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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태복음 5: 43~48

김경진 목사

2023.06.25

<원수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몇 장의 사진을 보내 주셨습니다.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찍으신 사진이었습니다. 아마 6·25를 생각하시면서 그곳을 방문하신 듯 보였습니다. 특별히 사진 속 바닥에 새겨진 한 글귀가 저의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주년이 되었습니다. 꼭 그렇게 된 날이네요. 6·25가 주일에 발발했는데 마침 오늘 6월 25일도 주일이다보니 의미가 더욱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야 북한이 남침하고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73년이 흘렀으니 당황스러웠던 시간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가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 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학창 시절에 6·25전쟁을 기억하는 행사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북한의 만행을 떠올린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한 민족을 향하여 총을 겨눌 수 있는지, 탱크를 몰고 진격해 내려올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치밀한 준비 끝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0분경,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된 53년 7월 27일까지 꼬박 3년 1개월 2일에 걸쳐 한국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3년여 동안 코로나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꼭 그 정도의 기간만큼 한반도에서 전쟁을 경험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추산이 있습니다마는 소련에 따르면 북한에서만 113만명이 사망하였고, 남북 합하여서 약 250만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사망한 군인도 한국군 13만명, UN군 4만명,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18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또 20만명의 전쟁미망인, 10만의 전쟁고아, 1천여 명의 이산가족이 만들어졌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에 대한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는 핵무기까지 개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북한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응징해야 할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집안만 하더라도 외조부께서 6·25전쟁 때 지원병으로 나가셨다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러니 저희 가족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북한은 분명 원수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원수’라고 말할 때, 북한에만 한정지을 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이 6·25전쟁이 발발한 날이기도 하고 한국 전쟁을 기념하는 주일이라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달려들며 피해를 주는 원수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기와 속임수로 집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못된 사람들이 있죠.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거짓말로 지옥과 같은 곳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큼은 살아 있는 동안에 벌 받는 것을 꼭 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사지로 몰아넣어서 힘들게 하거나 눈물도 많이 흘리게 하는 원수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1부 예배 때 저에게도 그런 원수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많은 분들이 놀라시는 듯 보였습니다. 저라고 왜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소망교회 교인 중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원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쓰신 예화이긴 합니다만 목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를 하셨더니, 그 말씀을 듣고 남편되는 분이 집에 가서 아내를 잘 대해 주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원수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는 것이 우리 마음을 참 무겁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사실 여러분 중에 대답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으실 줄로 압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죠.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불현듯 드는 생각은 어떤가요? “예, 잘 아는 내용입니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 참 좋은 말씀인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불가능합니다. 저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나의 가족을 처참하게 죽인 원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딸을 성폭행하고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시신을 도륙하고 절단하고 유기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참으로 무겁습니다.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붙잡고 있습니다. 분명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하라 하셨는데… 하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척에 있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한 언덕인 것 같은데 그곳에서 주님이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을 향하여 하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고, 앞으로 따를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에는 특별한 형식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 가실 때마다 보이신 전개 방식입니다. “너희가 ~ 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런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통하여 듣고 해석해 온 말씀을 예수님이 그분의 입으로 다시 말씀하시고 해석하시며 교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패턴을 보이는 말씀이 산상수훈 가운데 여섯 번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6개의 대립 명제라고 명명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이미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율법은 살인을 금하지만 예수님은 분노하는 행위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는 행위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은 맹세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이혼증서를 허용하였으나 예수님은 음행의 사유 없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은 과도한 보복을 금하지만 예수님은 보복 자체를 금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지만 주님께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3~44)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죠.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도와 목적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 먼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

 

예수님께서 전하신 모든 말씀들, 특별히 여섯 개의 대립 명제로 되어 있는 말씀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시는 구절입니다. 이와 동시에 앞서 가르치신 내용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원수를 용서하라” 하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음욕까지도 품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온전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온전하여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에 사용된 ‘온전함’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 teleios)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 중 신명기 18장 13절 말씀에는 이렇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전하라[τέλειος, teleios] (18:13)

 

