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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의 르호봇

창세기 26:16~22

김경진 목사

2025.03.02

<수동적으로 보이는 이삭의 인생이지만, 그의 고백에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다룰 주인공은 이삭입니다. 저는 이삭에 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이삭에게 조금 친근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삭이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그는 성경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늘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인물이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태어날 때부터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각되었을 뿐이고, 이삭에 대해서는 큰 의미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작 죽어야 했던 사람은 이삭이었는데, 그의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은 그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는 장면에서도 주된 인물은 늙은 종과 아브라함이죠. 늙은 종이 스스로 가서 리브가를 찾아옵니다.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와서 만나는 장면에서 이삭이 잠시 나타날 뿐입니다. 이렇듯 이삭은 늘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며 끌려다니는 존재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일 때도 그렇습니다. 이삭은 그저 속는 존재이죠. 야곱이 몰래 들어가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챌 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야곱에게 속아 그를 축복하는 모습에서는 판단력이 없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도 계속 쫓겨나고 쫓겨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창 26:1)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시련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힘든 시간, 견뎌야 하는 시간,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가 맞서야 했던 문제는 기근이었습니다. 물이 떨어져 물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방랑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라고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삭이 살았던 땅은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며 그에게 큰 의미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삭이 살았던 땅은 어떤 곳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봅니다. 기근이 들어서 떠나야 했던 땅, 그들이 살고 있었던 땅은 과연 어떤 땅이었을까요? 성경 앞부분을 보면 이삭이 살았던 장소의 두 지명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장 가까이 등장하고 있는 이름은 ‘브엘라해로이’입니다. 창세기 25장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창 25:11)

 

그런데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다른 지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려고 하다가 숫양을 대신 바치고 내려옵니다. 그다음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살았던 장소인 ‘브엘세바’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창 22:19)

 

따라서 이삭이 기근으로 떠나게 된 땅은 브엘세바 아니면 브엘라해로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아마도 브엘세바와 그다지 멀지 않거나 혹은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다시 흉년이 들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이 떠난 땅은 아브라함과 관련이 있던 땅이라는 뜻입니다.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은 아브라함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지명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브엘세바가 이삭이 떠난 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물론 이 지역을 정확히 추측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유익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기근으로 떠난 다음에 다시 돌아온 장소가 어디였는지 살펴볼 때 그 의미가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근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곳의 이름이 브엘세바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삭이 기근의 시기에 브엘세바를 떠나서 여러 곳을 방황하다가 기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왔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브엘세바에 거주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야곱과 에서를 키웠을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떠나서 밧단아람으로 갈 때 출발한 장소도 브엘세바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0)

 

다시 말하면 야곱과 에서, 이삭과 리브가가 함께 살던 고향이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기근을 보낸 다음에 브엘세바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를 들러서 가는 장면이 창세기 46장에 나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창 46:5)

 

요셉과 함께 살려고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야곱은 마지막 장소로 브엘세바를 들릅니다. 그는 헤브론에 살다가 마지막으로 브엘세바에서 하루를 머물고, 그곳에서 애굽으로 떠납니다. 그만큼 브엘세바는 야곱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해 본다면 브엘세바는 이삭과 야곱, 아브라함에게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했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깔고 오늘의 본문을 한번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삭은 수차례 터전에서 쫓겨나며 우물을 새로 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과 그의 가족이 기근이라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랄 지역으로 떠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삭은 그곳에서 어떻게 처신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랄에서 부유한 거부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머물라고 명령하시죠. 명령을 따라서 이삭과 그의 가족은 그랄 땅에 머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더 거부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시기도 함께 받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삭과 그의 가족들이 사용하고 있던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일까지 자행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함께 살지 않겠다는 뜻이죠. 이삭을 내쫓으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삭과 그의 가족들의 생명줄인 우물을 막아 버리며 이곳에 있지 말아 달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삭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을 때, 아비멜렉 역시 이삭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향하여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이삭은 참으로 억울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변한 그랄 땅에서 그는 한없이 불안과 원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흉년으로 물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물을 막아 버리고 떠나라고 하니, 이삭은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삭과 그의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았던 비옥한 그랄 평야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 지역 어딘가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그곳을 그랄 지역의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창 26:17)

 

골짜기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좁았을까요? 그들이 이전에 거주했던 장소는 평야였습니다. 넓고 샘들이 솟아나는 지역, 우물들이 여러 곳 있는 살 만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골짜기로 쫓겨 들어갔으니, 그곳에서 과연 우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흉년이 들어 모두 말라 있는 골짜기에서 이삭과 그의 식솔들이 과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이삭은 물의 줄기를 발견합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창 26:19)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쫓겨 나오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물을 찾아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곳에서도 어느 정도 기근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조금 꼬여 갑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창 26:20)

