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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성경 속 인물인 히스기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젯밤에 일어난 이태원에서의 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라 생각합니다. 150여 명의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고, 150여 명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연관된 가족들의 숫자를 센다면 수백 명 또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 아침, 슬픔을 당하고 힘들어 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517년 종교 개혁이 있었으니깐 올해로 꼭 50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혁 교회 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신교회’라는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처음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에는 정말로 새로운 교회였고, 사회에 대안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505년이 지난 오늘에 우리 개신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고 있는지, 희망이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소개될 때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사회에 희망을 주는 종교였습니다. 여인들이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지며 인간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 주었고, 이후로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성과 종들 그리고 양반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곳이 한국교회였습니다. 최하층민인 백정이 장로가 되는 곳도 교회였습니다. 백정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는 일이 일어난 곳 역시 교회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3‧1운동을 주도했던 자리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참으로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젊은이들은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외계인처럼 취급하는 일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하나씩, 하나씩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무기력한 모습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묻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종교 개혁 주일을 맞아 일찍이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성경 속 인물 히스기야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를 통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의 의미,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남유대의 13대 왕으로 악한 왕인 아버지 아하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후 그는 2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왕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왕하 18:5~7a)
그가 행한 일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두드러진 일은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한 ‘성전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읽은 구절은 한 구절로 짧았지만, 사실은 이 구절과 연관된 본문은 굉장히 깁니다. 역대하 29~31장까지가 오늘의 본문이라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본문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히스기야가 단행한 종교 개혁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개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을 정화시키며 예배하는 우리 마음 또한 깨끗해지길 원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룬 종교 개혁은 어떠했을까요? 역대하 29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대하 29:2~5)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닫힌 성전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있었던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아하스 왕 때부터 성전 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온갖 이방 제의와 관련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예배드리는 일을 멈춘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들을 향하여 성전 안에 쌓인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내용을 열왕기하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열왕기하 18장의 내용은 히스기야의 개혁을 짧게 요약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이방 신을 섬기는 산당들이 있었고, 아세라의 목상들이 있었고, 주상들이 널려 있다고 알려 줍니다.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오랫동안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 놋뱀을 히스기야가 부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것을 ‘느후스단’ 즉 ‘놋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독사에 물렸다가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놋뱀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것을 높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낫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정말로 놋뱀을 본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놋뱀이 신성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놋뱀을 숭상하며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살려 주셨건만, 이스라엘은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놓친 채 놋뱀만을 숭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놋뱀을 부수며 이것은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진정한 종교 개혁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중세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는 점차 불필요한 것들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숭배되고 숭상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났습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세 시대 교회 안에는 마리아의 형상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다른 성인들의 형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은혜가 내려오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공로사상을 통해서, 즉 선행을 해야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면죄부가 돌아다니면서 공로를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고는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지고 도리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는 우리 안에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고, 잘못된 것들을 만들어 내도록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무엇인가 달라붙는 것들이 생깁니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과연 종교 개혁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우리 안에 있는 지저분하고 헛된 것들을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필요한 것들, 하나님이 아닌 것들,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서 부수는 일로부터 종교 개혁은 시작됩니다. 잘못된 관행, 잘못 형성된 신앙의 구조, 기복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 현실주의, 공로주의, 율법주의와 같은 일들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종교 개혁을 해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초대 교회와 싸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구원이라는 진리 안에 율법주의와 같은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이 바울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종교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루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교회 안에 가득 찬 공로주의 사상, 공로를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상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 순전하고 깨끗하게 비워 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참 예배자로 돌아오는 일이 따를 때에 주님 앞에서 귀한 성도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수도사의 수도원장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오곤 했답니다. 고양이를 참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목줄에 매고는 옆에다가 묶어 두고 미사를 직전했다고 하죠. 그런데 수도원장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남아 있던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이 한 일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고양이를 데려다가 묶어 두고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고양이가 죽게 되자, 고양이상까지 만들어 제단 옆에 두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매여서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이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안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개혁된 성도, 개혁된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덧붙여진 수많은 것들,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 허탄한 것들, 잘못된 사고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모습입니다.