그런데 이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신명기의 ‘완전하라’고 기록된 단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과 조금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신명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서에서 “너희는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의미는 문맥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앞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 18:9~11)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신명기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함’이란, 주변의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접한 자나 점쟁이 같은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신명기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이란 무엇인가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방인의 종교로부터, 이방인의 관습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혼합되어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거룩함’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거룩함 안에 구별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1~2)

 

“거룩하라, 구별되어라.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로 완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다는 것은 막연하게 분리되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존재의 충일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존재가 될 때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별됨은 하나의 결과에 속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된다는 결과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인은 구별됨을 무기 삼아 죄인과 의인을 나누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진정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를 모른 채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근거로 선인과 악인을 나누고 구별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가진 거룩함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도 됩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거룩한 성전을 헐며 다시 짓겠다고 말하는 불경한 자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거룩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거룩성을 유지하고자 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선을 행하는 것을 도리어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스스로 거룩한 존재임을 드러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강하게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함은 외견으로서 구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온전함’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께서 전하신 온전함이란 존재의 충일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상태,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주목할 말씀은 마태복음 5장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5)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을 줍니다. “아들이 된다”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아들이 된다’는 말은 해당 당사자의 성품과 정체성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바나바를 향하여 “위로의 아들”(행 4:36)이라고 하였고,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서는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를 향해서는 “멸망의 자식”(요 17:12)이라고 하였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서는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라고 하신 다음에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 원수됨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루어 갑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야기한 온전함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은 모든 것을 품으시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것이죠. 악인과 의인을 모두 품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날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아들이 되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창기들과 함께하시고, 세리들과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더럽고 냄새 나는 이들과 함께하셨고, 병들고 귀신 들린 자들과도 함께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지내시면서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가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온전하다’라는 단어가 19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고 말하는 부자를 향하시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마 19:21)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닿는 고차원적인 영적 성숙의 단계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 다시 6·25전쟁 주제로 돌아가 보십시다.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하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라고 설교하는 제 자신이 때로는 참 부끄럽습니다. 이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늘 마음에 부담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아, 저는 아직 불가능합니다.” 하고 대답하게 되지만 우리 주님은 한 가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 이건 조금 해 볼 수 있겠구나! 솔직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때로는 좋지 않은 말이 나올 때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다 보면 사랑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경험하게 되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원수들을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대적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물론 원수가 하루아침에 선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수는 그저 원수일 뿐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고, 주님께서 몸소 그런 삶을 살아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때 선한 이와 악한 이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영적 순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까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결과를 보고 계십니다. 겨우 1키로미터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까? 도시를 회복했다고 국기를 걸어놓는 군인들의 사진이 종종 올라오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폐허가 다 되어 버린 건물 더미 앞에서 국기를 걸어 놓고 있는 모습. 모두가 죽었고, 모두가 도망갔습니다. 죽음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과 원수됨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또 다른 탈출구입니다.

신냉전 시대를 보내면서 각종 신무기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국방력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미사일 발사 장면이 흐뭇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최근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하여서 많은 분들이 강경한 기조를 말씀하시곤 합니다.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북한은 원수 같고 지금도 우리를 괴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주의 북한은 기독교를 참으로 압제하는 국가입니다. 6·25 당시만 하더라도 1,1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예배당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혹독한 일들을 당해야 했습니다. 정말 원수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쟁을 기억하는 오늘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합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26:52)

 

기도하겠습니다.

Pray for Your Enemies

 

Matthew 5:43-48

 

 

Yesterday a close acquaintance sent me a few pictures. He had taken them in the War Memorial of Korea in Yongsan. In one of the photos, there was a sentence engraved on the museum floor that caught my eye. It was written, “If you want peace, remember war.”

 

This year marks the 73rd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Since it erupted on Sunday, June 25, 1953, it feels more meaningful that we are commemorating it on a Sunday today. It has been told that on the day the War broke out Christians heard the news of an invasion as they were leaving church after Sunday service. As already 73 years have passed since then, not many of us will remember that period of utter shock and confusion.

 

“Ah, ah, forget? How could we forget the day!

When the enemy came down trampling our motherland

With bare fists and red blood, when we stopped the enemies

Stomping our feet to the ground, when we trembled in indignation”

(Kim Dongjin, “Ah, ah, forget? How could we forget the day?”)

