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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
오늘 본문은 난해합니다. 성경에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들이 몇 있는데, 오늘 본문만큼 어려운 본문도 흔하지 않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출애굽기를 읽어 내려가는데, 흐름이 끊기는 부분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마치 불필요한 내용이 삽입돼 본문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 맥락은 이렇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당신이 누구신가를 모세에게 알리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고 애굽인의 학대를 내가 보았으니,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모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좀처럼 애굽으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갑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약속하시며, 애굽 왕 바로 왕 앞에 설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누가 나를 보냈냐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며 연달아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 나는 야훼,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시,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는 모세의 핑계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세 가지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낫게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일강 물을 떠서 땅에 뿌리니 피가 되는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또다시 자신은 혀가 둔하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이미 아론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으니, 그와 함께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승복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이드로에게 자신이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아내인 십보라와 자녀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장면이 전개됩니다. 하나님이 돌연 모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입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애굽기 4:24)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토록 공들여 모세를 부르시고, 설득해 내셨으며, 이제 드디어 모세가 길을 떠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이 시점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독자로서 우리는 이 본문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절대 안 죽지.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 물론 우리는 그다음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말 모세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 삶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
소망교회에 부임한 후로는 거의 방송 매체를 보지 못했는데, 이전에 시간이 날 때 종종 TV를 보곤 했습니다. 제가 주로 즐기는 장르는 스포츠였습니다. 드라마보다는 스포츠 보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래서 때로는 ‘너무 편파적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주인공 중심으로만 전개되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포츠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곤 합니다. 누구든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언제든 주인공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손흥민이 주인공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는 늘 흥미롭고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을 드라마나 소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는 분명 죽지 않을 것이고 승승장구해야 합니다. 모세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츠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가 갑자기 부상을 당해 실려 나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본다면, 마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주인공 같은 사람도 한 번의 실수로 역사에서 퇴장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충분히 설득하셨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게 된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제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모세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은 암시가 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그 순간에 긴장이 조성됩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이제 막 캐스팅된 모세를 죽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신학대학교에 입학할 때쯤 저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상당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신학교에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으니, 적어도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까지는 나를 죽이지 않으실 거야.’라는 안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인공적인 사고는 그해 여름,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름방학에 어느 선배님이 교회학교 수련회를 갔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는 대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슬퍼했고,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이곳도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죽음을 피해 왔는데, 신학교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런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는 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이니, 그런 죽음까지는 하나님이 신학생에게도, 목회자에게도 허락하시나 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처럼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형편없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도 그해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하숙집에서 그만 연탄가스 노출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고, 정말 가치 없어 보이는 죽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헌신을 하는 신학생에게까지 허용된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죽이실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은 버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따르는 이들도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아내실 수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YES”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을 돌보면서도, 주연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라거나,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그렇게 그들을 데려가곤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매우 결정적인 자리에 위치합니다. 없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불연속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연속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어떻게 주인공 모세가 죽을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연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모세가 죽었다면,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을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연은 모세가 아닙니다. 주연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열심히 설득하고 달래셔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드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모세는 나에게 유용한 일꾼이지만, 내가 모세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원인을 만들고,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자다. 나는 야훼다. 나는 여호와, 내가 주인공이다.”
<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주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는 질그릇이고, 때로는 토기장이가 얼마든지 부숴 버릴 수 있는 토기일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가며, ‘이곳에서 실제로 모세가 죽을 수도 있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를 어떠한 이유로 죽이려 하셨던 것일까요? 이후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할례’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그렇게 명령해 두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0~12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세기 17:10~12)
그렇다면 모세는 할례를 받았을까요? 태어나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아이 모세를 보고 ‘히브리인’으로 바로 알아볼 만큼,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점은,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십보라가 그 순간, ‘할례’를 시행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십보라가 할례 베풀 생각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하니 (출애굽기 4:25)
본문의 흐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두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그때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보라는 어떻게 할례를 알았으며, 또 어떻게 할례를 시행하는 법을 알았고, 할례 베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게르솜’이며, 둘째는 ‘엘리에셀’입니다. 아마 모세는 첫째 아들 게르솜을 낳은 후 할례를 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1절 이후를 보면, 모세가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한 후에 게르솜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태어난 아들에 대한 기록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둘째 엘리에셀의 이름은 출애굽기 18장에 가서야 등장합니다. 아마 게르솜을 낳고 오랜 후에 둘째 엘리에셀을 낳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 왔을 때, 처음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잊지 않았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첫째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여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믿음,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져 갔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인 미디안 여인 십보라는 오랜 기간 모세를 통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선뜻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례의 경우 첫 아들 게르솜에게는 할례를 행하도록 놓아두었지만, 그 아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본 후 십보라의 마음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십보라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십보라가 아들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떠나려는 바로 그때, 정작 그의 가정은 온전한 이스라엘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정황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이의 포도원을 돌봐야 하는 바로 그때,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한 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와 모세의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 사역에 앞서 자신의 ‘신앙’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이후 대대로 할례를 받아 내려오던 주님의 백성, 곧 주님께 선택된 백성입니다.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애굽을 향하던 모세였지만, 정작 그 자신이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아들에게 시행하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가정을 주님의 신앙 안에서 잘 돌보며, 양육하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밖을 돌보는 일은 감당하면서도 내 가정, 내 자녀들은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세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디모데전서 3:5)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디모데전서 3:12)
