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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여

로마서 10:13~15

김경진 목사

2025.04.27

<좋은 소식은 받아들임이 있어야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기 두 번째 주일, 기쁨의 50일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모든 성도님께 진정한 기쁨의 소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말씀 중에서 화상을 당했을 때 사진을 보여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후에 저에게 그렇게 심하게 화상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상처 없이 멀쩡하냐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숨은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제가 큰 화상을 당하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종합병원 같은 큰 병원으로 갈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인 중에 한 분이 제가 화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저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큰 병원도 좋겠지만, 화상 전문 병원이 꼭 맞는 치료를 해 줄 것 같으니, 꼭 그곳으로 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원은 알고 보니 아주 자그마한 병원이었습니다. 조금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한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외국에서 화상 전문 병원 수료를 하신 특별한 의사 선생님이니 믿어 봐도 된다는 말씀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가기 전에 한번 가 보자 생각하고 그 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자그마한 병원 입구로 들어갈 때, 저는 이미 손과 얼굴에 붕대를 하고 정말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병원을 나가면서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정말 잘 오셨어요. 정말 좋은 병원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잘 나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저는 조금 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치료는 일반 병원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매우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약 1년여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피부의 염증이 사라지고 살갗이 생기고 아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가 완성이 되어 갈 때, 저는 종종 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병원에 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얼굴과 여러 곳에 붕대를 감고 실려 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가서 항상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 정말 잘 오셨습니다. 한번 믿고 따라가 보십시오. 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신에 찬 말을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전 제가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화상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도 얼굴과 손, 발에까지 화상을 입었습니다. 꼭 저의 모습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에게 제가 갔던 병원을 꼭 가 보라고 열심히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께서 제가 권유한 곳으로 가지 않고 큰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고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었고 다른 여러 곳이 흉악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형을 받아야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갔던 곳을 갔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인생에 좋은 소식을 전해 주신 분들 중의 한 분은 그 병원을 소개해 주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아마 저의 얼굴과 손도 울퉁불퉁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미련해 보이지만, 전도와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떤 소식을 쉽사리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아직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을 한 차원 낮은 단계의 태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된 것들, 설명이 가능한 것들만 확실한 것이고,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삶 속에는 때로 어떤 사람이나 사실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과 이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중요한 무기와 같습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믿음이 적용되는 곳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매우 위급한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잠을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막 두드립니다.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옆집 사람인데 윗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대피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불이 날 가능성이 몇 퍼센트일지 생각하시겠습니까? 전기 누전 때문인지, 보일러 때문인지 원인 분석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듣는 즉시 믿고 바로 대피해야 할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대피하라는 말을 농담처럼 여긴다면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겠죠. ‘믿음’은 지금도 활용되는 중요한 무기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이 천사들로부터 전해 듣고서 가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것이니 피해야 한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위들이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한 번은 인터넷에서 일본에서 쓰나미가 왔을 때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재난의 모습이 먼 곳에서 찍힌 영상이었습니다. 사이렌이 울리며 대피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뛰어가는 반대 방향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듯이 두리번거렸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순간적으로 넘쳐 오는 물살에 휩쓸려서 그 뒤로는 화면에 그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사람들이 뛰라고 하면 곧바로 뛰어가야 했었습니다.

‘믿음’ 그리고 ‘믿고 행동하는 것’은 이렇듯 다양한 곳에서 사용됩니다. 믿고 행동해야 하는 차원이나 상황이 존재합니다. 그때에는 반드시 믿음으로 반응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또 하나의 어떤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입니다. 더 이상 인간이 어떤 것으로도 무엇인가 할 수 없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건강을 책임질 수 없을 때, 의학이 나의 건강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이성과 통찰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또한 삶에서 인생의 허무와 허망함을 느낄 때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고린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0~21)

 

바울 사도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삶의 성찰이나 지극한 연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한한 생명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소식,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는 소식은 오직 믿는 사람에게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 완성하신 다음에,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두시고 우리에게 안내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 혜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 10:13~15a)

 

길을 안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15b)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앞의 이야기처럼 좋은 병원을 소개해 주는 것, 화재 난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 운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알 수 있다면 그 소식처럼 좋은 소식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복음의 좋은 소식의 내용은 어떠한 것입니까? 복음은 부활절 아침 천사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5~6)

