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구독 사용방법
해당 카테고리에 새로운 콘텐츠를 모아보기 원하시면 구독을 추가해주세요 마이페이지 > 내구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잔치가 끝날 즈음에
<세례받으신 지 일곱째 되는 날,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찾아오십니다.>
잔치가 흥겹게 이어지고 있지만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밑바닥을 드러내는 포도주 통을 보면서 하인들이 수군거립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연회장에게 사실을 알립니다.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 환히 웃는 모습들, 그 사이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은 신랑 신부가 보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하인들은 수군거리며 가족들 역시 불안한 기색으로 움직입니다. 그러자 잔치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잔치가 흥겹게 끝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잔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멈추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결혼식의 결말이 신랑과 신부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하는지도 모릅니다. 순탄치 못할 결혼 생활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일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포도주가 떨어지는 징조는 참 불길합니다.
바로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이곳을 첫 번째로 방문하셨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찾으신 첫 번째 자리가 왜 하필 가나의 혼인 잔치였을까요? 석가모니는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 출가하였다 하지 않습니까? 죽음의 문제를 붙들고 해결하려 한 것이죠. 사실 죽음의 문제야말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결혼 예식이 벌어지는 혼인 잔치를 첫 번째 사역지로서 택하셨습니다. 인간에게 결혼식이 그토록 소중하고 중요할까요? 본질적인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혼인 예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것도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 속에 인간의 참혹한 현실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늘 잔치하고 싶어 하지만 잔치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꿈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며 시작된 복된 잔치임은 분명하지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이내 그들의 현실이 지속되지 못하고 불행한 상황에 직면한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 심지어 포도주가 부족한 자리에 방문하셨을까요? 포도주가 떨어진 현실을 해결해 달라는 마리아를 향하여서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를 방문하신 사건이 창세기 3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고는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멋진 에덴동산에서 결혼식을 한 첫 번째 부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차려 주신 멋진 식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모든 실과의 나무들과 함께 잔칫상을 받듯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잔칫상이었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성한 식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맙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일에 한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합니다. 창세기 3장 22~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3:22~23)
결국 첫 번째 인류요, 세상의 첫 부부가 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멋진 식탁에서 쫓겨남으로써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차려 놓으신 풍성한 식탁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에게서 잔치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를 열고 있는 한 부부를 만나러 오십니다. 요한복음 2장은 그날을 아주 세심하게 알려 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말씀과 유비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흘째’ 되는 날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부터, 즉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날부터 환산하면 일곱째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장 29절, 35절, 43절에서 이튿날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나오는데 모두 합하여 계산하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일곱 번째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시던 바로 그 일곱째 날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이어받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포도주가 막 떨어져서 암담한 처지에 놓인 신랑과 신부에게 다가가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혼인 잔치를 열고 있는 신랑, 신부에 유비적으로 연결시킨다면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을 축약해서 살펴본다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포도주를 어떻게 마련했을까요? 땅을 경작하며 포도나무를 가꾸었겠지요. 그 나무로부터 포도 열매를 얻고, 수고를 통해 포도주를 만들었을 겁니다. 결혼식을 위해 잔치에 쓸 포도주를 모았을 테고요. 그들에게 이 포도주는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또다시 노동을 해야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먹으면 사라지는 포도주를 위해 아담과 하와는 다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신 포도주는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음료였습니다. 그 음료를 혼인 잔치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베풀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 떨어져 가는 포도주 때문에 또다시 고된 노동을 하러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참 음료를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유비적으로 연결했을 때 얻게 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과 출애굽기 7장 말씀의 유비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선 모세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첫 번째 기적을 보여 주시며 애굽의 모든 강, 모든 물을 피로 변화시키십니다.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허락하신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기적 후 열 번째 기적에 이르기까지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기적은 의미를 가집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은 해방 앞에서 나일강이 피로 된 첫 번째 기적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구원의 시그널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끌고 나갈 것이다. 내가 너희를 구출하겠다.” 바로를 향한 선언이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본문의 혼인 잔치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셨습니다. 첫 번째 사역,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었고 그만큼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내겠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출발이 어떤 귀결로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초막절 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7~38)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복음 19장 3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3~34)
명절의 끝날, 모든 사람들이 물을 마시며 축제를 벌이는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창으로 찔린 옆구리로부터 피와 물, 즉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는 장면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내신 사건은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한 선포이자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와의 연결성 속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열어 보이시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 묘사된 물의 이미지는 어딘가 부족함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1장에서 세례요한이 말하지요.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6~27)
