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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야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의로움을 상징하던 이들의 이른 결말은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게 합니다.>
대개 삼국지를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삼국지를 접했던 때는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삼국지 요약본 같은 책이었는데, 삼국지 전체가 방대한 내용이다 보니 상당히 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한 말기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조정은 각지에서 의용군을 모집합니다. 의용군 모집 방을 보고 나라를 걱정하던 유비와 장비가 한곳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관우가 합류합니다. 이 세 사람은 어느 복숭아나무 밭에서 의형제를 맺습니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망해 가는 한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결의를 하고 한날에 함께 죽기로 맹세합니다. 삼국지의 첫 장면인 도원결의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유비라는 인물에 흠뻑 젖었던 것 같습니다. 약자와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모습, 도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백성을 버리지 않고 함께하는 모습을 참 멋지게 보았습니다.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스럽고 백성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돋보였습니다. 도원결의로 상징되는 것처럼 의리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려 하는 모습, 제갈량을 삼고초려 하여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겸손한 모습도 참 멋지게 보였습니다. 저는 유비를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삼국지를 읽어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은 유비와 관우, 장비가 위대한 나라를 세우고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는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 가면서 아슬아슬한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촉한을 건국하는 데까지 이른 것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관우가 형주를 지키던 중에 오나라 군대의 습격을 받고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주인공이 쉽게 사라지는 상황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전을 기대했으나, 장비는 더 허무하게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이후 유비는 아우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고 오나라를 침공하지만,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그만 병으로 사망합니다. 혹시나 반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제갈량의 활약이 잠시 이어지지만, 그도 북벌 중에 오장원에서 사망합니다. 여기서 한 나라 부흥의 꿈은 완전히 좌절됩니다.
어린 나이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망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의로움을 상징하던 촉한 세력의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량이 권모술수와 실리적인 힘을 상징하는 조조와 그의 후예인 사마씨 일족에게 결국 멸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후에 다시 읽을 때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기는 했지만, 어린 나이에 읽은 삼국지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역사 속에 선한 지도자의 행보는 사람들의 기대만큼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조금 길게 삼국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 본문으로 읽어 온 열왕기가 그러합니다. 열왕기는 상·하로 나뉘어 있으며, 솔로몬왕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둘로 나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왕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들의 멸망 이야기도 다루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열왕기에는 각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평가 기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우상숭배 여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잘 이끌었는지를 보는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처음에는 지혜로운 왕으로 평가받지만, 말년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아내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분열 왕국을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는 왕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평가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 19명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중 한 명도 하나님 앞에 선한 왕으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이는 아합왕입니다.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백성들에게도 우상을 숭배하도록 조장한 인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의 제사장 40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유일하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은 우상숭배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왕들의 치세가 약해지고 단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역사는 아합왕 때 나라의 힘이 강력했고, 그가 22년간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했다고 기록합니다. ‘왜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지?’라는 생각이 들 만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번의 전환점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예후가 아합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을 때 일입니다. 이때 바알 숭배가 척결되며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금송아지 숭배로 넘어갑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남왕국 유다의 경우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선하다고 인정받는 왕이 몇몇 있었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왕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선하다고 인정받는 두 왕을 꼽는다면,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선한 왕이 등장할 때마다 응원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 왕들로 인해 나라가 번영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 좋겠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그런데 성경 속 선한 왕의 이야기들이 그다지 흡족할 만한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히스기야의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선한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왕하 18:3)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왕하 18:5~6)
히스기야는 이전에 없던 하나님 앞에 선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죽을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가 재위한 지 14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왕은 오래 살게 해 주시지…’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과연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간 연장하는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선한 왕에 대한 보상답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가 덤으로 받은 15년의 인생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그가 병에서 나은 후, 그는 자신을 방문한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궁중에 있는 모든 보물과 무기를 보여 줍니다. 그 행동은 나중에 바벨론으로 모든 재물과 자손이 잡혀가는 단초가 됩니다.
또 히스기야는 연장된 삶의 시기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이후에 아버지 히스기야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므낫세입니다. 므낫세왕은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생명 연장을 포함해서 약 29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선한 왕의 시대가 끝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므낫세의 통치 기간은 55년에 이릅니다.