<깨끗해진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결단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두 번째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역대하 30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화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서 함께 제사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과정이 3장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우선 이미 망한 백성까지 초청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돌아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피란민들이 남으로 내려오고 있을 때, 남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들을 초청해서 제사드리자고 합니다.
유월절 예식을 드리려고 하는데, 그만 시간을 보니 성전 정화에 16일이 걸렸습니다. 성전 내부를 정리하는 데 8일이 걸렸고 외부를 정리하는 데 동일하게 8일이 걸렸습니다. 유월절 날짜인 14일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날짜를 놓쳤으니 1년을 기다려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히스기야가 논의합니다. 그리고는 민수기 9장에 나오는 예외 조항을 집중해서 보게 됩니다. 부정한 자들이 예외적으로 한 달 후에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왕과 백성, 모든 지파를 통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율법을 재해석한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율법이 아닌 정신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이 일은 이후 모든 사건들 속에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드리는 예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반면에 선별된 제사장의 숫자는 너무도 적었습니다. 제사장이 모든 제물의 가죽을 벗겨야 하는데, 일일이 벗길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성결한 레위인이 동참합니다. 율법으로는 제사장만이 가능한 일에 레위인이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역대하 29장 34절 이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에서 제물 바치는 사람들이 성결하게 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스스로 그 제물을 잡는 일을 해야 했지만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성결케 되기 위해서 또 다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레위인이 제물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여 제물을 잡게 됩니다. 역대하 30장 1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성결하지 않은 백성이 급히 제물을 먹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죠. 부정한 사람이 제물을 먹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들을 벌하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는 일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겠다는 일념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길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죠. 성경은 왜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을까요? 왜 그들이 율법 어긴 사실을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어쩌면 후대도 이 사실을 알고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위험이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도리어 이례적인 사건으로 숨겨 놓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이 특별한 법에 매인 것이 아니라 정신을 따라가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무엇인가 자꾸 매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만든 법이 도리어 우리를 묶을 때가 꽤 있습니다. 법을 따지는 공동체는 건강하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법에 호소하고 법으로 해결하는 사회는 사실 불행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마음 앞으로 나아가는 개혁이었습니다.
종교는 시간이 갈수록 딱딱해집니다. 교권주의, 율법주의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맞다’, ‘틀리다’와 같은 기능이 종교의 주된 기능이 될 때가 많습니다. 판단에 사람들이 정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이란 무엇일까요? 딱딱한 율법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유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것들로 넘쳐나지 않았습니까? 보지 못한 인형극을 보면서 연극을 하고, 노래를 배우며 악기 연주를 배우고, 텐트 치는 법을 배우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어울려 교제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의 장이 교회였습니다. 종과 주인이 함께 교회를 섬기고, 종이 도리어 주인보다 먼저 장로가 되는 일이 일어난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 아름답습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꿈을 키워 갑니다.
어젯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사실 할로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귀신을 조롱하는 날인데 도리어 귀신에게 먹히는 날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왜 그들이 그곳으로 갔을까? 왜 그곳으로 떠나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일을 준비하는 거룩한 밤이 되지 못했다는 마음에 그동안 교회는 무엇을 해 왔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과연 젊은이들의 창의력과 기대, 욕구를 찾는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 반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관행과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꽁꽁 싸서 그들을 묶어 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는 곳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종교 개혁의 참 의미는 중세 교회가 공로 사상과 율법주의에 매여서 구원의 확신을 제대로 주지 못했을 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으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선언한 데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다시 찾아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자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기쁨, 이것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 개혁의 또 다른 오류는 늘 완성되었다는 착각에 있습니다. 개혁은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늘 반성하고, 점검하고,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성전을 깨끗하게 한 후에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주변의 목상과 주상들을 부숴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배당이 깨끗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처한 자리가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자리, 나의 가정, 나의 직장에 놓인 주상을 깨어버릴 수 있는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나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멈추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고,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개혁은 우리 결단으로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단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결단하고 시작한 일이 레위인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제사장과 평신도들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모두가 개혁의 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개혁은 기다린다고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결단, 누군가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결단이 없으면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단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예배당에 붙이는 순간, 새로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니…”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히스기야를 가르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개혁자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개혁자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Because It Was Done So Quickly
2 Chronicles 29:36
Today is Reformation Sunday. If we consider 1517 the year in which the Reformation started in Wittenberg, 2022 marks its 505th anniversary. As we know, the Reformation gave birth to the Protestant church.