 

천사들이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또 한 가지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말씀하셨던 그대로’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합니다. 더하여 한 가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그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증언이 우리에게 복음이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참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해결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들고 나간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탄생시켰고, 이 부활의 증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함으로 온 세상에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이 소식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이 되었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어느 지혜도 죽음을 정복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요 11:25~26). 그러므로 이 말씀이 복음이며, 이 말씀이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 안에 답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 안에서 답을 찾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기신 말씀들이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화해하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그 안에 답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마치 병원을 믿고 나를 맡기듯이 예수께 나를 믿고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 복음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복음을 듣고 따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니까요. “주님, 누가 우리한테 들은 것을 믿었습니까?” …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땅으로 퍼져 나갔네, 그들의 소리가, 세상 끝으로 그들의 말이.” (롬 10:16~18, 새한글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온 세상으로 번져갔습니다. 시대를 넘어서 온 땅으로 그 증언이 번져 나갔습니다. 듣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이 소망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풀어낼 능력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마지막은 어떠할까요?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디입니까? 주님께서 죽음 이후의 길을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여 여전히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로가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미로에 갇혀서 우왕좌왕합니다. 어떻게 하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나섭니다. 내가 이 길을 너무나도 잘 아니, 나를 따라오면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저 자리에 앉아 미로를 연구하고, 내가 확신한 방향으로만 길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길을 잘 안다는 사람을 따라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문제는 안내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만약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지혜로울 것입니다.

 

<어둠의 땅에서 오직 예수의 소식을 붙잡는 것만이 소망과 생명의 역사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자리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에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이미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오며 신앙을 낳았고, 구원을 낳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소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였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을 넘고, 그리스와 로마를 넘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넘어 조용한 나라 조선, 한반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40년 전 제물포에 도착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입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회 목사였고, 아펜젤러는 감리교회 목사였습니다. 그분들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어느 날 밟았을까요? 바로 1885년 4월의 부활절 아침에 그들은 한국 땅을 밟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들고 어둠의 땅에 내려왔습니다.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민족을 향하여, 나라를 잃을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한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다가왔습니다. 어둠과 가난, 피폐함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부활의 소식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발걸음은 진정 아름다웠습니다. 나라를 잃고 절망으로 가득한 이 땅에 희망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말씀을 통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으로 나라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0년이 지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든지 부러워하는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한반도에서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지 140년이 되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소망은 이 땅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용서의 마음으로, 희생의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이 땅이 번영을 누리고, 다시 또 하늘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장애인 주일입니다. 장애인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장애인이 몇 명 있을 것 같습니까? 조사된 통계를 보면 263만 1천 명의 장애인이 있다고 합니다. 263만 명의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형평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장애인들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단 한 번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는데,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점과 같은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서도 감사를 누리며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척박할 수 있습니다. 가난으로 가득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억울할 수도 있고,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복음을 붙잡으며, 영생을 붙잡고 있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나의 영혼을 살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Romans 10:13-15

 

I once showed you a photo of my burns. Some of you will remember it. After that sermon, many people asked me how my face and hands could have recovered so well after such a serious injury. Although I said it was by God’s miraculous healing, there is a secret to my recovery.

 

To treat my wounds, I had to choose a hospital that provided specialized care for burns. At first, I considered tertiary hospitals because I thought I had to go to a big hospital like a general hospital.

 

But an acquaintance who had heard about my situation visited me at home. He felt compelled to speak to me. He said although a big hospital is a good option, he knew an excellent hospital that specialized in burns. It was a small hospital near Cheong Wa Dae. I was a little hesitant. But he so was full of confidence about this hospital as he told me and my family about it that I couldn’t ignore his advice. I was particularly impressed by his comment that I would never regret going there.

 

His assurance made me visit the hospital, for I was curious to know what kind of place it was. It was a small hospital. As I was about to step in with bandages on my face and hands and some doubts in my mind, a patient leaving the hospital said to me, “You came to the right place. It’s a really good hospital. Do just as the doctor tells you, and you’ll get well.” The words of my friend and this patient gave me confidence. After that, I decided to trust the hospital to cure me.

