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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인류의 과제이자 고민입니다. >
지난달 23일, 그러니까 한 열흘 전쯤입니다. 일본 방문 중이었던 이낙연 총리께서 게이오대학교 법학과 학생들과 대담한 내용이 인터넷 기사에 실렸습니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대규모 집회들을 궁금해하며 “한국인들은 무엇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인들만 정의와 공정을 열망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모든 세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공정함과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정의에 관한 질문과 관심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주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희랍의 철학자들로부터 마이클 샌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정의에 대해 고민했고 나름의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 사회 속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흥미롭게도, 또 안타깝게도 서초동의 집회나 광화문의 집회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한결같은 구호는 “이 나라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제가 위대한 석학들과 견주어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 그저 몇몇 분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런저런 주장을 살펴보니, 비슷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양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가 정의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정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의(正義, justice)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개념이다. 정의는 실제로는 애매모호한 개념이며, 철학 영역에서는 정의의 올바른 뜻을 확립하고자 많은 고민을 해 왔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여서 구성원 모두가 불만이 없게 되는 세상, 그런 상태. ‘이것을 정의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의 구현이 실제로 실현되기가 어려우므로, 존 롤스와 같은 학자는 ‘사회적 약자가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정의라는 명분 아래 도리어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많고, 불안해질 때도 많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바로 며칠 전이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국가(IS)의 지도자 알바그다디가 사망한 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화로 내놓았습니다. “어젯밤 미국은 세계 제1의 테러리스트를 정의의 심판대 위에 세웠습니다. 이슬람국가(IS) 창시자이며 지도자였던 알바그다디가 사망했습니다(2019년 10월 28일).”
저는 이 내용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 정의라는 용어가 종종 우리가 행하는 폭력의 수식어로 사용될 때가 많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마 IS는 또다시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고, 전쟁이 정당화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목도하곤 합니다.
살다 보면 가정에 불화가 있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며 싸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동의를 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만의 주장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한결같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편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또 “내가 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 아내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내용이 주가 되어, 결국 서로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하소연합니다. 서로 공평과 공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 집이 바뀌어야 한다고, 남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고, 아내는 이렇게 바뀌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공평하고, 공정하고, 평등하고, 정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와중에 도리어 가정의 상처가 깊어지고, 심지어 깨지는 일들도 발생합니다.
사회 개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사회가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노동자와 고용주 간에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당연합니다. 비정규직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와 평등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법을 내세우며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게 될 때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일리 있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회와 공동체의 분위기는 도리어 험악해지고, 때로는 증오로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그렇고, 우리의 직장이 그렇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 그렇고, 우리의 가정이 그렇고,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위키피디아는 정의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정의(正義, justice)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다.”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하는 정의가 필요하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도리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도리어 사회가 불행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모습을 확인할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증오의 분위기나 투쟁, 사회 혼란은 정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혼란스럽다고 무조건 부정의를 미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 정의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또다시 투쟁과 혼란을 경험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정의는 이 땅에 도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정의가 먼저가 아니라 평화가 먼저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정의를 추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교회, 정의로운 직장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8)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3:18, 새번역)
오늘 본문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열매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정의는 평화를 통해 얻어진다.”라는 답변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종종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면, 그때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최종 목표는 평화가 됩니다. 평화가 도래하도록, 이 땅에 온전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정의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정의를 평화를 만드는 하나의 도구로, 과정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의로워져야만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습니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화로워지고자 한다면, 이 불평등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불평등의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게 되면, 그때 평화가 올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국가 간에 그리고 민족 간에, 그리고 여러 공동체 안에 존재합니다. 국가들이, 민족들이, 사람들이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반드시 정의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이뤄진다면, 이 땅은 평화의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조금 힘들고 불행하게 느껴지더라도 참고 견디자.”라고 말합니다. “정의를 구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평화가 올 테니, 그때까지만 참자.”라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이 사는 한, 불완전하고 죄성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는 한, 이 바람은 어쩌면 요원한 꿈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다른 방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다 보면, 평화를 만들어 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정의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평화를 위해 애쓰다 보면, 어느새 행복한 사회, 행복한 교회, 모두가 일할 만한 직장, 모두가 행복할 만한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우선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우선한다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만들면, 그때 정의가 따라온다는 말씀입니다.
