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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즐겁게 살라

전도서 11:9~10

김경진 목사

2023.12.17

<인생의 마지막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북부 유럽 지역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으로 알려진 분이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이라는 분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 대사들(The Ambassadors)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533년에 완성된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 대사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장 드 당트빌(Jean de Dinteville)이라는 분,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라는 분입니다. 두 사람이 다양한 물건들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서 있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이 장 드 당트빌입니다. 몸에 걸친 화려한 옷이 그의 부유함과 지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죠. 손에 잡고 있는 홀에는 그가 29세임을 알려 주는 기호가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조르주 드 셀브는 주교의 직책을 가진, 당시로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명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들의 학식과 능력을 자랑하는 물건들도 함께 있습니다. 천문학을 탐구하는 기구, 지구본, 음악의 악보, 악기, 과학·수학과 관련된 책들도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의미심장한 시계 하나가 놓여 있는데요. 이처럼 디테일이 강한 이 작품 속에 한 가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두 사람 사이 앞부분에 그려진, 무슨 형체인지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사물입니다. 이 그림은 왜곡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골임을 알게 됩니다.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라는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죠. 특정한 각도에서만 보이도록 그린 그림인데 그 내용이 해골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미학을 공부하는 분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걸작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당시의 종교적·문화적·사회적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칭찬과 더불어서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을 보고 해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은 그림입니다. 크기가 상당히 크다고 해요. 2m에 달한다는데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국에 가시게 된다면 한 번쯤 보실 만한 그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두 젊은이와 해골의 상징적인 대비가 눈에 띕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다양한 학문들을 학습하고, 음악을 하고, 과학과 수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이나 천문학의 기기들도 활용할 줄 압니다. 외국에 대사로 진출해서 역할도 감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서 있는 초상화에 놀랍게도 그들의 미래가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고 젊은 현재라도 두 사람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골은 허무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해골은 정면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비스듬하게 다른 각도에서 볼 때에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이 그림이 특별하게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덴마크에서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이 쓴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87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대표작입니다. 노르웨이 산골 마을의 목사인 아버지를 도와서 독실한 청교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마르티네 그리고 필리파라는 젊은 여인들인데, 이 여인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주위의 많은 남성들이 주변을 기웃거릴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어느 날 군인 장교 로벤헬름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잠시 머물던 중에 자매 중 한 사람인 마르티네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루고자 한 욕망 때문에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장군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된 셈이죠. 이후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로벤헬름이 마르티네의 마을을 다시 찾게 됩니다. 마르티네와 필리파는 여전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다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다 얻은 그가 젊은 시절 로벤헬름 자신에게 독백하듯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벤헬름, 오늘 너는 네가 젊은 시절 이곳을 떠났던 너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글쎄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많은 생각이 드는 대사입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난 결단. 이제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때 내가 옳았어!’라고 증명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잔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로벤헬름이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대사를 내뱉게 됩니다. “헛되다!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랑을 버리고 떠난, 그리고 영광을 찾아 떠난 인생이 한마디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헛되다.’

인생을 마무리할 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고 싶으십니까? 우리도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게 될까요?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지혜자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

 

참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헛되다는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헤벨’입니다. 헤벨은 ‘증기’ 또는 ‘숨’을 의미합니다. 공허함, 덧없음, 헛됨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다섯 번이나 ‘헛되다’라고 말한 것은 히브리어의 최상급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헛되다고 고백하는 전도자, 이 지혜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솔로몬이죠. 최고의 지혜자로 소문난 솔로몬입니다. 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이 이방에도 퍼져서 많은 왕들과 사람들이 찾아온 사람, 바로 솔로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장 큰 영예와 부귀와 명예를 얻은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풍요와 번영의 중심에 있던 왕이 얻은 지혜는 결국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헛되다는 말 속에 담긴 비밀을 알려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가 많은 솔로몬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지혜가 있어서 번뇌와 근심도 많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모든 것들을 다 누리고 경험한 끝에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솔로몬 같은 인생을 경험하고 나면, 헛되다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헛다되는 고백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발견하곤 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주위 어르신들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또 나이가 들어 질병과 고통 속에 살아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인생이 참으로 헛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인생 잘 살아야 되겠구나. 어떻게 알차게 살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헛된 인생이니 그저 포기하고 살자….’

