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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나타내 보이시다

고린도전서 15: 3~8

김경진 목사

2023.04.30

<성경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지신 부활의 주님을 증언합니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도 만나 주셨고요.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제자들도 만나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3~8)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ὤφθη(ōphthē)’, “보이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설교에서 제가 종종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풍성한 신학적 관점이 이 안에 숨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ὁράω(horaó)’ 즉 “보다”라는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Verb-Aorist Indicative Passive, 3rd Person Singular)입니다.

헬라어 표현법이 조금 복잡하긴 한데요. 단순한 과거로 해석해서 ‘나타나셨다’(he appered)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부정과거 수동태로는 ‘나타내 보이셨다’(he made himself seen)라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의미를 살리고자 개역개정 번역도 “보이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ὤφθη’(ōphthē)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5절에서 “게바에게 보이시고(ὤφθη, ōphthē)”할 때 사용되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ὤφθη, ōphthē)”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ὤφθη, ōphthē)”라는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는 구절에도 ‘ὤφθη’(ōphthē)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이 적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나타나셨다’라고 표현한다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나타내 보여지셨다’는 표현으로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와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들이 함께 전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빈 무덤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울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이야기하자 예수님이 그녀를 향하여 “마리아야”,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고, “랍오니”(선생님) 하고 다가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모습은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 보다 더 흥미롭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13~17)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옆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실 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죠.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0~31)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부활 사건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민에게 나타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에 창이 난 흔적을 보여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오직 눈을 열어 주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활을 주장하는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일까요? 부활에 대한 제자들 나름의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벳새다 맹인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특별함을 이야기해 줍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읽어 가는 마가복음은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배열하여 영적인 교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 말씀을 함께 읽어 가시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보지 못한 맹인이 고침받는 장면이 두 곳에 소개되는데 그 흐름이 매우 의미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주님이 세례 요한이 잡힌 후부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을 선포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시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 보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1장에는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기적이, 2장에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됩니다. 3장에는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나타나고요. 4장에는 여러 가지 비유로 능력의 가르침을 주시며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5장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됩니다. 6장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후에 바다 위를 걸으시는 능력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지셨습니다. 7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고,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8장에는 오천 명에 이어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후에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벳새다의 맹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1~8장, 8장 이후부터 16장까지를 나누는 매우 중요한 변곡점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1~8장까지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8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 오르시며 수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지점에 맹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맹인을 고치신 사건은 특이합니다. 그동안 주님은 단번에 병자를 고쳐 주시거나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을 향하여서는 두 번에 걸쳐서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우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바르시며 안수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8:24). 아직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를 다시 안수하여 주시자 밝히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언합니다. 흐릿한 모든 것이 이제는 확실하게 보여지는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내용이 왜 이곳에 있을까요? 마가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먼저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모습입니다. 눈이 열리는 첫 번째 단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능력의 주님을 보여 주시죠. 여기까지가 우리의 첫 번째 눈 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과 더불어 예수님의 이야기는 수난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의 세상의 영웅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책망하시며 수난받으실 삶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도, 제자들도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첫 번째 눈 뜸에 머무르려고 하는 제자들이지만 맹인을 두 번 고쳐 주셨듯이 그들로 예수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진정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은 첫 번째 단계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놀라운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를 먹여 주시는 분이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능력의 주님이시지.’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주님을 만나는 일이 놀라운 경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병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신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진정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맹인이 두 번째 단계를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특별함의 비밀은 말씀을 듣고,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열려집니다.>

 

이러한 마가복음의 흐름을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한다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을 본 사람은 많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 먹은 자와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본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고, 종교 지도자도 있었고, 바리새인도 있었고, 서기관도 있었고,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까지만 보았습니다. 더 이상 그들의 눈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실패한 자요, 미완의 혁명가요, 힘과 정치적 싸움에서 도태된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맹인을 다시 안수하셨을 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듯이 주님이 눈을 열어 주신 사람은 그 이후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프세’(ὤφθη, ōphthē)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일은 이천여 년 전의 사건에 국한된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은 어떻게 열리게 되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오프세’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본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오프세’ 곧 ‘보이시고’의 경험은 식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내용이 그렇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죠.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눅 24:30~31)

