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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 22 ~ 26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 스스로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구약 시대, 수많은 믿음의 조상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제단이라는 말은 구약적인 용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요즘도 많이 듣지요. 가령 ‘새벽 제단을 쌓는다’라든가,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게 해 주십시오’와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만나는 자리,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제단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더 의미 있는 제단을 쌓을 수 있을까 고민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던 분들은 이제 예배의 자리에서 진정한 예배자로서 제단을 다시 쌓아야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면 제단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창세기를 보면 아담 이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제단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제단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시기는 노아 시대입니다. 노아의 이야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창 8:20)
여기에 ‘제단’이라는 표현이 첫 번째로 등장합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물을 받으시고자 제단을 만들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제단을 쌓았습니다. 창세기 12장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창 12:7)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제단을 쌓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쌓았던 제단입니다. 그런데 그는 제단을 한 번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며 쌓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제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고자 쌓았던 제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창 22:9). 물론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이삭도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26:25). 야곱도요. 벧엘에 세워진 제단이 바로 그것입니다(창 35:1). 모세도 제단을 쌓았고(출 17:15), 여호수아도 쌓습니다. 기드온도(삿 6:24), 사무엘도 제단을 쌓죠(삼상 14:31~35). 이처럼 구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제단을 쌓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제단을 쌓았을 겁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만나시며 십계명을 주시면서 제단을 만드는 구체적인 설계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본문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는 장면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기 20장 1절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십계명에 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열 가지 계명이 모두 알려진 후에 제단 만드는 법에 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20장 앞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어떻게 살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이후로는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지에 관한 말씀이 전해집니다.
자, 본문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은으로나 금으로나 자신들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23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십계명 첫 부분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3~5절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죠. 그리고 제단을 만드는 방법이 이어집니다.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네 양과 소로 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출 20:24)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으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토단’으로 제단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그곳에서 복을 주겠다고도 선포하시죠. 토단에 이어 돌로 단을 쌓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창 20:25)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제단을 만들지 이야기하시면서 먼저는 ‘토단’을 언급하셨습니다. 흙으로 제단을 만들라는 말씀이었죠. 토단만으로도 하나님께는 충분하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으론 아무리 하찮은 재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는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돌로 제단을 쌓는 경우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돌로 단을 쌓을 것을 미리 알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조건 하나가 발견됩니다.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창 20:25 중)
이 말씀을 읽으며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궁금증을 가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쭉 읽다 보니 이 구절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제단을 세울 때마다 한결같이 지켰던 법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명령합니다.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신 27:5~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백성을 향하여 “이제 너희가 그곳에 들어가면 돌로 제단을 쌓아야 한다. 그런데 그 돌에 쇠 연장을 대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을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제단을 쌓았던 여호수아가 이렇게 증언됩니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 (수 8:30~31)
성경은 여호수아가 쇠 연장을 대지 않은 제단을 만들었다고 알려 줍니다. 흥미롭게도 열왕기상 6장은 솔로몬도 성전을 짓고 제단을 쌓을 때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음을 보여 줍니다.
<제단을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돌 제단을 만들지 않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에게 이 말씀이 가지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일지 질문이 생깁니다. 돌로 제단을 만들 때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말씀을 해석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사용된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으로 표현된 ‘쇠 연장’이라는 표현은 원어로는 ‘헤레븐’ 곧 ‘칼’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유대교 랍비 중 시몬 벤 엘레자(R. Shimon b. Elazar)는 탈무드로 잘 알려진 미쉬나 미돗 3장(Mishnah Middot 3:4)에서 이것에 관한 해설을 다룬 바 있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한번 읽어 드립니다.
철은 사람의 날을 짧게 하려고 창조된 것이요 제단은 사람의 날을 길게 하려고 창조된 것이니 짧게 만드는 것이 길게 만드는 것보다 위에 오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_ Mishnah Middot 3:4
Iron was created to shorten a man’s days, and the altar was created to lengthen them. It is not fit that the “shortener” be lifted over the “lengthener.” (Mishnah Middot 3:4)
조금 어렵습니다. ‘철은 사람의 날을 짧게 하려고 창조되었고 제단은 사람의 날을 길게 하려고 창조되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때에 백성들이 다가와 묻습니다. “하나님이 돌로 제단을 만들 때 철(鐵)을 정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러자 여호수아가 대답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을 올려놓고 제사드리게 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평화를 내려 주시지 않는가? 그러므로 제단은 무엇인가. 제단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닌가. 그러나 철(鐵)은 어떤까? 이 정은 어떤 것인가. 칼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철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혀서 생명을 단축시키지 않는가? 칼과 창과 모든 무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증오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제단을 쌓는 일에 생명을 단축시키는 철(鐵)을, 정을 사용하지 말기를 명령하신 거라네.”