 

그들은 새 물줄기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랄 지역의 목자들과 다투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이 ‘에섹’입니다. ‘다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흥미로운 점은 이삭이 충분히 방어할 만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랄의 목자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천성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이삭의 위대한 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창 26:21)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다시 우물을 팠는데, 그들이 다시 와서 그 우물조차도 빼앗아 버립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대적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싯나’입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다시 자리를 옮겨서 우물을 파고자 합니다. 성경은 세 번이나 자리를 옮기면서 우물을 파는 이삭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척박한 곳에서 파낸 마지막 우물 앞에서 이삭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요즘도 우물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살던 당시에 우물을 판다는 것은 어마한 사업이었을 것입니다. 물길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물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깊은 곳까지 땅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삭과 그의 종들은 열심히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사업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물을 하나 판다는 것을 요즘으로 말한다면 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나 시작했다가 닫고, 또다시 어렵게 사업을 시작했다가 다시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삭은 또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다행히도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는 방해했던 사람들도 양심이 있었는지 더 이상 빼앗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6:22)

 

세 번째로 우물을 팠을 때야 이삭과 그의 가족은 비로소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그 땅은 어떤 모습의 땅이었을까요? 이제 조금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이야기는 평면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죠.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풀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랄 평야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물이 많은 비옥한 평야에서 함께 살다가 쫓겨났죠. 그래서 이삭과 그의 모든 식구는 그랄 골짜기 지역으로 옮겨 갔습니다. 처음 빼앗긴 우물이 그랄 골짜기에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시 와서 골짜기 안에 있는 우물도 빼앗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그의 가족들은 어디로 향해 나갔을까요? 다시 평야로 나갔을까요? 평야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그 평야 지대에서 골짜기로 피하여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더 들어가서 우물을 팠겠죠.

그런데 또다시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조차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다시 어디로 갔을까요? 평야로 나갔을까요? 그곳으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골짜기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겠지요.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곳, 형편없는 땅,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만한 땅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쫓기고 쫓겨서 간 땅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사람들은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간 이삭을 더 이상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삭은 우물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삭이 마지막으로 봤던 우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가치가 없는 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쫓기고 쫓겨서 간 이삭은 마침내 골짜기에서 다시 물길을 찾아내고는 그 우물의 이름을 이렇게 붙입니다. ‘르호봇’. ‘넓다’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곳이 넓은 장소였을까요? 넓다고 말할 만한 장소였을까요? 그곳은 결코 넓을 수 없는 땅입니다. 오래 머물 수 있는 땅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다음 23절에서 이삭이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오래 머물 수 없는 땅, 제대로 생존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저 물길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곳의 이름을 ‘넓다’라고 붙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반어법일까요? 저는 반어법의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넓다’라는 의미인 ‘르호봇’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이유에는 그의 신앙과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쫓기고 쫓기던 마지막 자리에서 ‘르호봇’을 외칩니다. “넓다. 우리가 이곳에서 번성하리로다.” 골짜기 속의 골짜기, 사람이 살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곳, 내몰리고 내쳐진 자리에서 이삭은 외칩니다. “이곳은 르호봇이다. 넓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번성할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곳에서 이삭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넓은 곳을 차지하려면 싸움터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넓은 곳을 차지할 수 있죠. 이삭은 차라리 처음 그랄 평원에서 아비멜렉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삭은 그야말로 르호봇인 넓은 자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는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그랄 골짜기 안으로 내쫓겨 들어왔습니다.

그랄 골짜기 입구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거기서 더 밀리지는 않아야 했습니다. 그래야지 넓은 땅이라도 바라보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야 르호봇이라고 외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또다시 밀려서 깊은 계곡 안으로 들어오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좁은 땅에서 그는 외칩니다. “르호봇. 이곳은 넓다.” 이곳은 여전히 넓고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르호봇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작았던 땅이었고, 가장 위축되었던 상태이자 초라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장소를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넓은 곳, 가능성이 있는 곳. 내가 이곳에서 번성하리라.” 이삭의 위대한 점은 넓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투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양보하고 빼앗기며 넘겨주었습니다.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법으로 물러서고 물러섰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땅 척박한 땅에서 그는 “이곳은 르호봇이다. 이곳은 넓은 땅이다. 이곳은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번성하리라.”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여 큰 사무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단칸방 같은 작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는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싸움도 하지 않고, 물러서고, 넘겨주고, 양보하고, 빼앗겨서 밀려난 조그마한 자리에서 과연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절규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하면서 그럴 때가 있고, 또는 교회 사역이나 인간관계, 정치적인 현안을 보면서 절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르호봇. 이곳은 여전히 넓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양보하고 물러서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믿는 구석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리아산에서 그는 이미 경험했죠. 아브라함과 함께 이미 재물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이미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척박한 곳에서도 그를 위축되지 않게 하였고, 도리어 ‘르호봇’을 외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라고 말할 자리에서 “아직도 이 자리는 넓다. 르호봇.” 이라고 외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작은 계곡에서 이삭이 ‘르호봇’을 외치자 하나님은 그를 브엘세바로 다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두려움을 갖고, 이삭과 서로 해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에 서명하자마자 종들이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새 우물을 얻었습니다”라는 소식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창 26:31-33)