 

The treatment there was very different from that of other hospitals; I had to endure severe pain for a long period of time. Only a scrubbing pad and a cleanser were used; every time I went, the nurse scrubbed off my skin with the pad and then placed a compression bandage on it to prevent new skin from coming up. That was it. I was treated like this for a year. As time passed, my skin inflammation was gone, new skin was formed, and my wounds were healed.

 

During my treatment, I would often see other patients with serious burns like me come to the hospital. Every time, I told them, with a deep conviction, that they came to the right place.

 

When I was ministering at Jangan First Presbyterian Church, a student came to have serious burn injuries like mine after a fire broke out at home. I strongly recommended the hospital that cured me, but his family elders thought it better to go to a bigger hospital, and he finally got treated at a general hospital. Watching his treatment, I was frustrated. His face did not recover; his skin became rough; and later he had to undergo plastic surgery. I asked him why he didn’t listen to me, but it was too late.

 

As I watched all this, I became more grateful to the friend who introduced me to that hospital. What would have happened if I had not listened to his advice? Of course, I believe it was God who led me to make that choice.

 

His words introducing me to that hospital were truly good news to me. That news saved me, cured me, and made me clean. All I did was to trust his words and make a resolution. As I result, I was completely healed.

 

People living in this modern world tend to view faith as something sub-standard. Many think that things that can be proved and explained by reason and science are certain, while believing in something unconditionally is foolish.

 

But as I mentioned earlier, sometimes in life we need to have such faith. Faith and reason, or faith and wisdom, are compatible; they can be used in different ways in different situations.

 

Dear brothers and sisters, imagine someone bangs at your door in the middle of the night. You ask, “Who is it?” He replies, “Your neighbor! There is a fire upstairs. Get out of the building now!” What would you do? How would you respond to this urgent news? Would you calculate the chances of a fire? Will you analyze how a fire started in your building? Will you analyze possible causes such as electrical circuit malfunction or a gas leakage?

 

Would all this thinking be important? Or should you immediately evacuate the building believing your neighbor’s words?

 

If it’s really a fire, you must believe your neighbor’s words, make up your mind, and evacuate immediately. In other words, many circumstances in life require mere faith. There is a realm where wisdom, theory, and reason do not operate.

 

After deciding whether to believe the news or not, you must resolve to act immediately. That is, there are times when faith and resolution are required of us.

 

Faith is not something inferior; there are times when you must simply believe and act. There is a dimension where wisdom and reason function, and there is a dimension where faith and resolve function. This continues to be true even in our modern society.

 

First Corinthians says:

 

“Where is the wise person? Where is the teacher of the law? Where is the philosopher of this age? Has not God made foolish the wisdom of the world? For since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God was pleased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to save those who believe.” (1 Corinthians 1:20-21)

 

Paul says, “the world through its wisdom did not know him.” In other words, man cannot know God through his wisdom. He cannot save himself through his wisdom.

 

Since it is impossible for man to attain to the knowledge of God through his own wisdom, God saves those who believe through the foolishness of what was preached.

 

In other words, God is pleased to save those who believe the preaching of the Good News.

 

God makes evangelists preach what He has done for us and saves those who believe and accept this preaching.

 

Our salvation cannot be gained through study, intellectual insight, or deep reflection.

 

Therefore, God decided to preach the Good News and to save those who believe and accept it.

 

Therefore, our salvation starts from a proclamation and is completed when those who hear that proclamation respond in faith.

 

That is why today’s passage says:

 

“for, ‘Everyone who calls on the name of the Lord will be saved.’ How, then, can they call on the one they have not believed in? And how can they believe in the one of whom they have not heard? And how can they hear without someone preaching to them? And how can anyone preach unless they are sent?” (Romans 10:13-15a)

 

How were we saved? The above verses tell us that we were saved not by contemplation, analysis, study, or insight. We were saved by believing the Gospel that someone preached to us, by listening to that Good News, and by accepting it.

Therefore Paul declares:

 

“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Romans 10:15b)

 

How precious it is to bring good news! Introducing someone to a good hospital is a precious thing, and knocking on doors to warn neighbors about a fire is also praiseworthy. Then how precious and beautiful would it be to deliver the Good News concerning the problem of our salvation and eternal life?