모세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 버려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건 이미 오랫동안 지속된 일인데, 하나님은 왜 그동안 그 문제를 덮어두시다가 이제야 들추시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저지른 죄악, 허물의 행위와 행위에 대한 심판, 혹은 계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가 아들에게 8일 만에 할례 베풀지 않은 것을 즉각 9일째에는 문제 삼지 않으시더니,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 곧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려는 그 순간에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왜 이런 간격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그토록 오랫동안 벌하지 않으시다가 이제야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이며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과 계산을 미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도리어 은혜로 작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심판하거나 인간의 허물에 죄를 물으실 수도 있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더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모세의 가정의 불신앙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십보라의 불신앙도 기다리고 계셨고, 아들을 할례 하지 않은 모세의 미온적인 태도도 인내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자비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이미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 화살은 이미 우리의 심장을 겨누고 있습니다. 화살이 여러분의 심장에서 분출하는 피 맛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약속이나 의무감 없이 발사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얼마든지 순간적으로 죽이실 수 있었지만, 그 시간 사이에 중간의 시간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 사이에 ‘중재의 시간’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십보라에게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아니, 십보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모세의 가정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대사요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주님의 자녀로 바르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 우리 가정의 ‘믿음’입니다.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가정이 되길, 우리의 모든 자녀가 영적인 할례를 받고, 주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는, 십보라와 같은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애굽기 4: 24 ~ 26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
오늘 본문은 난해합니다. 성경에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들이 몇 있는데, 오늘 본문만큼 어려운 본문도 흔하지 않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출애굽기를 읽어 내려가는데, 흐름이 끊기는 부분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마치 불필요한 내용이 삽입돼 본문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 맥락은 이렇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당신이 누구신가를 모세에게 알리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고 애굽인의 학대를 내가 보았으니,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모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좀처럼 애굽으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갑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약속하시며, 애굽 왕 바로 왕 앞에 설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누가 나를 보냈냐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며 연달아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 나는 야훼,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시,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는 모세의 핑계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세 가지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낫게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일강 물을 떠서 땅에 뿌리니 피가 되는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또다시 자신은 혀가 둔하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이미 아론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으니, 그와 함께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승복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이드로에게 자신이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아내인 십보라와 자녀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장면이 전개됩니다. 하나님이 돌연 모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입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애굽기 4:24)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토록 공들여 모세를 부르시고, 설득해 내셨으며, 이제 드디어 모세가 길을 떠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이 시점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독자로서 우리는 이 본문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절대 안 죽지.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 물론 우리는 그다음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말 모세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 삶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
소망교회에 부임한 후로는 거의 방송 매체를 보지 못했는데, 이전에 시간이 날 때 종종 TV를 보곤 했습니다. 제가 주로 즐기는 장르는 스포츠였습니다. 드라마보다는 스포츠 보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래서 때로는 ‘너무 편파적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주인공 중심으로만 전개되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포츠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곤 합니다. 누구든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언제든 주인공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손흥민이 주인공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는 늘 흥미롭고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을 드라마나 소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는 분명 죽지 않을 것이고 승승장구해야 합니다. 모세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츠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가 갑자기 부상을 당해 실려 나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본다면, 마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주인공 같은 사람도 한 번의 실수로 역사에서 퇴장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충분히 설득하셨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게 된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제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모세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은 암시가 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그 순간에 긴장이 조성됩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이제 막 캐스팅된 모세를 죽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신학대학교에 입학할 때쯤 저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상당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신학교에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으니, 적어도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까지는 나를 죽이지 않으실 거야.’라는 안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인공적인 사고는 그해 여름,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름방학에 어느 선배님이 교회학교 수련회를 갔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는 대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슬퍼했고,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이곳도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죽음을 피해 왔는데, 신학교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런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는 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이니, 그런 죽음까지는 하나님이 신학생에게도, 목회자에게도 허락하시나 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처럼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형편없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도 그해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하숙집에서 그만 연탄가스 노출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고, 정말 가치 없어 보이는 죽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헌신을 하는 신학생에게까지 허용된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죽이실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은 버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따르는 이들도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아내실 수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YES”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을 돌보면서도, 주연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라거나,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그렇게 그들을 데려가곤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매우 결정적인 자리에 위치합니다. 없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불연속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연속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어떻게 주인공 모세가 죽을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연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모세가 죽었다면,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을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연은 모세가 아닙니다. 주연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열심히 설득하고 달래셔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드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모세는 나에게 유용한 일꾼이지만, 내가 모세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원인을 만들고,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자다. 나는 야훼다. 나는 여호와, 내가 주인공이다.”
