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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대하는 법

누가복음 6:27~31

김경진 목사

2025.06.22

<원수를 갚은 것은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원수를 대하는 법”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께서는 제가 오늘 어떤 설교를 할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법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젊은 관원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너무나 무거워서 관원을 근심하며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주 쉬운 말씀 같지만,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하도 들어서 이제는 평범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깊은 본성과 세상의 방식을 역으로 가로지르는 혁명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누가 그리스도인다울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은 “과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기독교 진리에서 핵심과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갚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당연히 갚아야 하겠죠.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던 것도 당연히 갚아야 할 것입니다. 결혼식에 받은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받은 부의금도 늘 빨리 갚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또한 빌린 돈도 당연히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갚고 싶은 유혹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수를 갚고 싶은 충동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꼭 갚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호의나 내가 진 신세도 천천히 갚아도 될 것 같은데, 원수 갚는 일은 반드시 갚아야 할 것 같고 미루고 싶지도 않습니다. 즉시 갚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우리 삶 저변에 마치 상식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을 얌체같이 하면 따라가서 응징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가서 심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특별히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있지도 않은 소문이 나거나 허위 사실이 유포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응징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됩니다. 꼭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원수를 갚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개역개정)

이 말씀을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새번역)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뜻입니다. 개혁한글성경에서 신명기 말씀은 실감 나게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신 32:35,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보수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대하는 태도를 여러 방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주께 맡기고, 원수와는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잠 25:21~22)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배고파하거나 목말라하거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핀 숯을 그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이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숯을 머리에 올려놓는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의 낯을 뜨겁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머리에 숯을 올려놓으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시시각각 타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하겠습니까? 원수를 잘 대접하면 도리어 원수가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우리는 부담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 5:38~39a)

악한 자를 상대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를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무시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39b~42)

심지어 잠언 24장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잠 24:17, 19)

왜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잠 24:18)

왜 행악자를 보면서 우리는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까?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 24:20)

<원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 안에 속한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28)

주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시는 것일까요?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의 권한이니 침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 하나뿐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우선 하나님은 나에게 못되게 하는 사람들, 악인들, 원수들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은 비록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을 해하고 못된 짓을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짓고 악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죠.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요나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원수 같은 나라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 합니다. 결국에는 잡혀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죠.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요나는 성읍 동쪽에 한 자리를 잡고 올라가 앉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성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죠.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늘을 지게 해 주십니다. 요나는 그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벌레가 박넝쿨을 모두 갉아 먹고 맙니다. 그러자 요나의 머리에 해가 쪼이게 되고 생각이 혼미해지면서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욘 4:10~11)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원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아직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내가 포기하고 싶은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이 된 사울이죠. 스데반이 설교하다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용서의 기도, 원수를 사랑하는 기도, 박해하는 자를 위한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9~60)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 8:1)

스데반이 죽어 가던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죠. 그러나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 때문이었을까요? 사울은 훗날 바울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이루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아니 더 큰 일을 감당하는 큰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의 모든 삶을 정리하며 그때를 돌아보면서 바울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b~16)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나 같은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 동참했던 나를 오래 참아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를 잘 갚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원수를 갚으시는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이 더디게 느껴질 때가 있죠. 그래서 내가 먼저 직접 원수를 갚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일들마저도 선을 위해 사용하시기에, 우리가 그 악을 직접 갚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나 억울한 일이 도리어 선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악인의 행동입니다. 원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때로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원수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하죠. 요셉에게 원수는 누구였습니까? 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생인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고, 결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수와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가서도 아마도 형들만 생각하면 오랫동안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형들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지’, ‘어떻게 같은 피붙이로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두고두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형들을 혼내 주고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는 어떠합니까? 요셉을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리어 누명을 씌워서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잠시 감옥에 있었습니까? 계산해 보면 적어도 13년 정도는 감옥에 꼬박 있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보낼 수 있습니까?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 아마도 그 시간 동안 보디발의 아내만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 올라왔겠죠. 그런데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도 원수 갚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면,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 충분히 보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원수 갚는 일이 남겨 있지 않았습니다. 먼 훗날 요셉이 원수와 같은 형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원한을 갚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창 50:19~21a)