 

This is the first part of Kim’s song, “Ah, ah, forget? How could we forget the day?”, whose lyrics were written by Park Doojin. Many of you will know it. Whenever we commemorated the Korean War, we remembered North Korea’s atrocities by singing such a song that recalls the day of fury.

 

How on earth could North Korea come down and attack its brethrenin the South with tanks and rifles? After meticulous planning, North Korea initiated an attack on South Korea at around 4:20 a.m. on June 25, 1950.The War continued for the next three years one month and two days until an armistice was signed on July 27, 1953.

 

For about the same length of time that we suffered from the Covid-19 pandemic, a devasting war continued on the Korean Peninsula, killing and wounding countless people and leaving many others missing. According to a Soviet Union statistic, 1.13 million North Koreans and a total of 2.5 million, including North and South Koreans, were killed during the Korean War. In terms of non-civilian deaths, 130,000 South Korean soldiers, 40,000 United Nations servicemen, 520,000 North Korean soldiers, and 180,000 Chinese soldiers died. The War also resulted in some 200,000 widows, 100,000 orphans, and 10 million separated families.

 

It was a truly catastrophic disaster for this nation and its people. Yet today North Korea continues to pursue an ambition to conquer South Korea, vigilantly waiting for an opportunity; and in recent decades it has even developed nuclear weapons.

What must we do about North Korea? In a situation where the two Koreas continue to confront each other and remain technically at war, how must we treat the North?

 

Looking to my own family, my grandfather died in the Korean War fighting for the South. From my family’s perspective, therefore, North Korea is clearly the enemy.

 

Then what does our Lord say to us, especially Christians, about treating our enemies?

 

I brought up this subject today, of course, because we are commemorating the Korean War; but in our lives we often meet enemies who constantly try to kill or hurt us.

 

There are wicked people who trick us with lies and fraud, stripping us of all our possessions. They are our enemies. There are unforgivable people who make our lives a living hell through their lies and incitement. They are truly our enemies. There are people whom we want to see punished in this life.

 

How must we treat them?

 

In truth, we know in our hearts what our Lord will say to us: “Love your enemy. Forgive.” These words would immediately come to your minds.

 

Yes, we all know this. They are good words. But impossible. All the more soif we try to apply it to ourselves, to myself.

 

How can I forgive the enemy that killed my family? How can I love and forgive a man who violated my daughter and even went so far as to cut up her body into pieces?

 

Yes. This command of Jesus is extremely heavy. One that is truly hard to follow.

 

Today’s Scripture belongs to the famous Sermon on the Mount. After calling His disciples in Matthew 4, Jesus starts His ministry in Galilee. It is probably upon some hill in Galilee that Jesus deliversthis precious sermon,revealing the truths of the kingdom of God.

 

The sermon is Jesus’s cry to both those who had already become His disciples and those who would become His followers in the future.

 

In this Sermon on the Mount Jesus uses a special phrase repeatedly, which is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 but I tell you […].” This may be understood as Jesus’s special teaching that corrects, with His own words, the word of God that people thought they had heard from the Law in the past.

 

This unique sentence structure, repeated six tim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is called by scholars “the six antitheses.”

 

The Law forbids murder, but Jesus forbids even being angry at another person. The Law forbids adultery, but Jesus forbids even looking at another woman lustfully. The Law forbids breaking one’s oath, but Jesus teaches not tomake an oath at all. The Law allows a divorce by giving a certificate of divorce, but Jesus forbids any divorce that is not grounded on sexual immorality. The Law prohibits disproportionate revenge, but Jesus forbids revenge itself. Lastly, as is written in today’s text, Jesus corrects the teaching of the Law that says,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by saying, “Love your enemies”: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Matthew 5:43-44)

 

As I mentioned earlier, such commands of our Lord unsettle us. We find them hard to accept. Jesus seems to be asking us to do something humanly impossible. How can we love our enemies? How is this even possible? And how must we interpret this command of our Lord?

 

To properly understand Jesus’s intention and His purpose in this command, we must first closely look atHis concluding words at the end of the sermon.

 

Let’s look at verse 48:

 

“Be perfect,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Matthew 5:48)

 

These words are, in effect, a summary of all that Jesus teaches in His sermon, including especially the six antitheses, as well as an explanation on His intention.