이런 의식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작품 속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명언이죠. 현재를 즐겨라, 미래에는 최소한의 기대만 걸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이 말은 이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커팅 선생님 역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전하는 대사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집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아이들아, 너희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라(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은 인생이 유한하니 향락에 빠져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짧으니 게으르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인 인생이기 때문에 알차게 살아라, 즐겁게 살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에 대해 치열함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살라는 명령을 역설적으로 전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오늘 본문 속에 나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11:9a)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는 전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젊은이들을 향하여 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마음에 기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마음껏 살라는 자유의 명령을 건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현재 중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현재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삶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젊은이여, 즐겁게 살라”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9b)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삶의 태도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껏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실 것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병 주고 약 주는 것일까요? 우리 자유를 억압하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산다고 해서 살인하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해서 간음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당위성이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지혜자가 이것을 눈치챕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지혜라고 지혜자가 말씀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9)

 

네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하고서 마지막에 기말 시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우리는 마음껏 살 수 없을까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음껏 살아도 되지만 결과는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욜로’라는 표현 아시죠?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욜로족은 마음껏 살아갈 것을 모토로 삼는 젊은이들을 가리킵니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될 정도로 아주 유명해진 이 단어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며 전전긍긍하기보다는 현재의 삶에서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 살자는 정신적인 세계를 보여 줍니다. 지금 나 자신이 누리는 행복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하게 소비하더라도 괜찮다는 정신입니다.

한때는 굉장히 각광받는 것 같던 ‘욜로족’의 흐름도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옅여지는 분위기입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Trendmonitor.co.kr) 기관에서 최근에 조사한 내용인데요. 2022년 1월에 19살부터 59살까지 전국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없다”는 말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말에 동의하느냐? 물었더니 74%가 동의한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74% 육박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못할 것 같다고 대답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무려 62%의 사람들이 노후 준비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 때문에 마음대로 살기가 어렵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욜로의 삶을 즐기고는 싶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마음껏 살고 싶지만 정작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러하지 못한다네요.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마음껏 살라고 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줄을 알라는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으면 어쩌나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이것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괴테가 쓴 파우스트, 이 작품 중 2부 5막에 보면 근심이 말을 걸어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근심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목소리,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마음속엔 쟁쟁히 울릴 거예요. 온갖 형상으로 바뀌면서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나 파도 위에서나 영원히 불안한 길동무이지요.” 근심이 또다시 말합니다. 누구든 내게 한 번 붙잡히면, 온 세상이 쓸모없게 되지요. 영원한 어둠이 내리덮어서 해는 뜨지도 지지도 않고, 외부의 감각이 완전하다 해도 내부엔 어둠이 자리잡게 됩니다. 온갖 보화 중 어느 것 하나도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없어요. 행복도 불행도 시름이 되어 풍족한 속에서도 주리게 되지요.”

근심이 하는 말입니다. 근심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거리에 억눌려서 살아갑니다. 진학에 대한 걱정, 취업에 대한 걱정, 직장, 사업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 질병에 대한 걱정, 노후에 대한 걱정 … 아마 근심거리를 나열하라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심판이 걱정이 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악에서 떠날 때에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지혜자는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두 가지 비결을 함께 말해 줍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1:10)

 

여러분,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혜자가 말합니다. “네 근심이 떠나가게 하라. 그리고 악에서부터 돌이켜라.” 사실 어느 누가 근심하고 싶어서 근심합니까? 근심이 다가오는데 어떡합니까. 근심이 나를 싸매고 공격해 오는데 어떻게 도망쳐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근심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근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실 때에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여기에 해결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이렇게만 본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길 같지만, 이 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시며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수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근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 우리와 언제나 동행해 주시는 성령님을 믿을 때 근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근심 자체를 보지 말고 주님이신 그분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근심을 물리치는 길이고,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가 물 위를 함께 걷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만 두려워하면서 물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근심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망의 권세가 놓여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든 것들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을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또한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이 전도서 11장 10절에 나옵니다.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11:10)

 

우리가 악을 멀리 해야 하는 이유는 악이 근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그것이 또 다른 근심을 만들어 내며, 심판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현장에서 예수님이 잡힌 여인을 놓아주시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주님께서는 놓아 주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그녀가 자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간음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범하지 않는 길이 자유를 누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4부 예배에는 장로 권사 은퇴식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시는 시간이지만 아직 남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비록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즐겁게 살라는 주님의 명령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인데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선하신 그분의 계획을 바라보며 믿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삶을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마음껏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악에서부터 떠나서 주님과 늘 동행하며, 주님께서 이루시는 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Live Life Happily

 

Ecclesiastes 11:9-10

 

“The Ambassadors” is a masterpiece by Hans Holbein, a leading artist of the Northern Renaissance. Completed in 1533, it is one of Holbein’s most renown portraits. It portrays two people: Jean de Dinteville and Georges de Selve, both ambassadors. They stand on each side of the painting with various objects placed between them.