하나님은 나를 힘들게 만든 원수 같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악인이 사용된 것입니다. 원수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 일을 통해서 도리어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났다는 고백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기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으로 요셉을 감옥에 넣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고난, 억울한 일, 악한 일들을 통해서 받게 되는 고통과 억울함 등은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 가시는 또 다른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원수 때문에 그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큰 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조금 비약하여 해석하면, 원수가 없으면 나에게 잔칫상도 차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6·25전쟁 75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아편이라 부르며 기독교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가족들을 놓고 남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신앙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남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을 거쳐야 했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졌고, 그리고 그들은 원수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종종 우리는 때마다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아 잊으랴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그날을…” 원수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아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찾아 내려왔던 우리에게 큰 상이 원수들 앞에 차려져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닙니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나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온 원수를 용서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나의 모든 재산을 속여 빼앗아 가 버린 못된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를 모함하여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은 못된 사람을 정말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할 수 없지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정말 원수 때문에 모든 마음과 정신, 영혼이 잠식당해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했습니다. 사업의 문제로 사업의 실패하고, 그것 때문에 원수들이 생겨난 사람들. 결혼과 이혼의 과정에서 원수들이 생겨나고, 또 재산 문제로 가족 간에 원수가 된 이들, 그래서 마음속에 원수를 어떻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원수를 갚고 싶은데, 그 원수가 도리어 나를 지배하고 평안을 빼앗아 버려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나, 죄인 중에 괴수,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요 불의한 자인 나,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나. 그런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경험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 때만 이 말씀들은 진정 다른 말씀이 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b~28)

이 명령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구해 주신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마음속에 받아들입니다. 나를 용서하신 주님, 나 같은 죄인도 기다리시고 받아 주신 주님. 그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오래 인내해 주셨는데, 내가 어찌 내 미워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을 기억하면 어떻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마음으로 원수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인권 운동을 하다가 1962년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석방될 때는 1990년이었습니다. 약 28년여 동안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원수를 갚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처단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을까요?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며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시대를 열어 갔습니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죠. 정말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내게 맡겨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왜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은 그것은 원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마음이 담긴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잘 되게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때 원수에게 노예 되어 있던 마음이 해방을 얻고 참다운 평안과 은혜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명이 아닙니다. 치유 처방책입니다. 평안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How To Treat Your Enemies

Luke 6:27-31

The title of today’s message is “How to Treat Your Enemies.” Those of you sitting here will probably have a good idea of what I will be preaching about. How should we treat our enemies? What does the Bible teach us about this question? “Love your enemies.” Yes, I have told you the answer. I guess I can just conclude my sermon now.

“Love your enemies!” This word of our Lord that every Christian knows only too well, this command that feels even almost “ordinary” after hearing it too many times, is actually, however, a revolutionary teaching that goes against the very grain of our nature and the way of the world.

Love your enemies? Can we really accept this word submissively? Can we put this command into practice?

Living in this world, we find that some things simply must be repaid. The love and grace we receive from our parents are an example. We must also repay those whom we owe. The congratulatory and condolences money we get at weddings and funerals feel like a debt to us; we feel we have to repay them. Of course, any monetary debts must be repaid. Yet, there is another urge within us, one much more powerful than our obligation to repay a favor: to pay back our enemies.

Repaying our parents love and grace does not feel like an urgent matter. Neither do paying back a loan or returning a favor. But paying back a wrong done to us by an enemy feels like something that must be done and not be put off. How strange it is.

This desire for vengeance has become common sense, something natural and fitting that flows like an undercurrent in our lives. When you see selfish, rule-breaking drivers, you want to catch up with them and retribute.