악한 왕이 등장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시고, 선한 왕은 오래 살게 하셔서 나라가 든든해지게 하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므낫세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왕 요시야의 허무한 끝도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리고 아몬에 이어서 요시야가 왕위에 오릅니다. 유다의 역사에 마지막 희망이었던 왕입니다. 요시야 이후 유다에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2)
요시야는 재위 중에 성전을 수리합니다. 그때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여 말씀을 읽고 그의 옷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그 후 요시야는 모든 백성을 이끌고 성전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모든 회중과 함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죠. 모든 산당과 우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들어 시냇가에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과 함께 유월절을 회복하고 절기를 다시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또 이렇게 묘사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이렇게 멋진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준 요시야의 이야기는 성경에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에서 시작한 요시야왕의 이야기는 23장 25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왕이 유다를 오랫동안 다스리면 좋겠다.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어떤 복을 내려 주실까?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웠으므로, 이제 하나님께 어떠한 축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뜻밖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의 인생과 이스라엘 백성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축복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뒤이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왕하 23:28~29)
요시야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젊은 나이에 애굽 왕 느고와 전투하던 중 므깃도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끝입니다. 사실 요시야는 애굽 왕 느고와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애굽 왕은 앗수르를 치기 위해 길을 터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시야왕은 길을 터 주지 않았고, 그와 싸우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합니다.
성경을 흥미롭게 읽던 독자들도 제가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으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삼국지의 맥락과 열왕기의 주제는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상이하지만,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유사하게 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한 왕들을 오래 살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전투에서 허망하게 패전하게 하셨을까요? 게다가 이후에 요시야처럼 하나님을 섬긴 왕들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긴 역사의 흐름은 모든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죄의 운명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열왕기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선한 모습으로 나갈 수 없다는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잠시 선한 왕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 이후로 원죄가 있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열왕기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결국 너희는 악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잠시 선한 왕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너희의 힘으로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너희들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어.” 이 사실을 긴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5~26)
선한 왕 요시야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유다의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유다는 심판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아무리 선한 왕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고 하여도, 이미 쌓아 온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므낫세의 죄는 단지 므낫세왕이 지은 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모든 죄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므낫세가 지은 죄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번영입니까? 희망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인류의 역사는 멸망과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희망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적인 현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고, 번영을 향해 나아가며, 기술은 개발되고 있으니, 우리의 운명은 결국 좋아지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우리 인생과 나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판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 시간을 조금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약을 먹고 좋은 치료를 받아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결국 연약해지고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입니다.
<심판으로 향하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우리의 운명이 하나씩 어떤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피부로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운명과 나의 운명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 상황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9, 21~24)
바울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이어 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 25)
여전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인류의 역사는 요시야가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수 없는 악한 왕들의 등장 사이에 간혹 선한 왕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선한 왕들조차도 유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잠시 심판을 연장할 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못하는 다윗의 가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증언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 7:13~14, 새번역)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실패와 악한 왕들의 등장 사이에 선한 왕들이 잠시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심판을 면할 길 없는 다윗 왕조의 흐름 속에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의 선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한들,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선하게 오래 산다고 한들, 우리의 운명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신앙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우리 모두가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이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If Josiah Had Lived Longer,
Would History Have Changed?
2 Kings 23:25, 28-30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I read a book called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t was my first encounter with the novel. It was an abridged version for children, but sinc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s a very extensive story, I remember it being quite lengthy.
During the late Eastern Han Dynasty, when the country was in chaos due to the Yellow Turban Rebellion, the court recruited volunteer armies from various regions. Seeing these recruitment efforts and worried about the country, Liu Bei and Zhang Fei met, and then Guan Yu joined them. The three swore brotherhood under a peach tree. They resolved to save the troubled country, restore the declining Han, and die together on the same day.
As a child, I was deeply impressed by Liu Bei. His way of protecting and embracing the weak and the vulnerable and his refusal to abandon the people even in life-threatening situations seemed admirable. He was loyal to the country, compassionate toward the people, risked his life for loyalty and trust—as symbolized by the Oath of the Peach Garden—and recruited talented people like Zhuge Liang after three visits. All these traits made Liu Bei the protagonist of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Naturally, I read the novel supporting Liu Bei. I expected the story to end with Liu Bei, Guan Yu, and Zhang Fei founding a great country and finally creating a just world.
However, as I read the book, I felt anxious and tense. I cheered when Liu Bei’s army won battles, but felt uneasy when they lost. The story started to diverge from my expectations as I continued reading.