 

Indeed, preaching the Gospel is truly precious and beautiful.

 

Then what is the Gospel, this Good News, and how did it begin?

 

The Gospel started in the morning of Jesus’ resurrection with the declaration of an angel:

 

“The angel said to the women, ‘Do not be afraid, for I know that you are looking for Jesus, who was crucified. He is not here; he has risen, just as he said. Come and see the place where he lay.’” (Matthew 28:5-6)

 

And as many disciples and people met the resurrected Jesus, the Gospel spread through their testimonies. Paul later testifies as follows:

 

“For what I received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at he was buried, 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that he appeared to Cephas, and then to the Twelve.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nd sisters at the same time, most of whom are still living, though some have fallen asleep. Then he appeared to James, then to all the apostles, and last of all he appeared to me also, as to one abnormally born.” (1 Corinthians 15:3-8)

 

The testimony that Jesus was raised! The reason this is the Gospel is because it is news that there is One who solved the problem death, the problem we so fear. And this news of Jesus’ resurrection testifies to the veracity of all the words and ministry of our Lord.

 

There is a solution in Jesus. There is life in Him. There is salvation in Him. This is the Gospel.

 

The Early Church was established by those who went out with this Gospel; the world came to have hope when these witnesses of the resurrection proclaimed what they saw and heard. This news became power to those who believed in it, finally becoming the way to salvation.

 

No religion or wisdom on earth could proclaim that it conquered death. Only Jesus declared that He conquered death and was raised from the dead. Jesus declared, “the 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they die, and whoever lives by believing in Me will never die.”

 

This is why this the Good News, the Gospel.

 

To live a life of faith means to believe that the answer lies in Jesus, to find the answer in His words, and to be guided by Him.

 

Just as we entrust ourselves to a hospital, we must believe in Jesus and commit ourselves to Him. This is the life of faith.

 

But not everyone believed in the Gospel. Paul says:

 

“But not all the Israelites accepted the good news. For Isaiah says, ‘Lord, who has believed our message?’ But I ask: Did they not hear? Of course they did: ‘Their voice has gone out into all the earth, their words to the ends of the world.’” (Romans 10:16, 18)

 

Although the Gospel was preached all over the world and people accepted it, there were those who could not believe it and did not accept it.

 

You may have heard the story of Hiroo Onoda, a second lieutenant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during the Second World War. Even after the war had ended, he held out in the Philippines alone for 29 years until 1974 because he couldn’t accept that it had ended. Later in his biography he wrote that he could not accept anything that didn’t align with his belief system because he was trapped in a fixed idea.

 

As he fought even after hearing news of the war’s end, he brutally killed tens of natives on the island, continuing to carry out a war against them.

 

He couldn’t accept the war’s end. He couldn’t believe the news. Even today, there are many who live such lives. Because they are trapped in their own fixed ideas, the Good News cannot become joyful news to them.

 

To them, the news that Jesus was raised falls on deaf ears, failing to give them hope. Many people are lost because they refuse to believe in Jesus’ resurrection, even when they do not have the power to solve the problem of death. Many continue to live in anxiety because they cannot believe what Jesus taught us about the path after death.

 

But not everyone was like this. Those who believed in and accepted the Gospel found the answer and hope in it. The Gospel that began from the death and resurrection of Jesus has lived on for thousands of years since then, producing faith and salvation. It went beyond Israel, neighboring regions, Greece, Rome, Europe, the Americas, and Asia and came all the way to Joseon on the Korean Peninsula,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One hundred and forty years ago, two men disembarked at Jemulpo Port—Henry Appenzeller and Horace Grant Underwood. Underwood was a Presbyterian pastor and Appenzeller a Methodist pastor. After their arrival, scores of missionaries came to this land.

 

Their feet were truly beautiful just like the words in Romans—“How beautiful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They instilled hope in this utterly dejected land, a nation that had lost its sovereignty. They taught the people of Joseon how to pray; through the Word they preached, we came to know about God the Creator of the universe, about Jesus who died for us and was raised, and about the Holy Spirit.

 

The Gospel gave this country hope, and today, 140 years since its arrival, the Republic of Korea has become the envy of the world. Things that had never been seen on the Korean Peninsula are being witnessed now. After 140 years of accepting the Gospel, Korea has developed into such an amazing country.