When you see someone do wicked things, you are infuriated. Particularly, when we are wronged, when someone spreads false rumors about us, or when someone deliberately puts us in trouble over which we spend sleepless nights, we get fixated on how we might take revenge. We want our revenge to be proportionate to the wrong done to us.

These days, people seem to want to take revenge for all sorts of reasons. However, this is what our Lord says to those who wish to do so:

“Do not take revenge, my dear friends, but leave room for God’s wrath, for it is written: ‘It is mine to avenge: I will repay,’” (Romans 12:19)

Our Lord’s word given to us through Paul is clear. God does not want us to take revenge on our enemies ourselves; instead He wants us to leave that problem with God. When we are wronged and feel an urge to right that wrong, we must not try to take revenge ourselves, but must leave the matter of vengeance with God.

God clearly said, “It is mine to avenge.” The NLT says, “I will take revenge.”

God says vengeance is His work. Vengeance is God’s authority. Deuteronomy 32:35 vividly describes this fact as follows:

“It is mine to avenge; I will repay. In due time their foot will slip; their day of disaster is near and their doom rushes upon them.” (Deuteronomy 32:35)

God says that since it is He who will carry out vengeance on behalf of those who want it, His people must entrust the matter with God. Yet we want to take revenge ourselves. This is a violation of God’s authority and jurisdiction.

Then how must we treat our enemies? This is what Proverbs 25 says:

“If your enemy is hungry, give him food to eat; if he is thirsty, give him water to drink. In doing this, you will heap burning coals on his head, and the LORD will reward you.” (Proverbs 25:21-22)

Let’s say there is a man you despise. If he is hungry or thirsty, you must provide him with necessities. Then you will be piling up coal on his head, and God will ultimately repay.

Heaping burning coal on someone’s head can be interpreted as making that person feel flushed, ashamed, by making shame fall on him. So when we treat our enemies well, we will end up making them feel ashamed. Even without doing something vengeful, we will see God repay them for their evil.

Jesus also said: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 But I tell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 (Matthew 5:38-39a)

Jesus tells us not to resist the wicked. We should not fight against them. This is what Jesus teaches instead:

“If anyone slap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them the other cheek also. And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shirt, hand over your coat as well. If any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them two miles. Give to the one who asks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the 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Matthew 5:39b-42)

Proverb 24 even teaches us this:

“Do not gloat when your enemy falls; when they stumble, do not let your heart rejoice, […] Do not fret because of evildoers or be envious of the wicked,” (Proverbs 24:17, 19)

Why should we refrain from rejoicing when our enemies fall? It is because “the LORD will see and disapprove and turn his wrath away from them.” (Proverbs 24:18)

Why should we refrain from being infuriated when we see wicked people committing evil acts? Why does Jesus tell us not to envy the wicked when they prosper? The Bible says: “for the evildoer has no future hope, and the lamp of the wicked will be snuffed out.” (Proverbs 24:20)

In short, Jesus is teaching us not to pay attention to the wicked or to our enemies and is telling us not take revenge. He wants us to treat them well like every other person. And Jesus commands us to leave the retribution and judgement with God.

Furthermore, our Lord commands us the following through today’s passage:

“But to you who are listening I say: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pray for those who mistreat you.” (Luke 6:27-28)

Why does our Lord give us such a command? Does He just mean that we should not trespass on His authority of taking revenge? Is that what He means? No. There are several important reasons why our Lord commands us to love our enemies.

First, God desires to save even those who wrong us, the wicked, and our enemies.

Although they may now be committing evil, hurting others, doing wicked things, ignorant of God, living a life of sin and evil, God wants to save even such people. This is why He commands us not to take revenge ourselves.

You remember Jonah who went to Nineveh and proclaimed God’s judgement on that city. Jonah initially didn’t want to go there. He was bitter about God wanting to save a country that was like an enemy to his people. So he fled to Tarshish only to be caught and brought back by God to preach His message to the people of Nineveh. After proclaiming God’s judgement to the people of Nineveh, Jonah sits down in a spot east of the city to see what would happen to it. At first, he is pleased with the gourd vines that God grows to give him shade. But when a worm destroys the vines and the shade, leaving him in the scorching heat again, he becomes frustrated and complains to God.