 

이후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오프세(ὤφθη, ōphthē)’하셨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하십니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 24:41~43 중)

 

요한복음 21장도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만나 주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3~14)

 

그렇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 보여지는 자리가 식탁과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가면 베드로에게 떡을 주시고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신 자리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 큰 바위가 있는데요. 그곳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시고 식탁을 베풀어 주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위에는 팻말도 하나 있습니다. ‘멘사 크리스티’, ‘주님의 식탁’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찬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찬을 받을 때, 그곳에 부활하신 주님이 드러나 보여지십니다. 늘 그저 먹고 마시는 것 같지만 그 자리에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임재하시고,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성찬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게 된 후에 고백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엠마오 제자들의 경험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평범한 말씀처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도 같고, 와닿지 않은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씀 속에서 그리고 성찬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위력이고, 말씀의 능력이고, 우리가 말씀을 늘 사모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원할 때,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리고 성찬 속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눈이 열려지고, 성찬의 자리를 통하여 우리 눈이 열려져서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아, 기쁘다!’ ‘부활하심이 확인되었구나!’ 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입니까? 마가복음을 통하여, 특히 8장의 벳새다 맹인 이후 10장에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2)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은 벳새다 맹인의 시력이 밝히 보이는 데까지 이른 상태를 말씀하지만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에 관해서는 그가 예수님을 보게 된 후에 길에서 따르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여리고에서 주님을 만나 수난의 길, 부활의 길을 함께 따라갔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실망하던 길에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향해 다시 나아갑니다. 게바가 그랬고, 다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양을 먹이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당하기도 하고, 칼에 순교당하기도 합니다. 수없는 고난과 죽음을 당했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이 게바에게, 야고보에게,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 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씀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절기에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서 말씀 가운데서, 성찬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보게 해 주십시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수난과 부활의 길을 함께 걷게 해 주십시오. 그러하기 위하여 주님,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옵소서.

The Lord Makes Himself Seen

 

Luke 17:1-4

 

Today is the third Sunday after Easter. The Bible tells us that Jesus appeared to many people after being raised from the dead. He appeared to Mary Magdalene, many other women, Peter, other disciples, Thomas, and the disciples who were on the road to Emmaus.

 

In today’s passage this is how Saint Paul describes those to whom Jesus appeared:

 

“For what I received I passed on to you as of first importance: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that he was buried, 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and that he appeared to Cephas, and then to the Twelve. After that, he appeared to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nd sisters at the same time, most of whom are still living, though some have fallen asleep. Then he appeared to James, then to all the apostles, and last of all he appeared to me also, as to one abnormally born.” (1 Cor 15:3-8)

 

An interesting word in this passage is“ὤφθη (ōphthē),” which is translated “appeared” in the NIV. “ὤφθη (ōphthē)” is the aorist indicative passiveinthe third person singular of“ὁράω (horaó),” the Greek verb which means “to see.”

 

Greek expressions are complex. So while it is possible to translate “ὤφθη (ōphthē)” as “he appeared to” in English using the simple past tense, a more precise translation of thisaorist indicative passive verb would be “he made himself seen.”This is why the Korean Revised Version translates it “bo-i-syeot-da,” which means “he showed himself,” in an effort tomore vividly capture the meaning of the original Greek verb.

 

The expression“ὤφθη (ōphthē)” appears four times in today’s short passage:

 

  • Verse 5: “he appeared to(ὤφθη (ōphthē)) Cephas.”
  • Verse 6: “After that, he appeared to (ὤφθη (ōphthē)) more than five hundred of the brothers and sisters at the same time,”
  • Verse 7: “Then he appeared to (ὤφθη (ōphthē)) James,”
  • Verse 8: “and last of all he appeared to (ὤφθη (ōphthē)) me also, as to one abnormally born.”