즉 세례요한 자신이 베푸는 물 세례는 뒤에 오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에 비하면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표현입니다.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닌 성령으로 받는 새로운 차원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엄마의 양수와 더불어 물로 태어남이 아니라,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통하여 태어나는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더니 만일에 그녀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도리어 물을 요청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뜨는 물과는 차원이 다른 생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으로 가면 베데스다 못가가 나옵니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 들어가지 못하여 절망 속에 살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아시고 일으켜 세우시는데 물과는 관계없이 그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명령에 병자는 고침을 받습니다. ‘혹시라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물이 동할 때마다 들어가기를 원했던 38년 된 병자에게 너무나도 다른 차원의 길이 열린 순간입니다. 6장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물은 죽음이요, 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며 도리어 물을 다스리셨고, 그 위에 생명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물을 넘어서 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7장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나온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료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셈이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물은 인간적인 성질을 내포한다고 보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실패하게 만드는 모든 것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성경은 끊임없이 증언해 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 2장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해결책을 찾는 하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돌 항아리 곧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물통에 물을 넣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잔치 자리에 분명 비어 있는 포도주 통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대신하여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항아리에 물을 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항아리에 붓고서 그 물로 씻을 때마다 정결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정결케 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진정 정결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포도주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잔을 가지고 축사하실 때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신 포도주가 바로 보혈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로 돌아가 봅니다. 이야기는 잔치로 시작되었는데 잔치가 지속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가 인간의 현실이고 숙명입니다. 우리의 잔치는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 앞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마도 인생의 잔치가 끝나가는 현실을 가장 깊이 느낀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잔치를 이어 가는 듯한 사람들이 보이지만, 여기저기서 포도주 통이 비어 가는 현실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잔치인 줄 알았는데 포도주가 바닥나는 인생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빠지는 상황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정신적인 질병으로 고통받고, 불치의 병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며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양 병원에 지내면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 배고픔과 서러움으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잔치가 끝날 즈음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의 제물이, 우리의 권력이, 우리의 힘이,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동료가 우리의 잔치를 이어 갈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의 잔치를 이어 가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결케 되는 물 항아리에 물을 담으라. 내가 피로 변하게 해 주마. 속죄의 은총을 너에게 내려주마.” 주님께서 주시는 보혈 안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구속의 은혜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깨끗함을 입을 때만이 우리의 잔치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잔치가 끝나가는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위해 생명의 음료를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잔치가 끊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더욱 맛이 좋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잔치를 이어 주길 원하십니다. 후히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아니, 사실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가나의 혼인 잔치까지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도 만나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고 하늘나라의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When The Party Was Ending
John 2:1-11
The wedding feast was in full swing, but an anxiety was building. The servants nervously notified the host that the wine casks were almost empty. As the gay party chatter continued and all the guestswere enjoying themselves, the bride and groom seemed to be the happiest people on earth, sharing their bliss with others. Yet theservants started to nervously whisper among themselves, and the host started to move about anxiously. Little by little, the guests weregetting the feeling that the party was coming to an end.Something seemed wrong. This party will not end happily. Merry music was playing as the guests gathered at the tables, but this happy tune would soon end.
If the wedding feast had ended this way, it would have cast a dark shadow on the newly-weds’ future. The guests would have gotten the impression that their future would not be bright. This is why a lack of wine was a terrible sign.
Above is the story of the wedding in Cana. To our surprise, the first place of Jesus’s public ministry was a wedding feast. Jesus came to solve the problem between man and God and to save mankind. So how should we understand the fact that His ministry started at a wedding? This piques our curiosity. Siddhartha decided toleave his protected life and become a monk after seeing a corpse at a funeral. In other words, Buddha tried to grapple with the problem of death, man’s fundamental problem. But Jesus’ first ministry was at a wedding. Does a wedding have so much meaning and value to man? Is marriage an essential problem of man?
