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구독

ic_info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c_info

우리는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가

골로새서 1: 24

김경진 목사

2020.04.05

<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성도 여러분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우리 교우 중에 코로나19로 확진되어 치료받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국에 거주하는 가족을 방문한 뒤 확진 판정을 받으신 권사님과 남편 집사님이 계속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또 영국에서 공부하다 들어온 대학생 친구 한 명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 잠시 다녀온 찬양대원 한 분도 최근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또 권사님 가운데 한 분의 자녀가 미국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고생하고 있는데, 아직 병원을 갈 수 없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이분들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제거해 주시길, 모두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계실 테니, 이렇게 인사하면 어떨까요? “당신과 함께 예배하니 행복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 따뜻한 마음이 나누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가족과 함께, 또 사랑하는 이들과 손을 잡고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셨고, 비장한 각오로 들어서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한껏 고무되어 ‘호산나’ 찬양을 부를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나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에 이어 고난주간으로 넘어가면서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가.”
고난주간이 되면 우리 마음에도 거룩한 부담감이 생깁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찬송가에도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나도 주님께 뭔가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자주 들리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자.” 맞는 말이고,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금욕하기도 하고, 금식하기도 하며, 고난주간에는 결혼식도 금하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구제와 자선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런 관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주간은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고, 그분을 통해 허락된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주간은 의미 깊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깊이 느끼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예수님의 수난사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날짜와 시간도 상세히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난절마다 그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며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중세시대에 이러한 오해가 많이 불거졌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곤 했는데, 점점 지원자들이 많아지면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를 지려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처럼 채찍을 맞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처럼 자신도 손에 못을 박겠다고 자원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을 마치 순교하는 것이라고,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히 예수님과 똑같이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님을 본받겠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마는, 참으로 기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편 사순절과 고난주간,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1장 24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4, 새번역)

바울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남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고난의 잔을 우리가 함께 마셔야 한다는, 즉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이 말씀을 붙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채찍질하기도 하고, 금식과 금욕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을 느끼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고통과 고난을 우리가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요? 과연 예수님이 바라시는 일일까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고, 십자가를 서로 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부족하다거나,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신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완전합니다.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7~18)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그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골로새서 1장 앞부분에도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골로새서 1:21~22, 새번역)

성경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화해케 하신 사역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로 채우겠다.”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고난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고통에 파묻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평안’입니다. ‘평화’입니다. ‘기쁨’입니다. ‘깨우침’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죄인이었던 우리가 참된 평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작정, 언제나, 항상 고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한다. 함께 금식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껴본다. 그것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며칠 굶는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며칠 밥을 더 먹는다고 해서 구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이미 충분하고, 구원은 벌써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초대교회가 금식했던 이유는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대신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금식이라는 공로를 통해 주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고 금욕했던 이유는 인간인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며,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알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내 본래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면서 은혜를 구하려는 목적이었지,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을 도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오해해 왔습니다. 특별히 이런 과정에서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은 항상 관련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교회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어떤 고난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와 관련해 많은 주석가가 고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남겨진 또 다른 과제가 아닐까?’ 하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또다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1장 5절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고, 게다가 이 말씀을 읽던 당시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 넘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이 계속됩니다. 도대체 이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구약에 나오는 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속에서 탄원할 때가 많았습니다. 자신의 죄악 때문에,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못된 열매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받으며 부르짖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시고, 그들과 함께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시며 피할 길을 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들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언제나 자기 백성의 고통을 함께 받아내셨습니다. 이 내용이 이사야 63장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63:9 중, 새번역)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이 고통 당하신다는 것은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똑같이 고통을 느끼셨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하늘에 계시지만 고통을 느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과 더불어 한 가지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4 중,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와 연결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고난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미진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교회라고 하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위에 계시지만,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받는 이 고난이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미래의 지속적인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을 향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밝은 빛을 보고 고꾸라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 당시 사울이었던 그에게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교회는 예수님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그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바울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이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것을,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바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고통당하십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몰래 예배드리다 잡혀 고난을 당하면, 주님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중국에서 십자가가 내려지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핍박받게 되면, 주님께서 고통을 느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그 고난 말입니다.