 

The reason Jesus commands us to forgive our enemies is because He wants us to be perfect. The reason He tells us to not even look at a woman lustfully is because He wants us to be perfect.

 

Then what does it mean to be perfect? To understand the meaning, we need to consider something.

 

The original Greek word used for “perfect” is “teleios (τέλειος).” This word is also used in Deuteronomy 18:13 of theSeptuagint:

 

“You must be blameless [τέλειος, teleios] before the Lord your God.” (Deuteronomy 18:13)

 

The above words from the Old Testament and Jesus’s words in Matthew are distinct, however. I want to closely study this difference.

 

First let’s consider the command to be “blameless” in Deuteronomy. Before God commands His people to be blameless before Him, Godgives them the following commands in Deuteronomy:

 

“When you enter the land the Lord your God is giving you, do not learn to imitate the detestable ways of the nations there. Let no one be found among you who sacrifices their son or daughter in the fire, who practices divination or sorcery, interprets omens, engages in witchcraft, or casts spells, or who is a medium or spiritist or who consults the dead.” (Deuteronomy 18:9-11)

 

The blamelessness (or perfection) that God demands in Deuteronomy is to not follow the evil ways of the other nations and to forbid sorcery, divination, and the sort.

 

In short, by commanding them to be blameless, God is commanding His people to be separate from the other peoples. God doesn’t want His people to mix with them. When God tells His people to be “blameless” in Deuteronomy, He means He doesn’t want His people to be syncretized with the other nations or to follow their religions and customs.

 

In other words, this may be rephrased as “to be holy”:

 

“The Lord said to Moses, ‘Speak to the entire assembly of Israel and say to them: Be holy because I, the Lord your God, am holy.’” (Leviticus 19:1-2)

 

This separation, holiness was Israel’s longstanding identity.

 

However, as time passed, this separation and holiness served asan ideology for ruling. In particular, religious lea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used it to divide people into sinners and the righteousness and to judge them.

 

They started to distinguish what is holy from what is secular based on the traditions of the elders; eventually, their perspective of holiness drovethem to crucify Jesus.

 

In their eyes, Jesus was blasphemer, an irreverent man who claimed He would destroy and rebuild the temple, and a man who ate with sinners. In their eyes, Jesus did not set Himself apart at all.

 

Theyliked to pray loudly in the streets to show their holiness, but Jesus only rebuked their hypocrisy, even calling them “brood of vipers.”

 

Jesus did not require the holiness or separation of the Old Testament. Rather, He warned us against the hypocrisy that may arise from it.

 

Then what is the perfection that Jesus talks about in Matthew?

 

Perfection in the Sermon on the Mount means to attain to God’s character, God’s heart. In other words, it means to grow spiritually so as to reach heart of God.

 

In this respect, verse 45 requires our special attention: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Matthew 5:45)

 

In the Bible the phrase “children/son of something/someone” is often a figurative termthat indicates a person’s character or identity. For example, Barnabas was called “Son of Encouragement”(Acts 4:36);and Jesus called James and John “Sons of Thunder” (Mark 3:17), Judas “Son of Perdition” (John 17:12), and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brood of vipers.”

 

After Jesus commands us to “love your enemy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Matthew 5:44),He tells us in the next breath to become “children of your Father in heaven” and that God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Who is God and what is He like? As Jesus explains that He is a fair God who sends rain equally to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He asks us to be perfect like God.

 

The perfection Jesus talks about in this scene, therefore, is completely distinct from the blamelessness that the Israelites had learned about in the Old Testament.

 

The perfection of God that Jesus talks about is a perfection that embraces all. God embraces and waits for everyone, including the good and the evil. Of course, there will be a final judgment in the end days. But until that judgement, He sends the same rain and the same sun to everyone.

 

This is God. That is why His Son Jesus came to earth, drew near to sinners, ate with prostitutes, and associated with tax collectors. Jesus was also with the dirty, the stinky, the sick, and those possessed by evil spirits.

 

And that Jesus wants His children to reach the perfection of God.