 

이렇듯 ‘르호봇’이라는 외침은 멋진 결과로 마무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깊은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습니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까? 그 좁은 곳, 척박한 자리에서 한번 외쳐 보십시오. “르호봇. 넓다. 이곳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이 믿음의 고백을 외쳐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마침내 일곱 개의 우물이 있는 브엘세바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Isaac’s Rehoboth

 

Genesis 26:16-22

 

Although the stories of Abraham, Isaac, Jacob, and Joseph take up the bulk of Genesis, Isaac’s portion is not so big.

 

Isaac’s name first appears as the son of Abraham whom he got at the age of 100; Isaac plays an assisting role in the scene where Abraham sacrifices him; and even in the story of getting Rebekah as his wife, Isaac only appears once. Furthermore, when Jacob deceives Isaac to steal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aac merely appears as an assisting role.

 

The only place where Isaac plays an active role is found in today’s Scripture from Genesis 26.

 

The story begins with Isaac moving to a new region from a place where he was doing well. He was forced to move because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 where he had been living.

 

Although Isaac was the son of Abraham, the “Father of Faith,” his life was not without troubles. Isaac, too, had to endure hard times and faced problems in his life.

 

This time the problem was famine. Accordingly, he had to endure a season of crisis, as he and his family were forced to wander in dangerous regions in search of water.

 

The Bible describes his situation as such:

 

“Now there was a famine in the land—beside the previous famine in Abraham’s time—and Isaac went to Abimelek king of the Philistines in Gerar.” (Genesis 26:1)

 

Isaac could no longer live in the land where he lived; so he ended upmoving to Gerar, the land of the Philistines.

 

The Bible states that a famine again struck the land where he lived. Then where was he living?

 

Considering the geographical names that appear in the passages preceding today’s text, there may be two possibilities. The region mentioned immediately before today’s text is Beer Lahai Roi:

 

“After Abraham’s death, God blessed his son Isaac, who then lived near Beer Lahai Roi.”(Genesis 25:11)

 

But if we trace back a little farther, we will see the name Beersheba, the very place where Abraham and his family lived after Abraham returned from his trip to Mount Moriah to sacrifice his son:

 

“Then Abraham returned to his servants, and they set off together for Beersheba. And Abraham stayed in Beersheba.” (Genesis 22:19)

 

Although it is not clear where Isaac had been living when he moved to Gerar, we may guess it was probably one of the two places—Beer Lahai Roi or Beersheba.

 

It is hard to determine whereBeer Lahai Roi was geographically. But, most likely, it was not far from Beersheba.

 

Interestingly, in the passages succeeding today’s text Isaac moves to Beersheba. It appears that after the famine he returned to Beersheba.

 

Isaac and his family also seem to have continued to live in Beersheba in the years that followed. The Bible records that Jacob fled from Beersheba and ran away to Haran after deceiving his father and Esau. This is the Bible’s record about Jacob leaving Beersheba for Haran after stealing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Jacob left Beersheba and set out for Haran.” (Genesis 28:10)

 

Beersheba is again mentioned in the scene where Jacob finally takes his whole family to Egypt:

 

“Then Jacob left Beersheba, and Israel’s sons took their father Jacob and their children and their wives in the carts that Pharaoh had sent to transport them.” (Genesis 46:5)

 

Therefore, Beersheba was like a home to Isaac and Jacob.

 

Then we may make the following presumptions about today’s text. Isaac left Beersheba for a while because of a famine and went to Gerar. After wandering througha few other places, he returned to Beersheba.

 

If we understand this, we will better understand the contents and flow of today’s story. For example, it will be easier to understand the flow of the story where Isaac goes up to Beersheba instead of settling in Rehoboth, the place where he digs a well and confesses God will prosper him there.