< 자기희생에서 평화가, 평화에서 정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생깁니다. 무조건 평화를 만들기만 하면 됩니까? 정의롭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도둑이 있습니다. 강도가 있습니다. 그들과 그저 평화롭게,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평화롭게만 지내면 정의가 도래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살아가면서 그 모습을 그저 받아들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그게 평화입니까? 그러면 과연 그 땅에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평화를 말할 때, 부정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공존하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평화이고 화평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타협입니다. 굴종입니다. 부정의 그리고 불공정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 불의와 죄악을 책망하셨습니다. 그것에 굴복하거나 굴종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죄악이 그분을 십자가에 내몰 만큼, 예수님은 죄악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정의를 먼저 이루고, 그 뒤에 화평을 이루길 원하셨다면 어떤 방식으로 일하셨을까요? 아마 3년 공생애 동안 제자들을 엄격하게 훈련하셨겠지요.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들도 훈련하셨겠지요. 그리고 회개를 시키셨겠지요. 삶을 돌아보게 하셨겠지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내셨겠지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들로 흠이 없이 만드시는 데 온 힘을 다하셨겠지요. 그들을 그렇게 만드신 후, 하나님과 평화조약을 맺으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일하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반대 방향으로 일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일을 먼저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 화평은 그저 잠재적으로 침묵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정의 가운데 침묵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묻어두고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으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그 고통을 통해 부정의를 넘어서고자 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8)
우리에게 주님이 알려주신 평화의 방식은 자발적인 자기희생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끊임없는 자기희생, 자기 소멸의 방식을 통해서만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드디어 정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샬롬을 통해 정의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평화를 추구할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대속적인 희생, 그 희생이 평화를 만들고, 그 평화가 정의의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면, 그곳에 정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은 자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은 평화와 관련해 세상과 땅의 방식을 말하며, 이런 방식은 참다운 지혜가 아니라고 전합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서 3:14~16 중)
시기와 경쟁심으로는, 또 다툼으로는 결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혼란과 악한 행위를 만들 뿐입니다. 그것은 땅의 것이며,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샬롬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누구나 평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평화는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서 3:13)
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13, 새번역)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이해력입니다.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감성이 아닙니다. 이해력입니다. 아는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착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온유함에서 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평화는 누구나 만들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그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종종 평화를 만든다고 하면서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화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에서 나옵니다. 평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와 원천은 지혜에 있습니다. 부부간에, 국가 간에, 정치 문제 간에, 여러 상황 속에 있는 모든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서 3:17)
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3:17, 새번역)
하나님의 평화는 순결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첫 번째 발자국은 순결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기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화평케 하는 사람의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사람은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순결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순결한 사람이 평안에 도달합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친절할 수 있고, 온순하게 대할 수 있으며,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순결함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이 생기고, 온순하며 자비롭습니다. 편견과 위선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넉넉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 지혜와 착한 행실로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흥미로운 점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이 행위가 강조되면서 그것이 마음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6절이 그렇습니다. 시기심이나 다툼, 경쟁심을 가지고 하는 행위를 ‘악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또 13절과 17절에서는 착한 행실을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악한 마음, 시기하는 마음, 경쟁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은 결코 평화를 만들거나 샬롬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이념들이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지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미움이 있다면,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악한 마음이 있다면, 경쟁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이념은 결코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낼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얼마나 위대한 계획인지 상관없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된 일은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인가, 어떤 동기에서 시작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정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교회가 그렇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지는 행동만이, 자기를 죽이는 행동만이 이 땅에 평화를 만듭니다. 순결과 온유와 친절, 자비와 같은 지혜로운 행동, 착한 행동이 평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지혜로움과 착한 행실로 평화의 씨가 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정의의 열매가 우리 삶의 영역에서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8)
The WayTo Justice
James 3:13-18
Last month when Prime Minister Lee Nak-yeon visited Keio University Law School, a student asked him,“Why are mass rallies taking place in Korea now andwhat isthe greatest issue?” Prime Minister Lee replied,“Koreans are currently very sensitive to justice and equity.” Justice and equity are soughtnot only by Koreans but globally. Questions on justice have been asked throughout history. Philosophers, both modern and ancient, like Socrates and Michael Sandel have studied this question. The chants we hear in Seocho-dong andGwanghwamunall have to do with justice, too.
What is justice? According to the Korean Wikipedia, “justice seeks that which is fair and just for constituting and maintaining society. It is a concept included in almost all laws. In reality, the concept of justice is diverse and vague, and philosophers have strived to establish a proper definition of it.” Generally, people seem to consider justice as a state where society has reacheda certain level of equity so that its members are not discontent.