탈무드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해석이 마음에 드시나요? 유대교 랍비 전통이 해석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의미가 꽤 와닿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제단을 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을 운명인 존재가 제단에서 용서함받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안과 공포에 살아갈 존재가 제단 앞에서 용서와 평화를 누리는 바로 그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무기가 제단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자리에서 의미가 없다는 뜻이죠. 오직 사랑과 용서와 평화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자리, 생명의 제단에는 생명을 죽이는 분노, 성냄, 원망, 두려움, 싸움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부부가 서로 싸움하고 가정 제단을 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둘이 서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살리고 하나는 죽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폭언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가정 제단을 쌓을 수 없습니다. 속임수와 거짓말을 하면서 새벽 제단을 세울 수는 없는 법입니다. 원망받을 만한 일을 하면서 제단을 온전히 세울 순 없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삶을 짧게 하지만 제단은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늘리며 번성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칼이 제단에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너희가 나에게 제물 바칠 제단을 돌로 쌓고자 할 때에는 다듬은 돌을 써서는 안 된다. 너희가 돌에 정을 대면, 그 돌이 부정을 타게 된다. (출 20:25, 새번역)
<하나님은 제단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예배하며 복의 통로가 되길 원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이 제단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까요? 다듬지 않은 돌이라는 말이 원어로는 온전한 돌, 혹은 완전한 돌이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만일에 그렇다면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단 위에 놓여진 희생 제물이 과거에는 소와 양과 염소였지만 우리가 믿는 바대로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생각해 본다면, 제단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힌트가 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말씀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두 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제단을 쌓고 (왕상 18:30~32 중)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할 때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 열두 개를 찾아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리자 하나님이 불로 임하셔서 모든 제물을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언급되었듯 여기서 돌로 된 제단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그 제단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토단으로 제단을 쌓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큰 은혜가 됩니다. “어떤 것이든 좋다. 너희가 단을 쌓은 그곳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면 내가 듣고 응답하겠고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단이라고 한다면 정으로 쪼지 말라는 말씀은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는 뜻입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주님은 우리가 제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모두를 한결같이 제단으로 인정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어떤 돌은 동그랗고, 또 어떤 돌은 네모날지 모릅니다. 혹은 조금 평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을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칼을 대서는 안 됩니다. 모양을 변형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엘리야가 백성들과 급히 모은 열두 개의 돌이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그저 이런 돌, 저런 돌 모으며 예물을 드렸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돌의 모양을 보지 않으시고 흠향하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죄 흉악하지만 눈과 같이 희게 하시는 주님이심을 믿으며 제단을 쌓습니다. 우리 위에 온전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놓여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그분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에 하나님과 만나는 제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제단을 통하여 생명이 살아나고 드러나고 연장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제단인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앞서 우리는 제단은 살리는 것이고 평화가 임하는 곳이라 해석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제단인 우리를 통하여 세상이 복을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역사가 우리로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제단과 관련하여 생각할 게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는 층계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출 20:26)
어떤 뜻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는 오르는 계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올라갈 이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올라가면 인간은 추한 모습만을 드러낼 뿐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돌’이라는 단어는 ‘에벤’이라는 단어인데, 창세기 11장 3절에 첫 번째로 등장합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 사용된 그 벽돌을 가리키죠. 그들은 바벨탑을 쌓을 때 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으며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오를 때 신을 만나고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벨탑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이 단어 ‘에벤’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는 장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베개는 주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곳에서 야곱이 꿈을 꾸며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환상을 봅니다. 이것이 야곱의 제단이었습니다.
여러분,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옵니다. 내가 조금 더 올라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제단은 땅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의 귀한 제단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제단이 됩니다. 우리 모두 제단이 되어서 생명을 나누고 평화를 나누기를 주님이 소원하십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7월 24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제단을 쌓으려거든” (출 20:22-26)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311장, 208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출 20:22-26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7월 24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제단을 쌓는다”는 말은 신앙인들에게 친숙하고 자주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배의 특별한 자리, 주님과 만나는 특별한 시간을 우리는 ‘제단’이라고 부르면서 특별하게 여깁니다.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도 한결같이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을 쌓는 것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걸까요? 이제 더는 ‘제단’을 만들지 않고, 마음의 ‘제단’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런 명령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설교의 요약
“돌로 제단을 만들 때에는 쇠 연장을 대지 말라”(출 20:25)는 말씀을 오늘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할까요? 유대교 랍비는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철은 사람의 날을 짧게 하려고 창조된 것이요, 제단은 사람의 날을 길에 하려고 창조된 것이니 짧게 만드는 것이 길게 만드는 것보다 위에 오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철(鐵)로 만든 무기들은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킬 수 있기에 생명과 평화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제단을 쌓는 돌에 철을 사용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것은 죽어야 할 존재가 용서를 받아 생명을 누리고, 불안과 공포에 살아야 할 존재가 사랑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바로 그 자리가 ‘제단’ 아니겠습니까? 생명의 제단, 이 예배의 자리에는 생명을 죽이는 분노와 성냄과 원망과 두려움과 싸움이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철은 제단에까지 들어와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평화가 놓인 이 ‘제단’을 온전하신 예수님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단’ 위에 놓일 희생 제물이 되신 어린양 예수를 생각하면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돌 12개를 모아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여 제물을 받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돌로 된 ‘제단’은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곧 ‘제단’의 돌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를 정으로 쪼지 말라는 것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으시겠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단’으로 인정해주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십니다. 우리 위에 온전한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놓여 있기만 하면 됩니다.
‘제단’은 살리는 곳이며, 생명을 늘리고 평화가 임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진정 ‘제단’이라면, 우리는 이 생명과 평화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세상이 복을 얻고, 세상에 생명이 들어가며 생명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누기
1. 내가 드리는 ‘제단’은 어떠한가요? 쇠 연장을 대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2. 우리가 살리는 일을 감당하는 ‘제단’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마무리기도
하나님,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주님의 ‘제단’으로 삼으시고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생명을 약화하는 세상의 힘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생명을 전하는 은혜의 도구로 사는 주의 백성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