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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예레미야애가 3: 17 ~ 24

김경진 목사

2019.03.03

3.1 운동과 기독교 신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3.1 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교회의 일인가?” 물론 3.1 운동은 기독교인들만 주도한 운동은 아닙니다. 3.1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 33인 중에는 천도교도 있고, 기독교인도 있으며, 불교도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물론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과연 교회에서 그와 관련한 예배를 드릴만 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날이 100년째가 되는 날이라 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종교가 한마음으로 기억하고 기념한다.’라는 정도의 다짐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3.1 운동은 길이길이 남을 뜻깊은 운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공식 기록만 봐도, 독립운동을 요구하는 만세시위가 두 달간 1,500번이나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때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7,500명이 일제의 총칼에 피살당했습니다. 16,000여 명이 부상당했고, 46,000명이 검거되었습니다. 규모만 컸던 게 아닙니다. 시위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1 운동 세력에 놀란 일제는 그간 자행해온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꿨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습니다. 이처럼 3.1 운동은 실로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원하던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절반의 성공 혹은 실패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를 꼽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이 실패하게 된 이유로도 민족자결주의가 우리 조선 땅에서는 적용되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일본의 조선 강점을 묵인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북한이 평가하는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이 생각하는 3.1 운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름대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니, 아주 뜻깊은 일로 찬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기사를 읽었는데, 의외의 전개가 진행되었습니다. 3.1 운동을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는 평가하지만, 한마디로 ‘실패한 운동’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패의 이유는 3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3.1 운동은 외세에 의존해 민족의 운명을 구하려다 실패한 운동이었다. 둘째, 혁명의 과정에서 위대한 영도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셋째, 비폭력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보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비폭력 운동을 실패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북한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폭력과 힘으로 혁명을 이루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한의 자유 독립을 위해 투신한 신앙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올 1월 1일, 한국일보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유관순 열사, 감옥 동료와 지어 부른 노래 100년 만에 찾았다!”입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 여 옥사 8번 방에 유관순과 함께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유관순을 포함해 약 7명의 여성이 한방에 수감돼 공포의 밤을 보내며 옥중에서 만들어 불렀던 노래를 그들의 후손 중 한 사람이 공개한 것입니다. 두 곡을 공개했는데, 첫 번째 곡의 가사가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 입고 /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무엇보다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께 기도할 때’라는 노랫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고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한국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등 선교사들이 개교한 미션 스쿨 출신들이 많아서 대부분 기독신자였던 8호 감방 수감자들이 괴로움 속에서 기도하며 용기를 모으고자 했던 내용이다.”

‘진중이’라는 말은 당시 죄수를 가리키는 속어인 ‘전중이’의 오기로 파악됩니다. ‘진흙 색 일복’은 ‘황토색 일본 옷’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죄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노랫말을 이해하기 쉽게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입니다.

죄수로 잡혀 온 일곱이 죄수복을 입고 /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했네 / 죄수에게 던져주는 콩밥을 먹으며 우리는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조금 더 알아보니, 8호 감방에 수감 된 사람 중 6인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중 4명은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윤희’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지난 2월 13일 자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남자들도 벌벌 떨던 독립선언서 배포 … ‘3.1 운동 걸크러쉬’ 어윤희”
어윤희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던 여장부였다고 합니다.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 ‘권애라’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아 개성 시내에 뿌렸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기도실에서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커튼을 잘라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3월 3일 학생들은 미리 자퇴서를 써 놓았습니다.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며 만세 현장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성 시내에서 만세시위를 하다 잡혀 들어온 사람 중에는 ‘심명철’이라는 시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한국인 형사 황달평에게 체포되었는데, 형사가 “앞도 못 보는 장님 주제에 뭘 안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눈이 멀었다고 마음조차 멀었겠느냐?” 또 개성에서 함께 잡혀 온 ‘신관빈’은 남감리교 전도사였습니다.
8호 감방 수감자 중 나머지 3명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잘 알려진 대로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임명애’는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독립 만세운동을 강행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임명애는 구세군 사령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수감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유관순의 경우, 고문당하다 감옥으로 돌아오면 피투성이가 돼 제대로 걷지도 못해 질질 끌려오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심명철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흘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들은 감옥에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절망 중에서 희망을 노래한 것입니다.
최근 이 노래의 가사가 알려지면서 몇몇 분들이 가사에 곡을 붙여 공개했습니다. 그중 박정현, 김연아, 정재일 씨가 만든 곡을 한 기업체에서 후원해 무상으로 음원과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이 노래에는 그들이 불렀던 두 번째 노래도 이어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전국에 확산된 3.1 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라고 표현합니다. 독립을 바라는 결기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미 영상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 함께 시청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곳에 영상을 만드신 관계자가 계시다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본 영상은 공공성을 고려해 ‘주님께 기도했네’라는 가사를 ‘하느님께 기도했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당시 8번 감옥에 수감 된 분들이 찬양한 노랫말은 ‘주님께 기도했네’입니다. 이 내용을 기억하면서 함께 영상을 시청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자유 독립과 해방을 외치게 했습니다.