 

In Matthew the word “perfect” appears again in chapter 19. This is what Jesus says to the rich young man who tells Jesus that he has kept all the laws:

 

“Jesus answered, ‘If you want to be perfect, go, sell your possessions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Then come, follow me.’”(Matthew 19:21)

 

Here also we see that our Lord uses the term “to be perfect” to refer to a higher level of spiritual growth that reaches the heart of God.

 

Now let’s return to the subject of the Korean War. Can we love our enemy?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How can we forgive the enemy who hurt us so? How can we forget? It is simply impossible.

 

But our Lord asks us, His children, to forgive, to love our enemies, and to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us. But why do we have to do these things?

 

In fact, our reason tells us that living a life that loves our enemies is stupid. Nevertheless, if we do live such a life, it is not because we are afraid of wars or revenge, or because we believe that everyone will be changed into good, kind people if we do so.

 

We do so because our Lord told us to love our enemies and because He showed us that example through His life. We do so to draw near to the heart of God who sends rain equally to the good and the evil.

 

We are currently seeing the consequences of the war in Ukraine. To advance one kilometer in the battlefield and to take possession of a territory, countless soldiers are losing their lives. We see pictures of soldiers raising their flag after retaking a city. But what is the reality? All the buildings are in ruins, and the people are either dead or have become refugees. It is a city of death.

 

What then is gained through wars?

 

Therefore our Lord speaks to us. Love your enemies.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In this neo-Cold War era, countries feel pride in all sorts of new weapons, their defense capabilities, and launching missiles.

 

I found out recently that as a result of its strenuous efforts to develop arms, Korea has now become a major exporter of advanced weapons worldwide. Already the K2 Black Panther, a battle tank, the K9 Thunder, a self-propelled artillery, the FA-50 fighter, and the KF-21 fighter are being exported after successful development, and the L-Sam, a Korean missile defense system under development, has successfully intercepted missiles in tests.

 

Should we use those weapons?

 

Today, as we commemorate the Korean War, let us remember what Jesus said on the night of His arrest when one of His disciples drew a sword and cut off the ear of a servant of thechief priest.

 

“Put your sword back in its place. For all who draw the sword will die by the sword.”(Matthew 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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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 43~48

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원수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이 몇 장의 사진을 보내 주셨습니다.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찍으신 사진이었습니다. 아마 6·25를 생각하시면서 그곳을 방문하신 듯 보였습니다. 특별히 사진 속 바닥에 새겨진 한 글귀가 저의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기억하라.”