It was good that Liu Bei founded Shu Han, but it felt so futile when Guan Yu was captured and executed by Wu’s forces while defending Jingzhou. It felt like the main character disappeared too early. I thought there might be a twist, but Zhang Fei was even more senselessly betrayed and assassinated by his own subordinates, Fang Qiang and Zhang Da. Later, Liu Bei led a large army to attack Wu to avenge his two brothers, but was defeated at the Battle of Yiling and died from illness. After that, Zhuge Liang played a considerable role, which made me expect another possible twist, but he too died in the Battle of Wuzhang Plains and the dream of reviving the Han dynasty was completely shattered.
As a child, I was deeply disappointed by the ending. I felt a deep sense of powerlessness as Cao Cao and his successors, the Sima family, who represent manipulation and power politics, ultimately prevail over righteousness symbolized by Shu Han, Liu Bei, Guan Yu, Zhang Fei, and Zhuge Liang.
Of course, when I read it again later, I had other impressions. But my first impression from childhood stayed with me.
Talking about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makes me wonder how I would feel if I read it again now.
I’ve gone a bit into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but I often feel similar emotions when I read the Bible.
Recently, we read the Book of Kings in our early morning prayer services. When I read about the kings of Israel, similar emotions to what I felt in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rise.
The Book of Kings is divided into two parts in the Bible: I Kings and 2 Kings. The story begins with Solomon and then covers the kings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nd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after their division.
Interestingly, the Book of Kings introduces God’s evaluation of each king. It details the history up to the fall of both Judah and Israel and assesses whether each king was righteous or wicked before the Lord. The criteria for these evaluations are obedience to God, idol worship, and how well each king led God’s people in faith.
King Solomon was initially regarded as wise and good, but in his later years, he took foreign wives and followed their idols, which led to the division of the kingdom.
The assessments of the kings of the northern kingdom of Israel are all negative. Among the 19 kings of Israel in 1 Kings and 2 Kings, none is considered a righteous king before God.
The most wicked of them was Ahab. He worshiped Baal together with Jezebel and encouraged the people to worship idols. Elijah challenged 450 priests of Baal and 400 priests of Asherah on Mount Carmel and proved that only God is the true Lord; yet Ahab did not turn away from idol worship.
I wished such kings would die early or their rule was weaker, but surprisingly, Ahab’s era is actually regarded as a period when the nation was strong. Ahab ruled for 22 years. This made me wonder, Why does history unfold this way?
When Jehu overthrew Ahab’s Omride dynasty and established a new one, he temporarily abolished Baal worship. However, he too did not turn back to Jehovah, but returned to worshiping golden calves. This was a missed opportunity for Israel to return to God.
As for the southern kingdom of Judah, there were some kings who were recognized as good in God’s eyes. They include Asa, Jehoshaphat, Joash, Hezekiah, and Josiah.
And among these, the two considered the most righteous would be Hezekiah and Josiah.
When reading the Bible, we, as readers, tend to cheer whenever good kings appear. We hope they will do well, bringing prosperity and God’s blessing to the nation.
But the stories of these good kings often do not feel satisfying to us.
Take Hezekiah, for example. He was a good king who pleased God. The Bible assesses him as such: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2 Kings 18:3 NIV)
This is another assessment of him:
“Hezekiah trusted in the Lord, the God of Israel. There was no one like him among all the kings of Judah, either before him or after him.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stop following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2 Kings 18:5-6 NIV)
But, unfortunately, this good king fell seriously ill and was near death. This happened only 14 years into his reign. I thought, Why doesn’t God let such a good king live longer? Indeed, God granted Hezekiah an extra 15 years of life.
However, as we know, those 15 years are generally seen as a regrettable time. After recovering from his illness, Hezekiah showed the messengers from Babylon all the treasures and weapons in his palace, which eventually led to his descendants and wealth being taken to Babylon.
During this time, he also had a son, Manasseh, who is remembered as the most wicked king in God’s eyes.
While reading about Hezekiah, we often dream that he might do some great deeds, strengthen the country, receive God’s blessing, bring peace to the people, and establish the most powerful nation of the era. But the Bible’s account is disappointing.
What about Manasseh’s story? His father Hezekiah ruled for 29 years, including the extension of his life, but after such a good reign, Judah’s worst king, Manasseh, reigned for 55 years.
It would be better if evil kings like Manasseh quickly disappeared from history so that good kings could take over, but that doesn’t happen. Manasseh, considered the most wicked king, is recorded as the longest-reigning king of Judah.