 

On the left is Jean de Dinteville, whose lavish clothes reveal his wealth and status. An inscription on the scepter in his right hand reveals his age, 29. Georges de Selve,who was also a bishop, was a man of great standing of the time.

 

Between them are many objects that symbolize the era’s civilization and proudly point to the knowledge and capability of the two ambassadors. There are astronomical instruments, globes, musical instruments, music sheets, and science and math books of the period. Asymbolic sundial is portrayed at the center.

 

This impressive work of art, rich in detail, holds a secret. There is an unidentifiable image at the bottom between the feet of the two men: a distorted skull. The skull, rendered in anamorphormic perspective, can be seen clearly only when viewed from an oblique angle.

 

Many people have called “The Ambassadors” a masterpiece, including scholars of aesthetics. It is because the incredibly detailed portrait is full of hidden meanings about the political, religious, social context of the time.

 

Yet what is most striking about this piece is the symbolic meanings of the two young men in splendor and the skull. Holbein draws a portrait of two extravagantly dressed men in the prime of youth, who are learned in diverse fields, are skilled in music, understand math and science, and have extended their roles to outside their country as ambassadors capable of using the compass and other astronomical instruments… But in that very portrait he also draws their future: death. Futility. A skull.

 

Let me tell you a story from Babette’s Feast, a major work by Isak Dinsen, the great Danish writer. This short story was made into a film in1987, moving the hearts of many.

 

Two pious sisters, Martine and Filippa, live in a small Puritan community in Norway, helping their father, a pastor. One day, a young army officer, Lorens Löwenhielm, visits the village. During his stay he falls in love with Martine, but due to his worldly ambitions he leaves. After a long time, after he has become a general, he returns to the town. He has everything—fame and riches. But in his return to the village he finds himself deep in thought. There is a scene where he speaks in a kind of soliloquy to his younger self: “Tonight you must prove to me that what I did was right.”

 

After telling himself that he has to prove that his decision to abandonthe women he loves for success is right, Löwenhielmshouts, “Meaningless! Meaningless! All is in vain!” Although this scene is not part of the main plot, it has always stayed with me.

 

“Meaningless! Meaningless! All is in vain!” Will we eventually say these words too?

 

Solomon, the author of today’s Scripture, confessed the same words:

 

“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Ecclesiastes1:2 KJV)

 

In this short verse “vanity” is repeated five times. The Hebrew word for it is “hevel,” which primarily means “breath, vapor,” but figuratively also means “futile, meaningless, or vain.” The use of “hevel” five times in this short verse is a literary method that indicates a superlative. The author of Ecclesiastes is saying that all of man’s labor under the sun as well as all the wealth and fame he gains from it are meaningless.

 

Who is the author? It is Solomon, Israel’s king who was wiser than any man of the time. There was no sage greater than he during his time. His wisdom was known even among neighboring countries; and many kings and people sought him for wisdom and knowledge.

 

Not only that, Solomon, as Israel’s ruler, lived an extravagant and glorious life. He lived in an era of prosperity and wealth; he was at the center of it, enjoying it all.

 

Yet, as Solomon calmly reflects on his life, he confesses that all of it was “vanity of vanities.” He admits his life of wisdom, glory, and luxury was all in vain. Though others said of him, “How happy you must be to have so much wisdom!”, he himself sighed, saying, “For with much wisdom comes much sorrow; the more knowledge, the more grief.” (Ecclesiastes1:18 NIV) Solomon had tasted all that people sought—success, prosperity, and pleasures—but in the end he confesses, “all is vanity.”

 

I too have similar thoughts—that life is vain—as I age and see elderly people around me suffer from many sicknesses and pain and eventually go to the Lord one by one.

 

When such things happen around us, we cannot but think, ‘How must we live from now? How can we live wisely?’ As we contemplate on our life,which is headed toward the end and will surely end in vain, we cannot but ask this question: How must we live?

 

“Carpe diem” is the famous Latin phrase written by Quintus Horatius Flaccus, or Horace, the great Roman poet. The complete verse goes like this: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which translates to “seize the day, putting as little trust as possible in the future.”