Whatever the definition, we all want justice on earth, in our societies, and in our communities. Paradoxically, however, a lot of confusions arise in the name of justice. Sometimes, violence and wars are justified in its name.
As a pastor I see many married couples with diverse issues. Couples always fight over who is right. They come to me and other pastors, seeking advice, help, and understanding. Interestingly, however, they all believe that they are right. Believing this, they seek justice for the family. But this only leads to more conflicts and hurt.
This goes for social reform, too. People shout justice and social reform, but there is hatred deep within. We hear cries for gender equality, fair labor-management relations, and equity between regular and irregular workers. Each camp argues that this or that will bring social justice. But, paradoxically,hatred and dissension are only deepening in our society today.
What is the problem? According to the Wikipedia definition, justice is an essential ingredient to building and maintaining a society. But it is saddening to see that cries for justice are only making our society more unhappy today.
Then, as Christians, how should we view justice? How can we attain justice in our homes, communities, and workplaces as Christians?
God’s answer in today’s scripture is nothing short of amazing: “Peacemakers who sow in peace reap a harvest of righteousness.” (James 3:18 NIV)In the Contemporary English Bible it goes, “When peacemakers plant seeds of peace, they will harvest justice.” (James 3:18 CEV)
Today’s scripture does not give us a definition of justice or righteousness. But it is clear on how we can reap a harvest of justice. By peace. We often think that a just society will attain peace, that justice is a means to an end—peace. Accordingly, conflicts and strife created in the process of reaching justice must be endured. Because once justice is attained, peace will come. But, no. God has it the other way around. He is telling us clearly that peace comes first, not justice. Justice follows peace.
Then does this mean that peace is always the answer? For example, does a person living in North Korea have to make peace with its authoritarian regime? Will that lead to justice? No. Peace-making is not compromising or submitting to injustice. Jesus did not submit to unrighteousness or sin. He rebuked them. Jesus wanted to achieve peace on earth most of all. But He achieved it through sacrifice and suffering.
Ephesians 2 tells us, “For he himself is our peace, who has made the two groups one and has destroyed the barrier, the dividing wall of hostility, by setting aside in his flesh the law with its commands and regulations. His purpose was to create in himself one new humanity out of the two, thus making peace, and in one body to reconcile both of them to God through the cross, by which he put to death their hostility. He came and preached peace to you who were far away and peace to those who were near.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Ephesians 2:14-18)
The way to peace as told by Our Lord is to willingly sacrifice oneself. Jesus taught and showed us that peace on earth comes only by continuous self-sacrifice, self-denial, giving oneself to others, and crucifixion. If we reach peace through such methods, we will harvest justice. Justice is given as a gift through shalom.
Therefore, God’s will is clear. We must build peace, not justice. If we build the former, the latter will come. God will give us a harvest of justice where we have made peace. Today’s scripture tells us that the world’s way on building peace is not “wisdom”: “But if you harbor bitter envy and selfish ambition in your hearts, do not boast about it or deny the truth. Such “wisdom” does not come down from heaven but is earthly, unspiritual, demonic. For where you have envy and selfish ambition, there you find disorder and every evil practice.” (James 3:14-16 NIV)
Envy and competition cannot make peace. They only lead to disorder and evil practice. Then, who are those that sow the seeds of peace and bring fruits of justice to earth? Not everyone. Only the wise.
“Who is wise and understanding among you? Let them show it by their good life, by deeds done in the humility that comes from wisdom.” (James 3:13 NIV) Let’s read it in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Are any of you wise or sensible? Then show it by living right and by being humble and wise in everything.” Our Lord tells us that peace cannot be reached by just anyone. Only those with wisdom from above, heavenly wisdom, can make true peace. This applies to married couples, conflicts between nations, and political disputes.
The Bible teaches us how heavenly peace can be attained: “But the wisdom that comes from heaven is first of all pure; then peace-loving, considerate, submissive, full of mercy and good fruit, impartial and sincere.”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translates this as follows: “But the wisdom that comes from above leads us to be pure, friendly, gentle, sensible, kind, helpful, genuine, and sincere.”God’s peace is pure, peaceful, kind, gentle, compassionate, impartial, and sincere.