Yet Jesus went to a wedding as He started his public ministry. Not just any wedding, but one that “ran out of wine.” That the party “ran out of wine” is a clear reflection of the cruel reality of man. Man wants to go on partying, but that party will not last long. A wedding is a special occasion where a young man and a woman, fallen in love with each other, unite to start a new, blessed life. But the fact that the wine ran dry means that this new couple faced a truly miserable and cruel reality: their happiness cannot continue.
Therefore, the lack of wine meant that there was something missing in the wedding. Why did Jesus choose this wedding in Cana, a party that ran out of wine, as His first venue for ministry? And why did He say to Mary, His mother, “My hour has not yet come” when she asked Him for help?
When we study the Bible closely, we find that Jesus’s visit to the wedding in Canahas a connection to Genesis 3. After God created Adam, He was not pleased with him being alone. So He made Eve, a woman, for him. Adam and Eve were the first married couple on earth, and their wedding was the only one that took place in the Garden of Eden. But after they got married and their bodies united, they also became one in breaking God’s command. They ate from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and God banished them from the Garden of Eden.
This is what it says in Genesis 3:22-23:
“And the Lord God said, ‘The man has now become like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He must not be allowed to reach out his hand and take also from the tree of life and eat, and live forever.’ So the Lord God banished him from the Garden of Eden to work the ground from which he had been taken.” (Genesis 3: 22-23)
Finally, the first married couple on earth, also the first man and woman, were expelled from the Garden of Eden, preventing them from ever eating from the tree of life. This is how Genesis 3 ends.
But Jesus, the Son of God who came to earth to save mankind, visited a couple getting married in Cana. This was His first ministry. He came to a young bride and groom, starting a happy life together. If we draw an analogy between this wedding and the story of Adam and Eve in Genesis 3, this young couple in Cana may be seen as another “Adam and Eve.” However,the cruel situation they faced was a wedding that ran out of wine.
Then how did the couple in Canaprepare the wine in the first place? After Adam and Eve were banished from the Garden of Eden, they had to workthe land to grow grapes and labor to make wine.This is how the couple in Cana prepared and gathered the wine for their wedding feast. And that wine would have given them momentary joy. But to get more of that drink, they had to labor again. They had to work endlessly to get that wine, which would always run out after they had their fill.
The encounter between Jesus and the couple at Cana resembles God’s relationship with Adam and Eve, who got kicked out of the Garden of Eden in Genesis 3 and had to live a life of hard labor. It is as if God is giving Adam and Eve God’s drink, a liquor that they did not work for. Therefore, the wine Jesus made in Cana reminds us of the tree of life in the Garden of Eden. This wine was a drink that tasted like nothing in the world, a beverage not of this world. Jesus came to earth precisely for this ministry.
The wine of this world must be made continuously through endless labor. And it has to be made again after it runs out. But when this wine ran out, our Lord gave the wedding guests in Cana a taste of His wine from heaven, a drink made not by man but by God.
According to John 7, this is what Jesus said on the last day of the Feast of Tabernacles:
“On the last and greatest day of the festival, Jesus stood and said in a loud voice, ‘Let anyone who is thirsty come to me and drink. Whoever believes in me, as Scripture has said,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John 7:37-38)
And let’s look at how the Bible describes Jesus’ death on the cross:
“But when they came to Jesus and found that he was already dead, they did not break his legs. Instead, one of the soldiers pierced Jesus’ side with a spear, bringing a sudden flow of blood and water.” (John 19:33-34)
According to the Bible, Jesus told people to come to Him and drink, adding that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Andwhen He died on the cross, blood and water—that is, rivers of living water—flowed from His side.
This is why Jesus said His time had not yet come when He performed the miracle of changing water into wine in Cana. Therefore, what this miracle really points to is the blood and water that flowed from Christ on the Cross. Through His blood we have been given the living water, the drink the world cannot make.
Interestingly, “water” in the book of John is often used as a metaphor symbolizing a lack or incompletion. John the Baptist says this in John 1:
“‘I baptize with water,’ John replied, ‘but among you stands one you do not know. He is the one who comes after me, the strap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untie.’” (John 1: 26-27)
This means that John’s baptism of water is incomplete compared to that of Jesus which will come after him. As such, water in the book of John symbolizes a lack.