 

In the Bible we see instances where people fail to recognize Jesusimmediately when He first appears to them in His resurrected form. Mary Magdalene did not recognize the Lord when He appeared to her outside the tomb. The Bible says that she mistook Him for the gardener when He asked her why she was crying and whom she was looking for. Finally when Jesus called her “Mary,” she recognized Him and saw the risen Lord. Then she called out to Jesus, “Rabboni!” which means “Teacher.”

 

Another passage in the Bible that describes such an encounter between the resurrected Jesus and the disciples in a more fascinating and precise manner is the one about Cleopas and another disciple meetingJesus on the road to Emmaus:

 

“Now that same day two of them were going to a village called Emmaus, about seven miles from Jerusalem. They were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As they talked and discussed these things with each other, Jesus himself came up and walked along with them; but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together as you walk along?’ They stood still, their faces downcast.” (Luke 24:13-17)

 

It says in the above passage,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 But later when Jesus was eating at the table with them,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it was their risen Lord:

 

“When he was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bread, gave thanks, broke it and began to give it to them.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he disappeared from their sight.”(Luke 24:30-31)

 

This tells us that Jesus’ resurrection was seen not by everyone but only by those whose eyes were opened by the Lord. Jesus showed His resurrection to special people. This is how the Bible describes the resurrection.

Jesus’ resurrection was not revealed to everyone. Our risen Lord was seen only by those whose eyes were opened by Him.

 

What does this mean? Should we understand this as a mere justification of a certain minority, including the disciples, claiming that Jesus came back from the dead?

 

The Gospel of Mark, which we are reading these days in our early morning prayer services, imparts a great spiritual lesson to usby placing the story of receiving sight intentionally. Mark inserts the stories of blind men receiving their sight in two places of his book, which is significant in terms of its flow.

 

The Book of Mark begins with the public ministry of Jesus. Jesus, baptized by John the Baptist, starts His public ministry after John’s arrest: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has come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Mark 1:15)

 

After proclaiming these words, Jesus calls the disciples. Peter, his brother Andrew, and James and John, the sons of Zebedee, were among the first to be called. Then Jesus performs many signs and miracles.

 

Chapter 1: Jesus heals lepers.

Chapter 2:Jesus heals the paralyzed.

Chapter 3: Jesus heals a man with a shriveled hand.

Chapter 4: Jesus teaches with authority through parables and calms the sea.

Chapter 5: Jesus heals the demon-possessed, raises Jairus’ daughter from the dead, and heals a woman with a flow of blood for 12 years.

Chapter 6: Jesus feeds the five thousand and walks on the sea.

Chapter 7: Jesus casts out evil spirits from the Syrophoenician woman’s daughter and heals a deaf and mute man.

Chapter 8: Jesus feeds another four thousand and heals a blind man in Bethsaida.

 

Jesus’ first healing ofa blind man appears in this flow of events. But the way in which He heals him in this scene is different from others.

 

He heals the man in two phases. First, Jesus takes him outside the village, puts saliva on his eyes, places His hands on him, and asks him what he sees. The man replies, “I see people; they look like trees walking around.”(Mark 8:24)Then Jesus lays His hands on him once more. The Bible states that after this, his sight was restored and he saw everything clearly.

 

This scene describes a special healing where Jesus opens the eyes of a blind man in two stages.

 

Why is such a story recorded in this location? The Word of God delivered by Mark can be divided into two parts. The first part has to do with the preliminary aspect of Jesus, that is, Jesus of power and victory. After choosing the disciples, Jesus displays power and victory by healing the sick, raising the dead, calming the sea, and casting out evil spirits. But from John 8, where Jesus heals a blind man in two stages, the story of Jesus changes into one of suffering.

