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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엘의 하나님

창세기 21: 14~18

김경진 목사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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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1: 14~18

14~18

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18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한국 사회 안에서 빠름의 문화 때문에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도 합니다.>

수련회 중인 청년부를 만나기 위해 소망수양관을 방문했습니다. 새벽기도회가 끝나자마자 출발했는데 주말이어서 그랬는지 길이 제법 막혔습니다. 두 시간 이상 걸려서 겨우 도착한 듯합니다. 함께 가시는 우리 목사님들도 좀 초조하셨는지 도로가 조금 막힌다 싶으면 차선을 옮기고, 또 조금 막힌다 싶으면 차선을 변경하면서 빨리 가시고자 노력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참 묘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비슷하게 움직이는 걸 텐데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인생을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분들이 꽤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쪽으로 가면 될까 했더니 밀리고, 그래서 이쪽으로 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역시나 막히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첨예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빨리빨리 문화에 적응되고 있죠. 특히나 재수한다는 말처럼 입시를 치르는 아이에게나 부모에게 수치스런 말도 없습니다. 마치 대학 입시에 떨어지면 세상이 망한 듯이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빨리빨리 앞으로 나아가려는, 조금 부족해도 대학에 가려고 하고 자격이 미달이어도 자리는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우리 한국 사회에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문화가 한국을 세계 선진국으로 이끈 중요한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면에서 보면 그렇죠. 그러나 고도의 경쟁 사회는 사실 불행의 감정을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성장해 왔고 부러움을 사는 듯 보이지만 체감하고 있는 불행의 감정은 어느 나라보다도 큽니다.
행복 지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 해법 네트워크(SDSN)에서 2022년 세계 행복 지수를 발표했는데요. 우리나라는 세계 59위를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 2022년 국내 총생산(GDP) 순위가 12위라는 점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지는 행복 지수입니다. 현재 포탄이 떨어지는 우크라이나의 행복 지수가 80위라고 하니 우리나라 수치가 얼마나 낮은지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여러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집값을 유지하고 있어서 집을 마련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결혼은 해도 아이를 키울 만한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포기하는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올해 우리나라 출산율이 0.75명, 그러니까 전 세계에서 꼴찌라는 발표도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종종 온 가족이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접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이를 죽이고 부모 자신마저도 죽음을 택해야만 했던 그 과정이 얼마나 처절했을까요? 오죽하면 아이를 죽여야만 했겠습니까? 이와 같은 비참한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고도의 경쟁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합니다.
아마 오늘 설교를 듣는 분 중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나의 미래는 암담해. 어떻게 살아가지?’ 생각하며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미래를 잘 살아낼 수 있을지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청년들도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여 잘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놀랍게도 패자처럼 보이는 인물이 성경에도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이스마엘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관점에서 주로 읽으십니까?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말씀을 경청하고 해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기 때문이죠. 그들과 같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종적으로 아브라함의 인종인가요? 이삭의 인종입니까? 야곱과도 같은 혈통인가요? 사실 우리는 이스라엘 국민이 아닙니다.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 민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가 아브라함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피식 웃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심리 상태는 주인공인 아브라함이나 이삭과 가깝다기보다는 이스마엘과 비슷한 경험을 더 많이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가는 차선이 자꾸만 막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 하는 일이 잘 안 풀려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만 같이 느껴지는 사람들 말입니다. 다른 사람은 좋은 직장도 구하고, 나름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사람들, 남들보다 스스로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여 주십니다. 본문 속 창세기 21장에는 몇 사람이 등장합니다. 주연급으로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있습니다. 조연급으로는 아브라함의 첩이자 그의 서자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이 나옵니다. 물론 이스마엘과 이삭도 등장합니다. 우선 창세기 21장은 사라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삭을 노년에 낳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8일 만에 할례받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8절 이후에는 아이가 자라 젖을 떼고 이제 막 아장아장 자라나는 시절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때 꽤나 성장했을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목격합니다. 물론 아이들끼리 그럴 수 있지요. 이스마엘도 나름 이삭이 귀여워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에게는 너무도 귀중한 아이였기 때문에 용납하지 못합니다.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의 소생인 이스마엘과 그의 어미 하갈을 내어 쫓으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넓게 본다면 얼마든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한 가족입니다. 고대 시대를 생각해 본다면 가능한 일이죠.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첩과 함께 살았습니까? 야곱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의 아내가 둘이었습니다. 레아와 라헬. 그리고 첩이 또 둘이었습니다. 실바와 빌하. 이렇게 네 여인이 아이를 낳았고 그 자녀가 12명이 되었습니다. 그들 모두 이스라엘 지파가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가족 안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브라함과 이삭, 사라만이 기업을 이을 가족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 당시 열네 살 정도 되었을 때에 그와 그의 어미 하갈은 떡 몇 개와 물 한 부대를 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윤리적이지 않은 이야기 같습니다. 자비롭지도 않습니다. 본받을 만하지도 않습니다. 부인이 첩을 질투했고 남편의 서자와 첩을 내쫓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난처한 입장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사라의 고집과 생각을 두둔하셨을까요? 마치 자기만 알고 자기 아들만 아는 가족주의를 부추기는 것 같아 보이는데 말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언뜻 하나님이 사라의 속 좁은 생각에 동의하신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큰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그의 아들들로 이루어지는 특별한 가족이었습니다. 다윗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태어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귀한 가문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계산하셨던 셈이죠. 따라서 사라의 고집과 하나님의 허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사라의 생각이 속 좁은 가족주의, 정실(正室)과 아들의 우선주의에 있었다면 하나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자 같았던 이스마엘을 살피시며 그의 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사라를 통하여 승자의 이미지를, 하갈을 통해서는 패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갈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본다면 사라는 분명 승자였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낳았고 남편 아브라함의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역시 그녀의 편에 서 주셨습니다. 적어도 사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패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아서 14년 동안이나 길렀지만 아브라함의 대우가 달라졌습니다. 사랑도 식었습니다. 사라마저 강하게 이스마엘을 배척합니다. 하나님도 하갈을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그녀는 재산도 얻지 못한 채 떡 몇 개와 물 한 자루를 받고 쫓겨납니다. ‘사라에게서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라는 뜻을 가진 ‘사라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말이 이후 이스마엘 족속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사라는 모든 것을 다 빼앗으면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내었을까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하갈이 얼마나 분했을까?’ 아기를 낳으라고 들여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는 자신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는 모습에서 얼마나 분했을지 생각됩니다. 아마도 그녀는 평생 동안 슬픔 속에 살며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아이를 데리고 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죽음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창 21:14~16 중)