왜 그들은 거리로 나갔을까요? 군중심리에 휘말려 나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나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외세에 의존하며 ‘강대국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 즉 유관순, 어윤희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거리로 나갔을까요? 왜 그들이 그토록 희생을 치르면서 만세를 외쳤을까요? 왜 태극기로 들고 세상으로 나갔을까요? 그들의 참여의 밑바탕에 깔린 신앙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 조선의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늘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야 했던 나라입니다. 때로는 중국에, 때로는 일본에 점령돼 치욕과 수치를 당하며 살아야 했던 작은 나라입니다. 속이기를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며, 혈연과 지연으로 뭉치며,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당파 싸움으로 서로를 짓밟느라 내적 힘을 비축하지 못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국권도 빼앗기고,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도 세상을 떠나게 된 비극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나라에 복음이 들렸습니다. 여성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노예와 종들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차별 없이 전파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진리가 말씀으로 전해졌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알게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심판하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노예로 잡혀간 자들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민족도 주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고 싶다는 거룩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땅이 이렇게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런 마음으로 3.1 운동에 참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3.1 운동은 신앙적 결단의 행위였고,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3.1 운동은 매우 고귀하고 소중한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말씀’을 중심에 둔 비폭력 3.1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한편 흥미로운 역사 자료가 발굴돼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소개되었습니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배포된 <독립단 통고문>이 그것입니다. 김병조 목사라는 분이 중국 상해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날에 우리 백성들에게 통고문을 알리니 이르기를 우리 공경 존귀한 독립단 제군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본 사람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들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참 뜻을 훼손할 뿐인즉 각자 주의하기를 바라며, 신도는 매일 세 번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며 읽을 것이라 하였더라.”

그들은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이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매일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만세운동만 했던 게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그 운동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기도만이 살 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꿔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압제당하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 입장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한 그들입니다.
결과는 세상이 예측하듯이 참혹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듯이, 수많은 사람이 잡혀갔고 여 옥사 8번 방에 있던 유관순처럼, 그리고 수많은 사람처럼, 옥에서 수치당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집중적인 압박과 회유,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변절자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방에서 피눈물로 기도했던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기에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 그들의 기도, 피눈물로 기도한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처럼 희생되고 쓰러져 갔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모든 것을 걸었던 우리 민족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긴 시간 기다려야 했지만, 믿음으로 기다린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길 기다린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시간에 당신의 방법과 계획으로 이 땅에 해방이라는 선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혁명의 역량을 높인 것도 아니고, 폭력적으로 혁명을 시도해 해방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지혜나 소위 빅 딜(big deal)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일 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나름의 방식과 상식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 평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압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애가는 포로로 잡혀가는 암울한 정황에서 불린 애가입니다. 마치 여 옥사 8번 방에서 불린 가슴 시린 노래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애가를 부릅니다. 애가 첫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1:1)

또 예레미야는 3장 14절에서 이렇게 한탄합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3:14)

하지만 애가는 애가로만 끝맺지 않습니다. 곧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예레미야애가 3:20~24)