< 교회의 고난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

이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늘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였고, 자신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때, 주님도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나타내거나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비판과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교회를 박해하고, 여러 방식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교회가 핍박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교회는 그렇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로 채우겠다. 그 고난의 자리에 함께하겠다.” 이어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5, 새번역)

참으로 기가 막힌 연결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을 내가 나의 육체로 채우겠다.”라고 비장하게 이야기한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핵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려 한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될 것이다.” 이것이 비장한 각오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교회가 박해와 지탄받는 중에도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 곧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함께 채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 이 자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향해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한 주간 동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로 채우겠다고 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함께 고난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금식이나 금욕, 구제나 헌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것,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데서부터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동참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HowDo We Participate in Suffering?

Colossians1:24

Dear Church, how have you been? I know some of you are worried for family members who are coming in from overseas. I am praying that God will keep us safe from Covid-19. But let’s also pray for the world. Let’s pray for the people all across the world suffering from the virus and despair.

Today is Palm Sunday which celebrates Jesus’ entry into Jerusalem.Riding a colt, Jesus willinglyentered into a path of great suffering, while His disciples and the crowd cheered, completely unaware of this willing sacrifice. Palm Sunday is followed by Passion Week. So, today I ask this question: “How should weparticipate in suffering?”

During Lent and Passion Weekour hearts are heavy. We think, ‘What must I do for my Lord who died on the cross for me?’ Many churches come up with programs to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 Believers fast, practice abstinence, refrain from weddings and festivities, and help the poor. We cannot say these traditions traced back to the early church are wrong. However, I would like to dispel some misconceptions we may have about them.

Lent and Passion Week are a time to remember the pain and suffering of our Lord and to give Him thanks. When we think of Christ who died for us, how can we go about enjoying all the things that we used to? From this perspective, the Christian traditions surrounding Lent and Passion Week are meaningful.

Yet, it is true that some unintended side effects and misconceptions have sprung up from these long traditions.During Lent, the forty days preceding Easter, the early church registered candidates for baptism and taught them the main principles of faith. These candidates were asked to display a strong resolution and fast one meal a day during Lent.

In the 4th century, Passion Week gained even more prominence as pilgrims traveled to Jerusalem. St. Augustine said that special days in the Bibles had to be kept strictly because the Gospel clearly recorded when Christ died and rose. As such, traditions surrounding Lent were observed—and are kept even to this day—with an aim to remember Christ’s pain and thank Him for His grace.

However, during the Middle Ages more traditions and conventions were added. In some regions people started to bear the cross physically and even whip themselves. Some even nailed their hands, a horrifying practice. During this time the overall atmosphere of Lent and Passion Week became more charged, but their true meaning distorted.

When connecting Lent and suffering, the Church always reminded Christians of this verse: “Now I rejoice in what I am suffering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ossians 1:24)

This verse written by Paul gave Christians the impression that Christ’s affliction was lacking in some way and they had to participate in His suffering to make it complete. And the Church made people take part in suffering by encouraging fasting, abstinence, and even whipping. But this later led to a spread of ideas that went against the gospel. For example, people began to think that one had to suffer and put oneself on the cross, like Christ, in order to be saved.

Then what is the true meaning of Paul’s confession in Colossians 1:24?

First, should we interpret it as implying that Christ’s work of salvation on the cross was incomplete and, therefore, we must make up for that lack to receive true salvation? No. The Bible does not teach us that Jesus’ work on the cross was incomplete. Far from it. Nor does it say that we have to do something more to be saved.

Jesus clearly said, “It is finished”(John 19:30) before he breathed His last. Our Lord did a perfect job of delivering us. In Hebrews it says, “Then he adds: ‘Their sins and lawless actsI will remember no more.’And where these have been forgiven, sacrifice for sin is no longer necessary.” (Hebrews 10:17-18)

The verses preceding today’s verse in Colossians also clearly testify to this:

“Once you were alienated from God and were enemies in your minds because of your evil behavior. But now he has reconciled you by Christ’s physical body through death to present you holy in his sight, without blemish and free from accusation.” (Colossians 1:21-22)

Then is Colossians 1:24 saying that if we follow Christ, we will suffer inevitably and live a hard life? Is it trying to say that a Christian’s fate is to suffer? No. When sinners become reconciled with God, they receive true peace.So, affliction is not the destination of faith.