6·25전쟁이 발발한 지 73주년이 되었습니다. 꼭 그렇게 된 날이네요. 6·25가 주일에 발발했는데 마침 오늘 6월 25일도 주일이다보니 의미가 더욱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우리 성도들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야 북한이 남침하고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73년이 흘렀으니 당황스러웠던 시간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가사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 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학창 시절에 6·25전쟁을 기억하는 행사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북한의 만행을 떠올린 기억이 있습니다. 어떻게 한 민족을 향하여 총을 겨눌 수 있는지, 탱크를 몰고 진격해 내려올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치밀한 준비 끝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20분경, 남침을 개시하였습니다. 이후 정전협정이 체결된 53년 7월 27일까지 꼬박 3년 1개월 2일에 걸쳐 한국 전쟁은 지속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3년여 동안 코로나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꼭 그 정도의 기간만큼 한반도에서 전쟁을 경험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 추산이 있습니다마는 소련에 따르면 북한에서만 113만명이 사망하였고, 남북 합하여서 약 250만명이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사망한 군인도 한국군 13만명, UN군 4만명, 북한군 52만명, 중공군 18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또 20만명의 전쟁미망인, 10만의 전쟁고아, 1천여 명의 이산가족이 만들어졌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북한은 호시탐탐 남한에 대한 적화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는 핵무기까지 개발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북한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응징해야 할지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집안만 하더라도 외조부께서 6·25전쟁 때 지원병으로 나가셨다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러니 저희 가족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북한은 분명 원수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원수’라고 말할 때, 북한에만 한정지을 순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이 6·25전쟁이 발발한 날이기도 하고 한국 전쟁을 기념하는 주일이라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원수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달려들며 피해를 주는 원수들을 만나게 됩니다. 사기와 속임수로 집의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못된 사람들이 있죠.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거짓말로 지옥과 같은 곳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만큼은 살아 있는 동안에 벌 받는 것을 꼭 좀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사지로 몰아넣어서 힘들게 하거나 눈물도 많이 흘리게 하는 원수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1부 예배 때 저에게도 그런 원수가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많은 분들이 놀라시는 듯 보였습니다. 저라고 왜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소망교회 교인 중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원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쓰신 예화이긴 합니다만 목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를 하셨더니, 그 말씀을 듣고 남편되는 분이 집에 가서 아내를 잘 대해 주셨다고 합니다. 어쩌면 원수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수라는 것이 우리 마음을 참 무겁게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어떻게 대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사실 여러분 중에 대답을 모르시는 분은 거의 없으실 줄로 압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죠. 이 말씀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불현듯 드는 생각은 어떤가요? “예, 잘 아는 내용입니다. 다 아는 내용입니다. 참 좋은 말씀인 것도 알겠습니다. 그런데 불가능합니다. 저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나의 가족을 처참하게 죽인 원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딸을 성폭행하고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시신을 도륙하고 절단하고 유기한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참으로 무겁습니다. 실천하기 정말 어려운 명령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붙잡고 있습니다. 분명 사랑하라 하셨는데, 사랑하라 하셨는데… 하는 마음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척에 있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한 언덕인 것 같은데 그곳에서 주님이 제자들과 모인 무리들을 향하여 하늘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고, 앞으로 따를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에는 특별한 형식이 존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어 가실 때마다 보이신 전개 방식입니다. “너희가 ~ 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이런 패턴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통하여 듣고 해석해 온 말씀을 예수님이 그분의 입으로 다시 말씀하시고 해석하시며 교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패턴을 보이는 말씀이 산상수훈 가운데 여섯 번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6개의 대립 명제라고 명명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이미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율법은 살인을 금하지만 예수님은 분노하는 행위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는 행위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거짓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은 맹세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율법은 이혼증서를 허용하였으나 예수님은 음행의 사유 없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은 과도한 보복을 금하지만 예수님은 보복 자체를 금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명하지만 주님께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고쳐 주십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5:43~44)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죠. 불가능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도와 목적을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서 먼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5:48)

 

예수님께서 전하신 모든 말씀들, 특별히 여섯 개의 대립 명제로 되어 있는 말씀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시는 구절입니다. 이와 동시에 앞서 가르치신 내용의 의도를 분명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원수를 용서하라” 하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음욕까지도 품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온전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우리로 온전하여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에 사용된 ‘온전함’은 헬라어로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 teleios)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 중 신명기 18장 13절 말씀에는 이렇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전하라[τέλειος, teleios] (18:13)

 

그런데 이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신명기의 ‘완전하라’고 기록된 단어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과 조금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신명기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명기서에서 “너희는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 의미는 문맥의 흐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특히 앞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신 18:9~11)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신명기서를 통하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함’이란, 주변의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접한 자나 점쟁이 같은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신명기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완전함’이란 무엇인가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방인의 종교로부터, 이방인의 관습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혼합되어서는 안된다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거룩함’이라는 단어로 바꿀 수 있습니다. 거룩함 안에 구별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19:1~2)

 

“거룩하라, 구별되어라. 혼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로 완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다는 것은 막연하게 분리되어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존재의 충일함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존재가 될 때 자연스럽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별됨은 하나의 결과에 속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된다는 결과물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대제사장과 같은 종교인은 구별됨을 무기 삼아 죄인과 의인을 나누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진정 무엇이 거룩한 것인지를 모른 채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근거로 선인과 악인을 나누고 구별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이 가진 거룩함의 관점에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게도 됩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거룩한 성전을 헐며 다시 짓겠다고 말하는 불경한 자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거룩하지 않은 자였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거룩성을 유지하고자 거리에서 큰소리로 기도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선을 행하는 것을 도리어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스스로 거룩한 존재임을 드러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강하게 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함은 외견으로서 구별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온전함’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님께서 전하신 온전함이란 존재의 충일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상태,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즉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의 위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주목할 말씀은 마태복음 5장 45절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5)

 