However, 505 years on, we cannot but question ourselves, ‘Is the Protestant church today doing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God?’ In particular, as Koreans, we must ask, ‘Is the Korean church standing properly today, doing what i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When the gospel was first preached in Korea and Christianity was introduced, Christianity was a religion that gave hope to Korean society.
At a time when women were just considered “the property” of men and were not treated as full human beings, the church taught them they were God’s beloved children, giving them a new identity in Christ, and produced many great women leaders in this land.
Back then, amazing things happened in the church. Women, servants, and yangban, or Korean nobility, worshipped side by side; a baekjeongwho belonged to the lowest caste became an elder of a church and wore a gat, a hat traditionally worn only by noble class men; and his son became the first physician in Korea. It was the church that fought for Korea’s independence, withChristians leading the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that valiantly rose up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rule.
However, the Korean church today is in a sorry state. Korean society’s confidence in it has plummeted, and young people consider their Christian friends “aliens.”
I don’t think I have to describe in detail the plight of the Korean church today.
Where must the church be headed in the face of this reality, this powerlessness? Why is the church, which in the past was the very agent of change that enacted the Reformation, facing such a severe crisis? How can Christians overcome this crisis of the church?
As we celebrate Reformation Sunday, I would like to look at King Hezekiah, a biblical figure who enacted one of the earliest reforms in the Bible. From his religious reform, I want to learn what we must do today.
Hezekiah was the 13th king of Judah, who succeeded his father, an evil king,at the age of 25 and reigned for 29 years. The Bible records that he didwhat was good in the sight of God.
Kings 2 Chapter 18 describes him as follows:
“Hezekiah trusted in the Lord, the God of Israel. There was no one like him among all the kings of Judah, either before him or after him. He held fast to the Lord and did not stop following him; he kept the commands the Lord had given Moses. And the Lord was with him; he was successful in whatever he undertook.”(2 Kings 18:5-7a)
Among what he did, God was particularly pleased with his reform of the Temple.
Hezekiah’s reform of the Temple is recorded in detail in2 Chronicles chapters 29-31.By looking at this detailed description, we will be able to learn and consider the reforms that we ourselves must carry out today.
What was the process of Hezekiah’s reform?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In the first month of the first year of his reign, he opened the doors of the temple of the Lord and repaired them. He brought in the priests and the Levites, assembled them in the square on the east side and said: ‘Listen to me, Levites! Consecrate yourselves now and consecrate the temple of the Lord, the God of your ancestors. Remove all defilement from the sanctuary.’” (2 Chronicles 29:2-5)
The first thing he did was to open the doors of the Temple, which had been closed, and to remove all defilement from the sanctuary. During the reign of his father King Ahaz, the Temple doors were closed, and the sanctuary was filled with all sorts of impure things, such as objects used for worshiping foreign gods. The Levites and priests, who used to serve in the Temple and support the worship, had long stopped doing their duties. So Hezekiah starts his reform by first removing all defilement from the Temple.