 

For the past decades, men and women of faith prayed for this nation every morning, and even when the Constituent National Assembly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first legislative body of Korea, was established, the national assembly started its first meeting by praying to God. Churches were built in every corner of this land, and Korean Christians were more passionate than other believers in the world, building churches and worshiping God not just on Sundays but every day. Tithing was a given; keeping the Sabbath holy was highly valued; Korean Christians met every day for early morning prayer; they fasted and held all-night prayer vigils; they prayed in loud voices; they worshiped in tears. This was how the Republic of Korea was built.

 

As a pastor, I believe that Korea was able to become a developed nation and a leader of global culture today because it accepted the Gospel and because of the sacrifices of our ancestors of faith whose lives were changed by the Gospel.

 

Believe in the Gospel! It is my earnest hope that the Good News will be preached in this land and that the Republic of Korea will be filled with people who believe in that Gospel.

 

The answer is in Jesus. There is life in Jesus. The way is in Jesus.

 

Those who believe and accept this, who reflect on these words and follow the life of Jesus will be saved. They will go beyond this world and reach the eternal Kingdom. This is the very reason we believe in Jesus.

 

Last week was Easter Sunday. As we commemorate the love and sacrifice of the missionaries who carried the Gospel to Joseon 140 years ago on an Easter Sunday, and as we remember all the missionaries who came to this land with the Gospel, we too must spare no efforts to preach the Gospel around the world through missions.

 

“How beautiful 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those who bring good news, who proclaim peace, who bring good tidings, who proclaim salvation, who say to Zion, ‘Your God reigns!’” (Isaiah 52:7)

 

The Gospel of Jesus Christ! May you gain salvation, life, the answer, and a new living life by believing in and responding to this Gospel. And may you become the Lord’s disciples who save dying souls by bringing this Good News to others on beautiful f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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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3~15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좋은 소식은 받아들임이 있어야 좋은 소식이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기 두 번째 주일, 기쁨의 50일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모든 성도님께 진정한 기쁨의 소식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말씀 중에서 화상을 당했을 때 사진을 보여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이후에 저에게 그렇게 심하게 화상을 당하였는데, 어떻게 상처 없이 멀쩡하냐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숨은 한 가지 진실이 있습니다. 제가 큰 화상을 당하고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아보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종합병원 같은 큰 병원으로 갈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인 중에 한 분이 제가 화상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저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게 큰 병원도 좋겠지만, 화상 전문 병원이 꼭 맞는 치료를 해 줄 것 같으니, 꼭 그곳으로 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원은 알고 보니 아주 자그마한 병원이었습니다. 조금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한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외국에서 화상 전문 병원 수료를 하신 특별한 의사 선생님이니 믿어 봐도 된다는 말씀이 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큰 병원에 가기 전에 한번 가 보자 생각하고 그 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자그마한 병원 입구로 들어갈 때, 저는 이미 손과 얼굴에 붕대를 하고 정말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병원을 나가면서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정말 잘 오셨어요. 정말 좋은 병원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시면 잘 나을 수 있을 겁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저는 조금 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치료는 일반 병원과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매우 아프고 힘든 시간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약 1년여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피부의 염증이 사라지고 살갗이 생기고 아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가 완성이 되어 갈 때, 저는 종종 저와 비슷한 모습으로 병원에 오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얼굴과 여러 곳에 붕대를 감고 실려 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다가가서 항상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기 정말 잘 오셨습니다. 한번 믿고 따라가 보십시오. 저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신에 찬 말을 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래전 제가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집에서 일어난 화재로 화상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도 얼굴과 손, 발에까지 화상을 입었습니다. 꼭 저의 모습과 거의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에게 제가 갔던 병원을 꼭 가 보라고 열심히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께서 제가 권유한 곳으로 가지 않고 큰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정도 치료를 받고 돌아왔는데, 그의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었고 다른 여러 곳이 흉악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성형을 받아야 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가 갔던 곳을 갔더라면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인생에 좋은 소식을 전해 주신 분들 중의 한 분은 그 병원을 소개해 주신 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의 소개가 아니었으면, 아마 저의 얼굴과 손도 울퉁불퉁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미련해 보이지만, 전도와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소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떤 소식을 쉽사리 믿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아직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일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을 한 차원 낮은 단계의 태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성이나 과학으로 증명된 것들, 설명이 가능한 것들만 확실한 것이고,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미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삶 속에는 때로 어떤 사람이나 사실에 대한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과 이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상황에 따라 달리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의 중요한 무기와 같습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두 가지 선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믿음이 적용되는 곳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매우 위급한 경우가 있습니다. 한번 상상해 봅시다. 잠을 자고 있는데 한밤중에 누군가 문을 막 두드립니다.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옆집 사람인데 윗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대피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불이 날 가능성이 몇 퍼센트일지 생각하시겠습니까? 전기 누전 때문인지, 보일러 때문인지 원인 분석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필요 없을 것입니다. 듣는 즉시 믿고 바로 대피해야 할 것입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대피하라는 말을 농담처럼 여긴다면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겠죠. ‘믿음’은 지금도 활용되는 중요한 무기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이 천사들로부터 전해 듣고서 가족들에게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것이니 피해야 한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위들이 그것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고 피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한 번은 인터넷에서 일본에서 쓰나미가 왔을 때의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재난의 모습이 먼 곳에서 찍힌 영상이었습니다. 사이렌이 울리며 대피하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뛰어가는 반대 방향을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듯이 두리번거렸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순간적으로 넘쳐 오는 물살에 휩쓸려서 그 뒤로는 화면에 그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을까요? 사람들이 뛰라고 하면 곧바로 뛰어가야 했었습니다.