 

In other words, Jesus’ side of healing the sick and casting out demons does not represent the whole of Jesus. The former represents only a blurry picture of our Lord—just like the first unclear vision of the blind man before his eyes were fully opened.

 

But just as he was able to see clearly after Jesus laid hands on him again, our Lord will show Himself clearly to us though the cross, His Passion, and His resurrection. This is the message of Mark that is given to us through the healing of the blind man.

 

Therefore, from Mark 8 and onwards, Jesus speaks about His suffering, walks that path of suffering, and reveals the glory of His resurrection.

 

If we consider Jesus’ resurrection in terms of this flow,we may understand its meaning as follows.

 

Many people saw the amazing things Jesus did in this world. They saw Him heal the sick, cast out demons, raise the dead, and heal the mute, the blind, and the deaf. Many people saw these miraculous ministries of the Lord.

 

In fact, many Jews, including the religious leaders, the Pharisees, the teachers of the law, and the elders, saw what Jesus did. The five thousand and the four thousand saw how He fed them with miracles.

 

However, there were those who saw only that much. Such people only saw what happened up toJesus’ death on the cross. Their eyes were not opened further. So to them Jesus was only a failure, a failed revolutionist. He was only a victim who fell behind in the power struggle of politics.

 

But just as the blind man could see clearly after Jesus laid hands on him once more, those whose eyes Jesus opened could see what came after all this. Jesus allowed them to see His risen Self by opening their eyes.

 

This is the very meaning of“ὤφθη (ōphthē)”: “He made Himself seen.”

 

We can see the risen Lord when He opens our eyes.

 

Then isn’t such a thing confined to the resurrection that happened 2000 years ago? Of course, the Bible tells us about the special people that Jesus showed Himself to after He was resurrected. Then how can we meet the risen Lord? In other words, how can our eyes be opened?

 

In knowing Jesus, our understanding of Him is sometimes like the first opening of the blind man’s eyes. Sometimes, we know Jesus only as our Lord who heals my sicknesses, fills my needs, feeds me, helps me survive, and aids me in my life’s journey.

 

But if our knowledge of Him remains only at this level, we do not know Jesus wholly. We come to know the real Jesus when our eyes are opened and when we meet the resurrected Lord who died for us and rose again. We become true Christians when we can sing of this joy of resurrection.

 

Then how can our eyes be opened and have an encounter with the risen Lord? Interestingly, the hope of our eyes being opened is found in the story where the expression“ὤφθη (ōphthē),” “appeared to”, appears.

 

First, the Bible tells us that the experience of “ὤφθη (ōphthē),” that is, Jesus making Himself seen to us, has to do with eating at the table.

 

To begin with, Luke 24 talks about this. Jesus ate with the disciples who were on the road to Emmaus. The Bible says that their eyes were opened when Jesus was at the table with them:

 

“When he was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bread, gave thanks, broke it and began to give it to them.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 (Luke 24:30-31)

 

Other following incidents follow the same pattern. Jesus shows Himself to Peter. Then He shows Himself to (ὤφθη (ōphthē)) the other disciples. Then what does He do?

 

“[…] he asked them, ‘Do you have anything here to eat?’ They gave him a piece of broiled fish, and he took it and ate it in their presence.”(Luke 24:41-43)

 

A similar thing happens in John too. Jesus appears to Peter and the disciples at Lake Tiberius. In this scene, however, we see that He has a meal prepared for them. Then they see the risen Lord.

 

“Jesus came, took the bread and gave it to them, and did the same with the fish. This was now the third time Jesus appeared to his disciples after he was raised from the dead.” (John 21:13-14)

 

That is right. This is the reason we have communion. Even today, our Lord prepares a table for us and feeds us. And at that table He opens our eyes. At that place, our risen Lord makes Himself seen to us.

 

Second, our risen Lord opens our eyes through His Word. Wasn’t this the confession of the disciples after they saw Jesus on their way to Emmaus?