Second Kings, which gives a simpler description, records the following about his reform:
“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He removed the high places, smashed the sacred stones and cut down the Asherah poles. He broke into pieces the bronze snake Moses had made, for up to that time the Israelites had been burning incense to it. (It was called Nehushtan.)” (2 Kings 18:3-4)
The Bible tells us that there were high places that served foreign gods and Asherah poles in Judah. Another interesting fact is that the Israelites had also been worshiping and burning incense to the bronze snake that Moses had made. But Hezekiah broke that into piecestoo. The Bible also tells us that it was called “Nehushtan,” meaning it was just a piece of bronze.
This shows us that after the Israelites were saved by looking at the bronze snake in the wilderness, they came to have a distorted view of and worshiped it. God’s people had come to worship the bronze snake, instead of the God behind it.
Then what was the Church like in the Middle Ages when the Reformation began?
With the passage of time, unimportant things became important, and the Medieval Church came to worship things other than God. This was what happened in the Church in the Middle Ages—just as in the Temple in Hezekiah’s time.
Such things are commonplace in this world of imperfect and finite men.
In the Medieval Church, too, things other than God were worshiped and replaced Him. For example, there was the worship of Mary, Jesus’s mother; worshiping of theimages of saints; a belief in salvation through good works; and the sale of indulgences. The Reformation of the 16th century started by abandoning such wrongs and defilements.
This is precisely what we must remembertoday as we celebrate the Reformation.
What is the problem with the Korean church today? It is that “other things” have entered the place where only God must be worshiped.
Religion tends to constantly create objects ofhuman worship, idols, and impurities. So a religious reform must start by first removing all the impure things and worthless idols within us. It starts by emptying and purifying myself.
We must first abandon wrong practices andmisguided faith, including prosperity faith, success-driven faith, materialism, realism, salvation based on good works, and legalism.
In the early church, Paul fought against legalism. In the Middle Ages, Luther fought against salvation based on good works.
It is criticalthat we purify our place of worship and remove all defilement from the place where only God must be worshiped.
What is religious reform? As we can learn from Hezekiah’s reform, the closed temple doors must be opened, the priests and Levites must return to their proper places, and all wrong practices and defilement must be removed and purified.
Apparently, the peopleof Judah had forgotten worship altogether. Therefore, the first step of Hezekiah’s reform was to make them return to the place of worship as true worshipers.
How can we become reformed Christians? Bybecoming true worshipers through our return to the place of worship, by throwing out all vain things and worthless thoughts within us, and by looking to God alone. This is what reform looks like.
The second thing we learn from Hezekiah’s reform is freedom.
Chronicles 2 Chapter 30 describes in detail how Hezekiah gathers the people and worships with them after purifying the Temple. He even calls the people of the Kingdom of Israel that has already fallen. He invites them to worship with him.
But since it has already taken 16 days to purify the Temple, the day of the Passover, which falls on the fourteenth day of the first month, has gone by. As it has now become impossible to observe the Passover at the appointed time, King Hezekiah discusses with the people what must be done. As a result,they decide to keep the Passover on the fourteenth day of the following month, accordingto an exceptional clause in Numbers 9regarding how the ceremonially unclean may observe the Passover, although this clause does not exactly apply to their situation.
In other words, they make a decision that goes beyond the law. Hezekiah and the people interpret the law in a way that allows them to unify all the tribes of Judah and Israel. They follow not the law, but the spirit of the law.
Similar things take place after this decision too. When they are inundated with sacrifices and there are simply not enough consecrated priests to carry out the task of offering the sacrifices, the Levites are allowed to take part in skinning them(2 Chronicles 29:34 and beyond).Furthermore, when many in the crowd had not consecrated themselves, the Levites killed the sacrifices in their stead (2 Chronicles 30:17 and beyond).
When the people ate the sacrifices without consecrating themselves, Hezekiah prayed for them, asking God to pardon them. Everyone had broken the law. But all they wanted was to worship the living God, and it was during this process that violations occurred.
God heard Hezekiah’s prayer, forgave their sins, and received their worship and sacrifices.
Why does the Bible reveal all these details? What was an important attribute of Hezekiah’s reform? It tried torestore the spirit of worship, not its form.