It is interesting that attaining peace has to do with the attitude of the heart. Verse 16 says that acts of envy and selfish ambition are acts of evil. Verse 17 tells us that good deeds are peace-loving, considerate, submissive, full of mercy and good fruit, impartial and sincere. Whatever done in envy, selfish ambition, or evil thoughts cannot build peace—no matter how grand those plans may be. Things started in evil intentions can never lead to true peace, justice, or God’s righteousness.
The heart’s intent behind an action is critical. If something was started with envy and selfish ambition, then it can never achieve peace. However, if an action springs from a pure, peace-loving, considerate, merciful, impartial, and sincere heart, this will certainly bring peace. Only Jesus-like acts, self-sacrifice and cross-bearing, bring peace and, ultimately, God’s righteousness and justice.
Let’s sow the seeds of peace through good deeds and heavenly wisdom in our homes, church, workplaces, and society. And let’s harvest the magnificent fruits of justice that follow. God speaks to us: “Peacemakers who sow in peace reap a harvest of righteousness.”
야고보서 3: 13 ~ 18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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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정의에 대한 관심과 집중은 인류의 과제이자 고민입니다. >
지난달 23일, 그러니까 한 열흘 전쯤입니다. 일본 방문 중이었던 이낙연 총리께서 게이오대학교 법학과 학생들과 대담한 내용이 인터넷 기사에 실렸습니다.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대규모 집회들을 궁금해하며 “한국인들은 무엇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은 공정함과 정의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공감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인들만 정의와 공정을 열망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모든 세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개념이 공정함과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욱이 정의에 관한 질문과 관심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온 주제라는 생각도 듭니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희랍의 철학자들로부터 마이클 샌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정의에 대해 고민했고 나름의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 사회 속에서도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흥미롭게도, 또 안타깝게도 서초동의 집회나 광화문의 집회에서 서로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로부터 들려오는 한결같은 구호는 “이 나라를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일까요? 제가 위대한 석학들과 견주어 이야기할 수는 없기에 그저 몇몇 분의 이야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이런저런 주장을 살펴보니, 비슷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양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가 정의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정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의(正義, justice)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개념이다. 정의는 실제로는 애매모호한 개념이며, 철학 영역에서는 정의의 올바른 뜻을 확립하고자 많은 고민을 해 왔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하는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여서 구성원 모두가 불만이 없게 되는 세상, 그런 상태. ‘이것을 정의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의 구현이 실제로 실현되기가 어려우므로, 존 롤스와 같은 학자는 ‘사회적 약자가 손해 보지 않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우리는 모두 이 땅에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정의라는 명분 아래 도리어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질 때가 많고, 불안해질 때도 많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바로 며칠 전이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슬람국가(IS)의 지도자 알바그다디가 사망한 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담화로 내놓았습니다. “어젯밤 미국은 세계 제1의 테러리스트를 정의의 심판대 위에 세웠습니다. 이슬람국가(IS) 창시자이며 지도자였던 알바그다디가 사망했습니다(2019년 10월 28일).”
저는 이 내용을 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경우를 통해 정의라는 용어가 종종 우리가 행하는 폭력의 수식어로 사용될 때가 많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마 IS는 또다시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고, 전쟁이 정당화되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목도하곤 합니다.
살다 보면 가정에 불화가 있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며 싸울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하다고 호소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며 동의를 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자신만의 주장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한결같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남편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또 “내가 이렇게까지 양보했는데, 아내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내용이 주가 되어, 결국 서로 자기는 옳고 상대는 그르다고 하소연합니다. 서로 공평과 공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모두 일리가 있기도 합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 그래서 우리 집이 바뀌어야 한다고, 남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하고, 아내는 이렇게 바뀌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공평하고, 공정하고, 평등하고, 정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와중에 도리어 가정의 상처가 깊어지고, 심지어 깨지는 일들도 발생합니다.