After him comes Amon, and then Josiah ascends the throne. Josiah was the last hope for Judah. After him, no truly righteous king appeared. The evaluation of Josiah begins like this: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followed completely the ways of his father David, not turning aside to the right or to the left.” (2 Kings 22:2 NIV)
During Josiah’s reign, he ordered the restoration of the temple. While doing so, they discovered the Book of the Law. After reading it, Josiah tore his clothes and repented. He then led all the people up to the temple, read the Law aloud to the crowd, renewed the covenant with God, and tore down and burned all the high places and idols, even pulverizing them into dust and scattering it. He also reestablished the observance of Passover with all the people.
Because of this, the Bible further assesses Josiah:
“Neither before nor after Josiah was there a king like him who turned to the Lord as he did—with all his heart and with all his soul and with all his strength, in accordance with all the Law of Moses.” (2 Kings 23:25 NIV)
Josiah’s story continues in an exciting way. Starting from 2 Kings 22 and continuing to 2 Kings 23:25, the text details all his good deeds before God.
Readers of this story hope for a positive outcome. Finally, after a long wait, a truly good king appears. What blessings will God give Josiah? What blessings will God give the people of Israel who have all come before Him, repented, renewed themselves, and reestablished their covenant with God?
However, the Bible tells an unexpected story. It does not mention God’s blessings on his life or on Israel. It simply discusses his death:
“As for the other events of Josiah’s reign, and all he did, are they not written in the annals of the kings of Judah? While Josiah was king, Pharaoh Necho king of Egypt went up to the Euphrates River to help the king of Assyria. King Josiah marched out to meet him in battle, but Necho faced him and killed him at Megiddo.” (2 Kings 23:28-29 NIV)
At age 39, Josiah dies in battle at Megiddo while fighting Necho of Egypt. That’s the end of his story.
Reading this, I felt the same way I did as a child reading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hy didn’t God allow such a good king to live longer? Why did He let him die in battle? I might have felt less disappointed if another good king had appeared in Judah’s history after Josiah. But no other king served God like Josiah after him.
Readers of the Bible, who cheer and hope when a good king appears, become disappointed and lose hope at such scenes. They wonder, Is this the end?
Should we live good lives? Should we live honestly? If this is the fate of even the righteous kings before God, how should we live?
If a good king appears, shouldn’t there be proof such as victories in war, a rise in the nation’s power, and prosperity of the people? Shouldn’t Josiah live a long life and open up an era of power and prosperity for the nation?
But Josiah, considered to be the most righteous king of Judah, died at a young age in battle.
Then what is the message that the Book of Kings wishes to convey to us? If an era of peace and prosperity had come after every good king, we would obviously have resolved to become good people. But the Bible does not tell the story according to our expectations. Then what does it say?
It teaches us that we humans cannot, of our own will, be righteous before God. There are some good kings. But their reign is only short-lived. They abandon God again and return to idol worship. This is the fate of man who has inherited original sin ever since Adam and Eve.
The Book of Kings reveals this miserable reality of man. You, men, eventually head toward evil. Even though some good kings seem to appear for a while, they are far from sufficient to change your miserable fate. This is the truth that the Book of Kings reveals to us.
Today’s passage conveys this very message to us. Let’s look again at today’s Scripture:
“Neither before nor after Josiah was there a king like him who turned to the Lord as he did—with all his heart and with all his soul and with all his strength, in accordance with all the Law of Moses. Nevertheless, the Lord did not turn away from the heat of his fierce anger, which burned against Judah because of all that Manasseh had done to arouse his anger.” (2 Kings 23:25-26 NIV)
Would Judah’s history have been different if Josiah, a good king, had lived longer? Would the country have escaped judgement? The Bible’s answer is “no.” Even if the most righteous king ruled Judah for a while and pleased God, he cannot change the fate of man which has been determined by his sins. Manasseh’s sins are not just his sins alone. It would be correct to say that they represent all the sins that countless kings committed before God.
Where is humanity’s history headed? Prosperity? Hope? The Bible says that the history of man who has turned away from God is headed only toward destruction and judgement.
Good kings occasionally appear and give us hope. But still we are eventually headed toward judgement. It is because Manasseh’s sins overpower the goodness of Josiah.
Therefore, in us, there is no hope.
Wouldn’t we be able to rephrase this destiny of man as follows?