 

“They asked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Luke 24:32)

 

The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felt their hearts begin to burn as they heard Jesus explain the Scriptures to them. Then at the table their eyes were opened. Their hearts were opened as they heard the Word; and their eyes were opened as they ate at the table.

 

Today, we, too, hear and preach the Word. However, my preaching to you in this moment is not just a delivery of human words by a mere human, but God’s special time during which He works through His Word and through the speaker who delivers it. Therefore, we can hear the voice of the Lord and see the risen Lord in this time and place too.

 

Through the Word our eyes are opened, and we see Him; the risen Lord makes Himself seen to us. Through communion our eyes are opened and the risen Lord makes Himself seen to us.

 

This is the reason we desire the Word and come to the place of communion every Sunday. I hope that your eyes will be opened and the risen Lord will make Himself seen to you through the Word today as well.

 

Then what happens when we see the risen Lord? What must we do when the risen Lord makes Himself seen to us?

 

This is what our Lord teaches us through the Gospel of Mark.

 

Jesus heals the blind man in Bethsaida in two stages—to make him see more clearly. But in Mark 10 Jesus again heals the blind Bartimaeus right before He suffers. In this healing, an important expression—albeit mentioned only briefly—is newly introduced:

 

“Immediately he received his sight and followed Jesus along the road.”(Mark 10:52)

 

The Bible states that after Bartimaeus received his sight, he followed Jesus.

 

Then how must we interpret today’s passage? Jesus showed Himself to Peter, the Twelve, five hundred brothers and sisters, James, and Paul.

 

What is the meaning of the risen Lord making Himself seen to the people? Why did He open their eyes and make them see? It was to make them follow His path. Peter, James, Paul, and countless other saints went that very path.

 

If the level of seeing in Mark 8 is just to discern objects and if the next level is to clearly see Jesus who went the path of suffering and resurrection, the level of seeing in Mark 10 is to see and follow Jesus.

 

Therefore, beloved brothers and sisters, let us pray this prayer in this Easter season: Lord, open our eyes that we may see You, our risen Lord, inthe Word and in communion. As we see You, may we follow Your path of suffering and resurrection. Lord, send us the Holy Spirit so we may do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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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 3~8

3~8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성경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지신 부활의 주님을 증언합니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이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주셨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도 만나 주셨고요.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제자들도 만나 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3~8)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ὤφθη(ōphthē)’, “보이시고”라는 단어입니다. 설교에서 제가 종종 강조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풍성한 신학적 관점이 이 안에 숨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ὁράω(horaó)’ 즉 “보다”라는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 3인칭 단수(Verb-Aorist Indicative Passive, 3rd Person Singular)입니다.

헬라어 표현법이 조금 복잡하긴 한데요. 단순한 과거로 해석해서 ‘나타나셨다’(he appered)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부정과거 수동태로는 ‘나타내 보이셨다’(he made himself seen)라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의미를 살리고자 개역개정 번역도 “보이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ὤφθη’(ōphthē)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5절에서 “게바에게 보이시고(ὤφθη, ōphthē)”할 때 사용되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ὤφθη, ōphthē)”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7절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ὤφθη, ōphthē)”라는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라는 구절에도 ‘ὤφθη’(ōphthē)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말씀이 적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나타나셨다’라고 표현한다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나타내 보여지셨다’는 표현으로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합니다. 그와 동시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들이 함께 전해집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빈 무덤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울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착각합니다. 그래서 시신이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이야기하자 예수님이 그녀를 향하여 “마리아야”,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때 그녀의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고, “랍오니”(선생님) 하고 다가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모습은 엠마오로 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 보다 더 흥미롭고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눅 24:13~17)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옆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실 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죠.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눅 24:30~31)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들에게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부활 사건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민에게 나타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이는 곳에 나타나셔서 못 자국을 보여 주시고, 옆구리에 창이 난 흔적을 보여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랬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믿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오직 눈을 열어 주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부활을 주장하는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일까요? 부활에 대한 제자들 나름의 변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벳새다 맹인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특별함을 이야기해 줍니다.>