아침마다 절망 중에 일어났습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어설 때마다 다시 노래합니다. 아침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니 그 아침이 새롭습니다. 성실하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나아갑니다.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방식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피눈물로 기도하는 그 자리가 절망의 노래가 아닌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기에, 그 노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희망의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다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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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 17 ~ 24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3.1 운동과 기독교 신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3.1 운동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교회의 일인가?” 물론 3.1 운동은 기독교인들만 주도한 운동은 아닙니다. 3.1 운동을 주도한 지도자 33인 중에는 천도교도 있고, 기독교인도 있으며, 불교도 등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돼 있습니다. 물론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으로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과연 교회에서 그와 관련한 예배를 드릴만 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이날이 100년째가 되는 날이라 해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모든 종교가 한마음으로 기억하고 기념한다.’라는 정도의 다짐이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3.1 운동은 길이길이 남을 뜻깊은 운동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공식 기록만 봐도, 독립운동을 요구하는 만세시위가 두 달간 1,500번이나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때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더욱이 7,500명이 일제의 총칼에 피살당했습니다. 16,000여 명이 부상당했고, 46,000명이 검거되었습니다. 규모만 컸던 게 아닙니다. 시위 범위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3.1 운동 세력에 놀란 일제는 그간 자행해온 무단통치를 ‘문화정치’로 바꿨습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습니다. 이처럼 3.1 운동은 실로 위대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물론 원하던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절반의 성공 혹은 실패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3.1 운동이 일어난 원인으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주장한 ‘민족자결주의’를 꼽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3.1 운동이 실패하게 된 이유로도 민족자결주의가 우리 조선 땅에서는 적용되지 못하고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일본의 조선 강점을 묵인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를 보다가 북한이 평가하는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북한이 생각하는 3.1 운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름대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니, 아주 뜻깊은 일로 찬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기사를 읽었는데, 의외의 전개가 진행되었습니다. 3.1 운동을 의미 있는 운동이라고는 평가하지만, 한마디로 ‘실패한 운동’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실패의 이유는 3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3.1 운동은 외세에 의존해 민족의 운명을 구하려다 실패한 운동이었다. 둘째, 혁명의 과정에서 위대한 영도력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셋째, 비폭력 저항운동이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를 보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비폭력 운동을 실패의 원인으로 파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북한이라면, 그들은 반드시 폭력과 힘으로 혁명을 이루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한의 자유 독립을 위해 투신한 신앙의 선진들이 있습니다.

올 1월 1일, 한국일보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제목은 “유관순 열사, 감옥 동료와 지어 부른 노래 100년 만에 찾았다!”입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서대문형무소 여 옥사 8번 방에 유관순과 함께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유관순을 포함해 약 7명의 여성이 한방에 수감돼 공포의 밤을 보내며 옥중에서 만들어 불렀던 노래를 그들의 후손 중 한 사람이 공개한 것입니다. 두 곡을 공개했는데, 첫 번째 곡의 가사가 마음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 입고 /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 / 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무엇보다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주님께 기도할 때’라는 노랫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고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한국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었습니다.

“유관순의 이화학당 등 선교사들이 개교한 미션 스쿨 출신들이 많아서 대부분 기독신자였던 8호 감방 수감자들이 괴로움 속에서 기도하며 용기를 모으고자 했던 내용이다.”

‘진중이’라는 말은 당시 죄수를 가리키는 속어인 ‘전중이’의 오기로 파악됩니다. ‘진흙 색 일복’은 ‘황토색 일본 옷’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며, 죄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노랫말을 이해하기 쉽게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될 것입니다.

죄수로 잡혀 온 일곱이 죄수복을 입고 /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했네 / 죄수에게 던져주는 콩밥을 먹으며 우리는 /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조금 더 알아보니, 8호 감방에 수감 된 사람 중 6인이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중 4명은 개성에서 만세운동을 하다 잡혀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어윤희’라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에 대해 한겨레신문이 지난 2월 13일 자에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습니다. “남자들도 벌벌 떨던 독립선언서 배포 … ‘3.1 운동 걸크러쉬’ 어윤희”
어윤희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며 전도부인으로 활동하던 여장부였다고 합니다.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 교사 ‘권애라’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아 개성 시내에 뿌렸던 사람입니다. 두 사람은 기도실에서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준비했고, 커튼을 잘라 태극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3월 3일 학생들은 미리 자퇴서를 써 놓았습니다.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찬송을 부르며 만세 현장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개성 최초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개성 시내에서 만세시위를 하다 잡혀 들어온 사람 중에는 ‘심명철’이라는 시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한국인 형사 황달평에게 체포되었는데, 형사가 “앞도 못 보는 장님 주제에 뭘 안다고 만세운동을 주도하느냐?”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눈이 멀었다고 마음조차 멀었겠느냐?” 또 개성에서 함께 잡혀 온 ‘신관빈’은 남감리교 전도사였습니다.
8호 감방 수감자 중 나머지 3명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왔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잘 알려진 대로 천안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임명애’는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을 이끌고 독립 만세운동을 강행하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임명애는 구세군 사령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수감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유관순의 경우, 고문당하다 감옥으로 돌아오면 피투성이가 돼 제대로 걷지도 못해 질질 끌려오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심명철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한쪽 귀에서 고름이 흘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그들은 감옥에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절망 중에서 희망을 노래한 것입니다.
최근 이 노래의 가사가 알려지면서 몇몇 분들이 가사에 곡을 붙여 공개했습니다. 그중 박정현, 김연아, 정재일 씨가 만든 곡을 한 기업체에서 후원해 무상으로 음원과 영상을 공개했습니다. 이 노래에는 그들이 불렀던 두 번째 노래도 이어지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전국에 확산된 3.1 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라고 표현합니다. 독립을 바라는 결기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미 영상을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 모두 함께 시청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이곳에 영상을 만드신 관계자가 계시다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본 영상은 공공성을 고려해 ‘주님께 기도했네’라는 가사를 ‘하느님께 기도했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래 당시 8번 감옥에 수감 된 분들이 찬양한 노랫말은 ‘주님께 기도했네’입니다. 이 내용을 기억하면서 함께 영상을 시청하겠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자유 독립과 해방을 외치게 했습니다.