 

These words capture the way of life of the man finite. Man is destined to die; but that doesn’t mean he must give up on life. Paradoxically, he must strive to live. We must live today faithfully—for today is a moment that will never come again after death.

 

This is the meaning of “carpe diem.” We must give our utmost to the present, being grateful for it. That does not mean we must live a hedonistic, fearful, or lazy life. Carpe diem is an attitude that lives the present fully.

 

John Keating’s famous line in Dead Poet’s Society, rendered superbly by Robin Williams, comes from this very verse written by Horace: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A very similar expression is found in today’s text from Ecclesiastes:

 

“Be happy, young man, while you are young, and let your heart give you joy in the days of your youth. Follow the ways of your heart and whatever your eyes see,” (Ecclesiastes 11:9a NIV)

 

Asthe Teacher, Solomon, compiles knowledge and wisdom, he says to the young, “Enjoy your youth and be happy about the days of your youth. And do as your heart wishes and follow whatever your eyes see.”

 

This is a command on freedom to live as one wishes. It teaches us not to miss out onour youth. It advises us to fully enjoy and rejoice in our short-lived youth. The best of all our present will be that of our youth. The Teacher tells his readers to enjoy that present. Why? Because life is futile.

 

But then he goes on to say:

 

“but know that for all these things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Ecclesiastes 11:9b)

 

The wise attitude of the finite man is to live each day happily, to the fullest. He mustfollow the ways of his heart. But there is a catch: He must do so, knowing that at the end of his life God will judge him.

 

Live to your heart’s content, the Teacher says. But in the next breath he warns of a judgement at the end. What is this? Is the Teacher giving us a kiss and a punch at the same time? This may displease some readers as it appears to restrain our freedom.

 

But the reason Solomon says this is because although we can, and should, live as we wish, this does not mean we are allowed to commit murder or adultery or lie just because our heart desires it. In other words, our freedom must not infringe upon that of others.

 

However, the true meaning of these words go beyond that. It means that man’s every action will be judged by God. We may want to deny this, but this is the reality, God’s will, and the certain truth of the future.

 

Therefore, the Teacher is saying that living in acceptance of this fact is true wisdom.

 

Now let’s think about this. What is the secret to living a happy life in an uncertain world? The Teacher says:

 

“Be happy, young man, while you are young, and let your heart give you joy in the days of your youth. Follow the ways of your heart and whatever your eyes see, but know that for all these things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 (Ecclesiastes11:9 NIV)

 

In this verse the Teacher advises young people to follow their heart’s desires and whatever they see. He tells them to pursue their heart’s wishes in this visible world. But there is one thing they must remember—“for all these things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

 

Today’s passage tells us to live happily. It tells us not to be afraid, anxious, or nihilistic, but to live happily in this world of uncertainty and endless competition. It encourages us to have joy in our hearts, to rise to challenges, to have dreams, to not fear failure, to do our best, and to live life magnificently—instead of living unhappily amidst a depressed atmosphere. Yet there is just one thing to remember according to the Bible: “know that for all these things God will bring you to judgment.” Therefore, the meaning of this verse is this: “Enjoy life without fear, but do so with one thing, one constant, in mind: God’s judgement.”

 

What is the secret to living to one’s heart’s desire in recognition of God’s judgement? How can we always remember this constant, while living life as we wish?

 

These days, the motto of some young people is to live as they want. This is called YOLO, short for “You only live once.”

 

This acronym was so widely used that it even made it to the 2016 Oxford Dictionary. YOLO reflects the life attitude of young people these days who are choosing to enjoy life and the present to the fullest, rather than to struggle in preparing for an uncertain future. It refers to a lifestyle that makes decisions on the basis of attaining an individual’s happiness in his/her present reality.

 

However a recent report explains that this trend has weakened somewhat in recent years. In a January 2022 survey of 1,000 people aged 19-59, Trendmonitor, a market research company, found the following (trendmonitor.co.kr): 74.4% of the respondents answered, “I will have no regrets if I live doing what I want in the present,” while 73.7% said personal happiness was their number one priority, which show that the majority prefers a YOLO lifestyle. Yet, at the same time, many people thought such a lifestyle was realistically unfeasible. The reasons listed were anxiety and strain of preparing for old age (62.4%), limited income (46.3%), and an unidentifiable anxiety and fear (34.4%).