이 말씀은 언뜻 보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을 줍니다. “아들이 된다”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아들이 된다’는 말은 해당 당사자의 성품과 정체성을 함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은 바나바를 향하여 “위로의 아들”(행 4:36)이라고 하였고,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서는 “우레의 아들”(막 3:17)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를 향해서는 “멸망의 자식”(요 17:12)이라고 하였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서는 “독사의 자식”(마 12:3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라고 하신 다음에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 원수됨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루어 갑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속성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냐 하면,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전함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야기한 온전함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온전함은 모든 것을 품으시는 온전함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것이죠. 악인과 의인을 모두 품으시고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최후 심판이 있지만 그날이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모두에게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아들이 되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에게 다가와 주셨습니다. 창기들과 함께하시고, 세리들과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더럽고 냄새 나는 이들과 함께하셨고, 병들고 귀신 들린 자들과도 함께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더불어 지내시면서도 구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가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온전하다’라는 단어가 19장에서 한 번 더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고 말하는 부자를 향하시는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나타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마 19:21)

 

여기에서도 주님께서는 온전함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닿는 고차원적인 영적 성숙의 단계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자, 다시 6·25전쟁 주제로 돌아가 보십시다. 우리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하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용서하라, 사랑하라”라고 설교하는 제 자신이 때로는 참 부끄럽습니다. 이 말씀을 선포할 때마다 늘 마음에 부담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 “아, 저는 아직 불가능합니다.” 하고 대답하게 되지만 우리 주님은 한 가지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무엇입니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 이건 조금 해 볼 수 있겠구나! 솔직한 마음이 듭니다.

물론 때로는 좋지 않은 말이 나올 때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다 보면 사랑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경험하게 되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용서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 사랑하지 못할 것 같은 원수들을 향하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대적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여라.” 물론 원수가 하루아침에 선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변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수는 그저 원수일 뿐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못살게 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고, 주님께서 몸소 그런 삶을 살아내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때 선한 이와 악한 이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입니다. 영적 순례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더 가까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 결과를 보고 계십니다. 겨우 1키로미터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고 있습니까? 도시를 회복했다고 국기를 걸어놓는 군인들의 사진이 종종 올라오고 있습니다마는,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폐허가 다 되어 버린 건물 더미 앞에서 국기를 걸어 놓고 있는 모습. 모두가 죽었고, 모두가 도망갔습니다. 죽음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툼과 원수됨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를 대적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 주신 또 다른 탈출구입니다.

신냉전 시대를 보내면서 각종 신무기들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국방력이 자랑스럽게 여겨지고, 미사일 발사 장면이 흐뭇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최근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하여서 많은 분들이 강경한 기조를 말씀하시곤 합니다.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북한은 원수 같고 지금도 우리를 괴롭게 하는 존재입니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공산주의 북한은 기독교를 참으로 압제하는 국가입니다. 6·25 당시만 하더라도 1,1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기독교 예배당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참으로 혹독한 일들을 당해야 했습니다. 정말 원수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적어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쟁을 기억하는 오늘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합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26:52)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6월 25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장 43~48절)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520장, 218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마 5장 43~48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6월 25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3년째입니다. 625 전쟁을 기억할 때마다 분노했던 그 날의 느낌이 살아나고, 북한의 만행을 기억하게 됩니다. 엄청난 국가와 민족의 재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휴전 상태에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까요? 이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설교의 요약

“네 원수를 사랑하라. 용서하라.” 라는 말씀은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고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 앞에서 사실 당황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여러 가지 질문 가운데 곰곰이 묵상해보면,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온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이와 같이 신명기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요구로서의 완전함이란 주변의 민족들이 행하는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않는 것이고, 신접한 자, 점쟁이와 같은 이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에서 “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분리되라”는 뜻입니다. 그들과 섞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거룩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신명기에서의 온전함이 이와 같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전함이란 무엇일까 묵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라고 하시며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말씀하실 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완전함에 주님의 자녀들이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모든 것을 품으시는 온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신대로 그러한 삶을 살아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선한 이와 악한 이에게 고르게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북한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했던 적이 있나요? 조금이라도 원수 사랑을 향해 나아갔던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며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악인과 선인에게 고르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마음을 우리가 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주님의 아들과 딸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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