 

Therefore, today’s passage tells us what happened to Isaac and his family after moving to Gerar in a crisis caused by a famine. God commands Isaac not to go down to Egypt as Abraham had done and tells him to stay in Gerar. During his short stay in Gerar, he becomes strong and prosperous.

 

As he grew more powerful, he was envied. Neighboring people filled up Isaac’s wells with dirt. They cut his lifeline. Yet, though Isaac was wronged, Abimelek king of the Philistines did not defend him but instead commanded him to leave the region.

 

How unfair all this would have felt to Isaac!He would have felt deeply anxious and angry in Gerar, as powerful people and hostile neighbors sought to destroy him.

 

In a famine, moving to another region can be deadly. Without access to water, Isaac could lose all his possessions, including cattle. Moreover, even the life of his family would be at risk.

 

However, Isaac and his family leave Gerar and move to a valley. This is how the Bible describes the journey:

 

“So Isaac moved away from there and encamped in the Valley of Gerar, where he settled.” (Genesis 26:17)

 

How cramped it would have been in the valley. Would they have had water there? Survival in a barren valley during a famine would have been extremely difficult. Yet, interestingly, Isaac finds water there.

 

“Isaac’s servants dug in the valley and discovered a well of fresh water.” (Genesis 26:19)

 

But the story has a twist:

 

“But the herders of Gerar quarreled with those of Isaac and said, ‘This water is ours!’ So he named the well Esek, because they disputed with him.” (Genesis 26:20)

 

Although Isaac’s servants had dug a well and found water, they were again wronged, as the herders of Gerar quarreled with them. So the well’s name became Esek, meaning “disput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Isaac moves to another place when the herders of Gerar insist that the well is theirs, even though he appears powerful enough to fight them off.

 

He may have moved due to an inherent dislike for disputes. Nevertheless,what he did shows his greatness. The Bible continues to tell his story:

 

“Then they dug another well, but they quarreled over that one also; so he named it Sitnah.” (Genesis 26:21)

 

This tells us that even after he moved to another place and dug another well there, the people stole it from him again. So the well was named Sitnah, which means “enmity.”

 

Yet Isaac did not quarrel with them. He merely moves again and digs another well. The Bible states that he moved a total of three times, digging new wells.

 

Even today, digging wells is not easy. Of course, advanced technology has made it easier. But let’s think of the biblical times. Can you imagine the difficulty of detecting and findinga waterway and digging down at the appropriate spot?

 

This process would have been immensely challenging. But Isaac did not shirk this difficult task but did it three times. Luckily, when he dug his third well, the herders did not quarrel with him—perhaps out of a guilty conscience:

 

“He moved on from there and dug another well, and no one quarreled over it. He named it Rehoboth, saying, ‘Now the Lord has given us room and we will flourish in the land.’” (Genesis 26:22)

 

Finally, when Isaac had dug his third well, he and his family could settle in that land. Then what kind of place was it? When Isaac dug his first well, he had been living in the Valley of Gerar. Even here, the herders took the well from him.

 

Then where would Isaac have gone to after leaving Gerar? To the plain? Isaac’s family had already fled from the plain and entered theValley of Gerar. They would probably have gone deeper into the valley. Yet even there, the people steal his well. So where would Isaac have gone next? Probably deeper still into the valley. He would have moved to a more barren, a less populated land. There he dug a well again.

 

Deep in the valley, his neighbors would no longer have considered him a threat; he was able to live there without disputes over his new well.

 

But, after being forced to move again and again and finally digging his third well, Isaac names that well “Rehoboth,” which means “broad place.”

 

No matter how hard I think, Rehoboth could not have been a spacious land. Neither could it have been a place where one could reside for a long time, which is why Isaac goes back up to Beersheba in the very next verse.

 

But in the very last leg of his journey of being chased, he shouts, “Rehoboth! Broad place! We will prosper here!”

 

In a barren place, in the deepest of valleys, in the most uninhabitable place he was forced to flee to, he shouts, “Rehoboth! Spacious!”

 

Dear Church, this was Isaac’s “Rehoboth.”

 

To possess a spacious land, don’t you go into battle? This is how you conquer a broadterritory. To live in a broad land, shouldn’t Isaac have fought with Abimelek in the plains of Gerar at the beginning?

 

Or shouldn’t he have at least fought for his land when he first moved into the valley after being forced to leave the plain? Don’t you think he could have shouted, “Rehoboth! Broad place!” there?

 

But he shouts “Rehoboth!” finally after he is forced to move again and again. What does this mean?

 

Rehoboth was the least spacious and the most barren land that Isaac moved to. It also signified the most difficult season of his life. Yet he calls it “Broad place! Rehoboth! How spacious!”