Then what is the reason for fasting and suffering during Lent and Passion Week?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Many people fast to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 But these practices have nothing to do with our salvation.Our Lord’s suffering was enough to save us. Salvation has already been given to us. Then why do we fast and practice abstinence?

The early church did so not because they thought they could help Christ in His suffering. It was not their belief that their actions would ease His pain. They fasted and practiced abstinence because they wanted to realize, really know, just how weak and powerless humans are. Through fasting and abstinence, they wanted tounderstandjust how powerless they were to solve their needs and problems without external help.They wanted to exposehumans for who they really were and seek God’s grace accordingly. Their intention was not to help the Lord through their actions.

Nevertheless, many misperceptions developed during the Church’s long history. These undermined the true meaning of the gospel and undercut the significance of His precious blood and Jesus’ work of salvation. I am not saying that these traditions of fasting and abstinence are wrong. I am pointing out that their usage and interpretation may have been misguided.

Then what did Paul mean when he said,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Many exegetists have struggled with this verse because, literally, it may be interpreted as saying that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refers to a remaining suffering left to us in order to reach our salvation.

Second Corinthians 1:5 talks about suffering, too: “For just as we share abundantly in the sufferings of Christ, so also our comfort abounds through Christ.” Here Paul says that Christ’s suffering abounds in us.

Then what does this “suffering” or “Christ’s affliction” mean?

First, we must interpret their meani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Old Testament. In many places of the Old Testament, God says that He heard the cries of His people. And God acts to ease their pain and comfort them. He feels their pain as His. Isaiah says, “In all their distress he too was distressed,and the angel of his presence saved them.In his love and mercy he redeemed them;he lifted them up and carried themall the days of old.” (Isaiah 63:9)Colossians 1:24 is more easily understood from this perspective.

Also, a very important word appears in Colossians 1:24, which is“the church.”

“Now I rejoice in what I am suffering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ossians 1:24)

Paul links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to the churc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suffering? It does not mean that there is still more suffering to be done to save man. It does not mean that Christ’s work of salvation is lacking.

Yet, Paul says there is still something left in regard to His suffering. It is because His body, the Church, still has some suffering left. The Church is Jesus’ body. So, afflictions done to the Church are His afflictions.In Colossians 1:18 Paul says that Christ is “the head of the body, the church.” The Church is Christ’s body. Thus, the Church’s affliction is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Paul experienced this firsthand on his way to Damascus. When he was struck by a bright light, he heard Jesus say, “Saul, Saul, why do you persecute me?” (Acts 9:4) Jesus is saying that by persecuting believers Paul is persecuting Him. Paul would have realized then that the afflictions experienced by Christians are Christ’s afflictions. That is why Paul says that the Church is Christ’s body.

This rings true even today. When the Church is persecuted, Jesus is pained. The authorities of the world may not know this, but believers do. Jesus suffers when a believer in North Korea is caught and persecuted for worshipping Him. This is the remaining suffering of Christ. When the powers of the world persecute the Church, Christ suffers, too. This is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In this sense, our Christ in heaven will weep and suffer until the day He comes again. This is the suffering of Christ that is lacking.

Therefore, to say that we participate in Christ’s suffering means to participate in the afflictions done to the Church by the world. The early church was persecuted. Accordingly, just by becoming a believer or being a part of the Church, early Christians participated in the sufferings of the Church.

But Paul takes a step further. He says in verse 25, the one that immediately follows today’s scripture, “I have become its servant by the commission God gave me to present to you the word of God in its fullness.” (Colossians 1:25)Why does Paul say this? Paul says that he wants to fill up in his flesh what is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in verse 24. Then he goes on to say that he wants to present the word and become a servant of the church.

Yes. Paul is saying that filling up what is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is to build up the Church. He is talking about looking after the Church in each of our ways—through prayer, preaching the word, serving, and so on.

Dear congregants, during Passion Week let’s think about how “we”can fill up “what is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 Filling up this lack is not about fasting, abstinence, or penance. As God teaches us through Paul, it is to build up the Church. It is to participate in the persecution that the Church receives from the world. It is to share in the afflictionsthat Christ suffers because of the Church. In this sense, we may say we are participating in another form of Christ’s affliction by worshipping online, as we are unable to come to church during this hard time owing to the coronavirus.