With the passage of time, we get bound to nonessential things. Sometimes the laws made to help us bind us. It is said that a community focused on the law is not a healthy one. If a community finds that it has only the law to rely on to solve its problems, then how unfortunate!
Hezekiah’s reform attempted to go beyond the law and to draw near to the heart of God.
Religion gets stiff and inflexible with the passage of time. It gets trapped in legalism and clericalism. Its main function becomes judging right from wrong. The clergy do the judging, and the lay people get judged.
But what is true reform? It is not about strictly observing the law. It is to approach the heart of God. It is to know His love and His freedom. This is true reform.
True reform requires creativity and imagination.
The early Korean church was full of them. It put on plays that had never been seen before, taught songs and instruments, built tents with the people, danced with them, and men and women shared fellowship. The church was at the front and center of a new culture.
Servants and masters served the church side by side. Sometimes the servant became an elder before the master did and went on to become the head pastor, and the master would serve the church as an elder under his leadership.
There was beauty in this creativity and imagination. The church was beautiful. And the youth and children dreamed dreams in the church.
But what about the church today? Why don’t young people come to church these days? Is it by any chance because the church has stifled our God-given freedom with its old practices, laws, and stiff order?
The true church is a free church. It is a church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where everything is free, and where everyone enjoys the freedom of God. The true meaning of the Reformation is found in that it gave people true freedom and liberation through its motto “Sola Fide” at a time when the Medieval Church, trapped in legalism and salvation through good works, failed to give them an assurance of salvation.
The final error of religion lies in its delusion that things are complete. Reform is never complete. Reform must be enacted ceaselessly. We must always reflect and review. Even if our sanctuary is clean, our homes and workplaces may not be. Therefore, reform must go on.
The moment we think it is complete, our efforts stop and we fall. The moment we think it is complete, we become proud, leading to an impure faith.
We must strive for perfection, but we must always remember that we are imperfect. This is man.Still, we must do our best. This applies to the church as well as to our individual lives.
We must continue to revise, prune, and rebuild. This is reform.
The people of Judah destroyed the Asherah poles and the bronze snake and worshiped in the Temple. Then they went home and destroyed all the idols in their homes too.
Finally, reform is usually started suddenly byour resolution. This is a gift from God.
Hezekiah’s resolve and action drew the participation of the Levites and the priests. His resolve ignited the participation of the people, too, drawing them to take part in the reform.
Reform does not happen on its own. It does not come by waiting. Someone needs to make a resolution andact. Without this resolve, there is no reform. Without the former, the latter will never happen.
Reform is something that happens suddenly, today. Our resolve can renew us. This is reform.
The moment Luther nailed his 95 Theses to a church door in Wittenberg, the Reformation began. This is reform.
“Because it was done so quickly…”
Through the resolve of Hezekiah, of Luther, of Calvin… and through my resolve, amazing reforms happen suddenly.
I hope that you will all become “true reformers,” ceaselessly reflecting on what impurities must be removedin your life and constantly thinking about and trying your best to carry out the true will of God.