 

What makes Isaac great is that he did not fight to possess a more spacious land. He did not quarrel. He did not dispute. He yielded, gave, let others have their way, and stepped back. It appears to be the most foolish way. But he surrendered again and again. Yet he did not cower. In a small, barren land he sang, “Rehoboth! Room enough!”

 

Can we shout “Rehoboth!” when our business fails and we have to set up shop in a small garage after being forced out of our office? Will we be able to say “Rehoboth!” in that small space, after surrendering, yielding, letting others have their way, and not fighting for our rights?

 

Sometimes, we moan that we cannot step back any further—in our business,marriage,political issues, andvarious social relationships.

 

Yet Isaac shouted, “Rehoboth! Broad space! We will flourish again here!” in a place where there seemed to be simply no more room to step back.

 

Even though he yielded continuously, his confidence and calmness probably came from his faith in something or someone. Faith in God who was guiding him!The Lord who was guiding him! He believed and trusted in that Lord.

 

Because of that faith, he did not cringe even in a barren land and was able to shout, “Rehoboth!”

 

May we also have this confession. May we shout, “Rehoboth! Broad place!” in the very place where it seems we cannot step back any further. Since God is with me, I will flourish in this small space! I will prosper with this miniscule possibility! I hope this will be our faith and confession.

 

Isaac, who shouted “Rehoboth!” in this small valley, returns to Beersheba, a place like home, with God’s help. And with God’s help, Abimelek comes to fear Isaac, and the two reach an agreement not to harm each other. As soon as the contract is signed, the servants bring news that a new well has been discovered:

 

“Early the next morning, they each took a solemn oath not to interfere with each other. Then Isaac sent them home again, and they left him in peace. That very day Isaac’s servants came and told him about a new well they had dug. ‘We’ve found water!’ they exclaimed. So Isaac named the well Shibah (which means “oath”). And to this day the town that grew up there is called Beersheba (which means “well of the oath”).” (Genesis 26:31-33)

 

Isaac’s shout of “Rehoboth!” concludes with this magnificent ending.

 

Dear Church, are you stuck in a deep valley? Are you in a place where it seems you cannot step back any further? In that small, barren land, that place, that room, try shouting, “Rehoboth! How spacious! We will prosper in this land!”

 

Our loving Lord will finally lead us to Beersheba, thelandwith seven we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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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6:16~22

16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19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수동적으로 보이는 이삭의 인생이지만, 그의 고백에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다룰 주인공은 이삭입니다. 저는 이삭에 대한 설교를 할 때마다 이삭에게 조금 친근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삭이 주인공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그는 성경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늘 수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인물이죠.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이삭은 태어날 때부터 그로 인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각되었을 뿐이고, 이삭에 대해서는 큰 의미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쳤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작 죽어야 했던 사람은 이삭이었는데, 그의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은 그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는 장면에서도 주된 인물은 늙은 종과 아브라함이죠. 늙은 종이 스스로 가서 리브가를 찾아옵니다.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와서 만나는 장면에서 이삭이 잠시 나타날 뿐입니다. 이렇듯 이삭은 늘 수동적이고 피동적이며 끌려다니는 존재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일 때도 그렇습니다. 이삭은 그저 속는 존재이죠. 야곱이 몰래 들어가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챌 때에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야곱에게 속아 그를 축복하는 모습에서는 판단력이 없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도 계속 쫓겨나고 쫓겨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창 26:1)

 

이삭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시련이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도 힘든 시간, 견뎌야 하는 시간,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가 맞서야 했던 문제는 기근이었습니다. 물이 떨어져 물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 방랑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라고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이삭이 살았던 땅은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며 그에게 큰 의미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삭이 살았던 땅은 어떤 곳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봅니다. 기근이 들어서 떠나야 했던 땅, 그들이 살고 있었던 땅은 과연 어떤 땅이었을까요? 성경 앞부분을 보면 이삭이 살았던 장소의 두 지명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가장 가까이 등장하고 있는 이름은 ‘브엘라해로이’입니다. 창세기 25장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창 25:11)

 

그런데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다른 지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바치려고 하다가 숫양을 대신 바치고 내려옵니다. 그다음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함께 살았던 장소인 ‘브엘세바’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창 22:19)

 