And this is what God says to him at that moment: If you are concerned about this plant that withers overnight, “should I not have concern for the great city of Nineveh,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a hundred and twenty thousand people who cannot tell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and also many animals?” (Jonah 4:11)

God wants to save one soul more: He waits for one more sinner to return to Him. Of course, God shall judge the wicked on the last day and establish justice. However, until then, He is patient with them, waiting for them to return to Him.

There was a man whom God gained through such patience: Paul.

When Stephen was stoned to death for preaching about Jesus, he prayed for those who were stoning him even as he was dying. He literally prayed for his persecutors. Stephen’s prayer was for his enemies. Acts 7 describes the scene as such:

“While they were stoning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Then he fell on his knees and cried out, ‘Lord, do not hold this sin against them.’ When he had said this, he fell asleep.” (Acts 7:59-60)

After this scene, this is what it says in Acts 8:1:

“And Saul approved of their killing him.” (Acts 8:1)

Paul was there at the very scene of Stephen’s murder. In fact, Paul was one of the murderers. Paul was Stephen’s enemy, his persecutor, his murderer.

But was it perhaps because of Stephen’s prayer of forgiveness? Or because of Stephen’s prayer for his enemies?

After becoming an apostle of Christ, Paul later does even greater things than Stephen. As Paul looks back on his life, he confesses: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of whom I am the worst. But for that very reason I was shown mercy so that in me, the worst of sinners, Christ Jesus might display his immense patience as an example for those who would believe in him and receive eternal life.” (1 Timothy 1:15b-16)

Paul is saying that Jesus, through His patience, chose and used a person like himself, the worst of sinners.

There are times when it seems God is not taking revenge on our enemies. God’s judgement and retribution seem slow in coming. So we are tempted to take matters into our own hands. But God commands us to leave vengeance up to Him. Because, among the evil, there are souls He desires to save.

The second reason God tells us to leave vengeance with Him is because the trials and wrongs we experience are, at times, used for good. We may meet enemies in the process of God’s will being fulfilled, but His providence will ultimately prevail. Therefore, there is no need to take revenge on, or vent anger against, our enemies.

Joseph was a case in point. Who were Joseph’s enemies? Weren’t they his own brothers who tried to kill him and sold him into slavery? During his years in Egypt, Joseph would have trembled in fury at the mere thought of them. Perhaps, after becoming prime minister, he wanted to take revenge on them by going back home and seeking them out. But Joseph didn’t do that.

And what about Potiphar’s wife? She was the one who sent him to prison by falsely accusing him, after trying and failing to seduce him. How wicked! In prison, he would have felt deeply angry and bitter whenever he thought of her. Yet, he did not seek vengeance against her after becoming the second most powerful man in Egypt. If there remained any desire for vengeance against his enemies, Joseph would have acted upon it after becoming such a powerful person. But he did not have such thoughts.

Later, his enemy-like brothers confronted him because they were afraid that he might want to take revenge on them. But this is what Joseph said:

“Don’t be afraid. Am I in the place of God? You intended to harm me, but God intended it for good to accomplish what is now being done, the saving of many lives. So then, don’t be afraid.” (Genesis 50:19b-21a)

Joseph is confessing that God used his enemies, who hurt him, to guide him to a better, higher place. In other words, the wicked are used in the course of fulfilling God’s will. Even though my enemies tried to harm me, God’s great work was done through what they did.

If Joseph’s brothers had not sold him to slave traders and if he had not been incarcerated due to Potiphar’s wife’s false testimony, he would not have become the prime minster of Egypt. Therefore, everything—including trials, wrongs, pain inflicted by wicked people, and injustice—serves as God’s tool to mold us; accordingly, we can accept it all with joy. Therefore, our enemies are a pathway of blessing.