<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주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는 질그릇이고, 때로는 토기장이가 얼마든지 부숴 버릴 수 있는 토기일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가며, ‘이곳에서 실제로 모세가 죽을 수도 있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를 어떠한 이유로 죽이려 하셨던 것일까요? 이후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할례’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그렇게 명령해 두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0~12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세기 17:10~12)
그렇다면 모세는 할례를 받았을까요? 태어나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아이 모세를 보고 ‘히브리인’으로 바로 알아볼 만큼,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점은,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십보라가 그 순간, ‘할례’를 시행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십보라가 할례 베풀 생각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하니 (출애굽기 4:25)
본문의 흐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두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그때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보라는 어떻게 할례를 알았으며, 또 어떻게 할례를 시행하는 법을 알았고, 할례 베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게르솜’이며, 둘째는 ‘엘리에셀’입니다. 아마 모세는 첫째 아들 게르솜을 낳은 후 할례를 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1절 이후를 보면, 모세가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한 후에 게르솜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태어난 아들에 대한 기록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둘째 엘리에셀의 이름은 출애굽기 18장에 가서야 등장합니다. 아마 게르솜을 낳고 오랜 후에 둘째 엘리에셀을 낳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 왔을 때, 처음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잊지 않았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첫째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여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믿음,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져 갔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인 미디안 여인 십보라는 오랜 기간 모세를 통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선뜻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례의 경우 첫 아들 게르솜에게는 할례를 행하도록 놓아두었지만, 그 아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본 후 십보라의 마음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십보라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십보라가 아들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떠나려는 바로 그때, 정작 그의 가정은 온전한 이스라엘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정황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이의 포도원을 돌봐야 하는 바로 그때,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한 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와 모세의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 사역에 앞서 자신의 ‘신앙’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이후 대대로 할례를 받아 내려오던 주님의 백성, 곧 주님께 선택된 백성입니다.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애굽을 향하던 모세였지만, 정작 그 자신이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아들에게 시행하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가정을 주님의 신앙 안에서 잘 돌보며, 양육하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밖을 돌보는 일은 감당하면서도 내 가정, 내 자녀들은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세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디모데전서 3:5)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디모데전서 3:12)
모세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 버려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건 이미 오랫동안 지속된 일인데, 하나님은 왜 그동안 그 문제를 덮어두시다가 이제야 들추시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저지른 죄악, 허물의 행위와 행위에 대한 심판, 혹은 계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가 아들에게 8일 만에 할례 베풀지 않은 것을 즉각 9일째에는 문제 삼지 않으시더니,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 곧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려는 그 순간에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왜 이런 간격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그토록 오랫동안 벌하지 않으시다가 이제야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이며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과 계산을 미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도리어 은혜로 작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심판하거나 인간의 허물에 죄를 물으실 수도 있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더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모세의 가정의 불신앙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십보라의 불신앙도 기다리고 계셨고, 아들을 할례 하지 않은 모세의 미온적인 태도도 인내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자비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이미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 화살은 이미 우리의 심장을 겨누고 있습니다. 화살이 여러분의 심장에서 분출하는 피 맛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약속이나 의무감 없이 발사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얼마든지 순간적으로 죽이실 수 있었지만, 그 시간 사이에 중간의 시간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 사이에 ‘중재의 시간’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십보라에게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아니, 십보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모세의 가정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대사요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주님의 자녀로 바르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 우리 가정의 ‘믿음’입니다.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가정이 되길, 우리의 모든 자녀가 영적인 할례를 받고, 주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는, 십보라와 같은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9년 5월 2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일보다 더 중한 것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70장, 426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4:24-2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5월 2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좀처럼 가지 않으려 했습니다. 세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자신은 혀가 둔한 자’라고 말하며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아론을 만나게 하셨고,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승복하여 애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24절). 이유가 무엇일까?
설교의 요약
힘겹게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나서는 데,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의 이야기를 드라마 혹은 소설이 아닌, 스포츠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놓고 본다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를 주연으로 놓고 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서 주연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는 질그릇이고, 때로는 토기장이가 부수어 버릴 수 있는 토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을까? 할례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창17:10-12). 그런데 모세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은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25절). 모세의 아내 – 십보라는 둘째가 태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거부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정황 속에서만 우리는 모세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십보라가 아들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떠나려는 때, 정작 그의 가정은 온전한 이스라엘의 자격(할례)을 갖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다른 이의 포도원을 돌보아야 하는데,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와 모세의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밖을 돌보는 일은 감당하면서도 내 가정, 나의 자녀들은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세우지 못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딤전3:5, 3:12). 모세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주지 못하였기에 죽을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부분을 즉각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 하나님의 권한이며, 인간에게는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은혜입니다.
사역보다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 그리고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영적인 할례를 받고, 주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십보라와 같은 결단과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가족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3. 하나님께서는 신앙 안에서 내 가정, 나의 자녀들을 올바르게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은 신앙 안에서 견고하게 서 있습니까? 서로를 축복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세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가정의 달을 보내며, 밖의 포도원보다 먼저 돌아보아야 할 우리의 포도원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영적인 하례를 받고, 온전히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