슬픈 어미 하갈의 모습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멀리서 안타깝게 울고 있습니다. 이 어머니 하갈은 더 이상 자신의 아이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도 다 떨어져 갑니다. 아이의 목이 타들어 가고 신음하는 모습, 죽어 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고통스러운 몸짓이 보입니다. 더 이상 물을 구할 길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늘하게 보이는 관목덤불 아래 아들을 두고는 멀리 떨어져 나옵니다. 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차마 보기가 어려웠던 것이죠. 차라리 소리라도 듣지 않으려고 멀리 나와 버립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21:17)

하나님께서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원통해서 울고 있는 사람은 하갈입니다. 하갈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한 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 21:18)

결국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찾게 하셨고,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보전케 해 주셨습니다. 처량하게 울고 있었던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도우시고, 약속을 주시고, 그와 함께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마엘은 생명을 보전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큰 민족을 이루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때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 (창 21:20, 새번역)

<하나님은 버려진 신세였던 이스마엘을 통해서도 그분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실패자들, 실패자라 생각하는 사람들, 지독히도 복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태어날 때부터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스스로 도태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제 끝났어!”라고 말합니까? “나는 이제 실패한 사람이야.” “나는 쫓겨난 사람이야.”라고 말합니까? 마치 하갈과 같은 사람,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입니다. 물은 찾으나 목을 축일 만한 물이 없어서 타들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실 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또 사랑에 굶주려서 타는 목마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소망의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창 21:17 중)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 21:18)

약속과 함께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혀 샘을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창 21:19 중)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돌보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창 21:20 중)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누구에게 행하신 일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아니면 이삭입니까? 아닙니다. 야곱도 아닙니다. 버려진 하갈입니다. 죽어 가던 이스마엘을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갈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몰랐을 것입니다. 사라도 그랬을 테지요. 그들은 자신만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품에 안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승리자의 하나님만은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이셨고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패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셨습니다. 실로 이 세상에 버려진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버려진 자들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통해서 다윗을 내시고 당신의 아들이시며 이 땅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그 구속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잠시 이스마엘과 이삭을 떼어 내셨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계획 안에 이스마엘도 결과적으로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먼 훗날 하나님께서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보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며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정말로 주님은 낮은 자를 향해 오셨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오셨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스마엘 자손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에서의 후손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롯의 자손들도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버려진 것 같았던 성경의 수많은 이름들과 그의 자손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하나님은 분명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사라의 하나님이시지만 하갈의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실패자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이곳에 있으십니까? 혹시 하갈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이스마엘과 같은 운명에 처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음성과 너의 고통과 절규를 듣고 있다. 내가 너를 도우리라. 내가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8월 28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이스마엘의 하나님” (창 21:8-2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88장, 29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창 21:8-2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8월 28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첨예한 결쟁의 구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절대로 뒤쳐져서는 안 되는 문화에서 살아갑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말 중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라고 하지요. 우리나라 문화가 이렇다보니, 모두가 빨리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조금 모자라거나 뒤처지면 스스로를 루저라고 생각하거나 암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은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이스마엘의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읽을 때,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경우에 자신을 대입해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남들보다 뒤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라는 첩의 자식인 이스마엘이 자신의 아이인 이삭을 놀리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합니다. 그녀는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인 하갈을 내쫓으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윤리적이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사라의 편을 들어주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사라의 고집과 생각을 두둔하셨을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약속의 자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류의 메시아가 오는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고집과 하나님의 허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원대한 구원사가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의 구도에서 승자는 명백히 사라와 이삭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분명히 패자입니다. 얼마나 분하고 억울했을까요? 광야에서 방황하던 모자는 그만 통곡을 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죽어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는 어머니 하갈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이 버려진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임재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찾게 하셨고,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이에게 마시게 하여 생명을 보전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도우셔서 약속을 주시고 그와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실패자들, 본인을 실패자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혹 우리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승리자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버려진 자들의 하나님이기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시고, 실패한 자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하나님은 동시에 이스마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누기

 

  1. 내가 실패자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었나요?
  2. 내가 낙담하고 절망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마무리기도

 

 

이스마엘과 같은 나의 삶에 오셔서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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