 

In other words, though people want to enjoy a YOLO lifestyle, their worry and anxiety for the future make it impossible. What prevents us from living out our free decisions, from living as we want? Our worry and anxiety for the future.

 

Then how can we live life happily, recognizing judgement as a constant factor? Ecclesiastes 11:10 teaches us two secrets to doing this:

 

“Therefore remove sorrow from thy heart, and put away evil from thy flesh: for childhood and youth are vanity.”(Ecclesiastes11:10 KJV)

 

First, the Bible tells us to “banish anxiety” from our hearts. This means to live with a faith in God, a faith in our Lord. When anxiety enters our hearts, our hearts become overwhelmed by it. Anxiety is like a deep mire that traps our souls in obscurity. The anxious person has no joy. He loses any satisfaction or joy in life.

 

Anxiety is such a great threat to us because although it is invisible and inaudible, it quietly penetrates us in completely unexpected ways and forms.

 

Goethe, the great German writer and philosopher, wrote the following in Faust Part II Act V. This is what Care says to Faust:

 

CARE: Though the ear choose not to hear,

In the heart I echo, clear:

Savage power I exercise,

Transformed I am, to mortal eyes.

On the land, and on the ocean,

Evermore the dread companion,

Always found, and never sought,

Praised, as well as cursed, in thought. –

Have you yourself not known Care?

(Goethe)

 

Goethe splendidly describes the savage power of Care whose voice echoes in a person’s heart even when he does not hear it in his ears. Care continues to say in FaustPart II Act V:

 

CARE: When of man I take possession,

Then his whole world is lessened:

Endless gloom meets his eyes,

No more suns will set or rise,

Though intact, to outer sense,

He lives in the dark, intense,

Never knowing how to measure

Any portion of his treasure.

Good and ill are merely chance,

He starves, food in his hands:

Be it joy or be it sorrow

He delays it till tomorrow,

Waiting for the future, ever,

Finding his fulfilment, never.

(Goethe)

 

Care, or anxiety, has this vicious power.

 

Countless people living in this era are oppressed by their worries and cares. They are anxious about entering university, getting a job, their work and business, their children, disease, old age and so on. With a heavy burden on their shoulders, many live unhappily.

 

Then how can we stay away from care?

 

To those of us unable to live happily due to the onus of care and worry, our Lord says: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Trust in God; trust also in me.”(John14:1)

 

Our Lord also says, “You will grieve, but your grief will turn to joy.” (John 16:20)

 

The reason we are not troubled is because we believe in God who guides our lives to the best path. Because Jesus, who constantly guides us with His loving hand, is with us. Though we are weak, the Holy Spirit who prays for us in inexpressible groanings is always with us. We can be happy and not be troubled because we know that “in all things God works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him, who have been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Romans 8:28)

 

Today’s passage reveals another secret to living happily as we remember God’s judgement. Let’s look at verse 10 again:

 

“Therefore remove sorrow from thy heart, and put away evil from thy flesh:”(Ecclesiastes 11:10KJV)

 

Second, the Bible tells us to “put away evil from thy flesh.” The Bible repeatedly teaches us to put away evil and do good. (Psalm 37:27, 1 Peter 3:11, etc.) It tells us not to swerve to the right or to the left and to keep our foot from evil. (Proverbs 4:27)

 

Evil presents itself attractively, changing its form according to the times, the circumstances, and the person. The Bible commands us to stay away from this evil that tempts us in diverse forms.

 

The reason we must stay away from evil is that it causes trouble and cares. Evil also makes it impossible for us to stand in the judgement. Therefore, we must abandon all forms of evil and do good. The one who does this can live life happily.

 

Dear Church, the Lord wants you to live life happily. He does not want you to be trapped in anxiety or pessimism for the future, wasting life; He wants you to have dreams and rise to challenges in this world, living life magnificently with God-givenpeace and joy.

 

Today, particularly in the 1:30 service,we will have a retirement ceremony for elders and senior deaconesses. The beautiful marks of their humble service and sacrifice are seen everywhere in Somang Church. This church has stood strong thanks to their prayers and dedication. Though we do not know all the noble work they have done, our Lord, who does, will reward them with His reward and crown.

 

Some people are saddened and depressed by ageing. But ageing beautifully is also a wisdom we must learn in life.

 

You know what an antique furniture is. It is a beautiful piece that represents the culture, art, history, and lifestyle of the time it was crafted. Accordingly, an antique has a historical value in itself, giving the owner a unique experience and sense ofownership. While most objects are forgotten and thrown away with time, the value of a special object, like an antique,increases with time and is cherished even more.