Furthermore, in John 3, when Jesus talked about being born again, He said that no one can enter the kingdom of God unless they are born of water and the Spirit. He is talking about a rebirth through a baptism of water and the Spirit, not a rebirth from the womb.
Also in John 4 when Jesus asked a Samaritan woman for a drink, He said that she would have asked Him for water if she had known who He was. Through this, He mad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 of this world and His water.
In John 5 Jesus healed a man who had been lying down by the pool at Bethsaida for 38 years, waiting for the water to be stirred. Jesus made this hopeless invalid walk. Jesus healed this man not by having him go into the water, but by commanding him to pick up his mat and walk.
In John 6 Jesus walked on water. And in Chapter 7 Jesus said, “Let anyone who is thirsty come to me and drink. Whoever believes in me, as Scripture has said, rivers of living water will flow from within them.”
Looking at all these stories, we realize that people perceived water as a substitute for revelation. People thought water could save them. But the truth is, water symbolizes everything that people depended on,which later turned out to be completely unreliable.
The water of this world is incomplete. Therefore, the Bible repeatedly tells us that what we need is not the water of this world, but that of another world and dimension.
When we study John 2 from this perspective, we discover something interesting.
What Jesus commanded the servants at the wedding feast—that is, what He told people looking for a solution to a lack of wine—was to fill thewaterpots used for ritual cleansing with water.
What does this mean? What is the significance of Jesus’s command? Jesus did not order the servants to fill the wine casks with water. He told them to pour water into the stone waterpots used by the Jews for ceremonial purification.
This means that the purification rituals of the Jews were incomplete in reaching salvation. Until then, the Israelites thought they became purified by washing from this ceremonial waterpot, but Jesus’ command means that such water cannot give them true, complete purification. When Jesus transformed that purification water into wine, He clearly showed the Israelites and us what truly purifies man.
Although He said His time had not yet come because He was referring to what would come in the future, the ultimate message of the miracle at Cana was clear. Jesus was pointing to the blood He would shed on the Cross. What truly cleanses us is His precious blood. This is the very drink that gives us life, the true purifying water that cleanses all sins.
Now let’s return to John 2, the wedding at Cana. The story begins with a party, but that party meets a crisis which threatens to end it. A crisis that makes it impossible for the party to continue. This is the reality and fate of man. Our celebrations can never go on forever.
I saw photos of Ukrainian soldiers kneeling down in prayer before going to fight. What would they have been feeling? Wouldn’t they have felt the end of life, the end to all celebrations? These soldiers would have faced man’s reality: the feast is coming to an end.
It is true that some people continue to party. But still there are others who check on the wine running low. Ukrainian mothers, putting their little ones to sleep in the roar of the bombs, will feel this stark reality of man: the party is ending.
It is not just the Ukrainians. Those whose relationships have been destroyed, those whose families are breaking, those suffering from mental illnesses, those lying in bed of incurable diseases, those feeling the fear of death each day, those isolated in elderly homes missing their loved ones, those waiting for the day they would be able to return home, those staring, those deprived, and those living inhumane lives… feel the reality of man.
No, in fact, we “all” sense that the show is about to end.
Even though His time had not yet come, Jesus, out of His compassion and love for us, came to miserable people like us andtransformed water into wine to give us His drink.
In the beginning of my sermon, I drew an analogy between the story of Jesus at the wedding in Cana in John 2 andthe story of Adam and Eve in Genesis 3. But the book of John is also closely related to Exodus. In Exodus, the first miracle performed by Moses was changing the water of the Nile into blood. Accordingly, there are those who draw an analogy between Moses’s miracle in Exodus and Jesus’ miracle in John 2.
Moses’ miracle of turning the Nile into blood was a declaration of war. God declared war on Pharoah through Moses. And, although there was a long process and a long journey, God finally delivered the Israelites through Moses.
We must be able to catch the powerful message in Jesus’ transformation of water into wine. Jesus is saying through this miracle, ‘I will deliver you. I am now showing you the first miracle Moses performed in Exodus to deliver the Israelites from Egypt.’ Therefore, the miracle at Cana is Jesus’ message to us: “Wait for my salvation.”