Aren’t these the lyrics of Psalm 23 that we know so well? “You prepare a table before me in the presence of my enemies.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Psalm 23:5)

Thanks to our enemies we receive a table God prepares for us. Our enemies will see this and envy us. So our enemies are a tool God uses to give us a great feast. They are a pathway through which we receive a great table. Therefore, with this faith, we can leave it up to God to take revenge on our enemies. And even when we experience injustice and meet wicked people, we can withstand and give thanks.

Yet, despite all this, we cannot love our enemies. How can we love our enemies? This is truly hard and burdensome for us.

Realistically, it is hard. We may be able to say we love our enemies on a superficial level. But can I really forgive and love the man who murdered my child? Can I love the wicked person who falsely accused me and destroyed my life?

No, we cannot. This command to love our enemies is humanly impossible to follow; it is an impossible demand. That is why we are confused.

Then can we really love our enemies? Can we pray for them? If we are to love our enemies, one fact must be felt and experienced from the depths of our hearts. This must be felt neither in theory nor in thought. In the midst of our utter despair and struggle that we cannot love our enemies out of our own will, we must see the Cross of our Lord who saved even a sinner such as me.

We must be able to see the love of our Lord who gave His life on the Cross for us—the worst of sinners and an enemy of God who turned from Him, lied, killed, and was unrighteous—so that we would be reconciled with God. Only then can the word of our Lord to love our enemies enter our hearts.

We must look at this command again, holding on to the Cross.

“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John 13:34)

“But to you who are listening I say: Love your enemies, do good to those who hate you, bless those who curse you, pray for those who mistreat you.” (Luke 6:27-28)

This command to love our enemies comes from our Lord, who was crowned with thorns, was flogged, was pierced on the Cross, and said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Luke 23:34)

If my Lord forgave me, waited for a sinner like me, received me, and was patient with me, how can I not be patient with, withstand, wait for, pray for, and love the people I hate, who inflicted pain on me and was like an enemy to me?

This is the heart we need.

How must we deal with our enemies? Our Lord tells us to leave vengeance with Him, for He will repay; He commands us to love our enemies and pray for them. Let us remember this command and word of God. As we remember the precious blood that Jesus shed for us and His grace that received even a sinner like us, let us love our enemies too.

May we at Somang Church seek out the blessings hidden in our enemies and thank God for His great provid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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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27~31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원수를 갚은 것은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원수를 대하는 법”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께서는 제가 오늘 어떤 설교를 할지 이미 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법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오늘 설교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젊은 관원에게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실 너무나 무거워서 관원을 근심하며 돌아가게 했습니다. 그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주 쉬운 말씀 같지만, 우리를 근심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하도 들어서 이제는 평범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우리의 깊은 본성과 세상의 방식을 역으로 가로지르는 혁명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누가 그리스도인다울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의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은 “과연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리스도인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기독교 진리에서 핵심과 같은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갚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당연히 갚아야 하겠죠.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던 것도 당연히 갚아야 할 것입니다. 결혼식에 받은 축의금이나 장례식에 받은 부의금도 늘 빨리 갚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또한 빌린 돈도 당연히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갚고 싶은 유혹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원수를 갚고 싶은 충동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는 꼭 갚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받은 호의나 내가 진 신세도 천천히 갚아도 될 것 같은데, 원수 갚는 일은 반드시 갚아야 할 것 같고 미루고 싶지도 않습니다. 즉시 갚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우리 삶 저변에 마치 상식처럼 스며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운전을 얌체같이 하면 따라가서 응징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가서 심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특별히 내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있지도 않은 소문이 나거나 허위 사실이 유포되어 곤경에 처했을 때, 밤잠을 설치며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 응징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됩니다. 꼭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마음속에 가득 차곤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원수를 갚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19)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주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친히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말고,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개역개정)

이 말씀을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새번역)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라는 뜻입니다. 개혁한글성경에서 신명기 말씀은 실감 나게 이 사실을 말씀합니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신 32:35, 개역한글)