 

To the elders and senior deaconesses retiring today, I would like to say that you are truly precious to God and to us—like valuable antiques, no, in an incomparable way. You have kept your faith in God every moment, dedicated yourselves to our church faithfully, and have lived your lives to the fullest. Because of all these moments, the value of your lives will increase further and even after retirement, you will be recognized as a precious and beloved man/woman of God by many.

 

It is my hope that not only the retiring elders and senior deaconesses but everyone worshiping here today will not be anxious and live life happily in their faith in God. This is God’s will and desire for us. May you live magnificent lives that shine gloriously and become more valuable as time goes by. God will be with you until the end of the world. Let’s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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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11:9~10

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인생의 마지막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북부 유럽 지역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으로 알려진 분이 있습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이라는 분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 대사들(The Ambassadors)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533년에 완성된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 대사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장 드 당트빌(Jean de Dinteville)이라는 분, 조르주 드 셀브(Georges de Selve)라는 분입니다. 두 사람이 다양한 물건들을 사이에 두고 양옆에 서 있습니다. 왼쪽에 서 있는 인물이 장 드 당트빌입니다. 몸에 걸친 화려한 옷이 그의 부유함과 지휘를 잘 드러내 주고 있죠. 손에 잡고 있는 홀에는 그가 29세임을 알려 주는 기호가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조르주 드 셀브는 주교의 직책을 가진, 당시로는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명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들의 학식과 능력을 자랑하는 물건들도 함께 있습니다. 천문학을 탐구하는 기구, 지구본, 음악의 악보, 악기, 과학·수학과 관련된 책들도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는 의미심장한 시계 하나가 놓여 있는데요. 이처럼 디테일이 강한 이 작품 속에 한 가지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두 사람 사이 앞부분에 그려진, 무슨 형체인지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사물입니다. 이 그림은 왜곡된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골임을 알게 됩니다. 아나모르포시스(anamorphosis)라는 기법으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하죠. 특정한 각도에서만 보이도록 그린 그림인데 그 내용이 해골이라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미학을 공부하는 분들을 포함하여 다양한 사람들에게 걸작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당시의 종교적·문화적·사회적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했다는 칭찬과 더불어서 다양한 각도에서 그림을 보고 해석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극찬을 받은 그림입니다. 크기가 상당히 크다고 해요. 2m에 달한다는데 런던의 내셔널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국에 가시게 된다면 한 번쯤 보실 만한 그림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두 젊은이와 해골의 상징적인 대비가 눈에 띕니다. 그들은 화려한 옷을 입었습니다. 한창 젊은 나이에 다양한 학문들을 학습하고, 음악을 하고, 과학과 수학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침반이나 천문학의 기기들도 활용할 줄 압니다. 외국에 대사로 진출해서 역할도 감당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서 있는 초상화에 놀랍게도 그들의 미래가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멋지고 젊은 현재라도 두 사람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골은 허무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 해골은 정면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비스듬하게 다른 각도에서 볼 때에 역력하게 드러납니다. 이것이 이 그림이 특별하게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덴마크에서 최고의 작가로 꼽히는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이 쓴 바베트의 만찬(Babette’s feast)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87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대표작입니다. 노르웨이 산골 마을의 목사인 아버지를 도와서 독실한 청교도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마르티네 그리고 필리파라는 젊은 여인들인데, 이 여인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주위의 많은 남성들이 주변을 기웃거릴 정도였습니다.

그곳에 어느 날 군인 장교 로벤헬름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잠시 머물던 중에 자매 중 한 사람인 마르티네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세상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이루고자 한 욕망 때문에 결국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장군이 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된 셈이죠. 이후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많이 들어서 로벤헬름이 마르티네의 마을을 다시 찾게 됩니다. 마르티네와 필리파는 여전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다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다 얻은 그가 젊은 시절 로벤헬름 자신에게 독백하듯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로벤헬름, 오늘 너는 네가 젊은 시절 이곳을 떠났던 너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해!”

글쎄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많은 생각이 드는 대사입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사랑하는 여인을 떠난 결단. 이제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때 내가 옳았어!’라고 증명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잔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로벤헬름이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대사를 내뱉게 됩니다. “헛되다!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사랑을 버리고 떠난, 그리고 영광을 찾아 떠난 인생이 한마디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헛되다.’