 

새벽기도회 시간에 읽어 가는 마가복음은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배열하여 영적인 교훈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마 말씀을 함께 읽어 가시는 분들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보지 못한 맹인이 고침받는 장면이 두 곳에 소개되는데 그 흐름이 매우 의미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로 시작합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주님이 세례 요한이 잡힌 후부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죠.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말씀을 선포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먼저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시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계속해서 알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적과 표적을 보여 주시며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히 보여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1장에는 나병환자를 깨끗케 하신 기적이, 2장에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됩니다. 3장에는 손 마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나타나고요. 4장에는 여러 가지 비유로 능력의 가르침을 주시며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5장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기록됩니다. 6장에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후에 바다 위를 걸으시는 능력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지셨습니다. 7장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셨고, 귀 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8장에는 오천 명에 이어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후에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에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벳새다의 맹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1~8장, 8장 이후부터 16장까지를 나누는 매우 중요한 변곡점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1~8장까지는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8장 이후부터는 예루살렘에 오르시며 수난당하시고,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는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지는 중요한 지점에 맹인을 고쳐 주신 사건이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맹인을 고치신 사건은 특이합니다. 그동안 주님은 단번에 병자를 고쳐 주시거나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 맹인을 향하여서는 두 번에 걸쳐서 치유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우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눈에 침을 바르시며 안수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그때 그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8:24). 아직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그를 다시 안수하여 주시자 밝히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증언합니다. 흐릿한 모든 것이 이제는 확실하게 보여지는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내용이 왜 이곳에 있을까요? 마가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먼저는 제자들을 선택하신 모습입니다. 눈이 열리는 첫 번째 단계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장면에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바다 위를 걸어가시는 능력의 주님을 보여 주시죠. 여기까지가 우리의 첫 번째 눈 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을 고쳐 주시는 사건과 더불어 예수님의 이야기는 수난사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탄생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의 세상의 영웅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책망하시며 수난받으실 삶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도, 제자들도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야 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첫 번째 눈 뜸에 머무르려고 하는 제자들이지만 맹인을 두 번 고쳐 주셨듯이 그들로 예수님을 바로 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 속에서 진정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바라는 예수님의 모습은 첫 번째 단계에 머무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놀라운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를 먹여 주시는 분이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천 명을 먹이시고 사천 명을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려 내시는 능력의 주님이시지.’라는 생각으로 주님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런 주님을 만나는 일이 놀라운 경험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병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신 모습 속에서 예수님이 진정 드러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맹인이 두 번째 단계를 통하여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특별함의 비밀은 말씀을 듣고,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며 주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열려집니다.>

 

이러한 마가복음의 흐름을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한다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을 본 사람은 많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 먹은 자와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본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도 있었고, 종교 지도자도 있었고, 바리새인도 있었고, 서기관도 있었고, 장로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후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까지만 보았습니다. 더 이상 그들의 눈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실패한 자요, 미완의 혁명가요, 힘과 정치적 싸움에서 도태된 희생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맹인을 다시 안수하셨을 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듯이 주님이 눈을 열어 주신 사람은 그 이후를 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프세’(ὤφθη, ōphthē)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눈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이 일은 이천여 년 전의 사건에 국한된 것일까요?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은 어떻게 열리게 되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오프세’라는 단어가 사용된 성경의 본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오프세’ 곧 ‘보이시고’의 경험은 식탁과 관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내용이 그렇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에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죠. 그때 그들의 눈이 열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눅 24:30~31)

 

이후의 내용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보이시고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오프세(ὤφθη, ōphthē)’하셨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하십니까?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눅 24:41~43 중)

 

요한복음 21장도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차려놓고 만나 주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때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3~14)

 

