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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역설의 신비입니다. >
인터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성경 초보자입니다. 이게 궁금합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의 아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가룟 유다가 사탄이라면, 왜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사탄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려는 것도 아시면서 왜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나요? 이 세상에는 사탄의 일을 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 있나요? 해답 부탁드려요.
예수님의 수난사를 읽다 보면, 한두 번쯤 떠오르는 질문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질문의 중심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김기현 목사님은 『가룟 유다 딜레마』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하는 장미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시가 돋쳐 있고, 인간의 자유라는 장미에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정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가 가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가시를 죽 밀어버리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장미 본래의 아름다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즉 가룟 유다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요한복음을 따라가며 가룟 유다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정말 돌아올 길 없는 예정된 길로 간 것인지, 혹시 그에게도 돌아올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닌지, 만약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놓쳤다면 어떤 이유였는지,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은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란 것과 돈궤 맡는 역할을 수행한 제자였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 가룟 유다 이야기가 언급되는 첫 번째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기적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겠다며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숨으셨습니다. 그리곤 이후 바다 건너편에서 무리를 만나십니다. 이튿날 주님은 긴 강론을 하시는데, 그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이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결국 열두 명의 제자들밖에는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그러자 주님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요한복음 6:70 중)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아마 이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가룟 유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의 상황을 내다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당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데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을 보고는 모두 물러가 버렸습니다. 모든 이들이 실망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떠나고 제자 열둘만 남았는데, 그때 가룟 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룟 유다는 ‘내가 찾던 예수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내가 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찾던 메시아가 이 예수님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룟 유다가 가졌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갑니다. >
그렇게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 점차 예수님을 향한 모의와 협잡이 가속화됩니다. 동시에 한 여인이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엄청난 사건도 벌어집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협박과 핍박이 거세지고, 또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 나타나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의 내용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2:5 중)
어찌 보면, 돈궤를 맡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2:7~8 중)
어쩌면 이때 가룟 유다는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바로 다음 장인 13장 2절에서 가룟 유다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줍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한복음 13:2)
이 내용은 마가복음 14장 10~11절에 나오는 내용을 요한이 풀어 다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의 정황에 대해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0~11)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은 가룟 유다의 움직임을 마귀와 관련지어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가룟 유다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책임입니까? 마가와 요한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비추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르렀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따로 모으시고 그들과 식사를 나누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곤 허리에 수건을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발도 닦아 주셨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주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그리고 가룟 유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 앞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곤 이어, 보다 분명하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구체적으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 주는 자가 그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떡을 가룟 유다에게 직접 건네주십니다. 이때의 정황을 요한은 13장 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요한복음 13:27 중)
이 장면을 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가룟 유다를 몰고 가셨을까?’ 하고 아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몰고 가지 않으셨더라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말씀을 떠나자 유다에게 어둠이 찾아옵니다. >
지금까지의 성경의 흐름을 정리하면, 아마 가룟 유다는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자신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가던 즈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이 강하게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마리아의 행동이 분명 낭비로 보였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공개적인 반론을 묵살하시자 그는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섭섭함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로 하여금 모든 가능성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떡 조각을 적셔 주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 그리고 그 조각을 유다에게 건네주시는 순간, 유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섭섭함,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상처들, 미움이 강한 복수심으로 변해 그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은 가룟 유다의 이와 같은 비극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30)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서두에서부터 줄곧 증언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중에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주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주시는 떡 조각을 받은 후 밖으로 나갑니다. 바로 그때가 ‘밤’이었다고 요한은 표현합니다. 놀라울 만큼 멋진 표현입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빛을 멀리하고 어둠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밤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한편 ‘그가 나가니’라는 구절에서는 능동형이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밖에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당시 가룟 유다가 그곳을 떠난 후, 베드로에게 벌어진 일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좋은 말씀만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3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한복음 13:38)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독설을 퍼부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은 뒤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앞장서 주님을 가로막으며 외쳤습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마태복음 16:23 중)
마리아를 향해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을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에게 무안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께 무안을 당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사탄’이란 단어까지 사용하시며 베드로를 강력하게 나무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도 “이 중 하나는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호통치셨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은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은 채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한 사람은 ‘수제자’가 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둘에 대한 평가를 가른 것입니까?