The NIV describes such people as those who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the NLT as those who did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The true reformer is the one who does what i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역대하 29: 36
36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성경 속 인물인 히스기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젯밤에 일어난 이태원에서의 큰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같은 마음이시라 생각합니다. 150여 명의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 일어났고, 150여 명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연관된 가족들의 숫자를 센다면 수백 명 또 수천 명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이 아침, 슬픔을 당하고 힘들어 하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반성하는 기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종교 개혁 기념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1517년 종교 개혁이 있었으니깐 올해로 꼭 50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서 개혁 교회 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신교회’라는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처음 종교 개혁이 일어날 때에는 정말로 새로운 교회였고, 사회에 대안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505년이 지난 오늘에 우리 개신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고 있는지, 희망이 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 한국에 복음이 전해지고 기독교가 소개될 때만 하더라도 기독교는 사회에 희망을 주는 종교였습니다. 여인들이 남성의 부속물로 여겨지며 인간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 주었고, 이후로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여성과 종들 그리고 양반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곳이 한국교회였습니다. 최하층민인 백정이 장로가 되는 곳도 교회였습니다. 백정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고 독립운동가가 되는 일이 일어난 곳 역시 교회였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3‧1운동을 주도했던 자리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참으로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고, 젊은이들은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외계인처럼 취급하는 일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어쩌면 기독교가 처한 현실을 하나씩, 하나씩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교회의 무기력한 모습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묻게 되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종교 개혁 주일을 맞아 일찍이 종교 개혁을 단행했던 성경 속 인물 히스기야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그를 통하여 일어난 종교 개혁의 의미, 그리고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남유대의 13대 왕으로 악한 왕인 아버지 아하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후 그는 2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왕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하 18장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왕하 18:5~7a)
그가 행한 일 중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두드러진 일은 바로 성전을 깨끗하게 한 ‘성전 개혁’이었습니다.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성전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읽은 구절은 한 구절로 짧았지만, 사실은 이 구절과 연관된 본문은 굉장히 깁니다. 역대하 29~31장까지가 오늘의 본문이라고 보셔도 되겠습니다. 본문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히스기야가 단행한 종교 개혁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개혁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을 정화시키며 예배하는 우리 마음 또한 깨끗해지길 원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이룬 종교 개혁은 어떠했을까요? 역대하 29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레위 사람들아 내 말을 들으라 이제 너희는 성결하게 하고 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성결하게 하여 그 더러운 것을 성소에서 없애라 (대하 29:2~5)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닫힌 성전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있었던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 아하스 왕 때부터 성전 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안에는 온갖 이방 제의와 관련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이 예배드리는 일을 멈춘 지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그들을 향하여 성전 안에 쌓인 더러운 것들을 제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내용을 열왕기하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왕하 18:3~4)
열왕기하 18장의 내용은 히스기야의 개혁을 짧게 요약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이방 신을 섬기는 산당들이 있었고, 아세라의 목상들이 있었고, 주상들이 널려 있다고 알려 줍니다. 여기에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가 만든 놋뱀을 오랫동안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 놋뱀을 히스기야가 부수어 버립니다. 성경은 그것을 ‘느후스단’ 즉 ‘놋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독사에 물렸다가 살아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놋뱀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것을 높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 뱀을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낫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정말로 놋뱀을 본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놋뱀이 신성시되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놋뱀을 숭상하며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살려 주셨건만, 이스라엘은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놓친 채 놋뱀만을 숭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놋뱀을 부수며 이것은 그저 놋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진정한 종교 개혁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중세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안에는 점차 불필요한 것들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숭배되고 숭상되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났습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중세 시대 교회 안에는 마리아의 형상이 자리잡기 시작했고, 다른 성인들의 형상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은혜가 내려오는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무엇보다 공로사상을 통해서, 즉 선행을 해야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면죄부가 돌아다니면서 공로를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고는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지고 도리어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이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이하면서 생각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교는 우리 안에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내고, 잘못된 것들을 만들어 내도록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무엇인가 달라붙는 것들이 생깁니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과연 종교 개혁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우리 안에 있는 지저분하고 헛된 것들을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불필요한 것들, 하나님이 아닌 것들, 하나님을 대체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서 부수는 일로부터 종교 개혁은 시작됩니다. 잘못된 관행, 잘못 형성된 신앙의 구조, 기복주의, 성장주의, 물질주의, 현실주의, 공로주의, 율법주의와 같은 일들을 제거하는 데서부터 종교 개혁을 해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초대 교회와 싸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구원이라는 진리 안에 율법주의와 같은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에 대항하여 싸우는 일이 바울의 일이었습니다. 그의 종교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루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중세 교회 안에 가득 찬 공로주의 사상, 공로를 통해서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상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 순전하고 깨끗하게 비워 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참 예배자로 돌아오는 일이 따를 때에 주님 앞에서 귀한 성도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수도사의 수도원장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오곤 했답니다. 고양이를 참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목줄에 매고는 옆에다가 묶어 두고 미사를 직전했다고 하죠. 그런데 수도원장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남아 있던 수도사들이 수도원장이 한 일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고양이를 데려다가 묶어 두고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고양이가 죽게 되자, 고양이상까지 만들어 제단 옆에 두고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와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매여서 꼼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이것이 없으면 신앙생활이 안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개혁된 성도, 개혁된 교회의 모습이겠습니까? 우리 안에 덧붙여진 수많은 것들,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 허탄한 것들, 잘못된 사고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개혁의 모습입니다.