왜 그들은 거리로 나갔을까요? 군중심리에 휘말려 나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나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외세에 의존하며 ‘강대국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 즉 유관순, 어윤희와 같은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거리로 나갔을까요? 왜 그들이 그토록 희생을 치르면서 만세를 외쳤을까요? 왜 태극기로 들고 세상으로 나갔을까요? 그들의 참여의 밑바탕에 깔린 신앙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이 조선의 역사를 되짚어 봅니다. 늘 강대국의 침략에 맞서야 했던 나라입니다. 때로는 중국에, 때로는 일본에 점령돼 치욕과 수치를 당하며 살아야 했던 작은 나라입니다. 속이기를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며, 혈연과 지연으로 뭉치며,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당파 싸움으로 서로를 짓밟느라 내적 힘을 비축하지 못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국권도 빼앗기고,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도 세상을 떠나게 된 비극적인 상황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나라에 복음이 들렸습니다. 여성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노예와 종들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차별 없이 전파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진리가 말씀으로 전해졌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알게 되었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심판하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면 노예로 잡혀간 자들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 민족도 주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고 싶다는 거룩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 이 땅이 이렇게 고난을 받게 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이런 마음으로 3.1 운동에 참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3.1 운동은 신앙적 결단의 행위였고, 믿음의 표현이었다고 믿습니다. 세상의 역사는 다르게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3.1 운동은 매우 고귀하고 소중한 운동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기도’와 ‘말씀’을 중심에 둔 비폭력 3.1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한편 흥미로운 역사 자료가 발굴돼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 소개되었습니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배포된 <독립단 통고문>이 그것입니다. 김병조 목사라는 분이 중국 상해에서 펴낸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날에 우리 백성들에게 통고문을 알리니 이르기를 우리 공경 존귀한 독립단 제군이여, 무슨 일이든지 일본 사람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들이 하는 바이니 독립의 참 뜻을 훼손할 뿐인즉 각자 주의하기를 바라며, 신도는 매일 세 번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으로 돌아가며 읽을 것이라 하였더라.”

그들은 3.1 운동을 폭력적으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움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주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기로 했습니다. 적어도 이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결단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매일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만세운동만 했던 게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그 운동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까닭입니다. 기도만이 살 길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꿔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압제당하던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 입장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한 그들입니다.
결과는 세상이 예측하듯이 참혹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셨듯이, 수많은 사람이 잡혀갔고 여 옥사 8번 방에 있던 유관순처럼, 그리고 수많은 사람처럼, 옥에서 수치당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집중적인 압박과 회유,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변절자들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방에서 피눈물로 기도했던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기에 절망 중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무릎 꿇고 기도한 그들의 기도, 피눈물로 기도한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처럼 희생되고 쓰러져 갔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며 모든 것을 걸었던 우리 민족을 기억해 주셨습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긴 시간 기다려야 했지만, 믿음으로 기다린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길 기다린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시간에 당신의 방법과 계획으로 이 땅에 해방이라는 선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의 혁명의 역량을 높인 것도 아니고, 폭력적으로 혁명을 시도해 해방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임시정부 지도자들의 지혜나 소위 빅 딜(big deal)로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선물일 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나름의 방식과 상식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고 평가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압니다. 하나님의 손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예레미야애가는 포로로 잡혀가는 암울한 정황에서 불린 애가입니다. 마치 여 옥사 8번 방에서 불린 가슴 시린 노래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애가를 부릅니다. 애가 첫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1:1)

또 예레미야는 3장 14절에서 이렇게 한탄합니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애가 3:14)

하지만 애가는 애가로만 끝맺지 않습니다. 곧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예레미야애가 3:20~24)

아침마다 절망 중에 일어났습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어설 때마다 다시 노래합니다. 아침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니 그 아침이 새롭습니다. 성실하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고 나아갑니다.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면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방식으로 이루실 것입니다. 피눈물로 기도하는 그 자리가 절망의 노래가 아닌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기도하고 있기에, 그 노래는 희망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희망의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다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을 여전히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함께하심을 기억하며 주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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