Dear brothers and sisters, are you by any chance getting the feeling that the party is about to end? In John 2, “the wine was gone.” The people at Cana were running out of what had sustained them. They were losing the source of their joy.
But our Lord—even though His time had not yet come—came to these people who were coming to grips with the reality that the party was ending and gave them the drink of life. Jesus doesn’t want our feasts to end. Even if the wine of this world runs out, He wants us to continue a better, tastier, and more satisfying feast.
Let’s go to Him who gives generously. Let’s go to our Lord who has compassion on us. No, He is coming to us. Just as He came to the Samaritan woman whose life was a mess and to the wedding in Cana that ran out of wine, He is coming to us whose parties are ending. Let us all drink the new wine Jesus gives us andjoyfully join the feast of heaven.
요한복음 2: 1 ~ 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세례받으신 지 일곱째 되는 날,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 찾아오십니다.>
잔치가 흥겹게 이어지고 있지만 불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밑바닥을 드러내는 포도주 통을 보면서 하인들이 수군거립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연회장에게 사실을 알립니다. 흥겹게 떠드는 사람들, 환히 웃는 모습들, 그 사이에서 즐거움을 누리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은 신랑 신부가 보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하인들은 수군거리며 가족들 역시 불안한 기색으로 움직입니다. 그러자 잔치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잔치가 흥겹게 끝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이대로만 간다면 잔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즐거운 노랫소리가 멈추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결혼식의 결말이 신랑과 신부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하는지도 모릅니다. 순탄치 못할 결혼 생활을 미리 보여 주는 예표일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로 포도주가 떨어지는 징조는 참 불길합니다.
바로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혼인 잔치 이야기입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이곳을 첫 번째로 방문하셨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놀랍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찾으신 첫 번째 자리가 왜 하필 가나의 혼인 잔치였을까요? 석가모니는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서 출가하였다 하지 않습니까? 죽음의 문제를 붙들고 해결하려 한 것이죠. 사실 죽음의 문제야말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결혼 예식이 벌어지는 혼인 잔치를 첫 번째 사역지로서 택하셨습니다. 인간에게 결혼식이 그토록 소중하고 중요할까요? 본질적인 문제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혼인 예식에 참석하셨습니다. 그것도 “포도주가 떨어져 가는” 혼인 잔치였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말 속에 인간의 참혹한 현실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늘 잔치하고 싶어 하지만 잔치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꿈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며 시작된 복된 잔치임은 분명하지만,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이내 그들의 현실이 지속되지 못하고 불행한 상황에 직면한다는 점을 말해 줍니다. 이것이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 심지어 포도주가 부족한 자리에 방문하셨을까요? 포도주가 떨어진 현실을 해결해 달라는 마리아를 향하여서 “아직 나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를 방문하신 사건이 창세기 3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홀로 있는 아담을 보시고는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멋진 에덴동산에서 결혼식을 한 첫 번째 부부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차려 주신 멋진 식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와 생명나무, 모든 실과의 나무들과 함께 잔칫상을 받듯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잔칫상이었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성한 식탁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후 이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맙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일에 한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전합니다. 창세기 3장 22~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창 3:22~23)
결국 첫 번째 인류요, 세상의 첫 부부가 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멋진 식탁에서 쫓겨남으로써 영생하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이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차려 놓으신 풍성한 식탁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에게서 잔치는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혼인 잔치를 열고 있는 한 부부를 만나러 오십니다. 요한복음 2장은 그날을 아주 세심하게 알려 줍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말씀과 유비적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흘째’ 되는 날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부터, 즉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날부터 환산하면 일곱째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장 29절, 35절, 43절에서 이튿날이라는 표현이 연달아 나오는데 모두 합하여 계산하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일곱 번째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시던 바로 그 일곱째 날에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이어받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지금 포도주가 막 떨어져서 암담한 처지에 놓인 신랑과 신부에게 다가가고 계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혼인 잔치를 열고 있는 신랑, 신부에 유비적으로 연결시킨다면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을 축약해서 살펴본다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더 이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첫 이적인 가나의 혼인 잔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포도주를 어떻게 마련했을까요? 땅을 경작하며 포도나무를 가꾸었겠지요. 그 나무로부터 포도 열매를 얻고, 수고를 통해 포도주를 만들었을 겁니다. 결혼식을 위해 잔치에 쓸 포도주를 모았을 테고요. 그들에게 이 포도주는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또다시 노동을 해야만 얻을 수 있었습니다. 먹으면 사라지는 포도주를 위해 아담과 하와는 다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푸신 포도주는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차원과는 전혀 다른 음료였습니다. 그 음료를 혼인 잔치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선물로 베풀고 계십니다. 끊임없는 노동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 떨어져 가는 포도주 때문에 또다시 고된 노동을 하러 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참 음료를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창세기를 유비적으로 연결했을 때 얻게 되는 매우 중요한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과 출애굽기 7장 말씀의 유비적인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7장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선 모세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첫 번째 기적을 보여 주시며 애굽의 모든 강, 모든 물을 피로 변화시키십니다. 