<깨끗해진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결단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두 번째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역대하 30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성전을 정화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서 함께 제사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과정이 3장에 걸쳐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우선 이미 망한 백성까지 초청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정말 돌아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당시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피란민들이 남으로 내려오고 있을 때, 남유다 왕 히스기야는 그들을 초청해서 제사드리자고 합니다.
유월절 예식을 드리려고 하는데, 그만 시간을 보니 성전 정화에 16일이 걸렸습니다. 성전 내부를 정리하는 데 8일이 걸렸고 외부를 정리하는 데 동일하게 8일이 걸렸습니다. 유월절 날짜인 14일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날짜를 놓쳤으니 1년을 기다려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히스기야가 논의합니다. 그리고는 민수기 9장에 나오는 예외 조항을 집중해서 보게 됩니다. 부정한 자들이 예외적으로 한 달 후에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조항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율법을 넘어서는 결정을 한 것입니다. 왕과 백성, 모든 지파를 통일할 수 있는 방향으로 율법을 재해석한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율법이 아닌 정신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이 일은 이후 모든 사건들 속에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드리는 예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반면에 선별된 제사장의 숫자는 너무도 적었습니다. 제사장이 모든 제물의 가죽을 벗겨야 하는데, 일일이 벗길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성결한 레위인이 동참합니다. 율법으로는 제사장만이 가능한 일에 레위인이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역대하 29장 34절 이후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전에서 제물 바치는 사람들이 성결하게 되지 못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스스로 그 제물을 잡는 일을 해야 했지만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성결케 되기 위해서 또 다른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레위인이 제물 드리는 사람을 대신하여 제물을 잡게 됩니다. 역대하 30장 17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성결하지 않은 백성이 급히 제물을 먹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죠. 부정한 사람이 제물을 먹게 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들을 벌하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풀어 주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어기는 일은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겠다는 일념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길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죠. 성경은 왜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을까요? 왜 그들이 율법 어긴 사실을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어쩌면 후대도 이 사실을 알고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위험이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도리어 이례적인 사건으로 숨겨 놓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이 특별한 법에 매인 것이 아니라 정신을 따라가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무엇인가 자꾸 매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만든 법이 도리어 우리를 묶을 때가 꽤 있습니다. 법을 따지는 공동체는 건강하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법에 호소하고 법으로 해결하는 사회는 사실 불행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은 율법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마음 앞으로 나아가는 개혁이었습니다.
종교는 시간이 갈수록 딱딱해집니다. 교권주의, 율법주의가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맞다’, ‘틀리다’와 같은 기능이 종교의 주된 기능이 될 때가 많습니다. 판단에 사람들이 정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이란 무엇일까요? 딱딱한 율법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유를 알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런 것들로 넘쳐나지 않았습니까? 보지 못한 인형극을 보면서 연극을 하고, 노래를 배우며 악기 연주를 배우고, 텐트 치는 법을 배우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어울려 교제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문화의 장이 교회였습니다. 종과 주인이 함께 교회를 섬기고, 종이 도리어 주인보다 먼저 장로가 되는 일이 일어난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던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정 아름답습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은 꿈을 키워 갑니다.