인생을 마무리할 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고 싶으십니까? 우리도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하게 될까요?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지혜자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2)

 

참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헛되다는 단어가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헛되다’는 ‘헤벨’입니다. 헤벨은 ‘증기’ 또는 ‘숨’을 의미합니다. 공허함, 덧없음, 헛됨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다섯 번이나 ‘헛되다’라고 말한 것은 히브리어의 최상급을 나타내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전도자가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헛되다고 고백하는 전도자, 이 지혜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솔로몬이죠. 최고의 지혜자로 소문난 솔로몬입니다. 그의 지혜에 대한 소문이 이방에도 퍼져서 많은 왕들과 사람들이 찾아온 사람, 바로 솔로몬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장 큰 영예와 부귀와 명예를 얻은 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풍요와 번영의 중심에 있던 왕이 얻은 지혜는 결국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성경은 인생이 헛되다는 말 속에 담긴 비밀을 알려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혜가 많은 솔로몬을 부러워하지만, 정작 그는 지혜가 있어서 번뇌와 근심도 많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모든 것들을 다 누리고 경험한 끝에 모든 것이 헛되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솔로몬 같은 인생을 경험하고 나면, 헛되다는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헛다되는 고백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발견하곤 하지 않습니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주위 어르신들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또 나이가 들어 질병과 고통 속에 살아가시는 분들을 보면서 인생이 참으로 헛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드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인생 잘 살아야 되겠구나. 어떻게 알차게 살까?’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헛된 인생이니 그저 포기하고 살자….’

이런 의식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의 작품 속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명언이죠. 현재를 즐겨라, 미래에는 최소한의 기대만 걸어라(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이 말은 이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존 커팅 선생님 역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가 학생들에게 전하는 대사로 알려지면서 유명해집니다.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 아이들아, 너희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어라(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은 인생이 유한하니 향락에 빠져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생이 짧으니 게으르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 한 번인 인생이기 때문에 알차게 살아라, 즐겁게 살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에 대해 치열함을 가지고 몸부림치며 살라는 명령을 역설적으로 전하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오늘 본문 속에 나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11:9a)

 

인생이 헛되다고 말하는 전도서 11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젊은이들을 향하여 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마음에 기뻐하는 대로 살아보라고 권면합니다. 마음껏 살라는 자유의 명령을 건네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현재 중에 가장 좋은 때는 언제일까요? 젊은이들이 경험하는 현재가 아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삶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젊은이여, 즐겁게 살라”는 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전도자가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9b)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삶의 태도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껏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심판하실 것을 염두에 두며 살아가라고 합니다. 아니, 그렇다면 병 주고 약 주는 것일까요? 우리 자유를 억압하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도자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산다고 해서 살인하며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해서 간음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당위성이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자유가 다른 이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침해하는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지혜자가 이것을 눈치챕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지혜라고 지혜자가 말씀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9)

 

네 마음껏 살아도 된다고 하고서 마지막에 기말 시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우리는 마음껏 살 수 없을까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합니다. 마음껏 살아도 되지만 결과는 책임져야 한다….

이러한 딜레마를 우리 젊은이들이 많이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욜로’라는 표현 아시죠?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오직 한 번뿐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욜로족은 마음껏 살아갈 것을 모토로 삼는 젊은이들을 가리킵니다. 2016년, 옥스퍼드 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될 정도로 아주 유명해진 이 단어는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며 전전긍긍하기보다는 현재의 삶에서 최대한 기쁨을 누리며 살자는 정신적인 세계를 보여 줍니다. 지금 나 자신이 누리는 행복감이 중요하기 때문에 과하게 소비하더라도 괜찮다는 정신입니다.

한때는 굉장히 각광받는 것 같던 ‘욜로족’의 흐름도 근래에 들어서 조금씩 옅여지는 분위기입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Trendmonitor.co.kr) 기관에서 최근에 조사한 내용인데요. 2022년 1월에 19살부터 59살까지 전국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고 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 후회가 없다”는 말에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말에 동의하느냐? 물었더니 74%가 동의한다고 대답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 거죠. 개인의 행복을 우선시하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74% 육박한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못할 것 같다고 대답한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무려 62%의 사람들이 노후 준비에 대한 부담감과 불안감 때문에 마음대로 살기가 어렵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욜로의 삶을 즐기고는 싶지만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마음껏 살고 싶지만 정작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러하지 못한다네요.