사회 개혁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를 말하면서 사회가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됩니다.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노동자와 고용주 간에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도 들립니다. 당연합니다. 비정규직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와 평등권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외치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법을 내세우며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게 될 때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일리 있고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회와 공동체의 분위기는 도리어 험악해지고, 때로는 증오로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그렇고, 우리의 직장이 그렇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 그렇고, 우리의 가정이 그렇고,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위키피디아는 정의를 이런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정의(正義, justice)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다.”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정의가 필요하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하는 정의가 필요하다고 노력하고 있는데, 도리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도리어 사회가 불행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모습을 확인할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증오의 분위기나 투쟁, 사회 혼란은 정의를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이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 혼란스럽다고 무조건 부정의를 미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 정의를 이룬다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또다시 투쟁과 혼란을 경험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정의는 이 땅에 도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정의가 먼저가 아니라 평화가 먼저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정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정의를 추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사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교회, 정의로운 직장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8)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3:18, 새번역)
오늘 본문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의의 열매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답은 이렇습니다. “정의는 평화를 통해 얻어진다.”라는 답변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종종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면, 그때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의 최종 목표는 평화가 됩니다. 평화가 도래하도록, 이 땅에 온전한 평화가 올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해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 정의를 말할 때가 많습니다. 정의를 평화를 만드는 하나의 도구로, 과정쯤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의로워져야만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습니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화로워지고자 한다면, 이 불평등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불평등의 문제를 제거함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게 되면, 그때 평화가 올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국가 간에 그리고 민족 간에, 그리고 여러 공동체 안에 존재합니다. 국가들이, 민족들이, 사람들이 정의를 내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반드시 정의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이뤄진다면, 이 땅은 평화의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조금 힘들고 불행하게 느껴지더라도 참고 견디자.”라고 말합니다. “정의를 구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평화가 올 테니, 그때까지만 참자.”라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인간이 사는 한, 불완전하고 죄성을 가진 인간이 살아가는 한, 이 바람은 어쩌면 요원한 꿈이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은 다른 방향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다 보면, 평화를 만들어 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 안에 정의가 깃들어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회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평화를 위해 애쓰다 보면, 어느새 행복한 사회, 행복한 교회, 모두가 일할 만한 직장, 모두가 행복할 만한 가정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의를 우선하는 게 아니라, 평화를 우선한다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만들면, 그때 정의가 따라온다는 말씀입니다.
< 자기희생에서 평화가, 평화에서 정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생깁니다. 무조건 평화를 만들기만 하면 됩니까? 정의롭지 못한 이가 있습니다. 도둑이 있습니다. 강도가 있습니다. 그들과 그저 평화롭게, 사이좋게 지내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평화롭게만 지내면 정의가 도래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서 살아가면서 그 모습을 그저 받아들이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 그게 평화입니까? 그러면 과연 그 땅에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평화를 말할 때, 부정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공존하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과연 평화이고 화평이겠습니까?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타협입니다. 굴종입니다. 부정의 그리고 불공정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를 살아가시면서 불의와 죄악을 책망하셨습니다. 그것에 굴복하거나 굴종하며 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 죄악이 그분을 십자가에 내몰 만큼, 예수님은 죄악에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일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 주님께서 정의를 먼저 이루고, 그 뒤에 화평을 이루길 원하셨다면 어떤 방식으로 일하셨을까요? 아마 3년 공생애 동안 제자들을 엄격하게 훈련하셨겠지요. 예수님을 따라오는 사람들도 훈련하셨겠지요. 그리고 회개를 시키셨겠지요. 삶을 돌아보게 하셨겠지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내셨겠지요.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람들로 흠이 없이 만드시는 데 온 힘을 다하셨겠지요. 그들을 그렇게 만드신 후, 하나님과 평화조약을 맺으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일하셨습니까? 오히려 예수님은 반대 방향으로 일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일을 먼저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 화평은 그저 잠재적으로 침묵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정의 가운데 침묵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죄악을 묻어두고 넘어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희생으로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그 고통을 통해 부정의를 넘어서고자 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4~18)
우리에게 주님이 알려주신 평화의 방식은 자발적인 자기희생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방식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끊임없는 자기희생, 자기 소멸의 방식을 통해서만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평화가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드디어 정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샬롬을 통해 정의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정의를 세우는 게 아니라, 우리는 평화를 추구할 뿐입니다. 예수님처럼 대속적인 희생, 그 희생이 평화를 만들고, 그 평화가 정의의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면, 그곳에 정의의 열매가 맺힙니다.