우리는 유다 이야기에서 한 장면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에게 무안을 당한 후,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또 다른 장면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빵 조각을 건네신 후,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13:27)라고 묘사된 장면입니다. 아마 가룟 유다는 예수께 빵 조각을 받고 “네가 그니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강한 반발심과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판다고요? 내가 예수님을 배신한다고요? 내가 그럴 사람입니까?’ 아마 이렇게 마음속 깊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편,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그 속에 예수님을 팔 생각이 들어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이 그의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예수님에게 들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롯이 들통나자, 그는 더욱 강한 반발을 하고 만 것입니다.
<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빛으로 이끕니다. >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한두 번 예수님을 팔 자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또 너희 중 하나가 마귀라고는 이야기하셨지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단 한 차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다음, 예수님은 그에게 떡 조각을 주시며 “네가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던지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반발합니다. 그곳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어둠을 향해 나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뿌리쳐 버렸습니다.
어쩌다가 그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가룟 유다가 이렇게 실패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요한복음에 따르면, 6장에 나오는 말씀에서 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룟 유다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가고, 한 사람은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질책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응이 달랐습니다. 말씀 가운데 있었던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질책을 받고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을 향해 나름 합리적인 이야기를 했던 자신이 예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는 섭섭한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을 떠나기로,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과 결별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가룟 유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생명의 떡을 가룟 유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성찬식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나누시며, 가룟 유다에게 “네가 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알았다면, 그 떡을 먹고 깨우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그의 안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 주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말씀 앞에 나를 바로 세웁시다.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창조되고, 성례전을 통해 그 믿음이 확정된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두 경우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온전히 듣고 믿음을 만들어가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성찬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하지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 13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한복음 13:31)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어둠으로 사라졌습니다. 스스로를 파문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결단하고 나가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즉 “이제 십자가 죽음이 확정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반드시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어둠으로 사라지던 그 순간, 바로 그때, 그 일이 가룟 유다의 운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이나 고난, 때로는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안에 있던 불신앙이 그 기회를 꿰뚫고 들어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다니!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불신앙이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 밖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서 불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불신앙이 어려운 일, 고통과 고난을 만나자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파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섭섭한 일이 들어오는 순간, 사탄이 들어올 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우리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 이 이름은 언제든지 우리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 새번역)
요한복음 13: 21 ~ 30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역설의 신비입니다. >
인터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성경 초보자입니다. 이게 궁금합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의 아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가룟 유다가 사탄이라면, 왜 예수님은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까? 사탄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려는 것도 아시면서 왜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나요? 이 세상에는 사탄의 일을 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 있나요? 해답 부탁드려요.
예수님의 수난사를 읽다 보면, 한두 번쯤 떠오르는 질문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질문의 중심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그저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 있습니다. 김기현 목사님은 『가룟 유다 딜레마』에서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하는 장미에는 인간의 자유라는 가시가 돋쳐 있고, 인간의 자유라는 장미에는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가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정을 강조하다 보면 자유가 가시가 됩니다. 그렇다고 그 가시를 죽 밀어버리면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장미 본래의 아름다움은 많이 사라질 것입니다.