애굽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허락하신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기적 후 열 번째 기적에 이르기까지 애굽 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기적은 의미를 가집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고 이루어지지 않은 해방 앞에서 나일강이 피로 된 첫 번째 기적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구원의 시그널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끌고 나갈 것이다. 내가 너희를 구출하겠다.” 바로를 향한 선언이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선포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본문의 혼인 잔치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셨습니다. 첫 번째 사역, 첫 번째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었고 그만큼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선포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선언이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여 내겠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오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 출발이 어떤 귀결로 이어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초막절 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7~38)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복음 19장 33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3~34)
명절의 끝날, 모든 사람들이 물을 마시며 축제를 벌이는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창으로 찔린 옆구리로부터 피와 물, 즉 생수의 강이 흘러내리는 장면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내신 사건은 십자가 위에서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물과 피를 예표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한 선포이자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와의 연결성 속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는 새로운 차원의 구원을 열어 보이시는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흥미롭게도 요한복음에 묘사된 물의 이미지는 어딘가 부족함을 상징하는 메타포입니다. 1장에서 세례요한이 말하지요.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 1:26~27)
즉 세례요한 자신이 베푸는 물 세례는 뒤에 오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에 비하면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표현입니다. 물로 받는 세례가 아닌 성령으로 받는 새로운 차원의 세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도 비슷한 흐름이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엄마의 양수와 더불어 물로 태어남이 아니라,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통하여 태어나는 거듭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4장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시더니 만일에 그녀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면 도리어 물을 요청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서 뜨는 물과는 차원이 다른 생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으로 가면 베데스다 못가가 나옵니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그는 물이 동할 때 들어가지 못하여 절망 속에 살던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아시고 일으켜 세우시는데 물과는 관계없이 그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명령에 병자는 고침을 받습니다. ‘혹시라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물이 동할 때마다 들어가기를 원했던 38년 된 병자에게 너무나도 다른 차원의 길이 열린 순간입니다. 6장에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물은 죽음이요, 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며 도리어 물을 다스리셨고, 그 위에 생명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물을 넘어서 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7장에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누구든지 예수께로 나아오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나온다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료가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셈이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물은 인간적인 성질을 내포한다고 보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실패하게 만드는 모든 것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물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물이 필요하다는 점을 성경은 끊임없이 증언해 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복음 2장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해결책을 찾는 하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돌 항아리 곧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물통에 물을 넣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잔치 자리에 분명 비어 있는 포도주 통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대신하여 정결 예식에 사용되는 항아리에 물을 담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항아리에 붓고서 그 물로 씻을 때마다 정결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두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정결케 하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써 우리를 진정 정결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포도주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잔을 가지고 축사하실 때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신 포도주가 바로 보혈이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로 돌아가 봅니다. 이야기는 잔치로 시작되었는데 잔치가 지속될 수 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가 인간의 현실이고 숙명입니다. 우리의 잔치는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 모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죽을 수도 있다는 예감 앞에서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마도 인생의 잔치가 끝나가는 현실을 가장 깊이 느낀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잔치를 이어 가는 듯한 사람들이 보이지만, 여기저기서 포도주 통이 비어 가는 현실을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잔치인 줄 알았는데 포도주가 바닥나는 인생을 바라보면서 두려움에 빠지는 상황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정신적인 질병으로 고통받고, 불치의 병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며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양 병원에 지내면서 가족들에게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분들, 배고픔과 서러움으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잔치가 끝날 즈음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의 제물이, 우리의 권력이, 우리의 힘이,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동료가 우리의 잔치를 이어 갈 수 있겠습니까? 과연 이 세상의 잔치를 이어 가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정결케 되는 물 항아리에 물을 담으라. 내가 피로 변하게 해 주마. 속죄의 은총을 너에게 내려주마.” 주님께서 주시는 보혈 안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구속의 은혜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깨끗함을 입을 때만이 우리의 잔치는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잔치가 끝나가는 사람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을 위해 생명의 음료를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잔치가 끊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더욱 맛이 좋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잔치를 이어 주길 원하십니다. 후히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십시다.