Dear Church, I pray that during this Passion Week you will meditate deeply on Christ’s affliction. May you take part in the very suffering that He wishes you to participate in.

“Now I rejoice in what I am suffering for you, and I fill up in my flesh what is still lacking in regard to Christ’s afflictions, for the sake of his body, which is the church.” (Colossians 1:24)

btn_switch

골로새서 1: 24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

지난 한 주간도 평안하셨습니까? 성도 여러분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우리 교우 중에 코로나19로 확진되어 치료받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국에 거주하는 가족을 방문한 뒤 확진 판정을 받으신 권사님과 남편 집사님이 계속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또 영국에서 공부하다 들어온 대학생 친구 한 명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미국에 잠시 다녀온 찬양대원 한 분도 최근 확진 판정을 받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또 권사님 가운데 한 분의 자녀가 미국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고생하고 있는데, 아직 병원을 갈 수 없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이분들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속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제거해 주시길, 모두 안전하게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계실 테니, 이렇게 인사하면 어떨까요? “당신과 함께 예배하니 행복합니다.” 함께 예배하는 이 시간, 따뜻한 마음이 나누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가족과 함께, 또 사랑하는 이들과 손을 잡고 예배드리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아셨고, 비장한 각오로 들어서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한껏 고무되어 ‘호산나’ 찬양을 부를 뿐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되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이 지나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려주일에 이어 고난주간으로 넘어가면서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가.”
고난주간이 되면 우리 마음에도 거룩한 부담감이 생깁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주님께 무엇을 드릴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찬송가에도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주님이 고난을 당하셨는데, 나도 주님께 뭔가를 드려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자주 들리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자.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자.” 맞는 말이고,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금욕하기도 하고, 금식하기도 하며, 고난주간에는 결혼식도 금하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고난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구제와 자선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런 관습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기독교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고난주간은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고, 그분을 통해 허락된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 고난주간은 의미 깊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깊이 느끼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거스틴도 예수님의 수난사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날짜와 시간도 상세히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난절마다 그 날짜와 시간을 기억하며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

고난주간을 보내며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라고 말할 때, 자칫 오해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중세시대에 이러한 오해가 많이 불거졌습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곤 했는데, 점점 지원자들이 많아지면서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를 지려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예수님처럼 채찍을 맞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처럼 자신도 손에 못을 박겠다고 자원하는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이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을 마치 순교하는 것이라고,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감히 예수님과 똑같이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님을 본받겠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마는, 참으로 기괴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편 사순절과 고난주간,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1장 24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4, 새번역)

바울의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남아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분이 다 이루지 못한 고난의 잔을 우리가 함께 마셔야 한다는, 즉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이 말씀을 붙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고통스러운 자리에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채찍질하기도 하고, 금식과 금욕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고난을 느끼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느끼신 고통과 고난을 우리가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요? 과연 예수님이 바라시는 일일까요? 바울의 고백은 어떤 의미일까요? 물론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어 내려가다 보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고, 십자가를 서로 질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고, 그것만으로는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하고, 그렇게 할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구원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

성경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부족하다거나, 우리가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신포도주를 받으셨을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완전합니다.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이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7~18)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그 사건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선언합니다. 골로새서 1장 앞부분에도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골로새서 1:21~22, 새번역)