따라서 이삭이 기근으로 떠나게 된 땅은 브엘세바 아니면 브엘라해로이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특정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아마도 브엘세바와 그다지 멀지 않거나 혹은 조금 더 남쪽에 있는 지역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다시 흉년이 들었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삭이 떠난 땅은 아브라함과 관련이 있던 땅이라는 뜻입니다. 브엘라해로이라는 지명은 아브라함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지명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브엘세바가 이삭이 떠난 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물론 이 지역을 정확히 추측할 필요는 없지만, 이것이 유익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기근으로 떠난 다음에 다시 돌아온 장소가 어디였는지 살펴볼 때 그 의미가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근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곳의 이름이 브엘세바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삭이 기근의 시기에 브엘세바를 떠나서 여러 곳을 방황하다가 기근이 끝난 다음에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왔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삭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브엘세바에 거주하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야곱과 에서를 키웠을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떠나서 밧단아람으로 갈 때 출발한 장소도 브엘세바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0)

 

다시 말하면 야곱과 에서, 이삭과 리브가가 함께 살던 고향이 브엘세바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기근을 보낸 다음에 브엘세바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브엘세바를 들러서 가는 장면이 창세기 46장에 나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날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바로가 그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에 자기들의 아버지 야곱과 자기들의 처자들을 태우고 (창 46:5)

 

요셉과 함께 살려고 모든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갈 때, 야곱은 마지막 장소로 브엘세바를 들릅니다. 그는 헤브론에 살다가 마지막으로 브엘세바에서 하루를 머물고, 그곳에서 애굽으로 떠납니다. 그만큼 브엘세바는 야곱에게도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생각해 본다면 브엘세바는 이삭과 야곱, 아브라함에게 가족들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했던 의미 있는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깔고 오늘의 본문을 한번 깊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삭은 수차례 터전에서 쫓겨나며 우물을 새로 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과 그의 가족이 기근이라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랄 지역으로 떠난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삭은 그곳에서 어떻게 처신하였을까요? 그리고 그는 어떻게 해서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랄에서 부유한 거부가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아브라함처럼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머물라고 명령하시죠. 명령을 따라서 이삭과 그의 가족은 그랄 땅에 머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더 거부가 되어 갑니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시기도 함께 받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삭과 그의 가족들이 사용하고 있던 우물을 흙으로 메우는 일까지 자행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함께 살지 않겠다는 뜻이죠. 이삭을 내쫓으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삭과 그의 가족들의 생명줄인 우물을 막아 버리며 이곳에 있지 말아 달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삭은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 이야기를 하였을 때, 아비멜렉 역시 이삭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향하여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이삭은 참으로 억울했을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적대적으로 변한 그랄 땅에서 그는 한없이 불안과 원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란 말인가?’ 흉년으로 물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물을 막아 버리고 떠나라고 하니, 이삭은 참으로 난감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삭과 그의 가족들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았던 비옥한 그랄 평야를 떠납니다. 그리고 그 지역 어딘가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성경은 그곳을 그랄 지역의 골짜기라고 말합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창 26:17)

 

골짜기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좁았을까요? 그들이 이전에 거주했던 장소는 평야였습니다. 넓고 샘들이 솟아나는 지역, 우물들이 여러 곳 있는 살 만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골짜기로 쫓겨 들어갔으니, 그곳에서 과연 우물을 찾을 수 있을까요? 흉년이 들어 모두 말라 있는 골짜기에서 이삭과 그의 식솔들이 과연 살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아주 다행스럽게도 그곳에서 이삭은 물의 줄기를 발견합니다.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창 26:19)

 

참으로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쫓겨 나오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물을 찾아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곳에서도 어느 정도 기근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조금 꼬여 갑니다.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창 26:20)

 

그들은 새 물줄기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랄 지역의 목자들과 다투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이 ‘에섹’입니다. ‘다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흥미로운 점은 이삭이 충분히 방어할 만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랄의 목자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 갑니다. 천성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이삭의 위대한 점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창 26:21)

 

다른 곳으로 옮겨서 또다시 우물을 팠는데, 그들이 다시 와서 그 우물조차도 빼앗아 버립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대적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싯나’입니다. 그럼에도 이삭은 그들과 싸우지 않습니다. 다시 자리를 옮겨서 우물을 파고자 합니다. 성경은 세 번이나 자리를 옮기면서 우물을 파는 이삭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척박한 곳에서 파낸 마지막 우물 앞에서 이삭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요즘도 우물을 파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살던 당시에 우물을 판다는 것은 어마한 사업이었을 것입니다. 물길이 어디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물길을 안다고 하더라도 깊은 곳까지 땅을 판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삭과 그의 종들은 열심히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사업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물을 하나 판다는 것을 요즘으로 말한다면 한 사업을 시작한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을 하나 시작했다가 닫고, 또다시 어렵게 사업을 시작했다가 다시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이삭은 또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다행히도 세 번째 우물을 팠을 때는 방해했던 사람들도 양심이 있었는지 더 이상 빼앗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 26:22)

 