어젯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사실 할로윈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귀신을 조롱하는 날인데 도리어 귀신에게 먹히는 날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왜 그들이 그곳으로 갔을까? 왜 그곳으로 떠나야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일을 준비하는 거룩한 밤이 되지 못했다는 마음에 그동안 교회는 무엇을 해 왔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과연 젊은이들의 창의력과 기대, 욕구를 찾는 기능을 하고 있었는지 반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관행과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꽁꽁 싸서 그들을 묶어 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는 곳이 바로 참된 교회입니다. 종교 개혁의 참 의미는 중세 교회가 공로 사상과 율법주의에 매여서 구원의 확신을 제대로 주지 못했을 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으로 참된 자유와 해방을 선언한 데 있습니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다시 찾아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자유,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기쁨, 이것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종교 개혁의 또 다른 오류는 늘 완성되었다는 착각에 있습니다. 개혁은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늘 반성하고, 점검하고,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성경은 성전을 깨끗하게 한 후에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주변의 목상과 주상들을 부숴버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배당이 깨끗하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처한 자리가 깨끗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자리, 나의 가정, 나의 직장에 놓인 주상을 깨어버릴 수 있는 노력 또한 필요합니다. 나의 모든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우리는 멈추게 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치고, 다듬고,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개혁은 우리 결단으로 갑자기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결단은 하나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히스기야가 결단하고 시작한 일이 레위인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제사장과 평신도들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모두가 개혁의 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개혁은 기다린다고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결단, 누군가의 결심이 필요합니다. 결단이 없으면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단으로 우리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예배당에 붙이는 순간, 새로움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니…”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히스기야를 가르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개혁자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개혁자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10월 3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니” (대하 29:3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278장, 585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대하 29:3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0월 3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오늘은 505주년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 후 50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개신교회는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바른 자리에 있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는 사회에 희망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성들이 처우를 받지 못할 때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독립에 앞장섰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프로테스탄트로서 한국교회에 어떤 개혁이 필요한 것인가?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우리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의 요약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주목할 히스기야는 일찍이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께서 좋게 보셨던 왕으로 기록합니다. 특별히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두드러진 일은 바로 성전의 개혁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의 문을 열고 성소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없앴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오랫동안 섬기고 분향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그것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놋뱀에 대한 기억이 점차 놋뱀을 섬기는 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이는 중세교회의 변질된 모습을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중세 교회의 여러 성상들을 만들고, 성모로서 마리아를 숭배하거나, 면죄부 같은 것들은 바로 놋뱀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놋뱀만 보는 잘못을 저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모습을 답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와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교개혁은 잘못된 관행들을 내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이 헛된 우상들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서 또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창의적인 ‘자유’입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나눠서 행할 수 있는 그 자유입니다. 히스기야는 성전 정화를 애쓰다보니 유월절 일자를 온전히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논의하여 다음달 14일에 유월절을 지키기로 정합니다. 이는 율법이 아닌 율법에 담긴 그 정신을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율법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무엇입니까? 딱딱한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다가서는 것입니다. 초기 한국교회는 이러한 것들로 넘쳐났습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갖고 복음을 전했고, 복음에 다가서도록 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개혁은 결코 기다린다고, 그냥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결단과 결심이 없으면 개혁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니”(대하 29:36), 히스기야의 결단으로부터, 루터가 비텐베르크 예배당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는 그 결단의 순간부터, 칼뱅과 나의 결단으로 이 놀라운 개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무엇을 제거해야 할지, 무엇이 진정 하나님의 뜻일지 생각하며 끊임없이 결단하며 나오는 진정한 개혁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새번역) 평가합니다. 진정한 개혁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누기
- 신앙인의 삶에, 교회 안에 매여 있도록 하는 것과 개혁해야 할 관행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창의력과 상상력으로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마무리기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모습으로 서길 원했던 히스기야의 행적을 돌아보며 우리가 가야할 길을 다시 봅니다. 주님, 버릴 것 버리게 하시고, 도려낼 것 도려내게 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참된 종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