‘믿음’ 그리고 ‘믿고 행동하는 것’은 이렇듯 다양한 곳에서 사용됩니다. 믿고 행동해야 하는 차원이나 상황이 존재합니다. 그때에는 반드시 믿음으로 반응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또 하나의 어떤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떤 한계에 부딪혔을 때입니다. 더 이상 인간이 어떤 것으로도 무엇인가 할 수 없는 순간에 도달했을 때가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건강을 책임질 수 없을 때, 의학이 나의 건강을 해결해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이성과 통찰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뿐입니다. 또한 삶에서 인생의 허무와 허망함을 느낄 때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믿음입니다. 고린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0~21)

 

바울 사도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삶의 성찰이나 지극한 연구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유한한 생명은 스스로 영원한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소식,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는 소식은 오직 믿는 사람에게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일을 다 완성하신 다음에,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두시고 우리에게 안내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그 혜택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롬 10:13~15a)

 

길을 안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롬 10:15b)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앞의 이야기처럼 좋은 병원을 소개해 주는 것, 화재 난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런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 운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을 알 수 있다면 그 소식처럼 좋은 소식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복음의 좋은 소식의 내용은 어떠한 것입니까? 복음은 부활절 아침 천사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5~6)

 

천사들이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또 한 가지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그가 말씀하셨던 그대로’ 부활하셨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합니다. 더하여 한 가지, 예수님께서 자신이 살아나시겠다고 말씀하셨던 그대로 살아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증언이 우리에게 복음이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참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해결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는 선포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들고 나간 사람들이 초대교회를 탄생시켰고, 이 부활의 증인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함으로 온 세상에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이 소식은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이 되었고,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어느 지혜도 죽음을 정복하였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요 11:25~26). 그러므로 이 말씀이 복음이며, 이 말씀이 좋은 소식입니다.

예수님 안에 답이 있음을 믿고, 그 말씀 안에서 답을 찾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남기신 말씀들이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용서하여라, 서로 화해하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하나님을 믿어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명료합니다. 그 안에 답이 있고,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마치 병원을 믿고 나를 맡기듯이 예수께 나를 믿고 맡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 복음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복음을 듣고 따른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하니까요. “주님, 누가 우리한테 들은 것을 믿었습니까?” …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이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 땅으로 퍼져 나갔네, 그들의 소리가, 세상 끝으로 그들의 말이.” (롬 10:16~18, 새한글성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은 온 세상으로 번져갔습니다. 시대를 넘어서 온 땅으로 그 증언이 번져 나갔습니다. 듣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말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그 말씀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이 소망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풀어낼 능력도 없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마지막은 어떠할까요?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은 과연 어디입니까? 주님께서 죽음 이후의 길을 알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여 여전히 불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로가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미로에 갇혀서 우왕좌왕합니다. 어떻게 하면 미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나섭니다. 내가 이 길을 너무나도 잘 아니, 나를 따라오면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저 자리에 앉아 미로를 연구하고, 내가 확신한 방향으로만 길을 찾아보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길을 잘 안다는 사람을 따라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문제는 안내하는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만약에 믿을 만한 사람이라면,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 더욱 지혜로울 것입니다.