Isn’t this the reality we see in the life of the individual? The moment we are born, we all live toward death. This death is our irreversible fate. Death entered us because of sin. We are all on our way to judgment and death.
We may delay that time a little by exercising. Perhaps good medicine will delay that time a little too.
But our bodies gradually weaken, and eventually, we die. That is our inescapable destiny.
The history of Israel, the history of humanity, and each individual’s life will all move toward that same end. We are beings living with the reality of judgment. Therefore, there is no hope within us.
The apostle Paul describes our spiritual reality like this:
“For I do not do the good I want to do, but the evil I do not want to do—this I keep on doing. So I find this law at work: Although I want to do good, evil is right there with me. For in my inner being I delight in God’s law; but I see another law at work in me, waging war against the law of my mind and making me a prisoner of the law of sin at work within me. What a wretched man I am! Who will rescue me from this body that is subject to death?” (Romans 7:19, 21-24 NIV)
Paul frankly recognizes this human reality and gives thanks to our Lord:
“Thanks be to God, who delivers m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Romans 7:25 NIV)
Why does Paul thank God, even though he still struggles with sin in his flesh? Because Jesus bore all our sins and liberated us from the bondage of death.
Paul then confesses:
“Therefore, there is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because through Christ Jesus the law of the Spirit who gives life has set you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death.” (Romans 8:1-2 NIV)
Human history did not change simply because Josiah lived a little longer. But it did change because Jesus Christ came to this earth for us. This is the Gospel.
Countless evil kings have appeared, and among them, some righteous kings have also appeared from time to time. Yet even these good kings could not alter the destiny of Israel or Judah. They only momentarily delayed the fate and judgment to come.
Isn’t this why the prophet Isaiah finally prophesied the following toward Israel for continuously refusing to serve God and rejecting His promises?
“Then Isaiah said, ‘Listen well, you royal family of David! Isn’t it enough to exhaust human patience? Must you exhaust the patience of my God as well? All right then,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the sign. Look! The virgin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Isaiah 7:13-14 NLT)
Dear beloved saints, we cannot approach God through our own goodness. We may be righteous for a moment, but our destined reality is that we are inherently evil before God. That is why God sent Immanuel, our Lord Jesus Christ, to us.
Even if the righteous Josiah had lived longer, history would not have changed. Even if we live a better, longer life, we cannot change our fate. We are simply sinners. That is why we praise Jesus Christ our Lord. We thank Him because in Him, there is life, hope, and salvation.
Dear brothers and sisters, I urge you to hold onto this faith. Salvation is found in the Lord. There is no salvation within us. We cannot create our own salvation. Only the Lord saves us. This is the Gospel. The Gospel that truly gives us life. May you have this faith in the Gospel.
열왕기하 23:25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열왕기하 23:28~30
28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9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30
신복들이 그의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의 무덤에 장사하니 백성들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더라
<의로움을 상징하던 이들의 이른 결말은 세상의 허무함을 느끼게 합니다.>
대개 삼국지를 읽어 보셨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삼국지를 접했던 때는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삼국지 요약본 같은 책이었는데, 삼국지 전체가 방대한 내용이다 보니 상당히 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한 말기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을 때, 조정은 각지에서 의용군을 모집합니다. 의용군 모집 방을 보고 나라를 걱정하던 유비와 장비가 한곳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뒤이어 관우가 합류합니다. 이 세 사람은 어느 복숭아나무 밭에서 의형제를 맺습니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망해 가는 한나라를 다시 세우겠다는 결의를 하고 한날에 함께 죽기로 맹세합니다. 삼국지의 첫 장면인 도원결의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으면서 유비라는 인물에 흠뻑 젖었던 것 같습니다. 약자와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모습, 도망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백성을 버리지 않고 함께하는 모습을 참 멋지게 보았습니다. 나라에 대해서는 충성스럽고 백성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돋보였습니다. 도원결의로 상징되는 것처럼 의리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지키려 하는 모습, 제갈량을 삼고초려 하여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겸손한 모습도 참 멋지게 보였습니다. 저는 유비를 삼국지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삼국지를 읽어 내려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삼국지를 읽으면서 기대했던 것은 유비와 관우, 장비가 위대한 나라를 세우고 정의로운 세상을 구현하는 멋진 결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책을 읽어 가면서 아슬아슬한 느낌이 자주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촉한을 건국하는 데까지 이른 것은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관우가 형주를 지키던 중에 오나라 군대의 습격을 받고 처형을 당하고 맙니다. 주인공이 쉽게 사라지는 상황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반전을 기대했으나, 장비는 더 허무하게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암살을 당하고 맙니다. 이후 유비는 아우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고 오나라를 침공하지만, 이릉대전에서 대패하고 그만 병으로 사망합니다. 혹시나 반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에 제갈량의 활약이 잠시 이어지지만, 그도 북벌 중에 오장원에서 사망합니다. 여기서 한 나라 부흥의 꿈은 완전히 좌절됩니다.