세 번째로 우물을 팠을 때야 이삭과 그의 가족은 비로소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그 땅은 어떤 모습의 땅이었을까요? 이제 조금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의 이야기는 평면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죠.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풀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그랄 평야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물이 많은 비옥한 평야에서 함께 살다가 쫓겨났죠. 그래서 이삭과 그의 모든 식구는 그랄 골짜기 지역으로 옮겨 갔습니다. 처음 빼앗긴 우물이 그랄 골짜기에 이미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시 와서 골짜기 안에 있는 우물도 빼앗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그의 가족들은 어디로 향해 나갔을까요? 다시 평야로 나갔을까요? 평야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그 평야 지대에서 골짜기로 피하여 들어온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깊은 골짜기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더 들어가서 우물을 팠겠죠.

그런데 또다시 사람들이 와서 그 우물조차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다시 어디로 갔을까요? 평야로 나갔을까요? 그곳으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아마도 골짜기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겠지요. 사람들이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을 만한 곳, 형편없는 땅,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을 만한 땅으로 깊이 들어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쫓기고 쫓겨서 간 땅입니다. 이삭은 그곳에서 우물을 팠습니다. 사람들은 그 깊은 곳까지 들어간 이삭을 더 이상 위협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삭은 우물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삭이 마지막으로 봤던 우물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가치가 없는 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쫓기고 쫓겨서 간 이삭은 마침내 골짜기에서 다시 물길을 찾아내고는 그 우물의 이름을 이렇게 붙입니다. ‘르호봇’. ‘넓다’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곳이 넓은 장소였을까요? 넓다고 말할 만한 장소였을까요? 그곳은 결코 넓을 수 없는 땅입니다. 오래 머물 수 있는 땅도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다음 23절에서 이삭이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오래 머물 수 없는 땅, 제대로 생존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저 물길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곳의 이름을 ‘넓다’라고 붙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반어법일까요? 저는 반어법의 의미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넓다’라는 의미인 ‘르호봇’이라는 이름을 붙인 그 이유에는 그의 신앙과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쫓기고 쫓기던 마지막 자리에서 ‘르호봇’을 외칩니다. “넓다. 우리가 이곳에서 번성하리로다.” 골짜기 속의 골짜기, 사람이 살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곳, 내몰리고 내쳐진 자리에서 이삭은 외칩니다. “이곳은 르호봇이다. 넓은 곳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번성할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곳에서 이삭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넓은 곳을 차지하려면 싸움터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넓은 곳을 차지할 수 있죠. 이삭은 차라리 처음 그랄 평원에서 아비멜렉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이삭은 그야말로 르호봇인 넓은 자리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었겠죠. 그런데 그는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그랄 골짜기 안으로 내쫓겨 들어왔습니다.

그랄 골짜기 입구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거기서 더 밀리지는 않아야 했습니다. 그래야지 넓은 땅이라도 바라보며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야 르호봇이라고 외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또다시 밀려서 깊은 계곡 안으로 들어오고 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좁은 땅에서 그는 외칩니다. “르호봇. 이곳은 넓다.” 이곳은 여전히 넓고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이삭에게 있어서 르호봇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작았던 땅이었고, 가장 위축되었던 상태이자 초라했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 장소를 ‘르호봇’이라 불렀습니다. “참으로 넓은 곳, 가능성이 있는 곳. 내가 이곳에서 번성하리라.” 이삭의 위대한 점은 넓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투쟁하지 않고 다투지 않았습니다. 양보하고 빼앗기며 넘겨주었습니다. 가장 미련해 보이는 방법으로 물러서고 물러섰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땅 척박한 땅에서 그는 “이곳은 르호봇이다. 이곳은 넓은 땅이다. 이곳은 가능성이 있다. 이곳에서 나는 다시 번성하리라.”라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여 큰 사무실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단칸방 같은 작은 공간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우리는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싸움도 하지 않고, 물러서고, 넘겨주고, 양보하고, 빼앗겨서 밀려난 조그마한 자리에서 과연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때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절규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하면서 그럴 때가 있고, 또는 교회 사역이나 인간관계, 정치적인 현안을 보면서 절규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자리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르호봇. 이곳은 여전히 넓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양보하고 물러서면서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믿는 구석은 무엇이었을까요? 모리아산에서 그는 이미 경험했죠. 아브라함과 함께 이미 재물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이미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끌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척박한 곳에서도 그를 위축되지 않게 하였고, 도리어 ‘르호봇’을 외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라고 말할 자리에서 “아직도 이 자리는 넓다. 르호봇.” 이라고 외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작은 계곡에서 이삭이 ‘르호봇’을 외치자 하나님은 그를 브엘세바로 다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은 이삭에게 두려움을 갖고, 이삭과 서로 해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약에 서명하자마자 종들이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새 우물을 얻었습니다”라는 소식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전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창 26:31-33)