성경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화해케 하신 사역이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로 채우겠다.”라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고난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난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고통에 파묻히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평안’입니다. ‘평화’입니다. ‘기쁨’입니다. ‘깨우침’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죄인이었던 우리가 참된 평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작정, 언제나, 항상 고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기독교의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주간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한다. 함께 금식하고 고통을 느끼면서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느껴본다. 그것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며칠 굶는다고 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고, 며칠 밥을 더 먹는다고 해서 구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이미 충분하고, 구원은 벌써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초대교회가 금식했던 이유는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대신 느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금식이라는 공로를 통해 주님의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고 금욕했던 이유는 인간인 우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며, 얼마나 간사한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알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내 본래의 모습을 다시 확인하면서 은혜를 구하려는 목적이었지,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을 도우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오해해 왔습니다. 특별히 이런 과정에서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은 항상 관련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교회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 어떤 고난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까? 이와 관련해 많은 주석가가 고민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구원을 위해 우리에게 남겨진 또 다른 과제가 아닐까?’ 하는 관점에서 이 말씀을 또다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1장 5절에도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후서 1:5)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미 부활하셨고, 게다가 이 말씀을 읽던 당시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 넘친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이 계속됩니다. 도대체 이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구약에 나오는 관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 속에서 탄원할 때가 많았습니다. 자신의 죄악 때문에,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못된 열매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받으며 부르짖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시고, 그들과 함께해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시며 피할 길을 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주님은 그들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지만, 언제나 자기 백성의 고통을 함께 받아내셨습니다. 이 내용이 이사야 63장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63:9 중, 새번역)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이 고통 당하신다는 것은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똑같이 고통을 느끼셨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하늘에 계시지만 고통을 느끼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표현과 더불어 한 가지 눈에 띄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 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24 중,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와 연결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고난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미진한 것이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구원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이 ‘교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교회라고 하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입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위에 계시지만,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받는 이 고난이 그리스도가 받아야 할 미래의 지속적인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은 이 사실을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을 향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밝은 빛을 보고 고꾸라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 당시 사울이었던 그에게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의 몸 된 교회, 즉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교회는 예수님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 그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습니다. 바울은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이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이라는 것을,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바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고통당하십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몰래 예배드리다 잡혀 고난을 당하면, 주님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중국에서 십자가가 내려지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핍박받게 되면, 주님께서 고통을 느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그 고난 말입니다.

< 교회의 고난에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

이런 의미에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는 이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늘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교회가 고난을 받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였고, 자신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때, 주님도 함께 고통을 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날 이후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모든 것을 나타내거나 완전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비판과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교회를 박해하고, 여러 방식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교회가 핍박받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교회는 그렇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나의 육체로 채우겠다. 그 고난의 자리에 함께하겠다.” 이어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기신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5, 새번역)

참으로 기가 막힌 연결이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을 내가 나의 육체로 채우겠다.”라고 비장하게 이야기한 사도 바울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핵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려 한다. 나에게 맡겨진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될 것이다.” 이것이 비장한 각오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교회가 박해와 지탄받는 중에도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 곧 교회를 온전하게 세우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함께 채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예배당에서 함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 이 자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우리가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를 향해 비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한 주간 동안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로 채우겠다고 한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함께 고난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단순한 금식이나 금욕, 구제나 헌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것,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온전히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데서부터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동참이 고난주간을 보내는 모든 성도에게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0년 4월 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우리는 어떻게 고난에 참여하는가” (골 1:24)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51장, 92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골 1:24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아직 못 이룬 고난, 그로인해 못 다하신 구원 사역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설교의 요약

   기독교 역사 속에서 고난주간은 주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재연하면서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간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귀한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석의 사상을 만들어 가게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위하여 스스로 그리스도처럼, 고통스런 자리에 자신을 두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금욕과 금식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비복음적인 생각을 퍼트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미진한 어떤 사역이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그렇다면 왜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금욕을 하며 고행을 하는 것입니까? 초대교회가 사순절에 금식한 것은 그것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 아닙니다. 주님의 고통을 덜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다시 주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남은 고난이 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중요한 단어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골 1:24,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인 교회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고난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부족한 구원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남겨진 고난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그 교회에 남겨진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교회가 받는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8에서 바울은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새번역)라고 말합니다. 이 교회가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의 남겨진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 예수님이 고통스러워하십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파하게 하시려고 내게 맡겨진 사명을 따라,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골 1:25, 새번역).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함께 지는 일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전하는 일로, 기도하는 자는 기도하는 일로, 봉사하는 자는 봉사하는 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돌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고민하십시다. 그것은 금식이나 금욕이나 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을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께서 교회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시는 그 고통을 나누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누기

 1. 매년 고난 주간이 다가오면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셨습니까? 

 2. 오늘 말씀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어떻게 교회를 세우시겠습니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주님께서 이 땅에 남겨두신 주님의 몸, 주님의 교회를 잘 지켜내며 고난에 동참하는 귀한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Connection Car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