아니, 사실 주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주님을, 가나의 혼인 잔치까지 찾아오신 주님을 우리도 만나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고 하늘나라의 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3월 6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잔치가 끝날 즈음에” (요 2:1-11)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12장, 91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요 2:1-11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3월 6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인간은 인생의 잔치를 계속 하고 싶겠지만 그 잔치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잔치의 포도주는 결국 바닥이 나고 맞닿은 현실은 더는 즐거움이 지속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에 직면토록 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께서는 이 포도주가 바닥난 가나의 혼인잔치를 첫 번째 사역지로 삼으셨을까요? 포도주가 바닥난 현실을 해결해 달라 요청하였던 마리아에게 왜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설교의 요약
첫 번째 인류요, 첫 혼인식을 통해 부부가 된 아담과 하와의 혼인잔치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들은 수고하여 땅의 소산물로써 잔치를 위한 포도주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주는 잠시의 기쁨과 행복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포도주는 바닥이 나고 다시 수고하고 애써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포도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사역지로 찾은 혼인잔치에서 잔치의 포도주가 바닥이 났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연회장은 어떠했습니까? 더는 잔치를 이어갈 수 없는 현실에 염려와 절망이 엄습해왔습니다. 이처럼 잔치가 지속될 수 없는 위기,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현실이고 숙명입니다. 우리의 잔치는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관계가 무너져 내리고 가정이 무너지는 현실을 경험하는 사람들, 불치의 병으로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사람들, 배고픔과 서러움으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결국 이 잔치가 오래될 수 없음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이 염려와 절망이 가득한 삶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을 떠서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전혀 다른 차원의 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가장 좋은 품질의 포도주로 변화시키시고 먹게 하셔서 그 잔치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보여 주신 이 표적의 실체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인생의 한계를 사는 자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물과 피입니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바닥난 포도주의 현실에 맞닿은 우리가 이 영원한 생명의 음료인 예수의 피, 세상이 결코 만들어낼 수 없는 그 음료를 마시고 기쁨의 잔치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그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포도주가 바닥 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그 잔치의 행복과 기쁨을 이어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혹시 나의 잔치가 끝나가고 있다 느끼진 않습니까? 잔치에 포도주가 바닥이 난 것처럼 우리를 지탱하며 기쁘게 해 주는 것들, 그것들이 그만 사라지고 없어진 것 같아서 염려하고 절망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잔치가 끝나가는 이들을 찾으시고 그들을 위해 생명의 음료를 내어 주셨습니다. 비록 세상의 포도주는 다 떨어졌을지라도, 더 질 좋고 맛 좋은 더욱 깊은 즐거움으로 이끄는 그런 잔치를 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파탄 난 인생을 사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셨고, 포도주가 바닥나 잔치를 더 이어갈 수 없었던 가나의 혼인잔치에도 오셨듯 잔치가 끝나가는 우리의 인생에도 친히 오고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음료를 마시고, 기쁨으로 하늘 잔치에 참여하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누기
1. 내 삶에 바닥난 포도주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2. 바닥난 포도주를 영원한 생명의 음료로 채우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올해 내 가정과 내가 속한 구역이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하늘 잔치가 되고자 어떤 다짐과 노력이 필요할까요?
마무리기도
포도주가 바닥난 현실 앞에서 고통스럽게 해결을 찾는 이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음료를 마시게 하시고 잔치의 기쁨을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누리게 하옵소서. 사순절을 보내며 바닥난 우리의 포도주를 보게 하시고, 주님 말씀을 통해 새 포도주를 맛보는 귀한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