 

<어둠의 땅에서 오직 예수의 소식을 붙잡는 것만이 소망과 생명의 역사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자리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복음에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답을 찾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부터 시작된 복음은 이미 수천 년을 이어 내려오며 신앙을 낳았고, 구원을 낳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품고 소유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을 믿음으로 고백하였고, 그 안에서 평안을 찾았습니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을 넘고, 그리스와 로마를 넘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를 넘어 조용한 나라 조선, 한반도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40년 전 제물포에 도착했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입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회 목사였고, 아펜젤러는 감리교회 목사였습니다. 그분들이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어느 날 밟았을까요? 바로 1885년 4월의 부활절 아침에 그들은 한국 땅을 밟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을 들고 어둠의 땅에 내려왔습니다.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민족을 향하여, 나라를 잃을 상황 속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한국의 백성들을 향하여 다가왔습니다. 어둠과 가난, 피폐함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부활의 소식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처럼 그들의 발걸음은 진정 아름다웠습니다. 나라를 잃고 절망으로 가득한 이 땅에 희망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말씀을 통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알려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으로 나라가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40년이 지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든지 부러워하는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 한반도에서는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일어난 적이 없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지 140년이 되는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물론, 이 소망은 이 땅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리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용서의 마음으로, 희생의 마음으로 살아가기에 이 땅이 번영을 누리고, 다시 또 하늘의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은 또한 장애인 주일입니다. 장애인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그들을 돕기 위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 날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 장애인이 몇 명 있을 것 같습니까? 조사된 통계를 보면 263만 1천 명의 장애인이 있다고 합니다. 263만 명의 사람들이 장애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형평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장애인들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단 한 번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는데,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점과 같은 짧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날에는 역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날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회복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서도 감사를 누리며 견뎌 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척박할 수 있습니다. 가난으로 가득 채워질 수도 있습니다. 짧은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힘든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억울할 수도 있고,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복음을 붙잡으며, 영생을 붙잡고 있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께서 다시 사신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고, 나의 영혼을 살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25년 4월 27일 주일 구역(가정) 예배자료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이여!” (롬10:13~15)

(1)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2) 찬송가 171장, 503장을 부릅니다. 

(3)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4) 본문을 읽고 나눕니다. 

(5)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6) 마무리기도와 주기도로 마칩니다.

<생각하기>

  1. 좋은 병원이나 의사선생님을 알고 계신가요? 치료받았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봅니다.

<설교의 요약>

  병원을 찾을 때, 먼저 치료받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병원을 소개받으면 그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 말을 신뢰하고 결단하여 병원을 찾아간 사람은 나음을 얻습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불이 났다고 합니다. 그 때는 우선 그 말을 믿고 대피해야 합니다. 지혜 혹은 이성이 작동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즉각적인 믿음과 결단이 생명을 구합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이 자신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전1:20~21) 하였습니다. 지혜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선포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누군가가 전해준 좋은 소식을 듣고,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부활절 아침, 천사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5~6)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로부터 복음이 전파됩니다.(고전15:3~8) 부활의 증언이 복음이 된 것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의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장애인 주일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부활 소식은 복음입니다. 죽음의 문제, 삶의 어떠한 문제라 할지라도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140년 전 제물포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진정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받아든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온 선교사님들을 기억하면서, 우리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사52:7)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누기>

  1. 전도를 받거나, 전도를 했던 경험을 나누어 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과 구원의 경험을 나누어 봅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죽어가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심어 주시고, 이 땅을 생명의 땅으로 바꾸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복음을 들고 들어와 희생한 수많은 선교사님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선물로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신 하나님, 우리도 또한 구원하는 일에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는 우리의 오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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