말씀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마음껏 살라고 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줄을 알라는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으면 어쩌나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이것을 넘어서는 원초적인 근심거리가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학가인 괴테가 쓴 파우스트, 이 작품 중 2부 5막에 보면 근심이 말을 걸어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근심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목소리,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마음속엔 쟁쟁히 울릴 거예요. 온갖 형상으로 바뀌면서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나 파도 위에서나 영원히 불안한 길동무이지요.” 근심이 또다시 말합니다. 누구든 내게 한 번 붙잡히면, 온 세상이 쓸모없게 되지요. 영원한 어둠이 내리덮어서 해는 뜨지도 지지도 않고, 외부의 감각이 완전하다 해도 내부엔 어둠이 자리잡게 됩니다. 온갖 보화 중 어느 것 하나도 제 것으로 소유할 수 없어요. 행복도 불행도 시름이 되어 풍족한 속에서도 주리게 되지요.”

근심이 하는 말입니다. 근심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거리에 억눌려서 살아갑니다. 진학에 대한 걱정, 취업에 대한 걱정, 직장, 사업에 대한 걱정, 자식에 대한 걱정, 질병에 대한 걱정, 노후에 대한 걱정 … 아마 근심거리를 나열하라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 자신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의 심판이 걱정이 되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악에서 떠날 때에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때 지혜자는 심판을 염두에 두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두 가지 비결을 함께 말해 줍니다.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1:10)

 

여러분,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지혜자가 말합니다. “네 근심이 떠나가게 하라. 그리고 악에서부터 돌이켜라.” 사실 어느 누가 근심하고 싶어서 근심합니까? 근심이 다가오는데 어떡합니까. 근심이 나를 싸매고 공격해 오는데 어떻게 도망쳐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근심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근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것을 짊어지시고 돌아가실 때에 친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1)

 

여기에 해결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이렇게만 본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길 같지만, 이 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시며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수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근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언제나 사랑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 우리와 언제나 동행해 주시는 성령님을 믿을 때 근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근심 자체를 보지 말고 주님이신 그분을 바라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이 근심을 물리치는 길이고, 근심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가 물 위를 함께 걷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만 두려워하면서 물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습니다.

근심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사망의 권세가 놓여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든 것들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주 예수님을 믿을 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또한 주님께서 원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인생을 즐겁게 사는 비결이 전도서 11장 10절에 나옵니다.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11:10)

 

우리가 악을 멀리 해야 하는 이유는 악이 근심을 유발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그것이 또 다른 근심을 만들어 내며, 심판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간음하다 잡혀 온 현장에서 예수님이 잡힌 여인을 놓아주시면서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주님께서는 놓아 주시며 용서해 주십니다. 그녀가 자유하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간음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씀은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죄를 범하지 않는 길이 자유를 누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4부 예배에는 장로 권사 은퇴식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시는 시간이지만 아직 남은 시간들이 있습니다. 비록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 즐겁게 살라는 주님의 명령이 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모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인데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선하신 그분의 계획을 바라보며 믿고 살아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삶을 기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마음껏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악에서부터 떠나서 주님과 늘 동행하며, 주님께서 이루시는 귀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3년 12월 17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인생을 즐겁게 살라 (전 11:9~10)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428장, 431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전 11장 9~10절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 으로 접속. 12월 17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전도서의 저자인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 1장 2절) 라고 말합니다. 전도자인 솔로몬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서도 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될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설교의 요약

 

전도자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성공과 번영과 즐거움을 다 누려봤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곰곰이 회고해보니, 이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지혜와 명예와 호화로운 삶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인생일까요?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대로 행하라(전도서 11장 9절a). 이 말씀은 마음껏 살아가라는 자유의 명령입니다.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짧게 지나가는 청년의 날을 기쁘게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뒤이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도서 11장 9절b).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삶의 태도는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껏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의 마지막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살인해서는 안 되고, 내가 하고 싶다고 간음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거짓말하고 싶다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수로 두고 즐겁게 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은 첫째, “근심이 우리의 마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우리 인생을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언제나 사랑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이 우리의 몸에서 물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근심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심판을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악은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나누기

 

  1. 우리의 인생 속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인생의 모습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인생의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모두 느끼게 하옵소서. 마음껏 살라고, 행복하게 살라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르게 듣게 하옵소서. 늘 심판을 기억하며 죽음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포기나 좌절이나, 나태함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께로 더욱 나아가는 순례의 행진이 계속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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