즉 가룟 유다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역설이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요한복음을 따라가며 가룟 유다를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가룟 유다가 정말 돌아올 길 없는 예정된 길로 간 것인지, 혹시 그에게도 돌아올 기회가 있었던 건 아닌지, 만약 그럴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 기회를 놓쳤다면 어떤 이유였는지,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성경에 많은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란 것과 돈궤 맡는 역할을 수행한 제자였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에 가룟 유다 이야기가 언급되는 첫 번째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기적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겠다며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숨으셨습니다. 그리곤 이후 바다 건너편에서 무리를 만나십니다. 이튿날 주님은 긴 강론을 하시는데, 그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는 말씀도 전해 주셨습니다. 이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라는 말씀도 더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났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결국 열두 명의 제자들밖에는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요6:67)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그러자 주님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요한복음 6:70 중)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요? 아마 이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가룟 유다는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라고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의 상황을 내다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당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데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예수님을 보고는 모두 물러가 버렸습니다. 모든 이들이 실망하고 떠나버린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떠나고 제자 열둘만 남았는데, 그때 가룟 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가룟 유다는 ‘내가 찾던 예수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으로 ‘내가 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그 자리에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가 찾던 메시아가 이 예수님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룟 유다가 가졌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중 한 사람은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갑니다. >
그렇게 시간은 흘러갑니다. 이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기적이 일어났고, 점차 예수님을 향한 모의와 협잡이 가속화됩니다. 동시에 한 여인이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는 엄청난 사건도 벌어집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협박과 핍박이 거세지고, 또 한편에서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이 나타나던 때였습니다. 바로 그때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12장의 내용입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에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2:5 중)
어찌 보면, 돈궤를 맡아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다운 모습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가룟 유다는 자신이 예수님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를 가만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2:7~8 중)
어쩌면 이때 가룟 유다는 상당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바로 다음 장인 13장 2절에서 가룟 유다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음을 알려줍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요한복음 13:2)
이 내용은 마가복음 14장 10~11절에 나오는 내용을 요한이 풀어 다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의 정황에 대해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0~11)
흥미로운 사실은, 요한은 가룟 유다의 움직임을 마귀와 관련지어 파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가룟 유다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마귀의 책임입니까? 마가와 요한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비추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가 도래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이르렀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따로 모으시고 그들과 식사를 나누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곤 허리에 수건을 두른 후 대야에 물을 받아 제자들의 발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수건으로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물론 가룟 유다의 발도 닦아 주셨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주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한 가룟 유다의 발을 씻기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그리고 가룟 유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마 여러 생각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다른 제자들 앞에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곤 이어, 보다 분명하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십니다. 더욱이 구체적으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 주는 자가 그이니라.”라고 말씀하시며, 그 떡을 가룟 유다에게 직접 건네주십니다. 이때의 정황을 요한은 13장 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요한복음 13:27 중)
이 장면을 접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까지 가룟 유다를 몰고 가셨을까?’ 하고 아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몰고 가지 않으셨더라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말씀을 떠나자 유다에게 어둠이 찾아옵니다. >
지금까지의 성경의 흐름을 정리하면, 아마 가룟 유다는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자신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껴가던 즈음,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이로써 예수님을 향한 적대감이 강하게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마리아의 행동이 분명 낭비로 보였는데, 예수님이 자신의 공개적인 반론을 묵살하시자 그는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섭섭함이 올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로 하여금 모든 가능성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떡 조각을 적셔 주는 자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 그리고 그 조각을 유다에게 건네주시는 순간, 유다의 분노는 극에 달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섭섭함,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상처들, 미움이 강한 복수심으로 변해 그의 마음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모습에 대해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은 가룟 유다의 이와 같은 비극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한복음 13:30)
얼마나 기가 막힌 표현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다고 서두에서부터 줄곧 증언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쳤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빛이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중에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빛이신 주님과 함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주시는 떡 조각을 받은 후 밖으로 나갑니다. 바로 그때가 ‘밤’이었다고 요한은 표현합니다. 놀라울 만큼 멋진 표현입니다. 이제 가룟 유다는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빛을 멀리하고 어둠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밤에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한편 ‘그가 나가니’라는 구절에서는 능동형이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밖에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자유의지를 갖고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흥미롭게도 성경은 당시 가룟 유다가 그곳을 떠난 후, 베드로에게 벌어진 일을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도 좋은 말씀만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3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요한복음 13:38)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독설을 퍼부으실 때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당신이 수난을 당하시고 죽은 뒤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앞장서 주님을 가로막으며 외쳤습니다.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이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베드로를 강하게 책망하시며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마태복음 16:23 중)
마리아를 향해 “이것을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을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예수님에게 무안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 역시 예수께 무안을 당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사탄’이란 단어까지 사용하시며 베드로를 강력하게 나무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향해서도 “이 중 하나는 마귀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를 향해서도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호통치셨습니다. 이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사람은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은 채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한 사람은 ‘수제자’가 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둘에 대한 평가를 가른 것입니까?
우리는 유다 이야기에서 한 장면을 자꾸 떠올리게 됩니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에게 무안을 당한 후,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라는 말씀이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또 다른 장면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빵 조각을 건네신 후,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요13:27)라고 묘사된 장면입니다. 아마 가룟 유다는 예수께 빵 조각을 받고 “네가 그니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강한 반발심과 분노가 일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판다고요? 내가 예수님을 배신한다고요? 내가 그럴 사람입니까?’ 아마 이렇게 마음속 깊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한편,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그 속에 예수님을 팔 생각이 들어 있었다고 말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배신할 마음이 그의 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예수님에게 들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오롯이 들통나자, 그는 더욱 강한 반발을 하고 만 것입니다.