하나님께서 보수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원수를 대하는 태도를 여러 방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원수 갚는 일을 주께 맡기고, 원수와는 어떤 관계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잠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 (잠 25:21~22)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배고파하거나 목말라하거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핀 숯을 그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이 될 것이고, 결국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숯을 머리에 올려놓는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의 낯을 뜨겁게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끄럽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머리에 숯을 올려놓으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시시각각 타오르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하겠습니까? 원수를 잘 대접하면 도리어 원수가 초조하고 불안해집니다. 우리는 부담스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마 5:38~39a)

악한 자를 상대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를 생각하지도 말고 그냥 무시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39b~42)

심지어 잠언 24장은 이렇게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잠 24:17, 19)

왜 원수가 넘어질 때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잠 24:18)

왜 행악자를 보면서 우리는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까?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잠 24:20)

<원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과 계획 안에 속한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28)

주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시는 것일까요?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의 권한이니 침범하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 하나뿐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우선 하나님은 나에게 못되게 하는 사람들, 악인들, 원수들도 구원하고자 하시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금은 비록 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을 해하고 못된 짓을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을 모르고 죄를 짓고 악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들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직접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이야기가 그 사실을 우리에게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죠.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요나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원수 같은 나라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 합니다. 결국에는 잡혀서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죠.
니느웨에 하나님의 심판을 전한 요나는 성읍 동쪽에 한 자리를 잡고 올라가 앉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성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죠.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예비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늘을 지게 해 주십니다. 요나는 그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다음 날 벌레가 박넝쿨을 모두 갉아 먹고 맙니다. 그러자 요나의 머리에 해가 쪼이게 되고 생각이 혼미해지면서 불평하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욘 4:10~11)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원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아직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내가 포기하고 싶은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에게 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의를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끝까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이 된 사울이죠. 스데반이 설교하다가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스데반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죽이는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용서의 기도, 원수를 사랑하는 기도, 박해하는 자를 위한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 7:59~60)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행 8:1)

스데반이 죽어 가던 그 자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인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이었죠. 그러나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 때문이었을까요? 사울은 훗날 바울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이루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아니 더 큰 일을 감당하는 큰 사도가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의 모든 삶을 정리하며 그때를 돌아보면서 바울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5b~16)

하나님께서 죄인 중에 괴수 같은 나 같은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 동참했던 나를 오래 참아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를 잘 갚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원수를 갚으시는 속도가 너무 느리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보응이 더디게 느껴질 때가 있죠. 그래서 내가 먼저 직접 원수를 갚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일들마저도 선을 위해 사용하시기에, 우리가 그 악을 직접 갚지 않아도 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나 억울한 일이 도리어 선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악인의 행동입니다. 원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는 일들이 때로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원수에 대한 원한이나 분노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하죠. 요셉에게 원수는 누구였습니까? 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생인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고, 결국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버렸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수와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요셉은 애굽에 팔려 가서도 아마도 형들만 생각하면 오랫동안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형들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지’, ‘어떻게 같은 피붙이로서 나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두고두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형들을 혼내 주고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보디발의 아내는 어떠합니까? 요셉을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자 도리어 누명을 씌워서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잠시 감옥에 있었습니까? 계산해 보면 적어도 13년 정도는 감옥에 꼬박 있어야 했습니다.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보낼 수 있습니까?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 아마도 그 시간 동안 보디발의 아내만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 올라왔겠죠. 그런데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도 원수 갚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원수 갚는 일이 마음에 남아 있었다면, 요셉은 총리가 되고 나서 충분히 보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원수 갚는 일이 남겨 있지 않았습니다. 먼 훗날 요셉이 원수와 같은 형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형들은 요셉이 자신들에게 원한을 갚지 않을까 두려워하며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창 50:19~21a)