어린 나이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허망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의로움을 상징하던 촉한 세력의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량이 권모술수와 실리적인 힘을 상징하는 조조와 그의 후예인 사마씨 일족에게 결국 멸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후에 다시 읽을 때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기는 했지만, 어린 나이에 읽은 삼국지에 대한 첫인상은 그렇게 남아 있습니다.
<역사 속에 선한 지도자의 행보는 사람들의 기대만큼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조금 길게 삼국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 본문으로 읽어 온 열왕기가 그러합니다. 열왕기는 상·하로 나뉘어 있으며, 솔로몬왕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둘로 나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왕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들의 멸망 이야기도 다루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열왕기에는 각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평가 기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우상숭배 여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잘 이끌었는지를 보는 관점이 들어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처음에는 지혜로운 왕으로 평가받지만, 말년에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고 아내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분열 왕국을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는 왕으로 남았습니다.
이후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평가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하에는 북왕국 이스라엘 왕 19명의 이름이 거명됩니다. 그중 한 명도 하나님 앞에 선한 왕으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이는 아합왕입니다. 이세벨과 함께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며 백성들에게도 우상을 숭배하도록 조장한 인물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제사장 450명과 아세라의 제사장 400명과 대결하여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유일하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합은 우상숭배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왕들의 치세가 약해지고 단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역사는 아합왕 때 나라의 힘이 강력했고, 그가 22년간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했다고 기록합니다. ‘왜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지?’라는 생각이 들 만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역사에 한 번의 전환점이 있기는 하였습니다. 예후가 아합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웠을 때 일입니다. 이때 바알 숭배가 척결되며 백성들이 여호와께 돌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금송아지 숭배로 넘어갑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남왕국 유다의 경우는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선하다고 인정받는 왕이 몇몇 있었습니다.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그리고 요시야왕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도 가장 선하다고 인정받는 두 왕을 꼽는다면,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선한 왕이 등장할 때마다 응원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이 왕들로 인해 나라가 번영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 좋겠다는 기대가 생깁니다.
그런데 성경 속 선한 왕의 이야기들이 그다지 흡족할 만한 이야기로 전개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히스기야의 예를 한번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선한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왕하 18:3)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왕하 18:5~6)
히스기야는 이전에 없던 하나님 앞에 선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죽을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가 재위한 지 14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왕은 오래 살게 해 주시지…’라는 생각이 들 즈음에, 과연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간 연장하는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선한 왕에 대한 보상답다는 생각이 드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가 덤으로 받은 15년의 인생은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시간으로 채워졌습니다. 그가 병에서 나은 후, 그는 자신을 방문한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궁중에 있는 모든 보물과 무기를 보여 줍니다. 그 행동은 나중에 바벨론으로 모든 재물과 자손이 잡혀가는 단초가 됩니다.
또 히스기야는 연장된 삶의 시기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은 이후에 아버지 히스기야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므낫세입니다. 므낫세왕은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을 행한 왕으로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생명 연장을 포함해서 약 29년을 통치하였습니다. 선한 왕의 시대가 끝난 후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므낫세의 통치 기간은 55년에 이릅니다.