 

이렇듯 ‘르호봇’이라는 외침은 멋진 결과로 마무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깊은 골짜기를 걸어가고 있습니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까? 그 좁은 곳, 척박한 자리에서 한번 외쳐 보십시오. “르호봇. 넓다. 이곳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이 믿음의 고백을 외쳐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은 마침내 일곱 개의 우물이 있는 브엘세바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207장, 459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이삭과 관련되는 성경의 사건들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설교의 요약>

  이삭은 기근 때문에 살던 지역 브엘세바를 떠나 물을 찾아서 블레셋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삭이 흉년이라는 인생의 위기 속에서 그랄로 가서, 그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려줍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그랄에 머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삭은 점점 더 강성해지고 거부가 되어갔고, 주변의 시기를 받게 됩니다. 주변사람들은 이삭의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립니다. 블레셋의 왕도 이삭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억울한데 마을을 떠나라고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이삭은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불안하고 원통했을 것입니다. 기근의 시기에 거처를 옮기는 일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결국 그랄 땅을 떠나 어느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다행히도 거기서 물을 얻었습니다. 다시 그랄 목자들과 다투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삭은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갑니다. 천성적으로 싸움을 싫어하는 성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이삭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우물이 나왔지만, 또 빼앗기게 되어도 이삭은 다투지 않고 다시 옮겨 우물을 팝니다.

  이삭은 세 번이나 자리를 옮기면서 우물을 팠습니다. 요즈음도 어려운 일인데, 당시 상황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다행히 세 번째도 우물이 나왔고, 이번에는 그들도 더 이상 빼앗으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 우물의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그 의미는 ‘넓다’ 이지만, 바로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간 것으로 볼 때 결코 넓은 땅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처음 그랄 땅으로부터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곳, 형편없는 그런 곳까지 들어와서 우물을 판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은 곳까지 들어가 우물을 판 이삭을 더 이상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물을 빼앗으러 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삭은 쫓기고 쫓기다 마지막의 자리에서 ‘르호봇’을 외친 것입니다. 넓다! 우리가 이곳에서 번성하리로다! 척박한 곳, 골짜기의 골짜기, 사람들이 살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까지 내몰려서 ‘르호봇’을 외칩니다. 넓다! 이것이 이삭의 ‘르호봇’입니다. 이삭은 넓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밀리지 않고 빼앗아 차지해서 얻는 ‘르호봇’이 아닌, 내몰리고 밀린 자리에서 ‘르호봇’을 외친 것입니다. 가장 작고, 위축되고, 초라했던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말입니다. 이삭의 위대한 점은 넓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빼앗기고, 넘겨주고, 물러섰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사업에 실패하여 큰 사무실을 넘겨주고 작은 공간에서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싸움도 하지 않고, 물러서고, 넘겨주고, 양보하고, 그리고 남겨진 조그만 자리에서 르호봇을 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절규하고 말 것입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부부관계, 정치적인 현안에서도 말입니다.

  이삭이 그렇게 밀린 자리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르호봇을 외칠 수 있었던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을 이끌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척박한 곳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르호봇을 외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하는 자리에서 “아직도 이 자리는 넓다! 르호봇! 이 작은 가능성 위에서 번성하리라!”

  이삭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고향과도 같은 브엘세바로 돌아갑니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찾아와 서로 해하지 않기로 계약을 맺자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그 계약이 서명되자마자, 종들이 소식을 가져옵니다. 새 우물을 파서 얻은 것입니다. 르호봇! 그 외침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 있습니까?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갇혀 있습니까? 그 좁은 곳, 척박한 곳에서, 그 자리에서, 그 방에서, 외쳐 봅시다. “르호봇! 넓다! 우리가 이곳에서부터 번성하리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브엘세바 일곱 개의 우물이 있는 그곳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나누기>

1. 열심히 애쓰고 노력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억울하게 빼앗기거나, 밀리고 물러난 경험들을 나누어봅니다.

2. 양보할 수 없다고, 밀리면 진다고 끝까지 지키기보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뒤로 물러날 수 있겠습니까? 이삭처럼 물러나서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르호봇을 외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늘 밀리고 밀리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자꾸 빼앗기고 또 물러서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억울한 마음도 있습니다. 싸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용히 물러나며, 또 물러나며 우리의 마음을 다시 바로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이 좁은,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 자리에서 르호봇을 노래하게 하시옵소서. 믿음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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