그렇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 보여지는 자리가 식탁과 함께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가면 베드로에게 떡을 주시고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신 자리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 큰 바위가 있는데요. 그곳에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시고 식탁을 베풀어 주셨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위에는 팻말도 하나 있습니다. ‘멘사 크리스티’, ‘주님의 식탁’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성찬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찬을 받을 때, 그곳에 부활하신 주님이 드러나 보여지십니다. 늘 그저 먹고 마시는 것 같지만 그 자리에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이 임재하시고,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래서 성찬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게 된 후에 고백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32)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엠마오 제자들의 경험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평범한 말씀처럼 지나가기도 합니다.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도 같고, 와닿지 않은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말씀 속에서 그리고 성찬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위력이고, 말씀의 능력이고, 우리가 말씀을 늘 사모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원할 때,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리고 성찬 속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눈이 열려지고, 성찬의 자리를 통하여 우리 눈이 열려져서 부활하신 주님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아, 기쁘다!’ ‘부활하심이 확인되었구나!’ 하면서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입니까? 마가복음을 통하여, 특히 8장의 벳새다 맹인 이후 10장에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 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막 10:52)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은 벳새다 맹인의 시력이 밝히 보이는 데까지 이른 상태를 말씀하지만 이후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에 관해서는 그가 예수님을 보게 된 후에 길에서 따르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여리고에서 주님을 만나 수난의 길, 부활의 길을 함께 따라갔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 형제에게 보이시고,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실망하던 길에서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향해 다시 나아갑니다. 게바가 그랬고, 다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양을 먹이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임당하기도 하고, 칼에 순교당하기도 합니다. 수없는 고난과 죽음을 당했지만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이 게바에게, 야고보에게, 제자들에게 보이셨다는 말씀 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씀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절기에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서 말씀 가운데서, 성찬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보게 해 주십시오. 그 주님을 바라보며 수난과 부활의 길을 함께 걷게 해 주십시오. 그러하기 위하여 주님,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어 주시옵소서.

2023년 4월 30일 주일 구역(가정예배자료 

“주께서 나타내 보이시다 (고전 15장 3~8)

 

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⑵ 찬송가 166장, 459장을 부릅니다.

⑶ 구역식구(가족) 중 한 분이 기도합니다. ⑷ 고전 15장 3~8절을 읽고 나눕니다.

⑸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합니다. ⑹ 마무리 기도와 주기도로 구역예배를 마칩니다.

〈인터넷 참조〉 http://www.somang.net으로 접속,  4월 30일자 주일예배 말씀

 

 

생각하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에게만 보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설교의 요약

 

우리가 새벽기도회 시간에 읽고 있는 마가복음은 “눈이 밝아져서 보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에서 벳새다의 맹인을 고치시는 이야기는 다른 곳과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번에 걸쳐서 맹인을 고쳐 주십니다. 첫 번째 안수하셨을 때 맹인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안수해 주셨을 때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됩니다.

 

마가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두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보여주신 예수님의 일차적인 모습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귀신들을 쫒아내시는 능력과 승리입니다. 이것은 마치 맹인이 일차적으로 눈이 열려서 보는 것과 같은 흐릿한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안수하시고 보다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의 길, 부활의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유대인들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 즉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들도 이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눈이 열린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눈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실패한 자요, 힘의 싸움에 도태된 희생자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데 마치 맹인의 일차적인 눈뜸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알 때가 있습니다. 그것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식탁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 우리가 주님을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을 때, 그 때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게바도, 야고보도, 바울도, 그리고 수많은 주님의 성도들도 이 길을 따라 갔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길 말입니다.

 

 

나누기

 

  1.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 갈 때 부분적으로 알게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난 예수님의 모습 가운데 부분적으로 알았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말씀하시는 “점점 더 명확해지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 있을까요?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마무리 기도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어 말씀 가운데 그리고 성찬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바로 보게 하여 주옵소서. 그 주님을 바라보며 수난과 부활의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그러하기 위하여 주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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