<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빛으로 이끕니다. >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한두 번 예수님을 팔 자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또 너희 중 하나가 마귀라고는 이야기하셨지만,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단 한 차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한 다음, 예수님은 그에게 떡 조각을 주시며 “네가 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던지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 앞에서 반발합니다. 그곳을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어둠을 향해 나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뿌리쳐 버렸습니다.
어쩌다가 그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원인이었을까요? 가룟 유다가 이렇게 실패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요한복음에 따르면, 6장에 나오는 말씀에서 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가룟 유다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리에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말씀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께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가룟 유다와 베드로가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가고, 한 사람은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질책을 받은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반응이 달랐습니다. 말씀 가운데 있었던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라는 질책을 받고도 마음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입니다. 향유 부은 여인을 향해 나름 합리적인 이야기를 했던 자신이 예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는 섭섭한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곤 예수님을 떠나기로,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예수님과 결별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가룟 유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며, 생명의 떡을 가룟 유다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성찬식에 함께했습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나누시며, 가룟 유다에게 “네가 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알았다면, 그 떡을 먹고 깨우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말씀이 그의 안에 없었던 까닭입니다.
< 주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며 말씀 앞에 나를 바로 세웁시다.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믿음이 어디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합니다. “거룩한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창조되고, 성례전을 통해 그 믿음이 확정된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이 두 경우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는 말씀을 온전히 듣고 믿음을 만들어가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성찬에서도 믿음을 굳건히 하지 못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 13장 3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요한복음 13:31)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로 작정하고 어둠으로 사라졌습니다. 스스로를 파문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결단하고 나가자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 즉 “이제 십자가 죽음이 확정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반드시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누군가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어둠으로 사라지던 그 순간, 바로 그때, 그 일이 가룟 유다의 운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이나 고난, 때로는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안에 있던 불신앙이 그 기회를 꿰뚫고 들어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시다니!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미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불신앙이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 밖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서 불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불신앙이 어려운 일, 고통과 고난을 만나자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고,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파는 일에 앞장설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섭섭한 일이 들어오는 순간, 사탄이 들어올 자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준비되지 않으면, 우리는 불신앙의 늪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 이 이름은 언제든지 우리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고자 합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흠이 없이 완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 새번역)
2019년 3월 31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유다여, 가룟 유다여!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9장, 527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13:21-30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31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가룟 유다는 사탄의 아들입니까?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가룟 유다가 사탄의 아들이라면, 왜 예수님께서는 그를 제자로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왜 사탄이 유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을까? 이 세상에는 사탄의 일을 하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이 있을까? 이 질문의 중심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하나님의 예정에 다라 살아가는 존재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이 존재합니다.
설교의 요약
가룟 유다의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두 가지 서로 역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는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고 소개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복음은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을 때, 가룟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시며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은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미움, 상처, 편견들이 강한 복수심으로 바뀌었고, 성경은 “사탄이 섭섭한 그에게 들어갔다”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0절은 유다의 비극적인 모습을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표현하는데, 결국 유다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떠나 다시금 어둠 속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밖에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을까? 사실 베드로 역시 예수님께 독설을 들었으며, 심지어 “사탄아 물러가라.(마16:23)”는 이야기마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예수님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았고, 한 사람은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둘을 갈랐을까?
요한복음 13장 2절, 27절에 “마귀가 먼저 생각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떡 조각을 받은 후에 강한 반발심과 분노가 생겼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팔 사람이라고? 내가? 어떻게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에게 사탄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어둠속으로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불신앙이 드러난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나 시험에 들 때, 믿음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불신앙이 밖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겨서 불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어려운 일은 안에 있던 불신앙을 밖으로 드러내는 촉발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크지 않습니다. 섭섭한 일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사탄이 함께 들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깨닫고, 기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작고 사소하다고 생각해서 무시했는데, 오히려 내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경험이 있습니까?
2.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앞에서 우리는 불신앙으로 주춤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며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축복하고,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안에는 불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불만이 불씨가 되어 사탄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돌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우리를 버리지 말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