악한 왕이 등장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하시고, 선한 왕은 오래 살게 하셔서 나라가 든든해지게 하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는 므낫세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왕 요시야의 허무한 끝도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리고 아몬에 이어서 요시야가 왕위에 오릅니다. 유다의 역사에 마지막 희망이었던 왕입니다. 요시야 이후 유다에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선한 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22:2)
요시야는 재위 중에 성전을 수리합니다. 그때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여 말씀을 읽고 그의 옷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그 후 요시야는 모든 백성을 이끌고 성전 위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모든 회중과 함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죠. 모든 산당과 우상을 불사르고 가루로 만들어 시냇가에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백성들과 함께 유월절을 회복하고 절기를 다시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에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또 이렇게 묘사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 23:25)
이렇게 멋진 신앙의 모습을 보여 준 요시야의 이야기는 성경에 흥미진진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22장에서 시작한 요시야왕의 이야기는 23장 25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일을 행하였는지 자세하게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를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왕이 유다를 오랫동안 다스리면 좋겠다. 하나님은 요시야에게 어떤 복을 내려 주실까? 이스라엘이 모두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고 새로운 언약을 세웠으므로, 이제 하나님께 어떠한 축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기대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가지고 말씀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뜻밖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의 인생과 이스라엘 백성에 관련하여 하나님의 축복은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뒤이은 그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왕하 23:28~29)
요시야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젊은 나이에 애굽 왕 느고와 전투하던 중 므깃도에서 전사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끝입니다. 사실 요시야는 애굽 왕 느고와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애굽 왕은 앗수르를 치기 위해 길을 터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시야왕은 길을 터 주지 않았고, 그와 싸우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전사합니다.
성경을 흥미롭게 읽던 독자들도 제가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으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입니다. 삼국지의 맥락과 열왕기의 주제는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을 만큼 상이하지만,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무너지는 모습은 유사하게 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한 왕들을 오래 살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전투에서 허망하게 패전하게 하셨을까요? 게다가 이후에 요시야처럼 하나님을 섬긴 왕들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긴 역사의 흐름은 모든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죄의 운명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런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열왕기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듭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선한 모습으로 나갈 수 없다는 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잠시 선한 왕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그들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 이후로 원죄가 있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열왕기는 이러한 인간의 처절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줍니다. “결국 너희는 악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잠시 선한 왕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너희의 힘으로 불행한 운명을 바꿀 수는 없어. 너희들의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어.” 이 사실을 긴 역사의 흐름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5~26)
선한 왕 요시야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유다의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유다는 심판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아니라고 답합니다. 아무리 선한 왕이 잠시 나라를 다스리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고 하여도, 이미 쌓아 온 이스라엘의 죄가 그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므낫세의 죄는 단지 므낫세왕이 지은 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른 모든 죄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므낫세가 지은 죄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번영입니까? 희망입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인류의 역사는 멸망과 심판을 향하여 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희망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적인 현실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지금 잘 살고 있고, 번영을 향해 나아가며, 기술은 개발되고 있으니, 우리의 운명은 결국 좋아지지 않을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만, 우리 인생과 나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죽음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입니다.
죄로 인해 우리 안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판을 향하여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 시간을 조금 미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좋은 약을 먹고 좋은 치료를 받아서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결국 연약해지고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입니다.
<심판으로 향하는 인류의 운명을 바꾸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우리의 운명이 하나씩 어떤 지점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피부로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 그리고 한 인간의 운명과 나의 운명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심판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영적 상황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19, 21~24)
바울은 인간의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말을 이어 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 25)
여전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사람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인류의 역사는 요시야가 조금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또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으로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수 없는 악한 왕들의 등장 사이에 간혹 선한 왕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선한 왕들조차도 유다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잠시 심판을 연장할 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지 못하는 다윗의 가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을 증언합니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 7:13~14, 새번역)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윗 왕조의 실패와 악한 왕들의 등장 사이에 선한 왕들이 잠시 등장합니다. 그럼에도 심판을 면할 길 없는 다윗 왕조의 흐름 속에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의 선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악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한들, 역사는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선하게 오래 산다고 한들, 우리의 운명도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신앙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믿음을 우리 모두가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이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분명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요시야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왕하23:25,28~3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92, 434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거나, 정직하게 살았는데 오히려 손해를 본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설교의 요약>
요시야는 유다 역사상 가장 선한 왕이었습니다. 성전을 수리하다 발견한 율법책을 읽고 회개했으며, 백성들과 함께 언약을 세우고 모든 우상을 철저히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독자라면 이런 왕이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므깃도 전투에서 허망하게 전사합니다. 그 이후 남유다에는 더 이상 선한 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한 왕 요시야가 더 오래 살았다면 유다의 역사가 달라졌을까요? 성경의 답은 “아니오”입니다. 선한 왕들이 잠시 희망을 주지만, 이미 쌓아온 죄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멸망과 심판을 향해 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인류의 역사는 요시야가 조금 더 오래 산다고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류의 역사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선함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구원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과 희망과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누기>
1. 우리의 선함이나 노력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을 믿고, 이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며 거룩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오니, 우리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그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누리며 이 땅에서 거룩한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