<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은 자가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
오늘 본문은 평화와 관련해 세상과 땅의 방식을 말하며, 이런 방식은 참다운 지혜가 아니라고 전합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서 3:14~16 중)
시기와 경쟁심으로는, 또 다툼으로는 결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은 혼란과 악한 행위를 만들 뿐입니다. 그것은 땅의 것이며,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정말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샬롬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누구나 평화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 평화는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서 3:13)
새번역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13, 새번역)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이해력입니다.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감성이 아닙니다. 이해력입니다. 아는 사람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착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온유함에서 오는 행동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선 평화는 누구나 만들 수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혜, 그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종종 평화를 만든다고 하면서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화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에서 나옵니다. 평화를 만들 수 있는 계기와 원천은 지혜에 있습니다. 부부간에, 국가 간에, 정치 문제 간에, 여러 상황 속에 있는 모든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야고보서 3:17)
새번역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야고보서 3:17, 새번역)
하나님의 평화는 순결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의 첫 번째 발자국은 순결함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기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정결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 화평케 하는 사람의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러운 사람은 화평케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없습니다. 순결한 자만이 화평케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순결한 사람이 평안에 도달합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친절할 수 있고, 온순하게 대할 수 있으며, 자비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순결함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이 생기고, 온순하며 자비롭습니다. 편견과 위선이 없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넉넉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 지혜와 착한 행실로 평화의 씨앗을 뿌리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오늘 본문에서 발견하는 흥미로운 점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를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이 행위가 강조되면서 그것이 마음의 태도와 연결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6절이 그렇습니다. 시기심이나 다툼, 경쟁심을 가지고 하는 행위를 ‘악한 행위’라고 말합니다. 또 13절과 17절에서는 착한 행실을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음의 상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악한 마음, 시기하는 마음, 경쟁하는 마음으로 시작된 일은 결코 평화를 만들거나 샬롬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이념들이 있습니다. 좋은 세상을 지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미움이 있다면, 시기하는 마음이 있다면, 악한 마음이 있다면, 경쟁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이념은 결코 이 땅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낼 수도 없습니다. 도리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얼마나 위대한 계획인지 상관없습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된 일은 진정한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어떤 마음에서 시작된 것인가, 어떤 동기에서 시작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가정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교회가 그렇고, 국가가 그러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지는 행동만이, 자기를 죽이는 행동만이 이 땅에 평화를 만듭니다. 순결과 온유와 친절, 자비와 같은 지혜로운 행동, 착한 행동이 평화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직장에, 우리 사회에 지혜로움과 착한 행실로 평화의 씨가 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정의의 열매가 우리 삶의 영역에서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서 3:18)
2019년 11월 3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정의로 가는 길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40장, 29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약3:13-1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11월 3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정의란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라고 크게 대답합니다. 일반적으로 정의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여서 그 구성원들이 불만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바라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정의라는 이름으로 온 세상은 도리어 혼란스러워 지고 불안해 지고 있습니다.
설교의 요약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 되고, 전쟁이 정당화 됩니다. 서로가 옳다며 주장을 하고 정의를 말하지만, 도리어 가정은 상처가 커지고 심지어 깨어지기도 합니다. 정의를 말하는데 도리어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게 되기보다 도리어 사회가 불행해지고 혼란스러워 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과연 정의로움을 구현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정의로운 사회, 가정, 직장을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약3:18 새번역).
오늘의 본문은 정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의의 열매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려 줍니다. 정의는 평화를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고 만들다 보면, 어느새 우리에게 정의가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가 먼저가 아니라, 평화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평화를 만들면, 정의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평화를 만들기만 하면 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평화를 말하면서, 부정의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공존하는 타협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타협이고, 부정의와 불공정에 대하여 굴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평화는 자신의 희생과 고통을 통한 것이었습니다(엡2:14-18). 주님께서 알려주시는 평화의 방식은 자발적인 자기희생이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세상의 방식(시기심과 경쟁심)으로는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도리어 혼란과 악한 행위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오직 하늘의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진정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약3:13). 성경은 하늘로부터 오는 평화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순결함으로, 평안함으로, 친절함으로 오순함으로 자비함으로 편견과 위선이 없는 태도로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평화는 마음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17절). 예수님과 같은 자기희생, 십자가를 지는 행동만이 자기를 죽이는 행동만이 화목, 화평, 평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 정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지혜로움과 착한 행실로 평화를 씨를 뿌립시다.
나누기
1. 다툼과 분쟁의 상황(관계)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서로 함께 나눠보세요.
2. 정의가 아니라, 평화가 먼저입니다. 나는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까? 평화를 외치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평화를 심어야 할 곳이 있다면 어느 곳입니까? 서로 축복하며 함께 기도하세요.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로 평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십자가, 자기희생을 우리도 닮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통하여 이 당에 의의 열매가, 정의의 열매가 가득 넘치도록 열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