 모함당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재기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그토록 정의를 외쳤기에, 또 정의롭게 살려고 애썼기에 회사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지며, 그로 인해 언젠가는 후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형통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무리하며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또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위로를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요셉의 인생을 다시 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 그의 삶을 보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더한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때마다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또 요셉이 힘든 노예 생활과 감옥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이 그에게 작은 행복을 허락하셨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허락하신 작은 행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나아가 비록 내가 희생하지만, 그 희생으로 누군가 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 또한 형통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처럼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형통이 우리 삶에 큰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요셉의 삶을 통해 위로를 얻고,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