하나님은 나를 힘들게 만든 원수 같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악인이 사용된 것입니다. 원수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 일을 통해서 도리어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났다는 고백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팔아넘기지 않았더라면, 보디발의 아내가 모함으로 요셉을 감옥에 넣지 않았더라면, 요셉은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고난, 억울한 일, 악한 일들을 통해서 받게 되는 고통과 억울함 등은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 가시는 또 다른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의 말씀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원수 때문에 그가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차려 주시는 큰 상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조금 비약하여 해석하면, 원수가 없으면 나에게 잔칫상도 차려지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6·25전쟁 75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종교를 아편이라 부르며 기독교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가족들을 놓고 남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신앙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 남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한국 전쟁을 거쳐야 했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졌고, 그리고 그들은 원수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종종 우리는 때마다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아 잊으랴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그날을…” 원수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힘들게 살아왔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75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자유를 찾아 내려왔던 우리에게 큰 상이 원수들 앞에 차려져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닙니까? 그러하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앞에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이론적으로는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나의 삶에 깊숙이 파고들어 온 원수를 용서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말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나의 모든 재산을 속여 빼앗아 가 버린 못된 인간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를 모함하여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놓은 못된 사람을 정말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사랑할 수 없지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정말 원수 때문에 모든 마음과 정신, 영혼이 잠식당해 있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했습니다. 사업의 문제로 사업의 실패하고, 그것 때문에 원수들이 생겨난 사람들. 결혼과 이혼의 과정에서 원수들이 생겨나고, 또 재산 문제로 가족 간에 원수가 된 이들, 그래서 마음속에 원수를 어떻게 떨쳐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고통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원수를 갚고 싶은데, 그 원수가 도리어 나를 지배하고 평안을 빼앗아 버려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는 절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는 나, 죄인 중에 괴수,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요 불의한 자인 나,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나. 그런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하고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경험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들 때만 이 말씀들은 진정 다른 말씀이 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6:27b~28)

이 명령은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시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도 구해 주신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다시 마음속에 받아들입니다. 나를 용서하신 주님, 나 같은 죄인도 기다리시고 받아 주신 주님. 그 주님께서 나 같은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오래 인내해 주셨는데, 내가 어찌 내 미워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원수 같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주님을 기억하면 어떻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마음으로 원수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인권 운동을 하다가 1962년에 감옥에 들어갔다가, 석방될 때는 1990년이었습니다. 약 28년여 동안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원수를 갚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처단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을까요?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며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시대를 열어 갔습니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죠. 정말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갚지 말고 내게 맡겨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왜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은 그것은 원수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서입니다. 내가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마음이 담긴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잘 되게 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그때 원수에게 노예 되어 있던 마음이 해방을 얻고 참다운 평안과 은혜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계명이 아닙니다. 치유 처방책입니다. 평안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담고 실천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원수를 대하는 법” (눅6:27~31)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301, 29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내게 원수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고자 노력해본 적이 있습니까?

<설교의 요약>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하나님께서 갚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잠언의 말씀은 원수의 필요를 채워주라 합니다. 그래서 원수가 부끄럽게 만들고,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와 상대하지 말라,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하셨습니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고, 분을 품지도 말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령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악을 행하며 살지만, 하나님은 그들도 구원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사람들까지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이라도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그를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내가 당하는 고난이나 억울한 일이 도리어 선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원수를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있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누명을 씌웠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마음에는 원수 갚는 일만 있지 않았습니다. 훗날 총리가 되고 원수같은 형들을 만났을 때에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원수는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통로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에서도 원수는 내가 잔치 상을 받게 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벅차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라 하시며 주신 새계명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참아주시고 용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미워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라도 참아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보혈과 은혜를 생각하며 원수도 사랑합시다. 원수 안에 숨겨진 축복을 도리어 찾아내고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소망합시다.

  

<나누기>

  1. 하나님께 원수 갚은 일을 맡기거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을 기대하고 소망하거나,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이라도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며, 원수 사랑을 위해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오셔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도록 십자가 위에서 보혈을 흘리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원수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주님,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도 무거운 마음으로 받아 듭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부족하오니,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깊이 경험되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은혜에 감격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믿음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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