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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망

요한복음 3: 16

서정운 목사

2022.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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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 16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 믿는 자로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와 평화와 능력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시길 빕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까? 오늘 본문이 해답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약 80년 전,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웠던 복음의 진수를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예수 믿고 죄사함받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어떤 뜻입니까? 오늘 말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대양 육대주의 빈부귀천, 유무식의 차별 없이 듣고 믿고 구원받아야 할 복음, 나사렛 예수와 갈릴리 어부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이 복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고 의지하면 용서받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정죄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대속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 아무리 크고 무겁고 추악한 죄라도 정죄와 심판이 없습니다. 심판에서 자유합니다. 이것은 합리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회개하고 죄사함받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지나간 자신의 허물과 죄를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모습은 도덕적일지는 몰라도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선포하셨습니다.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이죠. 은혜입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구속받은 사람이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고 괴로워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 진리는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찝찝하다, 힘들다, 생각난다 등 감정의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골 3:15 중)” 하신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속죄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믿고, 영적으로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단 사이비들의 유혹과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패잔병처럼 왔다갔다 허둥대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당당하게 증언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도 용서받고 심판에서 자유하다고 하십니다. 앞으로 어떤 죄를 지을지 알 수 없는데 이미 용서받고 심판에서 자유하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속죄 제사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마다 예수님께서 갈보리산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시는 게 아닙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4절 말씀대로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단번에, 영원히, 온전케 한 속죄 제사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도말한 제사입니다. 반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이 은혜는 영원히 유효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기서 ‘영생을 얻었고’라는 말씀은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된다는 것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리니’는 미래에 대한 약속이자 보장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말씀은 상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사망의 지경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너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신분, 처지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가령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원수지간이 부자지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으나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영생 얻은 자는 그의 말과 인격, 삶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경고합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심판받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용서가 보장된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는 있지만 단연코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죄 짓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바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이지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아 의인이라 인정받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선포된 복음처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8:1~2)” 그렇습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성취되는 특혜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이 우리만의 소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누고 전파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이 소망 안에서 살게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 중)”고 하셨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중)”고 분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선교사는 아니지만 선교적 존재입니다.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현존하는 그곳이 우리의 선교 현장입니다. 그곳이 우리의 예루살렘이요 유대요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머무는 자리에서 약 1,2m 안에 일어납니다. 우리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을 함께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선교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말’로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시고 왕이시며 소망이심을 말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말씀한 대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인격과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벧전 3:15~16 중)”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그리스도인들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유가 곧 그들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에 의해 인도되어 교회에 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아니면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시라는 인격적 진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는 이 주장은 지식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살아 역사하는 인격적 진리입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실질적으로 부흥했던 시기에는 신도들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신뢰받았습니다. 사도행전 기록을 보면 별로 가진 것도 보잘 것도 없었던, 심지어 당국의 억압까지 받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였지만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자의 수를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기록합니다(행 2:47).
중국 교회 역사상 교회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는 1930년대 말 선교사들이 떠나고 중일전쟁이 끝나고 공산치하 공산군과 국군이 싸우고 그 다음에 개방되기 시작한 7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 실제로 부흥했습니다. 그때에는 선교사도 없었고 제도적인 교회도 없었던 때입니다. 신학교도, 기독교학과 이런 것조차 없던 시절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지하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자란 사람들 이야기 들어 보면 부모들 몰래 집 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서로를 살피고 위로하고 돕고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동네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좋아하기 시작합니다. 칭송합니다. 교회가 개방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아무것도 몰라도 사람들 보면서 몰려왔던 것입니다. 세상이 날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소망교회는 소망교회 예배당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시하고 주목하는 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격과 삶입니다. 그들이 주시하고 주목하고 경청하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이 체감하는 소망교회는 주님 말씀과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여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1990년대 말, 제가 중국 청도대학교에 갔던 이야기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당시 장신대 교수 몇 분들과 함께 공동 연구 문제로 회의를 하던 중에 한 중국 교수가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기독교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뜻밖의 질문에 내심 놀랬습니다. 무신론자인 공산당원의 물음에 속으론 의아해 하며 5분 정도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리고 제가 반문했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랬더니 그 교수님 강의에 들어오는 한국인 유학생 한 분이 있는데 매우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선량했던 여학생이라는 거예요. 알고 보니 그 여학생이 기독교인이어서 기독교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금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교수 한 분도 그 여학생을 두고 훌륭하다고 칭찬했습니다. 인격과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심을 증거한 유학생이었습니다. 다음 주일날, 그 이야기를 듣고 청도 한인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제가 “혹 그분이 여기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찬양대석에서 손을 들었습니다. 혹시 그때 그분이 여기에도 계십니까?
과연 우리는 소망교회와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야기로 남을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시라면, 우리는 날마다 복음적으로 더 긴장하고 복음적인 일에 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호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와 보혜사 성령님의 능력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합시다.

2022년 7월 1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우리의 소망” (요 3:1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98장, 30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3:1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1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예수님이 왜 우리의 소망일까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복음의 핵심이자 왜 예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는지에 대한 해답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익히 들어 아는 이 말씀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그 소망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설교의 요약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회개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에겐 과거 모든 죄를 용서받고 더는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이거나 도덕적, 종교적 교훈이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면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다시 기억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복음적이 모습이 아닙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죄도 용서받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그 은혜는 지속적으로 유효합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다는 오해를 가져와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대적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범죄 하는 일이 없습니까? 우리는 넘어지고 실수하고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고 뉘우치고 다시 바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아 의인이라고 인정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하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되는 특혜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들만의 소망으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구원받고 이 소망 안에 살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자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증거 해야 할까요? 우리 안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는 것은 지식이나 사상, 이념이 아닙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인격적 진리입니다. 세상이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는 교회는 예배당도, 교회 이름도 아닙니다. 세상이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실체인 교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이유가 그리스도인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중요한 과정과 이유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입니까?

 

나누기

1. 내가 전한 생명의 복음을 통해서 누군가 소망을 갖고 변화된 일이 있습니까?

2. 돌아볼 때 나는 교회와 세상 속에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까?

 

마무리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유일한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통해 다시 붙듭니다. 나를 자유케 했고, 변화시키며 새사람으로 세우신 그 은혜를 오늘도 입술로 증언하며 인격과 삶으로 그 생명을 나타내 보이는 주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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